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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변이 - 리디아 데이비스 작품집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강경이 옮김 / 봄날의책 / 2023년 5월
평점 :
[내 남편은 이제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그녀는 나보다 작아서 152센티쯤 되는 키에 체격이 다부지기 때문에, 그는 물론 예전보다 더 키가 크고 더 가늘어 보이고, 머리는 더 작아 보인다. 그녀 옆에 있으면 나는 앙상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고 적절한 각도로 서거나 앉아서 눈을 맞추려 해봐도 그러기에는 그녀가 너무 작다. 한 때 나는 그가 다시 결혼한다면 어떤 여자와 할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여자 친구들은 다들 내 생각과 달랐고 그중 이 여자가 가장 다르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양말> 중에서
한 때 자신의 남편이였던 남자가 재혼한 아내를 데리고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만나러 찾아 왔다.
두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헤어졌지만 아들과 자주 만나기 위해 서로 가까운 곳에 살며 왕래 하고 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이기에 그녀는 아들을 만나러 온 전 남편과 그의 새로운 아내를 위해 애써 불편한 감정을 감춘 채 서로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초대 받은 그녀의 친구들과 뒤섞여 함께 어울렸던 전 남편과 그의 새 아내는 집안의 모든 물건들을 거리낌 없이 집어 쓰는 동안 자신들의 물건들, 그다지 소중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집안 어딘가에 버렸거나 놓고 떠나 버렸다.
그녀는 오로지 아들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참고 있다.
[그날 밤 나는 그들의 숙소가 있는 시내로 가면서, 그들이 내 집에 남겼고 그때까지 내가 발견한 물건들을 챙겼다. 옷장 문 옆에 남겨진 책 한 권과 다른 어딘가에 있던 그의 양말 한 짝 그들이 머무는 건물 근처에 갔을 때 남편이 밖으로 나와 내게 차를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양말 중에서
그녀는 전 남편이 자신의 집에 두고 간 책은 여전히 왕래 하고 지내는 시 어머니의 집에 갖다 놓고 벗어 버리고 간 양말 한 짝은 길에서 만난 전 남편에게 건넨다.
전 남편은 헤어진 아내가 찾아 준 양말 한 짝을 무심히 바지 뒷 주머니에 넣고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이 양말을 왜 당신의 집에 흘리고 왔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전 남편의 뒷 주머니에 꽂혀 있던 그 양말 한 짝을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양말 한 짝이 도시 동부 베트남 거리의 안마 시술소들 옆, 이 멀고 낯선 동네에 그의 뒷 주머니에 꽂혀 있었으며, 우리 중 누구도 이 도시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곳에 함께 있었고 나는 여전히 내가 그의 배우자인듯 느껴져서 그 상황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양말' 중에서
전 남편이 흘린 양말 한 짝에 기억을 떨쳐 내지 못하는 여자와 자신의 양말을 전 부인 집에 흘렸다는 사실 조차 인지 하지 못하는 남자.
이 두 사람은 20세기 중반 미국의 문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로 뉴욕의 3부작을 시작으로 미국 20세기 현대 문학계의 거장이 된 폴 오스터와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그리고 번역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리디아 데이비스다.

[우리는 오랫 동안 서로의 배우자였고 나는 여기저기서 우리가 함께 한 삶 내내 내가 치웠던, 땀이 차고 발바닥이 닳은 그의 모든 다른 양말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다가 그 양말 속에 있었던 그의 발에 대해, 발볼과 뒤꿈치의 닳아버린 올 사이로 살이 비치던 모습에 대해 생각했다.]
-양말 중에서
리디아 데이비스가 폴 오스터를 처음 만났던 시절은 그녀가 뉴욕 버나드 칼리지에 입학 했던 첫 해로 콜럼비아 대학과 버나드 칼리지, 두 대학끼리 자유로운 학점 교환 프로그램으로 개설 된 강의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는 미소 지을 때조차 늘 눈을 크게 떴고, 몸은 가만히 있지만 눈만 움직이며, 모든 것을 관찰했고,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대화가 일종의 싸움인 양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을 방어할 태세가 돼 있었다.]
-'교수'중에서
리디아는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산만하고 부산스럽고 불안정했던 성격으로 가만히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지 않고 밖으로 뛰어다니며 온갖 사회문제에 대해 항의하고 시위하는 무리들 중에 끼어 있거나 남학생들과 풋볼을 하거나 터치볼을 했다.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한 눈에 반해 버린 폴 오스터는 말 수가 적고 책 읽기를 좋아 했던 청년으로 뉴저지 공립학교를 졸업 했기에 막상 콜럼비아 대학에 들어 왔을 때 WAPS부류들과 잘 뒤섞이지 못했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아버지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현대 영문학을 가르쳤던 교수로 젊은 시절, 좌파 운동으로 미국 학계를 뒤흔들며 붉은 당원으로도 활동했었다.
그는 교수가 된 이후에 좌익 성향의 학자들, 이민자 지식인들의 울타리 역할을 했는데 이들 중에 에드워드 사이드, 에리카 종, 그레이스 페일리등이 있었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엄마는 현대 영문학을 공부한 소설가로 주요 문예지에 단편 소설을 발표 했던 중견 문학가로 활동하며 여성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열성 페미니스트였다.
리디아는 자신의 부모를 무척 자랑스러워 했고 그녀의 부모는 딸에게 항상' 네가 추구 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시대의 흐름과 달리 하더라도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워라.'라고 말했다.
어떤 무리들 속에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았던 리디아는 1960년대 남자 아이들만 했던 풋볼이나 야구, 터치 볼 게임에도 과감하게 뛰어들어 함께 뛰어 다녔다.
운동 실력도 뛰어나고 공부도 잘했던 리디아는 주변 또래들의 우상으로 그녀가 카프카를 읽으면 친구들도 카프카를 읽었고 베게트의 희곡집을 읽으면 친구들도 베게트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리디아를 숭배하는 이들 중 한 명이였던 폴 오스터는 1973년 그녀를 따라 말라르메 시집 단 한 권만 손에 든 채 파리 행 배에 올라 탄다.
두 청춘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하자 마자 닥치는 데로 일을 하고 번역을 하고 글을 쓴다.
폴 오스터는 뱃사람들에게 고용 되어 새벽 시간 짐꾼으로 살고 오후 한 나절은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날랐고 밤에는 시를 썼다.
리디아는 각종 전자 제품, 식료품 , 화장품 카탈로그를 영어로 번역 하는 일을 했고 전화 교환수로 일하는 동안 틈틈이 시를 썼다.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약 7달러로 버텨도 행복했다.
[저녁으로 우리는 소시지 한 개를 먹었다. 우리에게 남은 돈이라고는 집 곳곳 쟁반에 있던 동전을 모아 거실 탁자 위에 쌓아둔 게 전부였다.]
-생 마르탱
그 시절 두 청춘의 힘겨운 삶을 지켜 봤던 지인들이 '왜 이러고 사냐'고 묻자.
리디아는 '이렇게 살아도 집으로 돌아가면 부유한 부모님이 있거든.'이라고 당돌하게 대답했다.
이 말은 사실이였다.
무엇을 해도 큰 돈을 단 한번도 쥐어 보지 못했던 폴 오스터는 몸 쓰는 노동에 영 재주가 없어서 밤낮을 지새우며 써낸 시들 모두 미국 주요 문예 편집자들에게 거절 당하고 번역한 글 조차 제대로 실리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가 보내 준 돈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출판사를 차리지만 고작 팔려나간 시집은 딱 10권 뿐이였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매번 좌절하는 폴 오스터에게 리디아는 이거 읽어봐, 이거 번역해봐.
이 문장 시적이지 않아 라며 이런 저런 책들을 권하며 그에게 창작의 힘을 불어 넣어 준다.
두 사람은 프랑스에 머무는 3년 동안 유명 해외리조트로 장기간 휴가를 떠난 이들의 집을 지켜주고 청소해주는 관리인 알바로 버티며 여기 저기 떠돌아 살다가 부모가 보내준 항공권으로 무사히 미국 땅으로 돌아 온다.
두 사람은 미국으로 돌아 오자 마자 결혼식을 올렸고 리디아는 아이를 갖는다.
아버지는 딸의 행복을 위해 리버사이드에 좋은 아파트를 사주고 20대의 끝자락에 선 두 사람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남편이 어린 시절 좋아하던 음식은 콘비프였다. 이 사실을 나는 어제 친구들이 놀라 와서 음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알았다.]
-고기, 내 남편
언제나 활동적이였던 리디아는 아이가 태어난 후 남편을 위해 자신의 거의 모든 시간을 주방에 쏟아 부어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를 해주며 로스트비프 샌드위치, 스테이크, 양파와 피망 꼬치구이를 들고 아이와 함께 야외로 나가 함께 먹고 함께 뛰어 논다.
분명 그때까지 폴 오스터는 아내 리디아가 만들어 준 모든 음식에 열광하며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아니 아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들 다니엘이 걸음마를 하기 시작 했을 때 부터 그는 한 번 집 밖을 나가면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 여자가 여러 해 전 이미 죽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그의 외투를 솔질 하고, 그의 잉크 병을 닦고, 그의 상아 빗을 쓰다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무덤 위에 자신의 집을 짓고 밤이면 밤마다 눅눅한 지하실에서 그의 곁을 지켜야 했다.]
-사랑
결국 폴과 리디아는 아들이 18개월일 때 헤어지지만 아들을 위해 리디아는 남편이 살고 있는 집 바로 길 건너으로 이사를 온다.
폴은 1981년 시 낭송회에서 만나 단 10분 만에 홀딱 반해 버린 콜럼비아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였던 시리 허스트베트와 사랑에 빠지고 곧장 법원에 이혼 소송을 신청한다.
이혼 소송 중에 약혼식을 올린 폴은 아홉살 어린 약혼자와 함께 20대 불같은 청춘을 보내며 피와 땀, 눈물로 지새웠던 파리로 신혼 여행을 떠난다.
그의 약혼자 시리 허스트베트는 파리 최고급 호텔에 머물던 중 갑작스런 편두통으로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나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지난 여름 그들은 그의 아들이자 내 아들이기도 한, 내 아들을 보러 몇 주간 이곳에 왔다. 몇 몇 껄끄러운 시간도 조금 불편하기는 했다. 두 사람은 내게 많은 편의를 기대하는 듯했는데, 아마 그녀가 몸이 아픈 탓인 듯했다. 그녀는 아파했고 침울했으며, 눈 밑이 쾡했다.]
-양말
재혼 후 폴 오스터는 뉴욕의 삼부작을 시작으로 뒤이어 출간 된 모든 책들이 호평을 받으며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항상 어딘가 아팠던 그의 아내 시리는 콜럼비아 대학원 박사 논문을 통과 하며 교수 임용직을 제의 받는다.
[해변에서 집까지 천천히 걸어와서 샤워를 했고 저녁이 되면 깔끔하게 차려 입고 내 아들의 손을 양 쪽에서 하나씩 잡고 데리고 나가곤 했다.]
-양말
아들이 18개월 때 집을 떠나버린 아버지 폴은 가끔씩 휴일 날이면 새 아내와 함께 찾아와 아들을 이런 저런 곳에 데리고 다녔다.
철이든 아들 다니엘은 조금씩 이런식으로 자신에게 아버지 행세를 하려는 태도를 싫어했고 항상 두 부자 사이에 끼여 드는 새 엄마를 증오했다.

십대 아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동네 무시 무시한 부랑아들과 어울리다 마약 밀수를 하는 범죄 집단에 소속되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이와 단짝이 되어 술과 마약에 찌들린채 수시로 새 엄마를 협박했다.
아버지 폴은 이런 아들을 사악한 악마로 자신의 소설(오라클 나이트)에 묘사 할 뿐 아들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새 아내와 새로 낳은 딸만 걱정했다.
추상 화가랑 재혼한 리디아는 뉴욕 인근에 오래전 학교 건물로 쓰였던 곳을 개조해서 각자의 작업실로 꾸며 놓고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두번 째 남편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리디아는 첫째 아들에게도 그렇게 했듯이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당신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떤 것에 우선 순위가 있다고 말하고 그냥 그것을 하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하나만이 아니고, 둘이나 셋만도 아니다. 여러 일에 우선 순위가 있을 때 그중 어느 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까?]
-우선 순위
리디아 데이비스의 삶의 우선 순위는 무엇이였을까?
20대 청춘 시절에 만나 불 같은 사랑을 했던 폴 오스터였을까?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핏줄인 아들 다니엘이였을까?
두 번째로 찾아 온 남편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낳은 또 한 명의 핏줄이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이였을까?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러다 아기가 잠들면 아기가 잘 때만 할 수 있는 일을 가장 중요한 것부터 시작해서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순위
리디아 데이비스는 남편과 헤어진 후 필사적으로 번역에 매달렸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두 아들을 양육하는데 자신의 모든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이 와중에도 이따끔씩 찾아 오는 바로 길 건너에 살고 있는 전 남편 부부의 저녁식사나 기타 등등의 편의까지 챙겼음에도 두 부부는 매번 새 책을 낼 때 마다 길 건너 자신들의 삶을 예의 주시 하고 있는 무서운 십대 아들 다니엘을 등장 시켰다.
[그들이 떠난 뒤, 두고 간 다른 몇 가지 물건들, 아니 정확히 말해 그의 아내가 내 재킷 주머니에 놓고 간 물건들-빨간 빗, 빨간 립스틱, 약병-을 발견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이 세 물건은 하나의 작은 무리를 이루어 부엌 진열대 여기저기에 둘러앉아 있었고, 나는 약은 중요한 것일 수도 있으니 그녀에게 보내려고 생각했지만 계속 잊어버리다가 결국 머지 않아 그들이 올 테니 다음에 올 때 주려고 서랍 속으로 치워버렸으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다시 온통 지쳐버렸다]
-양말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할 당 된 24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리디아 데이비스는 거창하고 거대한 서사 구조를 갖춘 글을 쓰는데 집중 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로지 생계를 위해 번역에 매달렸고 자잘하게 남은 여분의 시간 동안에야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쓰기 시작 한 글은 두 세 문장으로 끝나기도 하는데 첫 제목 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새뮤얼 존슨은 분개한다:
스코틀랜드에 나무가 그토록 적다는 것에.
이렇게 한 문장을 쓰고 남은 다른 시간에 그녀는 <새해 결심>을 한다.
-마침내 인생의 중반 쯤에 이르면, 당신은 모든 것이 결국 무라는 걸, 성공도 결국 무라는 걸 알 만큼 똑똑해진다.
1947년 생인 리디아 데이비스는 인생의 중반을 훌쩍 넘겨 버린 후 이렇게 자잘하게 남은 여분의 시간 동안 쓴 글이 400여편에 달해서 이를 분류하고 편집한 글들이 2013년 영국 맨부커상을 수상한다.
그녀의 스타카토 같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글쓰기 기법은 이전에 어느 누구도 시도 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글을 두고 단어와 단어 사이의 리듬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언어의 마술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 년 동안 다양한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 했던 리디아는 번역 중인 작가의 이력을 자신의 언어로 재 창작을 하거나 때로는 그를 자신의 앞, 문장 속에 초대해서 인터뷰도 하고 저녁 식사도 차려 준다.
이들 중에 신경 증세에 시달렸던 반 세기 전 세상을 떠난 작가 카프카가 줄창 편지에서만 사랑한다는 말을 했던 편지 연인 밀레나를 위해 요리를 한다.
[사랑하는 밀레나가 올 날이 다가오자 절망이 나를 가득 채운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대접할지 정하는 걸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생각에 아직 달려들지 못한 채 파리가 등불 주위를 빙빙 돌듯, 주위를 날아다니며 내 머리만 태우고 있다.]
-카프카 저녁을 요리하다
이 요리를 차려 주는 사람은 카프카 일까?
아니면 전지적 시점으로 카프카를 바라보고 있는 작가 리디아 데이비스일까?
작가로 크게 성공한 후 폴 오스터는 다양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작가 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말라르메, 카프카, 베게트 등의 작가들을 거론 하며 '솔직히 전 아내가 이 책들을 읽어 봐라, 여기 쓰인 문장들 제대로 해석해 봐라'라고 권해서 읽었는데 그 시절엔 어찌나 그녀가 강압적으로 강요 했던지 짜증이 확 올라 오는 걸 꾹 참고 읽거나 번역했죠.'라는 말을 했다.
20대 시절 리디아 데이비스는 주의력이 산만하고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성격이였는데 이를 두고 폴 오스터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물론 그녀도 번역을 했고 이런 저런 글을 썼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완성 한 게 없었습니다. 항상 어수선했고 어설펐는데 어떤 날은 오늘 반드시 말라르메 시 전체를 외우겠어! 라고 외치고는 외우지 못했죠. 또 다른 어느 날은 '글을 쓰고 있어.'라며 타자기 앞에 앉았는데 종이 한 장에 딱 두 세 문장이 적혀 있었고 그 다음 장엔 아무 문장도 없는 백지, 그러니까 어떤 문장을 시작하면 스토리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폴 오스터
폴 오스터의 이 말을 똑똑하게 기억했던 당시 뉴요커 기자가 2013년 리디아 데이비스가 맨 부커상을 수상 하자 마침내 그 두 문장이 반 세기 만의 한 권의 책으로 완성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글을 처음 읽었던 당시에 도대체 이 글은 이야기 인 것인가?라며 이런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이름을 다시 한번 내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farrar straus and giroux로 일명 FSG약자로 통용되는데 이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주요 작품들은 퓰리처 상, 내셔널 도서상, 노벨상 등을 수상한 이력이 있거나 이런 상을 받게 될 잠재적 재능을 가진 동시대 아주 뛰어난 작가들의 책들만 출판하는 출판사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책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영역판으로 새롭게 번역된 저자의 이름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바로 대작 중의 대작인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번역자로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1,2권 합본판의 번역서 제목이 <Swan's way>로 번역되어 다시 한번 이 책을 재독 하게 만들었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간간히 뉴요커 팟캐스트에 나와 자신이 직접 선별한 주요 단편들이나 시를 읽어 주는데 나는 그녀가 소개한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으며 사무엘 베게트의 희곡에서 눈부신 언어의 유희와 향연을 맛보게 되었고 카프카가 남긴 다양한 잡 글과 편지 글 속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카프카의 모습까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두툼한 단편적인 글들을 첫 장 부터 읽게 되면 온갖 종류의 재료들을 만나게 되는데 필시 시중에 출간 되고 있는 대중적인 잡지로 다양한 연령대들의 목소리가 담긴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특정 화자의 시점이나 서술이 뚜렷하지 않은 그녀의 문장에는 평범한 일상 부터 시작해서 결혼과 육아, 사랑과 이병, 투병과 상실, 애도와 슬픔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겼던 위인들의 뜻밖의 사적인 모습까지 읽을 수 있다.
어떤 글은 일기처럼 끄적였거나 어떤 글은 심리 분석을 했고 어떤 글은 보고서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문장을 원문으로 읽어보면 시적인 음률이 있다.
앞 서 언급한
-새뮤얼 존슨은 분개한다:
스코틀랜드에 나무가 그토록 적다는 것에.
이 글의 원문은
Samuel Johnson Is Indignant:
that Scotland has so few trees.
단어와 단어 사이의 리듬, 문장의 구조가 지닌 음악성, 중의적인 표현으로 쓴 이 문장 속엔 새뮤얼 존슨이 평생 동안 무엇에 매달리며 자신의 인생을 바쳤는지 그녀는 단 몇 단어로 정의했다.
[나는 대체로 '실험적이다'라는 평가를 거부한다. 그 말은 보통 전통에서 벗어난 형식의 소설이나 시. 혹은 어떤 형식이든 당혹스럽거나 기이하고 낯설게 보이는 것들에 반사적으로 붙이는 딱지다.]
-리디아 데이비스
전 남편 폴 오스터는 그녀가 어떤 문장을 완성하면 뒤이은 스토리로 이어서 완성하지 못했다고 회고 했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생계를 위해 번역을 하다 원작자가 남긴 편지 글을 읽기도 했고 그러다 자신의 글을 쓰는 작업을 동시에 하면서 남편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까지 해야 했고 아이까지 돌봐야 했다.
그러기에 이토록 오랜 세월 끝에서야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완성 할 수 있었다.
[나는 백 이십 년 쯤 오래된 사전을 갖고 있는데 올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위해 이 사전을 사용해야 한다.]
-오래된 사전
부커상을 수상하고 그동안 여러 스타일로 쓴 책들이 잇따라 출간 되는 동안 리디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언어로 번역된 그 책을 옆에 놓고 번역된 언어를 학습하며 사전을 뒤적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오늘 책장에서 사전을 꺼내면서 나는 내가 어린 아들보다 이 사전을 훨씬 더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전을 다룰 때마다 나는 사전이 다치지 않게 최대한 조심한다. 그러니까 내 주된 관심은 사전을 다치지 않게 하는데 있다.]
-오래된 사전
항상 활자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던 엄마의 시선을 벗어나 버린 아들 다니엘은 무시무시한 마약 갱단 두목의 돈을 훔쳐서 감방 살이를 하고 몇 배로 돈을 갚아 겨우 풀려난다.
[왜 나는 아들을 적어도 오래된 사전만큼 잘 대우하지 않을까? 어쩌면 사전은 딱 봐도 부서지기 쉽게 보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책장 모서리가 바스러 질 때는 모를 수가 없다.]
-오래된 사전
약물 남용보다 더 무서운 행동을 서슴치 않게 했던 아들 다니엘은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떠돌이처럼 살다 한 때 갱단원이였던 친구랑 함께 거주하고 잠시 집을 나선 사이 친구는 마약 조직원에게 살해 당하고 이후 다니엘은 좀도둑 스러운 생활을 청산하고 무대 공연 예술가로 활동하며 결혼을 하고 새 삶을 시작한다.
[나는 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만, 늘 알지는 못한다. 무엇이 필요한지 알 때조차 그걸 늘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매일 여러 번 나는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못한다. 내가 오래된 사전을 위해 하는 일의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는 내 아들을 위해서도 할 수 있을 텐데..]
- 오래된 사전
아들 다니엘은 여러 환각 증세에 시달리며 정신 분열증세를 보이다 10개월 된 자신의 딸에게 헤로인 성분의 약물을 주입해서(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밝혀지진 않았음'조사 당시 자신은 약물 흡입으로 혼수상태였다고 증언함) 아이는 혼수 상태에 빠져 병원에 입원한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딸의 학대와 살해 혐의로 체포되어 브루클린 법원에 거액의 보상금을 내고 보석으로 풀려 나자 마자 사흘 만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지하철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머리, 심장
심장이 운다.
머리가 심장을 도우려 애쓴다.
머리가 심장에게 상황을, 다시,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기 마련이여. 모두 사라지는 거야.
하지만 지구도, 언젠가는 사라져.
그러자 심장은 조금 괜찮아진다.
그러나 머리의 말은 심장의 귀에 오래 남지 않는다.
심장은 이 일이 너무 낯설다.
그들을 되찾고 싶어, 심장이 말한다.
심장에게는 머리밖에 없다.
도와줘, 머리, 심장을 도와줘.
여기, 반세기 동안 문장을 이어나간 이 책에 쓰여진 글들은 어떤 불안, 강박, 위압, 공포 그리고 소통의 장벽처럼 불쑥 불쑥 나타날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작가의 이야기 인 것 같고 어떤 이야기는 지난 시대를 살다 간 이들의 이야기 처럼 읽혀지다 돌연 질문도 없이 대답만 있는 페이지를 넘기다 프랑스어 초급반 강의록까지 읽게 된다.
어떤 형식에도 없는 이 책에 실려 있는 글에는 가공되지 않고 세공 되지 않은 단어들이 만나서 말도 안되는 감정으로 마무리 된다.
이 책은 어떤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좋다.
앞 페이지를 읽다가 뒷 페이지를 읽어도 좋고 재차 읽었던 페이지를 읽어도 좋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형식에도 없는 말도 안되는 문장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이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헬렌은 인내심이 대단하기 때문에 빛과 어둠 정도 밖에는 보이지 않을 때도 저녁에 먹을 감자를 천천히 깎곤 했는데, 손 끝으로 더듬으며 감자 싹을 찾아내 감자 칼로 하나씩 파냈다.]
-헬렌과 바이: 건강과 활기에 대한 연구 중에서
읽고 있는 이야기의 끝을 당장이라도 알아 버리겠다고 달려들지 않고 차분히 하루에 한 장 씩 며칠에 한 장씩 읽다 보면 대담하면서도 독특한 문장의 맛 언어의 묘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