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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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여덟시 반경. 오른쪽 창으로 햇살이 든다.-13쪽

같은 장소. 열두시 사십오분경. 이제 오른쪽 창들을 통해 햇볕이 들지 않는다.-61쪽

안개가 얼마나 자욱한지 길이 안 보이는군. 세상 사람들이 전부 지나가도 모르겠어.-122쪽

난 수녀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생각은 까맣게 잊었지. 그의 아내가 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어.-126쪽

(앞을 응시하며)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동네 다른 집들도요. 지척을 구분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들렸어요.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죠.-160쪽

늘 취해 있어라. 다른 건 상관없다. 그것만이 문제이다. 그대의 어깨를 눌러 땅바닥에 짓이기는 시간의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쉼 없이 취하라.
무엇에 취하냐고? 술에든, 시에든, 미덕에든, 그대 마음대로. 그저 취해 있어라.
그러다 이따금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가 풀밭에서나, 그대 방의 적막한 고독 속에서 깨어나 취기가 반쯤 혹은 싹 가셨거든 바람에게나, 물결에게나, 별에게나, 새에게나, 시계에게나, 그 무엇이든 날아가거나, 탄식하거나, 흔들리거나, 노래하거나, 말하는 것에게 물어보라. 지금 무엇을 할 시간인지 그러면 바람은, 물결은, 별은, 새는, 시계는 대답하리라. '취할 시간이다! 취하라, 시간의 고통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거든 쉼 없이 취하라! 술에든, 시에든, 미덕에든, 그대 원하는 것에!

- 보들레르 <취하라>-162쪽

그래요, 어머닌 위에서 과거 속을 헤매는 유령이 되어서 돌아다니고, 우린 여기 앉아서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도 잔뜩 귀를 세우고 추녀 끝에서 안개 떨어지는 소리까지 듣고 있죠.-189쪽

그러니 가세, 나의 노래들이여. 그녀는 듣지 못할 것이니.-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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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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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냄새 같은 것도 흘리지 않았고, 한 겹의 주름도 더는 그 자리에 남긴 것이 없었다.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았다. 어쩔 수 없이, 머물렀다.

[대니 드비토] 중-49쪽

가혹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뭐가 가혹해.
예를 들어, 네가 죽어서 나한테 붙는다고 해도 나는 모를 거 아냐.
모를까.
모르지 않을까.
사랑으로, 알아차려봐.
농담이 아니라, 너는 나를 보는데 내가 너를 볼 수 없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쓸쓸하겠지.
그거 봐. 쓸쓸하다느니, 죽어서도 그런 걸 느껴야 한다면 가혹한 게 맞잖아.

[대니 드비토] 중-57쪽

애매한 것을 외우다보면 외로운 것도 애매해지지 않을까. 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애매한 것을 멍하게 외우며 떨어지는 모습이란 아름답디 않다.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거나 봐줄 누군가도 없으므로 아름답지 않은 채로 떨어진다.

[낙하하다] 중-66쪽

몸이고 보니 괴로우면 울었다. 영물이라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운다고 사람들이 이 몸을 쫓았으나 말하자면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압도적으로 이상하게 우는 존재란 인간이라고 이 몸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쫓겨다니는 것이 이상하고 분했다. 밤이고 낮이고 인간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묘씨생] 중-124쪽

파씨는 어제저녁에 추웠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추울 예정입니다, 아저씨도 춥습니까, 거긴 춥습니까, 세계는 춥습니까,

[파씨의 입문] 중-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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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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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농법에 따르면 모든 씨앗에는 탄생 순간 별들의 위치가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나중에 싹이 나면 농작물들은 자연스레 특정한 별과 직접 연결돼 그 에너지로 성장한다는 것이었다.......(중략)......아저씨만 아는 우주의 비밀 중에는 사과는 목성의 기운으로, 자두는 토성의 기운으로 자란다는 사실도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어쩐지 사과는 목성을, 자두는 토성을 닮은 것도 같았다. 자두의 테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저씨는 죽은 땅을 살리는 증폭제라는 걸 만들었다. 예컨대 톱풀꽃 증폭제는 6월 20일경 꽃을 채취해 사슴 방광 속에 넣어 처마 밑에 걸어놓았다가 9월에 땅속에 묻어 다시 육 개월을 둔 뒤......-141쪽

"치료법은 아니야. 병이라고 꼭 치료해야만 하는 건 아니야. 병을 달고 산다는 말도 있잖아. 병도 생명의 일부야."-143쪽

"그게 바로 이해라는 것이지. 이해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164쪽

"결여된 존재가 아니라 온전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 너는 이미 온전해. 우린 완벽하기 때문에 여기 살아 있는 거야. 생명이란 원래 온전한 것이니까."-184쪽

이따금 출판사에 들렀다가 돌아갈 때, 형이 나를 살짝 안을 때가 있는데, 그때는 전기 정도가 아니라 꽃향기를 내뿜는 폭풍에 맞서 혼자 버티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일단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버티기는 하지만, 왜 그런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 폭풍에 맞서 버텨야만 하는지 이해되지도 않고, 설사 이해한다고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심정이랄까.-185쪽

중학교 1학년 때 과학선생님을 좋아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 선생님이었다. 멀리서 스커트를 입고 걷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뒷줄의 아이들이 스커트 아래쪽으로 거울을 밀어넣어 그 속을 들여다보려다가 들킨 뒤로 선생님은 바지만 입고 출근했다. 나는 그 아이들이 원망스러웠다.-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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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8월
판매중지


인간이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존재다.-69쪽

거문고 갑 속에 간직하여 두었더니
이따금 줄 끊어지는 소리 들려오누나-125쪽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겨울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해 겨울, 우리는 겨울이라는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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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구판절판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은 대부분 스캔들에 휩싸인 영화배우가 서둘러 차에 올라타면서 진실은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들을 향해 내젓는 단호한 손짓 이상의 의미를 띠지 못한다.-19쪽

때로는 나 몰래 꽃이 필까봐. 때로는 나 몰래 꽃이 질까봐. 제아무리 긴급한 편지였다고 하더라도 봄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내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지.-67쪽

'동서남북의 모든 나라들이 소발률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겼다. 소발률에서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와 아랍과 인도와 중국과 티베트의 문화가 혼재했다.' 모든 나라에게 소발률 너머는 이방의 땅이었다. 거기가 바로 지금 내가 가는 곳이다. 모든 게 혼재하는 곳, 수령과 백성을 버려두고 왕 혼자서 도망간 곳.-113쪽

느닷없이 터져난 눈물은 마음을 한결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울음을 터뜨리기 전까지만 해도 일어난 일을 부인하던 마음이 울음을 계기로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119쪽

하지만 그가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아무리 해도,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총동원해도'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삶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124쪽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짐작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짐작은 대부분의 경우 옳지 않았고, 그 때문에 서로를 오해했다.-141쪽

'강은 지는 꽃을 데려가는데 기러기 소리 외롭다'-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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