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적으로 시력이 약했던 드가는 1870년 초반 서른 여섯의 나이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의 왼쪽 시력 역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여서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거나 주변만 보이는 현상을 겪게 되자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버린다.

한동안 드가는 자신의 시력 장애를 받아 들이지 못한채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다며 자포자기한 상태에 빠졌다.

밝은 빛 아래의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 할 수 없게 된 드가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숨어지내듯 생활 하면서도 그림 작업을 포기 하지 않았다.

시력이 악화 되면서 드가는 염료를 섞거나 광택을 내지 않아도 되는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파스텔로 겹겹이 색의 층을 만들어서 입체적인 회화 효과를 내기 시작한 드가는 지속적으로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 하기 시작한다.

동판화, 애쿼틴트 판화, 드라이포인트, 석판화, 모노타이프 작업을 하던 드가는 밀랍과 찰흙을 만지면서 자신이 즐겨 그리던 작업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형해 나갔다.

1874년 드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에드몽 콩쿠르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시력 상실로 모델의 형태만 간신히 볼 수 있었던 드가는 모델의 신체적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자주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흙을 쥐고 있던 그의 손끝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서서히 그 찰흙은 모델을 닮아 갔다."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없었던 드가는 조각을 통해 대상의 형태와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탐구 해 나갔다.

1875년 파리에 대리석 장식과 금박 장식의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에 부유한 특권층이 몰려 갔다. 

온 몸을 완전히 가리는 긴 드레스를 차려 입었던 귀족 여성들과 달리 무대 위의 무용수들은 팔 다리를 드러내고 얇은 재질에 의상을 걸친채 춤을 추니 이들을 보기 위한 남성들이 발레 공연장을 찾았다.

정기권을 구입한 남성 관객들은 공연 시작 전이나 막간 또는 휴게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무용수들에게 은밀한 시선을 보냈다.

이들 틈에 화가 드가도 끼여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드가는 공연이 시작 되기 전 무대 뒤와 계단, 관람석에서 무용수들의 모든 움직임을 빠른 손놀림의 파스텔 스케치로 그렸고 늦은 저녁 작업실에서 마무리 작업을 했다.

당시 발레단에 연습생으로 들어온 10대 어린 소녀들은 주로 노동 계층에서 선발 되었는데 일곱살 또는 여덟살 때 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가난한 가정 환경에 부모로 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발레단의 소녀들은 온 종일 공연 연습에 몰두 해야 했다.

발레단의 어린 소녀들의 열악한 환경을 잘 알고 있었던 드가는 휴게실이나 무대 위에서 스텝과 군무, 그리고 앙상블까지 단 한 순간도 쉴틈 없이 훈련을 해야 했던 어린 무용수들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게 했다.

가게 점원, 세탁부, 하녀, 카페나 경마장등 공공장소에서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을 즐겨 그렸던 드가는 돈으로 쾌락을 사는 남성들과 달리 어린 소녀들에게 부성애적인 시선으로 대했다.

무용수들도 드가를 좋아했다.

그들은 드가가 자신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 주고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에 고마워 하며 진심으로 그의 모델이 되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드가가 작업 하는 걸 가까이서 지켜 본 한 무용수는 그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드가 선생님은 손에 연필을 들고 장옷 밑에 숨겨 둔 스케치북에 자신이 본 것을 재빨리 기록했어요. 오페라 하우스에 불이 꺼지면 그분의 모델이 된 무용수들이 스튜디오에 찾아갔어요. 무대 뒤에서 우리를 지켜 보았던 시선과 달리 드가 선생님은 아주 엄격한 작업태도로 다양한 포즈를 취할 것을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몇 시간씩 포즈를 취하는 동안 드가 선생님 손에 쥐어진 찰흙이 서서히 형태를 갖춰나가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어요."

1880년 제 5회 인상주의자 전시에서 드가는 일종의 맛보기로 빈 유리장을 전시하더니 그 다음 해에 90센티미터의 실제 머리카락과 리본, 천으로 만든 조끼, 모슬린 무용복에 분홍색 발레화를 신은 황금빛 밀랍의 인간 피부처럼 따뜻하면서 말랑한 질감의 조각상을 공개했다.

1881년 제6회 파리 인상주의 전시에서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가 등장 했을 때 행사장은 술렁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뒷발을 들고 서 있는 어린 소녀상은 야생 새끼 짐승처럼 듬성 듬성한 머리카락에 감긴 눈, 조금 경사진 이마, 새의 부리 같은 입술에 툭 내민 턱, 길게 늘어뜨린 노란색 리본, 유난히 두꺼운 목, 핀으로 고정한 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들린 엉덩이, 살짝 나온 아랫배, 단추를 몇 개 풀어 어깨에 살짝 걸친 조끼, 가는 허리, 누더기가 된 치마, 호리호리한 다리, 등 뒤로 마주 잡은 가는 팔과 손을 한 조각상을 마주한 관객들은 소스라치게 놀랬다.


실제 피부색과 비슷한 밀랍으로 빚어서 일까?

깔끔한 외모, 탄탄한 몸매 등 말 그대로 ‘조각 같은’ 조각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의 눈에 드가의 소녀 조각상은 예술은커녕, 이집트 미라나 아프리카의 물신이나 부두교 같은 불길한 상징물처럼 보였다.

평론가들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조각상을 향해 “원숭이가 있어야 할 곳은 (전시장이 아닌)동물원이지 않은가.” 신랄한 악평을 쏟아 부었다.

작가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는 드가의 조각상을 가리켜 현대적인 시도라며 "조각에 대한 모든 생각, 차갑고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순백색, 수 세기 동안 복제되었던 예술의 관습을 뒤흔들어내며 전통을 부숴 버린 작품이라 이례적으로 호평 했다.

이런 호평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예술계는 드가의 조각상을 향해 “타락의 꽃”, “악덕과 혐오”, “흉악한 분위기” “악취미로 빚은 인체 표본”이라는 폭언을 퍼부었다.

쏟아지는 악평과 비난에 드가는 작업실 구석 옷장 문을 열고, 조각상을 깊숙이 밀어 넣고는 두 번 다시 세상에 공개 하지 않았다.

드가의 작업실 옷장 문이 잠기고 나서 <열네 살의 어린 무희>는 이대로 영영 어둠에 잠겼을까. 

소녀의 이름은 마리 반 괴템 

소녀는 오페라단의 하급 발레 무용수로 무대 뒤 소품 같은 존재 였다.

발레단엔 마리 같은 소녀가 많았다. 그러니 딱히 불리는 이름도 없었다. 

이런 하찮은 발레단의 소품 같은 소녀들은 보잘 것 없고 빈약하고, 하찮다며 ‘작은 쥐’(Petites Rats) 무리라고 불렸다.

마리는 186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벨기에계 이민자로 아버지는 재봉사였고 어머니는 세탁부였다. 

마리에게는 큰 언니 앙투아네트가 있었고 한 살 많은 작은 언니도 있었지만, 출생 한지 18일 만에 사망했다. 

마리가 태어나고 5년 후 여동생 샤를로트가 태어났다.

마리 가족의 터전은 파리 9구. 

프랑스 전역에서 몰려온 가난한 예술가들, 거리의 부랑자들 노동자와 매춘부가 몰려 있는 그 곳은  토끼 굴보다 비좁고 비 위생적인 환경에 일명 파리에서 하수구로 불렸던 곳이다.

 마리 가족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방 값이 몇 달 씩 밀려 쫓겨나듯 자주 이사 갔다.

당시 빈민층 부모의 자녀들 중 소년은 광산과 농장으로 팔려 갔고 소녀는 공장이나 공연이 열리는 무대를 가야 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 생계가 어려워진 마리의 엄마는 자신의 딸 셋을 모두 발레단에 보냈다.


1878년,  마리는 열세 살이 된 그해 드가의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너, 9지구에 사는 그 꼬마 맞지?”


드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네, 마리예요.” 마리가 답했다. 

“우리 종종 봤지?” 드가가 물었다. 

“네, 맞아요.” . 

푸른색 안경을 쓰고 있는 드가는 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내 모델이 돼줄래?.”


드가는 마리에게 4시간당 6~10프랑 사이 사례비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육점 고기 한 근이 1~2프랑이었다고 하니 하급 계층 생계 기준에서 상당히 후한 금액이었다.

드가는 남아 있는 왼쪽 시력으로 멍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든 마리를 3년 동안 지켜 보며 발레리나의 화려한 몸짓이 아니라, 그 몸짓을 만들어낸 수많은 땀방울과 버팀의 시간을  빚어내듯 밀랍이나 찰흙으로 속을 채울 때는 성냥이나 종이, 코르크, 막대기, 헝겊, 밧줄, 목재, 스펀지, 옷감, 담배, 부러진 붓 같은 걸 함께 집어 넣었다.


3년 동안 드가의 작업실에 찾아가 모델을 섰던 마리는 지각과 불복종 등을 이유로 몇 차례 임금 삭감과 같은 징계를 받더니 조각상이 전시 되었던 1881년 오페라단에서 쫓겨났다.

1903년 미국인 루이진 헤브마이어가 뒤랑뤼엘을 통해 열네살의 어린 발레리나 조각상을 사려 했지만 드가는 응하지 않았다.

드가는 자신의 조소 작업이 동작과 균형을 연구하기 위한 습작일 뿐이라며 살아 생전 작업실 밖으로 소녀의 조각상 내보내지 않았다.

훗날 드가는 화상 볼라르에게 이런 말을 했다.

'청동으로 만들어두면 내가 죽은 뒤로도 영원히 남을 텐데 그런 걸 남긴 다는 것은 부담스러워."

마리가 오페라단에서 퇴출 당하기 몇 달 전, 신문 《레벤느망(L‘Evenement)》은 “(예술가 드가의 모델)마리가 르 라 모르(Le Rat Mort) 주점을 자주 오간다”는 식의 기사가 실렸을 뿐 현재까지  소녀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도 없고, 흔적도 없다. 

1917년 드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작업실 옷장 속에 갇혀 있었던 작은 밀랍상은 조각가 알베르 바르톨로메의 손을 거쳐 청동상으로 주조 되었다.

마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 열 네 살의 소녀가 정말로 바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현재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는  복제폼 28개로 주조 되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용수가 되었다.

예술은 늘 멋진 해답을 주는 건 아니다. 

 우리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비춰볼 수 있도록 작은 창 하나를 열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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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먹거리 중에서 가격대비 영양가가 높은 것은 닭이 낳은 알 '달걀'이다. 

달걀은 무게에 따라 왕란(68g 이상), 특란(68~60g), 대란(60~52g), 중란(52~44g), 소란(44g 미만)으로 나뉜다. 

알을 낳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닭이 낳은 알은 초란이라고 하는데 계란 크기로는 맛이나 영양의 차이가 거의 없지만  대개 산란 후 2주 정도까지가 가장 신선하고 영양가가 높은 상태다.

우리가 먹는 달걀은 대부분 특란 또는 대란인데 흰색, 갈색 그리고 청색의 계란 알 색깔은 영양학적으로 차이가 전혀 없다.

달걀 1개에 단백질이 6~7g 들어 있어서 하루 2개 정도 섭취 하면 닭가슴살 100g의 단백질 절반 가량을 섭취할 수 있다.

달걀의 단백질은 조리 방식이 달라져도 큰 차이가 없다.

삶은 달걀의 열량은 77칼로리지만 조리 할 때 기름을 사용할 경우 200칼로리를 훌쩍 넘긴다.

삶거나 굽거나 찌거나 중탕으로 수란 상태로 먹어도 맛이 뛰어난 계란은 기름에 조리 할 때 소금과 설탕 약간만 넣어 고소한 맛을 살려서 먹어도 맛있지만 계란요리에 빠지지 않는 소스가 있다.

다양한 요리에 뿌려 먹고 찍어 먹는 만능 소스 케첩은 어느 가정집의 냉장고 문을 열면 한 두 개 정도는 있고 다양한 음식에 두루 사용되는 소스다.

미국을 대표하는 페스트 푸드인 햄버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케첩은 미국 남북전쟁 이전까지 유럽에서 부유한 이들만 먹을 수 있었던 값비싼 소스였다.

17세기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서 아시아 푸젠성, 광둥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사용 되었던 생선 소스와 베트남 요리에 쓰이는 생선으로 만든 간장 ‘누옥맘(nuoc mam)’을 가져와서 전파 되기 시작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아시아 생선 소스와 간장에 버섯이나 호두를 갈아 넣어서 케첩 소스를 먹기 시작했지만  비싼 아시아 생선 소스를 수입하면서 값싼 토마토를 섞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케첩의 색깔은 빨간색이 아니라 갈색이였다.

미 대륙에 케첩이 전해졌을 때도  버섯이나 자두 ,복숭아를 섞은 갈색 소스 형태로  수입이 되었다.

하지만 남북전쟁으로  농작물을 제때 수확하기 힘들어지자  빠른 시간에  쉽게 키울 수 있는 토마토를 대량으로 재배해 케첩 소스에 섞기 시작했다.

남북 전쟁 당시 토마토를 넣은 빨간색 케첩 맛에 반해 버린 미 대륙인들은 폭발적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여러 업체에서 마구잡이로 만들며 불량 저질 토마토 케첩을 쏟아냈다. 

계란의 껍질을 갈아 넣거나 나무 껍질을 넣기도 했던 케첩에 부패를 방지 한다며 방부제로 포르말린을 넣고 변색 방지를 위해 아스팔트용 콜타르를 넣기도 했다.

케첩을 먹고 건강을 해치게 되자 소비자들은 외면하고 때마침 이 시기에 사업가  헨리 하인즈는 나쁜 첨가물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특허 받은 투명 용기 케첩 병에 소스를 담아 팔기 시작했다.

토마토를 끓여 걸러낸 뒤 설탕, 소금, 식초, 향신료 등을 첨가해 조린 하인즈 케첩은 계피, 허브 딜오일, 마늘 같은 천연 성분을 넣어 신선도와 맛을 보존 하면서 토마토 케첩은 하인즈라는 대명사가 되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소스가 된 하인즈 토마토 케첩이 투명한 유리 용기에 담기 전 1900년 경부터 일본에서는 푹 익은 토마토를 갈아 넣어서 유리 용기에 담아 먹는 소스를 먹기 시작했다.

일본 메이지 시대 때 부터 국민 브랜드 소스로 자리 잡았던 가고메 토마토 케첩은 유리병을 열자 마자 소스가 확 쏟아지거나 양 조절이 힘들고 사방으로 소스가 튀어서 그릇에 담아 먹었다.

1950년  바닥까지 깨끗하게 먹을 수 있는 비닐 튜브형 용기가 등장하면서 깔끔하게 쭉 짜서 먹게 되자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어떤 요리에도 맛과 풍미를 돋게 하는 토마토 케첩은 달걀로 만든 음식과 최상의 조합이다.

 달걀과 밥만 있으면 집에서 간편하게 조리 할 수 있는 오무라이스에 케첩만 뿌려도 맛과 풍미가 뛰어난 요리가 된다.

원하는 재료를 넣고  밥을 볶은 후 접시에 담고 난 후 달걀을 두 개를 휘저어서  버터를 넣고 달군  팬 위에 부어서 손목으로 팬을 돌려가며 달걀을 얇고 둥글게 부친다.

가장자리의 얇은 부분은 햐얗게 변할 때 가스 불을 끄면 가운데 부분은 반숙 상태처럼 촉촉하다.

준비해둔 밥을 둥글게 부친 지단 한 가운데 넣고 긴 나무젓가락을 사용해서 양쪽을 접어서 밥을 감싸면  반달 모양이 된다.

스푼으로 가운데 뿌려진 케첩 부분 부터 잘라내면서 비벼 먹다가 부족 할 때마다 케첩을 뿌려 먹는 오무라이스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지만 이따금씩 다른 소스를 넣은 오무라이스를 먹을 때면 다음 번엔 반드시 케첩만 뿌리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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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직접적으로 눈 앞에 보이지 않아도  이야기를 읽거나 듣거나 볼 때 무의식적으로 장소와 인물의 심리, 행동 그리고 주변의 소리와 소음, 색채를 여러 형태의 형상으로 그려 본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주 짧은 단편 <큰 소음>에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집안 전체의 소음이 한데 모이는 곳에 있는 내 방에 앉아 있다.

나는 모든 문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다. 문들이 닫히는 소리 때문에 그 문들 사이를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는 부엌 안에 있는 난로 문이 찰칵 닫히는 소리까지도 듣는다.

아버지는 내 방의 문들을 마구 열어 제치고 질질 끌리는 침실용 가운을 입은 채  내 방을 가로 질러간다.

옆방에서는 난로의 재를 긁어내고 있다. 발리는 앞방을 통해서 아버지의 모자를 닦아 놓았느냐고 한 단어 씩 소리치며 묻는다. 나에게 친근해지려는 쉭쉭 소리가 대답하는 목소리의 외침보다 더 높아진다. 집 안 문들의 손잡이가 돌려지고 카타르성 목에서 나오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나서 문은 계속적으로 어떤 여인의 노래하는 목소리와 더불어 열렸다가 드디어는 남자의 홱 밀치는 둔탁한 소리와 더불어 닫히는데 그것이 가장 난폭하게 들려 온다. 아버지는 가버린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주 짧은 단편 <큰 소음>에서 화자인 '나'가 머무는 공간 '방'에 등장하는 '문'들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여러 소리들이 들린다.

발자국 소리, 난로문이 닫히고 열리는 소리 그리고 방 안의 사람들 보다 목소리 톤이 더 높은 아버지가 등장하고 서로 밀치고 닫히는 사이 여인의 노래하는 목소리에 뒤섞인 난폭한 소리 , 밀쳐내는 소리가 들린다.

단순히 한 공간에서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긴장감이 느껴지고 그 장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버지'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읽는 동안 머릿 속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야기의 모양과 형태를  일목 요연하게 논리적인 구조의 틀 속에서    의식과 잠재 의식 사이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읽는 이들이 이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을 스토리텔링이라 한다.

카프카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으로만 이야기를 구축하지 않았다.

인물의 심리 변화는 일어나지만 주변 상황에 극히 미약하게 반응 할 뿐 명확하지 않게 불가사의하게 현실과 비현실 세계를 넘나들며 모호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읽는 독자들은 카프카의 짧은 단편을 읽고 어떤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까?

독자가 각자의 해석을 끼워 넣을 상상의 공간까지 만들어 놓은 프란츠 카프카는 모더니즘 시대를 도래 하게 만든 탁월한 천재였다.

활자로 서사적 세상을 구축하는 천재적 작가가 있듯이 음악 세계에서도 독특한 연주 해석으로 인간의 잠재적 의식  속에 무언의 형상을 부여 하는 음악가가 있다.

음악을 듣는 동안 그 세계에 누가 있는지 어떤 일이 벌어 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음의 높낮이가 달라 질 때 마다 서서히 진폭의 강도의 세기가 달라 질 때마다 마음의 울림이 달라 질 뿐이다.

이 세상은 항상 뜻밖의 일,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 뜻밖의 것들이 날씨 일 수도 있고 어떤 위기나 위험스러운 상황일 수도 있다.

반면, 변화의 기회나 뜻하지 않는 행운이 찾아 오기도 한다.

우리는 항상 사는 동안 맞닥뜨리게 되는 예기치 못한 것들을 알고 싶어 한다.

이건 무슨 의미 일까? 이런 변화는 좋은 징조 일까? 아니면 불길한 기운일까?

 사주팔자를 점쳐 보며 한 해의 운세를 미리 알아 보고 온갖 방책을 하며 주술의 힘으로  운을 끌어  모아 놓는다 해도 태생적인 것, 타고난 것을 완전하게 바꿀 수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가 예기치 못한 변화의 순간에 시작되듯 인간이 본능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하는 순간은 변화를 감지 할 때다.

5월의 꿀맛 같은 황금 연휴가 끝나고 나니 2026년의 한 해의 반이 훌쩍 지나갔다.

새로운 다짐도 작심 삼일이면 흐지 부지 해져 버렸고 새로운 마음으로 기획한 것들은 지지부진한 상태에 처해 있다. 

 왜 실천 하지 못했는지 오만 가지 예를 들며 끊임없이 자신을 매수 하는 동안 스스로에게  아무것도 기대 하지 않은 채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살아간다.

늘 해오던 일만 한다면 과거에 멈춰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천부적인 이야기꾼들, 세계적인 거장들 모두 불멸의 작품 속에 '극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장치를 심어 놓았다.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꿈을 꾸며 상상을 할 수 있는 종인 인간은 헛된 망상이나 허황된 목표를 추구 하며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달리는 과정들이 쌓여서 한 단계씩 도약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 나간다.

추구할 목표도 없거나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희망 마저 없다면 사는 맛이 없는 우울과 절망만 남는다.

성공은 늘 변화 무쌍한 불확실성 속에 도사리고 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빈스 롬바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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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6-05-30 07: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 남깁니다.^^ 오늘 scott님 포스팅 보면서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었던 책에서 봤던 ‘불확실성을 환영하라‘는 문장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일반적으로 불확실성보다는 확실성을 추구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확실성들은 과감히 끌어 안고(받아들이고)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계절에 맞게 옷을 바꿔 입듯이  읽게 되는 책이 있다.

인간 영혼의 밑바닥을 잔혹하게 파헤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겨울을 앞둔 11월에 꺼내 읽고 삶의 의미와 진실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톨스토이 작품은 차가운 공기와 눈이 내리는 겨울에 꺼내 읽는다.

무덥고 습한 공기가 짓누르는 계절에는 따스한 시선으로  다양한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체홉의 단편을 읽기 딱 좋다.

안톤 체홉이  1896년에 발표한 짧은 소설 <다락방이 있는 집>에서 화가인 주인공이 어느 날 지주 벨로쿠로프의 영지에 머물렀던 몇 년 전 일을 회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잘못하여 나는 낯선 어느 사람의 저택에 무심히 들어갔다. 해는 이미 기울어질 때였으므로 꽃이 핀 호밀 위에 황혼의 햇살이 길게 비치고 있었다. 좁아서 답답할 만큼 두 줄로 빽빽이 심어진 몹시 키가 큰 늙은 전나무가 빈틈없는 두 개의 벽처럼 줄 지어서 어둡고 아름다운 가로수 길을 이루고 있었다.

-안톤 체홉의 '다락방이 있는 집' 중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길을 잘 못 들어 선 화가는  어느 저택에 우연히 들어 가게 된다.

저택의 주인이자 지주인 벨로쿠로프는 뜻밖의 손님이 자신의 집에 찾아 오자 가족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함께 먹자고 제안한다.

화가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지주 벨로쿠로프의 두 딸을 만나게 된다.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고 활달한 성격에 언변이 뛰어난 큰딸 리자와 대화를 하던 화가는 길게 이어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떤 대화든지 논쟁으로 이끄는 학창 시절 버릇이 불쑥 튀어나와 버린다.

화가는   혼자 흥분하며 지루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다가 그만 식탁 위에 있는 소스 통을 옷 소매로 쳐서 넘어뜨리는 실수를 하고 말지만 두 자매는 이를 못 본 척 넘어간다.

처음 만난 화가와 열띤 토론을 벌이는 언니 리자와 달리  동생 제냐는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들을 뿐 대화에 저녁 식사 내내 끼어들지 않았다.

두 자매의 서로 다른 모습을 유심히 살펴 보던 화가는 지적인 아름다움이 넘치고 활달한 성격의 언니 리자 보다 조용한 성품의 책 읽기를 좋아하는 제냐의 매력에 끌리게 된다.

'나는 그녀에게 잘 보이지 못했다. 그녀가 나를 좋아 하지 않는 이유는 내 그림이 풍경화이고 그림 속에 민중의 가난함이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깊이 믿는 것에 대해 내가 무관심 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주와 격이 없는 사이가 된 화가는 막내 딸 제냐와 우연이라도 마주치기 위해 집으로 가는 길에 일부러 벨라코프 영지를 지나간다.

화가는 언니 리자와 늘상 의견대립을 해서 논쟁에 휩싸이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는  동생 제냐와는 조금씩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화가는 제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제냐는  가족들이 허락하면 받아들이겠다 라는  말을 하고는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한 달의 시간이 흘러  화가는 제냐가 어머니와 함께 외국으로 가기 위해 숙모집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언니 리자에게 듣는다. 

'저는 제 고집으로 언니를 슬프게 하는 일을 도저히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행복하시기를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와 어머니가 얼마나 애처롭게 울고 있는지 알아주셨으면...' 

그 날 이후로 화가는 제냐의 소식은 듣지 못하고 언젠가 크리미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지주 벨로쿠로프를 만나 두 자매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리자는 여전히 셀코프카에서 생활하며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차차 자기에게 공명해 주는 사람들의 서클을 만들어 그들 만의 강력한 당을 결성하여 지난번 선거와 같이 군 전체를 손아귀에 넣고 있던 발라긴을 밀어냈다고 했다. 제냐에 관해 벨로쿠로프가 알려 준 것은 그녀가 이미 집에 있지 않다는 것과 현재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 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화가는 차츰 두 자매가 살았던 그곳, 다락방이 있는 집을 잊고 살다 아주 가끔 그림을 그릴 때나 책을 읽고 있을 때 문득 그 시절 그 다락방 창문에 비친 녹색 빛 등불 아래서 책을 읽고 있던 제냐(미슈스)를 떠올린다.

언제나 무위도식 하는데 대한 변명 거리를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 대 저택의 여름날 휴일 아침은 특히나 매력적이었다. 아직 이슬에 촉촉이 젖은 초록색 정원이 온통 햇빛을 받아 반짝일 때, 집 주변에 자라난 목서초와 서양협죽도의 향기가 풍길 때, 그리고 교회에서 방금 돌아온 젊은이들이 정원에서 차를 마실 때, 모두가 아름답게 옷을 차려 입고 흥겨워할 때, 이 건강하고 아름답고 배부른 사람들이 긴긴 여름 내내 빈둥 대리라는 사실을 실감할 때, 모든 인생이 그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지금도 나는 똑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정원을 거닐고 있다. 일도, 목적도 없이 온종일, 여름 내내 그러고 싶었다. 

-안톤 체홉의 <다락방이 있는 집> 중에서

사방에 꽃들이 만발한 5월의 마지막 주,  기차에 올라타서 체홉의 단편을 설렁 설렁 넘기기 딱 좋은 날씨다.

미세먼지가 없는 맑고 깨끗한 하늘 아래서 살랑 살랑 부는  바람을 맞으며 5월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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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유럽에서 액체 저장용기로 제작되어 고급 소비재로만 판매 되었던 유리병은 1783년 영국의 슈웹스(Schweppes)가 세계 최초로 유리병에 담긴 탄산수를 대량 생산하며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1858년 영국 런던에서  위생적인 관리를 위해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처음 판매하면서 본격적으로 상업적인 용도로 유리병이 제작 되기 시작했다.

1899년 미국에서  콜라는 유리병에 판매 하면서 다양한 용도의 유리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1915년 미국 코카콜라 회사는 시장에 넘쳐 나는 코카콜라 유사품과 차별화 시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도 모양이 느껴질 뿐 아니라 깨지더라도 그 원형을 쉽게 가늠할 수 있는 디자인의  유리병을 세상에 등장 시켰다.

 1915년 인디애나 루트 유리 공장의 알렉산더 사무엘슨과 얼 알 딘이 코코아 열매의 울퉁불퉁한 세로 선과 독특한 윤곽(Contour)을 참고하여 제작한  유리병은 1950년 소비재로서는 처음으로 TIME지 커버에 등장한 최초의 상품으로 낙점될 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1960년 미 특허청에 상표가 정식 등록되면서 코카-콜라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상징이된 코카콜라 유리병은 특유의 아이코닉함으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뮤즈로  널리 사랑 받으며 소비자 상품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유리병의 상징이 되었다.

코카콜라의 유리병이 소비자 상품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칭송 받고 있지만 이보다 몇 세기 전인 12세기  세계인들을 매료 시켰던 병은 한반도에서 생산되고 있던  고려 청자였다.

10세기 무렵 중국에서 도자기 제작 기술이 도입 되기 전인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흙으로 모양을 빚어 냈던 시절 부터 불투명하고 투박하면서 화려한 색감에만 치중한 중국 도자기와 차별화된 디자인의 그릇을 빚어 왔다.

나팔처럼 벌어진 입, 긴 목, 골이 파이고 양감이 있는 몸체, 주름치마 같은 굽이 만들어내는 유려한 곡선에 고려만의 독특한 미적 기술과 입체적 기법이 그대로 담겨 있는 청자 병은  현대인들이 대량 생산하는 공장형 유리병과 비교 할 수 없는 예술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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