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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훈드여, 새로운 사상은 반드시 두 가지 질문을 받게 되오. 하나는 그 사상이 약할 때: 너는 어떤 존재인가? 타협하고 거래하고 사회에 순응하며 자기 자리를 찾아 살아남으려 노력하는가, 아니면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에 꼬장꼬장하고 게다가 멍청하기 짝이 없어 산들바람에 휘어지느니 차라리 부러지는 쪽을 택하는가?─후자인 경우, 대개는 (백 번 중 아흔아홉 번쯤) 산산이 부서지기 마련이오. 그러나 백번째에는 세상을 뒤바꿀 수도 있소.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 중에서


1989년 9월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출간 되자마자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비하 하고 모독 했다는 이유로 이 책을 불태우며 극렬한 시위로 들끓어 오른다.


악마의 시는 무슬림 인구 집단이 많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수단,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리랑카, 태국, 탄자니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베네수엘라 등의 국가에서 출판을 금지 시켜버린다.

1990년 2월 14일 이란 테헤란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1989년 6월 사망) 유언으로 남긴 '무슬림을 모독한 자는 처단하라'라는 종교 법령' 파트와'를 발표하며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무슬림들은 살만 루슈디를 발견 하는 즉시 무함마드의 이름으로 처단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1990년 2월 14일 파트와가 발령된 다음날 부터 살만 루슈디는 기나긴 도피 생활을 시작 하고 전 세계 곳곳에서 <악마의 시>를 불 태우는 시위와 작가 살만 루슈디의 생명을 지키자는 시위로 극렬하게 나눠져 버린다.

이 책을 출간하는 나라의 담당 출판사들은 무슬림으로 부터 폭탄 테러 위협을 받았고 악마의 시를 번역한 이들은 무슬림 폭도들에게 공격 당하거나 살해를 당했다.

유럽에서 <악마의 시>를 가장 먼저 출간한 이탈리아와 노르웨이 그리고 아시아 국가에서는 일본의 번역가와 출판인들이 무슬림의 공격으로 안타까운 생명을 잃자 세계 각국의 출판인들과 작가 단체들은 즉각적으로 살만 루슈디와 출판인들과 번역가들을 무슬림의 테러 대상에서 보호 받아야 하고 표현의 자유를 존중 하라는 선언서를 발표 한다.

영국은 살만 루슈디를 24시간 밀착 보호 하며 이란에게 경제적 외교적 제재 조치를 취했다.


살라딘은 참지 못하고 낄낄거렸다. 그 사건이 다윈의 보복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덤스데이는 저 딱딱한 빅토리아시대에 살았던 불쌍한 찰스에게 미국의 마약문화에 대한 책임을 덮어씌웠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 와서는 자기가 그토록 반대하던 부도덕한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중에서

1981년 <한밤의 아이들> 출간한 살만 루슈디는 전 세계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세계 문단 중심에서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영국 정보부의 보호 아래 수시로 거주지를 옮겨 다녔던 살만 루슈디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머물렀던 곳을 세워 보다가 사용했던 침대가 무려 56개나 된다는 사실에 놀라며 본격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격투기, 권투 같은 호신술을 배운다.

호메이니는 <악마의 시>가 본격적으로 서점에 깔리기 3개월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언을 반드시 지킨다는 무슬림들이 파트와는 발령한 사람만 취소 할 수 있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살만 루슈디를 향한 칼 끝을 저버리지 않았다.

제국 시절에 북아프리카 이슬람국가를 지배해서 무슬림의 이민자들과 난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프랑스는 1993년에서야 <악마의 시>를 번역 출간 하고 이슬람의 테러 행위가 미국 땅으로 번질 것을 우려 했던 미국은 프랑스 출간에 뒤이어 미국판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파트와 법령을 충실하게 시행했던 무슬림 폭도와 테러리스트들은 세계 곳곳에 알라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이들을 대상으로 분노하고 테러짓을 저지르는 동안 살만 루슈디는 공포심에 떨며 무기력하게 살지 않았다.

그는 매일 각종 호신술을 연마 했고 전 세계 여러 매체에 출연해서 언론의자유, 종교적, 관용, 문학의 자유에 대해 소신 발언을 하며 전세계 여론을 움직였다.

1998년 서방 국가의 제재 압력에 버티기 힘들었던 이란은 루슈디의 사형 선고를 철회 한다고 발표 했지만 루슈디를 처단 하는 어떤 무슬림도 처벌하겠다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파트와 법령이 발표 되자 마자 이틀에 한 번씩 거주지를 옮겨 다녔던 살만 루슈디는 도저히 이런 상태로 살 수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버린다.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란 어떤 것인가? 자기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전부를 들키는 것, 그 살 떨리는 벌거벗음의 상태 그것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일찍이 지브릴은 살라딘 참차의 모든 비밀이 고스란히 드러나버린 상황을 -납치,추락,체포 -목격하지 않았던가?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 중에서


반세기를 지나서도 무슬림들은 <악마의 시>를 쓴 작가 살만 루슈디를 용서 하지 않았다.

2022년 여름 살만 루슈디는 뉴욕대에 주최하는 강연장 무대 위에 오르는 순간 이슬람 테러리스트 가 휘두르는 칼에 찔려 한쪽 팔의 신경이 완전히 끊어졌고 한 쪽 눈 시력도 완전히 상실했다.



바닥에 쓰러져 내 몸에서 바깥쪽으로 퍼져가던 피 웅덩이를 바라보던 모습이 기억난다.

피가 많네. 나는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는 내가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극적이고 특별히 끔찍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이 내 목을 눌렀다. 큰 엄지손가락 같았다. 그 손가락이 가장 큰 상처를 눌러 내 생명이 담긴 피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살만 루슈디의 <나이프> 중에서


원형 극장 무대에 살만 루슈디가 올라가는 순간 검은 옷에 검은 마스크를 쓴 24세 무슬림 청년이 달려들어 날카로운 칼로 목을 찌르고 얼굴 위쪽과 입 왼쪽, 가슴, 허벅지를 차례차례 찌른다.

살인마 무슬림 청년이 살만 루슈디를 찌른 시간은 단 27초

현장에 있었던 소방관과 의사들의 빠른 응급처리를 받은 살만 루슈디는 왼손 힘줄과 대부분의 신경이 끊어진 상태로 응급실로 실려와 죽음을 향해 갔다.


눈을 잃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시신경이 손상되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나를 죽이지 못했으나 내 눈을 가져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그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눈을 잃는다는 건 신체적으로 힘든 일이다.

시야의 4분의 1을 아예 보지 못한다는 건 그 자체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엄청난 마취제를 투여 받은 살만 루슈디는 가족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 삶을 되찾아야 해. 죽음과 비슷한 상황에서 그저 회복만 할 수는 없어.

삶을 되찾아야 해.'

일주일 동안 끔찍한 수술을 마치고 일주일 회복 기간 동안 살만 루슈디는 앉고 일어서고 걷고 움직이는 법을 천천히 시도하고 파트와 법령 선포 당시 아홉 살 나이였던 아들, 이제는 새 하얀 머리카락으로 풍성하게 뒤덮인 그 아들의 손을 잡고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끔찍한 사고를 겪은지 18일 만에 살만 루슈디는 환자복을 벗고 티셔츠와 운동복 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휠체어에 올라탄다.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 하는 눈도 귀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회복의 시간을 갖고 칼이 아닌 펜을 들고 한 글자 씩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언어도 칼이었다.언어는 세상을 베어 세상의 의미를 그 내적 작동 방식과 비밀과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 언어는 하나의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베어 들어갈 수 있었다. 언어는 헛소리를 지적하고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언어가 나의 칼이었다.


살만 루슈디에게 칼을 들고 달려간 테러리스트 이름은 하디 마타르 24살의 레바논 출신인 그는 ‘악마의 시’를 단 두 페이지만 읽은 뒤 범행을 계획했다고 경찰에 진술했지만 그의 집에선 3만개가 넘는 증거물들이 쏟아졌다.

이란과 이슬람 국가는 이 사건과 자국의 연관성을 전면 부인했고 그 테러리스트도 단독범행이라 자백했다.

현재 미국 경찰은 배후 세력을 찾아내지 못했다.

파트와가 선포 된지 33년 6개월의 시간이 흘러 칼에 찔린 살만 루슈디는 강한 의지로 살아 남았다.

그는 회복 기간 동안 자신의 목을 찌른 그 테러리스트에게 범행의 이유를 묻는 일문일답 형식의 상상속 대화를 시도한다.



-살만 루슈디

신의 본성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

-테러리스트

신은 모든 것을 포괄하기고 모든 것을 아시지. 그분은 곧 모든 것이야.

-살만 루슈디

너희의 전통에 따르면, 너희의 신과 그 책에 나오는 다른 민족들. 그러니까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 믿는 신은 다른 거지? 그 사람들은 그들의 책에 적혀 있는 대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테러리스트

그들이 틀렸어.

-살만 루슈디

너는 내가 부정직할 뿐 아니라 악마이기도 하다는 거네. 그래서 나를 죽이는 게 옳다는 거야?

-테러리스트

너는 새끼 악마일 뿐이야. 그러니 자만하지 마. 하긴 새끼도 악마도 악마지.

-살만 루슈디

악마는 파멸 시켜야 하고?

-테러리스트

그래, 넌 이십억 명의 미움을 받고 있어. 그것만 알면 돼. 그렇게 까지 미움을 받다니. 어떤 기분일까? 벌레가 된 기분이겠지 잘난 체하며 온갖 말을 떠들어대지만 사실 너는 자신이 벌레 보다 못하다는 걸 알고 있어. 발로 밟아 죽여야 할 벌레 말이야. 넌 다른 나라고 여행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전 세계 나라의 절반 정도에는 발도 들일 수 없어. 그런 곳들에서는 너에 대한 증오가 너무도 강하니까.

-살만 루슈디

평범한 남자에게 할 만한 평범한 질문이야. 사랑에 빠진 적이 있나?

-테러리스트

난 신을 사랑한다.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출간 되고 나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신성을 모독했는지 아닌지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갈라졌다.

1989년 ‘악마의 시’는 출간 되자마자 금서로 지정돼 수입·유통·출판이 금지되어서 이슬람권에서 책을 읽은 사람이 드물었고 살만 루슈디에게 칼을 휘두른 테러리스트도 딱 두 페이지만 읽어 보고 범행을 계획했다.

실제로 이 작품을 읽어 보면 신성 모독이 아닌 시대와 사회에 대한 풍자와 유머로 가득 찬 20세기 <돈키호테> 같은 스토리라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까닭은 온건한 사람으로 보이길 거부했기 때문입니다.내가 여기 있는 까닭은 내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모든 것을 변화 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아프리카인,카리브인, 인도인,파키스탄인,방글라데시인, 키프로스인, 중국인-만약 우리가 저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면, 만약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 들이 일자리와 존엄성과 자식들의 더 나은 삶을 찾아 저 하늘을 건너오지 않았다면 우리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사회를 다시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죽은 나무를 잘라내고 새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입니다.

-살만 루슈디 <악마의 시>중에서


봄베이발 여객기가 런던 상공에서 폭발하고 두 남자 살라딘 참차와 지브릴 파리슈타만 살아 남는다.

살아 남은 두 사람의 운명은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비행기 잔해 속에서 탑승 했을 때의 영혼과 자아를 벗어 던져 버린다.

모국어도 잊어 버리고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영혼, 초능력을 갖은 두 사람의 미래는 이미 현실에서 소멸 되어 버린 채 지상의 천사로 다시 태어난다.


'다시 태어난 거야. 자네와 나. 생일 축하하네. 이봐 생일 축하 한다고.'

작가 살만 루슈디는 홀수 장에서 비행기에서 추락 하기 전 지상에서 15년 동안 배우의 삶을 살았던 지브릴 파리슈타의 삶을 보여 주고 짝수 장에서는 천사로 변신한 모습으로 교차 시키며 세상을 들끓어 오르게 만드는 온갖 사건들을 끄집어 낸다.


기억할 거야 양탄자 타고 다니는 레카 우리가 추락할 때 봤잖아 그리고 한 명 더 있었는데 미친놈 같은 스코틀랜드 복장을 하고 고라(백인, 유럽인) 같던데.

이름은 제대로 못 들었지만

알리도 그 둘을 봤는지 못 봤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알리는 그대로 서 있기만 했고

레카가 시킨 일이었어 알리를 위층으로 데려가라고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은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면서

나는 손가락으로 알리를 겨냥했고 우리는 위층으로 올라갔어

나는 알리를 밀지 않았어

레카가 밀었지

나는 절대로 알리를 밀어버릴 수 없었으니까.

스푸노

내 마음을 알아줘 스푸노

빌어먹을

나는 그 여자를 사랑했다고....


작가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에서 초월적 존재의 진짜 정체를 명확하게 알려 주지 않고 그의 정체를 곳곳에 숨겨 놓았다.

그 초월적 존재는 시 공간을 오고 가며 현실과 지옥, 그리고 천국 속에서 지상의 온갖 사건 마다 모습을 드러내고 푸념 하고 변명하며 거짓말 같은 진실을 장황하게 늘어 놓는다.

파트와 선포 후 33년 6개월 만에 자신의 목을 찌른 테러리스트가 법정에 서게 되는 날 작가 살만 루슈디는 그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삶에 당신이 침입한 것은 폭력적이고 해로웠지만. 이제 내 인생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삶이지요. 당신이 감옥에서 보낼 나날이 무엇으로 채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아닐 거라고 거의 확신합니다. 앞으로 내가 당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된다면, 아마 별것 아닌 듯 어깨를 으쓱하며 지나칠 겁니다.

난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게 그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부터 남은 나날 동안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상관없는 존재가 될 겁니다.

나는 당신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살아서 기쁩니다. 내 삶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살만 루슈디


루슈디는 자신을 향한 칼에 펜으로 맞서며 언어로 세상을 베고 찌르면서 종교의 관습과 굴레로 겹겹이 쌓여 있는 불평등을 향해 진정한 자유의 힘이 무엇인지 언어의 힘으로 증명해 보였다.

회복 기간 동안 써 내려간 <나이프>에서 루슈디는 이런 말을 한다.


합리주의자의 신앙에서 러셀은 이렇게 말해. '사람은 자신의 열정에 어울리는 신념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잔인한 사람은 잔인한 신을 믿고, 자신의 잔인함에 핑계를 대기 위해 믿음을 이용한다. 오직 친절한 사람만이 친절한 신을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경우에든 친절하게 행동한다.


신성 모독이라는 이유로 살해를 지시하는 자는 신의 제자가 아닌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한 살인 교살자일 뿐이다,

어느 시대나 어떤 사회에서도 예술은 논쟁과 비판을 불러 일으키지만 예술의 궁극적 가치를 인간성의 본질에 부합되는 자유와 존엄의 권리로 받아 들여야 한다.

단,그 예술의 가치가 형편 없다면 사람들에게 금세 잊혀 질 것이고 역사에 기록 되지 않을 것이다.

시인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에게 추방 당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오비디우스가 세상에 남긴 시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널리 읽혀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살해 당하고 불태워지고 소각 되고 쇠창살에 갇힐 지라도 말을 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인간의 자유까지 막아 낼 수 없다.

신의 이름을 외치며 칼을 들고 달려든 자에게 생명을 잃을 뻔 했던 살만 루슈디는 폭력이 아닌 펜을 들고 예술로 이렇게 답했다.


언어는 나의 칼이었다.

만약 내가 뜻밖의 칼 싸움에 휘말렸다면

아마도 ‘언어’라는 칼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만 루슈디(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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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4-11-11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작가의 분노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오늘도 눈호강하고 갑니다~ 정성이 가득 담긴 글 잘 읽었습니당~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시원합니다!

scott 2024-11-19 11:22   좋아요 2 | URL
살만 루슈디 여전히 칼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고 눈과 팔의 신경이 끊어져 버렸지만 죽을 때까지 칼 대신 펜을 쥐고 악의 공포를 이겨 내겠다고 합니다
에이 아이 시대에 더 소중해진 펜의 힘! ^^
 


소설가 한강이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2024년 노벨 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스웨덴 한림원은 10월 10일(한국 시각 저녁 8시) 수상자로 한강의 이름을 호명하며 “역사적 트라우마와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면서도 시적인 소설”을 쓴 작가라고 소개하며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했다는 발표를 했다.

철저하게 후보작 선정 과정 부터 심사까지 베일에 쌓아 놓고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노벨상 주최국이자 위원회인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자 선정에 있어서 정치적 색채가 농후 하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권위를 지닌 문학상으로 꼽힌다.

노벨상은 1901년 첫 시상 이후 123년의 세월 동안 가뭄의 콩 나듯 여성들에게 상을 수여 해서 물리학 분야 같은 과학 분야는 각각 3명 정도의 여성 수상자에게 영광이 돌아갔고 문학상은 2024년까지 121명의 수상자 가운데 2024년 한국 작가 한강을 포함해서 여성 수상자는 불과 18명에 불과 하다.

역대 노벨 수상자들 성비율로 비교 해보면 각 분야 수상자 8명 중에서 7명 정도가 남성이라면 여성 수상자는 단 1명에 그치고 있고 8년에 한 번 정도 노벨상에 여성 수상자들이 포함 되고 백인 수상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서 비 서구권에서 수상자가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 정도로 서구 보수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이런 비난을 의식 했는지 2012년 부터 남성 수상자와 여성 수상자에게 번갈아 상을 수여 했던 스웨덴 한림원은 2019년 미투 운동 촉발로 2년 동안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았다.

2016년과 2017년에 남성이 연달아 수상한 것을 제외 하고 2022년 아니 에르노가 상을 받은 다음 해에 노르웨이 남성 극작가 욘 포세가 수상했다.

따라서 영국의 베팅 사이트들은 올해 유력한 수상 후보로 중국의 카프카와 보르헤스로 불리고 있는 <찬쉐>를 수상 유력 후보로 내세웠고 일본어와 독일어로 시와 소설, 에세이를 쓰는 일본 작가 다와다 요코도 베팅 후보에 올려 놓았지만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로 부커상을 수상한 한국 작가 '한강'의 수상 예측을 한 영미권 언론은 없었다.

특히 이번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수상은 의미가 크다.

1993년 흑인 최초이자 여성인 토니 모리슨이 수상 한 이후로 아시아 여성으로서 첫 수상이자 유색인종 여성으로서 두 번째 수상이다.

1945년 남미 출신의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칠레 태생의 혼혈 백인이었고, 2007년에 수상한 도리스 레싱은 이란 태생이지만 영국인 부모를 둔 백인이었다.

100년의 시간 동안 노벨 문학상은 한없이 가벼운 통속적인 스토리나 영어권 국가 출신에 백인 남성 작가의 작품 중 영어로 번역된 작품이 많은 유럽, 북미 작가들에게 상을 집중적으로 수여했다.

따라서 이번 2024년 한국 작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백인, 남성이 주류인 세계 문학계에서 매우 뜻 깊은 일이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작가 한강은 출판사에서 근무하던 중 1993년 ‘문학과사회’에 ‘서울의 겨울’ 등 시 4편을 실으며 시인으로 등단했고 이듬해인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붉은 닻’이 당선되며 소설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1995년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의 길을 가기 시작한 작가 한강은 2005년 '몽고반점'으로 이상문학상 수상하며 탄탄한 문체와 밀도감 넘치는 스토리로 문학성을 인정 받는다.

2007년에 발표한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멀리하는 주인공을 통해 욕망과 폭력의 본질을 탐구한 작품으로 유려한 문장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2016년 시인을 지망했던 영국의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으로 맨부커 국제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향을 불러 일으킨 작가 한강은 2014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역사의 한 가운데 선 개인의 고통과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은 2014년 만해문학상, 2017년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수상하고 전세계 20여개국에 번역 출간됐다.

2023년에 출간한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고 1년 뒤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작가 자리에 우뚝 섰다.

작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속보를 터트리는 언론사들은 아시아계 최초 여성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상금의 액수(1100만 크로나/약 14억4000만원/세금이 부과되지 않음)에 대문자로 강조 하면서 세계 문학의 거장 헤밍웨이, 포크너 ,마르케스, 토니 모리슨의 이름과 나란히 표기 되는 작가가 되었다며 잔뜩 호들갑을 떨고 있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Before my wife turned vegetarian, I'd always thought of her as completely unremarkable in every way......


신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고리를 실험적이고 시적인 스타일로 연결 시킨 한강의 문체는 전 세계 독자들에게 새로운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10월 10일 노벨 문학상 선정 위원회 소속 안나-카린 팜 노 위원은 수상 발표 후 인터뷰에서 작가 한강의 작품 선정 이유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한강은 많은 장르를 아우르는 복잡성과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어구를 구사하는 작가다. 작품에서 뛰어난 주제를 연속성 있게 이어가면서도 특색 있는 변조가 돋보인다'









안나-카린 팜 노 위원은 한강의 작품 중에서 2014년 출간한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영문 제목 Human Acts)를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며 1980년대 한국의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겪은 한 소년의 끔찍한 트라우마가 어떻게 세대를 넘어 계승 되는지를 고통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역사적 사실을 유려한 문체로 가득 채웠다며 극찬 했다.










정말 닥쳐올 총살을 기다리듯 숨을 죽였습니다. 죽음은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라고.

-한강의 <소년이 온다> 중에서


한강은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 발표 당시 인터뷰에서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았을 정도로 이 작품은 작가의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된 작품이라는 말을 남겼다.

작가는 집필 하는 동안 광주에서 학살 된 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을 옆에 놓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고통. 속에서 완성한 작품이다.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수전 손택


우리는 무엇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시각적인 동물인 인간은 눈으로 목격한 것을 통해 고통의 감정을 느끼고 그 다음으로는 소리를 통해 듣는 '말' 언어 일 것이다.

우리가 매일 쓰는 언어는 순간적이다.

사랑-고통- 미움-그리움-행복 이라는 단어들은 백년 후면 흩어지고 사라져 버릴 '소리 덩어리'에 불과 하다.

“AI는 우리 종의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진화 경로를 바꿀지도 모른다.”

-유발 하라리


AI인공지능 시대에 나의 언어를 대신 해 줄 AI지능형 비서들이 있다.

나를 대신해서 글을 써주고 자료를 찾아 주고 쇼핑을 하고 공과금 업무와 회계 업무까지 척척 해준다.

운전 중에 가족들에게 메시지를 남겨 주기도 하고 매일 밤 어떤 오디오 북을 읽을지 골라주고 어떤 OTT프로그램이 있는지 추천까지 해준다.

따라서 몇 개의 단어만 알고 있어도 인공지능 비서가 무엇이든지 대신 선택해주고 해결 해 주는 시대에 하루의 시간을 꼬박 쏟아 부어 버릴 정도의 분량의 책을 읽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없다.

인간의 얇은 입술로 내뱉는 말은 그 무엇도 붙잡을 수 없고 세상에 어떤 큰 변화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대단하지 않다.

부유 하는 말들은 초라 할 정도로 덧없고 소음 공해에 지나지 않지만 언어가 가진 힘은 다른 시각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 보게 만들어서 지나간 시간과 역사를 되돌아 보며 현재 내가 먹고 보고 느끼고 말하는 그 모든 것들을 타인의 감정과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 할 수 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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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4-10-11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

scott 2024-10-11 21:02   좋아요 2 | URL
대단하죠!
작가님 책들 서점 마다 동이 나버렸어요 ㅎㅎㅎ
 

지난 7월부터 뉴욕 타임스는 21세기 첫 25주년을 기념해 이 시대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책을 선정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총 2주에 걸쳐 진행된 이 프로젝트에 소설가, 논픽션 작가, 시인, 비평가 등 문학가 503명을 대상으로 2000년 1월 이후 미국에서 출간한 책 가운데 베스트 책 10권 씩 추천 받아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100 Best Books of the 21st Century)을 선정해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유명 작가와 명사들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 섹스 앤 더 시티의 제작자이나 주연 배우 제시카 파커, ‘레슨 인 케미스트리’ 저자 보니 가머스, 페미니스트 작가 록산 게이를 비롯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들이 이번 100대 도서 선정에 참여했다.


가장 먼저 스티븐 킹이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100 Best Books of the 21st Century)에 추천한 10권의 도서는 다음과 같다.

1.이언 매큐언의 '속죄'

2.벤자민 블랙의 '크리스틴의 추락'

3.도나 타트의 '황금 방울새'

4.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

5.코매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6.마거릿 애트우드의 '오릭스와 크리크'

7.사라 워터스의 ' 게스트'

8.필립 로스의 '미국인의 음모'

9.비엣타잇 응우옌의 '동조자'

10번째 마지막 추천 도서는 자신의 책인 '언더돔'을 추천했다.


스티븐 킹에 뒤이어 작가 이민진이 추천한 10권 도서가 NYT에 올라갔을 정도로 현재 미국 문학계에서 작가 이민진의 위상이 어느 정도 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작가 이민진이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100 Best Books of the 21st Century)에 추천한 10권의 도서는 다음과 같다.

1.앤서니 도어의 '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2.캐서린 부의 '안나와디의 아이들'

3.콜럼 토빈의 ' 브루클린'

4. 줄리 오츠카의 ' 다락방의 부다'

5. 타라 웨스트오버의 '교육'

6.매튜 데스몬드의 '쫓겨난 사람들'

7.메릴린 로빈슨의 ' 길리아드'

8. 에드워드 p 존슨의 '알려진 세계'

9.바버라 애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

10.필 클레이의 '재배치'


이번 대형 문학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이 추천한 도서 중에서 단연 '소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 대부분 10권의 추천 도서 모두 '소설'을 추천했다.

반면에 작가 이민진이 추천한 10권의 도서 목록을 잘 살펴 보면 부의 불평등, 계급간의 갈등, 젠더 갈등, 교육의 불평등,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 국가의 의무로 전쟁에 동원된 젊은이들 그리고 미국 내 뿌리 깊은 흑백 간의 갈등의 불씨였던 노예 농장이 운영 되었던 남북 전쟁 시대까지 과거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차별과 박해, 인종 갈등의 문제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 이민진이 추천한 10권은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녀가 추천한 10권의 도서들은 단순히 허구적인 세상만이 아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정치, 사회, 문화, 교육의 문제와 모순되고 왜곡된 갈등의 불씨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는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통합적이면서 균등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가 엄청난 대서사시를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대서사시 같은 역사가 저를 소유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저는 역사와 문화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저로 존재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제 책이 한 세대의 이야기만 담도록 쓰는 것을 상상할 수 없어요. 한편으론 관심사가 코리아 디아스포라로 특정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 주제만큼 강하고 오래 제 흥미를 끄는 것은 없습니다.

열아홉 살, 대학생 시절 처음으로 재일 한국인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어요. 그때부터 자이니치의 이야기에 끌림을 느꼈고, 끈질기게 연구하고 조사해 갔어요. 제 인생을 소비할 만한 이런 주제를 발견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민진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파친코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독자들은 앞으로 전개 될 이야기가 역사라는 거대한 서막의 시작이라는 걸 어느 정도 가늠 할 수 있다.

이토록 강렬한 문장을 첫 서두에 주제문(thesis sentence)으로 써 놓은 작가 이민진의 작법은 현시대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는 방식이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전체 통독 하지 않은 이들도 이 문장 만큼은 어디선가 자주 접했을 것이다.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의 이야기' 중에서


19세기 최고의 인기 작가였던 찰스 디킨스가 첫 문장을 주제문으로 시작하면서 이후 많은 작가들이 첫 문장을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자칫 설교조로 이야기 흐름이 진행 될 수 있기 때문에 21세기에는 거의 쓰지 않고 있다.

작가 이민진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파친코의 첫 문장을 주제문으로 제사한 이유는 ' 역사에서 평범한 일반인들의 삶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진정 역사를 만드는 것은 그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쓴 문장”이라고 말해 왔다.

2024년 7월 미국 뉴욕 타임스가 실시한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100 Best Books of the 21st Century) 중에서 '파친코'는 15위에 올라갔다.

페미니스트 운동가 록산 게이를 비롯해 여러 명의 문인관계자들과 평론가들 그리고 배우들이 '파친코'를 추천했을 정도로 이 책의 가치는 한 시대를 다룬 역사 소설을 뛰어넘어 선 21세기를 대표하는 명작이 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작가 이민진의 <파친코>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강렬한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파친코에 등장하는 교활한 조폭과 장애를 가진 어부, 금지된 사랑을 이어가는 비밀스러운 인물들이 역사의 한 복판에서 겪게 되는 전쟁과 식민지, 개인적 갈등까지 4대에 걸친 한국 가족의 풍요롭고도 소용돌이치는 연대기적인 삶을 펼쳐 보인다.'



파친코는 일본에 번역 출간 되어 외국 소설로 드물게 단행본 출간으로 절판 되지 않고 인기의 상승 곡선을 타서 문고본으로 출간 되었을 만큼 일본 내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17년에 출간된 <파친코> 라는 작품은 전직 오바마 대통령의 추천에 힘 입어서 베스트셀러 도서에 진입하고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올라서며 뒤이어 영상으로 제작되어 전 세계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유명인의 추천사를 받고 주요 문학상 후보에 올라 영상으로 제작되었다고 해서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에 들어 간 것은 아니다.

이번에 선정된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에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2000년 이후에 출간한 책 중 단 한 권도 올라가지 못했다.

영화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얻은 테드 창, 마거릿 애트우드 그리고 류츠신의 책도 올라가지 못했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폴 오스터가 필생을 걸고 쓴 작품 <4321>은 추천 목록에 없었다.

단편집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한 줌파 라히리, 21세기 주목 받는 현대 작가이자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니콜 크라우스의 작품 역시 100권 리스트에 올라가지 않았다.

아시아계 작가들 중에서 출간 하는 작품마다 주요 문학상을 휩쓰는 이윤리 작가의 작품도 단 한 권도 못 올라갔고 유명 일본 작가들의 작품도 올라가지 못했지만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에 이민진의 <파친코>와 한강의 <채식주의자> 두 권이 올라갔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해 뉴욕 타임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해 뉴욕 타임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신비롭고 다른 세상의 공기를 담고 있는 짧은 소설 속에 굶주림과 욕망들이 어떻게 뒤엉키는지 마술적인 언어로 펼쳐 보인다.'

지난 8월 15일에 발표된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100 Best Books of the 21st Century) 중에서 1위부터 10위에 뽑힌 책은 다음과 같다.

1)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 (2012)

2) 이저벨 윌커슨의 '다른 태양들의 따뜻함' (2010)

3) 힐러리 맨틀의 '울프홀'(2009)

4) 에드워드 p.존슨의 '알려진 세상'(2003)

5) 조너선 프랜즌의 '인생 수정'(2001)

6) 로베르토 볼라뇨의 '2666' (2008)

7) 콜슨 화이트헤드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2016)

8) W.G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2001)

9)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 (2005)

10) 메릴린 로빈슨의 '길리아드' (2004)


2014년 영국 가디언지에서 발표한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 중 10위 안에 들었던 힐러리 맨틀의 '울프 홀'과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는 이번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 10위 상위권에 올라갔다.

앞서 발표한 영국에서 힐러리 맨틀의 튜더 왕조 3부작 중 제 1권인 <울프 홀>은 맨 부커상을 수상하고 이후 10년동안 맨 부커상 수상작 중에 가장 빛나는 작품 베스트에 뽑혔고 가디언지가 발표한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 중 1위를 차지했다.

뉴욕 타임스가 발표한 21세기 최고의 책 100권에 '바르도의 링컨'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한 조지 손더스는 총 3권의 작품(바르도의 링컨, 패스토럴리아,12월10일)이 올라갔고 캐나다의 단편작가이자 노벨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는 두 권의 단편(런 어웨이,미움, 우정, 사랑, 구애, 결혼)집이 올라갔다.

필립 로스의 작품도 두 권(미국인의 음모와 휴먼스테인)이 명단에 올라갔고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제스민 워드 (소설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와 회고록 '남자들에게 우리는 강간을 당했지') 두 권이 올라갔다.

이민진 작가가 추천한 에드워드 p. 존슨의 책 장편 소설'알려진 세계'는 10위 안에 들어갔고 펜 포크너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라간 단편집 'All Aunt Hagar's Children: Stories'는 베스트 100리스트에서 70위에 올랐다.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 받는 작가 제이디 스미스는 '하얀 이빨과 온 뷰티' 두권이 올라갔다.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던 아일랜드의 대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41위에 올랐고,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7부작(Septology)’, 박찬욱 감독에 의해 영상화된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 등도 100권 순위에 포함됐다.

21세기 100권 중 1위를 차지한 작품은 엘레나 페란테의 일명 나폴리 4부작 소설 중 제 1권인 ‘나의 눈부신 친구’(My Brilliant Friend·2012)가 차지했다.

나폴리 4부작의 마지막 <잃어버린 아이들>은 100권 중에서 70위를 차지 했고 초기작 나쁜 사랑 3부작 중 2부인 <버려진 사랑>이 92위에 올라갔을 정도로 이탈리아 출신의 엘라나 페란테는 21세기의 첫 25년 동안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다.










1950년대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유년기 시절에 만난 두 소녀 레누와 릴라가 서로 다른 환경과 선택으로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가는지 펼쳐 보인 이 작품은 총 4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흔한 사랑, 우정, 불륜, 배신, 치정을 다루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들은 여성의 사랑과 우정을 중심에 둔 대 서사 드라마가 널리 읽혀 지는 이유 중 하나로 자신들의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현재의 나와 딸들이 겪었을 법한 이야기가 사실적이게 읽혀지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오늘 아침 리노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가 평소처럼 돈을 빌려 달라고 할 줄 알고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라는 지극히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 되는 이 작품은 두 여성의 일생을 총 4권에 걸쳐 펼쳐 보이며 마지막 4권에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항상 열심히 노력해야 한단다.

우리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한 걸음 씩 앞으로 나아가야 해.

실수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엘레나 페란테의 <잃어버린 아이들> 중에서


총 10분을 넘지 않는 영상을 보는데 익숙한 세대들에게 각 권의 분량이 600페이지를 넘는 책 4권을 통독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최고의 소설이자 세기의 명작으로 항상 필독 목록에 올라가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빅토르 위고 작품들을 분량의 압박 때문에 읽다 중도 포기한 독자들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을 읽기 시작하면 놀라울 정도로 빨려 들어간다.

대단한 서사를 바탕으로 시계 태엽 처럼 정교한 플롯이나 뛰어난 묘사,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도 없는 평이한 서술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인 대화와 촘촘하게 짜인 개개인의 인생 역정들이 나의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이 시대 어디선가 살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읽혀진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단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이토록 고달픈 인생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서?



'사춘기 시절 부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세상에 둘도 없는 신발 같은 어린 시절의 공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귀족처럼 돈을 쓰고 싶어 하는 리노의 광폭한 욕구의 형태로 나타났다. 또 부는 환심을 얻으려고 텔레비전, 파스타, 반지를 사는 마르첼로에 의해서도 나타났고, 온갖 종류의 햄을 팔고 빨간색 오픈카를 가지고 있으며 4만 5천 리라쯤이야 푼돈이라는 듯이 돈을 쓰고 릴라의 그림을 액자에 넣고 치즈 같은 식료품 말고도 신발을 팔기 위해 자재비와 인건비에 투자하고 자신이야말로 동네에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도래하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스테파노에 의해서도 체현되었다. 부라는 것은 생활 속에 이미 내포된 것이다. 거기에는 영광도 화려함도 없었다. '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 중에서

2024년 한국의 어느 학교 교실에선 학기 중 해외로 체험 학습을 가지 않고 꾸준히 등교하는 학생은 또래들 사이에서 ‘개근 거지’라는 놀림을 받는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성실, 책임, 인내, 규칙 준수와 같은 덕목은 이제 교과서에만 나오는 것이 되었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힘들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고 타인들도 우리 인생을 힘겹게 할 숙명을 타고 났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도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고 태어날 수 없지만 , 인생의 책은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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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4-09-25 21: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나의 최신 스맛폰에서 내글이 안보여서 여러번 업로드
북플도 서재도 기능이 너무 떨어진다
글 한 번 쓸 때 마다 이토록 시간을 잡아 먹게 하다니
 

1916년 약 3,700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세계 제 1차 대전을 겪은 인류는 전후 전쟁에서 싸우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전투기 조종을 맡았던 조종사들은 전쟁터에서 '바람직하게' 싸우는 전쟁을 펼쳐 나가야 한다고 주장 하기 시작한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전투 비행기는 합판과 천, 금속, 고무 재질로 제작 되어 위 아래 두 쌍으로 달려 있는 날개는 지주로 연결 되어 있었다.

좌석은 하나 였고 프로펠러와 동기화 된 기관총이 앞을 향해 있고 총알은 프로펠러 사이로 발사 되었다.

차고에서 순식간에 조립해서 급박하게 움직이는 전쟁터로 출격해야 하는 전투 비행기들은 공습 목표물 폭격 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까지 파괴 시켰던 괴물이였다.

폭격 대상을 정밀하게 조준하는 능력이 형편 없었기 때문에 목표물을 향한 정확도가 떨어지는 전투 비행기는 시속 300-500킬로미터로 날아 올라서 800킬로미터까지 치솟다가 9킬로 미터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순간 지상으로 폭탄 물이 떨어 질 때 까지 약 35초가 걸렸다.

만약 폭탄이 떨어지는 동안 바람이라도 분다면 시속 160킬로미터까지 이르러서 지상으로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 조종사가 조준 했던 목표물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떨어 지는 확률이 높았다.



그들은 목표를 이룰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전혀 몰랐죠. 어디인지는 모르면서도 거기에 이를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집단 내부에서 일어난 정말 특이하고도 중요한 일은 기술적인 진보와 소재 개발에 대한 강한 믿음, 적절한 비행기를 손에 놓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말콤 글래드웰의 <어떤 선택의 재검토> 중에서

20세기 초 공중에서 적과 교전 할 수 있는 기동성이 뛰어난 비행기는 1차 대전을 겪고 난 후 1930년대 비약적인 항공 기술로 거듭 발전해 나갔다.

알루미늄과 철이 합판을 대체했고 엔진은 더 강력해졌고 항공기 내부 크기는 더 커지면서 더 높이 날아 오를 수 있었다.

어떤 전쟁에서도 멋지게 창공을 가로 지르며 적을 제압 할 수 있는 항공기들은 193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칼라일 소재 육군 대학원에서 탄생 했다.

이곳에 항공 기지가 설립 되면서 세워진 항공단전술학교에는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속도에 미쳐버린 20-30대 젊은 리더들이 모였다.

'우리는 관습에 구애 받지 않고 진보 한다.'


이들은 일명 '폭격기 마피아'집단으로 불렸던 항공단 교수진들로 대부분 1차 대전에 참전 했던 전쟁 용사들이였다.

전쟁 후 장군으로 진급한 이들은 전자 회사나 거대한 방산 업체에서 근무 하면서 항공 기술 개발에 몰두 했다.

이들 폭격 마피아들은 레닌과 스위스 연방공대 동기 출신의 네덜란드 태생 괴짜 엔지니어 칼 노든이 개발한 폭격 조준기( 망원경·볼베어링·수준기(水準器) 등으로 구성된 조준기에 공기 온도 등에 관한 64개 알고리즘을 활용해 조작하면 어느 시점에 폭탄을 투하해야 지상 목표물에 명중할 수 있는지 계산하는 조준기)로 비행기에 장착해서 적의 병참·군수 핵심만 정밀 타격하면 민간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편은 십 수 명에 불과 하지만 상대편에는 1만 명의 장교로 가득 찬 육군 해군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열의가 충만했다. '

당시 이들의 교육 방침이나 항공 기술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폭격 마피아'들이 어떤 일을 시도하거나 추진하고 있을 때 상황을 점검 하라 거나 멈추라고 지시 할 사람이 없었다.

교과서나 지침서도 없었고 강의 계획서도 없었던 항공단전술학교의 모든 교육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실시 되었다.

폭격 마피아 교수진들은 장소를 정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 든 지 공개적인 토론을 벌이며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육군성 지휘부의 참모들이 당시 우리가 하고 있었던 일이 무엇이였는지 알았다면 우리 모두 즉시 감옥으로 끌려 갔을 것이다. 기존의 군사 규칙이나 무기 개발과는 완전히 상반 되었던 것으로 이 사실을 알고도 우리가 개발을 지속하고 있는 행위를 절대로 묵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폭격 마피아 교수진들 중 핵심 멤버 도널스 윌슨 자서전 중에서


이렇게 엄청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던 폭격 마피아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항공기, 즉 인입 식 착륙 장치와 가압형 동체를 부착한 항공기를 탄생 시킨다.

이 항공기는 미국 전역으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상업 항공기가 아닌 오로지 폭탄을 싣고 날아 올라서 기상의 적들에게 무시 무시한 파괴력을 보여주는 강력한 무기였다.

1차 대전 당시 적진에 폭탄을 떨어뜨렸던 시기는 어두운 밤, 달빛이 떠올랐던 순간이였지만 이제 폭격 마피아는 훤한 대낮에 공격에 나설 수 있었다.

시야가 확보된 상태에서 목표물을 향해 정확하게 조준하는 변수를 입력해 작동을 시키는 순간 9킬로 상공에서 지상의 오크통 위로 정확하게 폭탄을 떨어 뜨릴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폭격기 마피아들의 이런 구상과 설계는 지극히 이론적인 것, 존재하기를 희망하는 것 이였을 뿐 이였다.

1930년대 전장에 투입했던 비행기들을 보게 된다면 이런 말을 내뱉을 것이다.

'뭐야, 이 사람들은 마약을 얼마나 많이 했던 거야?'

1차 대전을 겪었던 공군들은 필사적으로 육군이나 해군과 전혀 다른 전투력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고 싶었다.

1931년부터 1941년 항공 단 전술 학교를 중심으로 공군은 해군과 육군보다 앞선 기술력을 발전 시켜 나갔다.

이들이 집중 폭격 대상으로 삼은 건 '교량'과 '송수로' 그리고'전력'시설물이 였다.

교량을 파괴하고 송수로를 붕괴 시키고 전력을 불 태워 버리면 전쟁에 승기를 잡는다고 가정 했지만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폭격의 정밀한 기술과 폭격수가 어떤 표적을 정확하게 타격 시킬 수 있는데 만 집중적으로 연구 했다.

'폭격기 마피아'들은 폭격기를 동원해 도시를 초토화 시켜서 단 시간 안에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공군력은 수 개월 동안 적과 충돌을 거듭하며 참호 궤멸 작전 속에서 수 백 만명의 목숨을 잃은 1차 대전의 대 학살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이 20여 년 동안 운영한 항공단 전술 학교 졸업생은 고작 천 여명 남짓으로 수세 대에 걸쳐 육군 장교를 배출한 웨스트 포인트의 위엄과는 수적으로 전쟁 경험으로 비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41년 여름 히틀러의 진격으로 유럽 전역에 나치 깃발이 꽂혀 버리자 워싱턴은 폭격기 마피아 전술 교관들을 호출한다.

교관들은 이라는 놀라운 문서를 들고 간다.

이 문서에는 미국이 필요한 항공기(전투기, 폭격기, 수송기)종류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조종사와 몇 톤의 폭발물이 필요한지 부터 독일 지역의 50개의 발전소와 47개의 수송망,27개의 석유 정제소,18개의 항공기 조립 공장, 6개의 알루미늄 공장,6개의 마그네슘 공급원 같은 중요 표적물 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은둔의 10년 동안 오로지 항공 기술 개발에 매달렸던 폭격기 마피아 교수진들과 교관들은 미국 군 수뇌부에 단 9일 동안 전쟁을 승기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준다.

미국 육군 항공단 전술 학교에서는 폭격기 마피아들이 폭탄을 고도로 정밀하게 사용하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반면 영국의 물리학자 린더만은 탁월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아인슈타인 조차 증명 하지 못했던 수학적 명제를 해결 했던 천재로 미국 측 폭격기 마피아들과 전혀 상반된 논거를 처칠 총리에게 제시했다.

영국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 폭탄을 만들고 폭격기 승무원을 훈련 시키고 이 모든 폭격기와 승무원을 독일 노동자 계급의 가옥을 폭격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전력을 다한다면 18개월 안에 인구 5만 이상 모든 도시의 50퍼센트를 파괴 할 수 있습니다.

린더만은 처칠을 설득했고 처칠은 영국 폭격 사령부 지휘관 자리에 아서 해리스를 임명한다.

부하들에게 도살자로 불렸던 아서 해리스는 폭격 작전을 맡자마자 독일 쾰른 시에 대규모 공격을 시작한다.

표적을 확인하지 않고 영국에서 천 개의 폭탄을 싣고 서 쾰른 시 중심부에 90퍼센트를 초토화 시켜 버렸다.

그는 단 3일 만에 드레스덴을 폭격해서 2만 5000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폭격의 이유는 군의 이동을 막기 위한 것 이였지만 폭격의 대상은 민간인들 이였다.

아서 해리스는 폭격을 더욱 정확하게 해서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전쟁에서 사람들이 아닌 전쟁 기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42년 가을 B-17 폭격기를 몰고 슈바인푸르트를 향하고 있었던 육군 항공대 대령 커티스 르메이는 회피 기동을 하지 않은 채 약 8분 동안 직선 고정 비행으로 목표물에 접근해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전략을 세운다.

슈바인 푸르트 공습 전날 대령 르메이는 제4폭격비행단(B-17 폭격기)를 이끌고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매서슈미트 전투기 공장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하기로 했지만 출격 당일 날 아침 극심한 안개로 인해 활주로에 발이 묶여 버린다.

기상 악화로 인해 125대 비행기 중 24대가 독일 폭격기에 맞아 공중 분해 되었고 50-60대 비행기가 크게 파손되었다.

각각 8-9개의 폭탄을 실은 230대 폭격기들이 총 2000여개의 폭탄을 떨어뜨렸지만 목표물 중 고작 80여개 만 사라졌고 매서슈미트 전투기 공장은 큰 파손 없이 정상으로 가동 되었다.

슈바인푸르트는 1,2차 공습을 당해도 항공기 산업이 전혀 마비 되지 않았다.

반면 미국 측의 제 8공군이 출격한 60대의 전투기 중 17대는 심각한 손상으로 폐기 해버렸고 650명의 항공병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참전한 대원 중 4분의 1이 사라져 버린 폭격기 마피아는 절박한 심정으로 새로운 전투 계획을 세우고 기술력을 보강해 나간다.

1944년 12월 괌 사령부의 대 언론 공식 발표 자리에 선 공군 사령관 해이우드 핸셀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폭탄을 우리가 원했던 장소에 정확히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해온 일에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초기 실험 단계에 있을 뿐이다. 배워야 할 것이 많고, 많은 운영상의 문제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1944년 미군은 일본 군이 주둔하고 있던 괌, 사이판 등 서태평양 마리아나제도를 점령하자마자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 변모한다. 당시 이곳 전초 기지를 지휘 했던 인물은 헤이우드 핸셀 준장으로 그는 제21폭격기 부대를 이끌었다.

핸셀 준장은 낮에 폭격기를 출동 시킨 뒤 공장, 발전소 등 적국의 기반 시설을 조준해 타격하는 ‘정밀 폭격’ 전술을 선호했지만 적의 대공포를 피하려 구름 위를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며 정확한 위치에 폭탄을 투하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전략이 연달아 실패하자 민간인 학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항변했지만 결국 미국 본토에선 새 지휘관 커티스 에머슨 르메이 소장을 새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르메이 소장은 정밀 폭격을 포기하고 적의 대공(對空)공격을 피하기 위해 야간 시간대에 표적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보단 광범위한 공격을 가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야간 공습 전략에 '사탄의 제안'이라고 불렸던 '네이팜탄'을 썼다.

1945년 3월9일 밤 도쿄 커티스 르메이의 지휘로 첫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고 네이팜 탄을 장착한 폭격기는 오사카-구레-고베-니시노미야-오카야마-도쿠시마-도야마를 초토화 시켰다.

7월26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방송으로 내보냈지만 일본 군부는 ‘최후통첩’ 격인 포츠담선언을 격렬히 비난하고 언론을 통해서 절대로 항복할 의사가 없다는 걸 명확하게 밝혔다.

“(8월6일) 8시15분 15초, 폭탄 투하실의 문이 열리고, 리틀 보이가 떨어진다. 티비츠는 비행기를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돌린다. 43초 후 조종석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빛으로 가득해진다. 충격파가 비행기를 때리고, 티비츠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소리친다. ‘대공포!’ 뒤를 돌아보니 에놀라 게이를 향해, 훗날 그의 회상에 따르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끔찍하게’ 솟구쳐 오르는 구름이 보인다. 아래쪽에서는 히로시마가 타르 양동이처럼 검게 끓어오른다.”

-에번 토머스의 '항복의 길'중에서

일본 땅에서 진짜로 핵이 터지자 전쟁을 이끈 일본 최고전쟁지도회의 6인은 항복 여부를 투표에 부쳤다.

결과는 ‘3대 3’ 군 강경파는 항전 할 의지를 밝히며 전쟁의 지속을 위해 황궁 내 쿠테타까지 모의 한다.


8월 6일 특별 장비를 장착한 B-29 에놀라 게이가 세계 최초의 원자 폭탄을 히로시마에 떨어 뜨리자 정확히 43초만 7만명이 즉사했고, 뒤이어 약 7만명은 천천히 고통 속에서 사망했지만 일본이 여전히 항복의 의지를 밝히지 않는다.

3일 후 휴전 협상을 기대했던 소련군이 대대적으로 만주로 침공을 개시하고 8월9일 규슈의 나가사키에도 핵폭탄 ‘팻 맨’이 투하된다.

전쟁 막바지 최고전쟁지도자회의 참석자 6인 가운데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연합군의 최종 목표는 도쿄로 최후의 항전이나 결전이 아니라 오히려 항복만이 일본과 천황을 살리는 길이라 믿고, 핵폭탄 투하 후에도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한 군인들에 맞서 히로히토 덴노의 결단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8월15일 정오 일본 전역에서 ‘라디오 도쿄’를 통해 히로히토 덴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생각하건대, 이제부터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진실로 심상치가 않다. 너희 신하와 백성의 충정은 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곤란을 감당해내고, 참아야 할 곤란을 참음으로써 만대를 위한 태평시대를 열고자 한다.”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자 2차 대전이 끝이 났다.

일본 외무 대신 도고 시게노리 예측 대로 세 번째 핵 투하 장소는 도쿄였다.

스파츠는 자신이 이끄는 항공대의 B-29 폭격기 7대를 도쿄 상공에 띄워 가로 4인치, 세로 5인치의 전단(삐라) 500만장을 살포했다.

도쿄 상공에서 떨어진 삐라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은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전쟁을 종결할 기회다.

천황(일왕)을 설득하라.”

임진 왜란 당시 왜군에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손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가 천황을 설득 하지 않았다면 연합군이 일본 땅에 핵 100기를 투하 해도 일본 군부는 절대로 항복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종전 후 전범재판을 받고 수감됐던 도고가 1950년 7월 면회 온 가족에게 마지막 이런 글귀를 남겼다.

‘일본의 미래는 영원하겠지만, 매우 끔찍한 이 전쟁이 끝나 조국의 고통이 사라지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이다. 이로써 나의 일생의 과업은 달성되었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하든 중요하지 않다.“

폭격기 마피아의 리더 였던 헤이우드 핸셀 장군은 도쿄에 대한 네이팜(소이탄) 공격을 거부하다 경질되었다.

만일 폭격기 마피아의 양심과 신념이 그대로 지켜졌다면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 했을까?

1945년 8월 12일 일본은 이미 한국 동해안의 작은 섬에서 소형 원자폭탄을 실험했다. 미국이 7월 16일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한 것보다 불과 3주 뒤로 이 핵실험 성공을 미국측이 알고 있었는지 현재까지 어디에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1942년 4월 18일 미국이 일본 본토에 첫 공습을 시작하고 1944년부터 전략폭격으로 확대해 나가자 일본은 원폭 프로그램을 한국의 흥남으로 옮겨 버렸다. 따라서 흥남지역에서 일본군이 원자탄 연구를 계속 수행 하는동안 소련 잠수함이 흥남항 주변까지 내려 왔다.

“만일 1945년 8월 15일 나가사키에 B-29 폭격이 아니었다면, 일본이 먼저 미국 본토에 핵폭탄을 떨어뜨려서 미국을 평화협상에 강제로 끌어 당겨 놓고 영원히 한반도와 동아사이 전체를 집어 삼켰을 것이다."

핵폭탄 성공 후 익명의 플루토늄 폭탄 개발 관여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더 ‘나은’ 이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나는 그것이 사용되지 않길 바랐고, 그것이 초래할 파괴를 생각하며 몸서리쳤습니다.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이 종류의 폭탄 역시 예상한 대로 작동하는지, 다시 말해서 그 복잡한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몹시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은 끔찍한 생각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그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지속 된 세상의 모든 전쟁은 서로를 제거 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사람을 투입했다.

인류는 빠른 시간 안에 전투에서 승리 하기 위해 엄청난 파괴력과 정밀한 조준 기술을 갖춘 무기와 폭탄을 개발하는데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1,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군용 폭탄, 신관, 독가스,연막 통, 수류탄 같은 폭탄 물을 해체하고 분해 하면서 수백 번의 실험을 거쳐 무엇에 든 달라 붙어 활활 태워 버리는 '네이팜'을 탄생 시킨다.

세상의 어떤 전쟁에서도 민간인들의 피해를 최소화 해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 거대한 폭탄들이 도시에 떨어지는 순간,사상자의 피해는 막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평화란 선악의 거미줄에 간신히 매달린 비항구적인 긴장 상태에 불과하다.

2022년 부터 불길이 치솟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2024년 중동의 화약고인 가자 지구인 팔레스타인 땅에 무인 폭격기로 온갖 신 무기들이 대량 살상과 학살을 자행 하고 있다.

전쟁광 푸틴은 핵 미사일이 탑재된 항공기로 유럽 전역을 공격할 준비 태세를 하고 있고 이스라엘의 주도 면밀한 폭격과 공격 하마스 군 수뇌부와 수장들을 잇따라 살해 하면서 중동 전역으로 전쟁의 먹구름이 퍼져 나가고 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9일 나가사키 이 두 도시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희생된 이들은 대부분 민간인들로 약 15만~24만6000명이 사망 했고 이 사망자 숫자에 조선인도 약 10% 포함 되어 있다.

아시아 전역과 한반도 에서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포함해서 일본은 500만 명의 병력과 죽창부대만 믿고 핵 폭탄이 떨어지고 나서도 일주일을 버텼다.

매년 8월이면 일본 미디어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날들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방송 하며 당시 미국에 의한 원폭 투하가 정당 했는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시행 하며원폭의 비인간성과 일본이 지구상 유일한 피폭 국가라는 데 대한 피해자 의식을 상기 시키고 있다.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지난 100여 년 동안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숨진 246만6000여명의 위패가 안치 되어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우익들의 성지인 야스쿠니 신사에 전 현직 총리와 관료들이 줄을 지어 전범들에게 참배하는 모습을 전 세계로 생중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한결 같이 자신들이 저지른 역사적 만행을 덮어 버리며 교묘한 방법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자국민을 세뇌 시키는데 열을 올리는 동안에도 2024년 79주년 광복절을 맞이 했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땅에서 여전히 ‘광복’과 ‘건국’에 대한 논란에 서로 불붙어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무 정부적이며,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고 있는 냉엄한 국제 사회 현실 속에 앞으로 한반도의 미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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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길을 잃었다는 느낌, 너무 멀리 낯선 곳까지 와버렸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때껏 누구도 이렇게 멀리까지 와보지는 않았을 듯했다. 공기 성분 마저 고향과는 다른 듯한 낯선 느낌,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낯선 느낌이었다.

-카프카의 <성> 중에서


1919년 노동자 재해보험공사에 다니고 있었던 서른 여섯 살의 카프카는 전체 260여명의 직원 중에서 단 두 명 뿐인 유대인 중 한명으로 그가 맡은 업무는 보험료를 산정하고 노동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무수한 청원에 답변하고 재해 예방에 관한 다양한 사례를 엮은 논문을 쓰는 업무를 담당했다.

체코 보헤미안의 최고 수재들만 들어가는 카렐 대학교 법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던 카프카는 체코 최고의 재해 보험 공사에서 성실하고 명석한 직원으로 맡은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고객에게는 항상 친절했다.

그의 평판은 체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고 회사 밖을 나가는 즉시 180센티의 훤칠한 키와 몸에 딱 맞는 깔끔한 슈트와 모자를 쓴 모습에 수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사무실에 나가면서 외적으로 나의 직무를 완수하고는 있지만 나의 내적 직무를 완수 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완수 되지 않은 직무 하나하나가 사고로 이어지는데 그 피해는 전혀 복고되지 않고 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가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서른 여섯 살 카프카는 나날이 심해지는 폐결핵 질환 때문에 밀려드는 업무를 잠시 미뤄 두고 단 2주간의 휴가를 겨우 받아 프라하에서 약 32킬로미터 북쪽으로 떨어진 보헤미아의 휴양 도시 셸레젠으로 여행을 떠난다.

셸레젠이라는 도시에 도착한 카프카는 치료를 받는 환자들만 머무는 하숙집을 숙소로 잡는다.

몇 시간 후, 그의 절친한 친구 막스 브로트가 찾아 왔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던 카프카는 친구 막스 손에 들려진 종이 뭉치가 자신이 아버지에게 쓴 수 백장의 편지라는 걸 알아차린다.


'친구, 전부 태워 주게.'


친구 막스가 대답을 하지 않자, 카프카는 허공을 응시하며 이렇게 읊조린다.


'나에게는 조상도 없고 아내도 없고 후손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어떤 신앙과도 관계 없는 인간이다.

내가 종족으로서의 유대인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나 자신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2주 후 회사로 복귀한 카프카는 하루 하루 수척 해져 갔고 말을 하거나 삼키기도 어려울 정도로 기관지 상태는 날로 악화되어 갔다.

죽도록 멎지 않는 기침을 해 댔던 카프카는 마치 거대한 공장 기계가 기름칠을 하지 않아 쇳소리를 대는 기계처럼 마지막 연인 도라 디아만트와 담당 주치의에게 보낼 편지를 쓴다.


살아 있는 동안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운명에 대한 비관을 약간이 나마 막아낼 손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른 손으로는 그 폐허 밑으로 보이는 것들을 기록할 수 있다. 남들과 다른 것을 그리고 남들 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살아 있다.

아직 안 죽은 사람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카프카, 1921년 10월 19일


침상에 누운 카프카는 자신의 마지막 단편집이자 더없이 냉엄한 내용으로 채워진 단편<단식 광대>의 교정쇄를 검토 했다.

친구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에게 건네 받은 원고를 들고 출판사로 달려가 하루 라도 빨리 출간 일정을 앞당기라고 재촉하고 연인의 작품을 체코어로 가장 먼저 번역한 멜레나 에센스카는 완성된 원고를 받자 마자 매일 밤 타자기를 두드려 체코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완성된 번역판과 최종 출간 본을 받아 든 카프카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지만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예감하고 친구 브로트에게 두 개의 원고를 돌려 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는 것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두렵네. 그건 내가 아직 삶을 덜 경험했기 때문이겠지.'


마흔 한 살의 프란츠 카프카는 자신이 세상에 남긴 모든 글이 미완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고치고 수정하고 다시 쓸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빈 외곽의 열 두 개의 병실이 있는 사설 요양원에 입원하기 전 친구 브로트에게 자신이 남긴 모든 걸 불살라 버려 달라고 부탁한다.

그로 부터 일주일 후 1924년 6월 11일 수요일 오후 4시 마흔 한 살의 프란츠 카프카는 가족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눈을 감고 사흘 후 프라하 유대인 공동 묘지에 묻힌다.

친구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 보았던 막스 브로트는 장례식을 마치고 난 후에 친구 카프카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시각인 오후 4시에 자신의 시계 촛침을 맞추어 놓았다.

아들의 장례를 마치고 나서 카프카의 부모는 친구 막스 브로트를 집으로 불러 아들 프란츠의 사유물 관리자로 지정하는 계약서를 내민다.

브로트는 카프카가 남긴 책상 전체를 뒤집어서 심이 부러진 연필과 목깃이 뜯겨져 나간 단추들, 구슬들, 휴양지와 온천지에서 구입한 기념품들, 문진들 공책들, 미완성 초고들, 일기들 그리고 휴지 조각까지 전부 모아서 커다란 가죽 트렁크 속에 전부 때려 넣었다.

그는 친구 카프카가 살아 생전에 입었던 옷들의 주머니까지 전부 뒤져서 작은 종이 쪽지까지 전부 찾아 냈고 심지어 방 벽지에 낙서한 부분을 칼로 도려내서 떼어낼 정도로 카프카의 흔적이 남은 모든 걸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전부 모으고 모았다.

부모가 마지막 열쇠가 채워진 서랍장을 열자 펜으로 쓴 쪽지 한 장과 연필로 쓴 쪽지 한 장이 발견된다.

막스 브로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마지막 찾아낸 쪽지에 적힌 카프카의 글을 읽었다.

가장 친애하는 막스에게

내 마지막 부탁이네. 내가 남기고 가는 것 중에 공책과 원고와 편지 그리고 스케치 등등은 절대로 읽지 말고 남김없이 불태워 없애 주기 바라네. 더불어 자네가 갖고 있는 글과 그림 전부, 그리고 내 지인들이 갖고 있는 글과 그림 전부를 찾아내서 전부 태워주길 바라네.

설사 여건 상 서로 만나지 못한 다면 상대에게 태워 달라고 부탁하길 바라네

-프란츠 카프카가

카프카가 친구 막스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막스에게

다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기가 이번에는 좀 힘들 것 같네. 폐열 증상이 한 달 째 이어지니 무슨 힘이 나서 글을 쓸 수 있겠나? 설령 쓸 수 있다 해도 그 글에는 생명력이 없는 거네.

그런 연유로 이제 내가 쓴 글 전부에 대해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면 '판결', '화부', '변신', '유형지', '시골의사' 단편으로는 '단식광대' 뿐으로 이것 들 외에 내가 쓴 것들 현재 집안 어딘가에 남겨 있는 것들을 전부 찾아 내서 불태워 주길 바라네.

나의 마지막 부탁이니 당장 그렇게 해주리라 자네를 믿겠네.

-프란츠 카프카

1939년 3월 14일 화요일,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 ,집을 나선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는 검은 색 가죽 트렁크를 챙겨서 아내 엘자의 손을 잡고 황급히 프라하의 윌슨역으로 출발한다.

만일 이 역에서 오후 9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지 못하면 막스와 그의 아내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될 운명이였다.

아내 엘자의 미국 친척이 보내준 영국발 팔레스타인행 이민비자를 갖고 있었던 막스는 열종대열에 맞춰 유대인 추방 구호를 외치는 나치 청년들이 역 밖을 에워싸고 있는 광경을 숨 죽이며 지켜 보았다.

마침내 프라하의 팔레스타인 공관 책임자와 유대인 원조 단체 위원장의 보호를 받은 기차가 역에서 출발했다.

기차에 올라탄 아내 엘자가 좌석에 앉자 마자 막스 브로트는 친구 카프카가 남긴 모든 것들이 들어 있는 가죽 트렁크를 소중하게 좌석에 올려 놓았다.

두 부부가 영국 땅에 도착 했을 때 신고할 물품은 달랑 가방 한 개 뿐 정작 자신들의 소지품이 담겨진 가방은 단 한 개도 갖고 있지 않았다.

먼지와 바람만 휘날리는 황량한 팔레스타인 땅에 도착한 막스 브로트의 여권엔 54세/ 남자/ 난민 이라는 굵은 글씨가 새겨진다.

팔레스타인의 난민들끼리 모여 있는 허름한 하숙촌에 방을 겨우 구한 막스는 가방 속에서 친구 카프카의 원고 뭉치를 꺼내기 시작한다.


아멜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슬픈 미소이기는 했지만 어둡게 구겨진 얼굴을 환하게 펴주는 미소,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들려주는 미소, 전혀 모르겠는 낯선 것을 알려주는 미소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 중에서

1939년 나치가 유럽의 문을 폐쇄하기 직전 프라하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열차에 올라탄 막스 브로트는 오로지 친구 카프카가 남긴 것들만 챙겨왔다.

54세의 빈털털이였던 브로트는 텔아비브에서 출판인들과 편집인들 문학가들을 전부 끌어 모아 친구 카프카가 남긴 유언을 거슬러서 미완성 원고였던 ‘성’, ‘소송’, ‘아메리카’를 비롯해 카프카의 일기와 편지를 전부 세상에 공개했다.

그는 자신을 카프카의 유일한 절친으로 자칭하며 직접 카프카의 전기를 쓰고 출간 하며 전 세계를 무대로 강연에 나섰다.

2차 세계 대전 전쟁의 포화 속에 파묻혀 있었던 세계는 그를 카프카의 전문가로 칭송 하며 그가 편집하고 출간하는 카프카의 모든 저작물을 신뢰했다.

막스 브로트는 친구의 원고를 출간하는 동안 차곡 차곡 쌓여 가는 저작권 비용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자동차에 운전기사까지 고용하고 그리고 친구의 방대한 원고 편집 작업을 위해서 프라하 난민 출신의 에스테르 호페라는 여성을 비서로 고용한다.

1952년 어느 봄 날 아침, 막스 브로트는 10년 동안 자신의 곁에서 충실한 비서 일을 한 에스테르 호페를 서재로 불러 서랍에서 편지지 한 장을 꺼내 그녀가 지켜 보는 앞에서 증서를 작성해 나간다.


'친애하는 에스테르 에게 나는 나의 소유물인 카프카의 원고 및 서신 일체를 1945년에 당신에게 증여 했다.'

-베냐민 발린트의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 중에서


치밀하게 증여한 년도를 1945년으로 적은 막스 브로트는 1924년 친구 카프카가 남긴 모든 걸 담은 검은색 트렁크 안에 담긴 모든 원고와 일기, 편지, 쪽지들 그림들 사진들까지 전부 비서 에스테르와 함께 공동 금고에 맡기고 비서에게 모든 걸 증여한다.

16년의 세월이 흘러 20세기 최고의 문학가 자리에 오른 프란츠 카프카의 책이 전 세계 언어로 번역 되었던 시기인 1968년 12월 20일, 85세의 막스 브로트는 자신의 전 재산과 친구 카프카가 남긴 모든 걸 비서 에스테르 호페에게 상속하고 생일을 몇 일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

나치에 의해 카프카의 세 여동생과 친지들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고 막내 여동생 오틀라의 딸만 유일하게 살아 남아 영국으로 이주 했다.

이스라엘과 독일 양국가가 카프카의 원고 소유를 놓고 다투고 있는 동안 카프카의 조카는 모든 의사를 국가간의 문제로 양도하고 자신들은 카프카가 남긴 어떤 유산을 사적으로 취득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반면 막스 브로트의 비서 에스테르 호페는 1988년 카프카의 ‘소송’ 원본 원고를 200만달러에 독일 마르바흐 아카이브에 팔며 호화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카프카의 원고를 하나 둘 씩 꺼내면서 전 세계 부유한 수집가들의 귀와 눈을 홀리기 시작한다.

이스라엘 당국은 이미 30여 년 전, 막스 브로트가 사망한지 5년 뒤인 1973년 비서 에스테르 호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 했다.

당시 이 소송을 맡았던 판사는 막스 브로트의 최종 유언장에 따르면 비서 에스테르 호페가 브로트의 유산을 처리할 권한을 갖는다며 이스라엘 정부가 아닌 에스테르 호페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7년 에스테르 호페마저 사망하자, 두 딸 에바와 언니 루트 호페가 상속 절차를 밟으려 할 때 이스라엘 정부가 또다시 소송을 제기한다.

이스라엘 당국은 국립도서관을 앞세워 텔아비브에 사는 브로트의 비서 딸인 73세의 에바 호페에게 카프카와 브로트의 원고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 하고 약 9년에 걸쳐서 카프카가 남긴 원고 그리고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가 남긴 유언을 둘러싼 세기의 재판이 시작된다.

“이것이 줄다리기 시합이라면, 나에게는 아무 승산도 없겠지. 엄청나게, 엄청나게 강한 상대들과 싸워야 하잖아.”

브로트의 비서였던 엄마 에스테르 호페의 유언을 공증 받기 위해서 상속 등기소에 유언 공증을 신청했다가 난데없이 거대한 소송에 휘말린 에바에게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측은 막스 브로트가 비서 호퍼 에게 유산을 넘긴 것은 증여가 아니라 신탁일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체코 프라하에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어가 아닌 오로지 독일어로만 글을 썼지만 어디에서도 독일인으로도 유대인으로도 체코인으로도 살지 않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시기에 만난 연인 도라의 권유로 시오니즘과 유대교에 대해 공부하고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것이였지 그는 명시적으로 시온주의를 지지 한 적이 없었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독일이 천천히 자기 방식대로 가지게 되었을 것들을 독일에 강요했고 독일은 이방인들에게서 온 것들이라는 이유에서 그것들을 반대 했다.

-1920년,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은 막스 브로트가 비서에게 넘긴 것은 유산을 어떤 조건으로 어떤 기관에 넘길지를 선택할 권한일 뿐, 그녀의 딸들에게 물려줄 권한을 준 게 아니라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카프카가 명시적으로 시온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문학 유산은 유대 민족의 문화재로서 유대국가인 이스라엘 정부가 소유해야 마땅하다고 강변했다.

소송은 텔아비브 가정법원(2007~2012년)과 지방법원(2012~2015년)을 거쳐 2016년 이스라엘 대법원까지이어졌고 가정법원에 이어 지방법원에서 이스라엘 정부의 승리로 끝났고, 2016년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도 이스라엘 정부의 승소가 확정됐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에바 호페는 카프카 원고를 포함한 막스 브로트 유산 전부를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에 양도해야 할 것이며 단돈 1셰켈의 양도 보상금도 없을 것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어느 날 아침에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에바 호페는 자기가 상속권을 박탈 당한 상속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에바 호페











20년 가까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던 에바는 카프카 원고 인도가 한창 진행되던 2018년 분노와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막스 브로트는 친구 카프카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지 않았다.

1939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해 유대인 절멸을 시도한 나치로부터 카프카의 원고를 지켜낸 막스 브로트는 배신자 일까?

그는 85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까지 오로지 카프카의 원고와 편지를 출판하는데 모든 걸 바쳤다.

그의 헌신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살아 생전 무명이었던 카프카가 문학사의 가장 빛나는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세기 마다 각 국가를 대표하는 문학가들이 있다.

이탈리아는 단테가 있고 영국은 셰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은 괴테가 있다.

그렇다면 세기의 불후한 천재 프란츠 카프카는 어느 국가에 속한 작가인 것인가?

막스 브로트가 마지막 눈을 감기 직전까지 붙들고 있었던 원고가 있다.

친구 프란츠 카프카가 종이에 끄적였던 어느 문장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그들에게 왕이 되거나 왕의 전령이 되는 선택이 주어졌다. 모두가 아이들처럼 전령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렇게 전령들밖에 없는 것이고 이렇게 급하게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큰소리로 메시지를 왕이 없으니 무의미해진 그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유랑의 삶을 끝내고 싶어 하면서도 충성을 맹세했으니 차마 그러지 못한다.

-프란츠 카프카, 1924년 9월

프란츠 카프카가 세상에 잠든지 딱 100년이 되었다.

소송은 끝났고 그의 원고를 지켜내고 세상에 알리고 그 모든 혜택을 누렸던 이들 모두 세상을 떠났다.

카프카는 평생 동안 자신의 모든 것들로 부터 자립하고 자유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투쟁했다.

그의 소설엔 정확한 지명도 없고 정확한 이름도 없고 신도 없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은 '문학'이라는 무한한 상상력,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되고 되살아나는 불멸의 언어를 남겼다.

그가 남긴 무수히 많은 글들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빛처럼 세기를 지나 어디든 우리 곁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에 있는 얼어 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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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7-08 23: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카프카 소송 읽었어요. 다음엔 성 읽으려고 책 사놨고요.
카프카 얘기들 읽으면서 저 막스 브로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많이 궁금하더라구요. 스콧님 글 읽으니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기의 천재의 글을 알아본 안목. 그것을 버릴 수 없었던 마음. 그러나 친구의 유언을 무시하는데 일말의 주저도 없었던 것 같은 그의 삶 - 어떻게 보면 카프카가 소설속에서 그렸던 사람들 같기도 해요.
카프카의 작품은 인류의 것이지만 굳이 소유권을 따진다면 체코 아닌가요? 제 생각은 그렇네요. ^^
오랫만에 스콧님의 훌륭한 글을 읽으니 기분이 매우 좋아지는 밤입니다. ^^

2024-08-13 19: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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