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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1~2 세트 - 전2권
오에 겐자부로 지음, 김현경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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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넘어 화성을 방문하는 시대를 사는 인류가 가진 초음속 시간 감각으로 보자면 아득히 먼 옛날이라 할 시절, 미국에서 불어온 유행에 편승해 핵셸터를 규격 생산하여 판매하려던 일본인 업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핵셸터가 무사시노 대지 서쪽 끝자락에 들어섰다. 주택이 모여 있는 언덕에서부터 시작해, 갈대와 참억새를 비롯해 돼지풀, 양미역취가 우거진 습지대로 이어지는 80도 급사면에, 즉 가파른 벼랑 아래 자락을 파헤친 곳에 철근 콘크리트로 된 3미터 X6미터 지하 벙커가 설치된 것이다.]


철근 콘크리트로 된 3미터 X6미터 지하벙커, 일명 민간용 대피 시설인 핵셸터가 기업화하는데 실패하고 그대로 방치 된지 5년의 시간이 흘러 건물의 전체적인 폭이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종 모양의 3층 짜리 건물이 올려졌다.

기묘한 외관의 핵셸터의 1층은 거실 겸 식당이 있고 잠수함 승강구 모양의 덮개를 올리면 지하벙커로 이어지는 철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 갈 수 있다.

건물 내부에 물이 스며들 때면 구덩이를 파서 밭을 갈 수 있게 만들어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미래에 닥쳐올 재앙에 대비해서 이 건물을 설계하고 완공한 이는 한 때는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한 정치가의 사위로 장인의 비서로 활동하다 장인 소유의 건축회사에서 건설 중이였던 핵셸터 생산 판매 보급 기획을 담당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 모든 사업 기획을 전부 포기하고 돌연 아들을 데리고 핵셸터에서 은둔 생활에 들어가 고래와 나무와 교감 하는 대리인의 역할을 자처하고 이름까지 바꿔버린다.

오키 이사나 (大木勇魚)


그의 하루 일과는 명상을 통해 고래의 다양한 생태 사진을 보며 녹음 된 고래 소리를 듣고 이들과 영적인 교감을 나누며 핵셸터 안에 장착된 프리즘 쌍안경으로 건물 밖 너머에 있는 나무들을 관찰한다.

이렇게 고래와 나무에 깃들어 있는 혼령들과 교감 하는 오키 이사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생육의 진화 과정을 겪고 있는 나무들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화 하며 의사들에게 백치라는 진단을 받은 5살짜리 아들과 셸터에서 외부의 시선과 간섭이 차단된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5살 아들 진은 아버지가 녹음해온 여러 들새소리들을 듣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진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말을 시작했고 새의 이름을 정확하게 맞추는 영적인 아이다.

진은 아버지 이사나가 들려주는 50여 종의 새의 소리를 듣는 동안 얼굴에 온화한 기쁨이 흘러넘친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눈송이가 공중에서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순간 하늘 위를 날아다니던 새들이 바닥으로 추락하자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은 이사나는 출력한 사진에 또렷하게 보이는 녹황색 덩어리 같은 물체를 발견한다.

땅 위로 추락한 새들의 시체를 찾아 나선 이사나는 소그룹으로 흩어져서 훈련 중인 자위대원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다시 핵셸터로 돌아가던 중 허물처럼 껍질이 흘러내리는 떡갈 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새 한 마리를 발견한다.

아버지가 떡갈 나무 위에서 울고 있는 새의 소리를 녹음한 걸 듣자 마자 아들 진은 이렇게 말한다.


'쿠르쿠르, 보,보,보,...'

'염주비둘기입니다.'


그날 밤 이사나는 꿈 속에서 거세게 부풀러 오른 바다가 지표 위를 덮쳐서 핵셸터가 세워진 인근까지 흘러 들어온 광경을 보게 된다.

꿈에서 깨어난 아사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바다 속을 유영하던 고래 떼들이 자신과 아들 진이 은둔한 곳인 핵셸터를 찾아 온 것일까?

몇 일 후 이사나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식에 놀란다.

그는 떡갈나무 위에서 울던 새 한 마리를 목격했던 그날, 훈련 중이였던 자위 대원들이 불량소년들에게 습격을 받아 이들 중에 중상을 입은 자들이 있었다는 소식을 뉴스를 듣던 중 혹시라도 경찰들이 인근 건물들 모조리 탐방 심문을 하러 찾아 오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는 지적장애아인 아들 진을 지키기 위해서 라면 어떤 적이라도 물리치기 위해 철저한 준비와 대비책을 세워두었지만 자위 대원들에게 중상을 입은 자들 중에서 혹시라도 핵셸터로 숨어들어 오지 않을까라며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이사나는 프리즘 쌍안경으로 외부의 동태를 관찰하던 중 셸터에서 보이는 고지대 위에 한 무리의 작은 물고기 떼처럼 보이는 것들이 쌍안경에 잡혔다.

그리고 뒤이어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찰에게 긴급 체포되어 수갑을 찬 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아이들의 울음 소리일까 ...아니면 지난 밤 꿈 속에 나왔던 고래들의 신호일까...

어떤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 오더라도 이사나는 아들 진을 꼭 끌어안고 아이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봄의 기운이 솟아나던 날 아이에게 핵폭발이 일어나기 전의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드디어 핵셸터 밖을 나간다.

.....셀터로 돌아올 때까지 밀폐된 콘크리크 상자 속 참사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경지에 이르도록 이사나의 강박 관념은 고조 된다.

이사나는 견고하게 만든 현관문 열쇠 구멍 틈에서 흘러나오는 새소리를 듣고 있다.

'쏙독새 입니다. 이것도 쏙독새 입니다.'


셸터 안으로 들어간 이사나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찾아 간다.

검정개똥지빠귀 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들어간 이사나.


'산솔새 입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들 진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서른 다섯 살의 이사나는 밤 마다 꿈 속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아들 진의 곁을 죽은 유령처럼 맴돌고 있다.

그는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지적장애아인 아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 때 세상을 호령 했던 정치가 장인과 지적장애아를 낳은 아내는 아들진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아버지 이사나는 촉각, 시각, 후각이 뛰어난 아들 진이 인간 사회에서 살 수 없다면 고래와 나무들과 교감 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 갈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사나는 날마다 은신 하고 있는 핵셸터에서 혼심의 힘으로 나무의 혼과 고래의 혼을 향해 애원하고 있다.

이들 부자의 삶에 어떤 파고가 밀려 들어오고 있을까?

압수 수색 영장을 들고 온 경찰들, 아이의 건강상태를 걱정하는 병원관계자들, 권력자인 장인과 아내...아니면 바다 속을 유영하고 있는 고래떼 일까....

기존의 사회 질서를 뒤집어버리고 싶은 자유 항해단의 다마키치와 다카키 무리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핵셸터 건물로 잠입하고 서른 다섯 살 생일을 기점으로 온 몸의 근육이 위축되어 오그라 들어버린 '보이'라는 남자와 세상의 남자들에게 성적 학대와 착취를 당했던 '이나코'까지 이들 무리에 합류한다.

이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미숙아들로 어른들이 세운 사회를 모조리 부숴버릴 계획을 세웠다.


[우리 멤버들은 하나같이 집단 취직해 도쿄에 나온 놈들이야.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같은 건 서로 말하지 않지만 어쨌든 난 숲이 많은 지방에서 태어났어.우리 지방엔 고래나무가 있었지. 당신이 태어난 곳에는 고래나무가 없었어?]


이 세상에서 고래나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줄 사람은 단 두 명 뿐이다.

이사나와 그의 아들 진

그리고 자신이 고래나무에게 혼을 빼앗겨버렸다고 주장하는 소년 다카키

이들 모두 인간과 고래를 포함해 지구 상의 대륙과 해양의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사멸 해버리고 나무들까지 말라 비틀어진 이후의 세상을 걱정하고 있다.

지구의 왕은 인간이 아닌 나무와 고래라 굳게 믿는 이들은 다음 세대들이 도착 할 때까지 살아 남기 위해 셸터에 은신하며 세상이 파괴 시키는 적과 맞서기 위해 무기를 준비하고 새 세상을 선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대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그날을 대비해서 바다에 배를 띄워 대피할 계획을 세우는 도중에 군인과 경찰의 총기까지 탈취하며 자위대원들을 추적하는 추적대까지 조직하고 외부를 향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라디오를 통해 외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들", 상처 받고 버림 받은 청년들의 망상이 핵재앙으로 잿더미가 될 지구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아 자연과 교감하며 스스로를 구원 받게 될까?


[진은 깨어 있었다. 이불 한가운데 똑바로 누워서 눈부셔하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많은 발진이 속눈썹이 난 눈꺼풀 가장자리까지 돋아 있었고, 잘 생긴 귀 안쪽도 덮고 있었다. 잠옷 대신 입고 있는 이나코의 속옷 밖으로 힘없이 삐져나온 팔다리는 발진이 수북했다. 그런데도 긁어서 터진 상처 하나 없이, 발진이 깨끗하게 돋아 있었다.]


어린 진은 자신의 몸 곳곳에 수포가 나오고 발진이 돋아 나고 있음에도 아이는 붕대를 감은 손으로 긁지 않고 꾹 참고 있다.

세상 밖은 자위대원들의 자살 사건 그리고 총기 탈취 사건과 연관된 좌익 폭력 과격파들과 선전포고를 한다.

다카키와 다마키치가 이끄는 자유항해단 대원들은 곳곳에 폭발물을 설치 하며 고래와 나무의 혼령들을 향해 지구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곧 자신들을 태우고 먼 바다를 항해 할 한 척의 배가 도착하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들의 병세가 악화되자 아버지 이사나는 용기를 내어 셸터 밖으로 나와 필요한 식료품을 사러 가던 날 도시 전체는 마치 한 여름의 폭염처럼 달아 올랐다.

이사나는 거리와 도로 마다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곧 핵전쟁이 터지기 전을 대비해 사람들이 전부 피난을 갔다고 생각한다.

[나는 핵셸터에 아들과 틀어박혀 이 세상에서 인간에 의해 멸망 당하게 된 좋은 것들의 대리인으로서 최후의 날을 맞으려고 했어.

나무와 고래의 대리인으로서, 인류가 멸망하는 최후의 광경을 볼 계획이었어. 나 자신도 아들도 함께 멸망하겠지만, 그런 건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았지.]


고래와 나무의 혼령의 대리인을 자처 했던 이사나는 대 붕괴로 하늘 위로 치솟는 불기운을 향해 '오라'라고 우레 같은 소리를 지르기 위해 마지막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마지막 날에 나는 지구상의 모든 고래와 나무에게 너희를 멸망 시키려고 했던 인류가 지금 스러진다. 이 사실을 난 너희의 대리인으로서 환영해.'


드디어 핵셸터를 공격하려는 외부의 적들과 싸움이 시작되었다.

폭발 소리가 들리자 이사나는 어둠 속에서 아들 진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진, 총소리야, 빵! '

온 몸에 퍼진 수두로 고통 받는 아들 진을 무사히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이사나의 아내는 구급차를 타고 핵셸터 건물 밖에 도착했다.

경찰 특공대원들은 10대 소년 대원들과 함께 핵셸터 건물에 은신 중인 이사나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건물 안에 있는 여러분 인질을 석방하고 바로 나오세요.'


구급차와 경찰 대원들이 탑승한 차들이 핵셸터 밖을 에워싸고 있다.

이사나는 아들 진을 무사히 건물 밖으로 내보내고 구급차에 올라탄 걸 쌍안경으로 확인하며 나무와 고래의 혼령들을 향해 중얼거리고 있다.


'진 엄마는 나를 필요로 할 일 없이 ,장인이 후두암으로 죽은 뒤 그의 기반을 물려받아 국회의원이 되고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인 꿈을 좇아 계속 달려가겠지'


그의 영혼의 덩어리가 몸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어떻게 든 정해진 규칙대로 무너져버리는 세상 속에서 그도 언젠가 죽게 될 것이다.

자유대원의 리더 중 한 명인 다마키치카 기동대원을 향해 총을 쐈다.

하늘 위로 적동색 최루탄가루가 쏟아지면서 가스탄과 발연통이 폭발하듯 시커멓게 쏟아졌다.

이사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나무의 혼, 고래의 혼에게 보낼 마지막 메시지를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나무와 고래의 대리인을 자청해왔지만, 나는 피할 길 없는 인간, 즉 나무를 베고 고래를 도살하는 자들 중 하나야 나는 언젠가 쇠약해져서 쓰러져 죽을 것이고 이렇게 어중간한 채로 어떻게든 넓고 자유로운 곳으로 너희들은 살아 남아야 해.]

살수차가 뿌린 물 폭탄에 서서히 건물 전체가 물 속으로 잠식되고 있다.

머리 위에서 폭발음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진짜 핵폭발이 일어나서 해일과 대 홍수가 시작 된 것일까?

물이 이사나의 무릎 까지 차올랐다.

그동안 이사나는 아들 진의 미래를 위해 고래와 나무의 혼령들과 교감 해 오는 동안 그들에게 어떤 대답이나 신호를 받지 못했다.

과연 이사나의 외침을 들은 고래떼들이 핵셸터 몰려 오고 있을까?

[나는 나무와 고래에 대한 인류의 흉포함을 고발하기를 소망해왔다. 그런 자로서 가장 인간 답게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던 흉포함을 드러내고 오랫동안 가져온 생각의 옳음을 증명해야만 한다. 흉포하게 저항하는 동안 마지막 인류인 내 육체=의식이 어중간한 채 폭발하고 그리고 '무'다. 그때야말로 고래여, 너희는, 나무여, 다름 아닌 너희를 향해 다 잘 되었다라는 대 합창을 보낼 것이다. 모든 잎사귀는 몸을 떨며 이어서 노래할 것이다. 다 잘되었다.]

드디어 핵셸터 상부 덮개 문이 열리자 고래 피부처럼 검푸른 빛이 번뜩이며 나타났다.

이사나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가스탄에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섯 발이 장전 된 그의 총에서 세 발이 발사되었다.

강한 물살이 그를 덮쳤다.

네 번째 총알이 발사 되었다.

마지막 다섯 발...

마침내 고래떼들이 그를 찾아 왔을까...


1973년에 발표한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라는 작품은 37살의 오에 겐자부로가 1972년에 발생했던 아사마 산장 연합적군 농성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세상의 종말을 예감한 이들이 끝까지 희망을 포기 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한 작품이다.

지적 장애 아들 때문에 세상과 은둔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이사나가 대 지진으로 도쿄가 붕괴되리라 전망하는 반 사회적 청년무리들인 ‘자유항해단’의 탈주 계획에 동참하면서 ‘무장 투쟁’까지 나서게 되는 모습을 통해 지적 장애 아들 진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당위와 망상적 양태를 홍수, 고래 등 종교와 신화적 상징을 통해 묵시론적인 세상을 펼쳐 보인다.

이 작품은 이미 반 세기 전에 쓰여졌지만 21세기 현재 이 지구 곳곳에는 거대한 권력과 이권 이념의 피라미드로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빈곤층,청년층의 문제, 핵전쟁 위기, 핵오염의 위험에 노출된 현재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을 예견한 작품이다.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에서 지구 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들"의 망상에서 출발한 여정이 자연과 공생 공존 하지 않은 이상 우리 모두 거대한 물살에 휘말려 들어가버린다는 암울한 현실을 묵직한 문학적 언어로 표출했다.

핵과학자들(미국 핵과학자회보·BSA)이 인류 멸망까지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만든 '운명의 날' 시계는, 2023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자정 90초 전'으로 3년 만에 운명의 시간이 10초 앞당겨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핵 확산 위험 증가와 기후 이상으로 전 지구의 식량난은 더 심해지고 있고 전염병은 나날이 더 강력한 전파력으로 확산되고 있다.

인간의 자연의 시계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도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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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7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7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7 1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7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8-08 2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무와 고래는 땅과 바다에서 중요한 거네요 나무는 아주 많이 베고 고래는 그동안 많이 잡아서 얼마 남지 않고... 사람은 자연을 정복했다고도 하는데 그런 말 좋은 건 아니네요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 북극이나 남극 얼음 빙하가 사라지면 바다도 높아지고 안 좋아지겠습니다 지구 대멸종이 찾아올지도... 무섭네요


희선

scott 2023-08-09 10:32   좋아요 1 | URL
이 작품이 73년에 썼는데 마치 지금 현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한 것처럼 소설 속만의 세상이 아니였습니다
고래가 살지 못하는 바다
새가 사라진 숲의 나무
지구의 마지막 카운트가 임박해온것 같네요
서울 8월 평균 온도가 37도이고
새벽에도 3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앞으로 평균 온도 40을 넘어 갈 수 있다는 거겠죠
 
불안의 변이 - 리디아 데이비스 작품집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강경이 옮김 / 봄날의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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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은 이제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그녀는 나보다 작아서 152센티쯤 되는 키에 체격이 다부지기 때문에, 그는 물론 예전보다 더 키가 크고 더 가늘어 보이고, 머리는 더 작아 보인다. 그녀 옆에 있으면 나는 앙상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고 적절한 각도로 서거나 앉아서 눈을 맞추려 해봐도 그러기에는 그녀가 너무 작다. 한 때 나는 그가 다시 결혼한다면 어떤 여자와 할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여자 친구들은 다들 내 생각과 달랐고 그중 이 여자가 가장 다르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양말> 중에서

한 때 자신의 남편이였던 남자가 재혼한 아내를 데리고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만나러 찾아 왔다.

두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헤어졌지만 아들과 자주 만나기 위해 서로 가까운 곳에 살며  왕래 하고 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이기에 그녀는 아들을 만나러 온 전 남편과 그의 새로운 아내를 위해 애써 불편한 감정을 감춘 채 서로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초대 받은 그녀의 친구들과 뒤섞여 함께 어울렸던 전 남편과 그의 새 아내는 집안의 모든 물건들을 거리낌 없이 집어 쓰는 동안 자신들의 물건들, 그다지 소중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집안 어딘가에 버렸거나 놓고 떠나 버렸다.

그녀는 오로지 아들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참고 있다.


[그날 밤 나는 그들의 숙소가 있는 시내로 가면서, 그들이 내 집에 남겼고 그때까지 내가 발견한 물건들을 챙겼다. 옷장 문 옆에 남겨진 책 한 권과 다른 어딘가에 있던 그의 양말 한 짝 그들이 머무는 건물 근처에 갔을 때 남편이 밖으로 나와 내게 차를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양말 중에서


그녀는 전 남편이 자신의 집에 두고 간 책은 여전히 왕래 하고 지내는 시 어머니의 집에 갖다 놓고 벗어 버리고 간 양말 한 짝은 길에서 만난 전 남편에게 건넨다.

전 남편은 헤어진 아내가 찾아 준 양말 한 짝을 무심히 바지 뒷 주머니에 넣고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이 양말을 왜 당신의 집에 흘리고 왔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전 남편의 뒷 주머니에 꽂혀 있던 그 양말 한 짝을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양말 한 짝이 도시 동부 베트남 거리의 안마 시술소들 옆, 이 멀고 낯선 동네에 그의 뒷 주머니에 꽂혀 있었으며, 우리 중 누구도 이 도시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곳에 함께 있었고 나는 여전히 내가 그의 배우자인듯 느껴져서 그 상황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양말' 중에서


전 남편이 흘린 양말 한 짝에 기억을 떨쳐 내지 못하는 여자와 자신의 양말을 전 부인 집에 흘렸다는 사실 조차 인지 하지 못하는 남자.

이 두 사람은 20세기 중반 미국의 문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로 뉴욕의 3부작을 시작으로 미국 20세기 현대 문학계의 거장이 된 폴 오스터와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그리고 번역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리디아 데이비스다.


[우리는 오랫 동안 서로의 배우자였고 나는 여기저기서 우리가 함께 한 삶 내내 내가 치웠던, 땀이 차고 발바닥이 닳은 그의 모든 다른 양말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다가 그 양말 속에 있었던 그의 발에 대해, 발볼과 뒤꿈치의 닳아버린 올 사이로 살이 비치던 모습에 대해 생각했다.]

                                                                                                      -양말 중에서


리디아 데이비스가 폴 오스터를 처음 만났던 시절은 그녀가 뉴욕 버나드 칼리지에 입학 했던 첫 해로  콜럼비아 대학과 버나드 칼리지, 두 대학끼리 자유로운 학점 교환 프로그램으로 개설 된 강의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는 미소 지을 때조차 늘 눈을 크게 떴고, 몸은 가만히 있지만 눈만 움직이며, 모든 것을 관찰했고,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대화가 일종의 싸움인 양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을 방어할 태세가 돼 있었다.]

                                                                                                             -'교수'중에서


리디아는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산만하고 부산스럽고 불안정했던 성격으로  가만히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지 않고  밖으로 뛰어다니며 온갖 사회문제에 대해 항의하고 시위하는 무리들 중에 끼어 있거나 남학생들과 풋볼을 하거나 터치볼을 했다.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한 눈에 반해 버린 폴 오스터는 말 수가 적고 책 읽기를 좋아 했던 청년으로 뉴저지 공립학교를 졸업 했기에 막상 콜럼비아 대학에 들어 왔을 때 WAPS부류들과 잘 뒤섞이지 못했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아버지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현대 영문학을 가르쳤던 교수로 젊은 시절, 좌파 운동으로 미국 학계를 뒤흔들며 붉은 당원으로도 활동했었다.

그는 교수가 된 이후에 좌익 성향의 학자들, 이민자 지식인들의 울타리 역할을 했는데 이들 중에 에드워드 사이드, 에리카 종, 그레이스 페일리등이 있었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엄마는 현대 영문학을 공부한 소설가로 주요 문예지에 단편 소설을 발표 했던 중견 문학가로 활동하며 여성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열성 페미니스트였다.

리디아는 자신의 부모를 무척 자랑스러워 했고 그녀의 부모는 딸에게 항상' 네가 추구 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시대의 흐름과 달리 하더라도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워라.'라고 말했다.

어떤 무리들 속에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았던 리디아는 1960년대 남자 아이들만 했던 풋볼이나 야구, 터치 볼 게임에도 과감하게 뛰어들어 함께 뛰어 다녔다.

운동 실력도 뛰어나고 공부도 잘했던 리디아는 주변 또래들의 우상으로 그녀가 카프카를 읽으면 친구들도 카프카를 읽었고 베게트의 희곡집을 읽으면 친구들도 베게트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리디아를 숭배하는 이들 중 한 명이였던 폴 오스터는 1973년 그녀를 따라 말라르메 시집 단 한 권만 손에 든 채 파리 행 배에 올라 탄다.

두 청춘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하자 마자 닥치는 데로 일을 하고 번역을 하고 글을 쓴다.

폴 오스터는 뱃사람들에게 고용 되어 새벽 시간 짐꾼으로 살고 오후 한 나절은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날랐고 밤에는 시를 썼다.

리디아는 각종 전자 제품, 식료품 , 화장품 카탈로그를 영어로 번역 하는 일을 했고 전화 교환수로 일하는 동안 틈틈이 시를 썼다.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약 7달러로 버텨도 행복했다.


[저녁으로 우리는 소시지 한 개를 먹었다. 우리에게 남은 돈이라고는 집 곳곳 쟁반에 있던 동전을 모아 거실 탁자 위에 쌓아둔 게 전부였다.]

                                                                                                             -생 마르탱


그 시절 두 청춘의 힘겨운 삶을 지켜 봤던 지인들이 '왜 이러고 사냐'고 묻자.

리디아는 '이렇게 살아도 집으로 돌아가면 부유한 부모님이 있거든.'이라고 당돌하게 대답했다.

이 말은 사실이였다.

무엇을 해도 큰 돈을 단 한번도 쥐어 보지 못했던 폴 오스터는 몸 쓰는 노동에 영 재주가 없어서 밤낮을 지새우며 써낸 시들 모두 미국 주요 문예 편집자들에게 거절 당하고 번역한 글 조차 제대로 실리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가 보내 준 돈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출판사를 차리지만 고작 팔려나간 시집은 딱 10권 뿐이였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매번 좌절하는 폴 오스터에게 리디아는 이거 읽어봐, 이거 번역해봐.

이 문장 시적이지 않아 라며 이런 저런 책들을 권하며 그에게 창작의 힘을 불어 넣어 준다.

두 사람은 프랑스에 머무는 3년 동안 유명 해외리조트로 장기간 휴가를 떠난 이들의 집을 지켜주고 청소해주는 관리인 알바로 버티며 여기 저기 떠돌아 살다가  부모가 보내준 항공권으로 무사히 미국 땅으로 돌아 온다.

두 사람은 미국으로 돌아 오자 마자 결혼식을 올렸고 리디아는 아이를 갖는다.

아버지는 딸의 행복을 위해 리버사이드에 좋은 아파트를 사주고 20대의 끝자락에 선 두 사람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남편이 어린 시절 좋아하던 음식은 콘비프였다. 이 사실을 나는 어제 친구들이 놀라 와서 음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알았다.]

                                                                                               -고기, 내 남편


언제나 활동적이였던 리디아는 아이가 태어난 후 남편을 위해 자신의 거의 모든 시간을 주방에 쏟아 부어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를 해주며 로스트비프 샌드위치, 스테이크, 양파와 피망 꼬치구이를 들고 아이와 함께 야외로 나가 함께 먹고 함께 뛰어 논다.

분명 그때까지 폴 오스터는 아내 리디아가 만들어 준 모든 음식에 열광하며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아니 아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들 다니엘이 걸음마를 하기 시작 했을 때 부터 그는  한 번 집 밖을 나가면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 여자가 여러 해 전 이미 죽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그의 외투를 솔질 하고, 그의 잉크 병을 닦고, 그의 상아 빗을 쓰다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무덤 위에 자신의 집을 짓고 밤이면 밤마다 눅눅한 지하실에서 그의 곁을 지켜야 했다.]

                                                                                                         -사랑

결국 폴과 리디아는 아들이 18개월일 때 헤어지지만 아들을 위해 리디아는 남편이 살고 있는 집 바로 길 건너으로 이사를 온다.

폴은 1981년 시 낭송회에서 만나 단 10분 만에 홀딱 반해 버린 콜럼비아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였던 시리 허스트베트와 사랑에 빠지고 곧장 법원에 이혼 소송을 신청한다.

이혼 소송 중에 약혼식을 올린 폴은 아홉살 어린 약혼자와 함께 20대 불같은 청춘을 보내며 피와 땀, 눈물로 지새웠던 파리로 신혼 여행을 떠난다.

그의 약혼자 시리 허스트베트는 파리 최고급 호텔에 머물던 중 갑작스런 편두통으로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나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지난 여름 그들은 그의 아들이자 내 아들이기도 한, 내 아들을 보러 몇 주간 이곳에 왔다. 몇 몇 껄끄러운 시간도 조금 불편하기는 했다. 두 사람은 내게 많은 편의를 기대하는 듯했는데, 아마 그녀가 몸이 아픈 탓인 듯했다. 그녀는 아파했고 침울했으며, 눈 밑이 쾡했다.]

                                                                                                                   -양말


재혼 후 폴 오스터는 뉴욕의 삼부작을 시작으로 뒤이어 출간 된 모든 책들이 호평을 받으며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항상 어딘가 아팠던 그의 아내 시리는 콜럼비아 대학원 박사 논문을 통과 하며 교수 임용직을 제의 받는다.


[해변에서 집까지 천천히 걸어와서 샤워를 했고 저녁이 되면 깔끔하게 차려 입고 내 아들의 손을 양 쪽에서 하나씩 잡고 데리고 나가곤 했다.]

                                                                                                                    -양말

아들이 18개월 때 집을 떠나버린 아버지 폴은 가끔씩 휴일 날이면 새 아내와 함께 찾아와 아들을 이런 저런 곳에 데리고 다녔다.

철이든 아들 다니엘은 조금씩 이런식으로 자신에게 아버지 행세를 하려는 태도를 싫어했고 항상  두 부자 사이에 끼여 드는 새 엄마를 증오했다. 


십대 아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동네 무시 무시한 부랑아들과 어울리다 마약 밀수를 하는 범죄 집단에 소속되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이와 단짝이 되어 술과 마약에 찌들린채 수시로 새 엄마를 협박했다.

아버지 폴은 이런 아들을 사악한 악마로 자신의 소설(오라클 나이트)에 묘사 할 뿐 아들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새 아내와 새로 낳은 딸만 걱정했다.

추상 화가랑 재혼한 리디아는 뉴욕 인근에 오래전 학교 건물로 쓰였던 곳을 개조해서 각자의 작업실로 꾸며 놓고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두번 째 남편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리디아는 첫째 아들에게도 그렇게 했듯이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당신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떤 것에 우선 순위가 있다고 말하고 그냥 그것을 하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하나만이 아니고, 둘이나 셋만도 아니다. 여러 일에 우선 순위가 있을 때 그중 어느 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까?]

                                                                                              -우선 순위


리디아 데이비스의 삶의 우선 순위는 무엇이였을까?

20대 청춘 시절에 만나 불 같은 사랑을 했던 폴 오스터였을까?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핏줄인 아들 다니엘이였을까?

두 번째로 찾아 온 남편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낳은 또 한 명의 핏줄이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이였을까?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러다 아기가 잠들면 아기가 잘 때만 할 수 있는 일을 가장 중요한 것부터 시작해서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순위


리디아 데이비스는 남편과 헤어진 후 필사적으로 번역에 매달렸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두 아들을 양육하는데 자신의 모든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이 와중에도 이따끔씩 찾아 오는 바로 길 건너에 살고 있는 전 남편 부부의 저녁식사나 기타 등등의 편의까지 챙겼음에도 두 부부는 매번 새 책을 낼 때 마다 길 건너 자신들의 삶을 예의 주시 하고 있는 무서운 십대 아들 다니엘을 등장 시켰다.


[그들이 떠난 뒤, 두고 간 다른 몇 가지 물건들, 아니 정확히 말해 그의 아내가 내 재킷 주머니에 놓고 간 물건들-빨간 빗, 빨간 립스틱, 약병-을 발견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이 세 물건은 하나의 작은 무리를 이루어 부엌 진열대 여기저기에 둘러앉아 있었고, 나는 약은 중요한 것일 수도 있으니 그녀에게 보내려고 생각했지만 계속 잊어버리다가 결국 머지 않아 그들이 올 테니 다음에 올 때 주려고 서랍 속으로 치워버렸으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다시 온통 지쳐버렸다]

                                                                                                              -양말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할 당 된 24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리디아 데이비스는 거창하고 거대한 서사 구조를 갖춘 글을 쓰는데 집중 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로지 생계를 위해 번역에 매달렸고 자잘하게 남은 여분의 시간 동안에야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쓰기 시작 한 글은 두 세 문장으로 끝나기도 하는데 첫 제목 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새뮤얼 존슨은 분개한다:

스코틀랜드에 나무가 그토록 적다는 것에.


이렇게 한 문장을 쓰고 남은 다른 시간에 그녀는 <새해 결심>을 한다.


-마침내 인생의 중반 쯤에 이르면, 당신은 모든 것이 결국 무라는 걸, 성공도 결국 무라는 걸 알 만큼 똑똑해진다.


1947년 생인 리디아 데이비스는 인생의 중반을 훌쩍 넘겨 버린 후 이렇게 자잘하게 남은 여분의 시간 동안 쓴 글이 400여편에 달해서 이를 분류하고 편집한 글들이 2013년 영국 맨부커상을 수상한다.

그녀의 스타카토 같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글쓰기 기법은 이전에 어느 누구도 시도 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글을 두고 단어와 단어 사이의 리듬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언어의 마술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 년 동안 다양한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 했던 리디아는 번역 중인 작가의 이력을 자신의 언어로 재 창작을 하거나 때로는 그를 자신의 앞, 문장 속에 초대해서 인터뷰도 하고 저녁 식사도 차려 준다.

이들 중에 신경 증세에 시달렸던 반 세기 전 세상을 떠난 작가 카프카가 줄창 편지에서만 사랑한다는 말을 했던 편지 연인 밀레나를 위해 요리를 한다.

[사랑하는 밀레나가 올 날이 다가오자 절망이 나를 가득 채운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대접할지 정하는 걸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생각에 아직 달려들지 못한 채 파리가 등불 주위를 빙빙 돌듯, 주위를 날아다니며 내 머리만 태우고 있다.]

                                                                                              -카프카 저녁을 요리하다 


이 요리를 차려 주는 사람은 카프카 일까? 

아니면 전지적 시점으로 카프카를 바라보고 있는 작가 리디아 데이비스일까?

작가로 크게 성공한 후 폴 오스터는 다양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작가 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말라르메, 카프카, 베게트 등의 작가들을 거론 하며 '솔직히 전 아내가 이 책들을 읽어 봐라, 여기 쓰인 문장들 제대로 해석해 봐라'라고 권해서 읽었는데 그 시절엔 어찌나 그녀가 강압적으로 강요 했던지 짜증이 확 올라 오는 걸 꾹 참고 읽거나 번역했죠.'라는 말을 했다.

20대 시절 리디아 데이비스는 주의력이 산만하고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성격이였는데 이를 두고 폴 오스터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물론 그녀도 번역을 했고 이런 저런 글을 썼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완성 한 게 없었습니다. 항상 어수선했고 어설펐는데 어떤 날은 오늘 반드시 말라르메 시 전체를 외우겠어! 라고 외치고는 외우지 못했죠. 또 다른 어느 날은 '글을 쓰고 있어.'라며 타자기 앞에 앉았는데 종이 한 장에 딱 두 세 문장이 적혀 있었고 그 다음 장엔 아무 문장도 없는 백지, 그러니까 어떤 문장을 시작하면 스토리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폴 오스터


폴 오스터의 이 말을 똑똑하게 기억했던 당시 뉴요커 기자가 2013년 리디아 데이비스가 맨 부커상을 수상 하자 마침내 그 두 문장이 반 세기 만의 한 권의 책으로 완성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글을 처음 읽었던 당시에 도대체 이 글은 이야기 인 것인가?라며 이런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이름을 다시 한번 내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farrar straus and giroux로 일명 FSG약자로 통용되는데 이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주요 작품들은 퓰리처 상, 내셔널 도서상, 노벨상 등을 수상한 이력이 있거나 이런 상을 받게 될 잠재적 재능을 가진 동시대 아주 뛰어난 작가들의 책들만 출판하는 출판사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책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영역판으로 새롭게 번역된 저자의 이름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바로 대작 중의 대작인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번역자로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1,2권 합본판의 번역서 제목이 <Swan's way>로 번역되어 다시 한번 이 책을 재독 하게 만들었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간간히 뉴요커 팟캐스트에 나와 자신이 직접 선별한 주요 단편들이나 시를 읽어 주는데 나는 그녀가 소개한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으며 사무엘 베게트의 희곡에서 눈부신 언어의 유희와 향연을 맛보게 되었고 카프카가 남긴 다양한 잡 글과 편지 글 속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카프카의 모습까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두툼한 단편적인 글들을 첫 장 부터 읽게 되면 온갖 종류의 재료들을 만나게 되는데 필시 시중에 출간 되고 있는 대중적인 잡지로 다양한 연령대들의 목소리가 담긴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특정 화자의 시점이나 서술이 뚜렷하지 않은 그녀의 문장에는 평범한 일상 부터 시작해서 결혼과 육아, 사랑과 이병, 투병과 상실, 애도와 슬픔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겼던 위인들의 뜻밖의 사적인 모습까지 읽을 수 있다.

어떤 글은 일기처럼 끄적였거나 어떤 글은 심리 분석을 했고 어떤 글은 보고서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문장을 원문으로 읽어보면 시적인 음률이 있다.

앞 서 언급한

-새뮤얼 존슨은 분개한다:

스코틀랜드에 나무가 그토록 적다는 것에.

이 글의 원문은

Samuel Johnson Is Indignant:

that Scotland has so few trees.

단어와 단어 사이의 리듬, 문장의 구조가 지닌 음악성, 중의적인 표현으로 쓴 이 문장 속엔 새뮤얼 존슨이 평생 동안 무엇에 매달리며 자신의 인생을 바쳤는지 그녀는 단 몇 단어로 정의했다.


[나는 대체로 '실험적이다'라는 평가를 거부한다. 그 말은 보통 전통에서 벗어난 형식의 소설이나 시. 혹은 어떤 형식이든 당혹스럽거나 기이하고 낯설게 보이는 것들에 반사적으로 붙이는 딱지다.]

                                                                                                           -리디아 데이비스


전 남편 폴 오스터는 그녀가 어떤 문장을 완성하면 뒤이은 스토리로 이어서 완성하지 못했다고 회고 했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생계를 위해 번역을 하다 원작자가 남긴 편지 글을 읽기도 했고 그러다 자신의 글을 쓰는 작업을 동시에 하면서 남편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까지 해야 했고 아이까지 돌봐야 했다.

그러기에 이토록 오랜 세월 끝에서야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완성 할 수 있었다.


[나는 백 이십 년 쯤 오래된 사전을 갖고 있는데 올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위해 이 사전을 사용해야 한다.]

                                                                                       -오래된 사전


부커상을 수상하고 그동안 여러 스타일로 쓴 책들이 잇따라 출간 되는 동안 리디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언어로 번역된 그 책을 옆에 놓고 번역된 언어를 학습하며 사전을 뒤적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오늘 책장에서 사전을 꺼내면서 나는 내가 어린 아들보다 이 사전을 훨씬 더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전을 다룰 때마다 나는 사전이 다치지 않게 최대한 조심한다. 그러니까 내 주된 관심은 사전을 다치지 않게 하는데 있다.]

                                                                                                      -오래된 사전


항상 활자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던 엄마의 시선을 벗어나 버린 아들 다니엘은 무시무시한 마약 갱단 두목의 돈을 훔쳐서 감방 살이를 하고 몇 배로 돈을 갚아 겨우 풀려난다.


[왜 나는 아들을 적어도 오래된 사전만큼 잘 대우하지 않을까? 어쩌면 사전은 딱 봐도 부서지기 쉽게 보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책장 모서리가 바스러 질 때는 모를 수가 없다.]

                                                                                                           -오래된 사전

약물 남용보다 더 무서운 행동을 서슴치 않게 했던 아들 다니엘은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떠돌이처럼 살다 한 때 갱단원이였던 친구랑 함께 거주하고 잠시 집을 나선 사이 친구는 마약 조직원에게 살해 당하고 이후 다니엘은 좀도둑 스러운 생활을 청산하고 무대 공연 예술가로 활동하며 결혼을 하고 새 삶을 시작한다.

[나는 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만, 늘 알지는 못한다. 무엇이 필요한지 알 때조차 그걸 늘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매일 여러 번 나는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못한다. 내가 오래된 사전을 위해 하는 일의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는 내 아들을 위해서도 할 수 있을 텐데..]

                                                                                                             - 오래된 사전

아들 다니엘은 여러 환각 증세에 시달리며 정신 분열증세를 보이다 10개월 된 자신의 딸에게 헤로인 성분의 약물을 주입해서(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밝혀지진 않았음'조사 당시 자신은 약물 흡입으로 혼수상태였다고 증언함) 아이는 혼수 상태에 빠져 병원에 입원한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딸의 학대와 살해 혐의로 체포되어  브루클린 법원에 거액의 보상금을 내고 보석으로 풀려 나자 마자 사흘 만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지하철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머리, 심장

심장이 운다.

머리가 심장을 도우려 애쓴다.

머리가 심장에게 상황을, 다시,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기 마련이여. 모두 사라지는 거야.

하지만 지구도, 언젠가는 사라져.

그러자 심장은 조금 괜찮아진다.

그러나 머리의 말은 심장의 귀에 오래 남지 않는다.

심장은 이 일이 너무 낯설다.

그들을 되찾고 싶어, 심장이 말한다.

심장에게는 머리밖에 없다.

도와줘, 머리, 심장을 도와줘.

여기, 반세기 동안 문장을 이어나간 이 책에 쓰여진 글들은 어떤 불안, 강박, 위압, 공포 그리고 소통의 장벽처럼 불쑥 불쑥 나타날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작가의 이야기 인 것 같고 어떤 이야기는 지난 시대를 살다 간 이들의 이야기 처럼 읽혀지다 돌연 질문도 없이 대답만 있는 페이지를 넘기다 프랑스어 초급반 강의록까지 읽게 된다.

어떤 형식에도 없는 이 책에 실려 있는 글에는 가공되지 않고 세공 되지 않은 단어들이 만나서 말도 안되는 감정으로 마무리 된다.


이 책은 어떤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좋다.

앞 페이지를 읽다가 뒷 페이지를 읽어도 좋고 재차 읽었던 페이지를 읽어도 좋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형식에도 없는 말도 안되는 문장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이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헬렌은 인내심이 대단하기 때문에 빛과 어둠 정도 밖에는 보이지 않을 때도 저녁에 먹을 감자를 천천히 깎곤 했는데, 손 끝으로 더듬으며 감자 싹을 찾아내 감자 칼로 하나씩 파냈다.]

                                                                   -헬렌과 바이: 건강과 활기에 대한 연구 중에서


읽고 있는 이야기의 끝을 당장이라도 알아 버리겠다고 달려들지 않고 차분히 하루에 한 장 씩 며칠에 한 장씩 읽다 보면 대담하면서도 독특한 문장의 맛 언어의 묘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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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07-07 2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가 이혼하고 재혼하고 뭐 이런 이야기만 아주 조금 어디선가 들었는데, 리디아 데이비스 이런 훌륭한 작가가 전부인이었군요! 게다가 그 아들은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불안의 변이˝ 읽어봐야 겠습니다

2023-07-07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7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7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7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9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록비 2023-07-07 2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르고 지나칠 뻔 했네요.

scott 2023-07-07 23:36   좋아요 1 | URL
초록비님
이 책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되능 ㅋㅋㅋ
주말 무조건 시원하게 ^^

은하수 2023-07-08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 사진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글 읽다 리디아 데이비스라는 대어를 낚은 느낌입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책 저도 도전해봅니다
감사합니다^^

scott 2023-07-08 11:28   좋아요 1 | URL
이 책 아무 페이지나 읽어도 좋습니다
은하수님 주말
무조건 시원하게 ^^

2023-07-09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08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08 1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 그럼 저 맨 앞 묘사는 시리 허스트베트의 모습인 건가요?? 셋다 안 읽었는데 scott님 고견엔 누구 손 들어주고 싶으셔요?? 순위 매겨 주신 순서대로 하나씩 읽어보려구요 ㅋㅋㅋ(나쁜 취미)

2023-07-08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7-09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 첫번째 부인도 작가였군요 이런 이야기 처음 알았네요 예전에 폴 오스터 소설 보기도 했는데... 두 사람 아들은 죽고 말았군요 리비아 데이비스가 글을 죽 써서 다행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 가까이 살지 말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지나간 일이어서 바꾸지 못하겠지만...


희선

2023-07-09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냥이 2023-07-18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폴 오스터는 알고 있었지만 워낙 유명하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중 한명이기도 하구요 근데 리디아 데이비스는 몰랐네요 전와이프의 삶도 그녀의 생각도 그녀의 존재는 생각도 해본적이 없었는데... 읽어야할 책이 또 생겼어요.. 아 역시 스캇님 글은 알지 못하는 내용들이 가득이라 재미있어요 감사해요

scott 2023-07-23 23:03   좋아요 0 | URL
폴 오스터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신간 나옵니다
이분도 마지막 끝 자락 ㅎㅎ
동료 작가들 전부 떠났고
아들도 그렇게,,,,

희선 2023-08-08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cott 님 또 축하합니다 이달에도 책 즐겁게 만나시고 글도 쓰시기 바랍니다


희선

scott 2023-08-09 10: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희선님도 오늘 하루 무조건 시원하게 보내세요 ^^
 
피나 바우쉬 - 끝나지 않을 몸짓 현대 예술의 거장
마리온 마이어 지음, 이준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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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현대 무용에 노래와 연기, 대사를 집어 넣으며 무대 예술의 혁명을 일으킨 피나 바우쉬는 2009년 6월 30일, 암 진단을 받은 지 단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암 진단을 받기 5일전 2009년 6월 25일, 부퍼탈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 될 새로운 작품인 앙상블 무대를 준비 하고 있었다.

그날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로 건넸던 피나 바우쉬는 어느 누구에게도 작별 조차 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예순 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천재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를 위해 부퍼탈 시민들은 오페라 하우스 앞에 꽃을 놓고 촛불을 켰다.

그녀의 무용단 탄츠테아터는 묵묵히 예정된 폴란드 초청 공연을 떠났다.

피나 바우쉬가 서른 여섯 해 동안 탄츠테아터를 이끄는 동안 그녀가 창작한 춤의 언어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매년 새로운 작품을 선 보였던 피나 바우쉬는 사생활도 없이 오로지 연습, 안무 구상, 공연, 투어로 이어지는 삶을 살다 갔다.


1913년 5월 29일,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처음 초연 되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은 음악의 시작과 함께 무대 위에 무용수들이 등장 하자마자 관객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62년의 세월이 흐른 후 1975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공연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무대 바닥에 토탄이 두텁게 뿌려져 있는 땅 위에서 붉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은 무자비 할 정도로 난폭한 감정을 드러내며 서로를 탐닉한다.

각자가 선택한 여성과 남성은 죽일 태세로 서로를 쫓아 다니며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광폭의 움직임으로 무대 전체를 뒤흔들어버린다.

탄츠테아터가 평단과 관중에 인정 받게 된지 4년 만에 피나 바우쉬는 앞선 작품들의 고정된 고전적인 몸짓을 전부 털어 내버리고 확고한 스토리도 음악도 무대 디자인도 없는 모호한 무용수들의 몸짓을 통해 시적인 이미지,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무대에서 펼쳐 보인다.


'바우쉬는 자기 자신, 무용수, 관객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로 마법을 걸 줄 안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 부터 더 이상 독일 무대에 없었다. 피나 바우쉬는 연극의 모든 부문으로 돌격해서 이를 밀쳐 넘어뜨린다.'


아잇적에 우리는 숨박꼭질 놀이를 했지.

너 우리 놀이 아직 기억하니

모두 숨고, 한 아이는 기다려야만 하지

나무나 벽에 얼굴을 대고

손은 눈 위에, 마지막 아이가

자리를 발견할 때까지, 그리고 눈에 띄는 아이는

술래랑 경주를 해야만 하지

걔가 먼저 나무에 가 서면, 걔는 자유고

그렇지 않으면 걔는 그 자리에 서 있어야만 하지

마치 나무나 벽을 손바닥으로 치는 게

그 아이를 묘석처럼 땅에 못 박기라도 한 듯이.

그 아이는 마지막 아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움직이면 안 돼, 그리고 이따금 마지막 아이가

너무 잘 숨은 통에 발견되지 않기도 하지.

그러면 돌처럼 굳어 거기 서 있는 아이들 모두,

각자 자기 자신의 기념비가 되어, 마지막 아이를 기다리지.

그리고 이따금 한 아이가 죽는 일이 생기기도 해

그리고 개가 숨은 곳은 발견되지 않고, 그 어떤

배고픔도 열외로 그 아이를 발견한

죽음에서 그 아이를 끌어내지 못하지

망자들은 더 이상 배고픔이 없으니,

그러면 부활은 취소되고, 술래는

모든 돌을 네 번 씩 들춰 보았지.

-하이네 밀러의 극작품 <시멘트> 중에서


나는 피나 바우쉬가 안무한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본 이후로 <봄의 제전>, <반도네온>,<왈츠>, <카네이션>,<창문 닦이>, <콘탁트호프-14세 이상 신사숙녀>,<물>. <천지>,<러프 컷>,<보름달>,<대나무 블루스>, <....돌에 낀 이끼처럼, 아,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작품을 차례 차례 보는 동안 그녀가 무대에서 보여 주는 춤의 언어의 공통된 스타일을 알게 되었다.


피나 바우쉬가 안무 한 무대 위의 무용수들은 연극적인 요소를 도입해서 노래 하고 대화하며 관중들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무대에서 무용수들이 광란의 몸짓을 하는 동안 관중들은 무대 디자인이나 음악 따위는 눈과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무용수들의 몸짓을 통해 덧없는 사랑과 행복의 쓴 맛을 느끼며 산산 조각 나버린 청춘 그리고 망상의 현실을 마주 하게 된다.

무용수들은 서로에게 달려 들고 멸시하고 괴롭히며 밀치다가 무대 위를 두 다리와 두 손으로 기어 다닌다.

허공 속에서 광란의 몸부림을 치던 이들은 울고 웃고 노래하다가 무대 뒤로 사라져 버린다.

관중들은 도대체 이런 춤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보았을까?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성 안으로 이끌고, 다른 사람들이 뒤따른다>라는 작품을 초연 할 당시 이 무대를 본 관객들 모두 폭발해 버렸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한 대사를 인용한 이 무대에서 무용수들은 아무 움직임 없이 바닥에 누운 채, 마치 악몽을 꾸기라도 한 듯, 움찔 거리기 만 한다.

야유를 내지르는 관객들을 향해 피나 바우쉬는 이렇게 외쳤다.


'보고 싶지 않거든 집에나 가시고 우리가 작업 할 수 있게 내버려 두세요.'


안무의 틀을 벗어 던진 이 무대는 시간이 서서히 흐르면서 무대 전체에 물을 퍼붓고 꽃가루를 뿌리고 와인 잔을 부딪치며 담배 연기가 피어 오른다.


도대체 춤은 무엇을 보여줘야 하고, 관객은 어떤 시선과 태도로 바라 봐야 할까?


'최상의 표현 방식은 노래일 수도 있고, 문장이나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 상관 없어요. 모든 게 가능하답니다.'-피나 바우쉬


피나 바우쉬는 끈질길 정도로 자신이 창작한 춤의 언어를 밀고 나가며 관객들이 스스로 무언가 발견하기를 원했다.

이는 관객들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피나 바우쉬가 이끄는 탄츠테아터에 소속된 무용수들에게도 적용 되었다.


'그녀의 안무에는 확실함이란 없습니다. 제가 무언가 시작하면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무대에서 춤을 추다 보면 두려움이 밀려 들다가 환희로 가득 차 오르다가 돌연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을 추고 있다는 건 내 안의 그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겠죠.'


피나 바우쉬는 무용수들을 선발 할 때 나이, 국적, 소속되었던 학교, 무용 단체에 대해 묻지 않았고 키와 몸무게도 상관이 없었다.

대신 굉장히 정확한,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

이런 질문들은 한 작품을 공연 하고 나면 약 백 오십 개 정도 쌓이는데 어제 공연 했던 동작이 오늘 공연에서 취소 되고 전혀 다른 동작으로 뻗어 나가면서 세세한 걸 발견하고 조합하고 그러다 폐기 하면서 미세한 물의 파동처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나는 절대로 앞에서 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뒤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부분들을 가지고 작업했어요. 그것들은 서서히 커지고 조합되고 밖으로 자라나죠. 저는 절대로 백 퍼센트 만족 했던 적이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철저하게 모든 걸 뒤집고 또 뒤집어버립니다.]


1975년부터 1980년 까지 피나 바우쉬가 안무 한 모든 무대를 직접 구상하고 디자인한 롤프 보르칙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창조적인 무대로 피나 바우쉬의 무용 언어를 확립 시키며 춤의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펼쳐 보였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에는 리듬과 타이밍, 대조의 삼 박자가 정교한 콜라주 처럼 맞물리는데 앙상블 장면에서 독무가 뒤이어 나오다가 분주한 몸 놀림의 무용수들의 춤 사위 뒤로 대화가 오고 간다.

무용수들이 무대 위를 종횡무진 하며 뛰어다니는 동안 관객들은 자신의 유년기, 청년기, 노년기로 이어지는 삶의 환희와 고통을 골고루 맛보게 된다.

귀에 익숙하지 않은 낯선 음악과 함께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 소리가 몸짓의 언어와 부딪치는 순간, 무대 위의 세상은 섬뜻할 정도로 두려우면서 위협적이다.

이런 춤, 이런 공연을 보고 나면 한 동안 몸 속 전체에서 끌어 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인해 이따금씩 악몽을 꾸게 된다.

불편한 장면, 불길한 미소,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여주는 피나 바우쉬는 관객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생존자들에게는 한순간이 있다. 붕괴 직전인 건물들 사이, 외줄 위에서 그들은 축제를 즐긴다. 안무는 죽음의 무도의 전통 안에 있다.'-미셸 푸코

몽환적인 아름다움, 꿈 속 같은 편안함, 동화 속의 행복한 결말을 폐기 처분 해 버린 피나 바우쉬는 차갑게 고통 받고 있는 인간의 심장 속을 파헤쳐 보이며 끔찍한 인간의 숙명과 원초적인 욕망의 불기운을 관객들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인간은 무엇에 기뻐하며 웃고 울며 살아갈까?


1984년에 초연된 작품 <산에서 통곡 소리 들리나니>는 마태 복음 2장 18절의 구절로 흙바닥을 누비는 무용수들은 안개에 휩싸인 채 앞을 보지 못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무대 곳곳에서 풍선들이 터지고 수영모에 수영복을 입고 고무장갑을 낀 이들의 흉칙한 모습이 보인다.

남자는 여자를 때리고 여자는 다른 여자의 머리 채를 잡아 당긴다.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동안 무용수들 몸 곳곳은 멍 투성이가 되면서 어느 덧 이들의 머리카락은 회색빛으로 변하며 노인의 모습이 된다.

마지막 무대 하늘 위에 둥그렇게 뜬 종이 달을 향해 한 노인이 숨 가픈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여보세요'


그녀가 단독 안무 한 마지막 작품 <....돌에 낀 이끼처럼, 아,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무대는 어떤 이미지도 없고 최소한의 소도구들만 등장한다.

끝없이 펼쳐진 소금 풍경들은 소름 끼칠 정도로 관객들 시선에 차가운 빛으로 일렁 거린다.

'아름다운 것들은 뭔가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다니, 희한하죠.'


그녀의 춤의 언어에는 엄마가 아이에게 스프를 떠 먹이고, 두 연인은 다정하게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며 케이크에 꽂혀 있는 촛불을 끄고 노년의 부부는 다정하게 서로의 손을 맞 잡고 침대에 누워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어떤 제목도 달고 싶어 하지 않은 채 매년 새로운 작품을 작업 하며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나라와 협업을 하며 연습-공연- 투어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 부었다.

그녀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신이 창작한 무용 언어를 전파 했고 찬사와 비판을 한 몸에 받으며 때로는 부드러우면서 고집스러웠고 과격할 정도로 엄격할 정도로 어떤 부담감이나 요구도 견뎌냈다.



'나는 지칠 겨를이 없습니다. 경험하고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요. 어제 보다 더 많은 곳을 보며 더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인생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답니다

.-피나 바우쉬(194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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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05-08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나 바우쉬 예전에 영화 ˝그녀에게˝보고 처음 알았는데 따끈따끈 새 책이 나왔네요 오호~마구 읽고 싶게하는 스콧님 리뷰😉

2023-05-08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8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8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8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5-08 0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암이라는 걸 알고 닷새 만에 죽다니... 그럴 수도 있군요 암이라고 하면 말기라 해도 한두 달 길면 석 달 남았다고 할 것 같은데... 흔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불꽃처럼 살다 갔다는 느낌이 듭니다 피나 바우쉬 안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네요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자유롭고 상상력이 넘친다고 해야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많이 좋아해도 싫어하는 사람은 뭐 저런 게 있나 할 듯합니다 피나 바우쉬는 그런 거 마음 쓰지 않았겠네요


희선

2023-05-08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3-05-08 12: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술 음악에 이어서 이제는 무용까지~! 스콧님의 지식 범위는 무한대입니다 ㅋ
피나 바우쉬도 엄청 대단한 분이네요. 저런 열정이 있어야만 자기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나봅니다~!!

scott 2023-05-09 15:34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ㅋㅋ
그냥 제가 좋아하는 것만 읽고 보고 체험해보고 ㅋㅋㅋ

열정의 불이 너무 강렬해서 이분은 개인 사생활이 없었습니다 ^^

책먼지 2023-05-09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콧님 이런 글은 진짜 돈받고 파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미셸 푸코 인용해주신 부분과 그 아래 단락들이 확 와닿았어요.. 무언가에 미쳐서 거기에 온 삶을 다 바치고 떠난 사람의 기백이 느껴집니다!! 한겨레 주말판에서 이 책 소개 읽고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진짜 완전 읽고 싶어졌어요!!!

2023-05-09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1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1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2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3-06-08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기 기다란 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춤을 추는 공연은 실제로 보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표현을 한 것일까? 궁금해진달까요? 특히 단독 안무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니...
암튼 이 글도 당선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scott 2023-06-11 11:14   좋아요 1 | URL
저 공연은 피나 작품중에 유명한 작품!
실제로 보면 피나 공연은 맘이 심란해 집니다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춤들 ^^

나무님에게 유월 행운 가득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희선 2023-06-11 0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cott 님 축하합니다 췌장암은 바로 알기 어렵고 거의 말기에야 안다고 하죠 열흘도 못 살고 죽다니... 이제는 암이 낫기도 하지만, 여전히 암으로 죽는 사람 많은 듯합니다


희선

2023-06-11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의 시간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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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북동부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내 의중은 이렇다:그녀는 떠돌이 개처럼 오직 그녀 자신에 의해서만 인도되었다. 나 역시 이런 저런 실패 끝에 나 자신으로 축소되었으나, 적어도 나는 세상과 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어느 날 우연히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거리에서 스쳐 지나간 어느 북동부 출신 여자의 얼굴 속에서 모멸감으로 파멸 된 삶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우연히 마주친 그녀, 클라리시는 오래 전 자신이 살았던 그곳 북동부, 그곳을 떠올리며

자신의 몸 속 깊숙한 곳에 고인 응고물 같은 걸 느끼게 된다.


[나는 이 순간 조금은 겸허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앞으로는 너무도 외적이고 분명한 서술이 독자들을 침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생명력 넘치는 피가 천천히 흘러나와 금세 젤리처럼 출렁거리는 덩어리들로 응고될 수도 있다. 이 이야기가 언젠가 나 자신의 응고물이 될까?]


어느 누구에게 어떤 도움 조차 받지 못했던 한 여자의 삶,사악하고 무자비한 세상에 내던져 버렸던 그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들은 클라리시의 심장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버린다.

그녀는 알고 있다. 화려한 대도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북동부 출신의 여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빈민가의 공동 주택에, 여럿이 함께 쓰는 방에서 하루 종일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하는 여성들, 차라리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리는 게 더 나은 삶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저항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클라리시는 타자기 앞에 앉아 알지 못하는 여성,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여성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고 북동부 여자에 관한 글을 쓰는 동안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쉴 새 없이 종이 앞 뒤를 오고 가며 중얼거리듯 끄적이고 있다.

'내가 이 북동부 여자에 대해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아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그건 결국 내가 그녀와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브라질 북동부 여자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둥둥둥, 멀리서 울리는 북소리

한 여인의 지친 얼굴이 거울 속에 비쳐 진다.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 되는 순간, 북소리는 멎을 것이다.

북동부 오지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구루병을 갖고 태어나 두 살 때 열병으로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고 단 하나 뿐인 고모와 함께 살게 된 아이의 운명은 신체 곳곳이 휘어지고 바스러지는 뼈 마디처럼 매 순간 죽음을 면치 못할 상태에 처한다.

마침내 고모가 죽자 그녀는 손지검에서 해방 되어 북동부를 벗어나 모두가 동경하는 환상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에 왔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인간의 모든 걸 탐내며 뜯어 먹는 살 찐 쥐들로 가득 찬 탐욕과 욕망의 소굴이였다.

그녀는 무덥고 습한 기후 속에서도 일 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살며 현기증이 날 정도로 굶주려서 뼈는 점점 더 휘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음을 믿지 않았고 힘겨운 노동을 마치고 나면 자신의 어둡고 축축한 방으로 돌아와 누군가 버린 신문지 조각들에 적혀 있는 글을 읽으며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 낸다.

거대한 도시, 화려한 불빛 너머 그늘 진 곳에 그녀처럼 살고 있는 이들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많다.

가난한 가정에서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말을 배우기도 전에 고아가 되어 험난한 세상 속으로 내던져진 삶일 지라도 그녀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자신은 타이피스트고 처녀고, 코카콜라를 좋아한다며 매일 주문을 외우듯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 북동부의 흙냄새가 나는 남자 친구라는 존재를 만나며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행복을 꿈꾼다.


'돈이 최고 유산이지. 난 앞으로 큰 부자가 될 거야.'

그의 이름은 '올림피쿠 지 제수스 모레이라 샤베스',아버지 없는 아이로 태어나 의붓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는 동안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오로지 여자들을 꼬드기는데 필요한 기술만 익힌 남자를 사랑하는 마카베아.

그녀가 태어나던 해 엄마는 성모님께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남으면 '선한 죽음의 성모님'이라는 의미가 담긴 '마카베아'라 짓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올림피쿠는 그녀의 이름이 마치 피부병처럼 들릴 뿐 금속 공장 노동일로 몇 주 동안 돈을 모아 멀쩡한 자신의 생니를 뽑아서 번쩍이는 금니를 박아 넣고 정치인들의 거리 연설을 쫓아 다니며 그들의 자리에 올라 서겠다는 헛된 야망을 보인다.

그는 단 한 번도 마카베아를 위해 돈을 쓰지 않고 마카베아는 그를 위해서 라면 무엇이든지 해준다.

올림피쿠는 모두가 동경하는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남부 카리오카 출신의 마카베아의 동료 글로리아를 보자 마자 단 번에 마카베아를 차 버린다.

예고도 없이 이별하게 된 마카베아는 우는 법을 잊은 채 웃음을 터트리지만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인 친구 글로리아에게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한다.

어느 장군의 이름을 딴 거리에 살고 있는 글로리아의 집에는 전화기도 있고 다양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음식과 꽃들로 가득 차 있다.

오로지 출세 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올림피쿠가 부자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 그동안 몸이 아프고 마음이 불편해도 단 한 번도 말로 표현하거나 내색을 하지 않았던 마카베아는 글로리아가 준 값비싼 카카오로 만든 초콜릿 우유를 먹고 탈이 나버린다.

그녀는 평생 동안 딱 한 번 먹어 본 비싼 음식을 토하는 게 아까워서 병원에 가지 않고 몸져 눕고 결국 가난한 이들만 치료하는 게 지긋지긋한 의사에게 폐결핵 초기 진단을 받는다.

그 병이 어떤 병인지도 모르는 마카베아는 치료비를 대준 친구 글로리아에게 자신의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난 세상에서 혼자이고 난 아무도 믿지 않아요.모두가 거짓말을 해요. 때론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그러죠. 난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진실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진실은 꼭 내가 혼자 일 때만 찾아 오는 거예요.'


​마카베아는 천상의 트럼펫 소리 같은 어느 점술가의 말에 심장이 요동친다.

자신의 과거, 가난하고 학대 받고 버림 받았던 시절의 모습을 점술가의 입으로 생생하게 듣고는 자신의 미래를 향해 탐욕스러울 정도로 집착해 버린다.

마카베아의 삶에 희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비틀거리며 점쟁이 집에서 나와 황혼 녘의 어두워져 가는 골목에 섰다- 황혼은 누구의 시간도 아니다. 하지만 마치 하루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것처럼 흐려진 그녀의 시야는 핏빛과 거의 검정에 가까운 금빛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그녀를 맞이한 대기는 너무도 풍요로웠고 밤의 첫 찡그림은 그래, 그랬다. 깊고도 화려했다. 마카베아는 현기증을 조금 느끼며 서 있었다. 그녀의 삶은 이미 변했기에 눈앞의 길을 건너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거리의 수 많은 여인들 중에서 자신의 눈에 포착된 그녀의 삶의 마지막 순간, 독자들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세상 모든 이야기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 일까?'


머나먼 우크라이나에서 건너온 가난한 유대계 이민자 출신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엄마는 소련이 우크라이나 땅을 피로 물들였던 시기에 군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매독에 감염되었다. 

어떤 의학적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시절에 클라리시의 엄마는 주변에서 권유한 민간요법으로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면 매독이 치유 될 것이라는 말에 세번째 아이를 임신한다. 1920년 12월 10일 소련이 모든 걸 빼앗아가 버린 땅에서 굶주림 속에  살아있는 모든 걸 잡아 먹었던 시절 영하 20도의 날씨에 세번째 아이 클라리스를 출산하자마자 한 밤중 고향 땅을 떠나 숲으로 숲으로 들어갔다.

출산 하자 마자 갓난 아이를 안은 엄마는 한쪽 팔이 마비된 상태로 걷고 또 걸어서 국경을 넘어 난민선에 올라타 머나먼 브라질 땅으로 건너 간다.


'나는 그런 목적으로 잉태 되었지만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다. 그런 죄 의식이 내 몸 속 깊은 곳에 박혀 있다. 부모님은 내게 특별한 임무를 주었으나 나는 그들을 실망 시켰다. 내 부모님은 아무런 소용 없는 내 탄생을 용서했고 그들의 희망을 배반한 나를 용서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어린 시절 내내 나는 기적을 소망했다. 내가 태어났으니 이제 어머니를 낫게 해 달라고.'

-1968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인터뷰 중에서

클라리시 가족이 브라질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은 브라질 북동부 지방 바이아주의 알라고아로 1920년대 이 곳은 국가의 행정 통치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척박한 땅이였다. 클라리시 엄마는 온 몸이 서서히 마비되는 고통 속에서도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브라질 북동부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을 쓰고 있는 사람, 신은 세상이다. 진실은 언제나 내적이며 설명할 수 없는 접촉이다. 나의 가장 진실한 삶은 알아차릴 수 없고, 지극히 내적이며 어떤 말로도 정의할 수 없다. 내 가슴은 모든 욕망을 비운 채 그 자신의 최후 혹은 태초의 고동으로 축소되었다. 나는 세상을 짊어지고 그 일에는 어떠한 행복도 없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세 아이들이 새로운 땅에서 뿌리 내리길 바랬다.

'나는 그녀가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건 그녀가 삶을 너무도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1943년 법학을 공부 한 23살의 클라리시는 휴지 뭉치처럼 움켜쥔 원고를 딱 100부만 발행해서 100부 이상 팔리지 않는다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 한 첫 작품<야생의 심장 가까이>로 브라질 문학계를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그녀는 첫 작품을 발표 직후 패션지 기자로 활동하다가 같은 대학 학과 동기생과 결혼과 함께 외교관이 된 남편의 부임지를 따라 세계 곳곳을 누비며 2차 대전 발발 당시 독일 베를린에서 응급 간호사로 활동하며 자국의 군인과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친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남편의 부임지를 따라 다녔던 클라리시는 틈틈이 창작 활동을 이어갔지만 도저히 브라질 땅을 벗어나서 살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혼 후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 리우데자네이로로 돌아왔다.

보수적인 카톨릭 종교관이 뿌리 깊게 박힌 브라질 땅에서 클라리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혼 했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남편으로부터 양육비 조차 받지 못한 상태에서 번역과 칼럼 기고로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두 아들이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고 강력한 약물 치료를 받지 않으면 광적인 발작을 하는 아들과 사투를 벌이느라 클라리시의 삶은 점점 피폐 해져갔다.

1962년 클라리시가 남편과 헤어지고 난 후 3년의 시간이 흘러서 바르샤바 대사로 승진한 남편이 두 아들을 초청하고. 그녀는 이 초청을 받아 들여 두 아들과 함께 바르샤바로 건너가 환영 사절단과 만난다.

 그 사절단 중에 소련 연방 공화국 외교관이 그녀가 태어난 우크라이나 땅에 초청 방문을 추진해주겠다고 제안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1966년 9월 담배와 수면제 없이는 버틸 수 없었던 클라리시는 수면제 복용 후 불이 붙은 담배를 손에 쥔 채 커튼이 쳐진 창가 침대에서 잠이 든다.

한 밤 중 불타 오르는 침대에서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겨진 원고를 구하기 위해 손으로 불길을 잡기 시작했다.

다리와 손을 절단할 상태까지 화상을 입고 생사를 오가는 상태에서도 병원에서 타이핑을 쳐야 할 정도로 그녀의 삶은 비참했다.

마키아베가 나를 죽였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으로 부터, 우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두려워 말라. 죽음은 순간이며, 그러니 순간 속에서 지나가는 것이다.

나는 그 여자와 함께 죽었기에 그걸 안다.

부디 이 죽음에 관한 한 나를 용서해 주기를...


1977년 12월 9일 10시 30분에 세상을 떠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마지막 작품 <별의 시간>

통증을 느끼고 병원에 갔을 때 이미 수술이 불가능 한 상태로 그녀는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

죽음을 앞둔 클라리시는 세상을 향해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맹세컨대 이 책은 말들 없이 만들어진다. 이 책은 음소거 된 사진이다. 이 책은 하나의 침묵이다. 이 책은 하나의 질문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부터 여자라는 것을, 여자의 운명은 여자가 되는 것이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한 어머니의 생명 빛의 무게 짊어지고 태어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운명은 누군가의 삶을 활자로 써 내려가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이였다.



그녀가 이야기 하는 <별의 시간>에서 어느 누구의 삶도 별처럼 빛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한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살다 간 여성 '마카베아'가 거리에서 쓰러진 핏자국들이 활자에 새겨져 있다.

이 책은 미완성이다. 독자들은 마지막까지 마카베아가 어떤 상태로 되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여전히 세상 어디엔가, 마카베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이 많기 때문에 누군가의 글 속에 그녀의 삶은 이어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을 공격해서 지금까지 무고한 생명들을 짓밟고 있다.

러시아 곳곳에서 징병된 10대들, 죄수들, 외국인 용병들, 거리의 부랑아들에게 총과 무기를 쥐어준 푸틴의 명령을 받고 우크라이나의 모든 생명체를 고문하고, 강간하고 불태우고 있다.

이 책을 펼치면 첫 장에 이런 글들이 적혀 있다.

전부 내 탓이다. 혹은

별의 시간 혹은

그녀가 해결하게 하라 혹은

비명을 지를 권리 혹은

미래에 관해서는 혹은

블루스를 부르며 혹은

그녀는 비명을 지를 줄 모른다 혹은

상실감 혹은

어두운 바람 속의 휘파람 혹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혹은

앞선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싸구려 신파 혹은

뒷문으로 조심스럽게 퇴장



우리 모두의 별의 시간은 언제가 될까?

세상의 모든 전쟁들이 종식될 때 일까?

자연 재해 재난이 멈춰 버렸을 때 일까?

우리 모두 '나'에서 파생되었기에 '나'는 당신들이고 '나의 삶'은 곧 우리 모두의 '삶'이다.

우리 모두 '나 홀로' 세상에 존재 할 수 없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별의 시간'은 우리 모두의 시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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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3-03 02: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마지막으로 쓴 소설이고 끝까지 쓰지 못했군요 클라리시가 이 소설을 끝까지 썼다면 마카메아는 어떻게 됐을지... 더 나아졌을지 더 안 좋아졌을지... 어쩐지 좋게 안 썼을 것 같기도 하네요 마카베아가 사귄 올림피쿠를 보니 옛날 한국 드라마 생각나기도 합니다 가난한 여자보다 부자 여자한테 가는 그런 사람이 나오는...

클라리시는 늘 어머니한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 같네요


희선

2023-03-03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냥이 2023-03-03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같은 삶을 살아갔던 사람이였네요 간혹가다 주위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같고 소설같은 삶의 얘기들을 듣는데 이작가분도 그런분이군요 책이 미완성이라지만 궁금하네요
어떤 심정으로 쓰였을지.. 작가의 삶에 대해 알려주신 부분을 읽어 가는데 뭔가 짠하니 뭉클..

scott 2023-03-05 22:41   좋아요 1 | URL
솔직히 리스펙토르는 동시대 여성들에 비해 좋은 환경(교육,대사관저 생활,집에 일하는 상주 도우미들 거닐고 살았던) 이여서 그나마 이렇게 작품을 남길 수 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의 삶은 글로 차마 옮기기 힘들 정도 입니다(지난 몇 주에 걸쳐 리스펙토르 자서전 읽고 난 후 충격을 받음)

이 작품은 전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이해 하기 불가 할 정도로 무의식의 흐름처럼 서술해서 쉽게 읽혀지지 않습니다. ^^

희선 2023-04-08 0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cott 님이 좋아하는 작가 책 이야기를 쓴 거여서 기쁘겠습니다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꼬마요정 2023-04-08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콧 님 축하드려요!!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라 참 가슴이 먹먹했는데 새삼 또 가슴이 아프네요.
마키베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어떤 마음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까요... 어째서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직접적인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 걸까요... 만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브라질을 떠날 수 있었다면 삶이 달라졌을까요?
 
도둑맞은 자전거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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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가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꿔 놨어.'


여기, 가족의 운명을 바꿔버린 '자전거', 누군가에게 도둑 맞은 자전거를 찾아 나선 사람이 있다.


'자전거'가 그의 가족의 삶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시기는 메이지 38년, 일본군이 타이완 섬을 점령했던 시기인 1905년으로 뤼순 항에 백 오십칠 일간 포위되어 있던 러시아군이 일본군에 투항해서 한 달 후 일본이 대 승리를 거두었던 그 날, 그의 외할아버지가 태어났다.

어떤 역사 책에도 적혀 있지 않은 그의 외할어버지의 탄생과 함께 찾아 온 세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시대로 예고도 없이 들이 닥친 일본군 부대, 그들이 가져온 온갖 기이한 이동 수단과 기기들은 작은 섬 타이완을 뒤 흔들었다.

자잘한 물건 부터 사람까지 멀리 실을 수 있는 '자전거' , 위독한 생명까지 살릴 수 있는 그 자전거는 그 시대 어느 누구나 갖고 싶은 것으로 훔쳐서라도 소유 하고 싶었다.

까막눈의 외할아버지는 자신이 태어나던 해에 어떤 사람이 철마(자전거)를 도둑 맞았다는 기사를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고이 접어서 소중하게 보관했다.

1945년, 자전거를 도둑 맞은 외할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다.

'도둑 맞은 자전거'는 외할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니였지만 그의 죽음이 '자전거'에 의한 것이라는 걸 가족들은 알고 있다.

[물론 당신이 내 어머니와 오래 얘기를 나눈다면 우리 가족이 도둑맞은 세 번째 자전거와 다섯째 누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자전거는 아버지 것이었다. 제조사도 모델명도 알 수 없는 그것이 아버지의 첫 번째 자전거였다.]

반 벙어리 처럼 양복을 만들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이에서 내리 딸만 다섯을 낳아 지독할 정도로 가난에 찌들리면서도 운명 처럼 자신들의 삶에 아들이 찾아 오기를 바랬다.

아버지가 다섯 번 째 딸을 아이가 없는 먼 친척에게 보내려던 찰나에 어머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타고 남편이 서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자전거' 때문에 친척 집에 입양 되지 않았던 다섯 번째 딸의 운명, 그리고 운명처럼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집안의 늦둥이 '청'은 세월이 한 참 흐른 뒤에 자신의 가족의 운명이 희생과 사랑이 녹아 들어간 '자전거'와 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머니는 사람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자전거를 잃어 버린 거라면 찾지 못해도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했지만 '청'은  아버지와 함께 사라진 '행복표 자전거'를  찾기 위해 자신이 살아 본 적 없었던 그 시절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이 십 년 세월이 흘러 그 자전거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저 인생의 '운'만 믿고 살았던 그에게 돌아온 아버지의 행복표 자전거 '04886'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색만 조금 바랬지만 여전히 그 행복표 자전거는 부드럽게 바퀴를 굴리며 단단하게 땅을 딛고 움직였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이 자전거가 지난 이십 년간 내 성격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느꼈다. 잠깐 탔을 뿐이지만 림, 타이어,짐 받이, 일부 브레이크 부품, 페달, 안장, 핸들바가 전부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다시 돌아온 아버지의 '행복표 자전거'는 지난 시절 동안 개조하고 변형되어 다시 조립된 자전거로 도대체 누가 지난 이십 여 년의 세월 동안 이 자전거의 모든 부품을 교체하고 소유 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인생은 난수와 임의성의 선택, 즉 운만 있을 뿐 명은 없다고 생각했다. '

그는 쓰레기 더미처럼 가득 쌓여 있는 기억 속 그 시절, 집, 가족 그리고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아버지, 잃어 버린 지난 시절의 모습이 담겨 있는 추억의 흔적, 잃어버렸던 '행복표 자전거'를 소유 했던 이들을 찾아 나서면서 단 한 번이라도 그 자전거를 소유 했던 이들의 이야기들이 펼쳐 진다.


청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도 알고 계시다시피 그 자전거는 제 것이 아닙니다. 제 여자 친구 애니의 것도 아니고요. 이 자전거가 한동안 제 카페에 있었고 우리의 특별한 시간에 함께 한 건 맞습니다.

                                                                                           -압바스

고물상 주인 아부의 고객들을 통해 '행복표 자전거' 소유자들을 찾아 나선 주인공 '청'은 대만 중부 지역 출신의 중대의 정전사 였던 종군기자 압바스를 직접 만나 한 때 그의 여자 친구이자 카페 주인 '애니'라는 인물이 소유 했었던 '행복표 자전거'가 이 전에 북 말레이에 주둔 했던 '은륜 부대'에서 도둑 맞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청은 자신의 메일함에 도착한 카페 주인 애니의 이름이 찍힌 답신에 적혀 있는 글이 사실인지 소설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읽어 나가면서 1919년 '무성 곤충 채집소'에 고용된 '아윈의 이야기'에 첨부 된 '나비 그림 공장' 사진 한 장은 그의 또 다른 기억을 되살려 낸다.

일본이 타이완 땅을 점령했던 시기였던 1917년 위무성이 시작한 나비 채집은 푸리 지역 주민들을 나비 포획꾼으로 총 동원 할 정도로 거대 산업처럼 공장이 세워지고 그곳에서 표본 된 수천 만 마리의 나비를 일본 열도로 옮겼다.

이로 인해 나비 자생 지역인 푸리의 자연은 심각하게 파손 되었다.

청의 메일함에 담겨진 이야기 속에는 자전거를 탄 나비 포획꾼 아윈이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나비를 포획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나비로 생계를 이어 나갔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다.

[아윈은 직접 만든 나비 그림 몇 점을 자전차 뒷자리에 싣고, 간단한 일용품을 넣은 자루 두 개를 자전차 양쪽에 매달았다. 아윈은 몇 년 전부터 몰래 챙겨온 나비 날개로 나비 그림을 만들어 팔아 돈을 모으고 있었다. 돈은 모두 붉은 봉투에 넣어 계모의 베개 밑에 두었다. 그동안 돌봐준 것에 대한 보답이자 아버지의 자전차 값이었다. 아윈은 아버지의 자전차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전차를 타고 달리면 소 가죽 안장에 밴 아버지의 땀 냄새가 코끝에 실려 와 마음이 편안해졌다.]

청은 총 17종에 달하는 '행복표 자전거' 모델 중에서 자신의 아버지의 자전거를 소유 했던 압바스의 고향을 찾아간다.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도둑 맞았던 '은륜 부대'에 소속 된 압바스의 아버지의 음성이 담긴 오래된 테이프에서 쇼와 16년 1941년 황군이 남쪽 지역을 공격하고 있던 그 시절, 자원 입대해서 말레이 반도 밀림 속 특수 부대에 배치된 열 여덟 살 청년의 이야기가 흘러 나온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겨울이 다가올 무렵, 나는 고향을 떠나 일본 군 수송선을 타고 하이난다오로 향했다. 보름 뒤 하이난다오의 싼야에서 병사 수송선에 오를 때까지도 내 운명의 새가 어디로 날아갈지 알지 못했다. 바다도 벙어리가 된 밤이었다. 함선의 엔진 소리도 파묻힐 만큼 고요한 그런 밤, 그날 밤 갑판에 있던 사람들은 붉은 달무리에 에워싸인 ,믿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달을 보았다. 부대의 출동 준비는 창백해진 달이 서쪽으로 가라앉고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해와 달이 동시에 수면에 반사되는 새벽까지 계속 됐다.]

도둑 맞은 자전거로 시작 된 이야기는 아버지의 실종 사건과 함께 일본 군의 점령으로 불바다가 된 타이완 그리고 그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던 동아시아 역사 전체로 퍼져 나간다.


[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산비탈에 자리한 토착민의 비좁은 초가집과 산 밑에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극명하게 대비 될 것이다. 아시아인에게서 짜낸 피, 땀, 돈이 소수 백인종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지탱하고 있다.]

행복표 자전거의 두 바퀴에 연결 된 주요 인물들인 외성인 무 분대장과 라오쩌우, 원주민 바쑤야 그리고 주인공 청의 아버지의 운명이 역사의 시간 속에서 서로의 운명이 자전거 챗바퀴 처럼 맞물려서 함께 움직인다.

[얼마 후 그들은 내게 자전차 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난생 처음 타는 것이었지만 몸을 어떻게 써서 조종해야 하는지 어떤 느낌인지 금세 터득했다. 고가마 선생님은 바다를 건너가 전쟁을 하려고 할 때 대량의 장갑차와 수송차는 운반하기 어렵지만 자전차는 상대적으로 많이 가져갈 수 있고, 가볍고 빠른 데다 물건도 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평화롭게 야자수 나무들이 울창하게 뻗어 있는 곳에서 자전거로 시내를 이동하며 일상의 평온을 유지 했던 사람들 ,이들의 삶을 차례 차례 짓밟은 영국군,인도군 그리고 치욕적인 항복으로 8만명의 연합 부대원들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태국에서 출발해 미얀마를 지나는 철로 건설 현장에 투입 되어 열대 밀림 속에서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현지 주민들 대부분 학살 당하거나 생 매장 되었고 자연의 모든 생명체들은 일본군의 총과 칼에 의해 끔찍한 죽음을 맞이 했다.

[압바스는 그 일을 겪는 동안 자신이 점점 라오쩌우의 자전거와 한 몸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자전거 뿐만 아니라 더 추상적인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마침내 여러 해의 시간이 흘러 소설가가 된 청의 눈 앞에 지난 시절, 가족의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행복표 자전거' 가 나타난다.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자전거 파는 곳으로 갔다. 그날 중화상창으로 돌아오는 길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길이었다.'

누군가에게 도둑 맞았다가 다시 아버지의 눈 앞에 나타난 자전거, 그리고 그 자전거를 훔쳐간 도둑을 신고하지 않고 그냥 돌려 보냈던 어머니

'아버지가 실종되기 전 우리는 아버지가 빠른 속도로 모든 걸 잊고 있다는 걸 알았다.'

눈에 보이는 물건은 언젠가 먼지가 쌓여서 망가지거나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사라졌던 '자전거'는 누군가의 삶을 지탱 시켜 주며 전쟁의 포화 속에서, 가난의 굶주림에서 살아 남게 해 주었다.

[남자는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 나무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곳은 버려진 땅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뒤 마을 동쪽으로 이주해 농지를 개간했대요. 몇 년 전에야 누군가 우연히 이 나무가 '자전거를 안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마을 사람들은 이 일을 기적으로 여기면서도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남자는 해가 진 뒤 이곳에 오지 말라고 내게 충고했어요. 그 나무와 자전거를 보고 바쑤야가 자전거를 파묻을 때의 상황을 상상했고 라오쩌우도 생각했어요. 그의 자전거는 아마 또 다른 바쑤야가 땅에 묻었겠죠. 시간은 많은 것을 훔쳐 가지만 또 많은 것을 세상에 내놓아요. 안 그래요?]

병상에 누워있는 청의 어머니는 두 발을 땅에 딛기 힘들어 할 정도로 자신의 체중을 싣고 걷지 못하지만 아들은 어머니가 아가였던 자신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던 것 첫 번째로 양말을 신겨 주셨던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

'나는 어머니가 잃어버린 자전거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아버지에 관한 화제가 시작될까 봐 전전 긍긍하며 말을 받는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자루 없는 칼 같다. 하지만 정원 잔디밭을 깎을 때 행여 눈에 띄지 않는 식물을 잘못 잘라버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새기고 또 새겨도 바로 그런 순간이 오면 계속 피하려고 했던 그 풀을 아무도 모르게 싹둑 잘라버리게 된다.'

청의 아버지는 전쟁에 반대 해서 분대장에게 자전거를 남긴 채 떠났고 그 분대장은 대 학살이 자행 되었던 밀림 전투 당시 자전거 덕분에 살아 남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부하가 남긴 가족을 만나 화해와 용서를 한다.

청은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가 탔던 그 자전거에 올라타 제자리에서 반 원을 돌며 페달을 밟고 달린다.


씽,씽,씽, 끼익, 끼익,씨잉,씨잉,끼익, 끼익, 군데 군데 녹슨 자전거는 빛바랜 검은 소가죽 안장의 무게를 잘도 견디며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갔던 그곳을 한 바퀴 돌아 우체국을 지나 타이베이역까지 달린다.

아버지, 이모, 누나들, 형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고 철교 넘어 보이는 그곳 전쟁이 끝난 뒤 수 많은 사람들의 심장 박동이 울렸던 곳까지 올라간다.

자전거에 몸을 싣고 달리는 그의 기억은 강물 속으로 들어가 첫 사랑 테레사와 만나고 헤어졌던 순간을 떠올리며 여전히 아이 같이 굴었던 지난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마치 마치 몸통을 잃은 나비, 아윈의 방 벽에 붙어 있던 표본 된 나비 처럼 느껴진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멀리 있는 모든 것은 가까워지고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멀어졌다. 비행기 엔진의 둔중한 소음이 하늘에서 멈추더니 낯선 남자가 변소 칸 밖에서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넌 마흔 다섯 살까지 밖에 못 살 거야.']

마흔 다섯 살을 넘긴 청은 바다 항구를 비추는 불빛을 따라 천천히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누군가 그의 귓가에 이렇게 묻는다 '그 자전거는 어디로 갔나요?'

흠뻑 땀에 젖어 돌아 온 아들이 자전거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그의 어머니


'저 사람은 누구지? 자전거 타는 뒷모습이 너희 아버질 무척 닮았구나.'

시간이 흘러 가듯 자전거 주인은 바뀌었고 이들의 삶은 자전거의 두 바퀴에 연결 되어 하나의 이야기, 역사가 되었다.



'2006년 나는 소년공으로 징집 되어 일본의 전투기 공장에서 일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수면의 항로>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의 역사적 배경을 느끼기 위해 일본에 두 차례 다녀 왔는데 그중 한 번은 가나가와 현의 야마토와 코자 두 소도시에 묵었다. 하루는 M과 함께 숲에 갔는데 입구에 '들새의 숲'이라고 적힌 작은 팻말이 서 있고 그 옆에 오래된 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일 년 뒤 소설이 발표 되고 한 독자의 메일을 받았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중산탕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었는데 그다음엔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허구의 빈 자전거는 작가 우밍이의 마음을 움직여서 실제로 '행복표 자전거 모델'을 전부 수집해서 직접 부품을 구해 조립 하면서 한 가족의 모습,대만의 자전거 발전사, 동물원사, 나비 공예사 이야기를 지나 전쟁으로 파괴 되었던 20세기 중반 대만의 역사를 자연과 과거의 회상으로 긴밀하게 연결 시켜서 독자들을 어스름이 내린 밀림 숲 속으로 하늘 빛에 비쳐진 바다 속으로 그리고 힘없이 쓰러진 수 많은 생명들의 빛들이 사라진 그곳으로 데리고 간다.


1898년 일본 점령 시절에 저항했던 무고한 민간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아공뎬 학살 사건, 1947년 장제스 정부가 차별에 항의 하는 본성인 시위대를 무자비한 공권력으로 진압한 2.28사건,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군에 징발 됐다가 종전 후 국민당에 포로로 잡힌 뒤 타이베이 동물원의 한 우리 안에 갇혀 살다 2003년에 세상을 떠난 밀림의 코끼리 '린왕' 까지 실제 역사에서 발생 했던 사건들이 자전거 두 바퀴에 실렸다.

작가 우밍이는 기억의 역사가 남긴 고물의 흔적을 줍듯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 남은 이들, 세상을 떠난 이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졌던 이들의 삶을 거대한 나비 공장에서 표본 된 나비들을 복원하듯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다.


2018년 우연히 가디언지에 게재된 기사 한 편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바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오른 대만 작가의 국적이 (대만, 중국 )으로 표기 된 것에 대해 작가 우밍이가 강력하게 항의해서 주최측이 이를 받아들여 국적을 '대만'으로 정정 표기 되었다는 기사를 인상 깊게 읽었다.


나의 대만 친구들 역시 자신들을 중국인이 아닌 반드시 타이완, 대만인으로 불려 지길 원했고 어디에서도 이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중국'이 아닌 '대만'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대만의 국민 작가이자 대만 문학 역사상 최초로 영국 맨 부커상에 이름을 올린 우밍이가 '문학'을 통해 무엇을 세상에 말하고 싶었는지 궁금한 생각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그날 새벽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것 같다. 이야기는 할 때 마다 매번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법이니까. 우선 지평선 위로 올라온 여명을 서서히 움직여 대지에 펼쳐놓는다.

나무, 마을, 집, 초등학교, 갖가지 색이 이어진 논밭, 해풍에 출렁이는 작은 어선이 바둑알처럼 풍경 속 점점이 놓여 있다.'

활자 속에 마을의 모습이 보이고 쓸쓸함이 묻어 나는 바닷소리 그리고 바람을 타고 저 멀리서 자전거 한 대가 달려 오고 있다.

나는 어느 새 내 마음 속으로 들어 온 자전거를 타고 작가 우밍이가 펼쳐 보이는 세상, 단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그 시절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이 내뱉는 숨소리를 듣는다.

'그때는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도 애도 할 수도 없는 시대였다.'

길 위에서, 밀림 속에서 바닷 속에서 피를 흘리며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와 그들은 서로 보지 못한 채, 어떤 보이지 않는 신비하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 서 있다.

책장을 덮었을 때 시계 바늘은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누구를 보았던 것일까?

전쟁 속에서 사람들만 죽은 것이 아니였다.


타이완 땅의 수 만 마리의 나비들은 강제로 포획되어 대규모 공장에서 표본이 되어 일본땅으로 옮겨 졌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밀림의 북 말레이의 치열한 전투 전에 동원 되기 위해 끌려온 북미얀마 태생의 코끼리 무리 들은 살육 되었고 또 다른 전쟁에 끌려 갔던 코끼리는 종전 후 포로로 잡혀서 타이베이 동물원 우리 속에 갇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얼핏 보면 어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이 그대로 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니, 이 책 <도둑 맞은 자전거>를 읽고 난 후에 내 앞에 보여지는 세상은 어제와는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더 이상 생산 하지 않는 골동품 자전거를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하려고 모든 부품을 분해하고 닦아내고 조립하는 동안 녹슨 자리와 녹이 쌓인 두께를 정확하게 기억하게 되지만 어떤 부품으로도 완전하게 수리 될 수 없듯이 설사, 그 자전거 이름이 '행복표'라 불리더라도 온전하게 두 바퀴가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 자전거 바퀴 처럼 완벽하게 굴러 갈 수 없듯이 우리 모두 기억의 한 조각을 잃어 버린 채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럼에도 인생의 한 부분 어딘가에 '행복' 했던 순간을 떠올리듯, 그렇게 우리 모두의 기억, 잃어버린 기억들은 자전거 바퀴가 굴러 가듯 매 순간 그저 소리 없이 힘겹게 하루 하루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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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18 00: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완전 관심갑니다. 대만의 역사보면서 대만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느낄까 참 궁금했거든요. 제가 만난 대만 사람은 스콧님의 친구분들과 다르게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본토인이라고 생각하더라구요. 그래서 돌아가야 할 곳 중국이랄까? 그런 생각을 들으면서 진짜 이상하다 생각했거든요. 스콧님덕분에 오늘도 좋은 책을 알아갑니다. ^^

scott 2023-02-18 00:27   좋아요 5 | URL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만은 자신들의 정체성 무척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만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지만 아마 바람돌이님이 만나셨던 대만인들은 본토에서 건너온 후예들이 아닌 중화 인민공화국에서 넘어온 이들일 겁니다

제가 대만 친구들 엄청 많은데 국적 문제 앞에서는 반드시 타이완으로 못을 박고 있습니다.

이 책 제 인생 책 리스트에 올려 놨습니다 ^^

희선 2023-02-18 0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다보니 마쓰이에 마사시 소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가 생각나기는 했는데, 거기에도 역사가 아주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건 한 집안 이야기군요 이 소설은 대만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군요 자전거로 이런 이야기를 쓰다니...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좋지 않았겠네요 코끼리는 더... 어딘가에서는 코끼리로 다리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대만에 있던 나비를 표본으로 만들어서 일본으로 가져가다니... 조선은 호랑이가 다 사라졌군요 여러 가지 유물도 훔쳐가고... 그런 걸 일본만 한 건 아니겠습니다


희선

scott 2023-02-18 09:53   좋아요 2 | URL
개인의 소유물에서 전체 사회 국가 그리고 바다 건너 세상 까지 이어지는 대 서사시 입니다.
이 책을 통해 일본이 동아시아 국가 전체를 어떤 방법으로 집어 삼켰는지 그에 따른 희생자들의 모습, 동물들 자연들이 어떻게 파괴 되고 사라졌는지 엄청 깊이 있게 묘사 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잠시 그 시절 사람들의 삶을 엿본 것 같은 감동의 여파가 엄청난 작품이였습니다.

희선님 말씀처럼 조선의 호랑이 그리고 여우들 온갖 토종 자생 식물 박제하고 표본을 떠서 전부 일본 땅으로 가져갔고
대만의 천연 자원 소중한 동식물들 전부 가져갔다고 합니다

전쟁 당시 밀림 숲까지 전투전에 끌여 들였던 코끼리들은 참담한게 살육 당했습니다 ㅠ.ㅠ

웰리 2023-02-18 07: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성장기에 심어진 따스한
기억중의 하나가 아버지가
가르켜준 🚲 자전거 타기.

어느덧 세월 지나
거실 구석에서 실내자전거
폐달을 가끔 밟을뿐 이제는
손주들 가르킬 때가 오는중.
오늘 아침 나의 추억이 생각
나면서 작가의 이야기가 확 와닿는군요^^

오늘도 습관처럼 폐달을 밟고
가열차게 펌프질하며 달려용

스콧님 늘 감사합니다 ♡
오늘도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scott 2023-02-18 09:55   좋아요 2 | URL
웰리님에게 자전거에 담긴 추억이 있으시군요

전 자전거를 어렸을 때 타다가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을 뻔 해서

이 책 속의 인물들의 삶에 더욱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웰리님 이른 아침에 저에 길고 긴 리뷰( 이작품의 깊은 감동을 전부 담지 못한)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주말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항상 건강 하귀 ^^

책먼지 2023-02-18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마트폰과 노트북은 안 훔쳐도 자전거는 훔쳐가는 우리나라 사람들 떠오르면서요.. 자전거 도둑질이 이렇게 무서운 일입니다..(후덜덜) 대만 친구들이 중국 사람으로 오인받을 때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정정하고 넘어가는 걸 저도 보았는데 그때 느껴지는 기백이 진짜 엄청나죠.. 중국 본토 애가 은근히 대만을 중국으로 포섭하는 발언할 때 바로 들고 일어나 반박하는 것도 보았는데.. 이게 정말 이들에겐 절박한 존재의 문제 같더라고요..

2023-02-18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펄손 2023-02-19 0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만어 한어 배우면 보려고 했던 책인데 그냥 한글로 읽어야겠어요. 😅

scott 2023-02-19 01:18   좋아요 1 | URL
전 이책 일본어(가격이 훨씬 쌈)로 읽으려다 한쿡말로😆
이 책 번역 정말 힘들었을 텐데 번역 엄청 훌륭합니다😄

펄손 2023-02-19 10:00   좋아요 1 | URL
우와. 스캇님은 여러가지 언어를 하시니 그런 것도 선택하실 수 있군요!
진짜 번역이 잘 된 것 같아요. 외국어로 어렵게 읽느니 멋진 번역서로 읽어야겠어요! ㅎㅎㅎ

scott 2023-02-19 11:17   좋아요 1 | URL
표지도 한국어판이 작품의 색깔을 아주 잘 담아냈습니다.
일본어판은 제가 리뷰에 올린 그림인 밀림 속 코끼리와 원숭이가 커버로 ㅎㅎ

이책 꼬옥 읽어보세요

대단한 작품 입니다 ^^

2023-03-08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8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3-09 0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cott 님 또 축하합니다 이 작가 책으로 드라마 만들기도 했더군요 언젠가 이것도 드라마 만들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scott 2023-03-09 11:06   좋아요 0 | URL
대만의 국민 작가!
저의 최애 작가 작품이 되었습니다
글 정말 잘 씁니다 ^^

서니데이 2023-03-1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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