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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차갑고 깊은 물. 구병모의 소설은 차고 깊은 물 같다. 차가운 물에 들어갈 때는 준비운동을 해야하고, 가슴에 참방참방 물도 좀 묻혀둬야 하고, 그래도 들어가면 처음에는 차갑다. 정신이 확 든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쓰는 이 리뷰는 '마치 차갑고 깊은 물 같은 구병모 소설들에 대한 이야기.' 

받자마자 책을 읽었으니 책을 읽은지 3주가 지났는데도, 리뷰를 쓰기 위해 소설집의 목차를 다시 찬찬히 읽으니 각 이야기들이 웬만큼 다 생각났다. 많은 훌륭한 소설집을 읽어왔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아니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모든 소설집은 읽고 나서 3주가 지나도 제목만 보고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어야 훌륭하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다).  

그만큼 구병모 소설은 이야기 자체가 또렷하고 또 강렬하다. 발상부터가 기발하다. 이야기들의 성격은, 부산, 전주, 제천, 부천 등 우리나라에 수많은 영화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꼭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같다'고 하면 맞을 것 같다. 때로는 신선하고, 기이하고, 괴기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한 번도 유쾌하지는 않았다. 한 젋은 소설가가 써낸 소설집 전체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는 것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정말 이거 하나는 확신을 갖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유쾌하지 않다. 끔찍이도 싫어하는 벌레를 일단 두꺼운 책을 던져 잡아놓고는 차마 책 밑의 시신을 확인하지는 않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웬만하면 덮어두고 싶어하는 얘기들만 끄집어내서 그걸 아주 기발하고도 괴기스러운 상상력으로 더욱 더 또렷하게 만들어 눈앞에 들이미니까. 

명목상 경제적 효용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비유가 금지된 폐허를 찾은 남자의 이야기, 무슨 영문인지 눈 떠 본니 인도 한복판에 몸이 쳐박혀 있었다는 남자의 이야기, 훌륭한 교사로 살기 위한 노력이 한 순간의 실언(정말 실언일까)으로 끝나버린 여자 이야기,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자들을 새들이 쪼아서 조장(鳥葬)해주는 시대를 살며 알바사기(?)를 당한 여대생 이야기, 잠들지 않는 아이를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가 오븐에 넣어 조리하며 불면의 밤을 보내는 여자이야기, 눈물샘을 꿰메버린 고통을 느끼고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린 남자이야기, 그리고 성욕을 느끼면 몸속에 이식된 장치가 커다란 고철 괴물이 되어 몸밖을 뚫고 나오는 남자를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 

[고의는 아니지만] 속에는 이렇게 한 줄 정도로 요약만 해도 감당하기 버거운 이야기들이 잘 짜여지고 쓰여져 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이 책의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아름다운 표지가 얼마나 책 그 자체인지 알 수 있다. 모두가 공중에 붕 떠서 공중부양을 하고 있듯이 비현실적이고, 어쩌면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해주고 서로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머리 대신에 바나나나 치아, 장미, 포크, 하이힐, 캔 따위를 달고 있으니 공포스럽다.   

 

마치 ......같은 이야기 

가장 처음에 나오는 <마치 ......같은 이야기>를 읽고 나니 우습게도 누구 한 사람이 떠올랐다. 누구 한 사람이 떠오른 걸 '우습다'고 표현한 이유는 비유라는 것이 무언가를 더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긴 하지만 결코 직접적으로는 언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비유와 상황묘사들이 모여서 누구 한 사람(지금은 한 사람이지만 결국은 아주 여러 사람인)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 역설이기 때문이다. 

"이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실패작이야. 그냥 날생선을 우려낸 물도 이보단 낫겠어요." 

"생선이라니 그야말로 싱싱하지 않은 표현이로군요. 나로 말하자면 이건 병든 파충류의 분비물 같은 맛이에요." 

그러다가 일행 중 한 남자가 시인을 향해 손짓했다. 

"당신도 같은 걸 마시고 있으니 말해봐요. 이게 무슨 맛입니까?" p.13 

"왜 못합니까. 고작해야 비유일 뿐이잖아요." p.17
  

독재정권 하에서는 더욱 훌륭한 문학작품들이 많이 쏟아진다고 했다. 감시와 검열을 피해서 표현을 다듬고 말을 돌리고 주체를 숨기다보니 비유와 상징이 정교해지고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라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간단한 안주 하나를 먹으면서도 시를 쓴다.  

"만일 손님께서 그...... 제가 조잡한 표현을 사용하는 걸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제물로 바쳐진 처녀의 핏빛 같은 술을 한잔 달라고 하느니보다 레드와인을 달라고 하는 게 실물로서의 술을 얻어내는 데 효율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말하는 자와 그걸 듣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교양과 문화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고 일을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이지요." p.19  

비유가 금지된 표면 상의 이유는 쓰지 않는 편이 '경제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면의 이유는, 인간의 말이라는 것 자체가 비유가 없이는 생동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듣기 싫은 말을 듣지 않고자 함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고 또 알고 있는 두 가지 비유법을 금지하는 데 성공하자 나머지, 대상물 자체가 말의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환유니 제유 같은 것들은 힘들이지 않고 차례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만, 사실 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사라졌다기보다는 그것을 적재적소에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언어적 소양을 갖춘 경제 노동인구가 많지 않았을뿐더러, 수많은 말들 가운데 그것을 비유라고 뽑아낼 만한 예리한 식견을 갖춘 위정자도 흔치 않았기에 적발 사례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p.21 

그런데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그래봤자 위정자들은 이게 비유인지 아닌지 적발할 식견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통 '어쩌고저쩌고 하면 넌 사람도 아니야' 뭐 이런 표현을 실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데, 알고 보니 비유법을 금지한 그 사람은 정말로 '사람도 아니었다.' 어떤가, 유쾌하진 않지만 통쾌하지 않은가. 

타자의 탄생   

제목에 대해서부터 생각해보면, '타자'라는 것은 뭐 특별히 탄생한다기보다 그저 존재하는 것에 가까운데 작가가 '타자'가 '탄생'한다고 제목을 붙여놓은 걸 보면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타자의 탄생>을 읽고 생각해보니, 타자는 그냥 내가 아니면 다 타자인데, 그 수많은 타자 가운데도 적지 않은 숫자의 타자는 나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남'이라든가, '타자'라든가 하는 말을 붙이기엔 좀 미안해진다. 분명히 '나 자신'도 아니지만 '남'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이 허락지 않는 그런 관계 말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그런 관계에 있던 사람과 다시 멀어지거나, 그 사람을 밀어내야 할 때가 오고, 자의든 타의든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을 때 '타자'는 '탄생'하는 것이다. 

시작이 언제인지도 모르겠고 암튼 주인공 남자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는 길 한복판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린 시멘트 속에 정박한 상태였다. 처음에 사람들은 말을 걸고, 걱정하고, 도움의 손길을 준다. 완전한 타자였던 사람들과 조금씩, 순간이나마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처음의 관심과 관계맺기도 오래가지 못하고, 오히려 도시락을 갖다주던 아내와의 관계도 이 일을 계기로 좀 더 명확한 상태로(?) 정리가 된다.  

그리고 길 한 가운데, 시멘트 속에 정박한 남자는 깨달음을 얻는다. 

육체가 한 장소에 정박해 있으면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거나 비 그친 아스팔트 위의 지렁이처럼 포복 전진할 듯 말 듯 뒤틀린다. 어쩌면 시간은 자신의 몸이 움직이며 타인이나 사물과 부딪치는 데에서, 혹은 부는 바람을 적극적으로 온몸에 맞음으로써 비로소 생성되는 미미한 파장의 한 종류인지도 모른다. p.63  

정박한 것은 몸이지만, 몸이 정박하면 시간도 덩달아 꼼짝할 생각을 않고, 시간이 움직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진짜 타자는 물론이고 나 자신조차도 타자가 된다. 

고의는 아니지만 

야, 쟤네들 봐. 쟤들은 되게 예쁜 거 한다. 그 말에 원탁의 아이들은 우르르 일어나서 그들과 자신들 사이에 놓인 강의 폭과 깊이를 깨닫는데, 그건 곧 준비물을 가져온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의 미술 활동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목도하는 것이다. p.87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삶은 '그들과 자신들 사이에 놓인 강의 폭과 깊이를 깨닫'는 일인 것 같다. 처음에는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목도하'게 된다. 엄마 아빠가 바쁜 아이들은 그 일을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시작한다. 

다 아는 얘긴데, 어쩌면 나도 겪었던 얘긴데, 구병모의 담담하고 무신경한 서술은 그것을 좀 더 또렷하게 만든다. 그리고 구병모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런 아이들을 가르쳐야하는, 준비물을 가져오는 아이들과 매번 가져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해야 하는 교사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녀는 누구한테 휘둘러버릴 것만 같은 주먹을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 속으로 감추고 마지막 남은 관용을 바닥까지 긁어 설득 조로 말했다. p.101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차별하지 않고 모든 아이를 똑같이 대하려고 애쓰지만 교사도 인간인지라 하루에도 몇 번씩 '누구한테 휘둘러버릴 것만 같은 주먹을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 속으로 감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 두 번, 결국 그녀는 그렇게 감추어왔던, 대신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주먹을 한 순간, 한꺼번에 휘두르고 그것이 결국은 비극을 부른다. 

아, 이쯤 쓰고 나니 정말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런 말을 한 그녀를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차이가 점점 더 또렷해지는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이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를 때는 상황이 달라져있을까. 그렇지 않을 거라면 나는 어쨌든 아이의 준비물을 잘 챙겨줄 수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 더욱 더 치열하게 돈을 벌어야 할까.  

치열한 고민 끝에 단순한 결론 한 가지를 얻는다. 아이들 교육비와 심지어는 준비물들까지 다 유치원에서 준비해주면 어떨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 돈을 지원하면 어떨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나랏돈을 운용하는 작자들이 돈을 좀 합리적으로 잘 써주면 어떨까. 근데 그렇게 한다고 한들 아이들이 그 어떤 상처로부터도 보호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이 리뷰에서 도대체 몇 번의 질문을 하고 있나. 구병모의 소설이 이런 질문들을 만든다.

조장기 (鳥葬記) 

죽음의 냄새라니, p.123  

움직이지 않고 오랫동안 멈추어 있던 사람들에게 새의 무리가 날아와 그를 쪼아죽인다. 그들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자들이란다. 웃을 때 쓰는 근육보다 우울한 표정을 지을 때 쓰는 근육이 확실히 적다. 그러니까 움직임이 적다는 것은 어쩌면 '우울'이나 '좌절' 같은 말과 가깝다. 이런 점을 포착해내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구병모의 재능이다.

그리고 '우울'이나 '좌절' 같은 말과 가까운 한 여대생. 학비를 벌어야 하지만 못생긴 데다 특출난 재주도 없다. 그런 여자가 쉽게 구한 일자리는 뭔가 개운치가 않다. 그래서 그만두려고 하는데 그것마저도 쉽지가 않다. 좋은 일자리는 구하기가 어렵지만 힘든 일자리에서 벗어나기는 힘들고,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에 휘말리는 게 더 쉽다.  

자신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우울과 좌절과 죽음의 기운을 의식하며 두려워할 정도로 그녀는 다행히 아직 건강하지만, 곧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게 될까봐 무섭다. 뭔가를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실패하는 이 땅의 청년들이 가엽다.

어떤 자장가 

이번에는 자신의 논문 대신 남의 논문이나 레포트를 대필하며 잠자지 않는 아이를 키우는 여자의 이야기다. 아이는 자지 않고, 남편은 깨지 않고, 독촉 문자는 온다. 갖은 방법으로 아이를 재우려고 해봐도, 재우려고 할수록 자지 않으려고 하는 딸과 여자는 거의 사투를 벌인다.

자라면서 아이는 여자가 자신을 재운 뒤 다시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무언가를 한다는 걸 조금씩 눈치챘으며, 그 무언가가 마치 비밀스러운 제사나 의식이라도 되는 줄 알고 그 현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점점 더 오래 깨어 있기 시작했다. p.160  

이런 상황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구병모가 제시한 해답은, 아이를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오븐에 넣어 익히는 것이다. 잠을 거의 자지 못해서 곧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여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환상. 아니면 잠을 거의 자지 못하다보니 멍한 정신에서 자기도 모르게 불러낸, 진심이 섞인 자신의 무의식. 

얼마 전에 들은 정말 결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만든 지인의 말이 절로 떠오른다. "우리 아내는 말랐는데도 팔 힘 하나는 정말로 세. 나는 우리 애를 30분도 못 안고 있겠는데, 우리 아내는 3시간도 안고 있더라니까. 와우, 정말로 팔 힘이 세." 자기 아내가 자기 딸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지, 오븐에 넣고 굽는지도 모르는 채 자고 일어난 남편이 겨우, 그리고 버티다 못해 잠든 모녀를 보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이지, 최고다. 이렇게 시니컬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결말이라니.

재봉틀 여인 

"뭐 잘했다고 울어?"는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아주 보편적인 발화이다. 뭘 잘했다고 우는 게 아닌데, 뭘 잘했다고 우느냐 물으면 그게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난감하고, 그렇다고 나는 눈물을 딱 그치기도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는 애초부터 안 우는 게 최곤데, 애초부터 안 울 수만 있다면 안 울었겠지. 그러니까 "뭐 잘했다고 울어?"라는 말을 들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히려 눈물이 더 나는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 뭐든 꿰메준다는 재봉틀 여인을 만난다.

"손님, 무엇을 꿰메드릴까요?" p.184 

뭐든지 꿰메준다고 하면 과연 나는 뭘 꿰메달라고 했을까. 무서웠을텐데 겁도 없이 이 남자는 그 재봉틀 여인에게 뭔가를 꿰메달라고 했고 그 덕에 그는 더이상 울지 않게 됐다. 하지만 울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울지 않는다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그는 차에 부딪혀도 울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고, 사랑앞에서도 아주 시크한 사람이 됐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을까. 

곤충도감 

난감하다. 그러니까 구병모의 재주는 그냥 둬도 난감할 상황을 더 난감하게 이야기하는 것인 것 같다. 이걸 어째야하나, 이럴 경우 어떡해야 하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명확한 답을 낼 수 없는 질문만을 이야기 속에 교묘하게 섞어서 마구 던져대니까.  

오락실에서 1945 게임할 때가 생각난다. 처음에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쏴서 없애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들이닥치는 폭격에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은 내가 뻥! 하고 사라져버리던. 아마 구병모가 던지는 질문에도 한꺼번에 다 대답을 찾으려다 보면 결국은 뻥!

어떤 계기로 인해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지워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p.226 

범죄이기도 하고 범죄가 아니기도 하고, 잘못이기도 하고 꼭 잘못이라고 말 할 수 없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하고,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기도 하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아, 정말 어쩌라고! 하는 반항아적인 대사가 절로 나온다.  

성범죄자와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 그리고 사회의 시선을 바라보는 구병모의 시선은 언뜻 불분명해보이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듯이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가해자가 가해자가 된 것은 그 자신이지만,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어제 본 [리틀 칠드런]이라는 영화 속 소아성애자 로니와 그의 엄마가 떠오른다.

그렇다고 해서, 구병모의 질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상당히 동의한다고 해도, 재발율이 높은 성범죄자의 죄를 한 번의 실수로 생각하고 아무런 편견 없이 봐줄 수 있을까. 또 그건 자신이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모르겠다'는 답이 비겁하다는 걸 알지만, 정말 모르겠다. 

 

다시 책 표지 이야기를 하자면, 표지 속 일곱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한결같이 두 다리 곱게 모으고, 두 팔은 얌전히 차려 자세를 한 모습이다 (임산부만 가볍게 배를 받쳐들고 있다). 처음에는, 그리고 어릴 때는 다 다르게 시작하지만 결국 삶은 살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 보면, 다들 이렇게 누가 구령이라도 부른 것처럼 '차려'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굴욕적이고 무의식적인 차려 자세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건 뭘까. 역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수많은 방법 중 하나로 '이런 소설을 읽는 것'이 어쩌면 우리를 뭔가 좋은 답 근처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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