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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 저널》에서 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부고를 쓰는 기자로 알려져 있다. 내가 쓰는 부고 기사 대부분은 흥미롭고 주목 받을 만한 삶을 살았지만,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부고다.]

-제임스 R. 해거티


매일 누군가의 사망 시간과 날짜를 체크하는 사람이 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한 생을 마친 이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

그의 직함은 월스트리트 저널 소속의 부고 전문 기자 제임스 R. 해거티

그는 매일 2~3시간 동안 전 세계에서 속보로 올라오는 망자들의 이력을 읽으며 부고 기사 작성을 준비한다.

지난 40여년 동안그가 쓴 천 여명의 부고 기사의 주인공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은 유명인들, 또는 유명했어야 하는 사람, 악명 높은 사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는 부고 기사를 쓰기 전, 스스로에게 세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이 사람이 본인의 인생을 살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둘째, 왜 그걸 목표로 삼았을까?

셋째, 성공했을까?


[의료계를 선도하던 한 의사가 사망했고, 수많은 이들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동료들과 환자들, 의료개혁 운동가들이 거듭 말하기를, 이 의사는 강단 있고 인간적이고 명석한 사람, 주변 분위기를 북돋우고 주도하는 사람, 엄격한 교육자이자 정력적인 연구자, 항상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비비언 고닉의 <상황과 이야기> 중에서

여기 , 한 의사의 장례식 장에 추모객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

미국의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 그리고 에세이스트인 비비언 고닉은 말 없이 조문을 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누군가 낭독하는 추도사를 듣고 있다.

그 추도사를 낭독하는 사람은 고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40대 여성 의사로 그녀가 읽는 추도사를 통해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의 인생을 떠올리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다.

어떤 추도사였길래 저널리스트 이자 에세이스트인 비비언 고닉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을까?


[추도사 연사는 선배 의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던 풋내기 의사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이 기억은 추도사의 구조를 결정하는 구성 원리로 작용했다. 구조는 질서를 부여했다. 질서는 문장의 모양새를 다듬었다. 다듬어진 모양새는 언어의 표현력을 더욱 높혔다. 농밀해진 표현력은 연상에 깊이를 더했다. 한 젊은이의 견습 시절 분위기를 전하는 묘사, 사회 변동기의 의료업, 그리고 잘못을 지적하기만 할 뿐 칭찬에는 인색한 스승에 대한 양가감정이 켜켜이 쌓여 마침내 하나의 드라마가 짜였다.]

-비비언 고닉


비비언 고닉은 이날 40대 여의사의 추도사를 통해 어느 한 사람에 대해 말해지지 않은 것, 결코 말로 할 수 없는 것 까지 전부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한 망자가 남긴 인간관계의 따스하고도 고통스러웠던 불완전함에 통감했고 그 날 장례식장에서 받은 감동의 추도사는 평생 그녀의 가슴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오로지 고인의 업적과 삶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추도사를 쓰고 읽은 여의사는 자신이 망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유와 함께 자신이 왜 이 자리에서 그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놀라울 정도로 명료한 언어로 말했다.


흔히들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쓸 때 자신의 머릿 속에서 뭉뚱그려진 하나의 이미지가 두서 없이 종이에 쏟아져 나오게 된다.

그렇게 쏟아낸 글 속에는 글쓴이의 시각과 어조, 구사하는 문장의 리듬과 대상이 적절한 위치에 들어서 있지 않게 된다.

결국엔 온갖 넋두리와 , 푸념 , 변명 그리고 모호한 주제, 흐지부지한 결말로 마무리 될 뿐이다.

자신이 쓴 글을 다른 이들에게 공감력을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아무리 어렵다 해도 에세이나 회고록을 쓸 때는 소설가나 시인처럼 자기 성찰이라는 견습 기간을 거치며, 왜 말하는가, 누가 말하는가를 동시에 알아내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읽혀지는 세상의 모든 글에는 상황과 이야기가 있다.

그 상황이란 특정 주제의 맥락이나 주변 환경, 중심 플롯이고, 이야기란 글쓴이가 풀어내는 감정적 경험과 통찰력으로 허구의 인물과 시대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선, 좋은 글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활자가 꿈틀거릴 정도로 살아 숨 쉬며 읽는 독자들이 무언가 발견하고 알게 되고 궁극적으로 납득 시키는 글이다.

둘째, 시인과 소설가, 기자와 칼럼니스트, 기타 창작자들 모두 독자들에게 특정 상황과 이야기를 최대한 솔직하고 정직하게 써야 한다.

“그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의 이야기는 무척 매력적이었어요.”


우리는 매일 각종 매체에서 쏟아지는 뉴스와 소식을 읽는 동안 그곳이 어디인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기사를 읽고 에세이를 읽고 칼럼을 읽어나가면서 하나 씩 알아 나간다.

저널리즘에서 에세이 그리고 회고록으로 넘어 갈 수록 독자들은 점점 이야기 속의 화자에 대한 탐구심이 높아지고 더 깊어지게 된다.

따라서 글을 쓰는 이는 나와 그곳, 여기와 저곳, 그들과 저들 사이에 담겨있는 상황과 이야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떼어버리거나 축소하거나 확장 시켜서 이 모든 이야기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 되어 있는지 자신만의 언어로 써내야 한다.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쓰게 되고 사건 순서도 미세하고 바뀌고 대사도 미세하게 바뀐다. 좋은 글은 거짓말을 마구 하면서 진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슬아

작가 이슬아는 구독료를 내는 회원들을 모집해 매일 글 한 편을 보내주는 ‘일간이슬아’라는 구독모델을 창안해서 높다란 문단의 벽이나 특정 문학상 수상자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자신만의 출판 판매 전략으로 작가이자 연재노동자가 되었다.

그렇게 수 년동안 글을 써왔고 드디어 온라인 서점 독자 투표로 ‘2023년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1위에 뽑혔다.

작가 이슬아는 에세이로 출발해서 소설과 드라마로 확장된 전방위 작가로 1인 출판사 헤엄을 운영하며 자신이 쓴 글을 직접 편집해서 출판하고 있다.



“글을 쓸 때 빼기를 되게 열심히 한다. 군더더기가 없을 때까지 빼려고 한다. 그건 문장의 리듬감 때문인 것 같다. 잘 쓴 문장들은 눈으로만 읽어도 경쾌한 리듬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리듬감을 굉장히 중시한다.”

-이슬아


어머니와 자신의 이야기에 관한 회고록을 쓴 비비언 고닉도 자신의 삶과 어머니의 삶에서 무엇을 빼야 할지 가장 많이 고민했다.



'두 여자 모두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했고, 절망에 빠졌다. 한 명은 잃어버린 사랑을 찬미하는 데 남은 생을 바쳤다.'

-비비언 고닉


그녀의 회고록 집필은 더뎌져 갔고 문장은 한 없이 늘어져만 가더니 서서히 문장 속에 자기 변명만 쌓여갔다.

그리고는 지난 시절을 떠올리다 욱하는 감정이 터져 나와서 문장이 흐트러지더니 어느새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서 쓰던 원고를 덮어버렸다.


[나는 이 이야기, 냉엄한 진실의 서술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를 감상적이거나 냉소적이지 않게 풀어내고 싶었다. 내게 번뜩인 통찰- 내가 어머니처럼 되었으므로 어머니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은 나의 지혜였다. 그런 심리적 혼란의 이야기를 절실한 마음으로 추적하고 싶었다.]

-비비언 고닉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적절한 어조와 목소리를 찾아내야 하고 찾아 냈다면 쓰는 동안 쉼없이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며 문장의 유연하게 흘러 갈 수 있게 리듬감을 부여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독자들은 서술자를 믿고 그 서술자가 이야기하는 세상 속을 보고 탐험하는 동안 한 편의 이야기에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인생을 벽화로 그려본다면 어떨까. 그 벽화에서 어떤 패턴이나 의미를 찾으려면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봐야 한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는, 아무리 지루해 보일지라도 기본적인 세부 사항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제임스 R. 해거티


푸르른 청춘 시절엔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공간과 시간 한 가운데 서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 갈 수록 서있는 공간은 좁아지고 중심에서 벗어나 어느덧 시간만이 떠밀려서 허둥지둥 거리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살아 온 지난 날을 되돌아 볼 때면 흠짓 놀라게 된다.

시간이 흐를 수록 , 나이를 먹을 수록 앞으로 다가 올 날에는 플러스 + 되는 일 보다는 마이너스- 가 되는 일이 더 많아진다.


[1943년 7월 29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같은 날 몇 시간 후, 아버지의 막내 아이가 태어났다. 이보다 한 달 전, 우리가 이런 일들에 대비하느라 모든 기력을 쏟아붓고 있을 때, 디트로이트에서 세기의 가장 잔혹한 인종 폭동이 터졌다.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몇 시간 후, 아버지가 장례실에 안치되어 있는 사이, 할렘에서 인종 폭동이 일어났다. 8월 3ㅣ일 아침 우리는 산산이 부서진 유리 파편들 사이를 뚫고 아버지를 모셔갔다.]

-제임스 볼드윈의 <미국의 아들 기록> 중에서


이 글을 쓴 작가 제임스 볼드위은 1943년 8월 3일 아침의 풍경에 아버지의 죽음, 새 생명의 탄생,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시기에 뉴욕 할렘가의 모습을 몽타주처럼 빚어냈다.

이 시대를 살아 보지 않은 독자들은 문장을 읽어 나가는 동안 어느 흑인 남자의 죽음 속에 누군가의 아버지이면서도 폭력의 시대에 백인들에게 무차별 공격과 차별을 받았던 그 시대의 모든 흑인 남자들의 상황과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공감하게 된다.


우리는 매 시간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여러 상황과 이야기에 둘러 쌓여 살고 있다.

손 안에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는 때로는 전문가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더 많이 알 수 있고 광범위한 빅테이터 수집을 통한 알고리즘 축적으로 간단한 키워드로 세상의 거의 모든 상황과 이야기를 내 스스로 찾아내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나날이 읽고 쌓여가는 이야기를 읽다가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하고 돌연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될지 모른다.

부고 기사만 40년 동안 쓴 제임스 R. 해거티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유언장 작성이나 다락방 청소처럼 성가신 일이 아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어쩌면 즐거운 일일지도 모른다. 뜻밖의 성과를 얻을 수도 있고 말이다. '


무언가를 완벽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글쓰기 수업을 듣고 전문 기관에서 일정 시간 동안 교육을 받아도 완벽한 글을 쓰기 힘들다.

하물며 우리 인생은 그렇게 하기에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https://tobe.aladin.co.kr/t/scott

2023년 1월 12일 부터 투비컨티뉴드에 글을 매일 쓰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총 498개 노트를 발행했다.

내일 9월 11일에는 500개 노트가 발행 될 것이다.


나는 매일 무엇에 대해 쓰면서 읽고 , 무엇을 쓰기 위해 읽고 있다.

머릿 속에 담겨진 생각을 문장으로 정리하는 동안 내가 그동안 보고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활자로 재생 시키며 나를 탐구하며 이 세상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매일 글을 쓰라고 재촉하거나 등을 떠다 밀지 않지만 현재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내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게 되었다.

故신영복 선생님은 이런 말을 남기셨다.


'훌륭한 사람 중에 글을 못 쓰는 사람은 많다. 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해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쓰는 문장이 형편 없어도 매일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동안 결국엔 좋은 글을 쓰게 되면서 좋은 사람으로 거듭 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도 글을 쓴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사소한 것들을 그냥 쓰세요. 혹시 당신이 20살이고 죽음이 너무 멀리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지금 시작하세요. 쓰기 전까지는 당신의 인생 이야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맞춤법이 틀리거나 디테일을 놓쳐도 괜찮습니다. 쓸수록 쌓이고 쌓이면 나아집니다.”

-제임스 R. 해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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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9-11 0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투비에 쓰신 글이 곧 오백편이 되는군요 날마다 쓰기 쉽지 않죠 짧은 글도 아니고... 대단합니다 읽고 쓰고 실천하면 더 좋겠지요 아니 쓰기라도 하면 좀 나을 것 같아요 글에는 안 좋은 것보다 좀 나은 걸 쓰려고 하니... 안 좋은 거 쓰는 사람도 있겠네요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scott 님 이번 주가 좋은 한주이기를 바랍니다


희선

scott 2023-09-11 10:39   좋아요 1 | URL
네, 1월 12일부터 오늘까지 총 500개 노트를 썼네요.
손에 무언가 쥐고 써야 하는데 ㅋㅋㅋ
읽고 나면 휘리릭 날아가버리는데 쓰기 위해 이것 저것 찾아 읽으니 머릿속에 오래 남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좋은 9월
희선님 한주 시작 멋지게 ^^

어쩌다냥이 2023-09-11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대단하세요 읽고 난 책을 쓰리라 다짐하다가도 읽을 시간도 없는데 쓸시간이 어딨어 그냥 내 머리에 있으면 되지 해놓고는 소개글에 있던 블론드를 이북으로 사서 듣는데 ㅋㅋㅋㅋ 뭔가 기시감이..
책장을 뒤져보니 3권짜리였던 예전책이 있더라고요
읽고 난 후 리뷰를 쓰지 않은 폐해일듯요..

페렴아기냥이 둘을 구조해 하나는 별이 되었고
하나는 치료후 임보 10년 챙긴 길냥일 구내염으로 구조후 입원 ㅜ
데려가 달라고 바지잡는 아기냥이까지..
이젠 목뜯긴 성묘 길냥이 구조하려는데 못해서 출근하면 비몽사몽이네요

투비에도 들려주는 기능을 만들어주면 돟겠네요

scott 2023-09-11 15:47   좋아요 0 | URL
목이 뜯겨져 나가다뇨 ㅠ.ㅠ
길냥이 보살핌에 들어가는 비용
냥이님 엄청 날 것 같습니다
냥이들 병원비도 엄청 큰돈

필로소픽 2023-09-11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콧님 덕분에 비비언 고닉 선생님, 시리 허스트베트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글 잘 읽고 갑니다! 용기를 내서 처음 댓글 남겨 보아요~^^

2023-09-11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3-09-1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슬아 작가가 1위에 뽑혔나요? 대단한 작가네요!!!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사람들이 강이라고 하거나, 우유가 흘러내린 흔적이라고 하는 이 뿌옇고 하얀 게, 사실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우유가 흘러내린 흔적'이 무엇인지 묻자 캄파넬라가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수줍음이 많은 조반니는 들다 만 손을 황급히 내린다.

선생님의 질문에 은하수라고 대답한 캄파넬라는 친구 조반니가 머뭇거리고 망설일 때마다 곁에서 챙겨주는 따스한 친구로 은하 축제의 날에 하늘타리 열매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등불을 넣어 강에 띄우는 놀이를 하러 함께 간다.

캄파넬라와 달리 다른 친구들은 가난한 조바니가 엄마를 위해 우유를 사 오던 그날 놀이에 끼워주지 않아 조반니는 홀로 언덕에 올라가 밤하늘을 바라본다.


'은하정거장, 은하정거장.'


언덕 풀 밭 위에 누워 있는 조반니의 눈 앞에 갑자기 수억 마리의 반딧불이 날아오르듯 불빛이 쏟아지고 정신을 차린 조반니는 어느새 기차 안 열차석에 앉아 있다.

이곳과 저곳의 세상을 가로 질러 달리는 은하철도

은하 열차에 탑승한 조반니는 세상을 초월하는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2023년의 8월도 끝을 향해 달려 가고 있다.

처서를 지나 잠시 시원한 바람이 불다 이내 뜨거운 공기가 다시 올라왔다.

청량 하고 맑게 개인 가을의 시작은 멀게 만 느껴지는 8월이다.


[그는 아들과 나란히 버스 맨 뒤에 앉아 버스가 습지대 남쪽을 크게 우회 하는 동안에 셸터 콘크리트 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셸터의 위치를 그와 같이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될까? 그것은 세계의 마지막 전쟁이 일어난다면 핵폭발의 열과 충격파가 이 도시를 엄습하기 전에 냉정함과 끈기를 가지고 진과 함께 걸어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심한 열로 콘크리트의 외벽이 번쩍거린 다음에 이어질 충격파는 어린아이의 귀에도 울릴 것이다. 이사나는 그때 평온하게 속삭이는 듯한, ‘세계의 끝, 입니다’라는 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오에 겐자부로의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중에서


핵전쟁의 위기 속에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 진과 함께 아버지 이사나는 핵 방공호로 짓던 지하에 건물을 쌓아 올린 형태의 '핵 셸터'에 은둔한 채 세상과 단절한다.

은둔하는 남자 이사나는 자신을 나무와 고래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아들 진의 미래를 고래에게 부탁하며 세상을 움직이는 건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라 믿고 버려지기 쉬운 존재인 스스로를 구원하겠다는 의지로 세상에서 낙오된 청년들과 연대 해서 정부와 맞선다.

이사나가 쥔 총엔 정확히 다섯 발의 총알만 장전 되어 있다.

그 다섯 발의 총알로 무력으로 진압 하려는 정부를 무너뜨리지도 못하고 핵전쟁의 위협에 처해 있는 세상을 구원하지도 못한다.


[당신은 나라의 미래가 닫힌다 해도 자신은 나이가 들어 얼마 못 살 테니, 책의 지식만은 어떻게든 지닌 채로 죽자, 라고 말할 사람 아닌가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모습을 보이게 됐을까.]

                                                 -오에 겐자부로의 <만년 양식집> 중에서


2023년 3월 3일 오에 겐자부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책장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모조리 꺼냈다.

몇 편의 단편집과 장편집은 추가로 해외 주문을 해 놓고 그의 초기작 부터 읽기 시작해서 7월에 전부 완독 했다.

오에는 생전에 인터뷰도 활발하게 했지만 주요 매체에 기고글도 많이 남겼다.

아들 히카리와 함께 나온 다큐부터 노벨상 수상식을 하러 스웨덴으로 떠나는 여정을 담은 영상까지 보면서 나는 오에가 세상에 남긴 글을 읽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이 결정되던 날 밤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1994년 10월 13일, 저녁 9시가 조금 넘어서였지요.

전세 승용차에서 전화를 받은 교도통신 기자가 '아앗!'하고 다소 만화적으로 외치는 바람에 도쿄의 세이조 자택 앞에 모여 있던 저희들은 순간적으로 수상이 결정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삼사십 명이 있었던가요?

''''일본 현대 작가들이 쌓아 올린 업적 덕분에 살아 있는 내가 수상한 것이다...

이 말이 제 입에서 떨어지자 마자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받아 적던 기자들 모습이 제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두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렸고 도대체 내가 여기 왜 서있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뉴스에 제 얼굴과 목소리로 전부 도배 되고 온갖 신문 잡지 마다 제 얼굴이 표지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기자들 40명 정도가 저희 집에 찾아 왔고 그리고 몇 달 후 마침내 수상식이 열리는 스웨덴으로 날아갔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 와서 앞서 인터뷰 예약을 한 기자들과 몇 시간 동안 인터뷰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웠습니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눈을 뜬 저는 거울을 보고 이렇게 중얼 거렸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세상을 향해 마음껏 목소리를 높이자.']

                                                                                                  -오에 겐자부로


[집주인이 어두운 목소리로 이제 막 태어난 새끼 말을 저 들판에서 뛰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방사능비로 오염되었으니까요, 라고 말했을 때, 끊임없이 가랑비가 내리고 있음을 실감했다.

이 방사성물질로 인해 오염된 땅을 (최소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실제로는 그런 느긋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인간은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가 없다. 그렇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표정이, 불충분한 조명 아래 드러난 집주인의 상반신과 카메라를 받친 PD의 어깨를 바라보는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우리로 묶을 수 있다면, 그런 일을 우리가, 동시대의 인간들이 해버렸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복구할 수 없다……이런 생각에 충격을 받고 나는 노인의 울음소리를 냈던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만년 양식집> 중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평생 동안 사회를 향한 발언과 행동에 거침 없었고 어떤 협박과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아베가 죽기 몇 달 전 어느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선한 눈빛과 미소 뒤에 숨은 결의가 섬짓 했다는 말을 했고 정확히 100살을 채운 헨리 키신저는 자신의 회고록에 미소를 띄우며 유창한 영어로 자신에 맹렬하게 질문을 퍼붓던 오에 겐자부로를 어디서든 마주치는 게 껄끄러웠었다고 언급 했을 정도로 인간 오에 겐자부로는 어떤 국가, 어떤 권력 앞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외쳤다.


[내가 쓴 소설이 인쇄되고 있는 이상, 남아 있는 몇 권의 책이 미래에 소수의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어 사람들이 열중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때 나는 유령이 되어 나타나서 '그렇습니다. 나는 재미있는 것을 썼습니다 ! 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오에 겐자부로가 남긴 책을 전부 완독 하고 난 후 중국의 대 문호 '루쉰'이 남긴 글을 차례 차례 읽어나갔다.



[인류의 멸망은 매우 외롭고도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몇 사람의 멸망은 결코 외롭거나 슬프지 않다. 생명의 길은 진보 하는 것이다.

항시 무한한 정신이라는 삼각형의 빗면을 따라 올라가니 어떤 것도 그를 방해 할 수 없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부조화는 여전히 많다. 인간 스스로 시들고 타락하고 퇴보한 것도 여전히 많다. 그러나 생명은 결코 이 때문에 돌아보지 않는다. 인간의 절박하고 완벽한 잠재력은 어둠이 몰려와 대세를 막아도 비참함이 사회를 습격해도 죄악이 사람의 도를 더럽히더라도 항상 이런 철가시를 즈려 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의 면전에서 웃으며 뛰며, 멸망하는 사람들을 뛰어 넘어 앞으로 나아간다.

무엇이 길인가? 바로 길이 없던 곳을 밟아 길을 만들어 낸 곳이다. 가시덤불만 있던 곳을 개척하여 만들어 낸 곳이다.

이전에도 길이 있었으니 이후에도 영원히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인류는 외로울 리 없다.

왜냐하면 생명이 향상적이고 낙천적이기 때문이다.

                                                                              -루쉰의 생명의 길 중에서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에 방송된 일본 제국의 종전 선언을 한지 78년의 시간이 흘러 2023년 8월 24일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시작했다.

자신들부터 살겠다며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 시작하자 전문가들은 앞다퉈 실시간으로 방사능 오염 진단 키트를 꺼내 들고 문제 없다고 외치고 있다.

맑은 샘물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샘물은 전과 다름 없이 맑고 투명하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리고 연달아 핏물을 쏟아 부우면 어디선가 엄청난 양의 조류가 닥쳐 오지 않은 이상 샘물은 어느새 붉은 핏물로 가득 차 버리고 차츰 시간이 흘러 악취가 나는 오염수가 된다.



[제가 지금껏 얼마나 많은 생명을 해쳤습니까. 그런데 제가 잡아먹히게 되자 도망치다 이 꼴이 되었습니다. 이왕에 죽을 거라면 족제비에게 잡아먹혀 족제비가 오늘 하루 목숨을 잇도록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신이여, 다음엔 이렇게 쓸모 없이 버려지지 않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쓸 수 있게 해주세요.']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 중에서

은하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이 정거장에서 하나 둘 내리고 마지막 조반니와 그의 유일한 친구 캄파넬라 친구만 덜렁 기차 안에 남겨진다.


'캄파넬라 ,다시 우리 둘만 남았네. 어디까지든 함께 가자 나는 이제 그 전갈 처럼 정말로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 몸 따위는 백 번이고 불에 탄다고 해도 상관없어.'


1924년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며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를 때 미야자와 겐지는 <은하철도의 밤>을 썼다.

' 나 이제 저런 커다란 어둠 속이라도 두렵지 않아.

정말로 모든 사람의 진정한 행복을 찾으러 가겠어.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우리 함께 나아가자.'


마지막 손에 탑승권을 쥔 조반니는 깨닫는다.

친구 캄파넬라는 죽어서 은하 끝 하늘나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무시 무시한 무기로 세상의 반을 불태우며 이웃 국가의 무고한 생명들을 마구 짓밟은 일본은 자신들만 살겠다고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 하고 있다.

핵과학자들(미국 핵과학자회보·BSA)이 인류 멸망까지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만든 '운명의 날 시계'가 2023년 1월 1일 '자정 90초 전'으로 3년 만에 10초 앞당겨졌다.

그리고 8월 24일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시작으로 10초 더 앞당겨 질 것이다.

매달 부모님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병원 진료를 받으러 간다.

부모님은 자신들은 이미 세상을 다 살았지만 남겨진 우리 세대와 미래 세대의 앞날, 미래를 걱정 하고 계신다.

부모님 세대가 걱정하고 염려 해도 '운명의 날 시계'는 지금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상처투성이인 나를 벌거벗기고,

당신이 따온 약초 기름을 발라주면서 어머니는 탄식했다.

아이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살 수 없다고 말해도 되나?

그리고 어머니는 나에게 오랫동안 수수께끼가 될 말을 이어갔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만년 양식집>중에서

현재 지구 이 땅에서 우리가 다시 살 수 없다면 우리의 미래 세대 역시 살아 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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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8-27 0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가 세상을 떠나고 그동안 오에 겐자부로 책을 다 보셨군요 저는 예전에 한권 봤군요 겨우 한권... 소설도 아니고 《읽는 인간》... 그걸 보고 다른 책도 봤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지는 못했네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되네요 바다뿐 아니라 사람도 그렇게 좋지는 않을 텐데... 시작했다고 해서 끝까지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걸 바꾸려 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사람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다음 세대를 생각해야 할 텐데...


희선

2023-08-27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27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27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27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27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 삶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암초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인생의 너무 큰 몫을 출생이며 빈둥거리기, 수련 과정 따위에 할애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 중에서


연이어 터지는 흉폭한 사건과 묻지마 사건으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치솟고 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행복과 기쁨 그리고 행운만 깃들 수 없지만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로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보호 받지 못한다는 것이 현재 2023년의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삶의 가르침이 되는 말은 어릴 때 부모님의 집에서 배웠다. 모두 엄격한 지혜였지만, 오래된 가재도구처럼 아름답고 단순할 뿐이었다. 그런 걸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경구는 항상 문장 하나로 표현되었고, 곧 마침표가 찍혔기 때문이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중에서

학교에서는 폭력과 욕설이 난무 하고 부모는 서로를 견제하고 헐뜯는 경쟁심으로 충만해서 10살 영재에게 근거 없는 비방과 협박 메일을 보내고 있다.

상처와 충격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 같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겨서 언제 어느 순간에 불쑥 튀어 나올지 모른다.

마치 주기적으로 감정의 높낮이가 오르락 내리락 하듯 하나의 상처와 폭행, 폭언으로 받은 상처가 어제는 견딜 만 했지만 오늘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떤 보상과 위로로도 완전하게 치유 되지 않는다.

산다는 게 이토록 힘이 든다는 건 인간의 운명인 것인가?

인간의 삶에 밀물과 썰물이 있다면 밀려 오고 쓸려 내려가는 시기와 간격의 고리에서 잠시 멈춤이라는 건 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속도에 얽매여 산다. 밤낮으로 빠르게 달리고, 다른 모든 일도 빠르게 처리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우리를 둘러싼 네 벽이 고정돼 있는 것처럼 면도하고 밥 먹고 사랑하고 독서하고 업무를 본다. 섬뜩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 벽들이 움직이고,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길고 굽은 더듬이처럼 벽의 레일이 계속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중에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죽은 딸,테니스 공에 맞아 즉사한 남동생, 세상에 둘도 없던 친구 라 보에시의 사망, 신장 결석증을 앓다 피를 쏟아 내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했던 미셸 에켐 드 몽테뉴(1533-1592)는 38살이 되던 해 “남아 있는 삶이나마... 누구의 방해도 없이 지내다 죽겠노라' 다짐하고 조상 대대로 살았던 고향 프랑스 서남부의 페리고르로 귀향한다.

귀향 한 성 밖 너머 수시로 출몰하는 전쟁의 피 냄새가 끓어 올랐던 시기에 몽테뉴는 지름이 16보, 둘레가 50본 정도인 서재에서 칩거하며 1천 권 남짓의 책을 읽으며 종당 천장에 새겨 놓은 로마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시구를 지우고 이런 경구를 새겨 넣었다.


' 더 오래 살아도 새롭게 얻을 낙은 없다!'

-몽테뉴


그가 이 시기에 써낸 『에세』는 근대 시대로 넘어가 마르셀 프루스트, 로베르트 무질,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에세이>라는 장르를 탄생 시키며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적 사유의 글은 인간의 내적 삶이 결정적인 사유를 통해 추출해낸 단 하나의 변할 수 없는 형식이 되었다.



[처음부터 나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란 곧 작가를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 또렷이 보일 때까지 계속 읽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더 큰 생각은 무엇일까? 진정한 경험은? 진짜 주제는? 내게 중요한 것은 답을 찾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비비언 고닉의'상황과 이야기' 중에서


나는 매일 글을 쓰면서 세상을 탐구 하며 내 안의 나를 다양한 각도로 살펴 보고 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사회와 가정에서 소비 되고 허비 되고 끌려 다니는 '내가' 아닌 주체적인 '내가' 된다.

1월 12일부터 투비에 매일 글을 쓰고 있으니 나역시 몽테뉴, 비비언 고닉처럼 에세이를 쓰고 있는 것이다.

https://tobe.aladin.co.kr/t/scott


[문학의 미래는 단지 책장에 책 몇 권을 덧붙이거나 위대한 여성 작가나 호메로스를 꼼꼼히 읽고 세련된 사람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에 관한 것이다. 나는 복수의 목소리와 복수의 관점을 담은 복잡한 소설들을 체험하는 것, 고통 받고 축하하고, 여행을 떠났다가 집에 돌아오거나, 그저 방안에서 깊은 생각에 잠기고, 친절하거나 잔인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소설들을 체험하는 것을 통해, 이 상상의 인간들은 실제의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주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낯선 것이 친숙해진다. 소설 읽기는 우리 정치적 불행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 문제라면, 조직화, 적극적 저항, 더 강경한 수사가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야기들이, 좋은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시리 허스트베트의 어머니의 기원 중에서

한국에서 알랭 보통의 에세이들이 날개 돋치게 팔리는 동안 나는 뉴욕에서 시리 허스트베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그녀가 쓴 책들 기고한 에세이들을 모조리 찾아 읽었다.

그 시기에 뉴욕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폭행과 범죄가 날마다 실시간으로 발생했고 대낮에 거리에서 아시아계들이 흑인, 히스패닉 부랑자들에게 피가 터지게 폭행을 당했던 시기였다.

다민족 국가로 이방인과 이민자들, 불법 체류자들로 넘쳐 나는 미국 뉴욕은 그야말로 아시아계들에게는 정글 같은 곳이여서 그곳에서 아시아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매일 아침 문 밖을 나설 때 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어디에서든 안심할 수 없는 곳이다.

'여성은 성적 대상이 아니다.'라는 표어를 크게 적은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해도 아시아계 여성들의 인권 보호는 지켜지지 않는 곳이 뉴욕이다.


그 시기에 시리 허스트베트는 '여자가 성적 대상이면 남성도 성적 대상이다'라며 남성들이 품고 있는 성적 감성을 문장으로 낱낱이 해부 하는 기고 글을 썼다.

미국의 페미니즘은 2016년에 터져 나온 미투 사건 이전에 청교도적인 사고가 깊이 자리 잡은 곳이였다.

'성적 자유와 에로티시즘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한 시리 허스트베트는 법적으로 해석되지 못하는 '성차별'의 문제, 여성의 인권에 대해 심리학적 사유와 과학적인 사고 방식으로 분석했다.

시리 허스트베트의 글은 인간의 기억과 상실, 차별과 혐오, 모성, 이민자들의 현실을 예술적인 언어로 문학·신경과학·정신분석·예술·사회 분야를 넘나들며 여성성과 남성성이 모두 뒤섞여 있는 독특한 매력으로 넘쳐 난다.

그녀의 글이 기고 되고 책으로 출간 될 때마다 찾아 읽고 구매하는 이유는 세상을 집요하게 분석하고 파헤치는 작가 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유명 작가들이 펴낸 에세이 집에는 자기만의 이야기, 자기 만의 세상에 대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좁혀져서 실시간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의 세상을 손 안에 폰으로 볼 수 있음에도 세상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바라보는 시각은 점점 편협해져서 거짓과 진실에 대한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미국 2세대 페미니스트인 80대 비비언 고닉은 여전히 길을 걸으며 세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어떤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70세를 앞둔 1955년생 시리 허스트베트도 사회에 고착된 죽은 언어, 여성 혐오, 차별,폭력, 폭언에 대해 맞서 싸우며 상투적인 언어가 아닌 논리와 설득의 아우라를 휘감고 오래고 영예로운 싸움의 선봉장에 서 있다.



불안한 시기에 두 권의 뛰어난 작가들의 책이 펀딩 되고 있다.

이미 나는 두 권을 읽었지만 모두 어려운 시기에 훌륭한 양서가 세상에 널리 읽혀지는 바램으로 펀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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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08-21 0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리 허스트베트 글 좋네요 저는 한권도 안 읽었는데ㅜㅜ 스콧님 소개 보고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근데 이 분 남편이 폴 오스터군요ㅎㅎㅎ

2023-08-21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시우행 2023-08-21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소개 감사합니다.

scott 2023-08-21 09:56   좋아요 0 | URL
오늘도 무덥네요
호시우행님 한 주 시작 시원하게 ^^

건수하 2023-08-21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리 허스트베트 전에 어딘가에서 보고 (스콧님이 언급하셨을까요) 이름이 어렵다고 생각하고서는 잊어버렸는데 오늘 이 글을 보니 급 관심이 생겨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요즘의 난무하는 범죄 때문인 것 같아요) 소개 감사합니다.

scott 2023-08-21 09:56   좋아요 1 | URL
네, 전에 제가 언급 했습니다

좋은 책 어려운 시기에 출간 결정한 출판사 칭찬하고 싶어서 올렸네요 ^^

희선 2023-08-22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cott 님은 벌써 읽으신 책이 한국말로 나오는군요 그런 거 보면 반갑겠습니다 요새 일어나는 일이 그리 좋지 않지만... 한국도 좀 멈춰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경제만 많이 생각했잖아요 한동안 저녁이 있는 삶을 살자 했지만 정말 그렇게 산 사람이 얼마나 될지... 세상은 이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겉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2023-08-22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억울한홍합 2023-08-27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에서부터 읽고 싶어집니다~~

scott 2023-08-27 20:59   좋아요 0 | URL
홍합님 9월 도서로 강추 ^^
 


[외국 도시에서 지인들에게 헛되이 통화를 시도하는 행위는 참으로 큰 공허함을 자아냈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을 때의 감정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섰고, 다이얼을 돌리는 이 행위가 마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도박인 듯이 느껴졌다. 그러므로 전화기에서 다시 튕겨나온 동전을 집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런 계획 없이 밤이 될 때까지 다시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아마도 그러느라 너무 지친 탓인지, 나는 내가 아는 누군가가 방금 곁을 스쳐지나간다는 느낌에 수시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런—다른 명칭을 붙일 수 없는—환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내가 수년 동안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사람들, 말하자면 이미 죽은 사람들 뿐이었다.]

                                                                   -제발트의 <현기증과 감정들> 중에서


영국 대학에서 독일 문학을 가르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제발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기 전 까지 고작 13년 동안 작품 활동을 했음에도 전 세계 곳곳에 제발디언이라는 독자들을 탄생 시키며 유럽 문학의 거장이 되었다.

제발트 소설의 중심의 거대한 하나의 축은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여행 속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들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의 여정에는 삶의 장소를 바꿈으로써 인생의 불운한 시기를 극복해보려는 희망 없이 낯선 공간을 통해 그곳에 축적된 기억의 서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에 젖어 세상을 유랑하는 방랑자다.


제발트는 고향 독일을 떠나 영국에 정착한 채 모국어를 가르치며 자발적으로 고독한 망명자로 이미지를 통해 문자로는 언어화 되지 않는 한 인간의 기억과 역사 속에서 삭제된 과거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상투적인 의미로 얼룩진 세속적인 문학 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가 구사하는 문장 속 <기억das Gedächtnis>이라는 단어 앞에는 소유격이 붙지 않는다.

이는 곧 나의 기억과 너의 기억 그리고 그들의 기억 사이에 어떤 구분도 가중치도 두지 않는 우리 모두의 기억이라는 의미다.



[두 소년이 방파제 위에 앉아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동상의 층계 위에서 군도를 휘두르고 있는 영웅의 그늘 속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우물가의 한 소녀가 동이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 과일 장수는 자기 물건들 곁에 드러누워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선술집 안쪽에 텅 빈 문과 봉창을 통하여 두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은 앞쪽 탁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거룻배 한 척이 소리 없이, 마치 물 위로 들려서 오듯, 흔들리며 작은 항구로 들어왔다. 푸른 작업복을 입은 한 남자가 상륙하여 밧줄을 고리에 걸어 당겼다. 은 단추가 달린 검정 저고리 차림의 다른 두 남자들이 사공 뒤에서 들것을 들고 들어오는데, 그 위에는 꽃무늬에 술이 달린 큰 비단보에 덮여 분명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카프카의 '사냥꾼 그라쿠스' 중에서


소설가로 10년 남짓 활동한 제발트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자전적인 작품인 <현기증, 감정들>은 짧은 단편 2편과 긴 단편 2편이 병렬 형식으로 배치되어 1813년과 1913년 사이 이탈리아를 여행한 스탕달과 카프카의 전기적 사건들이 끝나면 제발트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들 작품을 서로 이어주는 하나의 단편은 바로 카프카의 단편 ‘사냥꾼 그라쿠스’로 우연히 시작된 비극으로 인해 영원히 떠도는 영혼이 돼 버린 그라쿠스의 방랑을 통해 스스로 망명객처럼 떠도는 제발트 자신의 사랑에 대한 갈망과 역사의 상흔에 대한 속죄가 담겨 있다.


[아마도 그러느라 너무 지친 탓인지, 나는 내가 아는 누군가가 방금 곁을 스쳐 지나간다는 느낌에 수시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런─다른 명칭을 붙일 수 없는─환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내가 수년 동안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사람들, 말하자면 이미 죽은 사람들 뿐이었다. 또는 죽었을 것이 확실한 사람들, 이를테면 마틸트 젤로스와 외팔이 마을 서기 퓌르구트를 나는 보았다. 

그런 돌연 한 환각을 몇 번 겪고 나자 내 마음속에는 울렁거림과 현기증으로 묘사할 수 있는 희미한 우려가 싹트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붙잡고자 하는 장면들의 테두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머릿속에 피어나는 모종의 생각들은 내가 채 인식하기도 전에 와해 되었다.]

                                                                                   -제발트의 '외국에서'중에서


낯선 땅에서 제발트는 고향 땅에서 추방된 시인 단테와 마주치기도 하고 이탈리아 리바의 한 버스 안에서 청년 시절 카프카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쌍둥이 형제를 만나기도 한다.

서사를 요약할 수 없는 제발트의 소설 곳곳에 삽입된 사진과 이미지들은 각기 다른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또 다른 무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제발트라는 한 작가가 펼쳐 보이는 기억과 상상이 뒤엉킨 몽환적인 세상은 한 인간의 뒤섞여 있는 기억의 서사가 누군가에게는 고통과 회한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허상이 빚어낸 몽환적인 세상을 엿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때로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 기억하고 싶어 하면서도 영원히 기억해 내지 못한다.

과거의 시간에서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지난 시절의 사건과 경험의 본질은 희미해지고 퇴색 되어버린다.

지난 시절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듯이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마법은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인간은 산다. 어쨌거나 산다.

그리고 살았다는 것은 기억을 통해서 만 입증된다.


'인생에서 방대한 부분들이 망각으로 사라진다고 할까요. 하지만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는 부분의 밀도는 상당히 높아집니다. 이로 말미암은 무게가 한번 짓누르기 시작하면 우리를 침몰 시킵니다.'

-W. G. 제발트


2023년 제발트를 읽는다는 건 , 지금 내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에 있는 것인지 그 너머 다른 세계를 서성 거리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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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8-17 2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발트 정리해서 나란히 꽂아놨는데...
여기서 표지 보니 반갑네요

scott 2023-08-18 10:37   좋아요 0 | URL
네 ^^

거리의화가 2023-08-1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망각이 때로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기억을 붙잡고 산다면 힘들듯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살아가기 위하여 내부 조정장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scott 2023-08-18 10:38   좋아요 1 | URL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마법이 없으면 도저히 버텨 내기 힘듭니다
아마 자책감에 스스로 자폭하거나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악마가 될 수도

희선 2023-08-18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티초크 없어졌나 했는데 아니었군요 예전에 나온 책이 없어진 것 같아서... 제발트 새 책은 다음 달에 나오네요 한번도 못 읽어봤어요 잊어야 하는 것도 있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군요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잊지 않아야 하는데, 사람이 그러지 못하기도 하죠


희선

2023-08-19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중에서


[그는 갑옷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누워 있었는데, 머리를 약간 쳐들면 반원으로 된 갈색의 배가 활 모양의 단단한 마디들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보였고, 배 위의 이불은 그대로 덮여 있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머지 몸뚱이 크기에 비해 비참할 정도로 가느다란 다리가 눈앞에서 힘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카프카의 변신 중에서


카프카는 친구들 앞에서 곧잘 자신이 쓴 원고를 낭독하며 친구들의 반응을 살폈다.

사후 세기의 명 단편으로 평가 받게 될 <변신>의 시작은 활자가 새겨진 종이 출판 물이 아니라, 작가의 목소리에서 시작 되었다.


매년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북페어 시즌이면 세계 출판계들이 몰려와 다양한 행사를 열며 작가들을 초청하는 이벤트등을 열고 있지만 특별 낭독회 같은 행사는 맨 부커상이나 노벨상 수상작가들을 초청 할 때를 제외 하고는 작가들이 독자들 앞에서 자신의 작품을 읽는 자리를 마련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신 오랜 세월 동안 영국 시민들의 귀가 되어주는 BBC라디오 채널을 통해 다양한 문학 작품들과 희곡들을 드라마로 제작해서 유명 배우들이 직접 낭독 연기를 펼친다.

라디오 드라마는 단순히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사운드와 효과음으로 극 연출의 분위기를 한 층 높이며 배우들의 발음 톤과 어조, 리듬의 조화 속에서 눈으로 보여지는 시각적 효과로 극의 흐름, 인물들의 갈등, 상황의 급 변화를 피부로 체감하며 감각적으로 스토리를 따라가며 눈으로 읽고 보는 시각적인 예술에서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몇 년 전 부터 라디오 극을 위한 텍스트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내용이다.

2002년 봄, 슈투트가르트의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편집을 마친 그 작품은 얼마전 최초로 SWR(남서독일라디오)에서 방송되었다.

책 전체를 읽어주는 오디오 북과는 달리 라디오 극은 '청각 공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연출과 대본, 사운드 아트의 역할이 중요하다. 라디오 극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인간의 목소리가 사운드 아트의 정점에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것은 곧 언어임을 자주 깨닫는다.]-배수아의 작별들, 순간들 중에서


전 세계에서 문학 작품 낭독회가 가장 활발하게 열리고 있는 곳은 출판 대국인 미국으로 그중에서 뉴욕과 워싱턴은 소규모 책방에서 유명 작가들을 초청해서 참석한 독자들 앞에서 자신의 책을 낭독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다.

폴 오스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줌파 라히리는 내가 미국에 거주 할 당시 직접 이들 작가의 낭독회가 열렸던 곳에 참석해서 작가가 읽어 주는 목소리를 통해 혼자 읽었을 때 느꼈던 느낌과 전혀 다른 차원의 감동을 받았다.



2021년 10월 제주도의 지역 도서관에 초청을 받은 작가 김연수는 자신의 책을 들고 참석한 제주 도민들 앞에서 이야기를 낭독하기 시작한다.

독자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동안 작가는 이야기를 읽고 지어내고 찾아 내며 제주도를 벗어나 창원까지 이어지는 낭독 여정을 시작한다.


'낭독이 끝난 뒤에는 오신 분들께 이야기를 청했다. 어떤 일을 하시는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이 낭독회에는 어떻게 오게 됐는지. 그러면 누군가 손을 들고, 다들 그 사람을 쳐다본다. 나도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바로 그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김연수


작가 는 독자들의 얼굴을 떠올리거나 마주 하지 않고 오로지 새 하얀 백지를 채우는데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한 새 하얀 백지들이 종이에 활자로 새겨지고 나면 어느 새 나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작가 김연수는 독자들과 만나는 동안 자신의 작품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그 안의 이야기들을 직접 듣고 쓰는 동안 함께 읽고 마음을 나눴다.

태초에 이야기는 동굴 속 모닥불 주변에서 시작 되었다.

한 낮 동안 추격 전을 벌였던 거대한 짐승과 맞섰던 이야기부터 우연히 무언가 발견하고 목격했던 이야기까지 문명을 세우기 전부터 인간들은 이야기를 지어 냈고 들려주며 자신만의 이야기로 발전 시켜 나갔다.


[그레고르는 대답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디를 보나 자신의 예전 목소리가 분명했지만, 몸속 깊은 곳에서 억제할 수 없이 올라오는 어떤 고통스런 찍찍거림이 거기에 섞여 있었다. 이 소리 때문에 그의 말은 처음에만 명확하게 들렸을 뿐, 나중에는 상대가 제대로 알아들었을지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 엉켜버렸다.]-카프카의 '변신'중에서


소설 속의 그와 그녀가 어느 새 나의 일상의 모습과 겹치며 그렇게 우리는 카프카의 그레고리 잠자처럼 하루를 힘겹게 버텨내며 그 하루가 모여 일 평생이 된다.



'그들이 낮 동안 열심히 일해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밤의 사람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내게 하는 것. 나는 그들이 모여서 듣는 내 이야기도 그런 것이 됐으면 싶었다. 그날의 낭독회 이후, 소설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산문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쓰게 됐다. 강연회보다는 막 지은 짧은 소설을 읽어주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낭독회를 더 자주 하게 됐다.'-김연수


은둔의 작가로 불렸던 폴 오스터는 2001년 9월 11일 뉴욕 한 복판에서 거대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던 날 거리로 달려 나왔다.

무섭게 연기가 피워 오르며 굉음을 내뿜는 사이렌 소리에 온 세상이 충격에 휩싸이는 동안 폴 오스터는 타자기 앞이 아닌 팟 캐스트 스튜디오에서 수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애끓는 사연을 낭독하기 시작한다.


'모든 소설은 작가와 독자가 동등하게 기여한 협업의 결과물이며, 낯선 두 사람이 지극히 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영원히 아는 사이가 되지 못할 사람들과 평생 대화를 나눠 왔으며, 앞으로도, 숨이 멎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폴 오스터


인간의 몸은 다양한 유기물과 유기체들의 세포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생명체로 세포들의 공존과 공생 협력과 결합으로 지금까지 진화 해 왔다.

지구 상 생명체들 중에 나와 다른 생명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를 다른 생명에게 전달 해서 하나로 통합 시킬 수 있는 생명체는 인간이 유일하다.

모든 생명체의 몸속엔 생체 시간이 있다. 무언가를 만들고 지어내는 동안 우리는 앞서 살다 간 생명체의 경험과 지혜를 통해 실수와 실패를 줄여 나가며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무언가를 재 창조해 나간다.

그렇게 누군가에 의해 창조 되고 창작된 것들 중에서 나의 목소리, 내면의 소리를 들려주는 목소리가 있다면 이로 인해 삶의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동시에 삶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깨달음까지 얻게 될지 모른다.

“이전까지 소설가로서 정체성이 있긴 있었겠지만, 이제 좀 달라졌다. 쓰는 게 좋아서, 좀 잘 쓰고 싶어서 썼지만, 지금은 이야기의 역할을 이해하게 되면서 더 좋은 이야기를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모슬포의 작은 서점에서 열린 낭독회에 갔는데, 작업복을 입고 피곤하고 졸리는 표정의 독자들이 참석했더라. 그들에게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마치 빵이나 밥 같은 것을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 소설이 허기진 누군가한테 제공되는 정신적 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김연수 세계일보, 2022년 11월 22일자 인터뷰 중에서


뉴욕 제과 빵집 아들은 빵을 굽지 않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지어 내며 독자들이 있는 곳에서 낭독회를 열고, 팟캐스트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읽어준다.

그렇게 이야기의 여정 속에 독자들의 눈빛과 얼굴을 마주 하는 시간 동안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이토록 뜨거운 여름에 들려 줄까?


[우리는 저절로 아름답다. 뭔가 쓰려고 펜을 들었다가 그대로 멈추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 채, 다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바라볼 때, 지금 이 순간은 완벽하다. 이게 우리에게 단 하나 뿐인 세계라는 게 믿어지는가? 

이것은 완벽한, 단 하나의 세계다. 이런 세계 속에서는 우리 역시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생각의 쓸모는 점점 줄어들고, 심장의 박동은 낱낱이 느껴지고, 오직 모를 뿐인데도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김연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 중에서

세상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 본다는 건 그 대상에 대한 감정을 품고 함께 공유 하며 끊임없는 생명력을 불어 넣어 누군가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흩어져 있는 이야기의 파편들마다 생명의 혼을 불어 넣는 것, 그것은 오로지 이야기를 지어내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일을 1970년 생 작가 김연수가 했다.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비록 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지만, 제 뒤에 오는 사람들은 지금 쓰러져 울고 있는 땅 아래에 자신이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세계를 실현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 만으로 말입니다.-김연수의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중에서


2023년 어느 해 보다 뜨거운 여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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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7-01 07: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유없이 대가 없이 다정한 사람들이 세상을 구할 거라고 연수옹이 으샤으샤하고 계시군요 ㅎㅎㅎ저는 신작은 아주아주아주 천천히 읽으려구요.

2023-07-01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시우행 2023-07-01 0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하게 읽었답니다. 역시 글은 글다워야~~~

scott 2023-07-01 10:58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무더운 칠월 주말 시작 ㅠ.ㅠ
호시우행님 무조건 시원하게 주말을 ^^

미미 2023-07-01 13: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콧님! 폴 오스터의 말 반복해서 읽게됩니다. 영원히 아는 사이가 될 순 없지만 지극히 친밀한... 소설이 만들어 내는 마법같은 관계! 이번달에는 소설 더 읽어야겠어요ㅎㅎ

2023-07-01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7-02 0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BS 라디오에서 소설을 드라마처럼 읽어주기도 했는데... 이제 그런 시간은 없군요 그게 나오는 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다 듣는 건 아니어서... 한국도 이제 작가가 독자와 만나고 자기 소설이나 시를 읽기도 하는군요 그런 시간이 있는 거 괜찮은 듯합니다 그것도 시간 좀 됐군요 코로나 때는 어려웠겠지만, 다시 조금씩 하겠지요 저는 가지 않겠지만... 이런 말 빼놓지 않네요

까닭없는 다정함, 좋은 말이네요 ‘다정한 것이 살아 남는다’가 가장 먼저 생각나네요 다정함이 들어간 책 찾아보면 많을 듯합니다


희선

2023-07-03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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