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기준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빅맥 값을 비교한 빅맥지수(Big Mac Index)는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1986년 처음 만들어서 매년 1월과 7월에 발표되어왔다.

지금까지 빅맥지수는 각 나라의 물가 수준과 화폐 가치를 평가하는 경제 지표로 자리 잡으면서 스타벅스 커피값을 비교하는 '라테 지수', 이케아 가구 제품 가격을 비교하는 '이케아 지수' 등과 같이 전 세계 다양한 도시에 수 천개의 매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의 대표 상품들의 가격 책정 변동에 따라 나라별 체감 물가 지수를 한눈에 파악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명 커피 공화국으로 불리는 한국에서는 맥도날드 매장 보다 모퉁이만 돌아가면 간판이 보이는 스타벅스 지수에 더 민감하다. 

 고물가 시대에 커피 중독자들은 가성비가 좋은 커피를 마시게 되니 스타벅스 가격 변동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물가가 급등할 때 면 가성비 반찬으로 식탁을 지키던 김 가격이 치솟아서 즐겨 사 먹던 김밥이 가격이 두 배로 급등하거나 조미김 한통에 김이 10장에서 8장으로 줄어 들게 되면  이보다 더 속상할 수가 없다.

기후 이상으로 바다 온도가 상승해서 발생하는 적조현상으로 인해 김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한국의 김은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 잡아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싹 쓸어가는 대표적인 상품이고 K푸드 열풍에 냉동 김밥 수출양이 대폭 늘어나서 수출로 물량이 빠져나가게 되어  국내 소비자들에게 공급할 김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이어 전 세계 두 번째로 김 생산량이 많은 일본은  그동안 반 세기 넘게 전 세계 김 수출의 60퍼센트를 장악했던 시절도 있었다.

일본은 7세기 무렵 부터  미역보다 얇은 바다말을 얇게 펼쳐 말려 먹었다. 이 바다말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던 것은 도쿠가와 가문이 에도에 입성하고 나서 부터였다.

도쿠가와 가문은 안정된 식재료를 수급하기 위해 에도성 앞에 어장을 조성했다.

 그 시절에 생겨난 어장은 가니스기, 혼시바. 시나가와로 점차 이 어장이 번성하면서 주변에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어장과 상권이 번성하기 시작하자 시나가와가 주변 포구를 총괄 하는 중심 어장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김 양식을 재배 했다.

17세기 에도에 시나가와에서 생산한 김은 색은 붉고 형태는 닭 벼슬처럼 작고 비린내가 난다 해서 노리(海苔) 불렀다. 김을 가공하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사찰에 종이를 대량 공급했던 아사쿠사 제조자로 당시 아사쿠사는 헌 종이를 수거 해서 재생종이를 생산했던 수공업체였다. 종이를 가공했던 수공업자가 미역보다 가는 김을 종이처럼 건조 시키는 방법을 고안했다.

바다에서 수거한 바다말을 담수에 섞어 대나무 판지에 얇게 펴서 바람에 건조 시키고 나서 숫불에 살짝 구우니 비린 냄새가 사라졌고 태운 종이처럼 입 속에서 바삭거리다 스르르 녹아 내리자 일본인들은 밥을 얹어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공한 김을 조미한 간장에 찍어 먹으면서 에도 시대 일본인들은 바다 채소라 불렀다.

 일본이 김을 종이처럼 얇게 가공 하기 훨씬 전부터 한국은 13세기 말인 신라 시대 부터 바다에서 김을 건져서 건조 시켜 먹었다. 삼국 시대 때 김은 혼인을 앞둔 왕의 폐백 품목 중 하나 였고  조선 시대는 임금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검은 바다풀이였다.

이 검은 바다풀이 김이라 불리게 된 건  조선시대 인조 임금이 자신의 수라상에 오른 검은 바다풀을 맛있게 먹고 무슨 음식인지 묻자 한 신하가 음식 이름은 모르고 전남 광양에 사는 김여익이란 자가 만든 음식이라 답했다. 이후 조선 왕실에서는 김여익이 만든 바다풀이라 해서 그의 성을 따 ‘김(金)’이라 부르게 했다.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김밥의 기원은 일본 마키스시(巻き寿司)의 일종인 '노리마키(海苔巻き)'에서 왔다. 

에도 사람들은  식초와 설탕을 섞어 넣은 밥에 김을 싸서 먹기 시작했고 각종 속재료를 넣고 대나무발로 말아 원통형으로 만든 '후토마키(太巻き)'는 메이지 시대 들어서면서 부터 만들어 먹었다. 메이지 시대때 '후토마키(太巻き)'의 속재료는 생선회 였다.

1930년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 들어 온 일본식 김밥은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 되어서 당근과 계란, 우엉, 햄, 깻잎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대체됐다.

일본은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노리마키의 기본이 되는 식초와 설탕으로 밥에 초절임을 하는 방식이 사라졌고 현재 일본 식당에서 파는 김밥은  미원과 소금, 참기름을 넣고 속재료도 한국 처럼 다양하지 않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김과  즐겨 먹는 김밥이 어느 나라에서 먼저 유래 되었는지 따지기도 전에 한국의 김밥은  일본의 라면 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한국의 식재료와 뛰어난 조리 기술로  다채롭게 발전 시켜 나간 음식이다.

햄버가 한 개 먹은 포만감 보다  김밥 몇 줄을 먹은 포만감은 세계 물가 지수 지표로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김밥은  한국인에게 무척 특별한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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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비 2026-09-07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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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책벌레 였던 조선 제22대왕 정조(正祖·1752~1800)는  1791년  창덕궁 어좌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치우고 책거리 병풍을 세우라고 명하고 신하들에게 이런 발언을 합니다.

 "서재에 들어가 책을 만지기만 해도 기쁜 마음이 솟는다. 경들은 그렇지 아니한가?"

왕이 좋아한다는  책거리를 고관대작이 앞다퉈 병풍을 집에 들였고 곧바로 시중에 대유행하면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열풍을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했던 조선 시대 유교 사회에서 책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였기에 책을 비롯해 도자기, 문방구, 향로, 화병 등을 진열해 놓은 모습을 그린 그림인 책가도가 고위층 부터 서민 계층까지  널리 유행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책 사랑은 조선 왕실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아서 아무리 가난해도 어느 집이든 책이 있어서 1886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해군 장교 주베르는 헛간 같은 곳에서도 책이 나와서 자신들의 자존심이 상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입에 풀칠할 정도로 가난해도 땔감이 없어서 추운 겨울 천장에 고드름이 줄줄이 매달려 있어도 조선 팔도 어디에서든 초가 산간에도 글 읽는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로 한국인에게  책은 끼니를 때우는 것보다  소중한 존재 였습니다.20세기 서양 예술의 혁신적인 기법보다 앞선 역원근법, 초현실적 기하학, 그리고 착시 효과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는 조선의 천재 화가들이 그린  책가도 @Scott-MoveableFeast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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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맘 2026-09-06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곁에 두고 많히 읽어야겠어요~
 

 

 


데미언 허스트가 골드 스미스 대학 시절 친구들과 기획 했던 전시 이름에서 차용된 잡지 <프리즈>는 4년 후 1995년 뉴욕과 베를린에 아트페어 개최를 시작으로 지난 30여년 세월 동안 현대 미술계의 광범위하면서도 촘촘한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아트페어 개최를 비롯해 출판물,비디오, 팟캐스트, 웹사이트 등을 통해 전 세계 예술가와 컬렉터를 연결 하는 세계적인 아트 ,컬쳐 멀티 플랫폼으로 성장했다.21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리즈>는 본격적으로 전세계 예술 작품을 한 곳에 전시 하는 아트 페어를 2003년 런던에서 개최 하면서 예술과 문화가 대중에게 더 가깝게 다가 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2012년 랜들스 아일랜드 에서 개최한 <뉴욕 페어>와 런던 <프리즈 마스터 페어>를 시작으로 영상과 작품을 다양한 매체로 적극 소개 하며 단순히 미술품을 구매 해서 전시 하는 것 뿐 만 아니라 문화와 패션, 음식,영화와 연결 시키며 전 세계 예술의 교두보로 우뚝 성장했다.

반면 1966년 독일 쾰른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아트 페어가 열린 이후 줄곧 아시아 지역은 일본과 홍콩을 제외하고 예술계 변방으로 한국은 몇몇 소수의 작가들 작품을 제외하고 해외 거물 급 갤러리 소장품으로 등록 되지 못했다.

1980년대 까지 아시아 미술 시장의 중심은 일본으로 막강한 엔화 자금력을 동원해서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모네의 '수련'작품 같은 최고의 명작을 긁어 모아서 세계 미술계 시장을 움직이는 한 축으로 우뚝 성장했다.1990년 버블 경제로 일본 경제가 기나긴 침체에 빠져 버리자 싱가포르가 아시아 미술 시장 자리를 차지 했지만 2007년 싱가포르 정부가 미술품에 7퍼센트 부가 가치를 부과 하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면서 세계 주요 경매 회사들이 세금이 없는 홍콩으로 건너 갔다.

외국의 메이저 급 화랑들이 홍콩 미술 시장 곳곳에 문을 열며 아시아 문화 예술 중심지가 되었지만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불안한 사회 경제 상황과 중국 공안의 극심한 검열로 정치적 불안이 요동 치던 중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 되면서 유럽 명문 갤러리들이 서울에 사무실을 열기 시작했다.

그동안 일본과 싱가포르 그리고 홍콩에 밀렸던 서울은 2022년 9월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를 개최 하면서  아시아 예술계의 변방에서 벗어나  예술산업이라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게 되었다,

국내외 거장 예술가들 작품들과 세계적인 갤러리들이 총 집결하는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가 열리는 동안 단순히 그림을 사고 파는 것 뿐만 아니라 행사 기간 동안  출품 전시된 작품에 관한 영상 전시,소더비 인스티튜트의 프리미엄 컬렉션 코스, 토크 프로그램,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클래식 연주회 그리고 야간 행사를 통해 작가와 작품, 컬렉터와 수집가를 연결 시키며 미술계의 중요한 화두와 의제에 관해 소통하는 거대한 '아트 테마 파크' 같은 프로그램이 빼곡하다.

 세계 메가 갤러리들이 총 집결하는 2026년 프리즈에 참석한 가고시안은 데이미언 허스트의 솔로 부스를에  ‘Pill Cabinets’를 비롯해 ‘Spin Paintings’, ‘Spot Paintings’, ‘Treasures’ 등 대표 연작을 한자리에서 선보이고 있다.

2026년 프리즈에서는 이전과 달리 서구 중심 미술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 받았던 한국 미술과 세계의 20세기 작가 15명의 작품과 함께 도자와 섬유, 유리, 금속, 목재, 한지 같은 재료로 만든 공예 작품들도 출품 되었다.세계 제 1일의 반도체 공정을 창출하는 한국인의 DNA에는 탁월한 미적 감각이 스며 있어서 물과 불, 흙과 조개 껍질 그리고 옻나무 같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수천년 동안 빛을 바라지 않는 예술작품을 만들어 왔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인간의 삶 전체를  재편하는 시대에 인간의 본능과 신체적 감각으로 빚어낸 예술 작품이 품고 있는  생명력은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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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가구 배치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방 안의 침대 위치를 잡는 것으로 침실의 크기와 방문과 창문의 위치에 맞춰야 잠잘 때 머리 방향의 위치를 잘 잡을 수 있다.

머리 방향 위치를 잡는데 몇 가지 염두 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자기장을 발산하는  전자파를 발산하는 전자 기기 방향으로 머리를 두면 뇌신경을 자극 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멀리 하거나 방향을 바꿔야 한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지만 머리를 방문 쪽으로 향하거나  장롱 쪽 가까운 곳에 두거나 발이 문 쪽으로 향하고 자는 것도 좋지 않다.

머리의 방향은 그 사람의 기나 건강 상태 등에 의해 좋고 나쁨이 미묘하게 달라지게 하는데 수면 시 머리 방향을 동쪽으로 두면 떠오르는 햇빛의 양기를  받을 수 있어 좋다는 말이 있다. 

 잠잘 때 머리의 방향을 내 스스로 느끼기에 가장 편안한 상태의 방향을 잡아도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뻐근하다.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렸을 때 좋다는 기능성 베개를 찾아 전문 매장에 시범 전시 된 침대에 누워 보며 내 몸에 맞는 베개를 사용했다.

 누웠을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편안함을 주는 베개를 비고 자도 이를 악물고 자거나 이를 갈거나 입을 벌리고 자는 경우가 많아 졌다.

이런 증상 때문인지 기상 알람 소리를 들으면 심장 박동이 빨라져서 마치 전속력으로 달리다 갑자기 멈추기라도 하듯 호흡까지 가파졌다.

머리 방향을 바꿔보기도 했고 베개를 바꿔 보기도 했지만 증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바람직한 수면 자세는 바르게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자는 자세로 경추와 요추의 커브가 자연스럽게 근육의 긴장이 없는 상태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옆으로 누워야만 잠이 들기 때문에 바른 자세 상태에서 꿈나라를 가보지 못했다.

학부 시절 기숙사 생활을 할 때 다리를 꼬거나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에 올려놓고 교차 시켜 놓은 자세로 잠을 잤다.

나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메이트가 알려줘서 깜짝 놀랬다.

두 다리를 묶고 자야 하는 걸까라는 고민을 했지만 기숙사를 나오고 나서 이 자세는 사라졌다.

사람마다 체형과 척추 커브, 구조의 비대칭 정도가 달라서  편안함을 느끼는 수면자세도 다르다.

의사와 베개 매장 직원 말에 의하면 베개는 천장을 보고 바로 누워 잘 때보다 어깨 높이를 감안하여 팔뚝 하나만큼 더 높은 위치인  10~15cm의 높이가 적당한데 똑바로 누워 자는 사람이라면 머리와 어깨 사이의 빈 공간을 채워주도록 베개의 목 부분만 높으면 되고 옆으로 누워 자는 사람이라면 베개 좌우가 높아 누웠을 때 어깨를 받쳐줄 수 있는 형태가 좋다는 조언을 했다.   

 베개 높이는 자는 자세에 따라 달라지고 사람마다 체형과 척추 커브, 구조의 비대칭 정도가 달라서  편안함을 느끼는 수면자세도 다르다.

그렇다면 각자의  목 높이에 맞는 베개를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벽에 등을 살짝 붙이고 머리 뒤통수는 닿지 않도록 기대어 선다.

2. 머리 각도가 5도 정도 앞으로 향해 있는지 확인 후 벽에서부터 목까지의 거리를 잰다.

3. 측정한 목 높이를 고려해 베개에서 목이 닿을 부분을 꾹 눌러 그 높이가 나오는 베개를 고른다.

이런 사항을 모두 고려해서 베개를 골라도 일어났을 때 몸 상태는 개운하지 않다.

그동안 사용했던 베개들 중에서 가장 편안한 숙면을 취하게 해 주었던 베개들 중에서 이것 저것 따져보면 내가 직접 고른 베개가 아니였다.

 

기숙사를 나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주택가 4층 꼭대기에 살았던 시절, 당시 집 주인은 내가 자신들의 두번째 입주자라며 각별하게 신경을 써 주었다.

없는 게 없을 정도로 혼자 쓰기 딱 좋은 가구와 세간 살이들, 주방 시설과 기기까지 완벽했다.

특히 덮고 잤던 이불과 베개는 깃털 만큼 가볍고 폭신 해서 여행을 갈 때면 가져 가고 싶을 정도로 편안했다.

 그 집에서 몇 주를 보내고 난 뒤 집주인이 잠은 편히 잤냐. 어디 불편한데 없는지 물었다.

나는 단 몇 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불과 베개가 너무 편했다고 대답했다.

날씨가 화창했던 어느 저녁  집주인 가족에게 저녁 초대를 받아 뒤뜰에서 열린 바베큐 파티에 참석했다.

이사 오던 날 잠깐 인사만 나눴던 집주인의 두 아들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와 동갑이였던 둘째 아들이 내가 아끼는 그 베개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농장에서 키운 거위 털로 직접 만든 수제 베개라는 말을 해주었다.

 

둘째 아들에게  베개 한 개에 몇 마리 거위 털이 들어 가냐고 물으니 한 마리 거위에서 대략 140그램이 나오는데 성인용 베개 한 개에 들어가는 거위는 15마리에서 20마리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혹시 내가 덮고 있는 이불도 거위털로 만들었냐고 물으니 그렇다며 그 거위 이불에 들어간 거위는 50마리가 넘는다며 솜털과 날개 쪽 깃털을 사용해야 보온이 뛰어나다는 말을 했다.

 

거위 털 베개의 수명은 1년에서 1년 반이고 이불은 5년이다.

그 집에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그 이후로는 거위 털을 넣은 걸 침구로 사용하지 않았다.

베개가 불편 할 때면 그 시절 거위 털 베개가 생각나지만 나의 질 높은 수면을 위해 수십마리의 거위 털을 뽑아 만든걸 사용할 수 없어서 베개 전문 매장을 찾아다닌다.

전문가에 의하면 기능성 베개로 인기가 좋은 메모리 폼이나 라텍스 소재 베개 수명은 3년이고 천연 라텍스의 수명은 10~15년인데 개개인의 머리 무게와 땀 수분 상태에 따라 교체 주기가 달라진다는 말을 했다.

새로 구입한 베개 사용 설명서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라텍스는 수분에 약해 습기가 계속 닿으면 표면이 딱딱해지고 갈라지는 경화현상이 일어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자는 동안 땀이나 침을 많이 흘리는 사람은 방수포를 안쪽에 한 겹 씌워주면 좋다.

경화현상이 일어날 경우 베개가 점점 더 딱딱해지고 탄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라텍스 가루가 떨어져 코·입으로 흡입할 수 있으니, 그 상태에 이르렀다면 빨리 교체해야 한다.


체형에 맞는 베개를 찾지 못하거나 교체 하는 것도 귀찮다면 이런 베개도 괜찮을 것 같다.

(c) Håkon Anton Fagerås

세상에서 제일 딱딱한 베개를 만드는 노르웨이 조각가 호콘 안톤 파가로스는 베개 천을 재단하고 박음질 하지 않고 딱딱한 대리석을 드릴로 정교하게 깎아내고 다듬는다.

 

점토나 대리석을  면 베개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포근한 베개로 변모 시키는 조각가 파가로스는 인생이 침대에서 시작되어 침대에서 끝난다며 '만약 당신이 딱딱한 베개를 좋아한다면...'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색과 크기의 딱딱한 베개 조각품을 만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수면 시간 통계 자료에 따르면 미국 성인들은 평균 9시간 28분이고 일본은 7시간 22분 한국인 성인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7시간 41분, 이 가운데 직장인은 6시간 6분으로 전체 회원국 중 일본 다음으로 가장 낮았다. 

현재 우리나라 연간 노동 시간이 2100시간을 넘어 OECD 평균 1766시간보다 무려 400시간이나 많다.

잠도 못 자며 일만 해도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것도 빠듯하기에 베개 만큼은 내 몸을 편하게 해주면 좋겠다.

잠과 싸우지 말고 머리를 베개에 눕혀라. 

-마하트마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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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9-04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을 잘 자는 게 참 중요하단 걸 나이 들면서 새삼 느껴요. 건강의 척도란 것을요. 저도 늘 옆으로 또는 살짝 업드리다시피 누워야 어느새 잠이 들어 있을 때가 많아 바른 자세 유지가 참 힘들더군요. 그리고 베개의 중요성도 느껴 정말이지…다른 곳에서 잠을 잘 못 잘 정도가 되어버렸죠. 베개 정말 중요해요.^^

카스피 2026-09-05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이 보약이라고 하는데 전 요즘 잠이 잘 안아서 거의 한 1~2시경에 자느 것 같아요.그래선지 낮에는 몸이 찌푸퉁 한것 같습니다.저도 베개를 바꿔봐야 될 것 같아요.
 

지금으로 부터 142년 전인 1884년 12월 5일 , 조선 땅에서 선교를 하며 의술을 펼쳤던 미국인 호러스 알렌(1858~1932)은 늦은 밤, 휘황찬란한 달빛이 기이할 정도로 대낮 같이 빛나서 일기에 황홀할 정도로 빛나는 순간을 기록한다.

“인적이 드문 거리는 조용하고, 달빛에 비친 거리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산보 하기 위해 대문 밖으로 나갔다”

일기를 쓰고 난 후 호러스 알렌은 대낮 같이 빛나는 달빛을 맞으며 집 주변을 산책 하고 밤 10시 반쯤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자마자 누군가 요란하게 대문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호러스 알렌이 문을 열자  미국공사관 직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변이 일어 났습니다. 어서, 안전한 곳으로 대피 하십시요.'


1884년(고종 21) 12월 4일 저녁, 우정국의 책임자였던 홍영식(1856~1884)이 한국 최초의 근대적 통신체제 출범을 기념하는 연회장에서 급진 개화당의 주역들(김옥균,박영효,서광범, 서재필)과 함께  민씨 척족 등 수구파들을 몰살할 계획을 꾸민다.

조선의 급진개화파들은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청불전쟁으로 조선 주둔 청군이 3000명에서 절반으로 감소한 시기를 기회로 삼고  자주국가 수립과 개혁을 위해 정변을 계획했다.

1884년 12월 4일  밤 10시 30분,   개화당은 우정국 개청 축하연회장에서 개혁 정령을 반포 하기 전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기고 군사권을 장악하고 문벌 폐지와 인재 등용, 군제 개혁 등 근대적 개혁안이 담긴 개혁 정령을 반포했다.

개혁 초기는 성공한 듯 보였지만  청에 맞서 자주를 회복할 것인가, 당분간 보호 아래 국력을 키울 것인지를 놓고 분열의 조짐이 시작되었고 섣불리 일본군을 끌어 들여서 민심에 반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청나라군이 개입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당시 일반 조선인들은 개항 이후 일본을 침략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고종의 성급한  군사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었고 급속하게 밀려 들어 온  외국 상품의  범람으로 조선 경제는 무너져 버렸다.

도로 정비를 이유로 살던 주거지들이 철거 되어 고향을 떠나 전국 떠돌이 신세로 전락한 민중들은 개화당이 발표한 개혁 정령에 극심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부유한 금수저 20대 조선 청년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주변 강대국 세력들의 본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이들의 교활한 전략에 휘말려 들어갔다.

특히 정변 마지막 날 고종이 폐립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해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고 개화당의 집을 파괴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출처 :일본국회도서관 

일본에서 최고 조선전문가였던 이노우에 가오루(1936~1915) 외무경은 청일전쟁이 발발한 뒤 조선의 내정개혁을 위해 일본이 주도해 시행한 갑오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조선 공사로 부임하기전 도쿄에서 김옥균을 만난다.

고종 내외의 사치와 민씨 척족들의 부패로 조선 재정은 거덜이 난 상태에서 김옥균은 조선 국방력 확충에 필요한 무기 구입과 신식 군대 훈련에 들어갈 자금을  일본 정부로 부터  끌어 올 생각이였지만 이노우에게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미 2년전 일본 정부는 조선왕 고종에게 요코하마 정금은행에서 대출한 17만엔을 차관 해 주었지만 명성 왕후 일가와 황족들이 외국사절 접대, 수신사·조사시찰단·유학생 등 파견, 부산·원산·인천 등의 개항한다는 명목으로 펑펑 써버려서  나라를 지키고 경제 내실을 다질 곳엔 단 한 푼도 쓰이지 못했다.

김옥균은 앞서  후쿠자와 유치키에게 2천만엔을 지원 받았지만 개인 경비와 사치 비용으로 홀라당 써버렸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이노우에는 김옥균이라는 인물을 허세와 허풍이 심해서 신뢰 할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출처:문화재청 /1884년 갑신정변 실패후  망명 시절의 김옥균의 모습.

김옥균이 벌인 일로 너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했다.

가장 먼저 그의 아내와 딸은 관노비가 되었고 집안은 풍비 박산이 났다.

3일 천하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조선의 지배계급 내에 뿌리 깊었던 증오심이 폭발해서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됐다. 

이 틈을 노렸던 청나라와 일본은 서로 살벌한 기싸움을 벌이며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를 위해 1885년 4월 “장래 조선국에 만약에 중대 변란이 생겨 청·일 양국 혹은 한 나라에서 병사 파견이 요구될 때에는 마땅히 먼저 상대에게 행문지조(行文知照·문서로 알린다)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톈진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이 7년 후 조선 땅을 불바다로 만든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고종과 명성황후 일가는  김옥균을 비롯해 개화파 세력 처단에 집착하며 나라를 통째로 외세 세력들이 쉽게 들락거리게 만드는 빌미를 던져준다.


조선 땅에 쿠테타가 발발 했다는 소식에 알렌은 황급히 조선의 통상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독일 외교관 출신인 묄렌도르프의 집을 찾아 간다.

그 집에 도착해 보니 오른쪽 귀에서 눈두덩까지 칼에 베여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이를 발견한다.

명성왕후의 양오빠 민승호의 양아들로 고종 내외의 신임을 독차지 하고 있었던 민영익(1860년~1914)은 하늘에서 내린 천운으로 의사 알렌의 치료를 받아 목숨을 구했다.

 천하(天下)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전통적 우주관에서 ‘온 세상’을 뜻한다. 하지만 시간을 뜻하는 수사와 명사 뒤에 붙으면   짧은 기간 동안 권력을 잡았다가 그 권력을 빼앗긴 사건을 의미한다.

1884년  갑신정변 두달 뒤인 12월 13일, 도망가지 못한 김봉균, 이희정, 신중모, 이창규는  능지처참됐고, 이점돌, 이윤상, 차홍식, 서재창, 남흥철, 최영식은 참형을 받았다.

 일본으로 도망갔던 김옥균은 청나라 실세 이홍장을 만나러 상하이에 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된 뒤 국내로 송환 돼 양화진 백사장에 시신이 던져 졌다.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독을 마시고 자결했고 그의 아내와 딸은 관노비가 되어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갔다.

가장 오래 살아 남았던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의  부모, 아내와 자식 모두 독금물을 먹고 자살하거나 자결했다.

1919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과 하란사를 밀사로 파견해 대한제국 황실의 독립 의지를 알리려 했던 고종의 은밀한 계획은 일본 측에서 심어둔 비밀 첩자들인 황제를 보좌하는 궁녀들과 내시들에 의해 흘러 들어갔다.

사전에 고종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일본은 뜻대로 되지 않자 독살을 감행했다.

1919년 1월 19일  이날 고종이 마신 음료는 식혜였다.

사망 직후 고종의 팔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 했고 이가 빠지고 혀가 닳아 있었으며 목에서 복부까지 30센티미터가량 검은 줄이 나 있었다는 기록이 윤치호 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 수기에 조선총독부가 시의 안상호에게 독살을 명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적었다. 

궁내부 사무관을 지낸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의 회고록 '이왕궁비사'에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가 민병석과 윤덕영이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와 모의해 안상호에게 명해 독을 쓰게 했기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적혀 있다. 

곤도 시로스케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안상호는 1896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 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귀국 후 순종과 고종의 전의(주치의)로 활동하며 조선 최초 서양 개업의로 활동 했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에게 피습당한 이완용을 치료한 하며 신의 손으로 소문이 자자해지기 시작했다.

구사 일생으로 살아 남은 매국노 이완용은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 즉 경술국치 체결에 앞장서서 

대정친목회를 조직해서 조선 땅의 경제인과 관료·언론인·교육자·법조인·의료인을 참여 시켜 조선인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내고 세뇌 시키는 일본의 손과 발이 되었다.

이 조직에서  한국 최초의 개업의 안상호는  평의원을 지내며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인들이 피 땀 눈물을 흘릴 때 경기도 군포 등지의 철도·도로 인근에 수천 평 규모의 부지를 소유했고 이후 자손대대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리며 대한민국 땅에서 살고 있다.

2026년은 갑신정변 발발 142주년을 맞는 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면 나라가 퍠망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었을까?

갑신정변 주역들인 개화당 엘리트들은 역설적이게도  모두  강경 수구보수파였던 노론명문가의 자손들이었다.

조선 왕조 5백년 내내 계파와 당파 싸움으로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과 권력자들의 아귀다툼으로 내부에서부터 섞어 들어 갔다.

로봇과 공존 하는 시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협회.단체, 조직, 정당, 관공서 그리고 민생의 안전과 치안을 최우선으로 맡고 있는 경찰 조직까지 모두 썩어 버려서 부패 할 대로 부패 하다 못해 은폐와 은닉, 눈감아 주는 것은 당연시 하고 있다.


암행어사, 홍길동이 등장 한다 해도 법과 정의가 실종된  이 나라를 구제 할 수 있을까? 


개인의 안전을 위해 차라리 신변 보호용 로봇이 등장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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