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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샐리 루니 지음, 김희용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평점 :
2018년 5월,영미 문학권을 뒤 흔들며 '스냅챕 세대의 셀린저'라는 영미 문학 평단의 찬사와 수 많은 수식어를 쏟아낸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은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100만 부 이상 판매된 초대형 베스트셀러다.

나는 이 책 <노멀 피플>을 2019년 6월, 런던 히드로 공항 서점에서 구입했다.
표지 속 두 남녀가 깡통 속에 들어 가 있는 모습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책을 펼쳤고 그 날밤 투숙 중인 호텔에서 밤을 지새우게 만들었다.
특별하지 않은 배경과 상황, 별난 구석이 없는 인물들, 그리 큰 갈등이나 클라이막스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이 책에 빨려 들어갔던 건 91년생 작가의 엄청난 필력 때문이였다.
불안한 청춘의 시기를 겪는 메리엔과 코넬이 서로를 향해 지칠 줄 모르는 끌림과 갈등, 사소한 부딪침이 주된 스토리 이지만 이 책을 두 번, 세 번 읽다 보면 가족과 형제에게 당한 폭력과 폭언의 상처가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학적인 욕구와 욕망의 충돌 속에서 육체적인 사랑이 어떻게 유지 되는지 절제 된 대화와 묘사로 펼쳐 보이는 기술은 가히 예술적이다.
'같은 터의 토양을 공유하며 서로의 주변에서 성장하고 공간을 만들기 위해 몸을 뒤틀다 예상치 못한 모습이 되어버린 두 그루의 나무들 같다.'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 중에서
거대한 사회 네트워크 속에서 인간은 개개인으로 존재 하지 않고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비로소 한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 해 나간다.
부와 특권의 촘촘한 네트워크 망에서 발버둥 치며 계층의 사다리로 올라가려는 청춘의 처절한 모습은 타인의 도움과 보살핌 없이 불가능하다는 현실까지 보여준 작가 샐리 루니는 2015년의 데뷔작 <친구들과의 대화>를 쓰기 전 부터 출판계에서 눈여겨 보았던 인물이였다.

아일랜드의 최고 명문 대학인 트리니티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샐리 루니는 유럽 연합에서 주최하는 대학생 토론 대회에서 매년 우승하며 정치, 문학, 사회 분야에서 최고의 영예상을 받았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더블린 리뷰>에 다양한 에세이를 기고 하며 뛰어난 필력을 인정받아 출판 에이전트들이 그녀에게 명함을 뿌리고 갈 정도였다.
밀레니얼 세대의 문학적 현상이자 미래의 고전이라는 극찬을 받은 <노멀 피플>은 출간한 해에 맨 부커상 후보작에 오르며 <타임스>가 선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계 인사 100명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영국 BBC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2018년 그녀의 세번째 작품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Beautiful World, Where Are You>는 대형 광고 간판과 팝업 스토어 형식의 북스토어에 오로지 이 책으로만 가득 채워질 정도로 그녀의 인기는 하나의 문학적 현상을 넘어 서서 문학계 셀럽이 되었다.
2022년 3월, 런던에서 Beautiful World, Where Are You를 구입하고 앞 부분 몇 페이지를 읽다 덮어 버렸다.
도저히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에도 감정을 이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였다.

그렇게 몇 달을 방치하다 영국 가디언지에 그녀가 기고한 리뷰 나탈리 긴츠부르크의 <All Our Yesterdays>에 기사를 읽고 나서 다시 책을 펼쳤다.
이 책<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Beautiful World, Where Are You>의 첫 장엔 나탈리 긴츠부르크의 에세이에서 발췌한 문장이 쓰여있다.

나는 보통 어떤 글을 쓸 때 그것이 아주 중요하고
또 나 스스로가 뛰어난 작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겠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시시한 그것도 아주 시시한 작가라는 인식도 자리하고 있다.
맹세코 나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나의 소명' 중에서
1916년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명망 있는 학자 집안에서 성장한 나탈리 긴츠부르그는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토리노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대 가족이자 친족 구성원의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열 살 때 부터 글을 썼던 문학 천재 긴츠부르그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는 동안에도 아이들과 피난 생활 중에도 시와 소설, 에세이를 썼고 무명 작가들의 책을 영어와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출간 해 주며 생의 마지막까지 세상의 모든 희망을 문학에서 찾았다.
밀레니얼 세대의 문학 스타로 드높은 칭송을 받고 있는 샐리 루니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칭 마르크스 주의자'라며 정치적 소견을 밝혔다.
그녀가 '자칭'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큰 목소리를 내며 여러 단체와 함께 시위를 하거나 어떤 주장을 펼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앞서 발표한 두 작품에서 계급과 권력, 자본주의의 병폐를 보여 준다는 평단의 평가를 받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좌파 정치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책으로만 마르크스 사상을 학습한 게으른 좌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학 시절 내내 다양한 주제를 놓고 벌이는 토론 대회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쓰기 실력을 보여 주었던 샐리 루니의 집안은 노동 계층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더블린의 경제 불황이 시작 되기 전에 국영 전기 회사에 근무했다.
경제 불황으로 공기업을 사기업으로 전환하는 사회,경제 개혁 정책으로 실업자가 된 그녀의 부모는 일용직 노동자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런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고 성장한 샐리 루니는 서구 유럽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장미빛도 기대하지도 않고 자신이 쓴 작품에서 조차도 현 사회에 대한 새로운 모습이나 제도와 개혁에 대한 주장도 펼치지 않는다.
오로지 천 유로 세대의 고단한 현실이나 계층 사다리에 올라 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보다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담은 지극히 사소하면서 평범한 남녀간의 사랑 세계에 집중하고 있다.
[한 여자가 호텔 바에 앉아 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깔끔하고 단정했다.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긴 상태였다. 그녀는 메시지 접속 창이 떠 있는 휴대전화 화면을 힐끗 보고 나서 , 또 다시 문을 돌아 보았다.]
-샐리 루니의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중에서
한 남자가 문으로 들어 왔다.
그는 얄팍한 얼굴에 몸은 호리호리하고 머리 색은 짙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손님들의 얼굴을 살핀 뒤,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창가에 있던 여자는 그를 알아보았지만, 그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주의를 끌려고 애써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같은 또래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올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었다.
24살에 발표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신예 작가 엘리스 켈리허는 전 유럽에서 쏟아지는 문학 행사 참가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 차기작 집필은 커녕 현재 신경 쇠약 중세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고향 더블린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한적한 해안 마을에 집을 빌려 혼자 살고 있다.
데이팅 앱을 통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은 펠릭스는 물류 창고 노동일을 하고 있고 사망한 엄마가 남긴 집을 놓고 형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마침내 약속 장소에서 만난 앨리스는 자신의 집을 구경 시켜 주겠다며 펠릭스를 초대 한다.
[친애하는 아일린에게, 네가 매 마지막 이메일에 답장해주기를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기 때문에, 사실은 (한 번 짐작해봐!) 네 답장을 받기도 전에 너에게 새 이메일을 쓰는 중이야.
우리가 이메일을 주고받는 게 내가 삶을 버티고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내 존재(그러지 않으면 거의 쓸모 없거나 심지어 완전히 쓸모없는)의 일부를 급속도로 퇴보하는 이 행성에서 보존하는 나름의 방식이라는 걸 너는 알아야만 해.
나 한테 이메일도 쓰지 않으면서 대체 뭐하고 있는거니?
나는 네가 더블린에서 내고 있는 집세를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 지금 거기 집세가 파리보다 더 비싼 거 아니?]
친구의 집세까지 걱정하는 앨리스가 이메일을 보내는 상대는 문예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프리랜서 작가이자 편집일을 하고 있는 아일린 라이든이라는 인물로 이 두 사람은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의 동창생이자 절친한 친구 사이다.
박봉에 시달리는 아일린은 현실의 비참함을 어린 시절의 친구이자 의회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사이먼과 가끔은 진한 사랑을 나눌 정도로 사랑의 감정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상태다.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네 명의 인물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장면이 바뀔 때 마다 이메일 형식의 1인칭 시점이 서로 맞물려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30대를 갓 넘어선 네 명의 남녀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이 작품의 스토리 중심은 서로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끌림이다.
육체적인 사랑으로 엮여진 네 명의 인물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암흑 같은 절망보다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라는 외침처럼 희망적이다.
책 출간의 성공으로 엄마의 담보 대출까지 한번에 갚아 준 앨리스는 매달 통장에 만 단위 숫자가 찍힐 정도로 돈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일용직 노동자 펠릭스에게 '돈 정말 많다'라는 말을 내뱉을 정도로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주면서도 차기작 구성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성경 책을 펼쳐 놓고 셰익스피어의 가부장적인 언어 유희를 실랄하게 비판한다.
앨리스는 이메일을 통해 절친한 친구 아일린에게 유럽 문학계의 지나친 자본주의 행태를 비판하며 현대 소설은 이미 그 생명력을 다했다며 비관적인 생각을 토로 하며 오염된 공기와 물, 질병의 대 유행, 기후 변화의 위기, 부패한 정치 집단을 비난 하면서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앨리스는 기원전 1400년 경에 세워졌던 크레타 문명을 발굴한 에번스과 문명의 언어를 해독하는데 매달렸던 문헌학자와 고고학자들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고리가 이어지지 않고 끊어지고 멈춰버렸다며 현 자본주의 시대의 종말을 주장한다.
반면 자신의 생체 시계에 대한 걱정, 즉 출산 능력이 앞으로 10년 정도 유지 될 수 있을지, 이런 사회에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을지 걱정하며 친구 아일린에게 '너는 애를 잘 낳는 외모'라며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칭찬의 말을 한다.
친구 아일린은 여섯 살 연하의 여자친구랑 연애 중인 친구 사이먼이 자신과 잠자리를 하고 나서 성당에서 고해 기도를 올리는 모습에 실망하면서도 그의 사랑을 갈구 한다.
1년에 2만 유로 정도 벌고 시골 대 저택에 혼자 거주 하며 우울감에 빠져 있는 앨리스는 현 사회를 피해자 집단(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 유색인종, 여자들)과 억압자 집단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 남자들, 백인종)으로 구분하고 이들이 서로 착취하는 방법을 차단 시킬 해결책을 친구 아일린에게 토로 하면서도 펠릭스의 데이트 신청을 기다린다.
[나는 20세기를 하나의 긴 질문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답이 틀렸어. 우리는 세상이 끝났을 때 태어난 불운한 아기들이 아닐까? 그 후로는 이 행성에도 우리에게도 기회가 없었어. 아니, 그것은 단지 하나의 문명, 즉 우리의 문명의 끝일 뿐이고, 미래의 언젠가 또 하나의 문명이 그 자리를 대신할지 모르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둠이 깃들기 전 불을 밝힌 마지막 방에 서서 무언가의 증인이 되고 있는 셈이야.]
세상의 끝, 자본주의 한계의 끝자락에서 밀레니얼 세대인 30대 앨리스, 아일린, 사이먼은 모두 고학력자들로 천 유로 세대들보다 비참한 삶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부모 세대처럼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는 삶은 꿈꾸기 힘들 만큼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살 곳을 찾아 정착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작품 출간이 대박 나서 돈을 쌓아 놓고 있는 앨리스와 달리 펠릭스는 사망한 엄마가 물려 준 방 한 칸과 주방 한 칸 짜리 집을 놓고 형과 다툼을 벌이며 냉동 물류 창고에서 포장 업무를 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펠릭스의 삶에 할애한 페이지가 몇 장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날 아침 펠릭스가 일하는 동안 앨리스는 그녀의 출판 대리인과 전화 통화를 하며, 그녀가 받은 문학 축제들과 대학들의 초청에 대해 의논했다. 이 통화가 이뤄지는 동안 펠릭스는 휴대용 스캐너를 이용해 다양한 제품 상자들을 식별하며 라벨이 부착된 팰릿형 카트에 분류해 넣었고, 그러면 곧이어 다른 작업자들이 그 카트를 밀며 수거해갔다. 이 작업자들 중 몇몇은 상자들을 수거하러 왔을 때 펠릭스에게 반갑게 인사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영국에서 불굴의 의지로 작가가 된 데버라 리비는 밀레니얼 시대 사회에서 가장 주목 해야 할 것들은 돈-계급-차별 이라며 자신의 모든 작품이 이 세가지 키워드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했다.
데버라 리비는 첫 남편과 이혼 후 아이들의 생계를 떠 맡으면서 사회가 어떤 식으로 모성을 강요하며 여성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차별과 학대 착취를 하도록 오랜 세월 관습과 문화, 언어로 지배를 가했는지 여러 작품과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작가 데버라 리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로지 개인적인 성취에서 이뤄낸 이익만이 삶의 풍요를 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반면 91년생의 샐리 루니는 대학 시절부터 쌓아 온 필력으로 단 두 편의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외모와 치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 욕망이라는 요소 없이 즐길 수 있는 순수하면서 심미적인 것을 인식할 때 아름다움은 비로소 분출 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이 세상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예술 작품 마네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베르조를 그린 초상화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작품, 음악, 아름다운 경치에 보여지는 아름다움이라 생각 하기에 밀레니얼 세대에게 칭송 받는 계급인 상업성을 두루 갖추고 SNS의 팔로우 추종자들을 이끌고 있는 셀럽들이 즐겨 먹고 마시고 듣고 읽는 것 보다 자신의 눈과 귀를 끌어 당기는 작품에서 삶의 의지와 욕망을 발견한다.
[인류는 신을 향해 나아가고 신의 본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런 속성들을 갖추고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써. 따라서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든 우리를 신성함에 대한 사색으로 인도하지. 비평가로서 우리가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는 것에 대해 궤변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거야. 우리는 단지 인간일 뿐이고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 할 수는 없는 법이나까.]

집안 대대로 귀족 가문에서 성장한 톨스토이는 자신이 집필 중인 작품에서 가난과 고통, 질병 그리고 형살이에 처한 삶의 모습을 묘사 할 때 밑바닥 삶을 체험했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참조 했다.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가난을 글로 읽었던 톨스토이와 달리 사형장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도스토옙스키는 모든 인간의 고통과 번뇌의 시작은 '돈'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세상은 아름다움이 구원할 것이라 믿었다.

“나를 파멸 하게 하는 건 돈이 아니라 삶의 이 모든 불안, 이 모든 쑥덕거림, 냉소, 농지거리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중에서
소설 ‘가난한 사람들’에서 빠듯한 월급으로 입에 겨우 풀칠만 하는 하급관리 마카르는 연인에게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건 돈이 아닌 타인의 조롱과 비웃음이라고 고백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 했을 당시 1846년대 러시아 사회는 모두가 ‘절대적 빈곤’만 강조했다.
하지만 지옥의 끝까지 추락해 본 경험을 가졌던 자신의 작품 <가난한 사람들>의 빈궁한 하급 관리 마카르의 모습에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고 좌절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투영 시켜 이미 러시아 사회 깊숙이 청년 빈곤층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불행은 전염병입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전염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옛날에 검소하고 조용하게 사셨을 때는 겪어 보지도 못했을 불행을 이제 제가 당신께 가져다 드리고 말았군요.]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불행도 가난도 전염병처럼 대를 이어 물려 받는다.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는 이제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고 누구든 열심히 성실하게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으로 시험에 합격해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의 연쇄 순환 고리가 사라져 버렸다.
[착한 사람은 황무지에서 살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저절로 굴러 온 행복을 누리는 이따위 일들은 도대체 왜 생기는 것이랍니까! 어째서 어떤 사람은 어머니 뱃 속에서부터 운명의 새가 행운을 점지 해주고, 왜 어떤 사람은 양육원에서 태어난단 말입니까! ]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1840년대의 삶과 2023년 현 시대의 인간의 삶이 크게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분명 인류는 진화해 왔고 현재의 삶은 분명 지난 세기 보다 월등히 좋아졌고 나아졌지만 서로를 향한 울분과 증오심, 분노의 크기는 이전 세기보다 더 커졌고 사회적 위치와 삶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기회의 평등이 사라져 버렸다.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 이전하고 같을 수밖에 없느냐고요?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들을 옷을 뒤집어 보이듯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도스토옙스키
샐리 루니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속의 인물의 사고와 행동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며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서간체 형식과 3인칭 시점이 뒤섞인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의 두 인물, 앨리스와 아일린은 독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작가의 생각과 사고를 대변하는 양면적인 인물들이다.
카톨릭 신앙이 국교인 국가에서 태어나 최고 대학의 영예로운 졸업생으로 30세에 진입하기 전에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위치에 올라선 작가는 삶의 중심을 신앙과 사랑에 두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절망적이여도 신을 선택한다면 생의 빛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 보다 무언가를 사랑하는게 훨씬 낫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 있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을 바라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 그것은 그 나름대로 특별한 선물, 축복,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닐까?'
친구 앨리스의 편지를 받은 아일린은 삼 개월 동안 피임약을 끊고 사이먼의 아이를 갖는다.
일에 대한 큰 애착심이 없는 의회 보좌관 사이먼은 자동차도 집도 없지만 방 한 칸짜리 주택에서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매일 출근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바로 지금 겪고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고 남을 바꾸기보다는 나 자신을 바꾸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이런 사회, 이런 정치, 이런 국가의 상태를 개인이 바꾼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매일 우리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하루를 살아내고 버텨내고 있다.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라는 제목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그리그의 신들>의 한 구절로 작가 샐리 루니가 2018년에 참가한 리버풀 비엔날레 행사 제목이였다.
한 시대의 예술로 평가 받는 작품은 이미 현 시대에서 예술로 평가 받으며 수많은 이들의 공감과 이해 그리고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따라서 지난 세기의 작품이 현 시대에도 통용되는 언어가 되고 미술이 되고 음악이 되어 각기 다른 아름다움으로 빛이 난다.
91년생 작가의 작품이 밀레니얼 세대의 '제인 오스틴', '더블린의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불리며 미래의 고전으로 평가 받고 있어도 다음 세대까지 이 평가가 이어질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이란 무섭고 섬뜻한 거야! 무섭다고 하는 건 뭐라고 정의 할 수 없기 때문이야. 정의할 수 없다는 건 하느님께서 수수께끼 만을 던져주셨기 때문이지. 여기 선 양극단이 맞붙어버리고 모든 모순이 함께 살고 있어. 동생, 난 교양이라 곤 하나 없는 놈이지만, 이건 많이 생각해봤어 정말 비밀이 무섭게 많아!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가 이 지상에서 인간을 짓누르고 있어.
어떤 사람이 그것도 더없이 고상한 마음과 높은 이성을 지닌 사람이 마돈나의 이상에서 시작해서 소돔의 이상으로 끝나고 만다는 거야
수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이란 다름 아닌 소돔 속에 도사리고 있어.
넌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니? 섬뜩한 건 아름다움이 무서울 뿐만 아니라 신비로운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야. 거기서 악마가 신과 싸우고, 그 전쟁터가 바로 인간들의 마음 속이야.]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