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문장으로 지은 집이라고 한다면, 첫 문장은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문장을 열고 들어가면 책이라는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만큼 첫 문장은 중요하며 책을 이해하는 첫 단추가 된다.]
-김응교의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이다.'
어떤 종류의 글을 쓸 때 마다 첫 단어,첫 문장이 쉽게 써지지 않는 경험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일단 첫 문장만 쓰면 다음 문장으로 술술 넘어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첫 발을 떼는 것 보다 첫 문장 쓰기가 쉽지 않다.
'역사는 우리를 져버렸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이민진 '파친코'
작가 이민진은 자신의 작품 “파친코'의 첫 문장에 역사에서 평범한 일반인들의 삶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진정 역사를 만드는 것은 그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쓰고 지우고 고치면서 마침내 탄생한 문장이라는 말을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소설의 첫 장을 열자 마자 마주하게 되는 첫 문장은 작품 전체를 함축하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인도하는 입구이자 작가에겐 가장 중요한 문장이다.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초의 어느 날 해 질 무렵, S골목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 중에서
얼핏 첫 문장을 읽다보면 무덤덤하게 쓰여진 것처럼 읽혀지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어떤 장소의 날씨, 시간, 그리고 하숙집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온 한 청년의 망설이는 모습을 통해 감옥같이 비좁은 방에서 나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으려 하는 주인공의 운명이 담겨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의 첫 문장을 쓰기 위해 수 백 번 고쳐서 완성했다.

“제 소설들의 모든 첫 문장은 책 전체를 드러내는 ‘주제문’이에요. 초고 단계에서 마음에 드는 첫 문장을 쓴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 첫 문장을 발견하기 위해서 몇 번씩 책을 다시 씁니다. 전통적인 집필 방법은 아니죠.
저는 기자처럼 기록하고, 학자처럼 논문을 쓰는 작업 형식을 취해요. 몇 번의 퇴고를 거치면서 조금씩 첫 문장이 두각을 드러내죠. 수많은 시간을 고군분투한 후에야,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지고 제가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죠. 그 과정에서 처음 쓴 글이 쓰레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민진
<그해 여름의 수수께끼>
https://tobe.aladin.co.kr/s/5871
6월 9일 생애 첫 창작물을 쓰기 시작 할 때 첫 문장을 써 놓고 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않고 앞으로 쓰게 될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그해 여름의 수수께끼> 1. 런던의 비
https://tobe.aladin.co.kr/n/69025
[기숙사에 처음 도착한 그 날 늦은 저녁부터 줄곧 비가 쏟아졌다.
킹스 칼리지 런던 대학 학생관 2층 외국인 학생 관리 사무소에서 발급 받은 학생증과 기숙사 신청 서류를 들고 굵은 빗줄기를 뚫고 기숙사 건물 로비로 뛰어 들어갔다.]
<그해 여름의 수수께끼> 10. 어느 수 사슴의 죽음
https://tobe.aladin.co.kr/n/85326
[신성한 환영처럼 눈 앞에 펼쳐졌던 그해 여름, 바르비종의 숲
악마와 천사를 만났던 그 곳을 벗어나 바람과 비의 정령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이곳 에이번 강 줄기를 따라 걷는다.
기쁨의 비를 듬뿍 맞으며...]
나는 매일 책을 읽을 때 마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내 삶에 필요한 문장을 찾아 읽는다.
따라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문장들은 내 삶의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주는 영양분이자 영혼의 숲이다.
6월 9일 부터 쓰기 시작했던 첫 창작물 <그해 여름의 수수께끼>는 이전에 어딘가에 써두었던 작품을 수정하고 매만져서 완성한 것이 아니라 바로 첫 문장 '기숙사에 처음 도착한 그 날 늦은 저녁부터 줄곧 비가 쏟아졌다.'을 쓰고 난 후 창작의 열차에 올라 탔다.
매일 글을 쓰면서 실로 방대한 분야에 걸쳐 책을 읽어나갔다.
그렇게 7주 동안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으면서 고전의 힘, 첫 문장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의 첫 문장
"그는 마지막 행에 도달하기 전에 자신이 그 방에서 절대로 나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이해했었는데, 그것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양피지의 해독을 마친 순간 거울의 도시(또는 신기루들)는 바람에 의해 부서질 것이고,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질 것이고, 또 백년의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가문들은 이 지상에서 두번째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양피지들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한 과거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반복되지 않는다고 예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의 마지막 문장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다시 맨 앞 장의 첫 문장부터 다시 읽고 싶어진다.
그리고 다시 첫 문장을 읽고 나면 마지막 문장을 읽기 위해 처음 부터 다시 읽게 된다.
“우리는 가끔 우연히, 부지불식간에 뭔가 아름다운 말을 해 놓고도 어쩌다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우리는 눈가리개를 한 요리사, 냄비 속으로 아무거나 던져 넣었는데 가뭄에 콩 나듯 아주 맛깔난 음식을 만들어내는 요리사와 같다.”
-마크 포사이스의 문장의 맛 중에서
작가들이 맛의 황홀한 향연을 맛보게 하는 유명 셰프들처럼 펜 끝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읽을 맛, 감동의 여운을 느끼게 만든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애초부터 영감이 이끄는 매혹의 기술은 없을지 모른다.
동서양의 고전을 통독 하고 재독 하며 매달 나오는 다양한 서적들을 두루 섭렵 한다 해도 첫 문장을 쓰기 쉽지 않지만 견고하게 쌓아 올린 문장이 어느 날 누군가의 심금을 뒤흔들지 모른다.
따라서 나에게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을 향하는 첫 발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