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빛
전수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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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서나 종교서적을 보면 죽음은 별 것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가고 있으며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산화라는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아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불교에서는 이번 생에서의 인연이 다음 생에서의 인연으로 이어진다며 괜찮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철학자도, 예수님도, 부처님도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아지고,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음식을 먹으면서, 혹은 웃고 이야기하면서 난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 많이 먹고, 웃고, 이야기하면서 상주의 슬픔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거니까 먹어도 되고, 웃어도 되고, 이야기해도 된다고 들어서 어느 순간부터 할 수는 있게 됐지만 여전히 하면서 마음이 불편하고 죄책감도 든다.

 

또 어떤 사회는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지만 난 그냥 평범한 한국사람이니까 죽음은 여전히 생경하고 불편하고 무엇보다 싫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도 싫지만 아는 사람의 죽음은 더 싫고 아는 사람의 죽음도 싫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정말 끔찍하다. 아직 나는 제대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중 가장 끔찍한 것은 바로 자식의 죽음이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든 존재, 바로 나로 인해 탄생한 존재, 그리고 이제는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존재가 바로 자식이므로 부모나 형제, 친구의 죽음과는 어떻게 보면 비교할 수 없는 아픔과 상실감을 안긴다.

 

[오래된 빛] 역시 자식의 죽음을 시작으로 필연적으로 얽힌 사람들을 찾아오는 불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래된 빛]을 읽은 후 보게 된, 자식의 부고를 접하면서 시작되는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는 마치 소설로 읽은 [오래된 빛] 속 창호 가족의 모습을 영화로 다시 한 번 보는 기분이었다.

 

반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밤 늦게 불려간 산 속에서 실족사한 창호의 부모와 형 창수의 삶은 그 이후 그야말로 보통의 삶에서완전히 멀어진 삶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갖고, 학교를 다니지만 그렇게 겨우겨우 생존을 위한 활동만을 이어갈 뿐 이미 세상 속 보통의 삶과는 완벽하게 동떨어져 있다.

 

여름이면 쉽게 바다에 갔다 돌아오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우리는 저 보통의 삶에서 얼마나 멀어졌을까. p.94

 

그들은 죽어버린 창호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절대 바다나 가족 여행 등을 가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준다. 그렇게 스스로를 잠시도 쉬지 않고 벌하는 창호의 아버지는 가해 학생의 아버지에게도 벌을 주려 한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는 창호 아버지와 달리 형 창수는 우연한 기회에 가해 학생을 벌 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가해 학생인 기환은 이미 또 그의 아버지로부터, 슬픔에 젖어버린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벌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혹했던 나머지 끊임없이 일탈하며 자신을 내버린다.

 

그렇게 소리쳐라. 너는 불행했다고. 행복을 바라지 않았다고. 그것이야말로 네 삶의 자부심이라고. p.200

 

이는, 이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 중 누가 외쳐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누군가의 불행한 죽음이 야기한 남은 자들의 불행. ‘오래된 빛이 이미 너무 오래돼 빛으로서의 기능과 의미를 잃은 빛인 것처럼, 살아남은 자들의 삶 역시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껍데기뿐인 삶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겐 가족도 온전한 의미의 가족이 아니고 그래서 그 흔한 가족 여행은 애초에 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죽음으로 인해 삶과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피해자 측만이 아니다. 가해자와 그의 가족 역시 그 죽음으로 인해 운명적으로 불행을 온 몸에 새기고 정상적인 가족의 범주를 벗어나 각자 삶에서 끊임없이 헤매고 또 헤맨다.

 

모두가 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안쓰럽다. 그래서,

 

전수찬 [오래된 빛]의 미덕은 계획이 결코 실행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실은, 실행하지 못했지만 이미 실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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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파탈 - 치명적 매혹과 논란의 미술사
이연식 지음 / 휴먼아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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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어디에서나 말하는 것에 대해 나도 말하려면 웬만큼 잘 하지 않고서야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된다. 하지만 누구도, 어디서도 쉽사리 말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값어치가 생긴다.

 

그 옛날 입에 담는 것은 물론이요, 생각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던 것이 있다. 지금은 그때만큼 심하진 않지만 여전히 공적인 영역에서보다는 사적인 영역에서 더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sex)’이다.

 

입에 쉽게 담기 힘들지만 너무나 본능적이고 일상생활과 밀접해 무시할 수 없다면 그것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아마 그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춘화(春畵)’는 그 역사가 아주 깊다.

 

이연식의 [아트파탈]은 바로 은밀한 성()이 그림을 통해 어떻게 표현됐고 어떻게 유통됐으며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한 책이다.

 

공식적인 영역에서 통용되려면 앞서 확립된 예술의 형식을 따르는 단계가 필요하다. P.192

 

누드라는 상태가 누드화누드사진과 같은 작품의 영역으로 들어오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많은 진통이 있었다. 저자는 그 배경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지만 무엇보다 이라는 가장 사적인 영역공적인 영역으로 불러오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진통으로 해석했다.

 

누드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성이 나체로 미술학도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몸을 가렸는데, 그 이유는 교실 밖에서 교실 안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술학도 앞에 몸을 드러내는 것은 합의된 공적인 영역이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서 그 공간(교실)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 앞에 알몸을 내놓는 것은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사적인 영역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로부터 수많은 화가들이 나체를 그리고자 한 데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 나체, 누드가 가진 아름다움과 마땅히 가려져 있어야 하는 것이어서 더해지는 신비함이나 흥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나체인 사람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특유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것은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미셸 투르니에의 이야기에서 너무 잘 드러나며 그 덕에 미술의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기도 했다.

 

어느 날 열아홉 살 소녀가 문학에 관한 자문을 구하러 투르니에를 찾아왔다. 그녀는 투르니에의 집에 있는 여러 카메라와 사진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투르니에는 그녀의 모습을 찍고 싶다고 했고 그녀는 승낙했다. 그리고 여기서 오해가 생겼다. 촬영을 준비하던 투르니에의 앞에 그녀가 알몸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투르니에는 잠깐 당황했지만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그녀의 어깨 위쪽만을 찍었다.

투르니에는 자신이 찍은 그녀의 사진들을 펼쳐놓고 보다가 나체 초상이라는 영역을 새로이 발견했다. 알몸을 찍지 않았음에도 화면 속 얼굴에는 화면 바깥에 있는 알몸의 광휘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P.32

 

성문화는 말 그대로 문화의 영역이라서 다른 문화의 영역들처럼 과거와 현재가 다르고 또 지역마다 다르다. 태초에 ()’이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없고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던 시절에는 그것이 별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숨겨야 할 것, 은밀한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널리 퍼져나간 후에 이것은 가진 자혹은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은 중국 고대사회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데 주인의 성생활을 하인들이 보조하기도 하고 넓디 넓은 집 안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부자라서 가능한 일이다.

 

반면 일본의 춘화에서는 좁은 장소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그 표현은 더욱 노골적이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도 나체화를 둘러싼 분란은 여느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발생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나체화를 둘러싼 분란을 가라앉히고 결국 나체화를 예술계 안에서 수용하게 한 건 엉뚱한 쪽에서 작용한 힘이었다. 서구에서 고상한 예술 형식으로 취급되는 나체화를 일본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는 일본이 서구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증거이고 서구인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P.187

 

그리고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더욱 보수적인 시각이 나타나는데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과부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교미하는 개를 그려 넣는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일이 많았다. 또 유독 키스하는 그림이 적다는 것도 재미있는 특징이다.

 

중국, 일본의 춘화와 대별되는 한국 춘화의 결정적인 특징은 키스가 없다는 것이다. P.178

 

누드화와 그에 대한 인식은 그 시대, 그 사회의 성문화와도 직결된다. 하지만 아래 저자의 의견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도 똑같이 통용되어야 할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성문화를 건강한 것건강하지 않은 것’, ‘변태적인 것정상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부터가 심각한 패착이다. 이런 구분은 문화와 예술 영역에서 성적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관료와 보수 세력이 가장 쉽게 휘두르던 구실이다. P.176

 

저자는 또한 다음과 같은 케네스 클라크의 관점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진작가들이 누드 사진을 찍을 때 그들의 진짜 목적은, 벌거벗은 육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은 육체는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하는, 예술가의 견해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케네스 클라크, <누드의 미술사>에서 p.194

 

개인적으로는 시대에 따라 단순히 벌거벗은 육체를 재현하는 것또한 진짜 목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의 일은 재현된 육체를 보는 감상자의 몫이다. 그것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든 말이다.

 

이연식의 [아트파탈], 특별히 새로운 시각이나 독창적인 해석 없이 그저 내숭 부리지 않는 것만으로 이렇게 책이 되어 나올 수 있는 게 이 땅의 미술이자 에로티시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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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낸시 휴스턴 지음, 손영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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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성공해서 유명해진 엄마를 둔 아이들은 엄마를 다른 사람들처럼, 팬의 입장이 돼 열렬히 짝사랑하거나 안티 팬이 돼 열렬히 미워하게 되는 것 같다. 페넬로피 라이블리의 [문타이거] 속 클라우디아 햄프턴의 딸이 그랬고, [여섯 살] 속 아이들도 대부분 그들이 여섯 살일 때까지만 해도 유명인 엄마의 열성 팬이지만 그 때 목격한 어떤 사건이나 그 때 시작된 감정의 변화를 계기로 안티 팬이 되고 만다.

 

반대로, 아이를 마치 최고 스타를 모시는 연예인 매니저의 자세로 대하는 엄마는 아이를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로 만들기도 한다. 부모가 연예인인 것도, 아이가 연예인인 것도,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부모가 그저 애태우며 좋아하고 기다려야 하는 연예인 같은 존재라는 것도, 그 누구보다 나에게 진심 어린 사랑과 따끔한 가르침을 함께 줘야 할 부모가 나를 마치 연예인 모시듯 한다는 것도.

 

[여섯 살] 4대에 걸친 여섯 살짜리 아이들의 시각을 통해 내 아빠에게, 아빠의 엄마에게, 내 할머니의 엄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우리 아빠와 아빠의 엄마와 아빠의 할머니는 왜 `그런 아빠` 혹은 `그런 엄마`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하고도 잔인한 책이다.

 

6살짜리 솔은 징그럽고, 솔의 아빠 6살짜리 랜돌은 사랑스럽고, 랜돌의 엄마 6살짜리 세이디는 안쓰럽고, 세이디의 엄마 6살짜리 크리스티나는 더욱 안쓰럽다. 그것이 그들이 타고난 어떠한 기질에 의한 것이라거나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가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던져준 운명 같은 것이라 `안쓰럽다`라는 네 글자로는 도저히 어떻게 안 될 만큼 안쓰럽다.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 어떤 것이고 또 어떻게 결정지어졌느냐는 그들의 이름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태양 은 정말 세상에 단 하나뿐인 태양보다 더 애지중지 그를 위해서만 사는 엄마가 아들에게 준 이름이고, 솔의 아빠 랜돌의 이름은 자기자신에 대한 지나친 강박에 시달리며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의 비극을 연구하는 엄마가 유대인식 이름이 좋다며 지어준 이름이다.

 

랜돌의 엄마 세이디, 세이디 스스로가 이름에서 슬픔을 느끼지만 정작 그녀의 엄마는 그저 느낌이 좋아서 그렇게 지은 것이고, 세이디의 엄마 크리스티나는 후에 클라리사가 되고 에라가 되듯이 그 기원도 분명하지 않고 그 미래도 약속 받지 못하는 그런 불안정한 이름이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뜨겁고, 그토록 놀랍고, 아무리 해도 미진하고, 그처럼 달콤하고, 그처럼 깊고, 그처럼 눈부시게 눈물이 솟아나는 그 느낌,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 R.M. 릴케

 

책은 이렇게 릴케의 문장을 맨 앞 장에 두고 시작한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나는, 과연`그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말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이 책에서는 솔과 랜돌, 세이디와 크리스티나의 `여섯 살` 시절이 아닐까. 낸시 휴스턴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토록 뜨겁고, 놀랍고, 미진하고, 달콤하고, 깊고, 눈부시게 눈물이 솟아나는 느낌이 이 책에, 이들의 여섯 살 시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기억을 더듬을수록 더욱 뜨겁고, 놀랍고, 미진하고, 달콤하고, 깊고, 눈부시게 눈물이 솟아나는 느낌도 더욱 더 더해지니까.

 

1부 솔, 2004

 

아빠는 보통 때는 세이디 할머니와 그저 그런 사이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이 할머니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재빨리 감싸고 나선다. p.64

 

솔은, 사실 그렇게 정이 안 간다. 너무 애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른도 아니고, 한 마디로 징그럽다. 극성스러운 엄마와 일면 쿨해 보이지만 무심한 것에 가까운 아빠 사이에서, 또 전쟁과 폭력이 일상화되고 그것이 고스란히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는 세상에서, 이런 괴물 같은 캐릭터가 탄생하는 것이 크게 이상할 것 없지만, ‘은 확실히 아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캐릭터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아이 같지 않은 아이 이 이야기의 출발점인 것은 낸시 휴스턴의 의도를 오히려 명확히 보여준다 하겠다. 솔을 통해, 가장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솔의 증조할머니 크리스티나의 상처의 근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솔의 모습은 생명의 샘이라는 이름에 반하는 끔찍한 비극을 만들어낸 바로 그 독재자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2부 랜돌, 1982

 

죽은 사람들이 의식을 되찾아 자기가 관에 갇힌 채로 땅속에 묻혀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일은 없겠지만, 롱아일랜드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갔을 때 관 속에 누워 계셨던 할아버지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무섭다. 우리 아빠의 아버지가 정말로, 진짜로 그 관 속에 갇혀 있는데, 다들 그게 아무렇지도 않고,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게 기가 막혔다. p.124

 

그렇게 보면 여자들의 가슴은 정말 묘한 존재다. 어릴 때는 하루에 몇 시간씩 거기 얼굴을 대고 젖을 빨아 먹는데, 점차 거기서 밀려나 결국은 볼 수조차 없게 되는 날이 온다. 하지만 TV나 영화를 보면 여자들은 젖꼭지만 빼고는 가슴을 늘 과시하고 있다. 젖꼭지에 무슨 신성한 비밀이라도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고, 그 안에 젖조차 들어 있지 않을 때가 많다. p.126

 

"저기, 바로 앞을 봐. 왼쪽에 튀어나와 있는 흰 땅 보이지? 그게 레바논이야. 바로 이 순간도 저기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레이건과 베긴이 저 나라에 군대를 보냈지. 그 군대 이름이 평화유지군(peace-keeping forces)인데, 그건 모든 걸 산산조각 내기(keeps pieces) 때문이야." p.155

 

여섯 살 랜돌은, 여섯 살 난 아들을 둔 아빠일 때의 모습과 달리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 모든 네 명의 여섯 살들이 공통적으로 그렇듯 또래에 비해 다소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기원한다. 그리고 솔의 경우처럼 그렇게 징그럽지 않다.

 

하지만 솔과 다른 결핍이 이 때 시작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상한 강박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똘똘 뭉친 엄마로 인해 랜돌은 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랜돌의 아빠는 너무나도 따뜻하고 자상하지만 200%의 아빠도 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다. 가끔 그 자리를 히브리어를 가르쳐주던 선생님이나 엄마 중심적 결정으로 가게 된 하이파에서 만난 소녀 누자가 채우지만 그것도 결국은 할머니가 생명의 샘에서 왔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찰나에 사라지고 만다.

 

어린 랜돌은 그것을 알 리가 없고 그것은 그를 그런 아빠로 만든다. 엄마를 어려워하고, 아내와 아들에게 무심하며 전쟁에 열광하는 보수적인 미국인으로.

 

3부 세이디, 1962

 

원래 그런 식이지만. "시간 맞춰 다니고 그런 시시한 일은 원래 신경 안 쓰는 애잖아." 할아버지가 비꼬는 어조로 말씀하신다. 할머니는 오븐의 온도를 낮춰놓았고, 빵은 약간 눅눅해진 상태다. 정확히 열두 시 반에 할머니가 지었던 미소도 점차 어두워지고 있다. p.212

 

"그럼!" 내가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해서 엄마가 나를 바보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은 따뜻하고 사랑이 넘친다. p.217

 

그런데 이때 피터가 "자 이제 내가 크리시-키스를 받을 차례!" 하면서 엄마를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영화에서처럼 열린 입에 진하게 키스를 한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의 경우는 키스 장면이 나오자마자 할머니가 TV를 꺼버리는데 여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p.221

 

전에 다닌 그 형편없고 속물스러운 사립여학교에서는 전교생이 자가용으로 등교를 하고, 영혼에까지 교복을 입고 다녔다. p.256

 

세이디의 여섯 살 시절은, 여섯 살짜리 아들 랜돌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어떤 강박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학대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점에서는 전혀 다르다.

 

세이디는 스스로 뚱뚱하다고 생각하고 엉덩이의 반점은 더럽다고 여기며 자주 만날 수 없는 엄마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늘 고민하는 불쌍한 아이다. 할아버지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고 할머니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세이디의 우상인 세이디의 엄마를 늘 탐탁지 않아 한다.

 

여섯 살의 어느 날 세이디는 드디어 엄마와 정말 아빠 같은 엄마의 남편 피터와 새 삶을 시작하지만 그 새로운 삶도 엄마의 과거가 엄마를 찾아오면서 금세 끝나버린다. 오히려 엄격한 할머니 밑에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던 때보다 더욱 큰 상처를 입는다.

 

이 때의 상처는 세이디가 엄마가 됐을 때 고스란히 드러난다.

 

4부 크리스티나, 1944~45

 

우리가 사는 도시의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살아 있지만, 드레스덴의 조각품에 나오는 님프나 천사들에 비해 추악해 보인다. 현실 속의 사람들은 분주하고, 근심에 차 있고, 특히 굶주린 데다,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을 수도 없고,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많고, 어떤 경우는 양팔이나 양다리를 모두 잃은 이들도 있다. 팔이나 다리는 물론 다시 자라나지 않는다. p.282

 

할아버지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저 죽이든지 죽든지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식전 기도를 할 때면 아빠와 로타르 오빠를 적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하시는데, 그럴 때 러시아 사람들이 자기들의 아빠나 오빠를 보호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들이 말하는 적은 바로 우리일 거고, 목사님이 교회에서 히틀러를 위해 기도하자고 하실 때, 러시아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할 텐데, 그럴 때 나는 가엾은 하나님이 구름 속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려 하지만 불행히도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p.283

 

이 모든 게 우리가-아니지, 난 폴란드인이니까, 독일이- 전쟁에서 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지금 그냥 패전을 받아들이고 이 모든 걸 끝내면 좋지 않을까? 대체 얼마나 더 져야 전쟁이 끝나는 걸까? p.326

 

사람이 울 때는 생각하는 모든 게 슬픔의 원인이 되는 것 같다. p.340

 

드디어 크리스티나이고 클라리사이고 에라이기도 한 솔의 증조할머니 G.G.의 여섯 살이다. 그녀 스스로는 절대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세이디의 인생을 뒤흔들고, 그로 인해 랜돌의 인생까지 뒤흔들어버린 비밀이 크리스티나의 여섯 살 무렵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 둘씩 드러난다.

 

그것은 모두 생명의 샘이라는 얼핏 아름답고 건강해 보이는 이름의, 추악하고 끔찍한 발상에서 시작됐음이 드러난다. 히틀러라는 인간이 인간이라는 수식을 받을 자격조차 없을 만큼 지독한 괴물이었음을 웬만큼 알고 있었더라도 생명의 샘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그가 얼마나 오만한 냉혈한이었는지, 얼마나 세상과 미래를 자기 뜻대로 주무르려고 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상처 입고 그 상처들이 끈질기게 대물림 되고 있는지, 이렇게 글로 쓰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손이 떨리는지.

 

진심으로 대신해 울어주고 싶은 이 아이들, 그리고 이 아이들의 찬란했어야 할 여섯 살. 책 속에 꼭꼭 눌러 담아 이젠 덮어두고 다시 펼쳐볼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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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김종진 지음 / 효형출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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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8년 즈음이었나? 김덕수 씨가 사물놀이 40주년을 기념해 [미스터 장고]라는 앨범을 낸 적이 있다. 오현란, 신해철, 정원영, 이하늘 등 대중가수들도 함께 참여해 국악을 무척 현대적인 느낌으로 풀어낸 명반인데, 이 음반에서 가장 좋아했던 곡 중 하나가 바로 2번 트랙 <공간>이라는 곡이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공간>이라는 곡을 들으면, 이 ‘공간’이라는 곡이 만들어주는 나만의 ‘공간’ 안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공간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지만, 공통적으로 평화와 신비가 공존하는 듯한 그런 공간이었다.

이렇게 음악을 통한 공간 지각 말고 ‘기억에 의한 공간 지각’은 정말이지 시시때때로, 언제나 갑자기, 불현듯, 더 자주 일어났다. 멀쩡하게 일하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과거 여행지의 한 길모퉁이가 생각난다든지,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음식점에서의 어느 순간이 떠오른다든지, 시끌벅적했던 술집에서의 기억들이 나를 찾아온다든지 하는 경험은 그야말로 일상이 됐을 정도로 나에겐 친숙하다.

기억하기 위해 많은 공간들의 사진을 열심히 찍어뒀지만, 정작 내가 시시때때로 불러내는 공간들은 사진 속에 박제해둔 곳보다는 무의식에 저장해둔 곳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그 때의 마음, 그 때 내 눈이 보고 내 귀가 듣고 내 코가 냄새 맡고 내 피부가 느낀 것들의 총집합일 것이다. 

[공간 공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들이다. 사람에게 ‘공간’은 단지 물리적인 장소나 눈에 보이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감의 짬뽕이 만들어내는 체험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수많은 아름다운 공간들을 소개하고 그 공간에 대한 저자만의 해설을 들려주고 있는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공간 중 하나가 바로 옛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만든 영국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 테이트 모던의 탄생 배경과 저자가 생각하는 테이트 모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공간은 오감의 공감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 더 실감이 났다.

2004년 12월 테이트 모던에 가 본 적이 있다. 내 기억에 이곳은 내리막길이 있는 노오오오옾은 중앙홀 때문에, 건물 전체가 길고 좁고 높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테이트 모던을 다시 보니, 내 기억과 달리 홀 부분만 그런 모양새일 뿐인 게 아닌가.

당시 나는 아주 적은 여비를 가지고, 아주 타이트한 스케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곳을 구경하고 싶은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었다. 혼자 낯선 런던의 거리를 떠돌다가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홀에 들어섰을 때는, 무거운 배낭여행을 돈 주고 맡긴 후 가벼운 몸으로 갤러리를 즐길 것인가, 돈을 아끼기 위해 그냥 좀 더 배낭 무게의 고통을 참을 것인가를 여전히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마음으로 홀 입구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지금껏 그 홀의 모양이 건물 전체의 모양인 것처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지에 나오는 그림도 그냥 표지로만 보았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어떤 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느낌보다는 그냥 책표지 정도로만 인식됐다. 하지만 책 속에서 이 공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읽고 나니, 이 공간이 느껴졌다. 창과 창 사이로 스민 빛이라는 걸 몰랐을 때는 벽에 그려진 무늬로만 보였던 이곳이 지금은 아무리 다시 봐도 움푹 팬 창이 있는 공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곳을 가본 적은 없지만 이곳을 잘 아는 저자의 설명으로 인해 나는 이 공간에 대한 공감각이 생겼다.

더불어 책을 읽고 나니 ‘김종진’이라는 저자도 마치 내가 가 본 하나의 공간처럼 인지가 된다. 테이트 모던에 대한 기억처럼 주관적으로 왜곡된 인상일지는 모르겠지만 내 느끼기에 저자는 지적이고 날카롭지만 따뜻하고 열린 사람인 것 같다.

공간을 바라보는 편협하지 않은 시선도 좋고 책 중간 중간, 그리고 책의 장이 마무리될 때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부연해놓은 지혜로웠던 앞 세대들의 철학을 풀어놓은 부분도 굉장히 좋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는 네 가지 특질이 한데 겹쳐질 때 진정으로 생성된다고 설명한다. 네 가지는 '땅 위에 있음', '하늘 아래에 있음', '신성함을 마주함', '죽음의 운명 속에서 살아감'이다. p.43

이리도 명쾌할 수가! 특히 땅 위에 있음, 하늘 아래에 있음 너무 좋다. 쉽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고. 

완전한 침묵이란 존재할 수 없기에 침묵도 소리라고 말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가 무반향실에서의 체험 이후 쓴 글을 인용한 부분도 역시 좋았다.

"나는 두 개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높은 음이고 다른 하나는 낮은 음이었습니다. 음향 엔지니어에게 물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높은 음은 내 몸속의 신경 시스템이 작동하는 소리이고 낮은 음은 피가 순환하는 소리라고 말이죠." p.195

소리가 전혀 울릴 수 없도록 했음에도 내 몸속의 신경 시스템이 작동하는 높은 음이 들리고, 피가 도는 낮은 음이 들리는 경험. 어떻게 보면 전적으로 인간의 오감과 체험을 통해 인지하는 공간을 주로 이야기하는 것이 굉장히 인간중심적인 사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란 실제로 스스로의 감각 중 일부를 통제해 일부만으로 뭔가를 느낄 수는 없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기도 하다. 

[공간 공감], 결코 건축가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다시 보게 해주고, 새롭게 알게 해주는 것들이 많아 참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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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고 싶은 날 - 스케치북 프로젝트
munge(박상희) 지음 / 예담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우연의 일치일까, 올 초 나는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동네 문방구에서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샀었다.

학교 다닐 때는 나도 누구나처럼 꽤나 그림을 그렸다. 아직 상상력이 마르기 전, 무엇도 귀찮아하지 않았던 그 때,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들은 잘 그린 그림으로 칠판에 다른 친구들 작품과 나란히 놓이기도 했고, 교내 예술제에 걸리기도 했고, 그 중 하나는 지금 내 방 구석 액자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랬기에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만 있으면, 다시 무엇이든 슥삭슥삭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든지 결심하기 쉬운 연초이기도 해서 자신만만하게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사서 친구들 앞에서 선언도 했다.

“난 이제 그림을 그릴 거야.”

‘그림 그리고 싶은 날’을 선물 받은 후, 그 때 샀던 스케치북 생각이 났다. 맨 첫 장은 그리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미완인 채로 두었고, 두 번째 장 역시 좀 더 나은 그림을 그리려 발버둥 치다가 여전히 미완인 채로 남아 있다.

‘그림 그리고 싶은 날’의 저자도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 이 책을 시작했듯이, 나 역시 반성으로 이 책을 보기(‘읽다’라는 단어보다 ‘보다’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그림 자료가 풍부하다) 시작했다.

예쁜 빨간색 양장 표지에, 전문가로서는 초보 수준일 수많은 방식의 스케치들과 함께 간간이 저자의 생각을 글로 적어놔 우선 보기에 쉽고 편했다. 책을 잡고 책장을 휘리릭 넘겨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책을 다 보고 나서는 오히려 찝찝해졌다. 지금까지 본 그림을 흉내 내려다 실패해 미완인 채 덮어둔 스케치북 속 내 그림들이 생각났고,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것이 그림이라고 하니까, 이런 책까지 읽었으니까, 더더욱 그 스케치북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부담을 느끼게 된 것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열어본 스케치북에는 종이 아래쪽 구석에 소심하게 그려놓은, 어디서 본 건 많아서 앤디 워홀 발바닥 때만도 못한 유치하고 어설픈 흉내가 떡하니, 어디 잡혀가지도 않고 그대로 있어서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친구들이 그림은 잘 그리고 있냐고, 어디 한 번 보자고 안 해줘서 고마울 정도다.

어른이 된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는 비록 강제성을 띄긴 하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미술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스케치북 한 장도 채워 넣지 못해 낑낑대고 있다니 말이다. 

틈틈이 다 읽은 ‘그림 그리고 싶은 날’의 책장을 휘리릭 넘겨보면서, 버려둔 스케치북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러다보면 나도 정말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까지 버리고 싶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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