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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분명, 슬슬 페이지가 넘어가는, 마구마구 뒤가 궁금한, 숨막히게 재미있는 추리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따뜻했다. 

클라라는 지금까지 스리 파인스에서 25년 동안 살면서 단 한 번도 범죄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현관문을 잠근다면 그건 기껏해야 주키니(오이 비슷한 서양 호박)가 넘쳐나는 수확 철에 이웃 사람들이 주키니를 몰래 가져다 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p.9 

마을에 대한 설명을 보라. 이런 곳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나 처음엔 모두가 사고사일 거라고 믿는 그런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 그래서 나중엔 누가 문을 잠그고, 문을 잠그지 않느냐도 이 마을에서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양심과 비겁함은 똑같다고 말했어. 우리가 나쁜 짓을 하지 못하는 건 양심 때문이 아니라 붙잡히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p.33 

"오스카 와일드는 어리석음 외에는 죄가 없다고 했지요." p.209 

대화의 수준을 보라. 마을 사람의 절반쯤? 이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사건의 주축이 되는 스리 파인스 사람들은 대부분 똑똑하거나 지혜롭거나 따뜻하거나 훌륭한 예술가다. 

가마슈는 이제까지 그런 사람들의 표정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 p.50 

그는 갓 죽은 사람의 손을 볼 때면 언제나 아픔을 느꼈다. 그 손이 잡았을 온갖 사물과 사람들이 상상이 되는 것이다. 음식, 얼굴들, 문손잡이들. p.54 

이 사건을 해결하는 가마슈 경감은 대단한 혜안을 가진 지혜롭고 능력있고 인간미까지 넘치는 수사관이다.  

"훌륭하셨죠. 그분과 대화할 때면 그분은 제가 세상에 유일한 존재라도 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계셨죠. 이해하시겠어요?" 

물론, 보부아르는 알고 있었다. 아르망 가마슈도 똑같은 능력이 있으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다른 곳을 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흔든다. 가마슈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가마슈가 누군가를 볼 때는 그 사람이 곧 우주다. 그러면서도 대장은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세세한 것까지 파악한다. 단지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p. 178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중심, 살해당한 제인 닐은 마을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사람이다. 제인의 죽음으로 클라라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받는 충격만 보아도 그녀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사실, 미스터리는 왜 더 많은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느냐는 거야. 인간으로 산다는 건 끔찍할 게 분명한데." p. 246 

이렇게 부정적인 말만 주로 입에 담는 시인 루스 자도 역시 결국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으며 제인에 대한 누구보다 깊은 사랑을 고백한다.

"우리가 만났을 때 제니가 내게 키스했다.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시간아, 사랑스런 것들을 훔쳐가기 좋아하는 도둑아. 

그것도 네 명단에 넣어라. 

그래 나는 지쳤다. 그래 슬프다. 

그래 건강과 재산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 점점 늙어간다. 

하나, 그건 꼭 넣어라. 

제니가 내게 키스했다." 

루스는 그 시를 작은 목소리로 읊었고, 조용한 방이 들었다. 

"리 헌트의 '론도'. 내가 썼으면 했던 유일한 시야." p.382 

마을 사람들에게는 죽은 제인이 이렇게 거대한 존재이기에, 결국 누가 제인을 죽였을 것인가가 궁금해지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가마슈 경감이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역시 현대의 과학수사 방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관찰과 용의자들과의 대화 그를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는 '숨가쁜', '숨막히는', '손에 땀을 쥐는' 그런 종류의 추격전은 아니다.  

그것이 나의 읽는 속도를 지연시켰다. 마을 사람 하나하나의 사정과 내면에 집중해야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래서 누가 범인이냐고?!" 하는 조바심이 났달까. 추리소설 읽기란 흔히, 조금씩 조금씩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과정을 급하게 쫓아가는 과정인데 말이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용의자들의 내면을 탐구한다고 해서 긴장감과 속도감이 떨어졌던 건 아닌 것 같다.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의 경우 무려 3권에서 수많은 새로운 인물들을 등장시켜가며 그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지루하기는 커녕, 지금 한 장면을 읽고 있으면서도 빨리 다음 장을 읽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 먹으면서 저녁에 뭐 먹지 생각하는 것처럼. 

차이가 뭘까 생각해보니, 첫번째 차이는 이거였다. '모방범'에서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 인물이 그 사건과 왜,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 지도 함께 드러났지만, '스틸라이프'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저마다의 사연과 개성은 갖고 있지만 그들의 등장이 반드시 새로운 사건이나 단서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 하나는 '스틸라이프'의 주인공들은 모두 각자 사연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죽은 제인 닐을 비롯해서, 좋은 화가인 데다 천사같이 착하기까지 한 클라라, 그리고 역시 뛰어난 화가인 데다 너무나 순수하게 그녀를 사랑하는 거의 완벽한 남편 피터, 가마슈 경감, 그를 완벽하게 보좌하는 보부아르... 

물론 성격파탄으로 그려지는 제인 닐의 조카 욜랑드와 그녀의 남편 앙드레, 철없는 아이들, 경거망동하는 신참 형사 니콜이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욜랑드와 앙드레는 범죄소설에서 꼭 필요한 가장 지목하기 쉬운 용의자 역할을 위해 없어선 안 될 캐릭터고, 니콜은 오히려 가마슈의 완벽함과 인간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요소였던 것 같다. 

이런 점들이 '따뜻한 추리소설'을 탄생시키긴 했으니 '숨막히는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데 한 몫 했다. '이 사람인가?' '설마 이 사람이 범인?' 하고 의심해볼 용의자의 수를 너무 줄여놨고, 이렇게 착한 사람들만 만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각자 자신의 약점이나 추함을 드러내는 등장인물들이 범죄소설을 읽는 내 맘도 더 편하게 해준달까.

그럼에도 나는 '스틸라이프'가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죽음을 바라보고 설명하는 작가의 방식은 우리의 '가마슈 경감' 캐릭터처럼 지혜롭고 통찰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삶을 헤쳐 나가지 못하는 그들에게 온갖 변명거리를 제공해주잖아요?" p.205 

"살인에서 희한한 점은 그 행위가 종종 실제 행동보다 몇십 년 앞서서 실행된다는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그 일로 오랜 뒷날 어김없이 살인이 벌어지는 거예요. 나쁜 씨앗이 뿌려진 거지요. 옛날에 해머 영화사에서 제작한 공포 영화들 같습니다. 괴물은 달지지 않아요. 절대 달리지 않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고, 사정도 두지 않고, 노리는 상대에게 다가가지요. 살인은 종종 그런 식으로 일어나요. 아주 멀리서 출발하는 겁니다." p.208 

"그런 일은 너무 자주 일어났다. 죽음은 보통 밤에 찾아온다...(중략)... 그러나 시골에서 죽음이라는 불청객은 낮에 찾아온다...(중략)...죽음은 해뜰 녘과 해 질 녘 숲 속에서 활과 화살을 들고 서 있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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