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an Carlo Restaurant, 1952 ⓒ Saul Leiter Foundation
한 장의 사진을 하루에도 여러 번 바라보는 시간 동안 사진의 이미지는 변하지 않는다.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에는 시간의 흐름이 새겨져 있다. 이미지에 투영된 사람들은 정지해 있지만 사진 속에 담긴 모든 것들은 어쩌면 사라져 버린 그 모든 것들일지 모른다.
하나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포착한 사람, 흘러가는 시간을 회화 적 이미지로 구현한 사람, 사진 작가 사울 레이터 (Saul Leiter)

1950년대 오로지 흑백 사진만이 예술 작품으로 평가 받았던 시대에 그는 55년 동안 다양한 색채로 일렁 거리는 뉴욕 거리의 모습, 사람들의 움직임을 카메라에 담았다.

Cap, c.1958 ⓒ Saul Leiter Foundation
그는 사물과 사람의 명료하고 또렷한 모습이 아닌 흐트러지고 번지고 가려지고 지워지는 듯한 페인팅 기법의 사진으로 이미지에 시적인 상징성을 부여 하며 묵묵히 자신만의 실험적 스타일을 고수했다.
1923년 독실한 유대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울 레이터는 예술 학교에 진학 하고 싶었지만 탈무드 학자인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치자 랍비 학교를 중퇴하고 무작정 뉴욕으로 떠난다.
“평생 유대인을 직업 삼아 살긴 싫다고 아버지에게 심한 말을 했죠. 탈무드 학자이셨는데.”

Sailors c1952 ⓒ Saul Leiter Foundation
1948년 뉴욕에서 그림을 공부 하던 사울 레이터는 추상 화가 리처드 파우제트 다트(Richard Pousette-Dart)의 권유로 카메라를 쥐고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Carol Brown 1952 ⓒ Saul Leiter Foundation
호기심으로 찍기 시작한 이미지들이 1960년대 들어서면서 <라이프> , 뉴욕현대미술관 등에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주요 패션 잡지의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게 된다.

Phone Call, 1957 ⓒ Saul Leiter Foundation
그의 렌즈가 포착한 세상은 수 많은 이들의 틈을 비집고 헤쳐나가지 않고 유리창을 중간에 두거나 자동차, 빌딩, 우산 등이 만들어낸 공간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의 카메라는 스치듯, 지나치듯, 속삭이듯 그렇게 세상을 바라본다.

Street Scene, 1959 © Saul Leiter—Courtesy Howard Greenberg Gallery, New York
“빗방울이 맺힌 유리창이 나한테는 유명인을 찍은 사진보다 훨씬 흥미로워요. 빗방울은 뭔가 오묘하잖아요.”
사진의 목적은 무엇일까? 순간을 포착한 이미지로 누군가에게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면 분명 이 사진들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예술 작품으로 불려 져야 한다.
스스로를 그저 평범한 사진 찍는 사람 일 뿐 이라고 말하는 사진가 사울 레이터

Postmen 1952 ⓒ Saul Leiter Foundation
“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에요. 난 그저 누군가의 창문을 찍죠. 그게 뭐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미국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서 무려 66년 동안 살았던 사울 레이터
수십 년 동안 그의 사진들은 <하퍼스 바자> <엘르> <에스콰이어> <보그> 같은 잡지에 새겨졌지만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 진 건 그가 80세에 접어 들었을 때였다.
2005년 뉴욕 출장길에 들른 서점에서 우연히 그의 사진을 본 독일 유명 출판사 '슈타이틀'의 대표가 독일로 돌아가 그의 첫 사진집 < Early Color >를 발행한다.
흑백에서 컬러로 사진 기술이 넘어가는 시대인 1950년대 컬러 필름은 인화 후 사진을 자를 필요 없이 이미 잘라서 담긴 슬라이드 포장 형태로 판매했다.
잘라 낼 필요 없는 편리한 컬러 필름들은 어두운 구도 속에서도 선명한 색감을 보여 줬다. 그는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에서 나오는 변질된 색감을 차용 했고 유리에 반사된 모습을 촬영하는 것을 즐겼다.
수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반 세기 넘도록 세상은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Canopy, 1958 © Saul Leiter—Courtesy Howard Greenberg Gallery, New York
'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어요. 그냥 누군가의 창을 사진에 담았을 뿐이에요. 그렇게 대단한 업적은 아니에요. (...) 그(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그(나)에 대한 이야기를 남길 자격이 없어요.'
천천히 빛을 본 그의 필름들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고 그는 사진 계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다.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55년 동안 거주 했던 사울 레이터는 공간의 변화도 없고 구도와 대상들도 바뀌지 않았다. 달라진 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뿐, 사울 레이터는 50년대 색감으로 21세기 시간의 흐름을 보여줬다.

Red Umbrella, c.1958 ⓒ Saul Leiter Foundation
창문, 빗방울, 우산, 거리
“세상의모든 것은 사진으로 찍힐 만해요. 사진의 좋은 점은 보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겁니다. 온갖 것을 음미할 수 있게 해주죠.'
'내 삶은 활용하지 못한 기회로 가득하다. 며칠 전 나는 책장 사이에 끼워 둔 편지 한장을 발견했다. 30년 가까이 그 자리에 있던 것이었는데, 열어보니 전시회 초대장이었다.'

스스로 유명해지는데 큰 관심이 없었던 사울 레이터는 인화 조차 하지 못한 필름 박스들을 아파트에 쌓아 두고 살았다.
영국의 영화 제작자이자 촬영 감독인 토마스 리치는 2005년도 출간된 사울 레이터의 사진 집을 보는 순간 “이렇게 특별한 눈을 가진 사진 작가가 어떻게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는지 믿을 수 없었다”며 사울 레이터에게 말이라도 걸어 보고 싶어 무작정 뉴욕으로 건너 갔다.

토마스 리치 감독은무려 3년 동안 사울 레이터와 친분을 쌓아가며 설득해서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영상에 담았다.
그의 사진들은 21세기에 찍었다고 해도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색채와 프레임 감각으로 사진 속에 담긴 뉴욕은 단순한 일상을 넘어 은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Taxi, 1957 © Saul Leiter—Courtesy Howard Greenberg Gallery, New York
그는 평생 동안 뉴욕의 고가 도로와 자동차, 사거리의 모습, 비와 눈이 내리는 날의 풍경, 공원을 서성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매혹 되어 유명인들의 멋진 모습이 아닌 거리를 지나다니는 평범한 이들의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했다.
“난 그저 남의 집 창문이나 찍는 사람이에요. 나름대로 괜찮은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런 걸로 잘난 척 하면 안되죠. 근사한 작품을 만든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난 남들이 추켜 세운다고 혹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News Stand, c.1958 ⓒ Saul Leiter Foundation
지나가는 버스, 상점의 쇼윈도, 이정표 등 거리의 표정 속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삶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아무런 의도나 계획 없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나가 느긋한 시선으로 사진을 찍는 그의 작업실에는 인화하지 않은 슬라이드 필름들, 아무렇게 나 쌓아둔 박스들, 네거티브 필름들, 자신이 직접 일일이 들춰봐야만 알 수 있는 지난날 흔적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는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잠 못 들고 싶지 않아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다.

“물건이란 한 때 내 것이었다가 다른 사람한테 가는 거예요. 죽을 때 가져갈 수 없잖아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갖는 것이 아니라 뭘 버리느냐 입니다.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도 실은 그리 걱정할 게 아니에요.”
단,그가 버리지 못하는 것들은 연인이 세상을 떠날 때 남겨 놓고 간 물건들로 버리지도 정리하지도 어딘가에 맡기지 못한 채 내버려두었다.

그의 평생의 동반자 솜스 벤트리는 세상이 사울의 이름을 모를 때도 그의 사진이 대단히 훌륭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사울이 보낸 작은 메모, 봉투 조차 버리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었다.
1960년에 만난 두 사람은 각자의 공간에 거주 하며 평생의 동반자로 살았다.

'나는 가끔 그녀가 멋진 스튜디오 속 판화 모음 집처럼, 그녀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줄 수 있는 매우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죠. 사람들이 내 일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지 않는 시기에도 솜즈는 저를 믿었어요. 그녀는 그런 의미에서 항상 헌신적이었죠. 그녀는 제가 비범한 색채 감각을 가진 아주 훌륭한 사진 작가라고 생각했거든요.'
2002년에 연인이 세상을 떠나고 3년 후 그의 이름, 작품은 전 세계인들을 매료 시킨다.

사울 레이터는 거리를 걷다가 무심코 바라보았던 건물 유리창에 흉측한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며 이제 자신은 볼품없는 노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2013년 그는 촬영을 마친 그 해 다큐 개봉 일을 몇 일 앞둔 11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삶의 끝자락을 한 편의 다큐에 담은 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In No Great Hurry: 13 Lessons in Life with Saul Leiter)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아름다움을 찾는 게 중요해요. 세상의 근사한 것들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거요. 변명하지 말고 당당하게 즐겨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