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낸시 휴스턴 지음, 손영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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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성공해서 유명해진 엄마를 둔 아이들은 엄마를 다른 사람들처럼, 팬의 입장이 돼 열렬히 짝사랑하거나 안티 팬이 돼 열렬히 미워하게 되는 것 같다. 페넬로피 라이블리의 [문타이거] 속 클라우디아 햄프턴의 딸이 그랬고, [여섯 살] 속 아이들도 대부분 그들이 여섯 살일 때까지만 해도 유명인 엄마의 열성 팬이지만 그 때 목격한 어떤 사건이나 그 때 시작된 감정의 변화를 계기로 안티 팬이 되고 만다.

 

반대로, 아이를 마치 최고 스타를 모시는 연예인 매니저의 자세로 대하는 엄마는 아이를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로 만들기도 한다. 부모가 연예인인 것도, 아이가 연예인인 것도,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부모가 그저 애태우며 좋아하고 기다려야 하는 연예인 같은 존재라는 것도, 그 누구보다 나에게 진심 어린 사랑과 따끔한 가르침을 함께 줘야 할 부모가 나를 마치 연예인 모시듯 한다는 것도.

 

[여섯 살] 4대에 걸친 여섯 살짜리 아이들의 시각을 통해 내 아빠에게, 아빠의 엄마에게, 내 할머니의 엄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우리 아빠와 아빠의 엄마와 아빠의 할머니는 왜 `그런 아빠` 혹은 `그런 엄마`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하고도 잔인한 책이다.

 

6살짜리 솔은 징그럽고, 솔의 아빠 6살짜리 랜돌은 사랑스럽고, 랜돌의 엄마 6살짜리 세이디는 안쓰럽고, 세이디의 엄마 6살짜리 크리스티나는 더욱 안쓰럽다. 그것이 그들이 타고난 어떠한 기질에 의한 것이라거나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가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던져준 운명 같은 것이라 `안쓰럽다`라는 네 글자로는 도저히 어떻게 안 될 만큼 안쓰럽다.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 어떤 것이고 또 어떻게 결정지어졌느냐는 그들의 이름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태양 은 정말 세상에 단 하나뿐인 태양보다 더 애지중지 그를 위해서만 사는 엄마가 아들에게 준 이름이고, 솔의 아빠 랜돌의 이름은 자기자신에 대한 지나친 강박에 시달리며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의 비극을 연구하는 엄마가 유대인식 이름이 좋다며 지어준 이름이다.

 

랜돌의 엄마 세이디, 세이디 스스로가 이름에서 슬픔을 느끼지만 정작 그녀의 엄마는 그저 느낌이 좋아서 그렇게 지은 것이고, 세이디의 엄마 크리스티나는 후에 클라리사가 되고 에라가 되듯이 그 기원도 분명하지 않고 그 미래도 약속 받지 못하는 그런 불안정한 이름이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뜨겁고, 그토록 놀랍고, 아무리 해도 미진하고, 그처럼 달콤하고, 그처럼 깊고, 그처럼 눈부시게 눈물이 솟아나는 그 느낌,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 R.M. 릴케

 

책은 이렇게 릴케의 문장을 맨 앞 장에 두고 시작한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나는, 과연`그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말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이 책에서는 솔과 랜돌, 세이디와 크리스티나의 `여섯 살` 시절이 아닐까. 낸시 휴스턴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토록 뜨겁고, 놀랍고, 미진하고, 달콤하고, 깊고, 눈부시게 눈물이 솟아나는 느낌이 이 책에, 이들의 여섯 살 시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기억을 더듬을수록 더욱 뜨겁고, 놀랍고, 미진하고, 달콤하고, 깊고, 눈부시게 눈물이 솟아나는 느낌도 더욱 더 더해지니까.

 

1부 솔, 2004

 

아빠는 보통 때는 세이디 할머니와 그저 그런 사이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이 할머니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재빨리 감싸고 나선다. p.64

 

솔은, 사실 그렇게 정이 안 간다. 너무 애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른도 아니고, 한 마디로 징그럽다. 극성스러운 엄마와 일면 쿨해 보이지만 무심한 것에 가까운 아빠 사이에서, 또 전쟁과 폭력이 일상화되고 그것이 고스란히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는 세상에서, 이런 괴물 같은 캐릭터가 탄생하는 것이 크게 이상할 것 없지만, ‘은 확실히 아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캐릭터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아이 같지 않은 아이 이 이야기의 출발점인 것은 낸시 휴스턴의 의도를 오히려 명확히 보여준다 하겠다. 솔을 통해, 가장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솔의 증조할머니 크리스티나의 상처의 근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솔의 모습은 생명의 샘이라는 이름에 반하는 끔찍한 비극을 만들어낸 바로 그 독재자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2부 랜돌, 1982

 

죽은 사람들이 의식을 되찾아 자기가 관에 갇힌 채로 땅속에 묻혀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일은 없겠지만, 롱아일랜드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갔을 때 관 속에 누워 계셨던 할아버지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무섭다. 우리 아빠의 아버지가 정말로, 진짜로 그 관 속에 갇혀 있는데, 다들 그게 아무렇지도 않고,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게 기가 막혔다. p.124

 

그렇게 보면 여자들의 가슴은 정말 묘한 존재다. 어릴 때는 하루에 몇 시간씩 거기 얼굴을 대고 젖을 빨아 먹는데, 점차 거기서 밀려나 결국은 볼 수조차 없게 되는 날이 온다. 하지만 TV나 영화를 보면 여자들은 젖꼭지만 빼고는 가슴을 늘 과시하고 있다. 젖꼭지에 무슨 신성한 비밀이라도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고, 그 안에 젖조차 들어 있지 않을 때가 많다. p.126

 

"저기, 바로 앞을 봐. 왼쪽에 튀어나와 있는 흰 땅 보이지? 그게 레바논이야. 바로 이 순간도 저기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레이건과 베긴이 저 나라에 군대를 보냈지. 그 군대 이름이 평화유지군(peace-keeping forces)인데, 그건 모든 걸 산산조각 내기(keeps pieces) 때문이야." p.155

 

여섯 살 랜돌은, 여섯 살 난 아들을 둔 아빠일 때의 모습과 달리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 모든 네 명의 여섯 살들이 공통적으로 그렇듯 또래에 비해 다소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기원한다. 그리고 솔의 경우처럼 그렇게 징그럽지 않다.

 

하지만 솔과 다른 결핍이 이 때 시작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상한 강박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똘똘 뭉친 엄마로 인해 랜돌은 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랜돌의 아빠는 너무나도 따뜻하고 자상하지만 200%의 아빠도 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다. 가끔 그 자리를 히브리어를 가르쳐주던 선생님이나 엄마 중심적 결정으로 가게 된 하이파에서 만난 소녀 누자가 채우지만 그것도 결국은 할머니가 생명의 샘에서 왔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찰나에 사라지고 만다.

 

어린 랜돌은 그것을 알 리가 없고 그것은 그를 그런 아빠로 만든다. 엄마를 어려워하고, 아내와 아들에게 무심하며 전쟁에 열광하는 보수적인 미국인으로.

 

3부 세이디, 1962

 

원래 그런 식이지만. "시간 맞춰 다니고 그런 시시한 일은 원래 신경 안 쓰는 애잖아." 할아버지가 비꼬는 어조로 말씀하신다. 할머니는 오븐의 온도를 낮춰놓았고, 빵은 약간 눅눅해진 상태다. 정확히 열두 시 반에 할머니가 지었던 미소도 점차 어두워지고 있다. p.212

 

"그럼!" 내가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해서 엄마가 나를 바보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은 따뜻하고 사랑이 넘친다. p.217

 

그런데 이때 피터가 "자 이제 내가 크리시-키스를 받을 차례!" 하면서 엄마를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영화에서처럼 열린 입에 진하게 키스를 한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의 경우는 키스 장면이 나오자마자 할머니가 TV를 꺼버리는데 여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p.221

 

전에 다닌 그 형편없고 속물스러운 사립여학교에서는 전교생이 자가용으로 등교를 하고, 영혼에까지 교복을 입고 다녔다. p.256

 

세이디의 여섯 살 시절은, 여섯 살짜리 아들 랜돌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어떤 강박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학대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점에서는 전혀 다르다.

 

세이디는 스스로 뚱뚱하다고 생각하고 엉덩이의 반점은 더럽다고 여기며 자주 만날 수 없는 엄마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늘 고민하는 불쌍한 아이다. 할아버지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고 할머니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세이디의 우상인 세이디의 엄마를 늘 탐탁지 않아 한다.

 

여섯 살의 어느 날 세이디는 드디어 엄마와 정말 아빠 같은 엄마의 남편 피터와 새 삶을 시작하지만 그 새로운 삶도 엄마의 과거가 엄마를 찾아오면서 금세 끝나버린다. 오히려 엄격한 할머니 밑에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던 때보다 더욱 큰 상처를 입는다.

 

이 때의 상처는 세이디가 엄마가 됐을 때 고스란히 드러난다.

 

4부 크리스티나, 1944~45

 

우리가 사는 도시의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살아 있지만, 드레스덴의 조각품에 나오는 님프나 천사들에 비해 추악해 보인다. 현실 속의 사람들은 분주하고, 근심에 차 있고, 특히 굶주린 데다,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을 수도 없고,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많고, 어떤 경우는 양팔이나 양다리를 모두 잃은 이들도 있다. 팔이나 다리는 물론 다시 자라나지 않는다. p.282

 

할아버지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저 죽이든지 죽든지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식전 기도를 할 때면 아빠와 로타르 오빠를 적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하시는데, 그럴 때 러시아 사람들이 자기들의 아빠나 오빠를 보호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들이 말하는 적은 바로 우리일 거고, 목사님이 교회에서 히틀러를 위해 기도하자고 하실 때, 러시아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할 텐데, 그럴 때 나는 가엾은 하나님이 구름 속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려 하지만 불행히도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p.283

 

이 모든 게 우리가-아니지, 난 폴란드인이니까, 독일이- 전쟁에서 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지금 그냥 패전을 받아들이고 이 모든 걸 끝내면 좋지 않을까? 대체 얼마나 더 져야 전쟁이 끝나는 걸까? p.326

 

사람이 울 때는 생각하는 모든 게 슬픔의 원인이 되는 것 같다. p.340

 

드디어 크리스티나이고 클라리사이고 에라이기도 한 솔의 증조할머니 G.G.의 여섯 살이다. 그녀 스스로는 절대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세이디의 인생을 뒤흔들고, 그로 인해 랜돌의 인생까지 뒤흔들어버린 비밀이 크리스티나의 여섯 살 무렵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 둘씩 드러난다.

 

그것은 모두 생명의 샘이라는 얼핏 아름답고 건강해 보이는 이름의, 추악하고 끔찍한 발상에서 시작됐음이 드러난다. 히틀러라는 인간이 인간이라는 수식을 받을 자격조차 없을 만큼 지독한 괴물이었음을 웬만큼 알고 있었더라도 생명의 샘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그가 얼마나 오만한 냉혈한이었는지, 얼마나 세상과 미래를 자기 뜻대로 주무르려고 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상처 입고 그 상처들이 끈질기게 대물림 되고 있는지, 이렇게 글로 쓰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손이 떨리는지.

 

진심으로 대신해 울어주고 싶은 이 아이들, 그리고 이 아이들의 찬란했어야 할 여섯 살. 책 속에 꼭꼭 눌러 담아 이젠 덮어두고 다시 펼쳐볼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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