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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밀크
데버라 리비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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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 깃발이 펄럭일 때는 바다 수영을 하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

스페인 한 해변에서 메두사라 불리는 해파리에게 다리를 쏘인 소피아는 자신의 삶이 메두사의 저주를 받아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름: 소피아 파파스테르기아디스

나이:25세

국적: 영국

직업:


소피아는 원인 모를 다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엄마 로즈를 고메즈라는 남자가 운영하는 스페인의 한 요양 병원에 입원 절차를 밟기 위해 보호자 서약서에 양식을 기입하던 중 <직업>란에 어떤 직업도 기입하지 못하고 있다.


따스한 남쪽 해안가에 자리 잡은 휴양지의 리조트를 빌린 소피아와 그녀의 엄마 로즈는 다른 투숙객들처럼 돈 걱정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이 보이지만 이들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런던의 작은 집을 은행에 저당 잡혀서 그 돈으로 스페인으로 건너 온 소피아는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 했지만 어디에서도 마땅한 직업을 얻지 못한 채 무료 인터넷 망을 이용할 수 있는 웨스트 런던의 한 카페에 시급 종업원으로 매일 출근하고 있다.

그렇게 모든 재산을 탈탈 털어 스페인의 한 휴양지로 온 소피아는 다리 통증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엄마 로즈의 휠체어를 끌며 이렇게 중얼 거린다.


나는 더 큰 삶을 원한다.

나는 실패자다.

내 꿈은 끝났다.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해서 장학금을 받고 석사과정에 진학 했지만 엄마의 발병으로 박사과정으로 진학하지 못한 채 카페로 출근해서 매일 쿠키과 케익을 만들고 있는 소피아에게 클리닉 직원은 서약 양식을 채우라고 재촉한다.


'직업칸을 채우지 않았네요.'


서약 양식을 채워야만 클리닉 치료를 받을 수 있기에 결국 소피아는 펜을 쥐고 이런 문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영아 연구하기

-동물 연구하기

-원시인 연구하기

- 정신분석 받기

-개종했다가 극복하기

-한 가지 정신병 증세를 겪고 극복하기

소피아는 개종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두번 그어 버린다.

그녀의 아버지는 예순 아홉 살 나이에 자신의 딸 보다 겨우 네 살 많은 여자와 결혼해 아기를 낳고 고향 그리스 땅으로 건너가 집안에서 상속 받은 선박 사업체에서 나오는 돈으로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

14살 이후로 아버지를 만난 적 없는 소피아는 자신을 부양하느라 빚더미에 앉아 있는 엄마의 빚도 갚아야 하고 얼마의 비용이 들어 갈지 모르는 치료비까지 모두 떠 안아버렸다.

카페 일로 소피아가 받는 임금은 세 시간당 18.30 파운드로 은행에서 온갖 굴욕스러운 말을 듣고 작은 방 한 칸 짜리 딸려 있는 집으로 겨우 대출을 받았다.


저기 소피아가 엄마 로즈를 휠체어 태우고 지나가고 있다.

시멘트 공장 맞은편, 황량한 해변에 자리 잡은 고메스 클리닉

두 모녀는 이곳에서 치료를 마치고 영국 런던으로 돌아 간다 해도 머물 곳이 없다.


이름:

나이:

국적:

직업:


스물 다섯 살의 소피아는 이런 기본적인 양식에 자신의 이력을 자랑스럽게 기입하지 못하면서도 최우등 성적의 인류학을 공부한 지식으로 주변의 인물들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소피아가 탐구하기 시작한 인물들은 우선, 해변에서 메두사라는 해파리에 쏘였을 때 가장 먼저 달려온 다이빙 학교에 있는 간의 의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후안과 의 여자친구 잉그리트 바우만 그리고 미스터리한 치료사이자 돌팔이스러운 의사 고메스 박사에 대한 모든 행동과 말투를 인류학적 지식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독일 바이에른 대학에서 기하학을 전공한 잉그리트의 늘씬한 체형에 사로잡힌 소피아는 그녀가 사소한 행동조차도 지나치지 않고 입맞춤이나 눈물을 글썽여 보이는 감수성에 놀라면서 빠져든다.

이를 눈치 챈 잉그리드가 거리를 두자 소피아는 해파리에 쏘인 부위를 치료해 준 잉그리드의 남자 친구 후안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후안이 메두사에 쏘인 모든 곳에, 부은 자리와 물집에 키스 했다. 내 몸에 그런 부위가 더는 남지 않은 게 아쉽다고 느껴질 때까지 .

나는 욕망에 쏘였다. 그는 나의 연인이고, 나는 그의 정복자였다.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집안의 가장이였던 엄마 로즈는 무료급식 대상자였던 딸을 부양하느라 어느 순간부터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혼한 전 남편을 딸 앞에서 비난하거나 헐뜯지 않는다.

소피아는 자신의 엄마 로즈의 휠체어를 밀면서 한 편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한 인간, 잉그리트에게 관심을 보이며 인류학적 지식으로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한다.


나는 좋아한다.

-그녀가 촘촘하게 수 놓인 벨트를 푸는 방식을

-그녀가 자신의 몸을 좋아하는 방식을

-붉은 흙먼지에 덮인 그녀의 맨발을


잉그리트와 연인이 된 소피아는 스스로도 자신의 성체성을 알지 못한 상태로 엄마를 클리닉 치료소에 맡겨둔 채 해변가에서 만나 새로 사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뜨거운 태양 열기, 모기, 메두사를 닮은 해파리...

엄마 로즈가 다리를 절룩거리는 모습을 지켜 보던 소피아는 자신이 엄마의 보호자이자 부양자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하며 결국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아버지가 있는 그리스 아테네로 떠난다.

소피아는 공항에 마중 나온 아버지와 그의 새 아내 그리고 자신의 반쪽 피가 섞인 젖먹이 아기를 만난다.

소피아는 아테네에서 아버지의 멋진 집에 머무는 동안 어린 시절로 돌아가 밤마다 아버지가 자장가처럼 읊어 주었던 그리스 알파벳 놀이를 하다 너무나도 행복한 젖먹이 여동생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가족의 의무란 무엇인가?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부양하고 책임져야 하는 부모는 자식에게 얼마 만큼의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할까?

변변치 못한 직업에 엄마의 치료비까지 대야 하고 은행에 채무 상태인 소피아는 아버지에게 손을 벌린다.

소피아 입에서 돈 이야기가 나오자 이제 부녀 사이는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가 되었다.

만일 그녀의 아버지가 값을 지불하고 나면 그는 그동안 가족에 대한 채무 비용을 완전히 청산하게 될 것이다.

딸의 입에서 돈 이야기가 나오자 아버지는 매몰차게 돌아서고 아버지의 새 아내 알렉산드리아는 하루가 다르게 노화 상태에 접어든 남편의 상태를 소피아에게 토로 한다.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 소피아가 새로 사귄 스페인 친구들은 엄마 로즈가 치료 받고 있는 고메즈 클리닉 운영자가 사기꾼이라며 어서 치료를 그만 두라는 문자를 보내 온다.

마침내 아테네의 아버지 집에 머무는 동안 소피아는 자신이 그동안 부모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환각 상태였다는 사실을 젖먹이 여동생의 생글 거리는 미소를 보고 깨닫게 된다.

소피아의 아버지는 딸과 헤어지는 자리에서 은행에 간다는 걸 깜빡 했다면 지갑에서 10 유로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고 그렇게 소피아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테네 공항에서 전부 잃어버린다.

소피아의 엄마 로즈는 도서관 사서로 10억개가 넘는 단어를 색인 작업을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신발을 신지 못할 정도로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어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엄마 로즈를 한적한 산책로까지 끌고 나온 소피아는 대형 트럭만 지나가는 도로 한 가운데 엄마를 버리고 가버린다.

나는 평생 어머니 시중을 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웨이트리스였다.

어머니 시중을 들고 어머니는 기다리는....

엄마가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져버린다면 소피아는 더 이상 어느 누구의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될까?

10유로 지폐 한 장으로 부녀간의 채무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

외동딸을 부양하느라 병들어 버린 어머니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위를 갖고도 시간 당 임금을 받으며 매일 쿠키를 굽고 케익을 자르다 빚더미에 올라 앉은 딸

소피아는 직업란에 이런 단어를 적어 넣는다.

[웨이트리스]



인류학을 공부 한 우등생 주인공 소피아의 독백으로 가득 채워진 <핫 밀크>는 한 영장류의 성장 보고서이자 혼돈의 자아 정체성을 겪고 있는 고백서로 21세기 가족의 의무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작품으로 2016년 맨 부커상 파이널리스트에 올랐고 같은 해 미국 뉴욕타임스 북리뷰에서 선정한 가장 주목 받는 100권의 책에 올랐을 정도로 출간 즉시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195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난 데버라 리비는 5살 무렵 아버지가 저지른 폭력으로 감옥에 수감 되자 엄마의 손을 잡고 9살 때 영국으로 건너왔다.

영국 땅에서 두 모녀는 이민 보조금과 무료 급식비로 생계를 조달 할 정도였지만 그녀는 폭력으로 얼룩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려 전액 장학생으로 런던 다팅턴 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한다.

1989년 단편집으로 영국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데버라 리비는 단편, 장편, 라디오 극본, 연극 시나리오, 영화 각색을 넘나들며 거의 모든 작품들이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 무대에 올려지고 있고 단편과 희곡 작품들은 BBC라디오 드라마로 제작되고 있다.

 2012년에 발표한 장편 <헤엄치는 집>과 단편집<블랙 보드카> 모두 맨부커상 파이널리스트와 프랭크 오코너 국제 단편 소설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써내는 작품 마다 주요 문학상에 올라가고 있다.

이 정도의 작가 위상에 오르기 까지 데버라 리비는 항상 채무 상태에 시달리며 가족을 부양하느라 단 하루도 쉼 없이 원고를 써나갔고 첫 번째 남편과 이혼 후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자신의 희곡 작품을 들고 직접 연극 무대마다 찾아 갈 정도로 매일 눈만 뜨면 돈 걱정을 하고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돌아갈 곳도 도망칠 곳도 없었기에 그녀는 오로지 글만 써야 했고 글로만 생계를 이어나가기 힘들어서 대학에 출강 하며 창작 생활을 이어갔다.

작품이 출간 될 때마다 평단과 독자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현재 영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작가가 되지만  2011년 <헤엄치는 집>이 맨 부커상에 오르기 전까지도 새 작품 출간 할 때마다 영국측 출판사로 부터 '이번 작품은 성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미국 측 대형 출판사인 펭귄에서 그녀의 작품들을 출간 결정하고 마침내 맨부커상 후보작으로 선정되자 언제나 갑으로 군림했던 영국 측 출판사에서 허리를 굽히기 시작했다.

한 때는 영국 측 어떤 출판사도 편집자도 그녀의 원고를 읽자 마자 쓰레기 통으로 집어 던졌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새로운 작품을 써 주기 만을 고대 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채무 상태로 태어나는 여성은 집안에서부터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고 허비 되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여성의 삶의 채권자 입니까?'

                                                                         -데버라 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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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10-11 23: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살림비용을 썼던 그 데버라 리비군요.
전 에세이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소설은 또 어떨지 궁금해지네요.
스콧님 리뷰 읽으니 딱히 좋아하지는 않던 작가의 책도 읽고 싶어지는 마법? ^^

scott 2023-10-11 23:54   좋아요 3 | URL
그 책 한국에서 인쇄체에 색의 마법을 부렸죠 ㅋㅋ
영미권에선 리비의 독특한 문체와 화법을 좋아 합니다.
에세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개척자이기도 하고

소설도 잘 씁니다 ^^

새파랑 2023-10-12 10: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피아의 인생이 파란만장 하네요~ 그녀의 행동이 잘못된거 같긴 한데 그녀에게만 잘못을 물을수는 없을거 같습니다 ㅜㅜ

작가 이름은 들어봤는데 소설도 썼군요? ^^

2023-10-12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10-13 0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이 데버라 리비 삶과도 아주 상관없지 않아 보이기도 하네요 공부에 매달리고 장학생이었다니... 글도 열심히 썼군요 처음엔 잘 안 됐지만... 맨부커상 후보가 되니 영국에서 글을 써달라고 하게 됐군요


희선

2023-10-13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육교 시네마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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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도깨비 굴뚝이라는 게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도쿄 시타마치의 화력 발전소에 거대한 굴뚝 네 개가 있었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 하나로도 두 개로도 세 개로도 보였다고 한다. 없어졌다가 생겼다가 하니까 도깨비 굴뚝]

                                                       -온다 리쿠의 <육교 시네마>중에서

도쿄 시내에서 도깨비 굴뚝이 보였던 곳은 어딜까?라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 어느 방향에서 봐도 가로 세로 직선 네 개가 합쳐져 거대한 직사각형 프레임처럼 보이는 곳을 응시해본다.

여기 육교 난간에 턱을 괴고 한 곳을 꼼짝 않고 응시하는 소년이 있다.

소년은 알고 있다.

도로 위에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육교는 도시 전체를 볼 수 있는 특등석이다.

어떤 날에는 부동 자세로 육교 난간에 서 있는 중년 여성이 있다.

그녀에겐 마치 이 세상이 온통 허무함으로 가득 차 보인다.

또 다른 어떤 날

체구가 자그마한 노부부가 육교 난간에 기댄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서서히 날이 저물고 초롱불이 하나둘 밝혀진다. 어슴푸레하고 부드러운 빛이 주변에 내려 앉았다.

이렇게 아름다웠나

이렇게 고귀한 것이었나.

이렇게 덧없는 것이었나.

육교 위에서 보이는 세상이 있다.

아니, 육교 위에 올라가야 만 볼 수 있는 세상이 있다.

타고난 이야기 꾼 온다 리쿠가 7년 만에 발표한 단편집 <육교 시네마>에 총 18편의 단편들이 담겨 있다.

<소설 신초>에 '야마모토슈고로상' 특집과 '괴담 특집'에 실렸던 단편들이여서 미스터리, 호러, 공포, 서스펜스,초 자연적인 장르물 까지 그동안 온다 리쿠 표의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의 색채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각각의 단편들은 작가가 장편을 쓰기 위해 프롤로그 형식으로 가볍게 스케치한 작품까지 들어 있어서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이나 배경 중심 스토리가 또렷하게 드러 나지 않았다.

작가가 구체적인 작품 개요를 작성 하지 않은 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고 나서 쓴 작품부터 로알드 달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과자에 쓰는 나무 열매에 대한 짧막한 이야기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오마주한 다소 만화적인 발상의 작품, 장편<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스핀 오프 단편까지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넘나들었지만 어떤 단편 하나 명확한 마무리 없이 흐지 부지하게 끝이 나버린다.

나오키 상을 수상한 <꿀벌과 천둥> 작품이 출간 되자 마자 정신없이 이어진 인터뷰와 사인회를 하는 동안에 우연히 자신의 시선에 잡혔던 이들에 대한 상상의 스토리 까지 줄줄이 이어져서 나오키 상 수상 이후 작가가 앞으로 어떤 장르의 글을 써나갈지 다양한 문체와 시점을 시도한 단편 조차 기대감을 안고 읽기 시작 한 독자를 허무하게 만들었다.

[나는 공상을 좋아하고 혼자서 잘 노는 아이였다.

그리고 종종 '그것'이 일어났다.

지금도 잘 설명할 수 없는데 이따금 어디 다른 곳의 풍경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다.

시야 가득히 풍경이 나타난다.

마당에서 놀고 있어도 방에 있어도 눈앞에 펼쳐진다.

잘은 몰라도 어딘가 바다에서 가까운 곳 같았다.

멀리 커다란 배 같은 물체가 보이거나 바다가 얼핏 보인 적도 있기 때문이다.]

                                                                            -'첫 꿈' 중에서


단편 '첫 꿈'은 작가 온다 리쿠가 앞으로 쓰게 될 차기작 장편 <추억의 오중주>의 예고편처럼 쓴 작품으로 어린 시절 부터 동경했던 요코하마에 관한 꿈과 몽상가 기질이 넘쳤던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버무릴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교실에 있었다

'그'도 교실에 있었다.

'그'는 두 손을 우아하게 머리 위로 쳐 든다.

나는 교실에 앉아 '그'가 춤추는 것을 본다.

주위에서 춤추는 같은 반 학생들

너도 봤지?

'그'가 내게 그렇게 묻는다.

나는 잠자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환한 햇빛.

나와 '그'는 그해의 '봄의 제전 '속에 있다.

-<봄의 제전> 중에서

작가 온다 리쿠는 차기작 장편으로 발레극인 <봄의 제전>에 관한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 후기에 밝혔다.

유명 안무가들이 안무한 <봄의 제전>을 전부 감상한 온다 리쿠는 군무를 솔로 형식의 안무로 설정하고 작품 배경을 학교 교실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스케치처럼 쓴 작품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스토리 없이 어느 고등학교에서 발레를 하는 한 남자 아이를 지켜보는 화자가 등장 할 뿐이다.


7년 만에 발표하는 단편집에 18편의 단편들이 들어 있다 해서 큰 기대감을 갖고 읽었지만 단편들 모두 앞으로 쓸 예정인 작품들의 개요만 살짝 보여 주듯 마무리해서 어떤 작품도 인상 깊지 않았다.

단편집을 펼치자 마자 시작 되는 이야기 <철길 옆 집>도 화면 전경에 보이는 철길을 바라 보던 화자가 호퍼의 그림을 떠올리다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를 언급하며 자신의 집 앞 철길을 지나가는 낯선 이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철길 옆집에 무단 점유 하며 신문을 읽는 남자가 등장 하더니 돌연 사라진다.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쓴다.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을까?

또 다른 단편인 <악보를 파는 남자>의 배경은 어느 콘서트 홀로 나흘 동안 개최되는 현악기 이벤트를 취재 차 온 잡지 기자가 등장한다.

그녀가 목격한 한 남자가 형형색색의 악보를 팔고 있다.

나흘 동안 잡지 기자는 이 악보 파는 남자를 관찰하며 망상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서술한다.

[ 그 망상이란 이런 것이다.

그는 음악을 팔고 있다.

눈앞에 멋진 곳이 나열되어 있다. 그는 머릿속에 모든 곡이 들어 있어 악보를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다.

그는 머릿속에 자신이 파는 악보의 곡이 빼곡이 들어 있어 언제든지 연주 할 수 있다.

어디서부터나 재생이 가능하다.

셔플 연주도 가능하고 일부 구간을 반복할 수도 있다.]

                                                                  -온다리쿠의 악보를 파는 남자 중에서

이쯤 되면 대단한 스케일은 아니여도 <악보를 파는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 해야 한다.


<악보를 파는 남자>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새하얀 로비의 커다란 창유리 안쪽이라 처음에는 역광 탓에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첫 문장을 읽은 독자들도 문장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남자의 얼굴이 궁금해진다.

작품 속 화자는 스마트 폰을 보고 콘서트가 열리는 홀을 기웃 거리며 악보를 파는 남자 주변인들과 대화 하며 그 남자를 응시하고 있다.

페이지가 넘어가도 그 남자는 악보를 팔고 있다.

이 작품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악보를 파는 남자.

이 순간, 그건 정말로 내 망상 속에만 존재하는 명예 전시가 되고 말았다.'

                                                                     -<악보를 파는 남자> 중에서

그렇다. 이렇게 7년 만에 나온 온다 리쿠의 단편집은 작가가 앞으로 발표할 작품의 맛보기만 살짝 보여 줄 뿐 그동안 나오키 상 수상 이후 떠밀려 들어온 원고 뭉치에 파묻혔던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의 명예스럽지 않은 전시작 물만 모여 있다.


또 다른 단편에는 고등학교 무용반을 배경으로 군무가 특징인 발레 <봄의 제전>을 독무인 솔로로 추고 있는 남학생이 등장한다.

현재 습작 중으로 이 단편 역시 습작처럼 썼다고 후기에 밝혔다.


마지막 이 단편집의 제목인 <육교 시네마>는 작가가 후기에서 이야기 하는 작품의 배경과 집필 이유와는 전혀 다르다.

작가는 고령화가 심각한 일본에서 전국의 인프라가 모두 낡아버려서 어디를 가도 부식이 심한 육교가 흉물이 된 곳이 많다며 도시의 폭력처럼 서 있는 육교에 대한 글을 썼다고 자부 하며 가장 나 다운 단편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후기를 읽고 두 번 세 번을 읽어도 이 작품의 전체 스토리는 모호하다.

여기 수록된 작품들 중에 작가가 후기에 밝힌 데로 앞으로 발표 될 장편들은


오래전 부터 구상 중인 신작 스핀 오프들이라며 아직 집필 중이니 언제 발표 될지 모른다고 언급 했다.


그리고 나.

나도 찾아왔다.

이곳에.

이 육교에

이 거대한 우연의 스크린을 보러...

정말 여기 맞을까.

나는 우뚝 서서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1964년생 온다 리쿠는 1991년 일본 판타지 노벨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하고 이후 2016년까지 일본의 거의 모든 문학상을 휩쓸었다.

이후 발표 된 작품부터 공기가 팽팽하게 들어간 풍선 같은 탄탄한 서사 구조가 서서히 빠져 나가서 이전의 시도 했던 작가의 주 특기인 다양한 시점을 바꿔 가며 회색빛과 하늘 빛의 두 개의 세상을 자유자재로 오고 갔던 화려한 필력이 느슨 해져 버렸다.

이렇게 장편으로 이어지는 맛보기용 프롤로그 같은 단편집을 출간 하고 난 후 2023년 5월에 발표한 <둔색 황시행鈍色幻視行>은 단편 육교 시네마에서 더 크고 화려하게 확장 되어 배를 타고 세상을 질주 하는 이야기로 발전 시켰다.

작가 온다 리쿠는 항상 꿈을 꿀 때 마다 다음 날 눈을 뜨면 꿈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종이 위에 떠오르는데로 휘갈긴다고 한다.

이렇게 쌓여가는 작가의 꿈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야기의 실타래를 타고 작가의 글밥으로 탄생한다.

작가는 그동안 발표한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했던 이들을 추려 내어 다른 이야기로 확장 시켜 나갔다.

그러니 여기 수록 된 작품들은 작가가 앞으로 발표 할 장편의 프롤로그 같은 단편 모음집이여서 대단하게 인상 깊은 작품들은 없고 아쉬움만 한 가득이다.

'우리'가 함께 꾼 '첫 꿈'

맨 처음 꾼 꿈은

어둠 속에 흔들리는 불길, 하늘 높이 치솟은 불길 속에 우두커니 선 두 남녀,

불타는 두 사람

그게 '우리'의 FIRST DREAM'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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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9-03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 실린 소설을 장편으로 다 쓸지... 하나는 썼군요 쓰고 있는 것도 있고... 앞으로 쓸 게 많네요 기다리면 장편으로 나오겠습니다


희선

2023-09-03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1~2 세트 - 전2권
오에 겐자부로 지음, 김현경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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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넘어 화성을 방문하는 시대를 사는 인류가 가진 초음속 시간 감각으로 보자면 아득히 먼 옛날이라 할 시절, 미국에서 불어온 유행에 편승해 핵셸터를 규격 생산하여 판매하려던 일본인 업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핵셸터가 무사시노 대지 서쪽 끝자락에 들어섰다. 주택이 모여 있는 언덕에서부터 시작해, 갈대와 참억새를 비롯해 돼지풀, 양미역취가 우거진 습지대로 이어지는 80도 급사면에, 즉 가파른 벼랑 아래 자락을 파헤친 곳에 철근 콘크리트로 된 3미터 X6미터 지하 벙커가 설치된 것이다.]


철근 콘크리트로 된 3미터 X6미터 지하벙커, 일명 민간용 대피 시설인 핵셸터가 기업화하는데 실패하고 그대로 방치 된지 5년의 시간이 흘러 건물의 전체적인 폭이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종 모양의 3층 짜리 건물이 올려졌다.

기묘한 외관의 핵셸터의 1층은 거실 겸 식당이 있고 잠수함 승강구 모양의 덮개를 올리면 지하벙커로 이어지는 철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 갈 수 있다.

건물 내부에 물이 스며들 때면 구덩이를 파서 밭을 갈 수 있게 만들어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미래에 닥쳐올 재앙에 대비해서 이 건물을 설계하고 완공한 이는 한 때는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한 정치가의 사위로 장인의 비서로 활동하다 장인 소유의 건축회사에서 건설 중이였던 핵셸터 생산 판매 보급 기획을 담당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 모든 사업 기획을 전부 포기하고 돌연 아들을 데리고 핵셸터에서 은둔 생활에 들어가 고래와 나무와 교감 하는 대리인의 역할을 자처하고 이름까지 바꿔버린다.

오키 이사나 (大木勇魚)


그의 하루 일과는 명상을 통해 고래의 다양한 생태 사진을 보며 녹음 된 고래 소리를 듣고 이들과 영적인 교감을 나누며 핵셸터 안에 장착된 프리즘 쌍안경으로 건물 밖 너머에 있는 나무들을 관찰한다.

이렇게 고래와 나무에 깃들어 있는 혼령들과 교감 하는 오키 이사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생육의 진화 과정을 겪고 있는 나무들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화 하며 의사들에게 백치라는 진단을 받은 5살짜리 아들과 셸터에서 외부의 시선과 간섭이 차단된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5살 아들 진은 아버지가 녹음해온 여러 들새소리들을 듣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진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말을 시작했고 새의 이름을 정확하게 맞추는 영적인 아이다.

진은 아버지 이사나가 들려주는 50여 종의 새의 소리를 듣는 동안 얼굴에 온화한 기쁨이 흘러넘친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눈송이가 공중에서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순간 하늘 위를 날아다니던 새들이 바닥으로 추락하자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은 이사나는 출력한 사진에 또렷하게 보이는 녹황색 덩어리 같은 물체를 발견한다.

땅 위로 추락한 새들의 시체를 찾아 나선 이사나는 소그룹으로 흩어져서 훈련 중인 자위대원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다시 핵셸터로 돌아가던 중 허물처럼 껍질이 흘러내리는 떡갈 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새 한 마리를 발견한다.

아버지가 떡갈 나무 위에서 울고 있는 새의 소리를 녹음한 걸 듣자 마자 아들 진은 이렇게 말한다.


'쿠르쿠르, 보,보,보,...'

'염주비둘기입니다.'


그날 밤 이사나는 꿈 속에서 거세게 부풀러 오른 바다가 지표 위를 덮쳐서 핵셸터가 세워진 인근까지 흘러 들어온 광경을 보게 된다.

꿈에서 깨어난 아사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바다 속을 유영하던 고래 떼들이 자신과 아들 진이 은둔한 곳인 핵셸터를 찾아 온 것일까?

몇 일 후 이사나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식에 놀란다.

그는 떡갈나무 위에서 울던 새 한 마리를 목격했던 그날, 훈련 중이였던 자위 대원들이 불량소년들에게 습격을 받아 이들 중에 중상을 입은 자들이 있었다는 소식을 뉴스를 듣던 중 혹시라도 경찰들이 인근 건물들 모조리 탐방 심문을 하러 찾아 오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는 지적장애아인 아들 진을 지키기 위해서 라면 어떤 적이라도 물리치기 위해 철저한 준비와 대비책을 세워두었지만 자위 대원들에게 중상을 입은 자들 중에서 혹시라도 핵셸터로 숨어들어 오지 않을까라며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이사나는 프리즘 쌍안경으로 외부의 동태를 관찰하던 중 셸터에서 보이는 고지대 위에 한 무리의 작은 물고기 떼처럼 보이는 것들이 쌍안경에 잡혔다.

그리고 뒤이어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찰에게 긴급 체포되어 수갑을 찬 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아이들의 울음 소리일까 ...아니면 지난 밤 꿈 속에 나왔던 고래들의 신호일까...

어떤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 오더라도 이사나는 아들 진을 꼭 끌어안고 아이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봄의 기운이 솟아나던 날 아이에게 핵폭발이 일어나기 전의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드디어 핵셸터 밖을 나간다.

.....셀터로 돌아올 때까지 밀폐된 콘크리크 상자 속 참사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경지에 이르도록 이사나의 강박 관념은 고조 된다.

이사나는 견고하게 만든 현관문 열쇠 구멍 틈에서 흘러나오는 새소리를 듣고 있다.

'쏙독새 입니다. 이것도 쏙독새 입니다.'


셸터 안으로 들어간 이사나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찾아 간다.

검정개똥지빠귀 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들어간 이사나.


'산솔새 입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들 진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서른 다섯 살의 이사나는 밤 마다 꿈 속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아들 진의 곁을 죽은 유령처럼 맴돌고 있다.

그는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지적장애아인 아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 때 세상을 호령 했던 정치가 장인과 지적장애아를 낳은 아내는 아들진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아버지 이사나는 촉각, 시각, 후각이 뛰어난 아들 진이 인간 사회에서 살 수 없다면 고래와 나무들과 교감 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 갈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사나는 날마다 은신 하고 있는 핵셸터에서 혼심의 힘으로 나무의 혼과 고래의 혼을 향해 애원하고 있다.

이들 부자의 삶에 어떤 파고가 밀려 들어오고 있을까?

압수 수색 영장을 들고 온 경찰들, 아이의 건강상태를 걱정하는 병원관계자들, 권력자인 장인과 아내...아니면 바다 속을 유영하고 있는 고래떼 일까....

기존의 사회 질서를 뒤집어버리고 싶은 자유 항해단의 다마키치와 다카키 무리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핵셸터 건물로 잠입하고 서른 다섯 살 생일을 기점으로 온 몸의 근육이 위축되어 오그라 들어버린 '보이'라는 남자와 세상의 남자들에게 성적 학대와 착취를 당했던 '이나코'까지 이들 무리에 합류한다.

이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미숙아들로 어른들이 세운 사회를 모조리 부숴버릴 계획을 세웠다.


[우리 멤버들은 하나같이 집단 취직해 도쿄에 나온 놈들이야.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같은 건 서로 말하지 않지만 어쨌든 난 숲이 많은 지방에서 태어났어.우리 지방엔 고래나무가 있었지. 당신이 태어난 곳에는 고래나무가 없었어?]


이 세상에서 고래나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줄 사람은 단 두 명 뿐이다.

이사나와 그의 아들 진

그리고 자신이 고래나무에게 혼을 빼앗겨버렸다고 주장하는 소년 다카키

이들 모두 인간과 고래를 포함해 지구 상의 대륙과 해양의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사멸 해버리고 나무들까지 말라 비틀어진 이후의 세상을 걱정하고 있다.

지구의 왕은 인간이 아닌 나무와 고래라 굳게 믿는 이들은 다음 세대들이 도착 할 때까지 살아 남기 위해 셸터에 은신하며 세상이 파괴 시키는 적과 맞서기 위해 무기를 준비하고 새 세상을 선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대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그날을 대비해서 바다에 배를 띄워 대피할 계획을 세우는 도중에 군인과 경찰의 총기까지 탈취하며 자위대원들을 추적하는 추적대까지 조직하고 외부를 향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라디오를 통해 외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들", 상처 받고 버림 받은 청년들의 망상이 핵재앙으로 잿더미가 될 지구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아 자연과 교감하며 스스로를 구원 받게 될까?


[진은 깨어 있었다. 이불 한가운데 똑바로 누워서 눈부셔하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많은 발진이 속눈썹이 난 눈꺼풀 가장자리까지 돋아 있었고, 잘 생긴 귀 안쪽도 덮고 있었다. 잠옷 대신 입고 있는 이나코의 속옷 밖으로 힘없이 삐져나온 팔다리는 발진이 수북했다. 그런데도 긁어서 터진 상처 하나 없이, 발진이 깨끗하게 돋아 있었다.]


어린 진은 자신의 몸 곳곳에 수포가 나오고 발진이 돋아 나고 있음에도 아이는 붕대를 감은 손으로 긁지 않고 꾹 참고 있다.

세상 밖은 자위대원들의 자살 사건 그리고 총기 탈취 사건과 연관된 좌익 폭력 과격파들과 선전포고를 한다.

다카키와 다마키치가 이끄는 자유항해단 대원들은 곳곳에 폭발물을 설치 하며 고래와 나무의 혼령들을 향해 지구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곧 자신들을 태우고 먼 바다를 항해 할 한 척의 배가 도착하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들의 병세가 악화되자 아버지 이사나는 용기를 내어 셸터 밖으로 나와 필요한 식료품을 사러 가던 날 도시 전체는 마치 한 여름의 폭염처럼 달아 올랐다.

이사나는 거리와 도로 마다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곧 핵전쟁이 터지기 전을 대비해 사람들이 전부 피난을 갔다고 생각한다.

[나는 핵셸터에 아들과 틀어박혀 이 세상에서 인간에 의해 멸망 당하게 된 좋은 것들의 대리인으로서 최후의 날을 맞으려고 했어.

나무와 고래의 대리인으로서, 인류가 멸망하는 최후의 광경을 볼 계획이었어. 나 자신도 아들도 함께 멸망하겠지만, 그런 건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았지.]


고래와 나무의 혼령의 대리인을 자처 했던 이사나는 대 붕괴로 하늘 위로 치솟는 불기운을 향해 '오라'라고 우레 같은 소리를 지르기 위해 마지막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마지막 날에 나는 지구상의 모든 고래와 나무에게 너희를 멸망 시키려고 했던 인류가 지금 스러진다. 이 사실을 난 너희의 대리인으로서 환영해.'


드디어 핵셸터를 공격하려는 외부의 적들과 싸움이 시작되었다.

폭발 소리가 들리자 이사나는 어둠 속에서 아들 진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진, 총소리야, 빵! '

온 몸에 퍼진 수두로 고통 받는 아들 진을 무사히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이사나의 아내는 구급차를 타고 핵셸터 건물 밖에 도착했다.

경찰 특공대원들은 10대 소년 대원들과 함께 핵셸터 건물에 은신 중인 이사나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건물 안에 있는 여러분 인질을 석방하고 바로 나오세요.'


구급차와 경찰 대원들이 탑승한 차들이 핵셸터 밖을 에워싸고 있다.

이사나는 아들 진을 무사히 건물 밖으로 내보내고 구급차에 올라탄 걸 쌍안경으로 확인하며 나무와 고래의 혼령들을 향해 중얼거리고 있다.


'진 엄마는 나를 필요로 할 일 없이 ,장인이 후두암으로 죽은 뒤 그의 기반을 물려받아 국회의원이 되고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인 꿈을 좇아 계속 달려가겠지'


그의 영혼의 덩어리가 몸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어떻게 든 정해진 규칙대로 무너져버리는 세상 속에서 그도 언젠가 죽게 될 것이다.

자유대원의 리더 중 한 명인 다마키치카 기동대원을 향해 총을 쐈다.

하늘 위로 적동색 최루탄가루가 쏟아지면서 가스탄과 발연통이 폭발하듯 시커멓게 쏟아졌다.

이사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나무의 혼, 고래의 혼에게 보낼 마지막 메시지를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나무와 고래의 대리인을 자청해왔지만, 나는 피할 길 없는 인간, 즉 나무를 베고 고래를 도살하는 자들 중 하나야 나는 언젠가 쇠약해져서 쓰러져 죽을 것이고 이렇게 어중간한 채로 어떻게든 넓고 자유로운 곳으로 너희들은 살아 남아야 해.]

살수차가 뿌린 물 폭탄에 서서히 건물 전체가 물 속으로 잠식되고 있다.

머리 위에서 폭발음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진짜 핵폭발이 일어나서 해일과 대 홍수가 시작 된 것일까?

물이 이사나의 무릎 까지 차올랐다.

그동안 이사나는 아들 진의 미래를 위해 고래와 나무의 혼령들과 교감 해 오는 동안 그들에게 어떤 대답이나 신호를 받지 못했다.

과연 이사나의 외침을 들은 고래떼들이 핵셸터 몰려 오고 있을까?

[나는 나무와 고래에 대한 인류의 흉포함을 고발하기를 소망해왔다. 그런 자로서 가장 인간 답게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던 흉포함을 드러내고 오랫동안 가져온 생각의 옳음을 증명해야만 한다. 흉포하게 저항하는 동안 마지막 인류인 내 육체=의식이 어중간한 채 폭발하고 그리고 '무'다. 그때야말로 고래여, 너희는, 나무여, 다름 아닌 너희를 향해 다 잘 되었다라는 대 합창을 보낼 것이다. 모든 잎사귀는 몸을 떨며 이어서 노래할 것이다. 다 잘되었다.]

드디어 핵셸터 상부 덮개 문이 열리자 고래 피부처럼 검푸른 빛이 번뜩이며 나타났다.

이사나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가스탄에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섯 발이 장전 된 그의 총에서 세 발이 발사되었다.

강한 물살이 그를 덮쳤다.

네 번째 총알이 발사 되었다.

마지막 다섯 발...

마침내 고래떼들이 그를 찾아 왔을까...


1973년에 발표한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라는 작품은 37살의 오에 겐자부로가 1972년에 발생했던 아사마 산장 연합적군 농성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세상의 종말을 예감한 이들이 끝까지 희망을 포기 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한 작품이다.

지적 장애 아들 때문에 세상과 은둔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이사나가 대 지진으로 도쿄가 붕괴되리라 전망하는 반 사회적 청년무리들인 ‘자유항해단’의 탈주 계획에 동참하면서 ‘무장 투쟁’까지 나서게 되는 모습을 통해 지적 장애 아들 진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당위와 망상적 양태를 홍수, 고래 등 종교와 신화적 상징을 통해 묵시론적인 세상을 펼쳐 보인다.

이 작품은 이미 반 세기 전에 쓰여졌지만 21세기 현재 이 지구 곳곳에는 거대한 권력과 이권 이념의 피라미드로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빈곤층,청년층의 문제, 핵전쟁 위기, 핵오염의 위험에 노출된 현재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을 예견한 작품이다.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에서 지구 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들"의 망상에서 출발한 여정이 자연과 공생 공존 하지 않은 이상 우리 모두 거대한 물살에 휘말려 들어가버린다는 암울한 현실을 묵직한 문학적 언어로 표출했다.

핵과학자들(미국 핵과학자회보·BSA)이 인류 멸망까지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만든 '운명의 날' 시계는, 2023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자정 90초 전'으로 3년 만에 운명의 시간이 10초 앞당겨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핵 확산 위험 증가와 기후 이상으로 전 지구의 식량난은 더 심해지고 있고 전염병은 나날이 더 강력한 전파력으로 확산되고 있다.

인간의 자연의 시계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도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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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7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7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7 1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7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8-08 2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무와 고래는 땅과 바다에서 중요한 거네요 나무는 아주 많이 베고 고래는 그동안 많이 잡아서 얼마 남지 않고... 사람은 자연을 정복했다고도 하는데 그런 말 좋은 건 아니네요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 북극이나 남극 얼음 빙하가 사라지면 바다도 높아지고 안 좋아지겠습니다 지구 대멸종이 찾아올지도... 무섭네요


희선

scott 2023-08-09 10:32   좋아요 1 | URL
이 작품이 73년에 썼는데 마치 지금 현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한 것처럼 소설 속만의 세상이 아니였습니다
고래가 살지 못하는 바다
새가 사라진 숲의 나무
지구의 마지막 카운트가 임박해온것 같네요
서울 8월 평균 온도가 37도이고
새벽에도 3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앞으로 평균 온도 40을 넘어 갈 수 있다는 거겠죠
 
불안의 변이 - 리디아 데이비스 작품집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강경이 옮김 / 봄날의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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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은 이제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그녀는 나보다 작아서 152센티쯤 되는 키에 체격이 다부지기 때문에, 그는 물론 예전보다 더 키가 크고 더 가늘어 보이고, 머리는 더 작아 보인다. 그녀 옆에 있으면 나는 앙상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고 적절한 각도로 서거나 앉아서 눈을 맞추려 해봐도 그러기에는 그녀가 너무 작다. 한 때 나는 그가 다시 결혼한다면 어떤 여자와 할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여자 친구들은 다들 내 생각과 달랐고 그중 이 여자가 가장 다르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양말> 중에서

한 때 자신의 남편이였던 남자가 재혼한 아내를 데리고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만나러 찾아 왔다.

두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헤어졌지만 아들과 자주 만나기 위해 서로 가까운 곳에 살며  왕래 하고 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이기에 그녀는 아들을 만나러 온 전 남편과 그의 새로운 아내를 위해 애써 불편한 감정을 감춘 채 서로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초대 받은 그녀의 친구들과 뒤섞여 함께 어울렸던 전 남편과 그의 새 아내는 집안의 모든 물건들을 거리낌 없이 집어 쓰는 동안 자신들의 물건들, 그다지 소중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집안 어딘가에 버렸거나 놓고 떠나 버렸다.

그녀는 오로지 아들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참고 있다.


[그날 밤 나는 그들의 숙소가 있는 시내로 가면서, 그들이 내 집에 남겼고 그때까지 내가 발견한 물건들을 챙겼다. 옷장 문 옆에 남겨진 책 한 권과 다른 어딘가에 있던 그의 양말 한 짝 그들이 머무는 건물 근처에 갔을 때 남편이 밖으로 나와 내게 차를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양말 중에서


그녀는 전 남편이 자신의 집에 두고 간 책은 여전히 왕래 하고 지내는 시 어머니의 집에 갖다 놓고 벗어 버리고 간 양말 한 짝은 길에서 만난 전 남편에게 건넨다.

전 남편은 헤어진 아내가 찾아 준 양말 한 짝을 무심히 바지 뒷 주머니에 넣고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이 양말을 왜 당신의 집에 흘리고 왔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전 남편의 뒷 주머니에 꽂혀 있던 그 양말 한 짝을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양말 한 짝이 도시 동부 베트남 거리의 안마 시술소들 옆, 이 멀고 낯선 동네에 그의 뒷 주머니에 꽂혀 있었으며, 우리 중 누구도 이 도시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곳에 함께 있었고 나는 여전히 내가 그의 배우자인듯 느껴져서 그 상황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양말' 중에서


전 남편이 흘린 양말 한 짝에 기억을 떨쳐 내지 못하는 여자와 자신의 양말을 전 부인 집에 흘렸다는 사실 조차 인지 하지 못하는 남자.

이 두 사람은 20세기 중반 미국의 문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로 뉴욕의 3부작을 시작으로 미국 20세기 현대 문학계의 거장이 된 폴 오스터와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그리고 번역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리디아 데이비스다.


[우리는 오랫 동안 서로의 배우자였고 나는 여기저기서 우리가 함께 한 삶 내내 내가 치웠던, 땀이 차고 발바닥이 닳은 그의 모든 다른 양말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다가 그 양말 속에 있었던 그의 발에 대해, 발볼과 뒤꿈치의 닳아버린 올 사이로 살이 비치던 모습에 대해 생각했다.]

                                                                                                      -양말 중에서


리디아 데이비스가 폴 오스터를 처음 만났던 시절은 그녀가 뉴욕 버나드 칼리지에 입학 했던 첫 해로  콜럼비아 대학과 버나드 칼리지, 두 대학끼리 자유로운 학점 교환 프로그램으로 개설 된 강의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는 미소 지을 때조차 늘 눈을 크게 떴고, 몸은 가만히 있지만 눈만 움직이며, 모든 것을 관찰했고,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대화가 일종의 싸움인 양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을 방어할 태세가 돼 있었다.]

                                                                                                             -'교수'중에서


리디아는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산만하고 부산스럽고 불안정했던 성격으로  가만히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지 않고  밖으로 뛰어다니며 온갖 사회문제에 대해 항의하고 시위하는 무리들 중에 끼어 있거나 남학생들과 풋볼을 하거나 터치볼을 했다.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한 눈에 반해 버린 폴 오스터는 말 수가 적고 책 읽기를 좋아 했던 청년으로 뉴저지 공립학교를 졸업 했기에 막상 콜럼비아 대학에 들어 왔을 때 WAPS부류들과 잘 뒤섞이지 못했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아버지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현대 영문학을 가르쳤던 교수로 젊은 시절, 좌파 운동으로 미국 학계를 뒤흔들며 붉은 당원으로도 활동했었다.

그는 교수가 된 이후에 좌익 성향의 학자들, 이민자 지식인들의 울타리 역할을 했는데 이들 중에 에드워드 사이드, 에리카 종, 그레이스 페일리등이 있었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엄마는 현대 영문학을 공부한 소설가로 주요 문예지에 단편 소설을 발표 했던 중견 문학가로 활동하며 여성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열성 페미니스트였다.

리디아는 자신의 부모를 무척 자랑스러워 했고 그녀의 부모는 딸에게 항상' 네가 추구 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시대의 흐름과 달리 하더라도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워라.'라고 말했다.

어떤 무리들 속에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았던 리디아는 1960년대 남자 아이들만 했던 풋볼이나 야구, 터치 볼 게임에도 과감하게 뛰어들어 함께 뛰어 다녔다.

운동 실력도 뛰어나고 공부도 잘했던 리디아는 주변 또래들의 우상으로 그녀가 카프카를 읽으면 친구들도 카프카를 읽었고 베게트의 희곡집을 읽으면 친구들도 베게트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리디아를 숭배하는 이들 중 한 명이였던 폴 오스터는 1973년 그녀를 따라 말라르메 시집 단 한 권만 손에 든 채 파리 행 배에 올라 탄다.

두 청춘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하자 마자 닥치는 데로 일을 하고 번역을 하고 글을 쓴다.

폴 오스터는 뱃사람들에게 고용 되어 새벽 시간 짐꾼으로 살고 오후 한 나절은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날랐고 밤에는 시를 썼다.

리디아는 각종 전자 제품, 식료품 , 화장품 카탈로그를 영어로 번역 하는 일을 했고 전화 교환수로 일하는 동안 틈틈이 시를 썼다.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약 7달러로 버텨도 행복했다.


[저녁으로 우리는 소시지 한 개를 먹었다. 우리에게 남은 돈이라고는 집 곳곳 쟁반에 있던 동전을 모아 거실 탁자 위에 쌓아둔 게 전부였다.]

                                                                                                             -생 마르탱


그 시절 두 청춘의 힘겨운 삶을 지켜 봤던 지인들이 '왜 이러고 사냐'고 묻자.

리디아는 '이렇게 살아도 집으로 돌아가면 부유한 부모님이 있거든.'이라고 당돌하게 대답했다.

이 말은 사실이였다.

무엇을 해도 큰 돈을 단 한번도 쥐어 보지 못했던 폴 오스터는 몸 쓰는 노동에 영 재주가 없어서 밤낮을 지새우며 써낸 시들 모두 미국 주요 문예 편집자들에게 거절 당하고 번역한 글 조차 제대로 실리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가 보내 준 돈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출판사를 차리지만 고작 팔려나간 시집은 딱 10권 뿐이였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매번 좌절하는 폴 오스터에게 리디아는 이거 읽어봐, 이거 번역해봐.

이 문장 시적이지 않아 라며 이런 저런 책들을 권하며 그에게 창작의 힘을 불어 넣어 준다.

두 사람은 프랑스에 머무는 3년 동안 유명 해외리조트로 장기간 휴가를 떠난 이들의 집을 지켜주고 청소해주는 관리인 알바로 버티며 여기 저기 떠돌아 살다가  부모가 보내준 항공권으로 무사히 미국 땅으로 돌아 온다.

두 사람은 미국으로 돌아 오자 마자 결혼식을 올렸고 리디아는 아이를 갖는다.

아버지는 딸의 행복을 위해 리버사이드에 좋은 아파트를 사주고 20대의 끝자락에 선 두 사람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남편이 어린 시절 좋아하던 음식은 콘비프였다. 이 사실을 나는 어제 친구들이 놀라 와서 음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알았다.]

                                                                                               -고기, 내 남편


언제나 활동적이였던 리디아는 아이가 태어난 후 남편을 위해 자신의 거의 모든 시간을 주방에 쏟아 부어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를 해주며 로스트비프 샌드위치, 스테이크, 양파와 피망 꼬치구이를 들고 아이와 함께 야외로 나가 함께 먹고 함께 뛰어 논다.

분명 그때까지 폴 오스터는 아내 리디아가 만들어 준 모든 음식에 열광하며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아니 아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들 다니엘이 걸음마를 하기 시작 했을 때 부터 그는  한 번 집 밖을 나가면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 여자가 여러 해 전 이미 죽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그의 외투를 솔질 하고, 그의 잉크 병을 닦고, 그의 상아 빗을 쓰다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무덤 위에 자신의 집을 짓고 밤이면 밤마다 눅눅한 지하실에서 그의 곁을 지켜야 했다.]

                                                                                                         -사랑

결국 폴과 리디아는 아들이 18개월일 때 헤어지지만 아들을 위해 리디아는 남편이 살고 있는 집 바로 길 건너으로 이사를 온다.

폴은 1981년 시 낭송회에서 만나 단 10분 만에 홀딱 반해 버린 콜럼비아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였던 시리 허스트베트와 사랑에 빠지고 곧장 법원에 이혼 소송을 신청한다.

이혼 소송 중에 약혼식을 올린 폴은 아홉살 어린 약혼자와 함께 20대 불같은 청춘을 보내며 피와 땀, 눈물로 지새웠던 파리로 신혼 여행을 떠난다.

그의 약혼자 시리 허스트베트는 파리 최고급 호텔에 머물던 중 갑작스런 편두통으로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나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지난 여름 그들은 그의 아들이자 내 아들이기도 한, 내 아들을 보러 몇 주간 이곳에 왔다. 몇 몇 껄끄러운 시간도 조금 불편하기는 했다. 두 사람은 내게 많은 편의를 기대하는 듯했는데, 아마 그녀가 몸이 아픈 탓인 듯했다. 그녀는 아파했고 침울했으며, 눈 밑이 쾡했다.]

                                                                                                                   -양말


재혼 후 폴 오스터는 뉴욕의 삼부작을 시작으로 뒤이어 출간 된 모든 책들이 호평을 받으며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항상 어딘가 아팠던 그의 아내 시리는 콜럼비아 대학원 박사 논문을 통과 하며 교수 임용직을 제의 받는다.


[해변에서 집까지 천천히 걸어와서 샤워를 했고 저녁이 되면 깔끔하게 차려 입고 내 아들의 손을 양 쪽에서 하나씩 잡고 데리고 나가곤 했다.]

                                                                                                                    -양말

아들이 18개월 때 집을 떠나버린 아버지 폴은 가끔씩 휴일 날이면 새 아내와 함께 찾아와 아들을 이런 저런 곳에 데리고 다녔다.

철이든 아들 다니엘은 조금씩 이런식으로 자신에게 아버지 행세를 하려는 태도를 싫어했고 항상  두 부자 사이에 끼여 드는 새 엄마를 증오했다. 


십대 아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동네 무시 무시한 부랑아들과 어울리다 마약 밀수를 하는 범죄 집단에 소속되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이와 단짝이 되어 술과 마약에 찌들린채 수시로 새 엄마를 협박했다.

아버지 폴은 이런 아들을 사악한 악마로 자신의 소설(오라클 나이트)에 묘사 할 뿐 아들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새 아내와 새로 낳은 딸만 걱정했다.

추상 화가랑 재혼한 리디아는 뉴욕 인근에 오래전 학교 건물로 쓰였던 곳을 개조해서 각자의 작업실로 꾸며 놓고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두번 째 남편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리디아는 첫째 아들에게도 그렇게 했듯이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당신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떤 것에 우선 순위가 있다고 말하고 그냥 그것을 하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하나만이 아니고, 둘이나 셋만도 아니다. 여러 일에 우선 순위가 있을 때 그중 어느 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까?]

                                                                                              -우선 순위


리디아 데이비스의 삶의 우선 순위는 무엇이였을까?

20대 청춘 시절에 만나 불 같은 사랑을 했던 폴 오스터였을까?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핏줄인 아들 다니엘이였을까?

두 번째로 찾아 온 남편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낳은 또 한 명의 핏줄이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이였을까?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러다 아기가 잠들면 아기가 잘 때만 할 수 있는 일을 가장 중요한 것부터 시작해서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순위


리디아 데이비스는 남편과 헤어진 후 필사적으로 번역에 매달렸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두 아들을 양육하는데 자신의 모든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이 와중에도 이따끔씩 찾아 오는 바로 길 건너에 살고 있는 전 남편 부부의 저녁식사나 기타 등등의 편의까지 챙겼음에도 두 부부는 매번 새 책을 낼 때 마다 길 건너 자신들의 삶을 예의 주시 하고 있는 무서운 십대 아들 다니엘을 등장 시켰다.


[그들이 떠난 뒤, 두고 간 다른 몇 가지 물건들, 아니 정확히 말해 그의 아내가 내 재킷 주머니에 놓고 간 물건들-빨간 빗, 빨간 립스틱, 약병-을 발견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이 세 물건은 하나의 작은 무리를 이루어 부엌 진열대 여기저기에 둘러앉아 있었고, 나는 약은 중요한 것일 수도 있으니 그녀에게 보내려고 생각했지만 계속 잊어버리다가 결국 머지 않아 그들이 올 테니 다음에 올 때 주려고 서랍 속으로 치워버렸으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다시 온통 지쳐버렸다]

                                                                                                              -양말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할 당 된 24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리디아 데이비스는 거창하고 거대한 서사 구조를 갖춘 글을 쓰는데 집중 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로지 생계를 위해 번역에 매달렸고 자잘하게 남은 여분의 시간 동안에야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쓰기 시작 한 글은 두 세 문장으로 끝나기도 하는데 첫 제목 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새뮤얼 존슨은 분개한다:

스코틀랜드에 나무가 그토록 적다는 것에.


이렇게 한 문장을 쓰고 남은 다른 시간에 그녀는 <새해 결심>을 한다.


-마침내 인생의 중반 쯤에 이르면, 당신은 모든 것이 결국 무라는 걸, 성공도 결국 무라는 걸 알 만큼 똑똑해진다.


1947년 생인 리디아 데이비스는 인생의 중반을 훌쩍 넘겨 버린 후 이렇게 자잘하게 남은 여분의 시간 동안 쓴 글이 400여편에 달해서 이를 분류하고 편집한 글들이 2013년 영국 맨부커상을 수상한다.

그녀의 스타카토 같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글쓰기 기법은 이전에 어느 누구도 시도 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글을 두고 단어와 단어 사이의 리듬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언어의 마술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 년 동안 다양한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 했던 리디아는 번역 중인 작가의 이력을 자신의 언어로 재 창작을 하거나 때로는 그를 자신의 앞, 문장 속에 초대해서 인터뷰도 하고 저녁 식사도 차려 준다.

이들 중에 신경 증세에 시달렸던 반 세기 전 세상을 떠난 작가 카프카가 줄창 편지에서만 사랑한다는 말을 했던 편지 연인 밀레나를 위해 요리를 한다.

[사랑하는 밀레나가 올 날이 다가오자 절망이 나를 가득 채운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대접할지 정하는 걸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생각에 아직 달려들지 못한 채 파리가 등불 주위를 빙빙 돌듯, 주위를 날아다니며 내 머리만 태우고 있다.]

                                                                                              -카프카 저녁을 요리하다 


이 요리를 차려 주는 사람은 카프카 일까? 

아니면 전지적 시점으로 카프카를 바라보고 있는 작가 리디아 데이비스일까?

작가로 크게 성공한 후 폴 오스터는 다양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작가 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말라르메, 카프카, 베게트 등의 작가들을 거론 하며 '솔직히 전 아내가 이 책들을 읽어 봐라, 여기 쓰인 문장들 제대로 해석해 봐라'라고 권해서 읽었는데 그 시절엔 어찌나 그녀가 강압적으로 강요 했던지 짜증이 확 올라 오는 걸 꾹 참고 읽거나 번역했죠.'라는 말을 했다.

20대 시절 리디아 데이비스는 주의력이 산만하고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성격이였는데 이를 두고 폴 오스터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물론 그녀도 번역을 했고 이런 저런 글을 썼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완성 한 게 없었습니다. 항상 어수선했고 어설펐는데 어떤 날은 오늘 반드시 말라르메 시 전체를 외우겠어! 라고 외치고는 외우지 못했죠. 또 다른 어느 날은 '글을 쓰고 있어.'라며 타자기 앞에 앉았는데 종이 한 장에 딱 두 세 문장이 적혀 있었고 그 다음 장엔 아무 문장도 없는 백지, 그러니까 어떤 문장을 시작하면 스토리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폴 오스터


폴 오스터의 이 말을 똑똑하게 기억했던 당시 뉴요커 기자가 2013년 리디아 데이비스가 맨 부커상을 수상 하자 마침내 그 두 문장이 반 세기 만의 한 권의 책으로 완성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글을 처음 읽었던 당시에 도대체 이 글은 이야기 인 것인가?라며 이런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이름을 다시 한번 내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farrar straus and giroux로 일명 FSG약자로 통용되는데 이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주요 작품들은 퓰리처 상, 내셔널 도서상, 노벨상 등을 수상한 이력이 있거나 이런 상을 받게 될 잠재적 재능을 가진 동시대 아주 뛰어난 작가들의 책들만 출판하는 출판사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책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영역판으로 새롭게 번역된 저자의 이름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바로 대작 중의 대작인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번역자로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1,2권 합본판의 번역서 제목이 <Swan's way>로 번역되어 다시 한번 이 책을 재독 하게 만들었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간간히 뉴요커 팟캐스트에 나와 자신이 직접 선별한 주요 단편들이나 시를 읽어 주는데 나는 그녀가 소개한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으며 사무엘 베게트의 희곡에서 눈부신 언어의 유희와 향연을 맛보게 되었고 카프카가 남긴 다양한 잡 글과 편지 글 속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카프카의 모습까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두툼한 단편적인 글들을 첫 장 부터 읽게 되면 온갖 종류의 재료들을 만나게 되는데 필시 시중에 출간 되고 있는 대중적인 잡지로 다양한 연령대들의 목소리가 담긴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특정 화자의 시점이나 서술이 뚜렷하지 않은 그녀의 문장에는 평범한 일상 부터 시작해서 결혼과 육아, 사랑과 이병, 투병과 상실, 애도와 슬픔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겼던 위인들의 뜻밖의 사적인 모습까지 읽을 수 있다.

어떤 글은 일기처럼 끄적였거나 어떤 글은 심리 분석을 했고 어떤 글은 보고서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문장을 원문으로 읽어보면 시적인 음률이 있다.

앞 서 언급한

-새뮤얼 존슨은 분개한다:

스코틀랜드에 나무가 그토록 적다는 것에.

이 글의 원문은

Samuel Johnson Is Indignant:

that Scotland has so few trees.

단어와 단어 사이의 리듬, 문장의 구조가 지닌 음악성, 중의적인 표현으로 쓴 이 문장 속엔 새뮤얼 존슨이 평생 동안 무엇에 매달리며 자신의 인생을 바쳤는지 그녀는 단 몇 단어로 정의했다.


[나는 대체로 '실험적이다'라는 평가를 거부한다. 그 말은 보통 전통에서 벗어난 형식의 소설이나 시. 혹은 어떤 형식이든 당혹스럽거나 기이하고 낯설게 보이는 것들에 반사적으로 붙이는 딱지다.]

                                                                                                           -리디아 데이비스


전 남편 폴 오스터는 그녀가 어떤 문장을 완성하면 뒤이은 스토리로 이어서 완성하지 못했다고 회고 했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생계를 위해 번역을 하다 원작자가 남긴 편지 글을 읽기도 했고 그러다 자신의 글을 쓰는 작업을 동시에 하면서 남편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까지 해야 했고 아이까지 돌봐야 했다.

그러기에 이토록 오랜 세월 끝에서야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완성 할 수 있었다.


[나는 백 이십 년 쯤 오래된 사전을 갖고 있는데 올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위해 이 사전을 사용해야 한다.]

                                                                                       -오래된 사전


부커상을 수상하고 그동안 여러 스타일로 쓴 책들이 잇따라 출간 되는 동안 리디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언어로 번역된 그 책을 옆에 놓고 번역된 언어를 학습하며 사전을 뒤적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오늘 책장에서 사전을 꺼내면서 나는 내가 어린 아들보다 이 사전을 훨씬 더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전을 다룰 때마다 나는 사전이 다치지 않게 최대한 조심한다. 그러니까 내 주된 관심은 사전을 다치지 않게 하는데 있다.]

                                                                                                      -오래된 사전


항상 활자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던 엄마의 시선을 벗어나 버린 아들 다니엘은 무시무시한 마약 갱단 두목의 돈을 훔쳐서 감방 살이를 하고 몇 배로 돈을 갚아 겨우 풀려난다.


[왜 나는 아들을 적어도 오래된 사전만큼 잘 대우하지 않을까? 어쩌면 사전은 딱 봐도 부서지기 쉽게 보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책장 모서리가 바스러 질 때는 모를 수가 없다.]

                                                                                                           -오래된 사전

약물 남용보다 더 무서운 행동을 서슴치 않게 했던 아들 다니엘은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떠돌이처럼 살다 한 때 갱단원이였던 친구랑 함께 거주하고 잠시 집을 나선 사이 친구는 마약 조직원에게 살해 당하고 이후 다니엘은 좀도둑 스러운 생활을 청산하고 무대 공연 예술가로 활동하며 결혼을 하고 새 삶을 시작한다.

[나는 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만, 늘 알지는 못한다. 무엇이 필요한지 알 때조차 그걸 늘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매일 여러 번 나는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못한다. 내가 오래된 사전을 위해 하는 일의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는 내 아들을 위해서도 할 수 있을 텐데..]

                                                                                                             - 오래된 사전

아들 다니엘은 여러 환각 증세에 시달리며 정신 분열증세를 보이다 10개월 된 자신의 딸에게 헤로인 성분의 약물을 주입해서(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밝혀지진 않았음'조사 당시 자신은 약물 흡입으로 혼수상태였다고 증언함) 아이는 혼수 상태에 빠져 병원에 입원한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딸의 학대와 살해 혐의로 체포되어  브루클린 법원에 거액의 보상금을 내고 보석으로 풀려 나자 마자 사흘 만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지하철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머리, 심장

심장이 운다.

머리가 심장을 도우려 애쓴다.

머리가 심장에게 상황을, 다시,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기 마련이여. 모두 사라지는 거야.

하지만 지구도, 언젠가는 사라져.

그러자 심장은 조금 괜찮아진다.

그러나 머리의 말은 심장의 귀에 오래 남지 않는다.

심장은 이 일이 너무 낯설다.

그들을 되찾고 싶어, 심장이 말한다.

심장에게는 머리밖에 없다.

도와줘, 머리, 심장을 도와줘.

여기, 반세기 동안 문장을 이어나간 이 책에 쓰여진 글들은 어떤 불안, 강박, 위압, 공포 그리고 소통의 장벽처럼 불쑥 불쑥 나타날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작가의 이야기 인 것 같고 어떤 이야기는 지난 시대를 살다 간 이들의 이야기 처럼 읽혀지다 돌연 질문도 없이 대답만 있는 페이지를 넘기다 프랑스어 초급반 강의록까지 읽게 된다.

어떤 형식에도 없는 이 책에 실려 있는 글에는 가공되지 않고 세공 되지 않은 단어들이 만나서 말도 안되는 감정으로 마무리 된다.


이 책은 어떤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좋다.

앞 페이지를 읽다가 뒷 페이지를 읽어도 좋고 재차 읽었던 페이지를 읽어도 좋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형식에도 없는 말도 안되는 문장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이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헬렌은 인내심이 대단하기 때문에 빛과 어둠 정도 밖에는 보이지 않을 때도 저녁에 먹을 감자를 천천히 깎곤 했는데, 손 끝으로 더듬으며 감자 싹을 찾아내 감자 칼로 하나씩 파냈다.]

                                                                   -헬렌과 바이: 건강과 활기에 대한 연구 중에서


읽고 있는 이야기의 끝을 당장이라도 알아 버리겠다고 달려들지 않고 차분히 하루에 한 장 씩 며칠에 한 장씩 읽다 보면 대담하면서도 독특한 문장의 맛 언어의 묘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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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07-07 2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가 이혼하고 재혼하고 뭐 이런 이야기만 아주 조금 어디선가 들었는데, 리디아 데이비스 이런 훌륭한 작가가 전부인이었군요! 게다가 그 아들은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불안의 변이˝ 읽어봐야 겠습니다

2023-07-07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7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7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7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9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록비 2023-07-07 2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르고 지나칠 뻔 했네요.

scott 2023-07-07 23:36   좋아요 1 | URL
초록비님
이 책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되능 ㅋㅋㅋ
주말 무조건 시원하게 ^^

은하수 2023-07-08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 사진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글 읽다 리디아 데이비스라는 대어를 낚은 느낌입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책 저도 도전해봅니다
감사합니다^^

scott 2023-07-08 11:28   좋아요 1 | URL
이 책 아무 페이지나 읽어도 좋습니다
은하수님 주말
무조건 시원하게 ^^

2023-07-09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8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08 1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 그럼 저 맨 앞 묘사는 시리 허스트베트의 모습인 건가요?? 셋다 안 읽었는데 scott님 고견엔 누구 손 들어주고 싶으셔요?? 순위 매겨 주신 순서대로 하나씩 읽어보려구요 ㅋㅋㅋ(나쁜 취미)

2023-07-08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7-09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 첫번째 부인도 작가였군요 이런 이야기 처음 알았네요 예전에 폴 오스터 소설 보기도 했는데... 두 사람 아들은 죽고 말았군요 리비아 데이비스가 글을 죽 써서 다행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 가까이 살지 말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지나간 일이어서 바꾸지 못하겠지만...


희선

2023-07-09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냥이 2023-07-18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폴 오스터는 알고 있었지만 워낙 유명하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중 한명이기도 하구요 근데 리디아 데이비스는 몰랐네요 전와이프의 삶도 그녀의 생각도 그녀의 존재는 생각도 해본적이 없었는데... 읽어야할 책이 또 생겼어요.. 아 역시 스캇님 글은 알지 못하는 내용들이 가득이라 재미있어요 감사해요

scott 2023-07-23 23:03   좋아요 0 | URL
폴 오스터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신간 나옵니다
이분도 마지막 끝 자락 ㅎㅎ
동료 작가들 전부 떠났고
아들도 그렇게,,,,

희선 2023-08-08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cott 님 또 축하합니다 이달에도 책 즐겁게 만나시고 글도 쓰시기 바랍니다


희선

scott 2023-08-09 10: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희선님도 오늘 하루 무조건 시원하게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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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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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북동부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내 의중은 이렇다:그녀는 떠돌이 개처럼 오직 그녀 자신에 의해서만 인도되었다. 나 역시 이런 저런 실패 끝에 나 자신으로 축소되었으나, 적어도 나는 세상과 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어느 날 우연히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거리에서 스쳐 지나간 어느 북동부 출신 여자의 얼굴 속에서 모멸감으로 파멸 된 삶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우연히 마주친 그녀, 클라리시는 오래 전 자신이 살았던 그곳 북동부, 그곳을 떠올리며

자신의 몸 속 깊숙한 곳에 고인 응고물 같은 걸 느끼게 된다.


[나는 이 순간 조금은 겸허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앞으로는 너무도 외적이고 분명한 서술이 독자들을 침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생명력 넘치는 피가 천천히 흘러나와 금세 젤리처럼 출렁거리는 덩어리들로 응고될 수도 있다. 이 이야기가 언젠가 나 자신의 응고물이 될까?]


어느 누구에게 어떤 도움 조차 받지 못했던 한 여자의 삶,사악하고 무자비한 세상에 내던져 버렸던 그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들은 클라리시의 심장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버린다.

그녀는 알고 있다. 화려한 대도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북동부 출신의 여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빈민가의 공동 주택에, 여럿이 함께 쓰는 방에서 하루 종일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하는 여성들, 차라리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리는 게 더 나은 삶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저항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클라리시는 타자기 앞에 앉아 알지 못하는 여성,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여성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고 북동부 여자에 관한 글을 쓰는 동안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쉴 새 없이 종이 앞 뒤를 오고 가며 중얼거리듯 끄적이고 있다.

'내가 이 북동부 여자에 대해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아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그건 결국 내가 그녀와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브라질 북동부 여자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둥둥둥, 멀리서 울리는 북소리

한 여인의 지친 얼굴이 거울 속에 비쳐 진다.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 되는 순간, 북소리는 멎을 것이다.

북동부 오지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구루병을 갖고 태어나 두 살 때 열병으로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고 단 하나 뿐인 고모와 함께 살게 된 아이의 운명은 신체 곳곳이 휘어지고 바스러지는 뼈 마디처럼 매 순간 죽음을 면치 못할 상태에 처한다.

마침내 고모가 죽자 그녀는 손지검에서 해방 되어 북동부를 벗어나 모두가 동경하는 환상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에 왔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인간의 모든 걸 탐내며 뜯어 먹는 살 찐 쥐들로 가득 찬 탐욕과 욕망의 소굴이였다.

그녀는 무덥고 습한 기후 속에서도 일 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살며 현기증이 날 정도로 굶주려서 뼈는 점점 더 휘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음을 믿지 않았고 힘겨운 노동을 마치고 나면 자신의 어둡고 축축한 방으로 돌아와 누군가 버린 신문지 조각들에 적혀 있는 글을 읽으며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 낸다.

거대한 도시, 화려한 불빛 너머 그늘 진 곳에 그녀처럼 살고 있는 이들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많다.

가난한 가정에서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말을 배우기도 전에 고아가 되어 험난한 세상 속으로 내던져진 삶일 지라도 그녀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자신은 타이피스트고 처녀고, 코카콜라를 좋아한다며 매일 주문을 외우듯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 북동부의 흙냄새가 나는 남자 친구라는 존재를 만나며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행복을 꿈꾼다.


'돈이 최고 유산이지. 난 앞으로 큰 부자가 될 거야.'

그의 이름은 '올림피쿠 지 제수스 모레이라 샤베스',아버지 없는 아이로 태어나 의붓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는 동안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오로지 여자들을 꼬드기는데 필요한 기술만 익힌 남자를 사랑하는 마카베아.

그녀가 태어나던 해 엄마는 성모님께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남으면 '선한 죽음의 성모님'이라는 의미가 담긴 '마카베아'라 짓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올림피쿠는 그녀의 이름이 마치 피부병처럼 들릴 뿐 금속 공장 노동일로 몇 주 동안 돈을 모아 멀쩡한 자신의 생니를 뽑아서 번쩍이는 금니를 박아 넣고 정치인들의 거리 연설을 쫓아 다니며 그들의 자리에 올라 서겠다는 헛된 야망을 보인다.

그는 단 한 번도 마카베아를 위해 돈을 쓰지 않고 마카베아는 그를 위해서 라면 무엇이든지 해준다.

올림피쿠는 모두가 동경하는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남부 카리오카 출신의 마카베아의 동료 글로리아를 보자 마자 단 번에 마카베아를 차 버린다.

예고도 없이 이별하게 된 마카베아는 우는 법을 잊은 채 웃음을 터트리지만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인 친구 글로리아에게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한다.

어느 장군의 이름을 딴 거리에 살고 있는 글로리아의 집에는 전화기도 있고 다양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음식과 꽃들로 가득 차 있다.

오로지 출세 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올림피쿠가 부자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 그동안 몸이 아프고 마음이 불편해도 단 한 번도 말로 표현하거나 내색을 하지 않았던 마카베아는 글로리아가 준 값비싼 카카오로 만든 초콜릿 우유를 먹고 탈이 나버린다.

그녀는 평생 동안 딱 한 번 먹어 본 비싼 음식을 토하는 게 아까워서 병원에 가지 않고 몸져 눕고 결국 가난한 이들만 치료하는 게 지긋지긋한 의사에게 폐결핵 초기 진단을 받는다.

그 병이 어떤 병인지도 모르는 마카베아는 치료비를 대준 친구 글로리아에게 자신의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난 세상에서 혼자이고 난 아무도 믿지 않아요.모두가 거짓말을 해요. 때론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그러죠. 난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진실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진실은 꼭 내가 혼자 일 때만 찾아 오는 거예요.'


​마카베아는 천상의 트럼펫 소리 같은 어느 점술가의 말에 심장이 요동친다.

자신의 과거, 가난하고 학대 받고 버림 받았던 시절의 모습을 점술가의 입으로 생생하게 듣고는 자신의 미래를 향해 탐욕스러울 정도로 집착해 버린다.

마카베아의 삶에 희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비틀거리며 점쟁이 집에서 나와 황혼 녘의 어두워져 가는 골목에 섰다- 황혼은 누구의 시간도 아니다. 하지만 마치 하루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것처럼 흐려진 그녀의 시야는 핏빛과 거의 검정에 가까운 금빛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그녀를 맞이한 대기는 너무도 풍요로웠고 밤의 첫 찡그림은 그래, 그랬다. 깊고도 화려했다. 마카베아는 현기증을 조금 느끼며 서 있었다. 그녀의 삶은 이미 변했기에 눈앞의 길을 건너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거리의 수 많은 여인들 중에서 자신의 눈에 포착된 그녀의 삶의 마지막 순간, 독자들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세상 모든 이야기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 일까?'


머나먼 우크라이나에서 건너온 가난한 유대계 이민자 출신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엄마는 소련이 우크라이나 땅을 피로 물들였던 시기에 군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매독에 감염되었다. 

어떤 의학적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시절에 클라리시의 엄마는 주변에서 권유한 민간요법으로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면 매독이 치유 될 것이라는 말에 세번째 아이를 임신한다. 1920년 12월 10일 소련이 모든 걸 빼앗아가 버린 땅에서 굶주림 속에  살아있는 모든 걸 잡아 먹었던 시절 영하 20도의 날씨에 세번째 아이 클라리스를 출산하자마자 한 밤중 고향 땅을 떠나 숲으로 숲으로 들어갔다.

출산 하자 마자 갓난 아이를 안은 엄마는 한쪽 팔이 마비된 상태로 걷고 또 걸어서 국경을 넘어 난민선에 올라타 머나먼 브라질 땅으로 건너 간다.


'나는 그런 목적으로 잉태 되었지만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다. 그런 죄 의식이 내 몸 속 깊은 곳에 박혀 있다. 부모님은 내게 특별한 임무를 주었으나 나는 그들을 실망 시켰다. 내 부모님은 아무런 소용 없는 내 탄생을 용서했고 그들의 희망을 배반한 나를 용서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어린 시절 내내 나는 기적을 소망했다. 내가 태어났으니 이제 어머니를 낫게 해 달라고.'

-1968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인터뷰 중에서

클라리시 가족이 브라질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은 브라질 북동부 지방 바이아주의 알라고아로 1920년대 이 곳은 국가의 행정 통치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척박한 땅이였다. 클라리시 엄마는 온 몸이 서서히 마비되는 고통 속에서도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브라질 북동부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을 쓰고 있는 사람, 신은 세상이다. 진실은 언제나 내적이며 설명할 수 없는 접촉이다. 나의 가장 진실한 삶은 알아차릴 수 없고, 지극히 내적이며 어떤 말로도 정의할 수 없다. 내 가슴은 모든 욕망을 비운 채 그 자신의 최후 혹은 태초의 고동으로 축소되었다. 나는 세상을 짊어지고 그 일에는 어떠한 행복도 없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세 아이들이 새로운 땅에서 뿌리 내리길 바랬다.

'나는 그녀가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건 그녀가 삶을 너무도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1943년 법학을 공부 한 23살의 클라리시는 휴지 뭉치처럼 움켜쥔 원고를 딱 100부만 발행해서 100부 이상 팔리지 않는다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 한 첫 작품<야생의 심장 가까이>로 브라질 문학계를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그녀는 첫 작품을 발표 직후 패션지 기자로 활동하다가 같은 대학 학과 동기생과 결혼과 함께 외교관이 된 남편의 부임지를 따라 세계 곳곳을 누비며 2차 대전 발발 당시 독일 베를린에서 응급 간호사로 활동하며 자국의 군인과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친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남편의 부임지를 따라 다녔던 클라리시는 틈틈이 창작 활동을 이어갔지만 도저히 브라질 땅을 벗어나서 살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혼 후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 리우데자네이로로 돌아왔다.

보수적인 카톨릭 종교관이 뿌리 깊게 박힌 브라질 땅에서 클라리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혼 했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남편으로부터 양육비 조차 받지 못한 상태에서 번역과 칼럼 기고로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두 아들이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고 강력한 약물 치료를 받지 않으면 광적인 발작을 하는 아들과 사투를 벌이느라 클라리시의 삶은 점점 피폐 해져갔다.

1962년 클라리시가 남편과 헤어지고 난 후 3년의 시간이 흘러서 바르샤바 대사로 승진한 남편이 두 아들을 초청하고. 그녀는 이 초청을 받아 들여 두 아들과 함께 바르샤바로 건너가 환영 사절단과 만난다.

 그 사절단 중에 소련 연방 공화국 외교관이 그녀가 태어난 우크라이나 땅에 초청 방문을 추진해주겠다고 제안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1966년 9월 담배와 수면제 없이는 버틸 수 없었던 클라리시는 수면제 복용 후 불이 붙은 담배를 손에 쥔 채 커튼이 쳐진 창가 침대에서 잠이 든다.

한 밤 중 불타 오르는 침대에서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겨진 원고를 구하기 위해 손으로 불길을 잡기 시작했다.

다리와 손을 절단할 상태까지 화상을 입고 생사를 오가는 상태에서도 병원에서 타이핑을 쳐야 할 정도로 그녀의 삶은 비참했다.

마키아베가 나를 죽였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으로 부터, 우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두려워 말라. 죽음은 순간이며, 그러니 순간 속에서 지나가는 것이다.

나는 그 여자와 함께 죽었기에 그걸 안다.

부디 이 죽음에 관한 한 나를 용서해 주기를...


1977년 12월 9일 10시 30분에 세상을 떠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마지막 작품 <별의 시간>

통증을 느끼고 병원에 갔을 때 이미 수술이 불가능 한 상태로 그녀는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

죽음을 앞둔 클라리시는 세상을 향해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맹세컨대 이 책은 말들 없이 만들어진다. 이 책은 음소거 된 사진이다. 이 책은 하나의 침묵이다. 이 책은 하나의 질문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부터 여자라는 것을, 여자의 운명은 여자가 되는 것이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한 어머니의 생명 빛의 무게 짊어지고 태어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운명은 누군가의 삶을 활자로 써 내려가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이였다.



그녀가 이야기 하는 <별의 시간>에서 어느 누구의 삶도 별처럼 빛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한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살다 간 여성 '마카베아'가 거리에서 쓰러진 핏자국들이 활자에 새겨져 있다.

이 책은 미완성이다. 독자들은 마지막까지 마카베아가 어떤 상태로 되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여전히 세상 어디엔가, 마카베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이 많기 때문에 누군가의 글 속에 그녀의 삶은 이어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을 공격해서 지금까지 무고한 생명들을 짓밟고 있다.

러시아 곳곳에서 징병된 10대들, 죄수들, 외국인 용병들, 거리의 부랑아들에게 총과 무기를 쥐어준 푸틴의 명령을 받고 우크라이나의 모든 생명체를 고문하고, 강간하고 불태우고 있다.

이 책을 펼치면 첫 장에 이런 글들이 적혀 있다.

전부 내 탓이다. 혹은

별의 시간 혹은

그녀가 해결하게 하라 혹은

비명을 지를 권리 혹은

미래에 관해서는 혹은

블루스를 부르며 혹은

그녀는 비명을 지를 줄 모른다 혹은

상실감 혹은

어두운 바람 속의 휘파람 혹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혹은

앞선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싸구려 신파 혹은

뒷문으로 조심스럽게 퇴장



우리 모두의 별의 시간은 언제가 될까?

세상의 모든 전쟁들이 종식될 때 일까?

자연 재해 재난이 멈춰 버렸을 때 일까?

우리 모두 '나'에서 파생되었기에 '나'는 당신들이고 '나의 삶'은 곧 우리 모두의 '삶'이다.

우리 모두 '나 홀로' 세상에 존재 할 수 없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별의 시간'은 우리 모두의 시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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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3-03 02: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마지막으로 쓴 소설이고 끝까지 쓰지 못했군요 클라리시가 이 소설을 끝까지 썼다면 마카메아는 어떻게 됐을지... 더 나아졌을지 더 안 좋아졌을지... 어쩐지 좋게 안 썼을 것 같기도 하네요 마카베아가 사귄 올림피쿠를 보니 옛날 한국 드라마 생각나기도 합니다 가난한 여자보다 부자 여자한테 가는 그런 사람이 나오는...

클라리시는 늘 어머니한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 같네요


희선

2023-03-03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냥이 2023-03-03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같은 삶을 살아갔던 사람이였네요 간혹가다 주위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같고 소설같은 삶의 얘기들을 듣는데 이작가분도 그런분이군요 책이 미완성이라지만 궁금하네요
어떤 심정으로 쓰였을지.. 작가의 삶에 대해 알려주신 부분을 읽어 가는데 뭔가 짠하니 뭉클..

scott 2023-03-05 22:41   좋아요 1 | URL
솔직히 리스펙토르는 동시대 여성들에 비해 좋은 환경(교육,대사관저 생활,집에 일하는 상주 도우미들 거닐고 살았던) 이여서 그나마 이렇게 작품을 남길 수 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의 삶은 글로 차마 옮기기 힘들 정도 입니다(지난 몇 주에 걸쳐 리스펙토르 자서전 읽고 난 후 충격을 받음)

이 작품은 전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이해 하기 불가 할 정도로 무의식의 흐름처럼 서술해서 쉽게 읽혀지지 않습니다. ^^

희선 2023-04-08 0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cott 님이 좋아하는 작가 책 이야기를 쓴 거여서 기쁘겠습니다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꼬마요정 2023-04-08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콧 님 축하드려요!!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라 참 가슴이 먹먹했는데 새삼 또 가슴이 아프네요.
마키베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어떤 마음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까요... 어째서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직접적인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 걸까요... 만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브라질을 떠날 수 있었다면 삶이 달라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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