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바다 냄새 쪽빛문고 7
구도 나오코 지음, 초 신타 그림, 고향옥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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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이렇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알라딘 페이스북 관리자님이 올린 이 글을 본 겁니다. 파란색 표지와 길지 않은 이 글을 읽고 나니 가슴에 파란 바닷물이 차 출렁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슴에 바닷물이 출렁출렁, 파도가 찰싹찰싹, 하는 기분을 못 참고 책을 사서 읽어보니 그 찰싹, 소리는 "잠 못 이루는 돌고래가 밤 산책을 나"와 "바로 누우면서 꼬리로 물을 두드린 소리"였습니다(아아아아). 철썩, 철썩 소리가 무슨 소리였는지를 아는 기쁨은 직접 책을 읽을 분들에게 양보할게요.

 

이야기는 잠 못 이루던 돌고래가 밤바다를 산책하다가 커다란 검은 벽을 마주치는 데서 시작합니다. 고독한 걸 즐기지만 이런 날이면(이런 날이 어떤 날인지도 직접 확인하시기를 :) 친구와 맥주를 마시고 싶어하는 검은 벽입니다.

 

입매가 야무진 은빛 작은 돌고래와 눈빛이 다정한 새까만 커다란 고래의 우정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시작'이라는 말은 어쩌면 어색합니다. 우정이라는 것은 도처에 원래부터 존재하고 단지 이 친구와 저 친구가 언제 만나느냐만이 관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 신타라는 작가의 그림이 그려진 표지도 예쁘지만 표지를 벗겨봐도 참 예쁩니다. 표지를 벗기는 순간, 마치 고래와 돌고래가 산책을 하거나 맥주와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고 운동을 하거나 잠이 드는 바로 그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저 파란 표지를 넘기면 표지와 꼭같은 느낌의 이야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습니다. 고래와 돌고래의 이야기가 주축이지만 중간중간 시와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고래의 시도 적혀 있고 돌고래의 운동기구 리스트도 있고 돌고래와 고래가 쓴 편지들도 있고 돌고래가 뽑은 고래 작품 베스트 10도 있습니다.

 

돌고래는 너무 훌륭한 운동선수이고, 고래는 으아아아 정말 멋진 시인입니다. 고래가 쓴 시들을 읽으면서 혼자서 하하하하 웃기도 하고 코끝이 찡해져서 찔끔거리기도 합니다. 정말 아름다워서 '아아아아 너무 아름다워!'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어집니다. 실생활의 구어체 대화에서 '아름답다'는 말 보다는 '예쁘다'라는 말을 더 많이 쓰지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고래의 시를 감상하고 나면 또 고래와 돌고래의 대화를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아아아아 너무 아름다워!'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립니다.

 

책의 분량 때문에 고래가 쓴 소설은 전문을 읽어볼 수 없었지만 돌고래 선정 고래 작품 베스트 10에서 대략의 줄거리와 제목 정도는 엿볼 수 있습니다. 고래가 쓴 모험소설에 등장하는 악당이 너무 나쁘지가 않아서 돌고래가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 새로운 문학의 장르도 탄생합니다. 일명 '운동회소설'입니다.

 

 

혼자 깔깔깔깔 아하하하 웃습니다. 고래의 메모장에 '책갈피, 다시마 숲에서 따 올 것.'이라는 메모를 훔쳐볼 때나 태양에게 '불가사리는 못 됐어'하고 고자질하는 산호나 '나 오징어를 사랑하게 됐어'하고 고백하는 문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요.

 

처음엔 좋은 구절에 줄을 치며 읽고 너무 좋은 걸 나누고픈 마음에 페이스북에도 옮겨 적고 하다가 곧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줄긋지 말 걸, 안 그은 부분이 아쉽고 그렇다고 모든 구절에 다 줄을 긋자니 괜한 짓 같습니다. 모든 이야기, 모든 에피소드, 글자 하나하나를 다 마음에 담고 싶습니다.

 

입을 열면 그 안에 소중한 것들이 다 들어있는 고래처럼 이 책의 모든 글자와 그림과 행간의 비어있는 공간과 행간의 꽉 찬 공간까지 빠짐없이 담고 싶습니다. 엄마가 퍼준 밥처럼 꾹꾹 눌러서 다 담고 싶습니다.

 

 

책띠에는 돌고래가 고래에게 쓴 편지가 적혀 있습니다. 편집자님이 이 책의 수많은 문장들 중에 과연 어떤 걸 책띠에 옮겨적을까를 결정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저라면 머리를 쥐어뜯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면 각자의 친구를 떠올릴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마침 오랜 친구를 만나 책을 선물하고 집에 돌아와 책을 마저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또 까똑으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예전엔 까똑이나 문자를 많이 하게 되면서 전화로 목소리 듣는 일은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이게 좋기도 합니다. 우선 더 자주 이야기를 하게 되고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으니까 다시 보고 싶을 때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고래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돌고래는 기분이 좋아지고, 고래는 돌고래 머리를 씀다듬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음에 남은 바닷물의 일렁임을 더 써 봐도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저는 이만하고 친구 만나러 나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직 나가보지 않았지만 밖은 날씨가 좋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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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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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하게, 읽었던 모든 책에 대한 감상문을 적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위 리뷰라는 걸 쓰기 시작한 지는 나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 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원래는 모든 감상문들을 반말(?)로 쓰다가, 얼마 전부터 이렇게 존댓말(?)로 영화를 본 후의 감상을 적어봤는데 그게 굉장히 마음이 편한 겁니다. 반말로 쓰다 보면 왠지 제가 되게 잘난체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스스로도 약간 거북할 때가 있었는데, 존댓말로 써보니까 반대의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겸손해지는 기분이랄까,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내가 느낀 건 느낀 대로 더 솔직한 감상이 써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독서감상문도 겸손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그 동안은 뭘 쓰던지 그럴 듯해 보이게 멋있게 쓰고 싶은 헛된 욕심 때문에 책을 읽기만 하고 그 감상을 글로 쓰지는 않은 경우가, 게으름 때문에 못 쓴 경우 다음으로 많았습니다. 이제는 짧게라도, 멋있지 않게라도, 꼭 책을 덮은 후에는 이렇게 글로 남겨보겠습니다(낡은 결심이라 여전히 자신은 없습니다만).

 

저는 부끄럽지만 무언가를 사는 것으로 적지 않은 기쁨을 느끼는 자본주의 노예의 전형입니다. 그 중에서도 책을 사는 것은 언제나 기분이 좋습니다. 집에 읽지 않은 책이 가득 쌓여있어도 큰 죄책감 없이 새로 나온 책이나 읽고 싶었던 책이나 혹은 이벤트 중인 책을 삽니다. 그래서 집에서도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음에는 무슨 책을 읽을까 고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과거에는 반드시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후에 새로운 책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여러 책을 동시에 읽기도 합니다. 출퇴근할 때 갖고 다니는 책으로는 너무 무겁거나 두꺼운 양장은 가급적 피하고 주로 집에서 그런 책을 읽습니다. 기차를 타고 고향에 갈 때는 가면서 다 읽어서 고향집에 책을 두고 올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 남아 있는 책을 들고 가거나 아예 돌아올 때까지 읽을 만큼 분량이 넉넉하게 남아 있는 책을 고르는 식입니다.

 

[시계태엽오렌지]를 사둔 게 얼마나 된 일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을 고향집 책장에 꽂혀 있었습니다. 지난 연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러 집에 가서 작은 서점에 온 기분으로 읽을 책을 골랐는데, 그게 시계태엽오렌지였습니다.

 

고전들이 대개 그렇듯이 뒷표지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찬사가 가득합니다. 기대를 안고 책을 읽기 시작하고는 살짝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주인공이 너무 거칠고 사악하더군요. 너무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앤서니 버지스가 당시 영국 십대들의 비속어들을 모아 스스로 고안해낸 nadsat이라는 언어라고 설명돼 있네요) 말을 뱉고 있었습니다. 흔히 이 작품과 함께 언급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조지 오웰 작품 속 등장 인물들과도 사뭇 달랐습니다. 샐린저나 오웰의 작품 속 인물들은 반항하는 모습도 왠지 우아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고나 할까요, 반면 알렉스는 그야말로 못돼 ()먹은 데다가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대개는 독자가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의 편에 서게 되지만 시계태엽오렌지를 읽을 때는 차마 그러지 못합니다. 일단, 알렉스는 전혀 멋있지가 않으니까요! 클래식을 좋아하는 취향마저도 그를 더욱 사악하게 보이게 할 뿐, 전혀 우아하지가 않습니다.

 

전혀 멋있지도 않고 그다지 철학도 없어 보이는(물론 초반에도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을 여러 차례여 걸쳐서 피력하기는 합니다만) 알렉스의 인생은, 아마 그렇기 때문에 꼬이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에서 원래 이런 깡패조직(?)의 보스는 그래도 그만한 카리스마와 멋있는 점이 있어서 부하들이 적어도 그가 힘이 빠지기 전까지는 목숨 바쳐 보필하곤 하는데, 알렉스는 스스로가 보스라고 믿는 그 작은 패거리 안에서도 신임을 잃고 미움을 삽니다. 그래서 그 불행한 감옥살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이 책의 1부입니다.

 

2부는 알렉스가 감옥에서 보낸 한 철을 다룹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루도비코 치료를 자진해서 받게 됩니다. 좋아하는 클래식도 마음껏 들을 수 없고 나쁜 짓도 마음껏 할 수 없어서 갑갑한 알렉스는 감형에 혹해서 루도비코 치료의 마루타가 되기로 합니다. 이 치료법은 일반적인 교화와는 달리 나쁜 생각을 하거나 나쁜 짓을 보게 되면 구역질이 나거나 몸에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일종의 세뇌입니다. 알렉스는 선해진 것이 아니라, 마치 종소리만 울려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진 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알렉스의 루도비코 치료를 반대하는 유일한 사람은 신부입니다. 세상의 신부님들이 으레 그렇듯, 인간은 원래 선하다고 생각하고 또 선함이 내재돼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영악한 알렉스는 이런 신부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를 압니다. 듣고 싶은 음악도 실컷 듣고 말입니다. 알렉스가 원래는 선하다고 신부님은 속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결국 그의 믿음이 일부는 맞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앤서니 버지스가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확하게 딱 떨어지는 결말로 나온다기보다, 독자들에게 생각할 여지와 갈등을 남기기도 합니다.

 

3부는 소위 기계적교화를 마친 알렉스가 시계태엽오렌지가 되어 사회에 나온 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감옥에서 기계가 되는 동안 직업을 갖고 평범한 사회인이 된(척 하는) 옛 친구들도 만나고 과거에 못된 짓을 했던 사람들도 만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대충 짐작이 가능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알렉스는 보복을 당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기보다는 그저 당하고 있는 편이 편합니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억지로 선해진 상태로 이야기가 막을 내린다면 재미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알렉스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사람 덕(?)에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잠시 알렉스는 신이 납니다. 그런데 막상 다시 악마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자 알렉스는 그런 것들이 이제 조금 귀찮아집니다. 돈도 모으고 싶고 혼자만의 시간도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시간과 자신의 모습들을 청춘이라 이름 붙입니다.

 

엄마가 싫어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엄마가 싫어하는 염색과 파마를 하고, 화를 내시던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냥 좀 놔두면 안 되냐고, 어차피 나이가 더 들면 하라고 해도 안 할 거라고 말입니다. 이 책의 결말은 이런 느낌입니다.

 

그런데 정말 알렉스도 그럴까요? 그랬을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동정이나 연민을 갖기는커녕 즐거움을 느끼던 알렉스가 단순히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이 모든 나쁜 짓을 관두고 평범한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알렉스는 철이 들었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걸까요.

 

과거에 조지 오웰의 책을 읽고 섬뜩한 예언가 같다고 쓴 적이 있는데, 앤서니 버지스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아동성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화학적 거세가 실제로 행해지거나 도입을 두고 논란이 이는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으니까요. 물론 화학적 거세와 루도비코 치료법이 서로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이 등장할 당시에만 해도 루도비코 치료법은 일종의 상상력의 산물이었다면 화학적 거세는 실제로 가능한 과학기술이 됐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혼란과 고민은 이제 실제로 반드시 한 번씩은 거쳐야 할 마음의 짐이 됐습니다.

 

나쁜 일을 하는 사람과 또 그 나쁜 사람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나쁜 일을 당해야 하는 사람’, 또 현재는 나쁘지만 앞으로 철이 들지도 모르는 사람과 철이 들지도 모르지만 점점 더 나빠질 수도 있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저는 비겁해서 나쁜 놈들은 무조건 똑같이 보복해줘야 해, 어떻게 해서도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해야 해, 라고 큰 소리로 외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나쁜 놈은 나중에 착한 사람이 될지언정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단지, 결코 100% 합의로 만들어질 수는 없을 그 방식과 정도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이 고민해봐야겠죠. , 역시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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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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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책이다. 이상한 책을 읽으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상한 책이 왜 이상한 책인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상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이겠고, 그래서 지금 쓰는 이 이야기는 서평이라기보다는 그냥 경험담 정도가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2010 8 13일이고 다 읽은 것은 2012 10 16. 무려 2 2개월에 걸쳐 책을 읽었다. 굉장히 흥미로운 서두와 인물들과 궁금한 내막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신나게 책을 읽어 내려가지는 못했다. 조금은 낯선 배경들과 이름들이 주는 무게의 영향이었나.

 

읽기 시작한 책이 잘 안 읽히는데도 끝까지 읽고 난 후 다른 책을 보려고 하면 책 읽기가 조금은 숙제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일단 내려놓고 다른 책도 열어보곤 했다.

 

그 해 10,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의 최종면접이 있었다. 현재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면접관이 물어봤다. <광대 샬리마르>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운의 땅 카슈미르에 대한 이야기와 그 땅에서 시작된 비장한 복수극에 대한 이야기. 그 면접에서 떨어졌고, 사상검증에 대한 실제의 피해경험과 그로 인한 피해의식으로, 어쩐지 <광대 샬리마르>라는 이 책과 살만 루시디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없어서 분명하게 인정할 수 없었지만 그 이후로 거의 2년 가까이 이 책을 이어보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런 감정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2년 후 다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 때 그 이상한 경험을 한 것이다. 일반적인 사건의 형태로 겪은 일이라기보다는 감정적 경험에 가깝긴 하지만, 마치 그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책의 세월을 함께 겪은 것 같은 강렬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광대 샬리마르>는 광활한 공간과 짧지 않은 시간을 다룬다. 인도 카슈미르 지방 일대와 1990년대의 로스앤젤레스가 주 배경이다. 광대 샬리마르가 막 연애를 시작했던 풋풋했던 시절부터 전 주인도 미국대사 막스 오퓔스의 운전기사가 되어 나타나고, 이후 인디아 오퓔스가 다시 카슈미르에 당도할 때까지의 이야기다.

 

인도 중에서도 카슈미르, 미국 중에서도 로스앤젤레스라는 구체적인 공간이 드러나있음에도, 몇 대에 걸친 가문의 역사를 다룬 우리나라 대하소설들에 비하면 어쩌면 짧은 시간임에도, 흔히들 이 작품을 평할 때 쓰는 마술적 리얼리즘때문에 어쩐지 더 넓고 긴 시공간을 관통해온 기분이 든다.

 

바로 그 기분이 내가 실제로 이 책을 읽기 시작해 읽기를 끝마치기까지 걸린 2 2개월이라는 시간과 겹쳐져 마치 내가 이 책 속에서 그 인물들과 그 시간을 살아낸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했다.

 

광대 샬리마르와 그의 영원한 사랑 부니, 막스 오퓔스와 인디아 오퓔스 간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개인사들은, 그 당시 역사와 오묘하게 맞물린다. 미국의 대 테러리즘 정책 하에 특히 제3세계에서 행해진 수많은 작전(?), 인도 카슈미르 지방의 종교적 갈등과 일시적인 화합, 이후 인도군과 반군 간의 잦은 충돌은 작은 파치감 마을의 평온을 완전히 뒤흔들어놓고 모든 것이 불행과 파국을 향해 교묘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결국 이 커다란 역사적, 세계사적 프레임은 그저 젊고 발랄한 한 개인인 인디아 오퓔스에게 어느 날 갑자가 충격적이고 불행한 사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의 엄마는 왜 저렇게까지 망가졌을까, 나의 아버지는 왜 이렇게 죽어야 했을까 하는 고민과 번뇌는 일시에 폭발하는 형태를 취하긴 하지만, 그저 자연인으로서의 인디아에게는 결과로 드러난 이 비극 이면에 얼마나 많은 개인들의 희생과 역사의 소용돌이가 존재하는지를 우리 독자들은 안다. 결국은 인디아도 알게 된다.

 

언젠가 올가 시메오노브나는 사랑이란 본래 슬금슬금 기어 들어오는 거라고 경고했다. "고놈은 네가 보고 있는 곳에서 다가오지 않는단다. 네 왼쪽 귀 뒤에서 슬그머니 기어 올라와 돌멩이처럼 냅다 머리를 후려칠 게야."

 

인생이 재미있는 것은 인디아가 고통 속에 그 많은 진실들과 마주하는 그 순간에도 또 사랑은 찾아온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노만(광대 샬리마르)과 부니의 사랑에서 출발했는데(또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복잡한 역사적 맥락에서 출발했을 텐데), 인디아는 그 비극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와중에도 사랑이라 생각되는 감정을 맞닥뜨린다.

 

올가 시메오노브나(책 읽기가 힘들었던 요인 중 하나가 소리 내어 몇 번을 읽어보지 않으면 익숙해지지 않는 이름들이기도 했다)가 말한 것처럼, “왼쪽 귀 뒤에서 슬그머니 기어 올라와 돌멩이처럼 냅다 머리를 후려치는 데에는 도리가 없으니까.

 

"저이는 사는 데 지쳤어. 죽음이 참 잔인도 한 것이, 우리 어린애들이나 한창때인 남정네, 여자들은 잘도 데려가면서 정작 매일같이 자기한테 오라고 비는 사람 소원은 무시한다니까."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한 몸이라고 했던가, 불멸의 사랑이었어야 했을 사랑에서 비롯된 비극은 이렇게 수많은 죽음과 죽음충동과 죽음에 대한 욕망을 낳고, 결국 광대 샬리마르와 인디아는 또다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이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긴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그야말로 폭력적인 현대사와 비극적인 개인사가 복잡하게 얽힌 대서사시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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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협의 빛
전혜정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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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몹시 인상적이고 강렬한 책, 그리고 작가의 등장이다.

 

최근 내가 읽은 소설의 경향을 최근 한국 소설의 경향이라고 말한다면 어폐가 있을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혜정 작가의 소설은 확실히 기존 한국 현대소설의 어떠한 경향에서 벗어나있고 개성이 강했다.

 

유려한 감성이 돋보이는 소설이든, 그로테스크하고 괴이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소설이든, 최근 읽은 많은 한국 작가의 소설들이 현대 속의 개인에 집중하고 있다면 전혜정 작가의 소설은 시대도, 개개인의 특성도 명확하지 않다. 주인공 중 하나가 다른 이름, 다른 얼굴로 대체되더라도 이야기의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을 정도다.

 

<나와 미스 마를렌>처럼 비교적 시대적 배경이 명확한 첫 번째 단편을 제외하면 이 소설집의 모든 작품은 공통적으로 마치 미래의 중세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명확한 신분 계급과 구시대적인 제도나 풍습, 복장 묘사 등은 분명 유럽의 중세를 떠오르게 하는데도, 그게 반드시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게 하는 오묘한 분위기와 미묘한 장치들이 마련돼 있어서인 것 같다.

 

이번 소설집 가운데서는 예외적이라고 한 <나와 미스 마를렌>도 주인공이 관찰하는 앞집 남자를 둘러싼 배경 등은 한국의 대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명확한 배경을 갖고는 있지만, 앞집 남자가 사는 세상은 다른 단편들 속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시대, 알 수 없는 세상 속이기도 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속사정과 나 자신이 소설 속 이웃 중 한 명이었으면 누구 못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을 게 분명한 엄청난 충격이 <나와 미스 마를렌>이라는 예쁜 제목 속에 숨어 있다. 그는 왜 그 집도 포기하지 못하고, 마를렌도 포기하지 못했을까. 둘 중 하나를 포기했다면 세상 속에 자신을 슬그머니 끼워 넣고 얼마든지 남들처럼 살 수 있었을텐데.

 

암소와 여배우라니, 다분히 이질적인 조합이었으나, 한편으론 어쩌면 그리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괴상한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이런 그를 유일하게 망측하다거나 미쳤다거나 욕하지 않고 일종의 이해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남부러운 직업 없이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던 주인공이다. 그리고 사건 이후 주인공은 이상을 버리고 현실에 순응하는 삶을 선택하는데, 이것은 현대사회에서는 조화시키기 어려운 이상을 가진 남자의 최후를 목격한 주인공의 선택으로 읽힌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알레고리로 끼워 맞추기에는 뭔가 아쉽지만, 더 많은 함의를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빨리 포기하는 것도 이미 현대인의 한 습성이 돼버린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품 <죽음의 도시>, 표제작 <해협의 빛>, <봉인된 시간>, <침묵>, <노예들의 땅에서>는 한마디로 끔찍하고 암울하다. <해협의 빛>은 그 묘사가 더욱 상세하고 거침이 없어서 무서울 정돈데, 책을 읽으면서 끔찍하다’, ‘두렵다라는 다소 현학적인 느낌 말고 실제로 무서워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아무래도 8살 때쯤 읽은 오싹오싹 공포체험이후 처음인 것 같다.

 

<죽음의 도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 이후 유독 그 도시에서만 수많은 사람이 자살을 선택하는 괴상한 사건을 다룬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설정은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해프닝이나 최근 개봉한 한국 영화 연가시에도 등장하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죽음의 도시>에서는 끝까지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영화와 소설의 차이이기도 한 것 같다. 영화가 끝까지 원인을 알려주지 않고 살아남은, 그래서 또 그 상태로 살아남은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생존자의 모습을 비추며 끝이 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지만, 소설은 그들을 그냥 남겨둘 수 있는 거다. 그냥 그렇게.

 

아빠. 아이가 이안을 불렀다. , 왜 그러니? 아빠, 나 무서워.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너무 무서워, 아빠도 무서워? 아이가 물었다. 그럼, 나도 무서워. 이안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아침을 먹을 거야. 그러고 나서 다시 무서워해도 늦지 않아.

 

<해협의 빛>은 과연 표제작이 될 만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전혜정이라는 작가의 세계를 충분히 대변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촌스러운 이 제목이 이 소설의 가장 적절한 제목이고,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작가가 해협의 빛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정보와 교류가 철저히 차단돼있는 D시와 오로지 D시에 대한 소문만으로 해협의 빛을 견디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역시 현대의 일면과의 알레고리가 보인다. 요즘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일 것 같지만, 그럼에도 과거가 아니라 현재나 미래의 이야기일 것 같은 <해협의 빛>.

 

빛이 가진 밝은 이미지와는 전혀 반대로 오로지 죽음만이 가득한 해협과 끔찍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누구도 실제로 가 본 사람은 없고 오히려 빛이 나오는 장소인 D시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는 현대인 모두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누구나 갖고 있을 공포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D시에 가 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주인공뿐인 거다. 주인공만이 감히 D로 가 볼 생각을 한다.

 

이렇기 때문에 <봉인된 시간>은 여전히 끔찍한 이야기이지만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군대와 매력적인 어린 여자. 많이 보고 듣고 실제로 겪었던 이야기니까. 주둔군은 패망하더라도 죽지 않는다면 자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만, 속절없이 몸을 빼앗긴 여자는 패망하지 않아도 그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불편한 사실.

 

<봉인된 시간>마라, 뒤의 다른 소설에서도 작은 비중이지만 잠시 등장하는데, 왠지 자신의 끔찍한 운명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같은 고통이 계속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다.

 

<침묵>도 마찬가지다. 끔찍한 고통과 죽음이 등장하고, 이단과 마녀사냥이 등장한다.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는 모두 인간이다. 특이하게도 양의 탈을 쓴 인간이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소설 안에서 실제로 구현되는데, 실제로 우리는 이 말을 보통 가해자에게 쓰겠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반대의 경우로 쓴다.

 

도저히 불가해한 현상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우리의 습관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습관이기도 하다.

 

<노예들의 땅에서>는 길이가 꽤 긴 중편소설이다. 시작과 끝이 한 장면으로 연결된 구조다. 본래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삶은 산화’, 말 그대로 시간의 흐름에 의해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전혜정의 작품 속에서 죽는 수많은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이 자연스러운 삶, 혹은 자연스러운 죽음을 허락 받지 못한다.

 

<노예들의 땅에서>는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노예들이 감히 인생의 가장 중대한 선택을 함으로써 결국 형벌을 받게 되는 슬픈 이야기다. 이런 곳에서 아름다움은 오히려 불필요하고, 불행하며, 잔인할 뿐이다.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감상도 굉장히길어졌다. 책을 보기 전 가장 기억에 남았던 평이 그로테스크한 서정성인데, 이렇게 잔인하고 암울한 데도 이 속에 서정성이 녹아 있다는 것도 참으로 놀랍다. 그리고 작가의 습관인지,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전체에 걸쳐 사위가 고요하다거나 사위가 적막하다거나(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이 비슷한) 하는 표현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아마 전혜정 작가의 이번 소설집 속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이 모두 이렇게 뼈저리게 고독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변이 아무리 살육으로 소란하고 고통의 비명으로 시끄럽고 요란하게 피로 물들어도 우리 개개인은 모두 고요하고 적막한 사위에 둘러싸여있는 것만 같이 그저 고독하기 때문에.

 

근데 단지 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토록 고독하고 고통스럽다는 점 뿐일까. 왠지 그건 아닐 것 같다.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그냥 왠지 그럴 것 같다. 그 어디에도 명확한 희망의 징후는 없지만 그럼에도 왠지.

 

어쨌든 그 누구보다 용감해서 멋진 작가니까. (이쯤 쓰고 보니 명확하네, 난 전혜정 작가에게 첫눈에 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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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코다 - 이루리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가 새로 만든 또 하나의 <북극곰 코다 첫 번째 이야기, 까만 코> 북극곰 코다 1
이루리 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 그림 / 북극곰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0분이면 읽히는 이 책의 여운은 그 수천수만배의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흰 눈으로 뒤덮인 북극에서 사냥꾼은 오로지 까만 코를 찾아야만 북극곰을 잡을 수 있지만 아마 코다와 코다의 엄마는 아무리 북극을 헤매고 뒤져도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거다. 코다의 코는 엄마 품에 묻히고 엄마의 코는 코다의 두 손 안에 가려져 있으니까. 

 

[까만 코다]를 보고 나니 마음 속에 하얗고 폭신폭신한 담요가 깔리는 느낌이다.

 

이 간단한 동화가 이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주는 단순하면서도 따뜻한 진리(가족의 사랑이라는)와 그 이야기에 꼭 들어맞는 포근한 그림의 조합이 마치 조금씩 내려 마침내 길을 막아버리는 엄청난 폭설과 같은 위력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까만 코를 가진 북극곰들과 또 세상의 모든 가족이 있는 동물들(가족 없이 태어나는 동물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이 영원히 사냥꾼들에게 발각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마치 내가 엄마 품에 코를 묻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하고 든든하다.

 

정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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