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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1 : 독립의 여명 1763~1770 - 혁명은 경제에서 시작된다 ㅣ 미국인 이야기 1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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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북아메리카 대륙 땅에서 프랑스 군과 맞붙었던 영국은 인디언과 연합 작전을 펼친 프랑스 군에 무참하게 패배하며 피츠버그 인근에서 프랑스 장군에게 치욕의 무릎을 꿇었다.
지중해 미노르카 해협 근처에서도 강력한 프랑스 해군에게 밀려났던 영국은 1756년 부터 7년 동안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무참하게 패배 했다.
1757년 영국은 자신들의 영토 였던 독일 하노버를 프랑스에 넘겨주고 인도 캘커타 마저 프랑스군에 함락 당한다.
인도 전체를 손 안에 넣을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이 된 프랑스 군에 대항하기 위해 1757년 영국 조지 2세 왕은 모든 장군들을 현직에서 물러 나게 하고 총리 윌리엄 피트에게 잃어버린 영국 땅을 되찾아오라는 명을 내린다.
해군 육군 장성들의 인사권을 손에 쥐게 된 총리 윌리엄 피트는 해군 지휘관으로 손더스와 보스카웬을 임명 하고 아메리카 지역을 관할할 육군 지휘관에는 제프리 애머스트와 제임스 울프를 임명한다.
이제 영국의 육군과 해군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올 지원금만 있다면 캐나다 부터 멕시코까지 영국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1758년 7월 보스카웬 제독과 애머스트, 울프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 육해군 합동군은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루이스버그 요새를 탈취해서 캐나다 온타리오와 킹스턴 요새를 차지해버린다.
때마침 인도에서 영국은 프랑스 군을 격파했고 유럽 대륙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 군대는 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의 포위 군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진격하고 있었다.
7년 동안 영국은 2000여명의 군대와 1000명의 이로쿼이 인디언 민병대와 연합해서 순차적으로 프랑스 군의 병력과 보급 조달을 원천 봉쇄하는 전략으로 설탕이 많이 나는 섬, 곡물이 많이 생산 되는 땅, 향신료 같은 식재료가 풍부한 땅, 담배 농장이 있는 땅들을 차례 차례 차지해 나간다.
브리튼이 처음 하늘의 명령으로
푸른 바다에서 솟아 올랐을 때
이것은 그 땅의 선언이었고,
수호 천사들이 그 가락을 노래 불렀다.
지배하라 브리타니아여, 바다를 지배하라.
브리튼 사람들은 결코 노예가 되지 않으리라.
1760년 영국 왕실 신하들은 조지 3세가 스물 두 살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영국 애국가 <룰 브라타니아Rule Britania>를 목청 껏 부르며 섬나라를 넘어 드넓은 해양과 대륙을 차지한 자신들의 나라, 브리튼을 찬양했다.
반면, 유럽 대륙은 강해진 국력과 힘을 가진 영국을 야만 국가보다 조금 진보 한 국가 정도로 폄하하며 문화가 없는 영국 국민이 그린 그림이나 작품들을 수집하거나 사들이지 않았다.
유럽 귀족들은 영국 땅으로 자손들을 유학 보내지 않았고 영국 귀족들이 주관하는 문화 살롱에 드나들지 않았다.
영국의 육해군에 밀려난 프랑스는 여전히 유럽 대륙에서 문화 제국으로 군림하며 이들이 퍼트린 자유주의와 계몽 철학의 사상과 문학,음악,건축, 예술은 여전히 전 유럽 국가의 표준이 였다.
한 세기 전 영국 국민의 손에 한 명의 왕이 참수 당했고 또 다른 왕은 추방 당했다.
유럽 귀족들의 시선에서 영국이라는 존재는 불안정한 족속들로 맥주와 생선을 즐기며 대의명분에 급급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일 뿐이였지만 거대한 교회라는 이익 집단의 이권 다툼에서 일찌감치 벗어난 영국은 유럽 전 지역과 맞붙어도 될 정도로 강력한 국력과 군대를 앞세워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오랜 세월 요동치고 분열되었던 정치 사회 속에 흉폭한 범죄와 심각한 도시 빈민들이 넘쳐 났던 영국 땅은 조지 3세가 재위 하면서 각종 사회 시설과 도로와 하수구 정비,재정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말끔한 도시 국가의 모습으로 변모해나간다.아메리카,서 인도 제도 아시아, 지중해 변방 지대에서 거둬들인 막대한 자원들은 영국이라는 나라를 빠른 속도로 산업 도시로 성장 시켜나간다.
교통, 통신, 도로는 운송 산업 제조업의 진보를 이끌며 유럽 대륙과 비교 할 수 없는 산업적, 상업적으로 앞 서 나간다,
1760년 스물 두 살 나이에 왕위에 오른 조지 3세는 하노버 왕실에서 태어나 영국 땅을 지배했던 아버지와 달리 영국 땅에서 태어나 스코틀랜드 출신의 고문관에게 교육을 받았다.
조지 3세는 재위 12년 동안 국가와 민족의 이념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과 이해 관계에 사로 잡힌 토리당과 휘그당의 파당 정치를 개혁 하고 싶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대륙과 해양에서 프랑스 세력을 격퇴 시킨 영국은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막대한 자원들을 주식과 펀드, 금으로 바꿔서 1694년에 세운 잉글랜드 은행과 다른 금융기관에 차곡 차곡 쌓아둔다.
대륙과 해양에 걸쳐 뻗어있는 식민지 영토를 관리 하기 위해 영국은 세금청, 물품 세청, 소금청, 재정 위원회, 해군청, 재무부등으로 정부 기관을 세부 화 시켜서 각각의 식민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 품목과 조세 품목을 세심하게 관리 하기 시작한다.
18세기 영국은 돈의 관리, 세금 전쟁을 시작하며 광활한 식민지를 통치 하기 위해 거대한 군함 건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다.
비좁은 영국,브리튼 섬을 벗어나 광활한 식민지, 영국의 자녀이자 신하인 아메리카 대륙을 통치 하기 위해 영국 의회는 무려 13개 조항의 세금 징수 법안을 통과 시킨다.
강력한 세금 징수를 자신들의 목숨과도 맞바꿔야 하는 총독들이 미국 땅에 도착하기 직전,이미 자치 행정과 의회를 갖추고 있었던 미국은 앞서 주둔한 프랑스를 비롯해 곧 들이 닥칠 영국의 행정 체제와 정치 사상에 어떤 영향을 받지 않았다.
언어와 문화 종교적 유대감은 물론 신분 조차 서로 구애 받지 않았기에 미국을 이끌어가고 있던 각 위원장들은 어떤 국가로 부터 통제나 제약에 대항하는 법안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1764년 부터 1783년에 들불 처럼 일어나 바다 건너 영국까지 위협 했던 미국 혁명의 불길은 단 한번도 통합 된 적이 없었던 미국인들의 무시 무시한 집결 정신을 보여주었다.
13개 식민지 구역으로 나눠진 채 각기 다른 관습과 제도 문화를 갖고 있었던 미국인들은 농산물, 상업,무역 종사자들의 활발한 교류와 교역으로 무섭게 결집하며 단합했다.
언제 어디서 급습해 올지 모르는 외부 세력에 대항하며 삶을 일궈 나갔던 미국인들은 가난, 탄압, 박해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저항 했다.
이들의 후손들은 계급 사회인 영국 중상류층들 보다 더 가난했지만 척박한 땅을 일구며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인구 성장과 함께 눈부신 기술 산업 성장을 발전 시켜 나간다.
10년 만에 본국인 영국의 대 지주들 보다 수십 배의 수익과 막대한 부를 축적한 대지주들이 탄생한 미국 땅, 이들의 자손들은 정치,외교 법조계로 진출하며 제조업과 제철,산업 시설과 해외 무역에 주요 자리를 차지해나간다.
수세기에 걸쳐 부를 축적한 영국 귀족들과 달리 십 여년 만에 이들의 부를 넘어선 미국의 부유한 시민들은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나갔고 영국은 이들이 축적한 부에 대한 세금을 추징 하기 위해 영국 본국에서 임명한 총리들을 파견 시킨다.
영국의 대의 제도로 무장한 파견된 총독들은 13개 지역 중에 7개 지역을 통치 했지만 당파 정치 보다 자신들이 세운 법안과 규칙을 중심으로 각 주를 관할하는 의원들은 실질적으로 영국 본국에서 파견 된 총독이 제시하는 통치를 따르지 않았다.
종교에서도 유럽 대륙과 영국에서 자유로웠던 미국은 17세기에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회중 교회주의자들과 영국 국교도, 퀘이커 교도, 침례교들의 분파로 나눠져서 분리파와 정규파로 세력 타툼을 벌이다가 18세기 중반이후 전 세계에서 밀려 들어온 다양한 이민자들의 각기 다른 언어와 종교색으로 분열과 대립 보다는 서로 다른 교리를 인정해 나가며 화합과 통합으로 결집해 나간다.
특히 영국 본국이 식민지 통치 명분으로 세금 징수와 정치 사회 지배 구조에 대한 간섭을 해나갈때 각계 종교 지도자들은 인구 증가와 맞물려서 성장하는 경제 성장 속에서 단 한 명의 신자를 데려 오기 위해 반 권위적이면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며 미덕, 검소, 근면,소명 의식의 도덕적 사상을 외부 세력에 의해 강탈 당하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미국 혁명을 이끈 세대인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제도를 정비하며 기준을 세워나갔다.
1760년 이후 영국의 거센 간섭과 엄청난 세금 징수에 불 처럼 대항 했고 횃불을 들고 봉기 하며 자신들의 땅에서 징수해버린 막대한 자원을 스스로 불태우며 저항한 미국 시민의 저항과 혁명은 강력한 힘으로 내부적 통합을 해나갔다.
영국에 대항 하는 혁명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 식민지의 안정적인 통치와 합법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 주둔 시킨 상비군의 심장을 저격했다.
아메리카 시민들은 상인들을 중심으로 영국 본토인들에 대항해 다양한 방법으로 의회 청원을 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해 나갔다.
미국 각 지역의 법안을 주도 하는 의원들은 미국땅에 단 한 푼의 세금을 내지 않은 채 미국땅에서 생산하는 자원에 온갖 세금을 거둬들이는 영국인들보다 미국 땅에서 태어나 삶을 일궈온 이들이 내는 세금이 더 소중했다.
미국인들은 자신의 영토를 관할하고 통치 하는 영국인들이 부과하는 이중 과세와 과도한 세금 추징 법에서 벗어날 방도를 모색했고 영국 통치자들은 추징 해야 할 품목과 대상 자원을 늘려나가며 한 푼이라도 돈을 더 거둬나갈 궁리를 한다.
영국에서 파견된 세금 징수원들은 아직 수확하지 않고 가공하지 않은 품목의 세액을 책정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거둬들일 과세 방안을 세워 나간다.
이런 인지세 법안을 각주의 상인들과 대 지주들은 절대로 받아 들이지 않고 반대 청원을 미 하원에 제출하고 영국 본토에서 파견 된 세금 징수원들의 탄핵 탄원서도 청원한다.
1765년 영국 의회가 미국 식민지의 세금 추징 법안과 인지 세법안을 통과시키기 직전 이미 영국땅을 밟은 벤저민 프링클린과 보수주의자 자레드 잉거솔은 미국인들의 세금은 미국 시민 스스로 과세해야 한다며 영국 의회의 의원들에게 13개 식민지주에 과세 법안을 철회 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영국의 식민지 통치 과세 법안을 반대하는 의원은 단 한 명으로 프랑스 인디언 연합군 전쟁에 참전 했던 아이작 베러 뿐이였다.
국왕이 승인만 하면 영국의 강력한 식민지 세금 징수 법안은 미국땅에 뿌려지게 된다.
자신들이 심어 놓고 생존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미국 땅에서 거둬둘인 세법 1차-2차 법안이 통과 되고 1765년 3월 영국 국왕의 최종 승인이 나자 5월 말 미국 버지니아 하원 의원들은 빠른 속도로 영국의회는 미국인들에게 과세할 권한이 없다는 결의안을 통과 시킨다.
영국 본토에서는 단 한 곳 버지니아 주에서 결의한 법안은 단 몇 주 후면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버지니아 주에서 시작 된 법안은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며 각 주로 퍼져 나가서 미국 전체 116명의 의원 중에 단 39명의 의원을 제외하고 찬성 표를 던진다.
영국이 미국 땅에서 생산된 담배와 설탕에게 징수 한 세금은 미국 땅의 극심한 가문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버지니아 의회에서 결의한 법안으로 세금 징수를 거부한다.
한 발 물러선 영국은 나머지 주에서 생산한 담배와 설탕에 모조리 세금을 징수하고
미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피와 땀이 스며 있는 담배와 설탕을 지키기 위해 교구당과 상인들이 법정으로 몰려가 영국에서 파견된 관리인들의 탄핵을 청원한다.
이는 6개 주에서 시작되어 7개 8개 주로 퍼져나가 영국은 겨우 400파운드의 세금만 손에 쥐며 미국 의원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이제 법안 보다 행동 그리고 말과 글을 내세운 상인들과 인쇄공, 철도 경영자들은 1769년 광장에 모여 폭동을 기획한다. 버지니아와 메사추세츠에서 시작된 세금 징수 반대 운동은 인지세 징수원들과 분배관들의 숨통을 조이는 협박으로 이어진다.
1770년 영국 하원은 일단 징수 법안을 철회 하며 미국인들의 거센 저항에 한 발자국 물러섰지만 조세 저항으로 시작된 운동은 식민지 해방을 울부짖게 만든다.
1770년 10월 단 두명 만 제외하고 세금 징수원들은 목숨만 건진 채 영국 본토로 도망친다. 뒤이어 신변의 불안을 느낀 뉴저지주 총독이 사임해버리자 뉴햄프셔주 세금징수원들이 보스턴에서 영국 땅으로 향하는 배를 타기 위해 도망친다.
자원과 물품에 세금 징수가 힘들어진 영국은 이제 토지세 법안을 통해 세금징수에 착수하고 각종 제조업과 토지 사업주들은 주 의회에서 징수해가는 세금보다 더 많은 액수를 징수한 영국에 분노 한다,
영국에서 파견된 토지 인지 분배관들은 자신들의 외모와 똑같이 생긴 인형들이 폭도들에 의해 광장에서 짓밟히고 불태워지고 자신들이 거주하는 주택들은 잿더미가 되자 엄청난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유럽 땅에 노란 별을 단 유대계들 처럼 영국인 토지 인지 분배관들의 이름과 주소는 각 주마다 노란색 글씨로 적혀진다.
막대한 영토를 통치하고 관할 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던 영국은 미국의 거센 저항에 세금징수 법안을 폐지 할지 고수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흘러 들어오는 돈의 문제는 영국 의원들의 입지를 위협 시켰고 미국 땅에서 건너오지 않은 설탕은 영국인들의 식단과 영양 문제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설탕 품귀 현상은 곧 영국 상인들의 재정 압박과 파산을 불러 일으켰고 식민지 땅 자원의 세금 징수 없이 영국 경제는 암울했다.
영국 의회는 미국 땅 없이는 영국이라는 국가 체제도 온전하게 유지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통치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이제 의원들은 무역의 감소로 인해 늘어난 부채에 허덕이며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영국의 지주 계층과 귀족들의 아우성까지 감내해야 했다.
어떤 방법으로도 법안 철폐를 지연 시키기 위해 시간을 끌어 갔던 영국은 1770년 12월 20일 의회 해산 직접 철폐 법안을 입안 시키고 다음 해 3월 초 입안 시킨 철폐 법안에서 [모든 사안에 대해]라는 문구 삭제를 압도적인 다수표 획득으로 3월 4일 하원에서 최종 통과된다.
3월 17일 국왕의 승인을 받은 토지 세금 징수 인지세법,이렇게 한 발자국 물러선 영국에게 미국인들은 어떤 반응을 했을까?
세금의 부담에서 면제를 주장하고 철폐를 주장 했던 미국인들은 영국 의회의 권한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영국 의회의 식민지 과세권 권한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결의안과 탄원서를 상,하원 의원에게 제출한다.
영국의 인지세법 철회 이후 미국 정치는 대 변동을 일으키며 권력 구도에 엄청난 변혁을 일으키고 새로운 세입 법안을 도입한 영국은 미국에서 생산된 납, 유리, 차등 기타 물품에 대한 관세 수입을 한 해 4만 파운드를 기준으로 내세운다.
어떤 물품과 생산 제품에 매겨지는 세금이라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매년 새로운 품목 마다 세금이 징수 될 것이라고 확신한 미국인들은 보스턴의 상인과 기술자들부터 세금 징수 거부를 시작한다.
납과 유리에 매겨진 세금은 옷과 거주지 같은 자유과 재산에게 매겨지는 세금과 같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지고 변호사,의사들이 선봉대에 나서자 벽돌공,하수 처리공,짐꾼,굴뚝 청소부 같은 하층민들까지 의회로 몰려가 항의하게 된다.
보스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방위군은 보스턴 시민들에게 거주지를 빼앗기고 광장이나 거리에 텐트를 치며 노숙을 하게 된다.
이들이 허름한 창고를 빌리려고 하자 창고 주인들은 막대한 돈을 요구하고 다른 주에 주둔 하고 있던 영국군들도 미국 시민들에 의해 거리로 쫒겨 나게 된다.
미국 시민들은 영국을 향해 탄원서나,탄핵안, 항의 문서,인형 화형식, 거주 지역의 화재등이 아닌 '자유로운 시민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징수법' 이라며 횃불을 든다.
시민들의 표로 의원직을 유지 하는 의원들은 선거에서 승리 하기 위해 애국심을 독려 하고 미국 시민들은 영국 땅에서 건너온 모든 물품에 대한 수입 거부 운동을 전 지역으로 확대 시켜 나간다.
영국은 어떤 유능한 관리나 총독을 파견 시켜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영토를 통치 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에 봉착 했다.
세금 징수 법안 만으로 온전하게 세금을 징수 하기 힘든 입항과 통관 절차와 제도는 각각의 구역을 담당하는 대리 징수관 -승선 세관원-기타 하급 관리들까지 엄청난 인력을 필요로 했고 광활한 영토에 자잘한 핏줄 처럼 뻗어 있는 항구와 항만은 강과 시내 냇가 포구를 오고 가는 곳의 장소를 기록하기 힘들 정도였다.
포구들은 지역의 토착민들에 의해 수시로 바꿔졌고 세관 관리가 지정된 항구로 달려 가면 온갖 자원을 가득 실은 배들은 여러 포구를 오고 가며 파견된 세관 관리인들이 알지 못하는 냇가와 강가로 우회 해서 담배와 해군 군수품 농산품들을 싣고 유유히 사라졌다.
1770년 영국에서 파견된 한 세금 관리 징수원이 본국에 보낸 문서에 이런 글을 기록했다.
'보스턴 항은 북쪽으로는 린에서 시작해 메사추세츠만에서 케이프코드를 따라 서쪽과 남쪽으로 나아가며 케이프 코드를 돌아서는 다트머스 항구를 돌아 낸터켓 섬, 마사스비너드 섬, 엘리자베스 섬까지 뻗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항구는 단 세 곳 뿐으로 현지 주민들과 토착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지도 상에도 표시 되지 않은 항구가 몇개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로 부터 광활한 미국 땅을 뺏었던 영국은 아메리카 전 대륙을 상세히 알지 못해서 어떤 항구와 항로에서 어떤 방법으로 밀수와 탈세가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오랜 세월 프랑스인들에게 단련 되었던 보스턴 시민들은 스코틀랜드와 네덜란드 항로를 경유해서 밀수한 프랑스 산 와인들을 영국에 신고 하지 않은 채 다른 국가로 수출을 했고 다른 밀수 품들도 다양한 경로와 방법으로 이루어 졌다.
18세기 미국 땅에서 발생하고 있었던 막대한 밀수와 탈세로 통용 되었던 상업이 엄청난 규모로 늘어나자 영국은 급기야 항구마다 주둔할 군인들을 파견한다,
영국 특유의 붉은 제복을 입은 파견 군인들은 너무 나도 쉽게 미국 시민들의 눈에 띄고 이들은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았고 굶주림에 허덕일 정도로 식량 배급 통로가 서서히 차단된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 닥친 겨울, 영국 파견 군인들은 하나 씩 주둔지에서 이탈해서 탈영하고 수색대원과 탈영병들이 뒤엉킨 도시에서 약탈과 강간, 폭행, 절도 같은 극악한 범죄가 들끓게 된다.
선량한 시민들의 자유가 영국군에 의해 짓밟히게 되자 법원과 경찰들은 시민들의 편에 서고 총독은 이제 보스턴 민중의 손에 넘어가 퇴각 명령이라는 압박을 받게 된다.
급기야 영국 군 주둔 군은 열 한 살 소년을 엽총으로 쏴 죽이고 무고한 소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장례 행렬에 수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 들면서 민간인과 주둔 군 사이에 폭력의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 폭력의 중심 세력들은 보스턴의 하층민 노동자들로 주둔 군인들이 비번 일 때 민간 시민들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영국 군 규정으로 인해 이들의 생계를 위협 하고 있었다.
가로등이 없었던 1770년대 보스턴의 밤은 날마다 주둔 군인과 하층민 노동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
민중의 희생은 다른 지역의 분노를 일으켰고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영국인들에 의해 학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1765년 부터 과도한 세금 추징으로 인해 생겨난 영국과 미국 식민지의 갈등은 영국이라는 국가의 정치 제제가 미국 땅에 자리 잡게 될 때 어떤 자유도 무참하게 짓밟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었다.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은 미국의 모든 시민의 자유를 파괴하고 있었다.
영국의 법과 정치 질서가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제도라고 믿고 있었던 미국 정치인들은 더 이상 영국의 왕을 자신들의 군주, 통치자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민중의 자유를 무참하게 짓밟는 것에 대한 분노는 독립을 향한 혁명의 불씨로 활 활 타올라 대영제국이 구축한 세계 질서를 뒤 흔들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