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중고매장 부천점 내부소개 (방문 후기를 남겨주세요)
중고책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새 책을 사서 보고 그 책은 제가 계속 보관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누울 자리가 없이 책을 쌓아두어야 해도 읽은 책을 버리거나 팔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중고서점은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서 읽었거나 다 못 읽었거나 그냥 가지고 있던 책들이 모여있는 곳이 중고서점입니다. 그래서 갓 찍어낸 새 책들만 모여있는 서점과는 또 다른 냄새가 납니다. 오래된 종이의 냄새, 그리고 그 책이 있던 장소나 그 책을 갖고 있던 사람의 냄새가 섞여 특유의 냄새를 뿜는 것이죠. 시뻘건 음식 양념을 묻히거나 커피 등의 액체류를 쏟아서 우그러진 책을 제가 사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이 모여있는 정취에는 분명 인간적인 면모가 있습니다. 새 책을 파는 서점에는 책 냄새가 더 진하고 중고책을 파는 서점에는 사람 냄새가 더 진하달까요.
직장이 있는 부천에도 중고서점이 생겼습니다. 부천역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한 모퉁이에 중고서점이 있습니다. 부천역의 개성이기도 한 복잡함이나 난잡함과는 확연히 분위기가 다른 입구라 서점에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새로운 장소 앞을 지나간다면 한 번쯤 돌아볼 것 같습니다.
중고서점을 다녀온 지는 꽤 됐습니다. 한 달 남짓 된 것 같습니다. 그 날 그 시각까지 알라딘 중고서점 부천점에 들어온 책은 1,799권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종이의 원료가 되는 나무로 된 입구와 마치 요술을 부려줄 것 같은 램프가 그려진 입구 앞에서 순간 맘이 설렜습니다.
서점 내부의 모습은 다른 중고서점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벽면에는 유명한 작가들의 얼굴과 그들의 대표작에서 발췌한 명문장들이 씌어 있습니다. 비록 진짜 얼굴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서점에 입성하기 전에 뭔가 설렘과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달까요. 멋진 예술가들은 그저 자신의 얼굴만으로도 아우라를 풍기는 법이니까요.
종로에 생긴 알라딘 중고서점에 처음 갔을 때 신선하다는 인상을 줬던 이 안내도 그대로입니다. 분명히 못하게 하는 것들이 많은 '금지 조항'들임에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금지나 부정의 느낌보다는 부드러운 권유와 유머를 느끼게 합니다. '애완동물 입장 금지', '음식 반입 금지'와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서점에서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을 못 하게 만듭니다.
계단 위에서 보는 전경은 이렇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분들은 다 똑같은 마음이겠지만 그저 보기만 해도 흐뭇합니다. 다 내 책이 아니고 아마 죽기 전에 이 책들을 다 읽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의 서재에 이 책들이 다 꽂히는 기분이랄까요. 평일 오후에 갔는데도 생각보다 사람도 많았습니다.
매장안내도입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도 참 예쁩니다.
엘리베이터 입구 위에도 문인들의 인자한 미소나 매서운 눈초리와 함께 그들의 명문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장정일이 쓴 '애서광 체크리스트' 역시 알라딘 중고서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문장입니다. 기쁘게도 거의 모든 항목에 해당되는 저는 장정일과 알라딘 중고서점의 인증을 받은 애서광입니다. 이 중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책에 낙서를 하지 못한다'인데, 저는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책이라는 것이 참 희한하게도 이렇게 진열된 책을 구경하기만 해도 책을 읽은 것 같고 책을 사기만 해도 읽은 것 같은데 정작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을 읽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아주 오래전 사서 읽은 책을 또 산 적도 있습니다. 사놓고 안 읽은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읽은 책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책을 읽으면서 좋은 구절이나 인상적인 부분에는 연필로 밑줄을 치고 책을 읽기 시작한 날짜와 다 읽은 날짜를 적어넣기도 합니다. 요즘은 읽은 책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도 열심히 활용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책에 일정부분 영역 표시를 하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내용도 잊고, 문장도 잊고, 심지어 내가 읽었는지조차 잊겠지만 다시 펼쳐보면 그 때 그 기억이 차르르르 넘어가는 책장 사이사이로 배어나올 테니까요.
알라딘에서 이벤트용도로 제작하는 다양한 제품들도 이렇게 진열이 돼 있습니다. 분명, 상술입니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많이 사야 주기 때문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효과적인 상술입니다. 아직 읽을 책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품들이 탐 나서 책을 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후회한 경우는 크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사고 싶었던 책을 사는 거고 사두면 결국은 읽게 되고 또 만들어지는 제품들도 책이 아니지만 책 향기를 더하는 데 충실한 제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혹 때문에 지갑이 가볍거나 읽어야 할 책이 너무 쌓여있을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가보던 알라딘에 오랫동안 아예 로그인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저기 두 번째 칸에 보이는 빨간 색 머그에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
간 김에 필요한 책을 검색해봤습니다. 사려고 하는 책의 위치가 적힌 종이를 은행번호표처럼 뽑을 수 있지만 왠지 종이가 아깝게 느껴져서 스마트폰으로 위치를 찍었습니다. 이 날은 손홍규 작가의 책을 많이 찾아봤습니다. 손홍규 선생님에게 글 쓰기를 배우러 가는 첫 날이었거든요.
보이는 이 곳은 유아 도서가 있는 구간입니다. 계단에서는 아이가 내려오고 계단 왼쪽에는 유모차가 놓여있습니다. 유모차에는 장바구니도 걸려 있습니다. 식구들 먹일 것을 사고 마음의 양식도 잊지 않은 어머니가 참으로 멋집니다.
여기는 계산대입니다.
중고서점에도 베스트셀러는 있습니다.
역시 유명한 작가의 베스트셀링 제품은 중고서점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들도 금세 다른 주인을 찾을 것 같습니다.
중고서점에는 책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씨디도 살 수 있습니다.
알라딘 중고서점의 매력포인트 중 하나는 바로 책을 담아주는 비닐봉지입니다. 벽이나 천장에 그려진 작가의 얼굴들이 책을 담는 봉지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기쁘게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기형도 시인의 얼굴에 새로 산 3권의 책을 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이후 2번 더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사왔는데 두 번 다 기형도 시인의 봉지였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얼굴을 모아 한 쪽 벽을 장식해보고픈 욕심이 생겼습니다.
세 권의 책을 산 가격이 얼마일까요? 피고름으로 작품을 쓰셨을 작가님들에게는 왠지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새 책을 사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신 이렇게 사서 읽은 책은 다시 중고서점에 내놓지 않을게요. 다른 책들은 절판이 아닌 이상 새 책으로 사서 볼게요. 손홍규 선생님은 작가 생활을 하면서 가장 씁쓸한 경험 중 하나가 사인을 해서 선물한 책이 중고서점에서 발견되는 일이라고 했는데요, 이렇게 구매한 책 중에는 다행히 그런 책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산 책 중에는 선물하는 사람이 직접 책 앞 장에 길고 짧게 편지를 썼거나 실제로 작가의 사인이 돼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편지가 씌어 있거나 저자 사인을 받은 책을 어떠한 사연으로 중고서점에 내다 파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혹시나 이 글을 보는 분들은 그러지 않으셨으면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을 표현해봅니다.
기형도 시인의 얼굴에서 세 권을 책을 꺼내 방바닥에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역시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꺼내놓고 사진을 찍기만 해도 배가 부른 것을 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