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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를 찾아서 - 한스 로슬링 자서전
한스 로슬링.파니 헤르게스탐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1년 12월
평점 :
2014년 9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의학 학술지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에 세계 보건 기구 WHO전략 국장 크리스 다이가 에볼라 전염병에 대한 기사를 기고 한다.
한스 로슬링 박사는 이 기사에 포함된 에볼라 신규 감염 환자 수의 증가세를 보여주는 그래프를 보는 순간 하던 일을 멈춘다.
그는 급격한 속도로 감염되고 있는 에볼라 신규 감염 확진자 수를 줄이는데 과감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지구 전체로 확산 될 거라는 걸 예감 했다.
이미 2014년 2월 부터 에볼라 점염병 환자들이 속출 하고 있었고 8월에 다다르자 빠른 속도로 아프리카 전역으로 감염 환자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WHO전략 국장 크리스 다이가 이끄는 연구 팀은 에볼라가 전파 되는 시작 부터 9월 14일 까지 에볼라 감염자 숫자 증가 데이터를 사용해 11월 초까지 예상 감염자 증가 숫자와 사례 추이를 추산해 나갔다.
이들이 예측한 데이터의 선은 점점 더 가파르게 상승해서 9월 중순까지 감염되는 환자의 숫자가 3주마다 두 배씩 증가했다.
이 시기에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의 거리에는 죽은 사람들로 즐비했다.
전쟁이나 테러, 자연 재해, 기타 지병으로 사망 한 것이 아닌, 에볼라에 감염되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사망한 이들이였다.
아프리카 곳곳의 도시의 의료 시스템은 붕괴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고 신규 감염자 숫자는 3주마다 두 배 씩 증가 하고 있는 시점에 한스 로슬링 박사는 에볼라 감염의 위험을 설명하는 영상을 제작해서 전 세계인들에게 에볼라 라는 질병이 어떤 것인지 알리기 시작한다.
이미 국제 보건 기구는 에볼라의 치명적인 전파력을 알고 있었지만 이에 대처 할 예산이 부족해서 제때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에볼라 발생 지역은 서 아프리카의 기니,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세 곳에만 국한되어서 세계가 크게 주목 하지 않았지만 감염 규모가 국제 공항 시설을 갖춘 대도시로 번져서 국가 간 이동시에 퍼져 나가게 된다면 전세계를 감염 공포 속에 빠뜨리게 된다.
2014년 10월 WHO가 에볼라 유행의 경보를 울렸지만 이미 감염병 확산을 통제 하지 못한다.
한스 로슬링 박사 팀은 2014년 10월 말 여행 가방 두 개에 가장 중요한 것들만 담아서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로 떠난다.
그는 현지에 도착 하는 날 부터 그날 그날 감염된 사람들 몸에서 체취한 혈액 샘플 검사 데이터를 정리 해서 에볼라 신규 사례 수 추이를 그래프로 그려나간다.
제약 회사와 국제 기구 측의 추가 치료 시설 확충으로 병상 숫자를 늘리고 의료진들을 추가 파견해서 한 달 만에 신규 감염자 숫자를 빠른 속도로 감소 시켜 나간다.
한스 로슬링 박사는 신규 감염자 속도가 감소 하고 있는 시점에 경계가 느슨해지기 전에 y 축에 로그 눈금으로 사례를 표시해 그래프를 다시 그려 나간다.

이렇게 다시 그려나간 그래프는 신규 확진자 발생이 시작 될 때와 같은 모양새로 끝나는 형태를 보여주었다.
즉, 신규 사례가 점점 줄어들되 갑작스러운 폭발이 일어나는 느린 경로를 따라서 에볼라 감염 확산을 성공적으로 막은 지역에서 부터 손 씻는 장소를 마련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조치를 취한다.
12월 동안 에볼라 감염자와 지역을 통제 하고 입원한 환자들을 격리 치료 하면서 불완전한 데이터 분석의 사고 패턴을 재 설정해 나가기 시작한다.
감염 속도를 늦추는데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단계 별 변화'에 맞게 대처해야 한다.
즉, '소방관 단계'가 완료 되면 '수사관 단계'를 시작해서 숫자 데이터가 아닌 환자를 치료한 사례를 숫자 데이터로 남기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한스 로슬링 박사는 '작전 상황실'에서 매일 아침 접촉자 추적 담당자에게 들어오는 보고서를 검토 하며 모든 감염자가 발생하고 치료 받는 모든 사례를 각 도시 별 상세한 지도에 표시해 나갔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 환자가 접촉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지도 위에 표시해서 도시 전체의 에볼라 화산 동향을 파악해 나간다.
한스 로스링 박사는 이렇게 축적한 데이터를 통해 누군가 에볼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아는 즉시 사망자와 물리적으로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의 목록을 작성해 나간다.
누군가 에볼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아는 즉시 사망자와 물리적으로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의 목록을 작성하며 감염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 할 때 부터 격리 시켜나가는 것이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 확산의 속도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였다.
한스 로슬링 박사 팀은 접촉자 목록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에볼라 환자와 밀접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2015년 1월, 2014년 6월 이후 처음으로 라이베리아, 기니, 시에라리온에서 한 주 동안 새로운 감염 확진자 수가 100명 미만으로 떨어졌다.
한스 로슬링 박사는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 경제 포럼에 두번 째로 참석해서 1000명의 청중 앞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 섹션에서 세가지 질문을 던진다.

-지난 20년 동안 극빈층의 비율은 ?
a)거의 두 배가 되었다.
b)거의 같은 수준을 유지 했다.
c)거의 반으로 줄었다
-전 세계 1세 아동 중 몇 명이 홍역 예방 접종을 받을까?
a)10명 중 2명
b)10명 중 5명
c)10명 중 8명
그리고 마지막 질문 , 1950년에 10억 명 미만의 어린이가 있었고 그 수는 21세기 초까지 꾸준히 증가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한스 로슬링 박사가 던진 세가지 질문에 대해 다보스 대의원들의 61퍼센트가 정답을 맞췄다. 스웨덴에서 이 질문에 응한 사람들 중 23퍼센트만이 정답을 맞췄고 미국에서는 5퍼센트만 맞췄다.
한스 로슬링 박사는 자신이 세운 갭 마인더 재단에서 축적한 포괄적인 데이터를 통해 세계의 기본적인 변화 패턴을 정확하게 알리는 데 노력 해 왔다.
그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극빈층의 비율을 기술 하는 접근 방식을 바꾸는 새로운 개념을 구상한다.
한스 로슬링 박사는 <팩트풀니스 factfulness(사실충실성)>를 통해 옛 서구의 기존의 방식이 아닌 '나머지 세계'를 현실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정확한 수치와 데이터를 펼쳐 보이며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아 무엇이 무지를 그토록 끈질기게 만드는지 이해 시켜나가기 시작한다.
한스 로슬링은 10대에 접어 들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해 나가는지 , 어떤 생활 조건에 살아야 풍족한 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의 조부모는 스웨덴 웁살라 근처 시골 마을 셋 집에 1915년 부터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그 시절 조 부모들은 우물을 퍼 날랐고 장작을 패서 땔감을 때웠고 나무를 베어 집을 지었다. 모두 다 한 방에서 생활했고 전등 불빛 하나에 어두운 밤을 보냈다.
1930년에 들어서야 옥외 임시 변소가 설치 되었고 1940년 4월 9일 독일군이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침공한다. 스웨덴은 징집이 가능한 나이 대 남자들 모두 전쟁에 참전하고 한스 로슬링의 아버지도 전쟁터로 나간다.
1952년 그의 할머니는 스토브를 사용해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했고 지하실에 수도가 설치 되었다.
평범한 노동자 계층에서 성장한 그의 아버지와 달리 극도의 빈민 층에서 자란 어머니의 삶은 불안정 했고 예측이 불가능했다.
국가 의료 기관은 결핵에 걸린 어머니를 치료 해 주었고 국가 의료 지원 시스템은 극빈 층이였던 어머니 가족에게 식품 교환권을 지원 해준다.
1846년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덮친 대 기근 시기에 살 곳을 찾아 미국 일리노이와 미네소타 오리건 주로 대량 이주 할 정도로 1차 대전 이전 까지 스웨덴 국민의 대다수는 극빈 층이였다.
전후 복구 시절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한 스웨덴은 꾸준히 일자리를 늘리며 사회보장 제도를 통해 극빈 층 계층의 의료와 교육에 투자를 늘려나갔다.
극한의 생활고로 내몰린 가족을 지원하고 구제하는 시민 사회의 지원 제도를 통해 도시 빈민가의 슬럼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교육을 통해 개개인이 사회로 나갈 수 있게 기회의 폭을 넓혔다.
한스 로슬링 박사의 어머니는 결핵에서 완치 되었고 6년 간의 정규 교육 과정을 마친 후 식품원 배달원이 된다.
주택 지원 제도 혜택을 받은 한스 로슬링 부모는 노동자 계층의 내 집 마련 장려 정책에서 빌려주는 돈으로 중앙 난방이 들어오는 집을 소유 하게 된다.
한스 로슬링 가족의 세대는 스웨덴 사회가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긍정적인 변화를 하던 시기에 국가가 제공하는 혜택을 받았다. 그의 조 부모는 문맹이였지만 3세대인 한스 로슬링 박사가 대학 교수직에 올라 설 수 있었던 이유는 개선된 보건 의료 정책과 사회 복지 제도로 인한 물질적 혜택 덕분에 가능했다.
1948년생 한스 로슬링 박사 세대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더 나은 삶의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인식했던 세대다.
그가 대학에 들어 갔던 시기에는 공공 교육, 보건 의료, 도로, 일자리를 확충하고 확장해서 더 많은 계층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던 시대 였다.
의과 대학에 재학 중 일 때 그가 마주 했던 극빈 계층의 삶, 그중에서도 10대 소녀들은 매춘과 착취에 고통 받고 있었다.
스웨덴은 1975년에 낙태가 합법화 되었다. 마을 보건소는 사후 피임약을 제공했고 영아 사망률이 4퍼센트로 떨어졌다.
그는 네팔에서 부터 모잠비크 시골 마을까지 수 없이 오고 가며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챙겼다.
스물 아홉 살 나이에 암 선고를 받았던 한스 로슬링 박사는 최종 진단에서 암세포 전이가 발견 되지 않아 극적으로 완치 통보를 받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두 번째 인생에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병에 걸리면 효과적인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가?
-의사들은 환자를 치료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훌륭한 병리 검사실은 갖추고 있는가?
1979년 10월 12일,그는 12년 전 모잠비크 독립 운동을 이끈 첫 지도자에게 약속했던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아프리카로 향한다.
그는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연료와 의약품은 항상 부족했고 숙련된 의료진과 좋은 장비의 부재로 인해 위급한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 받기 힘든 현실에 부딪친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 조차 전혀 감지 하기 쉽지 않았다.
평생 아프리카 선교회 의사로 일했던 잉에게르드 로트는 한스 로슬링 박사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극단적으로 가난한 곳에서 일할 때는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라. 네가 하려는 일이 더 나은 곳에 쓸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것일 수 있다.'
1978년 부터 세계 보건 기구는 '모두를 위한 기본 의료'를 기본 정책으로 삼고 , 수십 년 동안 최대한 많은 국가에서 최대한 많은 아동에게 예방 접종과 기초적인 의료를 제공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정했다.
한스 로슬링 박사는 10년 가까이 아프리카 극빈 국가에서 환자를 치료한 경험을 토대로 스웨덴 웁살라 의과 대학으로 돌아와 학생들에게 보건 의료를 다른 각도에서 평가 할 수 있는 3단계 접근 방식을 가르쳤다.
-당신이 일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수를 가능한 정확하게 파악하라.
--이 숫자 범위 안에서 1년 동안 몇 명의 아기가 태어나는지 추정하라.
-아기의 몇 퍼센트가 전문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태어나는지 조사하라.
가난한 사람들 대부분은 병원 진료를 받지 못하고 가장 기초적인 예방 접종 조차 맞지 못한다.
그는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곳에 보건 서비스를 받게 만들어야 유행병 감염을 예방 할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유행병의 지리적 확산 분포에 대한 지도를 상세하게 그려 놓고 유행병 원인과 전파 속도 추이를 추적해 나갔다.
이렇게 수 년 동안 축적된 데이터를 토대로 신규 사례 수를 보여주는 그래프를 하나 씩 완성해 나가며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요인까지 유추 해 나간다.
한스 로슬링 박사가 그동안 수십 년 동안 축적한 데이터 추이를 통해 각 국가의 인구 규모와 경제 발전 건강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에서 이제는 더 이상 출생률과 아동 생존률로 만 세계를 두 개로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 졌다.
여전히 뉴스나 신문 기사에서 인구 폭발 국가로 지목하고 있는 나라는 아프리카와 이슬람 국가, 그리고 기타 극빈 국가로 이곳의 유아 사망률이 세계 인구를 억제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언급 하고 있다.
'아동 사망률이 인구 성장의 억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이미 수 십 년 전 데이터로 언론과 기사에서 대명사 수식어 처럼 사용 되고 있다.
현재 인구 성장이 가장 빠른 곳은 아동 사망률이 가장 높은 최빈국들로 극심한 빈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동 노동이 필요하고 자식 중 일부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이를 더 많이 낳고 있다.
피임 법 사용을 최우선 과제로 놓고 빈곤과 아동 사망률을 줄여 나가야 한다.
한스 로슬링 박사는 각 나라를 물방울로 표시해서 인구 수에 비례해 물방울 크기를 정했다.

즉 이 물방울들은 각 나라의 인구 수로 1인 당 소득을 가로축으로 하고 기대 수명이나 가구 당 생존 자녀 수 같은 국가 건강 지표를 세로축으로 하는 그래프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방울 그래프에는 세계를 선진국과 저 개발국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래프 한 가운데 중앙에 몰려서 경제 발전의 상태 여부에 따리 해당 국가에서 발생 하는 질병으로 인한 건강 손실 부담의 크기가 달라지며 국가 별로 감염 성 질환에서 비 감염 성 질환, 만성질환 순서로 질병의 감염 전파 속도가 추이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염병의 확산과 감염 속도는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 나라까지 전 세계 국가들이 연속선상에 흩어져 있다.
20세기 서구의 시각으로 고착 되어 있는 데이터 시스템에 한스 로슬링 박사는 '나머지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 시킬 수 있는 <팩트풀니스>를 전파하는데 앞 장 선다.
2016년 여름, 한스 로슬링 박사는 자필로 기록한 강의 노트와 메모, 인터뷰를 토대로 동료 의사이자 아내 앙네타의 초등 학교 친구와 함께 회고록 집필을 시작한다.
한스 로슬링은 재 발한 암 치료에 몰두 하는 동안 집 근처 해변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줄기로 댐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는 열심히 땅을 퍼내고 돌멩이와 모래로 댐을 쌓아 물줄기의 방향을 바꾸는 작업에 몰두 하며 새로운 하구를 머리 속으로 설계하고 있었다.
한스 로슬링 박사가 만든 물줄기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자연적으로 바뀌면서 흘러 갔다.
그는 누가 이끄는 데로 삶을 살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의료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내일 보다 오늘에 집중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온전하게 살아 남을 수 없었다.
그는 평생 동안 먹는 시간을 아끼는 것 만큼 쇼파나 침대에 눕지 못할 정도로 전세계를 다니며 쉼 없이 각 국가의 보건 의료 상태와 시스템을 체크했고 극빈의 환자들을 진료 했다.
가족의 짐보다 환자의 진료 기록 서류를 더 소중히 챙겼던 그는 이따금씩 눈 붙일 시간이 나면 솔제니친의 작품을 펼쳤다.
'수많은 생물이 우주에 살고 있지만, 이 우주에는 생물의 수요 만큼의 중심이 있다. 우리 모두가 우주의 중심이다.'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중에서
한스 로슬링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부터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곳이 집 근처 해변가이든, 아프리카 모잠비크 시골 마을이든, 에볼라가 창궐했던 라이베리아 몬로비아였든 그리고 다보스의 세계 경제 포럼이든...
그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 하고 싶은 욕구에 이끌렸고 이해 했다고 생각 할 때 까지 절대로 자신의 의지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고안하고 축적한 물방울 그래프에는 서구의 고착된 데이터에서 벗어나 무지와 편견이 아닌 정확한 시각으로 이해 하고 접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가 마주 했던 수많은 죽음 아프리카, 쿠바, 독재 정권들이 은폐하고 방치한 국가적 영양 실조와 감염 실태의 참상, 에볼라 팬데믹까지 세상에서 가장 소외 된 지역의 사실에 기반한 것만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팩트풀니스'를 전파하는데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세상은 느리지만 분명히 나아지고 있다”-한스 로슬링(1948-2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