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만스탈
후고 폰 호프만스탈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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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독일문학의 이해' 수업 들을 때 교재로 샀던 책. 배우면서 읽으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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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의 노래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8-1 프로파일러 토니 힐 시리즈 1
발 맥더미드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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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5-6학년 때 나는 여름방학을 대부분 두류도서관에서 보냈다. 5학년 때는 셜록홈즈 시리즈를, 6학년 때는 루팡 시리즈를 독파했고, 그 후 틈틈이 애거서 크리스티를 읽었다.  

독파라고는 하지만 너무 일찍 읽어버린 탓에 지금 다시 읽어도 결말은 모른다. 하지만 '너도밤나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나무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새겨주고, 기암절벽에 자태도 당당하게 서 있는 멋진 '기암성'을 상상하게 하고, 비둘기 혹은 무궁화호밖에 타보지 못한 나로 하여금 '오리엔트 특급열차'에 로망을 갖게 한 것이 다 이런 추리소설 시리즈물이었다. 

이후로도 틈틈이 추리소설을 읽고, 스릴러 영화를 보긴 했지만 그 시절 여름방학 때만큼 열정을 쏟은 쪽은 소설보다는 '미드', TV 시리즈물이었다.  

소설 대신 미드를 보기 시작하면서 음산하면서도 우아한 저택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들과 신비로운 공기를 상상할 수 있는 특권은 빼았겼지만, 더욱 생생하고 과학적이며 무엇보다 빠른 해결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국민학생 때보다 훨씬 바빠진 나로서는 꽤 괜찮은 대안이었달까. 

그러다 얼마 전 다시 열중해서 읽은 토니 힐 시리즈물의 첫번째 책 [인어의 노래]는 어릴 때 읽은 추리소설의 고전들보다는, 최근에 본 미드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영상으로 보고 있지 않은 점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로 잔인해졌고, 범인의 내면은 더욱 복잡하고 뒤틀려져 있고, 그래서 해결하는 방식 역시 좀 더 과학적이고 복잡하게 바뀌어 있었던 것. 

예를 들면,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보헤미아 스캔들'은 이런 식이다. 복면을 한 방문객이 유럽의 위기 운운하며 겨우 한 장의 사진을 찾아달라는 사건을 의뢰하고, 홈즈는 역시나 특유의 치밀한 관찰력과 변장술과 통찰력으로 해결 직전에 이르지만, 너무나 아름답고도 현명한 여인이 오히려 홈즈의 생각을 앞서 사건 해결이 실패하는가 싶더니, 결국 여차저차하여 모든 오해는 풀리고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물론 예를 든 '보헤미아 스캔들'의 경우 홈즈 시리즈 중에서도 몸풀기에 가까운 짧고 가벼운 이야기지만, 과거 고전적인 추리소설들 속의 사건은 전반적으로 요즘의 추리물들에 비해 훨씬 사건이 다양했다. 살인이 일어나지 않고는 이야기되지 않는 현대의 추리물들과는 달리, 살인이 전부가 아니었고 필연도 아니었다.  

살인과 관련돼 있다고 해도 죽고 나서 사건을 해결하기보다는 죽기 전에 갈등의 요소를 제거해버리는 식이었다. 그렇다보니 사건에 접근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정도 훨씬 다채로웠다. 이미 일어난 일의 범인을 찾아내기 위한 단서 중심의 이야기이기보다는 관련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사연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추리물에서는 아름다운 결말이래봐야 범인의 자백과 반성 정도지만, 과거의 추리물들 속에는 결국 최악의 사태는 발생하지 않고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진정한 '아름다운 결말'도 적지 않았다.  

정말 조마조마하면서도 짜릿한 재미를 안겨줬던 루팡과 홈즈의 대결에서조차도 -작가가 모리스 르 블랑인 탓에 승자는 대체로 루팡이었지만- 결국은 두 탐정의 화해모드로 잘 마무리되곤 하지 않았던가.  

자, 이제 다시 [인어의 노래]로 돌아와보자. 사건은 말할 수 없이 잔혹하고, 범인은 더욱 뒤틀려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이 작품은 현대 추리물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보다는 범인을 둘러싼 이야기를 통해 범인의 마음 속으로 접근해 사건 해결을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또 고전 추리물 쪽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고전 추리물 쪽에 더 가까이 있다고 여겨진다. '프로파일링'이라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행동양식을 통해 내면을 파고드는 일이니까. 

그래서일까. 사건과 단서 중심이기보다 사연 중심인 이 작품은 여성성이 무척 강하다. 작가가 여성이고,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캐롤 조던이 여성이고, 밝힐 수 없는 여성성이 작품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사건해결의 중심에 서 있는 토니 힐 역시 똑똑하고 매력적인 남성이지만 오히려 여성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발기불능'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설정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거세불안'이라는 전형적인 여성적 불안요소로 볼 수 있으며, 프로파일링이라는 일 자체도 여성성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히는 '타인과의 공감'을 필요로하는 매우 여성적인 작업이다. 실제로 사건을 해결하는 힘 역시 보통의 경찰이나, 보통의 남성 심리학자와는 다른 토니 힐의 여성성에서 비롯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류사회에서 배제돼있다는 점 역시 슬프게도 일종의 (사회화된) 여성성이라고 볼 수 있다. 캐롤 조던은 실제로 여성이라서 경찰 조직 내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토니 힐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범죄수사라는 영역에서는 낯선 '프로파일링'이라는 남다른 접근 방식을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 바로 이런 점이 토니 힐과 캐롤 조던의 '환상의 쿵짝'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인어의 노래]의 가장 큰 특징이 여성성이라면,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시성(詩性)'이다. 게이 커뮤니티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 사건의 범인을, 언론을 비롯한 대중사회는 '퀴어 킬러'라고 이름짓지만 토니 박사는 '핸디 앤디'라고 이름 붙인다. '시(詩)'라는 것이 모두와 기존의 관점을 걷어내고 완전히 새로운, 벌거벗은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토니 박사가 범인을 조우하는 방식이 바로 이러하기 때문이다.

'퀴어 킬러'와 '핸디 앤디'라는 이름짓기는 아주 명확하고도 큰 차이를 갖고 있다. '퀴어 킬러'는 '퀴어'라는 '거대한 이단적 집단' 전체를 일컫고 있으며 '킬러'라는 말 역시 두루뭉술한 범주를 형성한다. 하지만 '핸디 앤디'라는 이름은 지극히 범위가 좁혀져 일그러진 내면을 가진 한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더군다나 '퀴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일반 대중들에게는 일종의 거부감과 이질감을 안겨준다. 따라서 '퀴어'라는 말이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발 뒤로 물러서게 한다면, '핸디 앤디'라는 이름은 한 발 더 다가가게 하는 것이다.  

범인을 '퀴어 킬러'로 부르느냐, '핸디 앤디'로 부르느냐는, 그러므로 사건을 해결하고 못하고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를 가져온다고 해도 과언을 아니다. 

[인어의 노래]는 무려 5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그만큼 담고 있는 이야기도 많다. 지나친 선정성으로 대중과 범인, 수사대 모두에게 뭐 하나 보탬이 안 되는 언론의 행태나 경찰 내부의 관행과 구태의연한 수사기법, 사회소수자들에 대한 일반대중의 시선 등 곳곳에 가볍지 않은 문제의식들도 꼼꼼하게 숨겨져 있다.   

또한, 범죄스릴러라면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될 요소인 반전도 훌륭하다. 사실 나는 범인이 직접 쓴 5번째 '사랑' 파일에서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보고 그 반전을 이미 짐작했었다(이건 자랑이다 :). 하지만 남겨진 또 하나의 반전이 더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토니 힐 박사의 혼잣말로 끝나는 결말 역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인어의 노래]는 충격적인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들도, 끝까지 힘을 잃지 않는 탄탄한 구성을 기대하는 독자들도, 모두 만족시킬 만한 세련되고 훌륭한 추리소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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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좋은 책을 어서 소개하고 싶어서 출판사는 마음이 급했던 걸까. 책에 오자나 비문이 꽤 많았다. 표시해놓은 것들만 몇 개 지적을 하자면:

"메릭은 자신이 겁먹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기도했다." (p.168) => "메릭은 자신이 겁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기도했다."

"네가 널 원한다는 걸 보여줘." (p.233) => "네가 날 원한다는 걸 보여줘."

"좋아, 앤디, 이제 쇼를 할 시간이야." (p.238) => 첫문장임에도 들여쓰기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안젤리야" (p.425) => "안젤리카"  

이런 부분들이 좀 실망스러웠고, 속도감 있게 책을 읽어나가는 데도 방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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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니까 사람이다 - 정신과 의사들만 아는 불안 심리 30
김현철 지음 / 애플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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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험하다고 여겨진 무의식의 욕구나 생각이 정말로 위험하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훗날 프로이트는 말했습니다.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은 상황을 위험하다고 잘못 해석하기 때문에 내적 불안이 괴로운 것이라고 말이죠." p.8
 

첫번째 "밑줄 긋기"를 넣고 나니 불안이 쳐들어온다. 아.. 책 읽는 동안 줄 정말 많이 그었는데, 편집증적인 성격상 힘들다고 이 중 몇 개만 쓰고 대부분을 버리는 건 못할텐데, 일찍 자야하는데, 요 며칠 계속 잠을 못 자서 회사에서 너무 힘들었는데.

정말 팍팍 줄을 그으면서 읽었다. 위로가 되거나, 그래서 그랬구나 싶거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그냥 그럴 수도 있구나 싶거나, 좋거나. 그래서 줄을 그었다. 

 

01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불안의 심리학

01 감정이 없는 나, 괜찮은 걸까

각 장에 달려 있는 제목만 볼 때는, '이 장은 나와 별로 상관 없는 장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읽다보면 겪어본 얘기고, 들어본 얘기고, 기억은 안 나고 느껴봤음직한 불안이고, 그래서 또 책에 줄을 긋고 있었다.
 
"하지만 보편적이란 말이 꼭 정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p.22

이렇게 말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쉰 목소리에 가까울 정도로 작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바로 심리적 긴장입니다. 심리적 긴장은 쉽게 근육 긴장으로 이어지는데, 목소리를 내는 데 필요한 성대와 후두의 작은 근육들은 심리적 긴장의 일차 타깃이 됩니다." p.23


우리 몸은 이렇게 긴밀하게 우리의 마음과 연결돼 있다. 한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만 하면 목소리가 지나치게 떨리곤 했다. 고등학생 때 발표하고 선생님께 칭찬을 좀 들었는데, 대학에 가니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 칭찬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나를 긴장하게 했고 성대와 후두의 작은 근육들까지 긴장을 시켰던 거였다.

05 진짜 내 모습이 싫은 나, 괜찮은 걸까

"영국의 정신의학자 랭(R.D. Laing)에 따르면, 이러한 가짜 자기는 유아기에 어머니에게 받아야 할 사랑과 같은 적절한 반응을 얻지 못해 생긴 존재의 불안에 대한 방어라고 했습니다. 쉽게 풀어 얘기한다면 엄마 하나 믿고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그 엄마조차 날 제대로 봐주지 않으니 거짓된 메이크업이라도 해야 엄마에게 버림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유아가 엄마에게 버림받기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생존 본능 때문입니다." p.56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이 바로, 엄마, 아빠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거였다. 나는 유아기에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에게 아주 사랑받았고 적절한 반응을 얻었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

"끼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의 끼를 가지고 사느냐, 남의 끼를 가지고 사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p.61 

이 말은 가수 장기하 씨가 방송에서 한 말을 저자인 김현철 씨가 인용한 부분인데, 책 전반적으로 전문서적이나 전문용어뿐만 아니라, 참으로 친숙한 대중문화들이 많이 인용돼있다. 이 명제를 심각하게 논하는 것을 최근에 본 기억도 없긴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대중문화는 저속한 것'이라는 명제는 폐기처분돼도 무방하다.
 

 

02 감정에 서툰 사람들의 불안의 심리학

02 질투와 의심에 사로잡힌 나, 괜찮은 걸까

"그런데도 남편은 아랑곳없이 특정 남자만을 의심하며 아내를 추궁하기 바쁩니다. 이런 남자들은 주로 두 가지 이유로 부인을 의심합니다. 첫 번째는 사실 그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쪽은 부인이 아니라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외도에 관한 자신만의 은밀한 소원을 상대에게 전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고지순하게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 외도라는 단어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금기어가 됩니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해소하지 못한 성욕은 정말이지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평화로운 마음을 위협하는 불청객이지요. 다른 사람을 향한 애정이나 성욕을 추잡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생각해온 이들은 결국 바람피우고 싶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상대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고 맙니다. 미안하지만 나의 정의로움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상대를 희생시키는 것이죠." p.87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은 여기서, 이렇게도 뒤섞이는구나.

04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미운 나, 괜찮은 걸까

"어릴 때 받은 충격적 기억은 주로 우뇌에 저장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우뇌에 저장된 정보, 주로 감정들은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우린 아주 먼 예전에 느꼈던 감정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p.98 

몸은 기억력이 좋다는 것을, 10년 만에 피아노를 다시 치거나, 1년 만에 스키를 다시 타거나, 몇 년 만에 자전거를 다시 탈 때 느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기억이라는 것 자체를 원래 몸이 하는 거였다.

"증오하는 사람의 사진을 볼 때나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볼 때나, 뇌 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모두 같았기 때문입니다. 미워할 때나 사랑할 때 모두 활성화되는 뇌 속 피각과 섬엽이란 부위는 공교롭게도 사랑뿐 아니라 증오나 공격적인 성향도 담당하는 부위입니다." p.101 

그래도 솔직히,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실은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는 싫다.

 


03 자극적인 감정에만 빠지는 사람들의 불안의 심리학

01 섹스에 빠진 나, 괜찮은 걸까

"여성을 그저 섹스의 노리개만으로 보는 남성의 경우, 이들 마음의 시계는 배변 훈련을 하며 엄마와 힘을 겨루는 두세 살의 항문기로 되돌아간 경우가 많습니다. 배변을 조절하듯 모든 대상을 내가 통제할 수 있냐 없냐가 이들에겐 쾌감의 소스가 됩니다." p.112 

"다른 여성에게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성행위를 강요하거나 여자를 냉정하게 차버리는 남자들의 이면엔 배변을 조절하지 못했을 때 엄마에게 받았던 모욕과 패배감을 설욕하고자 하는 바람이 숨어 있습니다." p.112

이토록 한 사람의 모든 것이 어린 시절의 체험이나 기억에서 비롯되는 거라면, 정말 쉽게 결혼해서 쉽게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될 것 같다.

02 나쁜 사람에게만 끌리는 나, 괜찮은 걸까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피에라 올라니에(Piera Aulagnier)는 "나는 고통스러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p.118  

"고통과 속박이 없는 연애란 평평한 궤도를 맴도는 롤러코스터와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내 식상함을 느낀 나머지 관계 자체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불안뿐 아니라, 상대방이 아무리 무결점에 가깝다 해도 연애 관계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정상적인 분노까지 참아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들에게 고통과 속박은 분노를 제어해주는 브레이크였기 때문입니다." p.118

"고통은 그들에게 마치 애완견의 목걸이나 말의 안장과도 같습니다. 보이지는 않아도 서로 깊은 관계라는 징표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p.119

언제 붕괴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겨주지 않는 연애. 나중에 어떻게 될 지언정 지금은 서로가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확신을 가진 연애. TV에선 참 많이 봤는데 역시. 왜 TV에서는 이런 불완전하고 아슬아슬한 연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드라마는 보여주지 않을까. 오히려 드라마를 통해 익숙해진 환상 때문에 현실에서의 더욱 정상적인 연애가 비정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03 잘 헤어지지 못하는 나, 괜찮은 걸까 

"아이들은 보통 부모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이나 결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실망은 아이가 겪는 가장 큰 심리적 고통인데,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부모의 결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덜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p.128

04 엄마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 괜찮은 걸까

"이렇게 소중한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각각의 모습으로 나누어 마음에 저장하는 본성을 정신의학에선 '분열'이라 합니다." p.135 

"정신과 의사인 마가렛 말러(Margaret Mahler)에 따르면, "어떨 땐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엄마는 전체적으로 좋은 사람이야"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만 세 살이 되어야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원활히 넘기지 못하면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 자상한 아빠와 무서운 아빠가 마음속에서 통합되지 않은 채 따로 인식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p.136 

"참고로 부모를 닮아가는 것은 유아에게 여러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부모와 공생할 수 있어 생존을 보장받고, 엄마의 나쁜 모습이 자신의 것이 되는 순간 그녀를 향한 증오심이 희한하게도 사라지기 때문이죠. 사람은 일단 자신의 것이 되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심리가 있습니다." p.137

역시 이 파트에서 나는 더 열심히 줄을 그었다. '엄마'는 내게도 역시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여전히. 좋은 곳에 가려고 하면 '엄마는 아직 못 가 보셨는데' 하는 생각이 들고, 좋은 화장품을 사서 쓰려고 할 때도 늘 싼 화장품을 사 쓰시고 그 돈을 모아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해주시려던 엄마 생각부터 난다.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참고 우리를 위해 주셨는데, 나는 너무나 내 욕망에 충실한 것에 계속해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데 웃긴 건, 그래서 나의 욕망을 결국 제어해내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해외 여행을 가고, 사고 싶은 것을 사면서 생각한다. '아마 나중에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연애를 할 때 엄마를 떠올리는 습관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완전히 엄마를 배제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가? 사랑에 빠져서 정신 없이 허우적대다가도 문득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여러가지 상황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가 걱정을 하시거나, 간혹 불만을 표하기는 하실 지언정 억지로 못하게 하시지도 않는데, 나는 엄마와 이런 문제로 부딪히는 것 자체가 두렵고 싫었다. 그래서 기왕이면 나도 좋고, 나를 사랑해주고, 엄마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지만, 이런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사랑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빠지는 것이므로. 

책을 읽으면서 나의 내면을 많이 바라보고, 나와 엄마의 관계 사이에 빗대어도 봤지만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지금이 좋은 것 같다. 서로의 인생에 적당히 개입하면서, 또 적당히 모른 척 해주는 이 상태.

불안과 만난 문화 심리 - 첫사랑과 유기 불안

"청소년기에서 20대 초반 성인기의 첫사랑은 심리적으로 부모와 분리되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래서 이성을 사랑하면 할수록 한편으로 나도 모르게 엄마 아빠가 눈에 밟힙니다. 부모에게서 떠나려는 욕구가 크면 클수록 부모에게서 버려질지 모른다는 유기 불안이 자극되기 때문입니다." p.140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성을 향한 얄궂은 폄하와 열정적인 갈망은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상대를 폄하하는 행위는 걷잡을 수 없는 갈망의 불길을 통제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화벽이 됩니다." p.141 

"연인과 헤어진 뒤 비통하고 슬프기는 누구 할 것 없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왠지 모를 후련함과 홀가분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건 심리적 성장과 변화뿐 아니라 더 행복한 사랑을 예고하는 신호입니다. 헤어진 뒤 홀가분해졌다는 느낌이 갖는 의미 중 하나는 여태껏 당신이 너무나도 상대의 바람대로만 움직여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건 100퍼센트 당신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와 당신의 무의식 사이에 벌어진 '상호 투사적 동일시'라는 현상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p.143

"이런 현상은 특히 열정적인 사랑에서 안정적인 사랑으로 바뀔 찰나에 많이 나타납니다. 상대를 감싸고 있던 이상화라는 오로라가 걷히면 상대방이 쏘는 투사라는 화살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마음가짐은 나의 본 모습과 걸맞지 않는 상대의 기대에는 일체 부응하지 않겠다는 단호함, 그리고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즉 상대의 과도한 칭찬이나 비난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p.145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에서 안정적인 사랑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몇 년, 그리고 '상대의 과도한 칭찬이나 비난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건 지금. 연애 초에는 누구나 그렇지만 '과도한 칭찬' 속에 산다.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것이 기쁘고 행복한데, '안정적인 사랑'으로 바뀌어갈수록 초기와 '비교'해 칭찬이 줄고 오히려 비판이나 비난은 늘어나게 마련이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그의 눈의 콩깍지가 벗겨져가고 있음을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충격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궁금하다. 늘 넘겨오긴 했지만, '잘' 받아들여온 것 같진 않다. 안타깝게도. 

"실은 성격의 유사성과 사랑을 유지하는 것과의 상관 관계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커플들이 헤어지는 원인은 성격 차이라기보다 가치관 혹은 취향의 차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p.146 

"'공감'과 '동감'은 얼핏 비슷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그 뜻은 조금 다릅니다. '동감'은 상대의 감정을 그대로 따라서 느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애인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저절로 눈물이 나긴 해도 정작 왜 그녀가 우는지 모른다면 그는 아마도 동감을 할지언정 '공감'은 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왜 우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비록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더라도 그는 제대로 '공감'한 것입니다." p.146
  



04 유난히도 사랑에 약한 사람들의 불안의 심리학

01 연애할 때마다 점집을 찾는 나, 괜찮은 걸까 

"결국 점집을 찾아 헤매던 그녀의 원동력은 헤어져야만 마음이 편한 '상실 불안'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p.153

02 잘나가는 사람만 끌리는 나, 괜찮은 걸까

"믿기 힘드시겠지만,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의 열등감을 가진 채 세상에 나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열등감을 다루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천차만별로 갈리지요." p.161  

저자는 또 이렇게 나를 위로한다. 고맙다.

"정신분석가 힐리(William Healy)에 따르면 열등감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성숙한 부모에 다가가고 싶지만 너무나 왜소한 나머지 어찌할 바 몰라 허둥대는 유년기 아이의 초라한 느낌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흉터라고 했습니다." p.161 

불안과 만난 문화 심리 - 옷과 구두와 가방과 상실 불안

"패션에 관한 심리를 흥미롭게 풀어내 국제 정신 분석학회지에서 관심을 끌었던 정신분석가 리처드(Richard A.K.)의 말이 맞다면, 분명 그녀는 돈 많은 아빠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p.181 

"약 1890년 경, 사회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인간을 달리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을 신체와 영혼 그리고 '옷'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까지 보았지요." p.182 

"옷을 입지 않는 종족은 많지만 장식하지 않는 종족은 지구상에 없다는 말을 남긴 스타 박사(Starr F.)의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p.184 

"그 결과 수많은 관찰과 연구 끝에 우리의 자아는 다름 아닌 피부에 존재한다는 혁명적인 가설을 제시합니다. 바로 '피부 자아'라는 개념이 그것입니다." p.184 

"우유를 갖고 있지만 차가운 철사로 만든 어미 모형과 우유는 없지만 감촉 좋은 천으로 만들어진 어미 모형 중, 거의 모든 새끼 원숭이들은 비록 우유가 없어도 편안한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어미 모형을 선호했지요." p.185
 
엄마가 아무리 귀찮다고 하셔도, 집에 가서 같은 방에서 잘 때는 언제나처럼 손을 꼭 잡고 잘테다. '피부 자아'와 '감촉'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니, 김정운 교수가 한 얘기가 생각났다. 그에 따르면,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빨리 죽는 이유는 스킨십이 적어서라고 했다. 여자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손자들을 앉고 여전히 사람의 피부와 접촉이 많지만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만질 대상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정말 일리 있는 말이다.
 



05 힘겨운 관계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불안의 심리학

02 유부남, 유부녀에게만 끌리는 나, 괜찮은 걸까

"당신의 사랑이 과연 진정한 것인지, 아니면 해결하지 못한 유아기적 앙금의 또 다른 반복인지 말이죠." p.208  

03 이성보다 동성이 더 끌리는 나, 괜찮은 걸까

"프로이트는 말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의심과 감정적인 태도 그리고 조금은 강박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p.215 

04 희생해야만 사랑하는 것 같은 나, 괜찮은 걸까

"우린 누구나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지 아닌지 늘 확인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p.218 

05 동생의 결혼식이 편하지 않은 나, 괜찮은 걸까 

"마음속 냉혹한 판사는 불행할 것을 선고한다" p.208
 
"그녀의 죄책감은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냉혹한 재판관을 자극하여, 동생의 고통스러운 호흡곤란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p.209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냉혹한 재판관도 그러나 판결을 '내리게 만들'지 직접 판결을 내리진 않는다. 고로, 판결은 나 자신이 직접 내리는 것. 

 

06 나쁜 생각과 걱정만 하는 사람들의 불안의 심리학

02 나쁜 생각이 유독 많은 나, 괜찮은 걸까

"상처가 될 정도로 극심한 기억들은 주로 우뇌에 조각조각 유리가 깨져 박히듯 저장됩니다." p.250 

역시 관건은 우뇌다. 인간은 일단 우뇌가 인식하고 저장하는 것은 막지 못한다. 하지만 우뇌에 저장된 기억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04 원리원칙에만 집착하는 나, 괜찮은 걸까

"불행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은 이들에게 또 다른 불안을 가중시키기 때문이죠." p.267  

 


07 이 모든 불안이 버거운 사람들을 위한 불안의 심리학

01 불안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껴안아야 하는 이유

"랜턴으로 동굴 속을 비췄을 때 커다른 그림자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아마 우린 실체를 파악하려 들거나 아니면 도망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그림자의 실체가 큰 괴물이 아니라 그저 작은 다람쥐임을 알게 된다면, 비로소 우린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77  

02 불안이 당신에게 주는 선물 

"깨어 있을 때 드는 자살 생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전체의 몸과 마음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인 것이지요.
" p.285 



책의 너무 많은 부분을 발췌한 것이 아닌가 좀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사실 이 기록은 좋게 읽은 책이 쉽게 휘발되지 않도록 나를 위해 한 번 더 정리하는 의미가 크다. 그래서 이렇게 모든 밑줄들을 다시 한 번 옮겨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

저자인 김현철 의사선생님은 현재 MBC라디오에서도 상담을 하고 계신다. 방송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책은 정말로 따뜻했다. 말하는 것처럼, 잘난체하지 않고 아는 것 과시하려하지 않고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프로페셔널하게 이야기해주면서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싫어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독려해준다.

책 속에는 '그때 너는 아이였고 부모님은 어른이었으니 더이상 너를 원망하지 마' 하는 이야기가 꽤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어른이었던 부모를 원망하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어린 시절의 나, 어린 시절의 내 혼란과 감정과 화해하라고 권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동시에, 내가 부모가 되어서도 나도 모르는 새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트라우마를 만들어줄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받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누구도 완벽한 어른이나 완벽한 부모가 되진 못할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는 것. 역시 신중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 다시 한 번 한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사랑'을 매개로 '불안'이라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애하고 있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내면의 가장 약한 모습, 가장 들추고 싶지 않은 모습을 가장 많이 보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래서 '불안하니까 사랑'이고 '불안하니까 사람'인 거다. 괜찮다. 나쁘지 않고, 이상하지 않고, 괜찮다.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이 책을 친구에게 추천하고, 따로 사서 선물도 했다. 그들도 나처럼 위로받고, 때로는 나와 과거의 연인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전문서적을 기대하고 읽는 독자라면 '왜 이렇게 쉬워?' 하면서 실망할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많이 아는 사람이 쉽게 글 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이 의사선생님,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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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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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이 소설 때문에 나처럼 괴로웠을 남편에게 각별한 감사를 건넨다. '내가 쓰는 소설의 의미'와 '식구가 쓰는 소설의 의미'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이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언제나 나에게 최선인 남편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이 글은 책의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 일부다. 

지독한 작가다. 책을 읽는 내내 그렇게 느꼈지만, 마지막 '작가의 말'을 보며 나는 한 번 더 이 생각을 곱씹었다. 정말 지독한 작가다. 

[환영]은 정말 소위 '남편 있는 여자'가 쓰기는 더더욱 쉽지 않은 소설인데 그녀는 썼고, 이렇게 출간해냈기 때문이다.

한때 싸이월드 BGM으로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라는 곡을 깔아놓은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남편' 아닌 '남친'이 있었고, 남친은 배경음악을 바꾸라고 종용했다. 자기가 옆에 있는데도 이런 곡을 걸어놓는 게 싫다고 했다. 그랬는데,

'여친'도 아니고 '아내'가 이런 글을 쓴다면 남편으로서는 지켜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이설 작가가 창작의 고통을 겪는 본인만큼 남편도 괴로웠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각별한 감사'와 '진심으로 미안'함을 표하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환영]은 정말 지독한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여자는 팔자를 관장하는 사나운 신이 사나운 곳에 버려놓은 것 같은 삶을 산다. 

오랫동안 왕백숙집을 들락거려 서로의 사정을 아는 이들이었다. p.23 

그 삶은 서로의 '사정'을 아는 사람끼리 모인 왕백숙집으로 여자를 밀어넣는다. 그녀를 고시원이라는 좁은 곳에 가둔 것으로는 모자랐던 걸까.

남편을 만난 건 고시원이었다. 저녁 한 끼 해결하던 고시원 주방에서 곧잘 마주치던 남자였다. 조심스럽게 비켜서다가, 목례를 하게 되고, 김치를 나눠 먹고, 계란 프라이를 두 개씩 하게 되었다. 고개를 맞대고 한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고, 그 국물에 찬밥도 같이 말아 먹었다. p.28

그래도 그녀는 자기의 인생만큼이나 갑갑한 공간인 좁아터진 고시원에서 남편을 만나 그곳을 일단 벗어나긴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후에 여자는 '남편과 살게 된 일'이 '살면서 내 뜻대로 되는 일이란 하나도 없었'던 인생에 '유일하게 이뤄진 것'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뿐(p. 116)'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남편과의 만남도 이렇게 별 감정 없이, 수식 없이, 간결하게 써내려갈 만큼 삶이 그저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사람이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이기에 살아보려고, 한번쯤 행복해보려고 여자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는데, 하필 그곳은 '물가'다. 가뜩이나 힘든 그녀를 물에 젖은 솜처럼 더 무겁고 지치게 만드는 물가. 

계절이 바뀌는 걸 제일 먼저 알려주는 건, 공기나 나뭇잎의 색깔, 왕백숙집의 손님 수가 아니었다. 계절에 가장 민감한 건 물이었다. 물가의 냄새와 빛깔은 하루하루 달랐다. 날이 더워지면 물비린내가 짙어지고 색깔도 탁해졌다. 겨울로 갈수록 물은 고요해지고 맑아졌다. 근래 들어 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p.105 

치워도 치워도 끝도 없이 떨어져 방바닥을 더럽히는 머리카락은 그래도 방바닥에 얌전히 떨어져 있는 동안은 그렇게까지 더럽진 않다. 하지만 욕실에 떨어져 물에 젖고 습기에 불어 엉킨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남편을 만나기 전, 그래도 아직은 그냥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같았던 여자는 물가로 가서 욕실에 떨어져 물에 젖고 습기에 불어 엉킨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된다. 물가에서, 닭국물을 떠먹고, 소주를 따르면서 그녀의 인생은 물기를 머금고 조금씩 젖고 눅눅해지고 너덜너덜해진다.

엄마, 아빠, 여동생, 남동생, 그 어떤 이름도 그녀에게 위안을 주지 못하는 가족의 범주는 그렇게 남편, 딸로 넓어져가며 여자를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는다. 가족과는 하고 싶은 말들보다 하지 말아야 할 말들만 점점 더 쌓아간다.

엄마와 나는 입을 더욱 굳게 다물었다. 몇 년 만에 만난 모녀 사이인데, 할 말이 참 없었다. 하고 싶은 말들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말들만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p.170 

가족들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더 쌓여가는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상상해본다. 아마 [환영] 속 여자의 삶 같으리라고, 소설을 읽은 덕분에 어설프게 짐작해보지만 사실은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여자가 잠깐 희망을 볼 때 나도 그 희미하고 짧은 순간의 그녀 희망을 잽싸게 낚아챘다. 희미한 빛이 점점 선명해져 그녀 안의 물기를 말려줄 수 있게 되기랄 바랐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김이설은 지독한 작가다. 그래서 책을 덮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주 느리게 걸을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무리 속도를 내려고 해도 발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방에 불을 켜고도 외롭다는 생각을 하는 대신 깊이 안도했다.


물에 젖은 채로 오래 방치돼 물때까지 머금은 욕실 배수구에 엉켜있는 머리카락을 눈 돌리지 않고 이마 찌푸리지 않고 맨손으로 용감하게 끄집어내는 김이설 작가의 용기가 놀랍다. 그리고 소설이 더 길게 쓰여지지 않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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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어느날 눈을 떴는데, 모든 게 수상하고 낯설다.  

어딘가 낯익은 상황이다. 어느날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고 의심하며 진짜 아내를 찾아나서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리브카 갈첸의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오랫동안 길러온 본인의 콧수염이 '원래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혼란을 겪는 엠마뉘엘 카레르의 [콧수염]에서도 주인공이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K 역시 어느 토요일, 예기치 않게 눈을 떠 모든 것이 전과 달라진 상황을 목격하고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아내와 딸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만화 속 요괴인간들처럼 보였다." p.73  

"그러나 뭐가 감사한 것인지, 뭐를 축하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가면무도회에 던져진 느낌이어서 K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p.74 

"K는 자신이 구색을 맞추기 위해 잘 팔리지도 않으면서 매대에 진열된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같다고 생각하였다. 가족이라는 슈퍼마켓에 아내는 아내라는 이름의 상표로, 장인은 신부의 아버지라는 라벨로, 처제는 신부의 역할을 맡은 신상품의 견본으로 이렇게 함께 서 있는 것이다." p.86  

그의 눈에 "아내와 딸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만화 속 요괴인간들처럼 보였"고 그런 요괴들이 함께 모여 손님을 맞고 식을 올리는 처제의 결혼식장에서는 "가면무도회에 던져진 느낌이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고 스스로가 "매대에 진열된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은 전날 밤 기억이 끊긴 1시간 30분 동안의 알 수 없는 시간에서 비롯됐다고 믿는 K는 그 비어버린 1시간 30분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모습을 바꿔 자신을 감시하는 수상한 존재들을 만나고 끝없이 이상한 경험만 한다.  

어떤 계기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찾아나선 사람은 결국 한 가지 공통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자신의 뿌리라고 믿는 어린 시절, 그 시절의 가족, 특히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다. K 역시, 정신과 의사인 친구 H의 조언으로 가족을 통해 이 난관을 헤쳐나가보고자 한다. 그리고 모두가 의심스럽고 모든 상황이 불안한 상황에서도 어머니를 떠올리자 역시 순간적으로나마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간다.

"생전의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단어를 부르자 K의 눈꺼풀 뒤에 있는 눈물샘과 그 주위에 산재한 누선으로부터 결막낭 안으로 투명한 액체가 고여 들었다. 내안각의 눈물주머니 속에 모여 있던 약알칼리성의 눈물이 눈동자를 적시는 것을 K는 느꼈다. 그러나 그 양이 미미해, 액체는 흐를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한 채 그저 촉촉하게 눈동자를 적시다가 서서히 말라갔다." p.116 

그럼에도 죽은 어머니를 제외한 현존하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실제의 아내는 어디 있는가. 실제의 자명종은 어디 있으며, 실제의 딸, 실제의 강아지는 어디 있는가." p.122 

K는 매일매일 함께 하던 너무나 익숙한 존재인 아내, 자명종, 딸, 강아지는 다 가짜라고 의심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몇십년 만에 만난, 그것도 겉모습이 완전히 변해버린 누나는 진짜라고 느낀다. 뭔가 부조리하지 않은가. 그래서인가, 불안과 의심과 수성쩍음으로 가득찬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가장, 아니 근래 읽은 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가장 따뜻한 부분은 오랜만에 누나를 조우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앉아라. 얼굴 좀 보자." 

누이는 소파에 K를 앉힌 채 두 손으로 배구 경기에서 리시브를 하듯 얼굴을 받쳐 들었다. p.218  

이 따뜻하면서도 죄스러운 누나와의 만남을 통해 결국 K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의심과 부정이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과 부정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결론은...  

격렬한 사랑의 끝도, 진정한 자아찾기의 끝도, 결국은 한 길로 통한다. 그래서 인간은 격렬한 사랑도 어느 한 사람과 끝맺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계속 이어나가고, 자아찾기도 아예 시도 자체를 하지 않거나 본격적으로 착수해 어느 순간 종결하는 게 아니라 인생을 통틀어 조금씩 천천히 해내가는 것 같다. 이 경우 결국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계속 진행중인 상태에서 결국 마주하고 싶지 않던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데, 무엇이 더 용감한 일인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무엇이 더 옳은 방식인지는 대답을 보류하고 싶다. 

우리는 어쨌든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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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았던, 김연수 작가의 발문에서 일부 발췌한다.  

발문.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 소설가 모두를 구원하리라 -소설가 김연수 中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별하는가? 일상적인 것들에서 멀어지면서. 연인들이라면 매주 토요일이면 서로 만나던 일을 하지 않거나, 밤늦게까지 통화하던 습관을 버리면서, 헤어지고 나서 언제 눈물이 제일 많이 났는지 생각하면, 이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연인의 손을 더 이상 잡지 못하는 게, 그게 바로 이별이다. p.389 

평론가가 무슨 말을 하든, 또 독자들이 어떤 식으로 읽든, 글을 쓰는 행위는 그런 모든 일들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이리라. 그건 너무나 순수한 행위여서 어쩌면 선생 자신과도 무관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이렇게 이 한 권의 소설을 손에 쥘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선생은 소설을 계속 쓸 수밖에 없으리라. 이 계속 쓰고자 하는 힘이 아마도 우리 소설가 모두를 구원하리라. 해서 이제는 선생의 또 다른 소설을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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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낯익은은타타인인들들과과낯낯선선자자신신이이뒤뒤엉엉켜켜사사는는이이도도시
    from 야구가 끝나는 그때부터가 진짜 겨울 2011-07-21 23:48 
    어느날 눈을 떴는데, 모든 게 수상하고 낯설다. 어딘가 낯익은 상황이다. 어느날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고 의심하며 진짜 아내를 찾아나서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리브카 갈첸의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오랫동안 길러온 본인의 콧수염이 '원래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혼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