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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버킨_ Jain Birkin Sings Serge Gainsbourg via Japan

 

2013년 3월 30일 토요일 @유니버설아트센터

 

 

제인 버킨을 검색해봅니다. 세상에나! 46년생이라고 나옵니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할머니입니다. 하지만 검색결과를 보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인 버킨은 그냥 제인 버킨. 마침 좌석도 2층이라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더더욱 나이를 실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키 크고 목소리 예쁘고 샹송을 잘 부르는 매력적인 젊은 여자 같습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작년에 제인 버킨의 공연도 본 동행은 분명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을 거라고 합니다.


오늘의 공연은 그녀의 2번째 남편이자 딸 샤를롯 갱스부르의 아버지인 세르주 갱스부르의 곡들로만 구성됐습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트럼본, 드럼 모두 일본뮤지션으로 구성된 밴드는 이 투어를 위해 결성됐고 아마 이 밴드구성으로는 오늘 서울에서의 공연이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Jain Birkin Sings Serge Gainsbourg via Japan”이라는 이름으로 갖는 마지막 공연이니까요.

 

처음.이라는 말과 마지막.이라는 말은 어쩔 수 없이 설렘과 애잔함을 줍니다. 제인 버킨이 세르주 갱스부르의 곡들만을 특별한 이 밴드의 연주로 부르는 마지막 공연을 본 것이 참 기분 좋습니다.

 

작년 악스홀에서의 공연에서는 2층까지 올라와 관객들과 눈을 맞추고 악수도 해줬다고 들어서 오늘 너무 예쁜 우산을 들고 객석으로 내려오는 제인 버킨을 보고 굉장히 설렜습니다. 하지만 2층까지 오기에 오늘의 공연장은 너무 크고 구조 또한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밴드를 소개할 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도, 또 세르주 갱스부르와의 특별한 만남이나 곡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할 때도, 굉장한 진심을 담아 그녀의 모든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노래 만큼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서툴게 한국인 크루들의 이름을 부르며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 사실 저는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당사자들은 자기 이름이 불리는 걸 듣고 또 감동했을 것 같습니다.

 

프렌치시크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그 말은 차라리 오늘의 서울날씨에 더 어울립니다).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과 몸과 옷은 시크하지만 그녀는 시크하다기보다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라는 게, 단 두 시간 공연만 보고도 확신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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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민_ 줄리엣(Juliettttttt)


 

2013년 3월 30일 토요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극이 시작되기 전 얇은 장막 뒤로 몇 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사라지고 화면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몇 문단이 뜹니다. 덕분에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머리 뒤에서 들리고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이 앞에 앉은 사람들의 실루엣을 부각해 기분이 좋았습니다.


 

홍성민의 줄리엣 영문 제목에는 t가 7개입니다. 아마 2010년 처음 공연됐을 때는 5개였겠지요. 그 때는 줄리엣이 5명이었고, 지금은 7명이니까요. 공연이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홍성민 연출가는 줄리엣이 5명에서 7명이 된 이유는 공연할 무대가 넓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농담 같은 대답이었지만 연극은 공연장의 공간에 영향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후에 50명의 줄리엣이 등장하는 줄리엣(Julie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t)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냐는 질문에도 역시 가능하다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저 역시도 아마 연출가에게 공간과 제작비만 주어진다면 아마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줄리엣에 등장하는 줄리엣 7명은 모두 과거에 한국에서 공연됐던 주인공들입니다. 고전 그대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경성시대 댄스홀을 배경으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마치 춘향이 같은 모습의 고전으로도 만들어졌었나 봅니다. 그렇게 공연됐던 7개의 서로 다른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7명의 줄리엣과 그녀들이 입었던 의상들을 빌려오거나 재연해 그녀들이 한꺼번에 다시 연기하게 합니다.


 

배경을 서로 달리 하는 줄리엣들은 성격에서도 두드러지는 차이를 보입니다. 극에서 인물의 성격은 주로 말투나 행동, 목소리 등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우리나라식으로 해석해 한복을 입히거나 근대를 배경으로 해 미니드레스를 입힌 3명의 줄리엣들의 개성이 두드러졌습니다. 나머지 4명은 사실 의상도, 목소리도, 성격도 비슷비슷해보였습니다만 이것은 홍성민 연출가의 의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정말 말 그대로 기존에 공연된 작품 속에서 인물들을 거의 그대로 빌려온 것이니까요.


 

관객과의 대화에서 캐릭터들이 비슷비슷해서 좀 지루하게 느껴졌다는 지적이 나왔는데, 다시 극을 다듬는다면 좀 더 다양한 ‘로미오와 줄리엣’ 작품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줄리엣 하나하나와 그녀들의 의상, 연기를 보는 재미가 이 극의 큰 부분을 차지하니까 매력이 다양할수록 더욱 재미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홍성민의 줄리엣은 지금 이대로도 또 어떤 부분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7명 중 4명이 입는 옷의 분위기나 성격이나 대사가 비슷했다는 것은 그만큼 원작에 충실한 해석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많이 공연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의 배경은 이탈리아의 베로나이고, 이 이야기를 써서 알린 것은 영국의 세익스피어인데,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또 대부분 구전들을 정리해서 쓴 거라는 사실입니다. 이탈리아 한 마을의 이야기가 흘러흘러 영국인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이것이 세익스피어에 의해 정리되어 고전으로 남고 또 이것을 전세계 수많은 예술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각색하고 재공연하고 있습니다. 홍성민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을 만든 이유입니다.


 

이 작품은 곧 유럽에서도 공연된다고 합니다. 그 때는 한국인 배우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각지의 줄리엣들이 나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말을 하고, 창을 하고, 일본말을 하고, 영어를 하고, 불어를 하는 줄리엣들이 동시에 나와 각자의 연기와 대사를 하면, 동시에 같은 언어의 대사를 할 때 만들어지는 소리와는 또 다른 소리들이 만들어 질 것 같습니다.


 

7명이 나오기 때문에 각 여배우들은 서로 어쩔 수 없이 경쟁을 펼칩니다. 누가 먼저 등장하고 누가 가운데에 서고 또 누가 더 예쁜 의상을 입고 누구 목소리가 더 크냐에 따라 관객의 시선이 쏠리기 때문이죠. 각자의 취향도 영향을 미칠 겁니다. 서로 다른 대사들을 뱉고 있는데 누구 하나를 정해서 따라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습니다. 어떤 관객은 그 상태로 소리의 뭉침을 들었을 것이고, 또 어떤 관객은 그 중 특정 인물을 처음부터 따라갔을 것이고, 또 다른 관객은 매 장면마다 서로 다른 인물을 정하고 그 인물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이번 공연을 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해외에서 공연된다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더라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아는 언어는 듣고 나머지 언어들은 배경음으로 삼는 것이지요. 그리고 뜻은 몰라도 그 때 각 배우들은 비슷한 장면을 연기하고 있으니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모두가 아는 것이기도 하고요.


 

원래 연극을 즐겨보는 편이 아니라서 배우들의 연극톤 발성이나 극적인 연기 자체가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전체의 완결성이나 작품성이 대단하다는 인상은 솔직히 받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어떤 완결성이나 작품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품 같습니다. 발상 자체는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배우들도 연기하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고 합니다. 예술이라는 건 때로는 신선하고 재미있는 발상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가치를 가집니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이렇게도 보여줄 수 있구나 하는 것 자체가 관객들에게는 또 다른 영감을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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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오 카스텔루치_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대하여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자생하는 비극> 연작들을 스크리닝으로 보고 나흘 만에 직접 신작 연극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에게 마법의 표가 생긴 겁니다.


 

극장에 들어가자 모든 것이 새하얗게 세팅 돼있었습니다. 왼쪽부터 하얀 소파와 카펫, 하얀 테이블, 하얀 침대, 그리고 무대의 중앙에 대형 얼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의 얼굴입니다. 예수의 얼굴, 혹은 예수의 얼굴이 담긴 대형 포스터는 극 후반에 아주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정시가 되자마자 두 남자가 역시 새하얀 옷을 입은 노인을 부축해 나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하는 연극에서 역할이 없는 그들이 연극이 시작되자마자 아버지를 부축해 소파에 앉히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어색합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는 혼자는 걷기조차 힘든 노인이 연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고 해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채 시작하는 순간 극 중 노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더욱 어색합니다.


 

아버지는 헤드폰을 쓴 채 우리나라의 ‘동물왕국’ 비슷한 프로그램을 보고, 뒤이어 등장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며 출근 준비를 합니다. 전화 통화를 하며 메모를 하는 그는 바빠 보입니다. 하지만 출근하려는 찰나, 아버지는 똥을 쌉니다.


 

그는 익숙하게 아버지가 싼 똥을 치우고 아버지의 옷을 갈아입힙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사과하고 아들은 계속해서 아비를 달랩니다.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하고 배변 조절이 힘들어도 아버지가 느끼는 수치심까지 사라지진 않습니다. 어릴 땐 분명 자신의 똥기저귀를 갈아줬을 아버지이므로 아들은 직장에 늦어도, 전화가 와도, 아버지를 토닥이며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아버지가 싼 똥은 새하얀 가구들 사이에 더욱 빛이 납니다. 똥이 묻은 자리가 너무 새하얘서 오히려 초콜릿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내 온 극장에 퍼지는 냄새가 정신을 차리라고 말합니다. 이게 가짜였으며 좋겠지? 하지만 이건 정말로 냄새 나는 바로 그 똥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등받이가 검은 의자에도 아버지가 싼 똥이 묻어있습니다. 연출자의 의도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등받이에 묻은 똥의 색깔과 모양은 마치 뒤에 걸려 있는 예수의 얼굴과 색깔이나 모양이 비슷합니다. 아마 우연이겠죠. 저는 그냥 제가 보고 싶은 걸 본 걸 겁니다. 어쨌든 위치와 각도 때문에 그 검은 등받이에 묻은 똥의 색깔이나 모양이 꼭 인간의 얼굴 같이 느껴지는 걸 어쩔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연극은 후반에 극의 반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치워 놓으면 다시 싸고 닦아 놓으면 다시 쌉니다. 차분하게 아버지를 달래고 보살피던 아들은 어느 순간 폭발하죠. 아버지 대체 뭘 드신 거냐고요.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흐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새하얀 침대에마저 자신의 설사를 묻힙니다. 아마 아무리 착한 아들이라도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아들은 무대 중앙에 걸린 예수 얼굴로 다가갑니다. 예수의 얼굴을 어루만집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의 절규가 느껴집니다.


 

아들은 무대 뒤로 사라지고 아버지는 여전히 똥 묻은 흰 침대에 걸터앉아 울고 있습니다. 이 때, 책가방을 매고 농구공을 든 남자아이가 등장합니다. 책가방에서 수류탄을 꺼내 예수의 얼굴에 던지기 시작하죠. 이후 계속해서 아이들이 나와 같은 행동을 합니다. 모든 아이가 다 나오고 나서 세어보니 아이들은 모두 12명이었습니다. 열 두 명의 아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분은 없을 듯 합니다.


 

실컷 수류탄을 던지고 나면 아이들은 다시 가방을 잠그고 다시 매고 왔던 길로 돌아갑니다. 그 후로는 예수의 얼굴 뒤로 불길과 사람의 그림자가 등장합니다. 예수의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변형됐다가 원래 모습을 찾았다가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메시지가 뜹니다.


 

“You’re My Shepherd”


 

그러다 오른쪽 귀퉁이에 어떤 글자가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떠오릅니다. 아직 극장 안이 어두울 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극장 안이 밝아질수록 그 글자는 선명합니다. ‘not’입니다.


 

어두울 때는 “You’re My Shepherd”로 보이지만 밝아오면 “You’re not My Shepherd”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레이디 가가의 공연은 그토록 반대하면서 이런 작품이 상영될 때는 왜 이렇게 고요한가를 반문하기도 하더군요. 명백한 신성모독 작품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상영됐을 때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져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의도는 꼭 신이 있다, 없다와 같은 단순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인간이 어떤 고통의 순간에 직면해있을 때, 그것을 피할 수도,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이 받아 들여야하지만 고통스러울 때, 또 수치스러우면서도 생을 부지해야 할 때, 자신이 믿는 신을 부르고 질문을 하는 것처럼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신에게도 질문하고, 관객에게도 질문하고, 배우들에게도 질문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에까지 이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믿어온 신은 과연 정말 있는 건지, 나를,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는 건지, 모든 것이 신의 뜻인 건지, 그렇다면 왜 하필 이런 고통과 수치를 주는 건지 우리 인간은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우니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면 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당신은 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을 그 어떤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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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봄이라는 것은 계절의 이름이기보다는 여름이 오기 직전 명멸하는 대낮이거나 조명처럼 번쩍 벚꽃 흩날리는 밤과 같이 어느 한 때를 가리키는 말이 돼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전히 보는 일을 가리키는 봄이란 건 변함 없어서 조금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매년 3월, 봄이 아직 덜 왔건 바싹 왔건간에 우리나라에서는 '페스티벌 봄'이 열립니다. 그동안 봄이 왔다가 가버린 건 알았어도 이런 축제가 열린다는 사실은 몰랐다가 작년 연말 젊은 축제기획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축제는 이름만 들어도 왠지 멋있다거나 재미있을 것 같다거나 하는 인상을 전달하면 절반은 성공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페스티벌 봄은 그렇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처음으로 선택한 '봄'은 무려 여섯 시간의 대장정을 위한 체력을 기본 요건으로 하는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연극 [자생하는 비극] 연작의 스크리닝입니다. 페스티벌 봄이 정식 개막도 하기 전에 필름포럼에서 말 그대로 연극장면을 촬영해 재편집한 영상을 극장에 모여 보는 것이었습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해주는 설명은 이렇습니다. 그래서 진작 그리스비극 좀 열심히 읽어놓을 걸 하는 후회가 됩니다.

 

로메오 카스텔루치라는 이탈리아 태생의 아방가르드 연극연출가에 대해서는 이번 페스티벌 봄을 통해 처음 알게 됐지만 그래도 6시간이나 보고 나니 좀 아는 예술가 같이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난감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볼수록 조금씩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지 점점 재미있어지고 영감을 주는 작품들이었습니다. 물론 갈수록 이야기의 배경과 내용이 좀 더 익숙하고 현대적으로 변주된 덕도 컸습니다.

 

총 340분 하고도 25초 분량의 [자생하는 비극] 연작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는 염소와 말, 가짜 피와 우유, 물과 빗물, 흰 옷과 까만 옷과 빨간 옷, 복면,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의 성기입니다. 아방가르드 연극답게 이 연작 속에는 대사도 많지 않고 움직임도 많지 않습니다. 상징과 은유로 가득하고 각각의 장면들은 느리게 움직이거나 정지한 상태로 보여지기 때문에 회화에 가깝습니다. 아니면 초기 영화 형태인 움직이는 사진 같습니다. 숨을 죽이고 저 사람은 뭘하고 있나, 누군가, 왜 저러고 있나를 생각하게 만들죠. 그리스비극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 염소와 말 등 앞에서 언급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소재에 대한 해석이 더욱 쉬웠을 겁니다. 하지만 모른다해도 마찬가집니다(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뭐든 한 가지로 해석하고자 하면 쉽고 그게 아니라면 복잡하고 모호하고 한 가지 결론으로 수렴되지 않는 다단한 생각이 머리를 떠도니까 말입니다.

 

겁에 질린 벌거벗은 남자, 하반신만이 천장에 매달린 소년 혹은 소녀, 나오지 않는 젖을 짜는 노파, 기저귀를 차고 월계관을 쓴 젊은 남자, 나폴레옹의 후예들로 보이는 군인들(파리 공연), 로마교황을 연상시키는 무기력한 노인과 교활한 사제들(로마 공연), 부족한 물과 그 때문에 늘 죽음을 면전에 맞는 기분으로 사는 부부(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만)(마르세유 공연) 등이 연작에 등장합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설명한 대로 로메오 카스텔루치는 [자생하는 비극]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시기와 공연 장소에 맞게 끊임 없이 변주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에 전혀 없던 서사가 강화되기도 하고 자연스레 대사가 늘어나기도 합니다. 한참을 보다보면 오히려 그렇게 관습적인 형태의 연극이 더욱 어색합니다. 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듭니다. 그 대화들은 어떻게 들으면 철학적이고 또 어떻게 들으면 전혀 무의미하기도 합니다.

 

연작의 후반으로 갈수록 대사들이 쏟아지기도 하고 배우들이 표정으로 연기를 하기도 하지만 초반에는 대사도 없고, 배경음악도 거의 없고, 배우들에겐 표정이나 제대로 된 얼굴도 없습니다. 얼굴이 있어도 계속해서 복면이 씌워지거나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더라도 동그란 눈과 입매만 보입니다. 이 때의 표정은 일상적인 표정들이라기보다는 더욱 드라마틱하게 과장되고 극단적입니다. 과장된 표정 속에 담긴 감정은 정확히는 몰라도 왠지 알 것 같은 그런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기쁘고 행복하기보다 두렵고 슬프고 괴롭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기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서 장면을 관찰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크리닝 형태이기 때문에 관객인 우리와 연극이 행해진 바로 저 장소와는 이미 많은 시간차와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그 자체로 또 한 번 더, 혹은 두 번 이상 장막을 칩니다. 많은 장면이 연극이 행해지는 공간과 실제 그 곳에 있는 관객 사이에도 한 단계를 더 만들어둡니다. 유리벽을 두거나 커튼을 치거나 뒤돌아서있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밖에서 관찰하고 생각하게 둡니다.

 

나체나 흰 옷에 뿌리는 시뻘건 피도 처음에는 끔찍하다는 생각을 부르지만 볼수록 너무 새빨개서 가짜 피구나 하는 안도를 불러 극에 몰입하거나 감정이입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형태의 연극이나 영화라면 그걸 보면서 아 피다, 아프겠다, 조금씩 감정이입을 하게 되겠지만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자생하는 비극] 속 핏물들은 가짜인 게 너무 분명해서 저건 누구의 피일까, 왜 저렇게 뿌려대는 걸까, 무엇을 의미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졸 틈도 주지 않습니다; 6시간 내내 1초도 졸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굉장히 몰입해서, 제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의외일 정도로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리스신화에서 각 동물이나 인물이나 피나 그 외의 것들이 대부분 상징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그걸 알고 나서 보면 또 어떨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기왕에 못 본 거 못 봐도 많은 걸 스스로 상상하고 영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더욱 흥미진진할 것을 압니다. 서사보다는 상징이 많다고 했던 생각도 바뀔 지 모릅니다. 알고 보면 그 모든 빈 공간과 빈 시간과 움직임 없음이 다 서사일지도 모르죠.

 

 

각 작품의 크레딧과 아주 적은 분량의 대사 혹은 소리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언데, 대략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글자막이 없어서 비록 그 사실이 미리 공지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프로그램북과 리플렛입니다. 슬기와 민.이 디자인했습니다. 참으로 심플하고 모던합니다. 이 자체도 예쁘지만 각 작품들과 결합한 이미지들은 정말로 더 예쁩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다음에는 또 어떤 충격과 영감을 받게 될지 기대됩니다. 이번 주말에는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연극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대하여]를 보러 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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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를 봤습니다. 이 스토커stoker는 그 스토커stalker가 아니지만 알고 보면 그 스토커stalker입니다. 엄마 스토커, 열여덟생일을 맞은 딸 스토커, 열여덟생일날 죽은 아빠 대신 나타난 삼촌 스토커, 죽은 아빠도 스토커, 암튼 스토커가의 이야기이니까 스토커들이 가득 등장합니다. 이 중 두 명은 알고 보면 그 스토커인 진정한 스토커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진정한 사냥꾼이기도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스타일의 영화라고 느껴집니다. 스토커를 가지고 치는 말장난과 중의적 의미들, 배우들이 하나같이 풍기는 그로테스크함, 영화의 에로틱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피아노곡들, 스토커가의 저택의 구조와 조명과 가구들과 계단(계단은 딸 인디아 스토커와 엄마 이비 스토커의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로 사용됩니다)과 문들(열린 문과 닫힌 문, 이쪽 문과 저쪽 문, 이쪽 문에 선 사람과 저쪽 문에 선 사람의 운명의 변화와 엇갈림), 모두 어느 하나 무심히 만들어지고 무심히 배치되고 무심히 사용되는 것이 없습니다.
인디아 스토커가 이비 스토커의 머리를 빗겨주던 장면이 아빠와 사냥하던 숲의 장면으로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넘어가던 장면도 확실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영화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내가 놓쳤을 지도 모르는 모든 것이 다 섬세하고 철저하게 의도된 감독과 배우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제 박찬욱의 절정에 달한 이 스타일의 표현이, 가득찬 상징들이, 조금은 지겹게 느껴집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상징이 아무리 빼어난 스타일로 표현되었다해도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때는 알아맞힌 것 이상의 감흥이 저 스스로에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해석의 폭이 비교적 좁은 상징보다는 질문의 폭이 비교적 넓은 함의가 담긴 영화들을 저는 대체로 더 좋아해왔으니까요.
바로 어제 얘기했던 <케빈에 대하여>와 어쩌면 마...찬가지로 <스토커> 속 모녀의 관계 역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형태의 일반적인 모성애에 기반을 두고 있진 않습니다. 이야기의 중심 역시 그러한 모성애는 아니고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장치에 불과해보입니다. 물론 감독이나 각본가가 의도한 다른 의도를 제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그 모든 설정이 오로지 하나의 이야기와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박찬욱 감독의 명백한 의도이기도 할 듯 합니다. 감독의 스타일과 상징들의 총체라는 점에서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도 비슷한 맥락에 두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과 상징들이 이젠 조금 지겹다는 말을 하고 있는 저의 생각들이 전적으로 취향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듭니다.

이런 의문도 듭니다. 남들이 못 보는 것까지 보고 못 듣는 소리도 듣는 훌륭한 자질을 갖춘 소녀는 왜 결국 자기 안의 폭력성과 악마를 인정하는 길에 있는 걸까 하는 겁니다. 뛰어난 사냥능력을 가진 자라면 아무래도 이 능력을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보여주기에는 착한짓보다 나쁜짓이 더 적합하기 때문인 걸까요. 스타일상 착한짓보다 나쁜짓이 더욱 시각적으로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표현 가능하기 때문인 걸까요. 그러니까 결론은 다시 한 번, 역시 스타일에 대한 취향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영화 후반부 이비 스토커의 자식에 대한 대사는 누구를 쳐다보고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이냐에 따라 똑같은 말이 굉장히 섬뜩한 말이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굉장히 통쾌한 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시선을 통해 착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디테일들을 떠올리며 곱씹을수록 박찬욱 감독이 얼마나 섬세하게 많은 것들을 영화에 심어두었는지가 느껴집니다. 특히 수미쌍관으로 배치해둔 장면돠 대사, 마지막에 흐르는 음악은 정말이지 섬뜩함을 더합니다. 자막으로 나오는 가사를 보며 원래 있던 음악이라면 다르게도 해석됐을지 모를 이 가사가 영화의 엔딩과 만나니 너무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찾아보니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음악 같았습니다. 아아 끔찍해라! 암튼 이런 쪽으로는 도가 튼 것 같은 박찬욱 감독, 내가 본 그의 필모 중에는 유일하게 특유의 유머감각도 쪽 빼고 철저하게 살벌하게 만든 이 영화는 얘기할 거리들이 많지만 막 그렇게 좋아하기는 조금 버겁습니다. 늙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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