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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1852년 노르웨이 서북쪽 해안에 자리한 스타방에르 출신의 한 청년이 바다 건너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 등록한다.
갓 스무살을 넘긴 청년은 소수의 퀘이커 교도들이 모여 살고 있는 낙후된 섬의 가난한 농부 집안출신으로 조선소 노동자였지만 뛰어난 솜씨와 성실함을 인정 받고 조선소 사업체를 운영하는 거부 한스 가브리엘 부크홀트의 후원을 받고 독일로 건너간다.
청년은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최고의 회화 교수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노르웨이 낭만주의 화파의 거목인 한스 구데(Hans Gude 1825-1903)의 문하생으로 들어 간다.
1년 후 1853년 늦가을 오후 여전히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 청년은 홀로 이런 독백을 주절 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아주 멋진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다.'
청년은 한스 구데가 자신의 그림을 탐탐 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의 아틀리에에 자신의 그림을 갖다 놓지 않을 것이다.
청년은 자신의 그림을 평가 받지 않으려고 오직 침대에만 누워 있다.
'나는 오늘 아틀리에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 청년이 누워 있는 곳의 집안의 다른 방에는 그가 짝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나의 사랑 헬레네도 이 집에 있다.
내 사랑 헬레네. 나는 자취방 침대에 누워 있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을 가진 헬레네는 집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귀를 기울인다. 그녀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청년이 하숙하고 있는 곳은 예거호프슈트라세에 자리한 집으로 남편과 사별한 그 집 주인 빙켈만부인과 그의 남동생 그리고 딸 헬레네가 살고 있다.
내 사랑 헬레네.
나는 당신이 머리를 보았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당신에게 다가간 뒤 두 팔로 당신을 안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당신의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파묻고 호흡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귀에 대고 이제 우리는 연인 사이냐고 나직이 물었다.
당신은 내 귀에 대고 그렇다고 속삭였다.
그래요.
이제 우리는 연인 사이에요.
청년의 망상 같은 독백은 과거와 현재 사이를 쉼없이 오고 가면서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하나씩 보여 준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제 삼촌 말이에요.
삼촌은 당신이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했어요.
청년은 맨 처음 뒤셀도르프에 도착 한 그 날의 시간으로 돌아가 기억의 회로를 돌리듯 주절거리기 시작한다.
나, 화가, 풍경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거장 한스 구데에게 그림을 보여 줄 용기를 낼 수 없었다.
한스 구데는 그림을 잘 그린다.
티데만도 그림을 잘 그린다.
그리고 나도 그림을 잘 그린다.
내가 아는 단 한 가지 사실은 당신에게 가야 한다는 것 뿐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는 온종일 당신을 그리워 한다.
헬레네에 대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청년은 하숙집을 나와 거리를 배회하며 예술 아카데미 교수진과 동료들과 도저히 가까워 지지 못했던 이유, 하숙집 주인인 빙켈만 부인과 그 주변인들의 태도, 단골 술집 사람들 그리고 헬레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두서 없는 독백을 하는 동안 청년의 주변 인물들은 그가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고 있다.
거장에게 재능을 인정 받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갖지 않고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소비하는 사회에서 엄격한 금욕주의적 종교관을 갖은 가난한 퀘이커 교 신자의 그림은 아무도 사가지 않고 청년의 그림은 어디에도 전시 되지 못한다.
하숙집에서 쫓겨난 청년은 수트 케이스를 끌고 다니며자신의 사랑 헬레네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다.
그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가족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말카스텐에 있는 내 사랑 헬레네를 만나기 위해 앞으로 걷기만 할 것이다.'
그토록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머나먼 고향 땅에서 독일에 온 청년은 희고 검은 천에 둘러 싸여서 저주 받은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은 채로 정신병원에 갇혀 버린다.
'나는 노르웨이로 돌아가서 그림을 그릴 것이다.
나는 햇살 아래 자리한 아름다운 풍경,
구름 아래 자리한 아름다운 자연을 그릴 것이며,
헬레네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디를 가든 항상 헬레네와 함께 있을 것이다.'
병실에 누워 있는 청년은 병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갈매기의 날개 짓을 응시한 채 이렇게 중얼 거린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
나는 두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
나는 갈매기를 떠올려야 한다.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두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 넣을 수 밖에 없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있다.
나는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강렬한 햇살 아래의 풍경을 너무나 오래 바라 보았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미쳐 버렸고, 지금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있다.'

1830년 노르웨이 스타방에르에서 태어난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Lars Hertervig 1830-1902)는 1856년, 24살의 나이에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30년 동안 극도의 가난과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밀가루 반죽과 석탄 가루로 덧칠 한 그림을 그리다 생을 마감한다.
그의 그림은 1914년 부터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처음 전시가 열리고 나서야 뒤늦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한 작가가 그의 생애를 추적하고 있다.
1991년 늦가을 저녁, 오사네: 비드메가 어둠 속의 비바람을 헤치며 걷고 있다.
그는 삼십 대 중반의 작가. 낡은 코트를 걸친 그가 길을 걷고 있다.
오늘 비드메는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그림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우연찮게 마음먹었다.
오슬로 거리를 걷던 중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피하기 위해 오슬로 국립 미술관으로 들어간 작가 비드메는 그곳에서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가 그림 <보르그외위섬>이라는 풍경화 작품을 보게 된다.

island Borgøya,1867,Lars Hertervig
인생의 최대의 경험, 순간의 경험을 단 한 장의 그림을 통해 느낀 작가 비드메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행복한 감정에 휩싸인다.
어떤 것도 성취한 적 없는 실패한 작가가 자신의 먼 친척인 라스 헤르테르비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눈물을 훔치며 구름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비밀스러운 본성을 예술의 형태로 표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에 생애 관한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는다.
퀘이커교 신자였던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신자 등록증을 확인하기 위해 오슬로의 한 교회에 찾아간 작가 비드메는 그의 이름이 등록되지 않았다는 ..아니 어쩌면 교회측에서 임의로 지워 버렸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그 역시 한 때는 노르웨이 국교회 신자 였지만 가톨릭으로 귀의 했기에 화가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이름도 신자 등록 명단에서 찾지 못한다.
비드메는 세상의 빛 속으로 사라져 버린 화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어둠 속 빗줄기를 지나 그가 마지막 생을 보냈던 고향 땅을 찾아간다.
시간은 다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1902년 초 가을 스타방에르의 한 농가, 성실하게 퀘이커 교 신자로 살아가고 있는 헤르테르비그 가족의 모습이 나타난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동생 라스를 돌보고 있는 누나 올리네는 치매 증세를 보이며 지팡이를 짚지 않고는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노쇠했다.
스타방에르에서 가장 작은 집에 살고 있던 누나 올리네는 아이를 많이 낳아 길렀고 그 아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난 후 병들어 버린 동생을 돌보고 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던 동생은 이제 누나가 음식 재료로 쓰던 것들로 낙서 같은 그림만 그리고 있다.
왜 그래, 라스 ?
아무것도 아냐.
거짓말, 뭔지 말해 봐.
아냐, 라스가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가 덧붙였다.
산이 거뭇거뭇해
이젠 바다도 거뭇거뭇하게 변했어.
누가 너에게 나쁜 짓이라도 한 거야?
허름한 아버지의 지붕 위 다락방에서 세상과 단절한 동생을 바라보는 누나 올리네
나는 몸을 일으켜 하늘을 쳐다 보았다.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있었다.
나는 바다를 바라 보았다. 검푸른 바다에 하얀 파도가 넘실거렸다.
나는 라스가 하늘 같다고, 바다 같다고 생각했다.
항상 변하는 사람, 밝음에서 어둠으로, 흰색에서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가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바다와 똑같은 사림이라고 ..
바다 같은 사람이였던 화가 라스는 노르웨이에서 극소수 퀘이커교 신자로 주변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며 '접근 금지' 같은 모욕을 당했다.
신의 말씀대로 살아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의 아버지는 선한 사람들을 이용해서 성실한 농부들이 키워낸 소와 수확물을 착취한 교활한 성직자들에게 속아 영원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바닷가 어부들이 팔다 버린 물고기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문고리에 걸린 생선 옆에는 라스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한 남자와 말,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산등성이. 그림은 대부분 누런색과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라스는 어느 날 그녀에게 뛰어와서 이 그림을 주고 갔다.
말쑥하게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멋진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며 고향 땅을 떠난 동생은 2년 만에 미쳐서 돌아 왔다.
병원 치료 후 더 이상 거리를 걷는 것도 사람들과 대화조차도 하지 않은 동생은 수시로 바닷가로 뛰어 가 보트 창고 외벽에 기댄 채 온 종일 하늘만 바라 보았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누나 올리네는 동생이 남긴 그림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빛을 보게 된다.
멜랑콜리아 I-II는 엄격한 종교적 신념으로 살아가는 한 가족의 가난과 고통이 사회적 성취를 이루기 힘든 제도와 관습의 장벽에서 정신 착란과 분열증으로 생을 마감 할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한 예술가와 치매를 앓고 있는 그의 누나 올리네의 모습이 다성음을 쌓아 올리듯 화가의 1차적 독백 시선과 그의 가족 중 일부인 누나 올리네의 시점으로 전개 된다.
자신의 작품을 인정 받지 못하는 화가의 내면의 고백 같은 독백은 반복적인 단어가 중얼거리듯 이어지면서 독자들은 페이지를 넘길 수록 화가의 과거와 현재, 환영과 환청이 뒤섞이며 문장이 어느 새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채 세상 밖으로 사라져 버린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음성을 듣게 된다.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끊임없이 사랑하는 여인 헬레네를 찾고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보다 사랑할 대상인 헬레네만 애타게 찾으며 어디를 가든 그녀와 함께 가겠다는 꿈 같은 망상에 사로 잡혀 있다.
정신병원에 갖혀 버린 화가는 사랑할 대상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더 이상 손에 붓을 쥐지 않고 자신의 두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 넣고 자위를 한다.
나는 산드베르그 박사가 말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 안된다.
나는 갈매기 소리를 듣는다.
그려할 대상,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린 화가는 하늘 위에서 쏟아지던 빛은 구원의 빛 사랑의 빛이 였을까...

House on Islet and Two Boats,Lars Hertervig ,1856
난 석탄과 물을 사용해. 작은 나뭇가지 끝을 깎아 내서 그림을 그린 다음에 손가락으로 번지게 한 거야
난 그게 구름인지 몰랐어.
잘 보면 구름인지 알 수 있을 거야.

거뭇거뭇하고 어두운 그림, 생명을 머금은 어둠, 빛을 발하는 어둠을 세상에 남겨 놓고 가버린 화가, 그가 보았던 세상을 작가 욘 포세는 시적인 음률과 언어로 되살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