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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의 백인 신부
짐 퍼커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이건 좀 다른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입에 담는 건 물론이고 머릿속에 잠깐 떠올리기도 싫은 범죄가 일어났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모든 범죄자들이 자신이 정말 사랑하고, 또 자신을 정말 사랑해주는 연인이 있었어도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러니까 세상 모든 사람에게 '짝'이 있다면 범죄는 확연히 줄어들지 않을까. 나라에서 죄수 교화와 법치 관련해 쓰는 돈을 인연 찾아주기 프로그램에 쓰면 오히려 더 좋은 효과가 나오지 않을까.
친구들에게 얘기해봤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래서, 그 후론 정말 말았지만, 그리고 '천명의 백인 신부' 얘기와 따지고보면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지만, 또 한 번 '천명의 백인 신부' 리뷰를 쓰면서 이 이야기를 해본다. '리틀 울프'라는 이름의 인디언 족장의 제안이 어떻게 보면 나와 뿌리를 같이 하는 발상에서 비롯된 거라는 억지를 부려보려고.
세상의 완전한 평화라는 것은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자신의 짝을 찾은 상태에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정말 이게 맞다면, 세상의 완전한 평화라는 것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비극적이기 짝이 없는 생각. 하다못해 삼삼오오 모인 친구들 무리에서도 늘 누군가 짝을 만나면 누군가는 혼자이기 때문에.
어쨌든 리틀 울프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고, 어떻게 보면 순진하기 짝이 없고, 어떻게 보면 대담한 제안을 했다. 인디언과 백인들 사이의 융화와 평화를 위해서 천 명의 백인 신부를 보내달라고. 그러면 자기네들은 소중하기 짝이 없는 말 천 마리를 보내주겠다고. 역사에서는 당연히 이 제안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한 소설가의 머릿속에서는 이 대담하고 말도 안 되는 제안이 받아들여진다.
'실미도'에 투입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벼랑 끝에 있었던 것처럼, '천명의 백인 신부' 계획에 투입되는 천명에 턱도 없이 모자라는 숫자의 백인 여성들도 모두 각자 삶의 벼랑 끝에 있었기 때문에,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에 스스로 동참하고, 그래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메이라는 당차고 솔직하고 뜨거운 여성을 주축으로, 백인 사회에서의 삶 대신, 그들이 '미개인'이라고 부르는 인디언 부족 사회에서의 삶을 선택한 다양한 여자들과 또 그녀들의 남편, 또 다른 아내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 그들은 끊임없이 낯선 상황을 맞닥뜨리고, 겁 내고, 헤쳐가면서 조금씩 인디언 사회에 동화돼 간다. 서로 조금씩 다른 과정을 거쳐 서로 조금씩 다른 속도로.
하지만 이런 현상을 단순히 '인디언 부족 사회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고만 보기에는 뭔가 아쉽다. 각자 속해 있던 환경에서, 각자의 사연과 저마다의 이유로 배제됐던 그녀들이, 별다른 편견 없이 자신들을 바라봐주는 곳에서, '자기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인디언들의 눈에 그녀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들과 다른 백인 사회에서 온 여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특징을 잡아 이름을 지어주지만 그런 작명법에는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이 반영되지 않고, 그저 그들이 가장 먼저, 혹은 가장 자주 목격한 장면을 문자 그대로 설명하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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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들은 갈색 피부에 건강한 활기가 넘치고 아주 사랑스럽다. 나이보다 성숙하고 건강해 보이며, 같은 또래 백인 아이들보다 품행이 바르다. 아이들은 너무 수줍어서 말도 제대로 못 걸고, 내가 사탕을 주면 엄숙하게 받아들고 까치처럼 깍깍거리며 달아난다. p.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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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사냥단 참여가 허락되지 않지만, 샤이엔 족은 특별한 재능을 알아보는 데는 아무 편견이 없고, 피미는 사냥 솜씨를 확실히 증명했다. p.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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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는 그녀의 일기장에 인디언 부족 사회의 미덕을 이렇게 명료하게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진짜 미덕은 백인사회의 문화를 무조건 우월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인디언 부족 사회의 장점을 바라보면서도, 또한 그네들의 '미개함' 또한 메이의 시선을 통해 냉정하게 주시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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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난 문제는 동서고금을 초월하는 것 같아. 우리 사회처럼 미개인 사회에도 부자와 빈자가 있어. p.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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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디언들의 승전의식과 아직 낯선 술에 취해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벌이는 충격적인 행패들에 대해 충격을 받고, 가감 없이 비판도 한다.
분명히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소설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생생한 묘사와 살아있는 캐릭터들 또한 이 소설이 크나큰 미덕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왠지 가라앉는 기분을 피할 수가 없었는데, 이 이야기는 어떻게 해도 절대 해피엔드가 될 수 없겠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이것이 희극으로 끝맺어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책 읽는 속도를 자꾸 더디게 만들었다.
이미 우리는 인디언들의 역사와 그들의 아픔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항상 또렷한 의식으로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는 길이 편치 않다는 것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실제 인물은 아니지만, 충분히 실제 인물이었을 수 있는, '천명의 백인 신부' 속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자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