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서른 한 살의 조지 오웰은 그해 7월 부터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 참가 하기 위해 여러 절차와 준비를 마치고 12월 함께 의용군으로 전선에서 싸울 의지를 불태우는 동지들을 만난다.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싸우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은 동지들을 만나기 전 참전 서류 절차를 밟는 동안 저널리스트로 전선에 참전 할지 의용군으로 총을 들고 복무 할지를 놓고 갈등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다. 하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

20세기 초 가장 잔혹한 최악의 내전으로 기록된 스페인 내전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총 3년에 걸쳐서  스페인 제2공화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내전으로 이곳에서 불붙어 버린 파시즘, 공산주의, 민주주의, 아나키즘, 반동주의, 군국주의, 반군국주의, 공화주의, 군주주의 등 당대 주류 이념들의 격전장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을 알리지는 전쟁이였다.

스페인의 다른 도시와 달리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카탈로니아에서 내전이 시작된 가장 큰 이유는 일자리를 뺏아긴 다른 도시의 노동자들이 권리 쟁취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며 다른 도시로  확장 시켜 나갔고 무정부주의자들이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활기 치고 다녔다.

1902년 사라고사와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이 봉기 하며 이때 부터 스페인 혁명의 불씨가 붙기 시작했다. 정부는 탄압으로 강제적으로 노동자들을 해산 시켜 버렸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노동조합원에 가입하는 노동자들이 늘어 나면서 그 세력은 스페인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1902년 부터 1923 년까지 정권이 33번이나 교체되면서 정치적 불안정이 고조 되었지만 세계 1차 대전 기간 동안 스페인 정부는 절대 중립을 지키며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경제 성장을 이어가는 동안 유럽 땅에서 탄압을 피해 날아 온 사회주의자들이 도시 곳곳에 시위와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1917년 러시아의 피의 혁명의 시작으로 카탈로니아에서 시작된 봉기는 군대의 무력 탄압이 아니고는 막지 못할 정도로 노동자들은 더 이상 맨 주먹으로 울부 짓지 않았다. 1923년 모로코에서 스페인이 반란 진압에 실패 하면서 스페인 내부에서 정치적 갈등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된다.

결국 프리모 데 리베라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군사 독재 내각을 수립하게 된다.

1929년 전세계 공황의 여파로 군사 독재 정권은 흔들리면서 1931년 군주제를 반대하는 혁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공화파는 지방 선거의 압승으로 공화국 수립을 선언한다.

1930년 제 2공화국의 시작을 알리며 혁명위원회는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1930년 스페인에서 발발했던 내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혁명의 양상으로 변질 되고 있었다. 내전 당시 스페인은 제 2공화국 체제 였다.

1931년 6월 좌익계 공화파는 제헌의회 선거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스페인을 '모든 노동자의 민주 공화국'으로 규정하는 민주적 헌법을 제정했다.

1932년 9월 카탈로니아 자치법이 성립되어 카탈로니아는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카탈로니아어를 공식어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32년 10월에는 부재 지주의 토지 몰수를 규정한 신농업법을 공포 했지만 보수세력의 반격으로 좌파 정권은 물러나고 1933년 우익 정권의 수장 알렉한드로 레룩스가 정권을 쥔다.

이에 반기를 든 카탈로니아에서 1934년 10월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로니아 국가'를 선포하지만 유혈 진압 당한다.

1936연 1월 선거를 통해 공화파 공화좌파 사회당 공산당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지만 우익 군부의 탄압으로 전국 곳곳에 수백개의 봉기가 일어난다.

결국 1936년 7월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지휘하는 군이 파시스트 반란을 일으키며 본토 각지의 병영에도 파급 되기 시작한다.

군부는 쉽게 쿠데타에 성공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노동 계급의 강력한 저항은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등 대도시를 중심은 군부를 막아내는 승리를 거두며 드디어 스페인 내전의 비극이 시작된다.

파시스트 정권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즉각 반란군을 지원하며 물자와 군비를 보내자 소련도 스페인 정부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 대 반 파시즘의 전쟁의 양상이 된다.

작가 조지오웰, 헤밍웨이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은 반 파시즘 전선에 뛰어든다.

스페인에서 벌어진 일은 사실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혁명의 시작이었다. 스페인 외부의 반파시스트 언론은 그 사실을 일부러 모호하게 만들었다. 쟁점은 <파시즘 대 민주주의>로 좁혀졌다. 혁명적 측면은 최대한 은폐되었다. 다른 곳보다 언론의 집중이 심하고, 또 대중이 언론에 쉽사리 기만당하는 영국에서는 스페인 전쟁에 대해서 오직 두 가지 이야기만이 입에 오르내렸다. 하나는 기독교 애국자들과 피를 뚝뚝 흘리는 볼셰비키들의 대립이라는 우익의 이야기였다. 또 하나는 신사적인 공화주의자들이 군사 반란을 진압하고 있다는 좌익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해서 핵심적 쟁점을 성공적으로 덮어버린 것이다.

 스페인 밖에서는 이곳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파악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반면 스페인 내부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중에서

생활고를 겪었던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으로 참가 하기 전에 경비를 대기 위해 집안에 있는 은식기를 전부 전당포에 팔아 넘겼고 은행에서 융자까지 신청을 받았다.

조지 오웰은 가족에게 집안의 은식기들을 가문의 문장을 새기기 위해 장인에게 수작업을 의뢰하며 맡겼다고 들러댔다.

집안에 식기들까지 팔아 치우고 모은 돈 빌린 돈을 탈탈 털어 겨우 군복을 구입한 조지 오웰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작가 헨리 밀러는  소중한 생명을 무모한 권력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갖다 바치는 건 무모한 짓이라며 자신의 옷장에서 가장 비싼 코튜로이로 만든 정장 코트를 건넨다.


어린 시절 집 근처에서 토끼 몇 마리를 엽총으로 쏴본 경험만 있었던 조지 오웰은 버마 제국 경찰로 복무 했음에도 사격 실력은 형편이 없었고 오합지졸로 구성된 의용군 부대에서 제대로 된 총기나 탄약이 장전된 무기조차 지급 받지 못한 채 서서히 전선의 격전지에서 멀어져 가버린다.


질흙 같은 어두운 밤,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한 남자가 바지를 추스리는 모습이 조지 오웰의 총구에 잡혔다.

그는 저 자를 지금 당장 쏠 것인가, 쏘지 않을 것인가 몇 분동안 갈등하며 어쩌면 저렇게 바지를 추스리는 남자가 자신이 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총구에서 눈을 떼버린다.


<동맥이 날아갔구나.> 나는 생각했다. 경동맥이 잘렸을 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죽음을 예상한 시간이 2분은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었다. 그런 시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아는 것도 재미있다는 뜻이다. ... 나는 이 터무니없는 불운에 격분했다.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이냐! 전투도 아니고 이 염병할 참호 한 귀퉁이에서 순간의 부주의 때문에 죽게 되다니! 나는 또 나를 쏜 사람 생각도 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스페인 병사일까, 외국인 병사일까. 나를 맞히었다는 사실을 알까 등등. 그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낄 수 없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다면 나도 그를 죽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만일 그 순간에 그가 포로가 되어 내 앞에 끌려 왔다면 잘 쏜 것을 축하해 주기만 했을 것이다. 


구사 일생으로 전선에서 목숨을 건진 조지 오웰은 바르셀로나 병원으로 후송되는 동안 극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포탄 주변 곳곳에 피어 있었던 꽃 향기를 떠올린다.

'우리 흉벽 앞의 총탄 맞은 나무에도 버찌 송이들이 빽빽이 달리기 시작했다.

찻종만한 분홍 꽃송이를 피우는 들장미들이 토레 파비안 주위 포탄 구멍들 위로 흐드러졌다. 전선 뒤쪽에서는 귓바퀴에 들장미를 꽂은 농부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조지 오웰

스페인 내전 전선에서 115일 동안 복무한 조지 오웰은 참혹한 죽음의 늪 속에서 향기를 내뿜으며 피어 있는 꽃을 발견 했고 죽은자의 시신을 덮은 땅 위에 솟구치는 희망을 보았다.


세상의 모든 전쟁의 시작과 끝은 각자의 이권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대립하는 이들의  돈의 전쟁이다.


무자비한 방법으로 우크라이나 땅을 초토화 시키는 동안 푸틴의 집권은 무한대로 늘어 나고 있고 2009년 부터 이스라엘 총리를 역임하고 있는 벤냐민 네타냐후도 하마스 정권을 뿌리 뽑겠다는 기세로 달려들어 최첨단 무기를 쏘아 대며 장기 집권을 계속 유지 하고 있다.

세계 제 1의 군사력을 갖춘 대국이 전 세계 물류의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인질 삼아 관세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전쟁 종식 이후 평화의 시대 보다 전쟁 발발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많기에 더더욱 전쟁의 양상은 잔혹함을 넘어선 끔찍한 비극으로 치닫고 있다.


총 3년에 걸친 스페인  내전에서 약70만명이 희생되었다.


천지 지변과 같은 자연 재해 앞에 인간은 지구 상에 존재 하는 동물 개체군 중에 가장 취약한 존재 이면서 모든 생명체와 자연을 순식간에 파괴하고 파멸 하게 만들고 있다.


전선에서 살아 돌아 온 나에게 전쟁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우리로서는 막을  수 없는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일종의 자연 재해로 여겨졌다.

-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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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세기부터  베네치아는  118개의 섬이 촘촘하게 연결된 물 위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구도심 전체에 수로가 연결 되어 있어서  섬과 섬을 이동 할 때면 수상 교통 수단인  곤돌라(베네치아 시내의 운하를 다니는 배)를 타고  이동 해야 한다.다.

베네치아에도 사계절이 있지만 봄-여름-가을-겨울의 온도 차가 그리 크지 않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할 정도의 숲도 없고 나무도 몇 그루 없는 곳으로 기후 변화로 해수면 상승에 따른 침수 지역과 범위가 매년 늘어나고 있다.

최근엔 바다 온도가 상승해서 베네치아 앞 바다 색이 짙푸른 녹색 빛으로 변해 버렸고 산소가 부족한 물고기들이 떼 죽음을 당하는 죽음의 바다로 변해 가고 있다.

얼음이 녹지 않고 항상 얼어붙어 있는 영구동토층으로 덮여있는 알래스카가 2011년  여름 부터 얼음층이 녹기 시작하면서 2023년 대 홍수가 발생해서 마을 전체를 물 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역대 기후 중 연중 최고의 온도를 기록 하고 있는 2024년 8월 알래스카에 대규모 홍수가 발생하면서 단단한 얼음 층으로 뒤덮인 지역의 점점 줄어 들고 있다.

 이렇게 물로 녹아내린 지역은 겨울이 되어도 기온이 이전 만큼 뚝 떨어지지 않아서 북극과 인접했던 지역의 눈과 빙하까지 녹아내리고 있다.

얼어 붙었던 땅이 녹기 시작하면서 바다가 고스란히 뜨거운 열을 흡수하고 그 열기는 알래스카 지역 전체 온도를 높이는 반사판이 되어  이 지역의 온난화가 북극 보다 4배 이상 빨리 진행 되고 있다.

 알래스카의 고온 상태가 계속  진행 되고 있는 동안 지난 27일 네팔에서 대 홍수가 발생했다.

티베트 고지대에서 발발한 지진의 여파가   히말라야 산 높은 곳에 저장돼 있던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약 40마일(약 64.4㎞) 떨어진 강으로 추락해서 암석과 얼음이 뒤섞인 눈이 강 수위를 몇 백배로 끌어 올려서 마을 전체를 단숨에 집어 삼켜버렸다. 

지구의 기온이 2도 이상 오르면 북극의 빙하는 점점 녹아내려 저지대는 물에 잠기고, 사막화 되는 지역은  더 넓어져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점차 줄어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생물 종의 20~30%가 멸종 위기에 놓여 생태계가 파괴되고, 폭염, 폭우, 산불 등 자연재해는 더욱 심해져서 도심 중심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삶 역시 붕괴 되어버린다.

민생을 위한 정치가 권력을 쥔 기득권들의 싸움터가 되는 동안 전례 없는 폭염 속에서 손 선풍기와 텀블러를 가방에 넣고 일터로 나가는 서민들은 물가 폭등, 세금 폭등에 숨만 겨울 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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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폰을 충전 하는 걸 깜빡 잊고 눕자 마자 잠이 들어 버린 어느 날 아침, 충전기기에 올려 놓자마자  알림 메시지가 쉼 없이 쏟아진다.

대부분 광고성 알림이거나 이벤트를 알려주는 알림, 출석 도장을 찍으라는 알림 그리고 일과 관련된 알림 까지  초-분 단위로 쏟아진다.

손끝으로 터치해서  지우고 나면 스팸성 문자와 전화가 들어 오고 차단하고 신고 해도 마치  실시간 방문객들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듯 미끼성 문자와 광고 알림을 보낸다.

스마트 폰이나 이메일이 없었던 시대에는 이런 폭탄성 메시지와 불필요할 정도로 쏟아지는 광고들에 시간과 집중력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 같다.


내 생은 지극히 단순하다. 꿈과 같은 내면의 삶을 묘사하는 일이 운명이자 의미이고, 나머지는 전부 주변적인 사건이 되었다. 삶은 무서울 정도로 위축되었고, 점점 더 계속해서 위축되어간다. 그 어떤 일에서도 이처럼 큰 만족감을 얻지 못했다.

-프란츠 카프카 



1세기 전, 유럽의 어느 작은 도시에 살고 있었던 세기의 천재 프란츠 카프카는 주중에는 보험 회사에서 아침 9시 부터 저녁 6시까지  숨 돌림 틈 없이  일터에서 상해를 당한 이들에 관한 보험 업무를 처리하는데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 온 카프카는 회사원의 무게를 벗어 던지고 비로소 편지를 쓰고 일기를 쓰고 그리고 상상의 세상을 거닐며 글을 썼다.


잠 없는 밤. 벌써 사흘째나 이어지는 중이다. 잠이 쉽게 들지만, 한 시간 후 쯤, 마치 머리를 잘못된 구멍에 갖다 뉜 것처럼 잠이 깨버린다.

-프란츠 카프카

 

짧은 생을 살았던 카프카는 생전에 많은 이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죽기 전 부치지 못한 편지 뭉치를 모두 태우라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부탁했지만 그는 전쟁 중에 목숨을 걸고 프라하를 탈출 하면서 가방속에 카프카의 원고와 편지 뭉치를 들고 이스라엘 땅으로 건너갔다.

그가 남긴 작품에 비추어 보면 카프카란 인물은 소심하고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면서 극도로 낯을 가리며 쉽게 타인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 해 볼 수 있지만 그의 주변엔 항상 친구가 많았고 여성을 사귀는데도 적극적이였고 주말이면 친구들과 주변 국가로 등산을 떠나거나 야외에서 피크닉을 할 정도로 활달했다.


카프카는 건강 상태가 좋을 때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자주 찾아 갔는데 한 번은 편지를 보내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 그를 원망하자 카프카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미안. 너무 중요한 책이라서 덮을 수가 없었어. 

늘 폭력적인 관계지. 책이 먼저, 그 다음은 너."

-프란츠 카프카

책을 읽느라 친구에게 받은 편지 답장을 쓸 시간이 없었던 카프카는 책과 자신과의 관계를 폭력이라는 단어로 표현 했다.

스마트 폰 시대에 카프카가 살았다면 친구들과 실시간 메신저를 주고 받으며 카톡 대화방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았을 것이고 업무로 쏟아지는 카톡 알림 지시에 온 몸이 마비 되었을 것이고  주중에 챙겨보지 못했던 OTT제작 영화와 드라마를 보느라 또는  연인에게 문자 폭탄을 날리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손 안의 폰에서 울리는 온갖 스팸과 광고성 알람은   일상과 사고를  균열 시키는 이 시대의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매우 늦은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줄곧 오직 그 하나만을 간절히 소망했지만, 전화기로부터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구슬프면서도 힘찬, 무언의 노래와 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죠. 

그제야 나는 알아차립니다.

 인간의 목소리는 이런 소리를 뚫고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았고, 자리를 뜨지도 않았습니다. 

- 펠리체 바우어에게, 1913년,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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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리며 상품화 시켰던 앤디 워홀은 물질 만능 자본시대에  세상의 모든 것을 상품화 시키는데 능했다.

대중은 그의 예술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며 열광했고 비평가들과 전문가들은 저급하고 창의적이지 않는 타인의 창의력을 훔치는 교묘한 사기꾼이라 손가락질 했다.

광고계에서 창작 작업을 시작하면서 대중에게 널리 소비되는 예술이 무엇인지 깨달은 워홀은 기존의 정통 예술가들처럼 고립된 작업실 공간에서 작업을 하지 않고   공장처럼 생산하며 주문이 들어 오는 데로 찍어내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서  동시대인들이 무엇을 원하고 갈망하고 있는지  무엇을 소비하기 위해 지갑을 여는지 꿰뚫어 보았던 천재였다.

워홀은 이전 시대의 예술가처럼 고립된 공간에서 팔리지 않는 작품을 창작하는데 홀로 고군분투 하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기술을 가진 조수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고용해서 기계적으로 작품을 제작을 했다.

작품의 전체적인 아이디어와 구상은 워홀이 했고 작품 생산은 조수들이 제작 했다.

그 결과 워홀은 한 개의 작품을 단 몇 시간 만에 수십 개에서 수백 개를 만들어 냈다.

그에게 예술은 고차원적이고 고색 창연 하고 고급스러운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간파하고 각종 주문과 요구 사항을 적극적으로 끌어 와서 다른 사람의 창작물까지 복사하고 복제해서 실행에 옮기는 것이였다.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워홀의 예술을 무한 복제 하면서 기존의 예술적 가치와 창의적 작업에 대대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홍보와 선전 예술을 완벽하게 구사 했던 워홀의 팝아트는 대중들과 공생 관계가 되어 1960년대 미국 대중 문화 전체에 새 물결을 일으킨다.


 워홀이 컬러 스크린 프린터기기로  찍어낸 스팸 깡통은 광고미술에서 상업 미술시장으로 옮긴 로이 리히텐슈타인에 의해 비행기를 폭파 시키는 폭탄으로 변신한다. 

(c)꽝,로이 리히텐슈타인,1962

만화 같은 상상력을 시각화 시키며 짧게 내뱉는 비속어나 감탄사를 이용한 언어유희 같은 작품들이 드로잉과 회화, 사진 예술계를 넘나들면서 창조적 독창성이라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예술가들의 위상이 전복 되어 버린다.

1960년대 앤디 워홀이 시작한 소비 지향 팝 아트의 상업적인 인쇄 기법, 대형 광고판, 교통 표지판, 상품의 포장지,대중 잡지와 신문, 텔레비전을 이용한 작업은 21세기 현 시대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상징적인 1960년대 팝아트 세계가 매콤하고 바삭하며 치즈가 듬뿍 들어간 한국 길거리 음식과 만났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벤데이 도트, 고대비 원색, 감성적인 만화 표현 등 빈티지 미국 만화 미학과 서울에서 즐겨 찾는 길거리 음식의 매력적인 식감을 생생하게 조화시킨 특별한 경험을  영상을 통해 맛보세요.!

🔥 탑처럼 쌓여 있는 붉은 색 매콤한 떡볶이 

🍙 한 줄에 4천원까지 치솟은 K김밥

🍗 젠슨 황도 반한 초바삭 골든 K치킨

🧀 세계인들이 한 번 맛보면 빠져버리게 만드는  K 치즈 핫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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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파블로 피카소의 청색시대 걸작, '다림질하는 여인' (Femme repassant)의 푸른 붓자국 아래에는 100년 가까이 숨겨져 있던 서늘한 비밀이 있었습니다. 

파리 몽마르트르의 혹한과 가난이 지배하던 '바토 라부아르'(세탁선) 시절, 스물세 살의 피카소는 캔버스를 살 돈조차 없어 이전 그림 위에 새로운 슬픔을 덧칠했습니다. 

수십 년 뒤, 첨단 적외선 기술이 밝혀낸 캔버스 밑바닥에는 여인의 두 손 아래 거꾸로 뒤집힌 한 남자의 얼굴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요? 

그리고 이 그림은 어떻게 청색시대의 차가운 절망과 곧 다가올 장밋빛시대의 은밀한 온기를 동시에 품고 있을까요? 

캔버스 너머 120년 전 파리의 골목과 피카소의 치열했던 삶, 그리고 인간의 고통 위에 새겨진 불멸의 존엄성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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