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삼 년 전 은하가 차디찬 회복실에서 깨어나 한 결심은 이런 것이었다.

삶에 피하지방처럼 껴 있는 모든 영양가 없는 관계들과 결별해야지.

그것들이 은하 인생에 달라 붙어 얼마나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일으켜왔는지는 막 수술을 마친 은하의 몸이 증거하고 있었다.]

                                                                                         -<은하의 밤> 중에서 


마흔 여섯의 은하는 유방암 선고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주변 지인들에게는 갑상샘암에 걸렸다며 쉽게 회복 될 것이라고 속였다.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은하는 엄마와 함께 다녔던 성당 마저 발길을 끊어 버리며 이렇게 스스로 벌을 받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수술 후에 찾아 온 극심한 통증,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하면서 은하는 자신의 생명이 이렇게 고통 속에 서서히 산화 되고 있다는 사실에 울적해졌다.

미혼인 채로 늙어가는 건 괜찮지만 어느 날, 치료 중에 홀로 죽게 된다면,,,이라는 자조적인 생각에 사로 잡힌다.

'고모, 요즘엔 부모도 자기 자식한테 그런 기대 안 해요. 바라지 마세요.'


암 발병이 시작 되기 전 은하는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 작가로 한 순간도 쉼 없이 달려 왔다. 암 투병을 하는 동안 가족들 보다 직장 동료 후배들이 은하의 상태를 더 걱정해주며 항암 치료로 고통스러워 할 때는 집안 청소와 설거지를 해주는 후배, 신입 막내 작가들이 살뜰 하게 챙겨주었다.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발병 이전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며 그런 삶에는 오로지 고독 크기를 잴 수 없이 크고 깊은 고독만이 필요 하리 라는 결론이었다.]


은하는 암을 도려내고 난 후 육체의 한 부분이 떼어져 나간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홀로 남미로 떠난다.

그리고 마침내 이른 봄, 방송국으로 돌아 와 지지부진한 시청률의 늪에 빠져 버린 예능국으로 복귀한다.

남들 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 한 은하의 바로 옆 자리에는 보도국 아나운서 출신의 딱지가 붙은 덩치가 산 만한 남자 오태만이 앉아 있다.

조직 개편을 한 날 보도국에서 예능국으로 굴러 들어 온 불운한 낙오자 오태만은 구체적인 업무 담당 조차 받지 못한 채 ,섭외로 바삐 뛰어다니는 은하의 동태만 살피고 있다.

남 국장은 4차 산업 시기에 귀농하는 청년들의 인생 역전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암투병에서 살아 돌아온 은하는 사람의 인생이 이런 식으로 역전 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보도국 출신 오태만은 뉴스 보도 주제를 찾듯 취재를 하기 시작한다.

조직 생활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로 군림하는 자는 바로 한가하게 유유자적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상사이고 더 두려운 존재는 가족 모두 해외로 보내서 홀로 살고 있는 기러기 신세로 24시간 회사 일에 매달리며 직원들에게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는 상사 일 것이다.

인생 역전한 귀농 청년들에 관한 프로그램의 이름은 <마망자들>로 정해지자 프로그램을 이끌고 채워 나갈 진행자와 게스트들을 섭외 하고 프로그램의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 미션과 상금을 걸기로 한다.

상금의 액수를 얼마로 정할 지 실강이를 벌이는 동안 은하는 정규직인 담당 피디 지민과 충돌한다.

아무리 이름난 작가여도 방송국의 개별 프로그램들 방송 되는 동안에 일하는 계약직이기 때문에 자칫 정규직 피디들과 충돌 했다가는 곧바로 일자리를 잃게 되기에 아홉 번 도전 만에 겨우 아나운서 시험에 붙은 오태만에게 이런 저런 하소연을 늘어 놓는다.

보도국에서 예능국으로 굴러 들어 온 오태만은 아나운서 시험에 여덟 번 떨어 졌을 때 훌쩍 쿠바로 떠났다. 은하는 항암 치료 후 암 세포가 제거 되자 마자 홀연히 쿠바로 떠났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함께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굽던 피디 지민은 암 항암 치료 후에는 단백질 섭취가 필수 라며 자신의 엄마가 유방암 투병 했다는 말을 꺼낸다.

은하가 자신의 암이 갑상샘 암이라고 속였지만 아이돌 출신 방송인을 통해 유방암 투병 중이라는 걸 그녀의 모든 지인들이 알게 되었다.


'모두 방송계에서 계속 볼 사이잖아요. 이 바닥에서 위성처럼 빙글빙글 돌며 만나고 헤어지고 할 사이요. 방송국이 폭발하지 않는 한 함께 있을 운명이고요.'

뉴스 화면을 장악 하기에는 인물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보도국에서 쫓겨난 오태만은 오로지 발로 뛰어 다니는 취재와 섭외가 중요한 예능국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프로그램 장소를 찾느라 무리 할 정도로 기여코 산에 올라가는 오태만, 입과 코를 가리고 있던 마스크가 순식간에 불어 온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오태만은 젖어 있는 덤불에 미끄러져서 발목을 다친다.

은하는 자신도 함께 미끄러질 수 있는 상황에 발목을 다친 태만을 부추켜서 겨우 산 아래로 끌고 내려 와 간신히 연출 부 사람들에게 구조 요청을 한다.

섭외 장소인 식당에 도착한 은하는 주인 할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식당 안과 방을 둘러 보다가 대 식구가 모여 찍은 사진에 쓰여진 '회갑 기념' 문구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뭐 바랄게 있겄어. 그냥 아프지 마라, 허지.'

'아프지 마라. 죽어서도 아프덜 말고 살아서도 아프덜 말고 그 말벢에 더 있겄어.'

드디어 <마망자>가 방영 되는 날, 방송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 은하는 창밖을 내다 보았다.


눈이 오고 있었다.

은하가 눈 오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 시키고 있는 동안 8시 뉴스가 시작 되기 전까지 후속 작업 편집이 끝날 수 있는지 오태만과 피디 지민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파업으로 시끌벅적한 방송국 내분 상태에서 시작 되는 아홉 시 예능이 성공 할 수 있을까?

시청자들은 방송국의 이런 복잡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보도국에서 추방된 아나운서들의 시위 목소리가 점점 크게 울리더니 뉴스 방송 중에 거리 현장에서 취재 중인 기자 뒷 편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난다.


'국민 여러분, MTN 부당 전보의 진실을 보도하겠습니다! 보도국 정상화 투쟁 중입니다. 저는 앵커 최지영, 김무한, 정치부 기자 주성태...'


뉴스 화면에서 곧바로 광고 화면으로 넘어 가버렸다.

<마망자들> 프로그램 출연 게스트로 준비 중인 오태만을 급히 호출하는 피디와 작가들


'나와, 나와요. 오태만 씨, 지금 사고 났어. 얼른 테이프 틀어야 해. 뉴스 사고 났다고.'

보도국에서 추방된 이들의 항의 시위로 뉴스 방영도 중단 되었고 뒤이어 방송 되는 아홉시 예능 <마망자>는 단 1초도 방영 되지 못했다.

'뉴스에서 그런 사고가 났는데 보도국 퇴사자가 상 받는 프로를 냈어 봐요. 일이 더 커졌겠죠.'

입봉작을 열심히 준비 했던 작가의 울분을 달래는 피디 지민, 첫 예능 방송 작가로 인생 역전의 꿈이 무너져 버린 막내 작가는 은하에게 쿠바에 가서 무엇을 위로 받고 구원 받았는지 묻는다.

'아, 그게 쿠바 였구나 페루 아니고.' 라며 말을 돌리며

'응, 구원이 있긴 있었더라고.'

은하는 쿠바에서 사흘 째 되던 날 문득 바다라도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해변으로 나갔지만 신기한 듯 홀로 있는 동양인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워서 한적한 숲 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걷고 또 걷다가 목 속 깊은 곳까지 모래 알들이 올라오듯 갈증이 차올랐다.

물탱크에 연결된 수도꼭지에 입을 대려는 순간, 앙상하게 말라 버리고 송곳니가 멧돼지처럼 입 밖으로 튀어나온 개와 맞닥뜨렸다.

무서움에 뒤로 물러 선 은하가 수도 꼭지를 돌리자 개는 물이 뿜어 나오는 호수에 혀를 대로 찹찹찹 마시기 시작했다.

갈증에 목 마른 개와 은하, 홀로 이곳을 떠도는 개의 모습을 보며 은하는 자신은 절대로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은하는 창밖을 한번 바라보았다. 회사가 보도에 세워 놓은 대형 전광판으로 눈이 계속 내렸고 은하는 잠깐 조카 겨레의 전화번호를 눌렀다가 신호가 가기 전에 끊었다.

잠시 후,,,


'고모 아까 전화 잘못 걸었어요?'

'아니'

'ㅋㅋㅋㅋ 다행이다.'

'고모 이제 안 아파요? 다 나았어요?'


크리스마스 이브, 새 하얀 눈이 하늘에서 흩날리는 동안 은하는 홀로 누운 방안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외치지도 않았고 하느님에게 기도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어떤 용서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 홀로 있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구원 되지 않는 날, 그저 그렇게 크리스마스 날은 흘러가고 있었다.


[멋지다. 멋져. 방송하는 사람은 말이야. 바로 은하 작가처럼 넓은 세상을 체험해야지. 망망대해를 헤밍웨이 처럼 일엽편주로 나가서 청 새치도 낚고 고등어도 낚고, 이 작업 해보고 저 작업 해보고, 그래서 은하 작가가 훌륭한 작가이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거지]


명절이나 자신의 생일 조차 제대로 챙기거나 기념하지 못한 채 오로지 방송 프로그램을 위해 살아 가고 있는 사람들....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이 잃은 사람에게 전해주던 그 기적 같은 입김들이 세상을 덮던 밤의 첫눈 속으로....'


김금희 작가가 독자들에게 내미는 선물 같은 스토리 <크리스마스 타일>

 우리 모두 각기 다른 어려움과  슬픔 그리고 기쁨과 고독을 경험하며 2022년의 시간을 통과 하고 있다. 

한 해의 끝 자락 11월, 그리고 12월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르게 되면 앞 서 흘러간 시간들을 이겨낸 우리 모두에게 축복하듯 하늘 높은 곳에서 새하얀 눈송이가 쏟아지길 바란다.




하늘 가득 눈 가루가 내릴지 모르는 그날, 2022년 12월 25일, 우리 모두의 행복을 빌어주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2-11-23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말이 되어 가니 크리스마스 선물로도 괜찮겠네요. 저도 이 책 배송 기다리고 있어요. scott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scott 2022-11-23 22:41   좋아요 1 | URL
네, 책 표지가 이뻐서
다이어리로 주는 데서 구입 선물 하고 있습니다.
서니데이님도 이 책 구입 하셨군요.

그다지 춥지 않은 11월
서니데이님 건강 잘 챙기세요 ^^

책읽는나무 2022-11-23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다리고 있어요.
따뜻하고 아름다운 2022년의 크리스마스를요.
책 표지처럼 이쁜 크리스마스가 빨리 왔음 좋겠네요^^

scott 2022-11-23 23:19   좋아요 1 | URL
나무님도
금희 작가님의 엽서 받아 보실 겁니다 ㅎㅎㅎ

이번 겨울 눈 보다 비가 많이 내린다는 예보가 ㅎㅎㅎ

어쩌면 12월 25일 비가 내릴 지도 몰라여 ㅎㅎㅎ

나무님 둥이들과 트리 장식 멋지게 하실 것 같습니다 ^^

책읽는나무 2022-11-23 23:39   좋아요 1 | URL
앗!! 아직 금희 작가님 책은 안샀고, 크리스마스만 기다리고 있네요ㅋㅋㅋ
엽서가 포함되어 있나요???
사진을 확대하니까 진짜 손글 엽서네요?? 노안이 심해 잘 안보였어요ㅜㅜ

scott 2022-11-23 23:43   좋아요 1 | URL
엽서가 들어 있습니다 (작가님 손글씨가 인쇄된 ㅎㅎ)

노안이시라뇨 ㅠ.ㅠ


12월엔 나무님이 직접 셀렉트 하신 굿즈 구경 시켜 주실 거쥬 ^0^

희선 2022-11-24 0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12월 25일엔 눈이 오면 좋겠네요 십일월에 첫눈이 오기도 했는데, 눈이 올 기미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밤엔 좀 춥지만... 비라도 좀 와서 건조함을 없애야 할 텐데... 어제 조금 내렸군요 그렇게 조금 내리는 걸로는... 비 오고 나서 바람이 조금 차가워졌어요 방송국 사람은 다른 사람처럼 이런저런 날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저도 그런 거 별로 생각하지 않고, 방송국 사람하고는 다르게 아주 시간 많지만... 성탄절엔 모두 평화롭기를...


희선

scott 2022-11-24 10:57   좋아요 1 | URL
차가운 공기가 아래로 내려 오지 못한 채 증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비가 내릴 지도
12월에는 비오는 날이 많다고 합니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거나 영하로 기온이 안 떨어지면 각종 병충해들이 죽지 않아서 다음년도에는 질병이 창궐,,,,

희선님의 성탄절도 평화 롭기를 바랍니다 ^^

반유행열반인 2022-11-24 0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 받아 놓고 펼쳐보지도 않고 꽂아뒀다 scott님 글 보고는 펼쳐서 엽서 확인했네요 ㅋㅋㅋㅋ 11월25일 발행 되어 있어서 뭐야 미래의 책이야 크리스마스 한 달 전 맞추고 싶었어요 언니? (속으로) 했는데 벌써 내일이 11월 25일 ㅋㅋ

scott 2022-11-24 10:59   좋아요 1 | URL
금희 작가 코믹함이 있습니다 ㅎㅎㅎ

자신도 엽서 쓰다가 이게 웬일이라공 ㅎㅎㅎ

미래의 책 <크리스마스 타일>
열반인님의 수능 열독의 후유증을 날려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11-24 14: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올해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연말 분위기도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ㅠ 작가님의 겉으로 보이는 인상과는 글의 색채가 약간은 달라서 보는 재미가 있네요. 미리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책인듯합니다.

scott 2022-11-24 16:03   좋아요 2 | URL
반전 성격의 매력을 갖고 계십니다
김금희 작가님 ㅎㅎ

예년에 비해 길어진 가을
화가님 멋진 오후 보내시기 바랍니다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
 
조선의 大기자, 연암
강석훈 지음 / 니케북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배에서 내려 언덕에 오르니 수레와 말이 길을 메워 갈 수가 없다. 동문에서 사문까지 5리 사이에 독륜차 수만 대가 길을 꽉 메워 몸을 돌릴 곳조차 없다 뛰어나고 화려하며 번화하고 부유한 것이 이미 심양이나 산해관은 비교할 상대가 아니었다. 통주에서 북경까지 40리는 돌을 깔아 길을 놓았는데 수레의 쇠바퀴와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더욱 웅장하여 사람의 심신을 흔들어 편치 않게 만든다.]


1780년 조선조 정조 4년, 조선은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70세 생일인 만수절을 앞두고 축하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한 정조는 자신의 고모부인 박명원을 진하 사절단의 단장역을 맡긴다.

진하 사절단을 이끌고 갈 단장인 박명원은 연암 박지원과 8촌 사이로 황제 건륭제의 생일인 8월 13일이 다가오기 3개월 전 5월 25일 연암 박지원을 진하 사절단의 일원으로 합류 시키고 현장 답사를 하기 위해 떠난다.


당시 연암 박지원은 정조의 최측근이었던 홍국영에게 쓴 소리를 한 이후 화를 입게 될 까봐 지인들이 서둘러 개성 부근 연암골로 피신 시켰다.

개성의 산골 중에 산골에 들어간 연암은 유유자적 하며 살지 않고 그곳에 가장 낮은 계급인 하층민들의 삶을 두루 살피며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어 담을 쌓아 올렸고 목축을 하기 위해 물과 목초가 좋은 곳을 찾아 다녔다.

배고픔을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다는 백성들을 구제 하고 싶었던 연암은 건륭제의 70세 생일 잔치가 열리기 전해 1779년 홍국영이 한양 밖으로 쫓겨나자 진하 사절단 단장이 된 8촌형을 돕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 왔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숭배하고 청나라를 되놈이라고 칭하며 오랑캐 문화 민족이라고 폄하했지만 연암은 조선에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북학파로 이번 사절단 답사에서 청나라 문화를 생생하게 경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1780년 5월 25일 한양을 출발한 사절단은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뻗어 있는 서른 세개의 역참을 거쳐 6월 24일 마침내 한 달 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조회를 보는 정전 앞에 있는 궁전을 태화전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한 사람만이 산다. 그는 성을 애신각라라 하고 종족은 여진족 만주부이다. 직위는 천자이다. 호칭은 황제이다. 직분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일컬을 때는 짐이라 하고 모든 나라에서는 그를 높여 폐하라 부르며 그가 하는 말을 조라 하고 호령하는 것을 칙이라 하며 그가 쓰는 모자를 홍모라 하고 그가 입은 옷을 마제수라고 하며 왕위를 전해 온 것은 4대째요, 연호를 건륭이라 하였다.]

1780년 8월1일 건륭 45년 가을, 조선에서 건너 온 연암 박지원은 70세를 맞이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세계 곳곳의 사신들과 나란히 서서 청 왕조가 그어 놓은 사절단 일원 구역에 섰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화려한 궁궐, 위풍당당한 위용을 드러낸 황제의 모습과 함께 직접 발로 뛰며 정보를 수집하고 생생한 현장을 목격하며 중립적인 식견으로 현지인들의 생활 모습과 함께 광활한 청나라의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문화, 풍속, 음악, 학문 등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하기 시작 한다.

스스로를 삼류 선비로 규정하고 ‘해야 할 말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쓰는’ 자세와 정신으로 무장한 연암 박지원(1737-1805)


그가 기록한 조선 최고의 르포타쥬 <열하일기>의 대장정은 '보고 들은 대로 쓰되 해야 할 말은 하고 써야 할 글은 쓰는'기자' 정신에서 출발했다.

첫째, 남의 나라에서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갑자기 물어볼 수 없다.

둘째, 언어가 서로 달라 잠깐 사이에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외국 사람은 염참을 한다는 혐의를 받을 것이다.

넷째, 너무 깊이 파고 들어가면 그 나라에서 꺼리는 일을 범하기 쉽다.

다섯째, 묻지 않아야 될 일을 물으면 무슨 정탐을 하는 것처럼 된다.

여섯째, 타국에서는 그 나라가 금지하는 것을 지키며 거처 해야 한다.

연암은 '황교문답'편 서문에 청나라 현지 취재 방식의 기준을 정해 놓고 매일 아침 눈 만 뜨면 청나라 사회의 발전상과 주변국가의 정세, 청나라의 외교 정책, 만주족이 장악해 버린 청나라의 한족 구역 관리 정채, 만주족과 한족의 갈등 양상 그리고 청나라의 대 조선 정책들을 주도 면밀하게 관찰하며 현지인들과 끊임없이 접촉했다. 그는 항상 '어떻게 하면 조선이 발전해서 백성들의 삶이 지금 보다 나아질 수 있는지, 조선이 외세의 침입에 어떻게 대처 하고 방어 할지.'깊이 고뇌 했다.

청나라의 상세한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황실의 주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하는 인물들을 만나야 했기에 연암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모색 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고 청나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 나라의 장수와 재상들의 잘나고 못난 것, 풍속의 좋고 나쁜 것, 만주족과 한족의 등용되고 소외되는 것, 고거 명나라의 사정등은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내용이다. 저들도 응당 대답하지 않을 것이며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연암은 청나라 관리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대국 청나라의 위세와 문화, 예법, 음악을 찬미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로 대화의 문을 열어나갔다.

비록 서로 다른 말을 썼지만 종이에 한자로 적어가며 필담을 나누면서 연암은 청나라인들 얼굴 표정에서 드러나는 모습을 통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탐지 해서 청나라가 어떻게 고도의 정치력으로 한족을 다스리는지 그 비책을 하나씩 헤아려 나갔다.

하지만 자신들의 나라가 천하의 제국이라고 생각했던 청나라 왕실이 조선 땅에서 건너온 학자를 자유롭게 활보하게 내버려 둘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연암이 거처를 옮길 때마다 감시원을 붙이며 수시로 어디에서 누굴 만났는지 알아냈다.

연암은 그때마다 조선 땅에서 거대한 제국을 관광하러 온 낭인일 뿐이라며 자신의 신분을 낮췄다. 청나라 관료들과 감시원들은 연암의 소탈하고 호방한 성격에 서서히 마음을 문을 열었고 연암은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에게 조선 땅에서 가져온 약품들을 주며 어디에 누가 자주 가는지, 주요 인물들의 동태와 동선을 알아냈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조선의 약재가 우수하다는 걸 알고 가장 귀한 물건으로 연암은 항상 품 속에 조선 제일의 '청심환'을 품고 다니며 높은 신분의 관료들과 허물 없이 필담을 나누었다.

[내가 계단 아래에 이르렀더니, 조공이 문 밖으로 나와서 맞이하였다. 그가 몸소 나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으라고 하기에 내가 머뭇거리며 사양했더니, 조공도 굳이 내게 먼저 앉으라고 청한다. 내가 '그대는 귀인이시고 저는 먼 나라의 변변치 못한 사람인데, 손님의 예로 대해 주시어 감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라고 했다. 조공이, '당신은 공적인 일로 중국에 오셨소이까?' 라고 묻기에 나는, '아닙니다. 관광하러 귀국에 왔습니다' 라고 했다.]

관리들의 출 퇴근 시간까지 알아낸 연암은 이들의 직위와 봉급까지 정확하게 알아 맞추며 청나라 사회의 통상적인 경제 상황까지 분석해서 그동안 자세하게 알지 못했던 청나라의 무역 규모 실태까지 조사하며 제국의 형세를 가늠해나갔다.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천하의 사대부들을 안정 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지식인들을 장악해야 안정적인 통치와 국정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청나라는 먼저 어떤 학문을 따르는 사람이 많은지 몰래 살폈는데 주자학이었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주자를 공문십철의 반열에 올려 제사 지내고 섬기며 주자의 도학을 황실이 대대로 이어온 가학이라고 선포했다.]

청나라는 한족을 통치 하기 위해 무자비한 힘을 내세우지 않고 우선 지식인들 부터 포섭해나갔다. 그래야만 무분별한 반란과 어수선한 사회를 진정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죄를 묻고 형벌을 내려도 이들의 책은 불태우지 않았다.

연암은 청나라 황실이 주자를 섬기는 정책을 통해 한족의 최고위층과 지식인들의 반란을 잠재우고 민심을 사로잡은 고도의 통치술이라는 걸 알아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에는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가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백성들이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 때문이겠는가.”


당시 조선은 여전히 청나라를 되놈으로 칭하며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 명나라만 숭배하고 있었다.

[대체로 중국 선비들은 그 성질이 자랑하고 떠벌리기를 좋아하며, 학문은 해박한 것을 귀하게 여겨 경서와 역사서를 닥치는 대로 인용하여 이야기하느라 입에 자개바람이 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외교적 언사에 익숙하지 못해 혹 어려운 것을 묻는데 급급하거나 당대의 일을 섣불리 이야기하기도 하고 혹은 우리의 의복과 갓을 과시하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의복과 관을 부끄러워 하는지 살피기도 하며 혹은 바로 대놓고 한족을 어찌 생각하느냐고 다그쳐 물어봄으로써 그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만든다. 이따위 행동은 비단 그들이 꺼려하고 싫어하는 행동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어설픈 실수이고 역시 섬세하지 못한 것이다.]

주자학에 매몰된 주류 기득권층이 명분에 집착해 백성의 삶을 돌보는 데는 무능했던 조선 사대부들이 수 십명의 하인들에 둘러 쌓인 채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연암은 한양에서 가져간 붓들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청나라 곳곳을 취재 하며 백성에게 이롭고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모자 정수리에 수정을 단 사람은 바로 호부상서 화신이라는 자란다. 눈매가 밝고 수려하며 얼굴은 준엄 하고 날카롭게 생겼으나 다만 덕과 그릇이 작아 보였다. 나이는 이제 갓 서른 하나란다.]

청나라에 도착 하자마자 어떤 사신들 보다도 발빠르게 움직여서 현지인들을 포섭한 끝에 나흘 뒤인 1780년 8월 12일 건륭황제의 최측근이자 심복인 호부상서 화신을 찾아낸다.


건륭황제의 심복 화신은 만주족 출신으로 황제의 친위대에서 일하다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화술로 황제의 눈과 귀를 사로 잡았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이용해 온갖 진귀한 보물을 뇌물로 받아 먹으며 황제가 좋아하는 것만 보여주고 말해서 자신의 어린 아들을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섯 살 막내 딸과 약혼을 시켰을 정도로 뛰어난 술수를 갖고 있었다.

호부상서로 불리는 화신의 모든 동태에 촉각을 세운 연암은 정조에게 보고 할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5년 후에 불어 닥칠 화신의 운명까지 예언한다.


[화신은 황제의 총애를 한창 독차지하는 귀한 신하이기 때문에 황제 역시 선물을 받고는 '화신이 나를 위하고 공경하는구나. 자기 집에 소장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짐에게 헌납 하다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는 장차'짐은 사해의 부를 다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진주 포도가 없는데 화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물건을 얻었을까?'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 되는 날엔 화신은 위태로우리라.]


1799년 2월 건륭제가 세상을 뜨자 마자 화신은 자신이 이끌고 있던 부패 관료 집단들과 함께 비극적 최후를 맞이 하고 청나라는 환란의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청나라의 위세를 높이 평가했던 연암은 '무엇이든 극에 치달았다가는 언젠간 무너지게 된다.'라는 예언을 하며 역사적으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멈춘 적이 없었던 만리장성 고북구 관문 앞에서 청나라에 휘몰아 닥칠 환란과 전쟁이 조선 땅으로 흘러들어 올까 걱정했다.


'내가 열하에 있을 때 예부에서 우리나라와 관련된 일을 거행하는 것을 보고는 천하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 자리에서 60년 동안 앉아 있었던 건륭제는 1796년에 황위를 가경제에 물려 준다. 1년 뒤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 나고 청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연암은 건륭황제의 평화로운 시기에 중국 곳곳을 누비며 청 조정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극심한 권력 다툼, 부패, 향락을 목격하며 망국의 길로 가고 있다는 걸 예감했다.

부패한 관료들, 간신들이 나라의 운명을 갉아 먹고 있던 시기에 연암은 청나라 한 가운데 서서 조선의 앞날에 닥쳐 올 먹구름에 대비 하기 위해 이용후생, 실사구시(實事求是)한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용(利用)이 있은 뒤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正德)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면 어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부강한 나라 건설과 백성의 삶 증진에 보탬이 되는 실용을 정치의 중심에 세워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에는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가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백성들이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 때문이겠는가.”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여전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연암은 수레 등 유통수단의 발달이 청의 부국을 가져온 주요 요소라고 지적하고, 조선의 현실을 비판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에는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가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길이 좋지 않고, 수레보다 봇짐을 많이 이용하다 보니 백성들에게 필요한 물품의 원활한 유통이 안 된다. 백성들이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이 대체 무엇 때문이겠는가.”

연암은 우연히 길에사 마주친 농부, 짐꾼, 행상들과 필담을 나누며 농사 짓는 법 , 수레 만드는 법을 배워서 조선으로 돌아 온 뒤 누에치기, 나무 가꾸기 등을 연구해서 손수 농사법을 실행해 보았다.

“정치에서 먼저 필요한 것은 덕(德)과 도(道)가 아니라 백성의 삶을 도탑게 하는 것이다. 오랑캐를 배척하려거든 우선 우리나라의 무딘 습속을 바꾸고, 밭을 갈고 누에 치고, 질그릇 굽는 일부터 장사하는 것까지 배워야 한다. 천하의 도는 현실에, 저 똥 덩어리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땅이 험준해서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 라고 말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국가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절로 뚫리게 마련이니, 어찌 길거리가 좁다거나 고갯마루가 높음을 걱정하랴?'

연암은 광활한 요동 벌판을 처음으로 두 발을 내딛었을 때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구나”

그는 분명 드넓은 영토를 바라보며 청나라의 운명을 읽었고 조선의 앞날을 걱정했을 것이다.

중국 열하에서 북경으로 되돌아갔던 8월 17일 연암은 성리학의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시대의 조류에 무지몽매 했던 조선의 현실을 깨부숴 버려야 겠다고 다짐한다.


“천하대세를 보고 천하지우를 근심한다”

1786년 7월 오십세에 접어든 연암은 음관으로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어 조정 건축물의 건축과 보수 ,토목을 담당하는 기관의 종 9품 벼슬자리에 오른다.

청빈한 선비로 가족들을 굶기면서 까지 집필에 몰두 할 수 없었던 연암은 자신이 부임한 곳의 백성들이 자신 보다 더 굶주리고 제대로 된 옷 한 벌 없다는 사실에 크게 낙담하며 백성의 삶을 돌보는 선정을 펼친다.

직접 밭을 갈고 나무를 베어 다리를 만들고 교량을 설치해서 하루 하루 노동으로 고된 백성의 삶을 위해 단 하루라도 쉼 없이 일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은 조선 왕조 역사상 최고로 학문에 조예가 깊고 개혁 성향이 강했던 군주인 정조가 문체반정을 통해 조선 사대부들의 문체를 검열했다.

정조가 문체반정에서 가한 제재는 다섯 가지로 중국의 잡서 반입 금지와 과거 시험응시 자격 박탈, 관리의 직위 해제, 반성문 제출, 군역에 북무하게 하는 충군 조치를 통해 지식인들의 사상을 검증했다.

하지만 기가 세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연암은 전제 군주에게 어떤 반성문도 제출하지 않았다.

1797년 연암이 면천 군수에 임명된 뒤 감사의 말을 하러 어전에 들어가자 정조는 '내가 지난번에 문체를 고치라고 했는데 과연 고쳤느냐?라고 묻고는 제주 사람 이방익의 중국 표류기를 들려주며 글을 지으라고 명한다.

정조는 자신이 아끼는 신하 연암에게 반성문 제출 대신 여행기 감상문 제출을 허락하며 세상의 이치에 밝고 아부나 아첨하지 않는 충신 연암의 직언도 듣고 있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연암의 <열하일기>가 조선 땅 전체에 해악을 가져 올 것이라는 상소문을 줄줄이 내며 파면 하라는 빗발치는 요청에 정조는 백성들이 읽지 못하게 조치만 하고 연암에게 불어 닥칠 화를 막아 주었다.

백성들이 읽지 못했던 열하일기는 조선 땅을 변화 시키지 못한 채 100년 동안 서고에 갇혀 버린다.

1901년에서야 그가 남긴 <열하일기>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다시 읽혀지면서 재평가 받기 시작했지만 조선 땅은 연암이 살았을 때보다 부국강병은 커녕 망국의 길목에서 서로 다투는 동안 온갖 외세들이 조선 땅을 헤집고 다녔다.


[그대는 왜, 예로부터 본래 지녀온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 중국의 존중할 만한 관례와 업적을 모조리 터득하고 돌아와서는 책자로 모조리 저술하여 온 나라에 쓰이게 하지 않소? 그대는 이런 일은 아니 하고서 한갓 조공을 바치는 사신만 따라다녔단 말이오?]


만일 정조가 문체반정을 내세우지 않고 열하일기를 서고에 처박아 두지 않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안 본 것이 없이 다 살펴보아 하나도 놓친 사물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연암은 위풍당당한 기세로 조선땅을 누르고 있었던 청나라의 모든 문화와 기술을 직접 눈으로 보고 연구 해서 조선 땅을 개혁하고 싶어 했다.

연암은 한 평생 나라와 백성을 위해 ‘남을 비판하기 전에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정신으로 살았다.

우물 안 개구리 격인 후진국 조선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부민강국의 방법을 고뇌 했던 연암이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게 된다면 어떤 일침을 퍼부을까?

신령 한 거울은 요괴를 비추고

신령 한 구슬은 잊은 걸 생각나게 하지요.

끊어진 줄을 잇는 아교가 있는가 하면

혼을 부르는 향도 있답니다.

2022년 시진핑이 3연임에 성공했다. 세계의 시선은 21세기 황제 시진핑 주석에 꽂혀 있고 그의 목소리는 최측근인 14살에 베이징 대학에 입학한 ‘신동’으로 유명한 중앙서기처 서기 리수레이를 통해 흘러나온다.

2022년 중앙 서기처 서기로 임명된 리수레이는 2007년 차기 지도자로 낙점 된 시진핑 주석이 중앙당교 교장을 맡았을 때부터 시 주석을 보필 하며 연설문 작성은 물론 그림자 수행을 하고 있다.


[황금을 도굴 한 세 도적이 술을 마시기로 하고 한 명이 술을 받으러 간다. 술을 받으러 간 도적은 황금을 독차지 하기 위해 술에 독을 타고 남은 두 명은 황금을 더 많이 나눠 갖기 위해 술을 받아 온 도적을 죽이고 실컷 술을 마신다. 이리하여 세 명의 도적은 모두 죽고 황금만 남았다. 그 황금을 줍는 사람이 생겼을 것이고 그 때문에 몇 천 명이나 더 죽을지 모를 일이다.]


명실상부한 ‘1인 지배’를 확립한 중국 공산당, 여전히 싸움질을 일삼는 한국 정치인들, 국민의 삶은 나날이 고달 퍼지고 있고 코로나 전파력의 기세는 꺾여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말똥구리는 자신의 똥 구슬을 아끼고 여룡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여룡은 자신에게 구슬이 있다 하여 말똥 구슬을 비웃지 않는다.'

어느 해 보다 힘든 해, 2022년의 한국, 말똥구리의 비웃음 소리만 넘쳐 나고 있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리의화가 2022-11-10 16: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하일기가 당시 서민들에게 널리 읽히고 활용될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요. 열하일기는 언제 봐도 흥미진진하고 재미나요! 박지원이 청을 엿보고 온 르포기자일수도 있겠습니다ㅎㅎㅎ

scott 2022-11-10 16:52   좋아요 2 | URL
조선 당시 백성들 너무 너무 가난하게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한양 4대문 밖에만 나가도 부모 잃고(굶다 죽음) 떠도는 거지 아이들이 엄청 났다고 합니다
양반들 옷 소매 폭만 좁혀도 헐벗은 백성들 입을 옷감이 충분히 나온다고 연암 박지원이 호통 치고 다녔죠.

당시 청나라에 갔던 박지원의 풍채가 현지인들이 놀랄정도로 눈에 띄었다고 합니다 ㅎㅎ
최초의 르포 기자!
말년은 너무나도 힘겹게 살면서 자나깨나 백성 걱정, 나라 앞날 걱정 ㅜ.ㅜ

레삭매냐 2022-11-10 16: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계 최악의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의 모습을 연암 선생은
과연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요.

강건 연간의 청나라는 과연
세계 최강국이었지만, 건륭제
가 죽자마자 바로 혼란으로
접어 들었군요. 한 나라의 흥
망성쇠는 그야말로 한끝 차이
지 싶습니다.

애민과 개혁의 군주 정조 역시
보수주의자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지 않았나 싶네요.

scott 2022-11-10 17:52   좋아요 2 | URL
열하일기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외교적 언사에 익숙하지 못해 혹 어려운 것을 묻는데 급급하거나 당대의 일을 섣불리 이야기하기도 하고 혹은 우리의 의복과 갓을 과시하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의복과 관을 부끄러워 하는지 살피기도 하며 혹은 바로 대놓고 한족을 어찌 생각하느냐고 다그쳐 물어봄으로써 그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만든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게 없죠.

호우 2022-11-10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혁 군주라고 알려진 정조는 왜 열하일기를 덮어두었을까요? 조선에도 문학의 르네상스가 올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랬는지 참 답답하네요.

scott 2022-11-10 21:41   좋아요 1 | URL
정조는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더 견고하게 해서 왕권을 강화해서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고 했는데 만일 백성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묘사된 조선과 전혀 다른 청나라의 눈부신 발전된 모습을 읽고 연암이 주장한 ˝청나라의 문물이 이토록 번성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 조선 선비들은 명나라만 찾고 청나라를 배격하는가?라는 주장에 동의 한다면 조선 사회 질서(철저한 계급사회)를 지탱하는 신분제가 흔들리면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고 생각 했습니다.

정조의 핵심 정책은 탕평책으로 영조를 계승한 정책이지만 그는 조정 요직을 특정 붕당에 몰아주지 않고 여러 붕당에 안배해서 정치적 안정을 꾀했습니다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붕당정치 병폐를 개혁하지 못했습니다
영조 말년에 노론 중 일부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이 되었고, 노론의 정치적 세력이 강화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노론들이 사도세자 아들이 임금이 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 했고 왕위에 올라간 정조는 죽을 때까지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결국 정쟁이 개혁을 가로 막았고 정조의 모든 정책에 족쇄를 채웠습니다
그럼에도 정조는 자신이 아끼는 신하들의 병풍이 되어서 연암 박지원도 독후감 쓰는 걸로 독화살을 피하게 해주었어요

호우님 처럼 이시기 정조 시대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ㅜ.ㅜ

호우 2022-11-10 22:04   좋아요 2 | URL
정조에 대해서는 좀 환상이 있는 거 같아요. 드라마같은 데서 다루는 것들도 우리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거 같고. 대중적인 책들도 좀 그렇고. 역사는 그냥 있는 것인데 후세 사람들이 조금은 자기 본위로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해요. 개혁이니, 혁신이니 하는 것도 시대에 따라 다른 거 아닌가 싶네요. 남이 먹여주는 역사가 아니라 스콧님처럼 스스로 역사를 읽을 줄 아는 역량이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scott 2022-11-10 22:18   좋아요 2 | URL
호우님 말씀에 동감 합니다
영화와 드라마 소설이 역사적 사실보다 환상을 품게 했습니다
조선시대는 방대한 기록를 남겼던 시대로
실록에 왕과 신하들이 어떤 정책에 대립했는지 사소하지만 굵직한 역사적 현황부터 정쟁까지 상세하게 기록 되어 있어서
역대 왕들이 어떤 왕이였는지 현미경 처럼 후대 인들이 볼 수 있습니다.

호우님 말씀처럼 개혁, 혁신은 현재 우리 시대의 시각으로 조선 사회를 평가하기 힘듭니다.

결국 정조도 자신의 자리 권력을 지키고 싶어 했고

그렇게 조선은 개혁의 시기를 놓치고 19세기 세도 정치로 결국 암울한 20세기를 맞이 했죠 ㅜ.ㅜ

그레이스 2022-11-11 0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한권이네요^^
문체반정하고, 연암을 불러 은근히 압박했던 정조는 아마도 왕권을 지키기위해 어쩔수 없었던 것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scott 2022-11-11 15:03   좋아요 2 | URL
정조도 <열하일기>
밤을 꼴딱 세워서 읽었을 정도로 재밌었다는 평가는 했는데

연암의 개혁을 정조가 이끌고 가기에 당시 신하들이
시대의 변화에 어두웠습니다
명나라만 끔찍하게 숭배 하고
주자학 책 싸놓고
제사까지 지낸,,,,

새파랑 2022-11-11 07: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하일기가 조선의 르포르타쥬군요~! 완전 적절한 말인거 같아요 ^^
당시에 널리 읽혔다면 좋았을텐데 많이 아쉽네요 ㅜㅜ

scott 2022-11-11 15:04   좋아요 3 | URL
열하일기
지금 읽어도 완죤 재밌습니다
연암 박지원 글을 정말 잘씁니다

현존 하는 작가들과 견주어도
단연 연암의 글빨 앞에선 ㅎㅎㅎㅎ

mini74 2022-11-14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그 시절의 베스트셀러였다고 본거 같아요. ㅎㅎ박지원은 시대를 앞서간 사람같아요. 위트도 있고....스콧님 글에서 박지원의 멋짐이 폭발합니다. ㅎㅎㅎ

scott 2022-11-15 11:30   좋아요 1 | URL
열하 일기 지금 읽어도 넘 ㅎ 재밌죠
저는 중1때 호질 읽고 조선시대글이 이렇게 재미나다니 감탄을 !ㅎㅎㅎ

박지원은 현세상에 있었다면
초대형 베스트 작가이자 학자 였을 것 같습니다 ^^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미래에서 오는 정보의 노예가 되었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일기에 적힌 인생 이외의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착각에 매달릴 필요를 느낀 적도 없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11-14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14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립백 콜롬비아 엑셀소 디카페인 #4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디엄 다크 로스팅한 원두로 물을 부을 때 원두에서 올라오는 첫향은 마일드한 고소한향이 느껴진다. 첫번째 한 모금은 밋밋한 알라딘 원두 특유의 맛이 느껴지고 마지막 단맛이 느껴지는데 상큼한 오렌지나 체리향 맛은 아니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의책장 2022-11-04 2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cott님, 원두전문가이신가요? >.<
저도 알라딘 드립백 나오면 대부분 다 구매해서 먹어보는 것 같아요ㅎ
장바구니에 담긴 책들 결제하려고 보면 드립백이 창에 떠서 안 살 수 없게 만들더라구요..☞☜

scott 2022-11-04 22:37   좋아요 2 | URL
네 전 한때 로스팅도 직접해서 원두 향 맛 맡아도 원산지 맞춥니다 🤗
알라딘 원두 특유의 밋밋한 맛이 있습니다🙊

하나의책장 2022-11-04 22: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전문가 느낌이 났었는데...
scott님.. 대체 못 하시는 게 도대체 뭔가요? 다방면으로 박학다식하셔서 존경스러워요^^

scott 2022-11-04 23:03   좋아요 1 | URL
하나님도 !박학다식! ㅎㅎ

전 일상에 헛점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자동차 엔진은 고칠 줄 알아도

운전은 못하고
레이싱은 좋아 하능 ㅎㅎㅎㅎ

독서괭 2022-11-05 12:53   좋아요 2 | URL
네? 운전은 못하시는데 엔진을 고칠 줄 아신다고요? 스콧님 알수록 신기한 분😳

책읽는나무 2022-11-05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 어떤 단맛일까요?
콜롬비아 디카페인은 진하게 내리면 한 번씩 흑설탕같은 단맛이 나는 것 같은데 그런 단맛일까요?^^

scott 2022-11-05 07:52   좋아요 1 | URL
정확합니다 🤗
설명서에 표기된 상콤한 과일맛이 아닌 과당맛 나는 단맛 ^^

서니데이 2022-11-06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커피 괜찮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저도 며칠 전에 사서 책과 함께 다음주에 올 것 같은데, 기대해보겠습니다.
scott님,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scott 2022-11-06 23:28   좋아요 1 | URL
드립백 보다 원두가 훨씬 낫다고 합니다.

저는 한 번 구매 하면 2킬로 정도 양을 구매 하기 때문에
알라딘 원두 200그램은 일주일 분량 ㅎㅎㅎ
가끔씩 드립백으로만 구입하게 되네요^^
 
문화와 폭력 - 전족의 은밀한 역사
도러시 고 지음, 최수경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 비단에 수놓아 만든 행전, 발등이 봄처럼 곱구나.

다른 이들은 칭찬하지 않지만, 내게는 사랑스러울 뿐.

-쌍행전 <약부시>


1875년 중국 샤먼에 파견된 영국 선교사 존 맥고언 목사는 자신이 주도 했던 교우 모임날 아침 아내가 이웃집 딸의 비명 소리를 듣자마자 달려 나가고 바로 눈 앞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당신은 영국 여자 아닙니까. 우리 중국 여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결코 이해 못 합니다. '전족'은 우리가 과거로 부터 물려 받은 기구 한 운명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준 것이지요. 이 넓은 제국에서 우리를 이 고통에서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전족을 하지 않는다면 비웃음을 당할 것이고 경멸의 대상이 되어 여종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15년 전 1860년 2차 아편전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해에 중국 샤먼에 도착한 맥고원 목사는 런던 선교회 소속으로 중국 내륙 깊숙이 선교를 하며 여자 아이의 발 뼈가 부서지고 살이 뭉개 질 때까지 동여 매는 끔찍한 전족의 해악을 직접 목격했다.

아편 전쟁의 패배로 주요 항구 도시 5곳을 개방하게 되자 맥고원 목사는 자신의 교회 예배에 참가하는 중국인 모든 여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전족'의 족쇄에서 해방 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준 '타고난 그대로의 발'을 소중히 해야 한다며 꾸준한 설득과 교육에 앞장선다.

맥고언 목사는 '전족'에 대해 문화적 폭력이자,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의 위반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에 대한 성적 위협으로 설교 했다.

1870년대 중국 전역에서 '전족'을 하지 않은 여성을 찾기 힘들 정도 였고 맥고언 목사는 폭도들에게 살해 위협까지 당했지만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선교사들을 모아 전족으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는 여아들과 부녀자들의 '발'상태를 꼼꼼하게 기록해 나갔다.

외국의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항구 도시 부터 반 전족 운동이 거세게 불어 닥쳤고 상류층을 중심으로 딸에게 더 이상 끔찍한 형별 같은 고통을 줄 수 없다는 엄마들의 깨어 있는 의식이 '반전족 운동'의 불을 붙였다.

그렇다면 과연 '반전족 운동'이 중국 대륙 전체 여성의 발을 영원히 해방 시켜 주었을까?


1999년 11월 하얼빈의 '즈창'이라는 전족 용 신발을 생산하는 마지막 공장의 생산 라인이 멈췄다.

'즈창'공장의 전족 용 신발 생산을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기술자들은 모두 여덟 명으로 당시 아흔을 바라 보는 나이였다.

이 공장에서 매년 300켤레의 전족 용 신발을 만들었는데 고객들 대부분이 80을 넘은 여성들이 였다. 하지만 1991년 부터 찾아 오는 고객 숫자가 줄어 들었고 팔리지 않는 신발들이 창고 가득 쌓여 갔다.

2000년에 들어서자 '즈창'공장장은 창고 가득히 쌓여 있는 전족 용 신발을 헤이룽장 민족 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 당시 박물관 측에서 중국 전통 전족을 많은 인민들에게 널리 알릴 기회라며 성대하게 기증 기념식을 거행하고 기념식 날 이런 발언을 남겼다.


'<전족>은 봉건 사회 부녀들이 심신 학대를 받았다는 역사적 증거 입니다.작은 발의 슬픈 노래를 두 번 다시 되풀이 해서는 안됩니다.'


19세기 말 부터 시작 되었던 반 전족 운동이 4반세기가 넘도록 지속 되었던 '전족' 여성의 발을 완전하게 해방 시켜 주었을까?

중국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전족'은 청나라 말기 부터 각기 다른 정부가 들어 설 때까지 전족 금지령이 발포 되었지만 역사 기록에 의하면 중국 전역에서 완전하게 근절 시키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덩샤오핑이 거세게 밀어 붙였던 개혁 개방 운동은 중국 인민들에게 '우리 문화를 되돌아 보고 보존하자'라는 민족의 자긍심이 한창 키워졌지만 전족 한 채 생을 마감한 여성의 삶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 되지 못했다.

10센티 이하에서 성장을 멈추게 만든 '전족'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 거의 비판 받지 않았고 전족으로 인해 평생 고통 받았던 여성들은 어떤 치료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전족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 되었는지 조차 불분명하고 언제 종말 했는지도 불분명하다. 다만 현재 중국 내 어떤 신발 공장 생산라인에서도 전족 용 신발을 제작하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3촌 크기(약 7센티)의 발은 어른 손바닥 크기 보다 작지만 수 많은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 서도 여성들의 발 크기가 '3촌'에서 더 커졌던 적이 없었다.

중국 전족 역사의 근원을 들춰 보고 싶다면 태어 날 때 부터 부모에게 물려 받은 '발'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7센티 크기로 강제로 축소 당했던 여성들의 삶, 그들의 목소리에서 찾아야 한다.

중국 '전족(纏足) '의 역사에는 남성들의 은밀한 즐거움, 성적 유희가 깊게 배어 있다.

상류층 남성들은 자신의 아내의 발 크기와 첩의 발 크기를 비교 하며 발이 더 작은 발을 가진 어린 여자를 찾아 다녔다.


명나라 말기 글을 읽을 줄 아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소품문 형식의 작품 <매품>에 '향기로운 연꽃의 아홉 등급'을 매기고 '관음증'을 불러 일으키는 법을 서술했다.


-여자가 발을 씻는 것을 엿보려면 병풍 뒤에 숨어 있을 것

-어둠 속에서 여성이 전족 끈을 푸는 순간 발 냄새를 맡고 다가 갈 것

-목욕을 하기 위해 전족 신발을 벗는 순간까지 기다 릴 것

-여자가 전족 신발을 벗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볼 것


당시 남자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손바닥 만한 전족 신발, 살짝 바닥을 스칠 정도로 작구나. 가느다란 초승달은 하늘에서 솟은 것이 아니로다. 내가 다닌 곳 가운데 전족 구경에 뛰어난 세 장소가 있었다. 이 세것은 모두 머리를 들어 전족을 볼 수 있으니, 내려다 볼 필요가 없었다. 천하의 명산과 절경에 치맛자락이 운집하니, 당연히 특별히 구경하기 좋은 곳이 될 수밖에 없다. 나중에 다른 곳을 구경하게 되면 또 뛰어난 곳을 선정할 것이다.'


명 나라 시대 남성들은 전족 구경에 뛰어난 장소를 물색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발을 가진 여성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걸 삶의 가장 큰 유희였다.

이렇게 '전족 '크기에 집착 했던 남성들이 중국 역사상 명나라 시대 때만 존재 했던 것이 아니다.

전족에 집착하고 전족을 성적인 방법으로 직접 접촉하고 싶었던 남성들에 관한 기록은 전국을 유랑하며 온갖 소문과 목격담을 수집하는 유랑 저술가들 기록에 남겨져 있다.


[소년에서 성인이 된 남자는 규방 출입을 허락 받고 전족 한 성인 여성과 원하는 모든 것을 즐긴다. 남자들은 발에 입을 맞추거나 발가락 냄새를 맡으며 감각적인 흥분을 했던 경험을 친구들과 서로 교류했다.]

                                                                                      -<채비록 제 4편>중에서

19세기 이전 까지 '전족'은 각종 정사, 지방지, 여훈서 같은 공식 발행 글에서 금기시 되었던 단어 였다.

20세기 중화인민공화국이 된 중국은 19세기 이전에 서술 된 '전족'에 관한 모든 것을 읽을 거리를 찾아 다니는 독자들을 겨냥한 유희 적 잡문이라고 치부 하고 문헌 적 학문적으로 연구를 하지 않았다.

'전족'의 기록을 찾아 기원을 추적하고 활발하게 연구를 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한 이들은 중국 밖의 외부인들이였다.

이들은 '전족'의 기원을 12세기로 올라가서 후반기에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는 것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했다.

1274년 학자 차약수가 기록한 책에 이런 글이 쓰여져 있다.


[여성들이 발을 싸매는 풍습은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린아이들은 4,5세가 되기 전에 아무 죄도 없이 끝없는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 발을 동 여매서 작게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후한 (25-220) 서대에 대양이 딸을 시집 보낼 때 딸은 명주 저고리에 베치마를 입고 대나무 상자를 들고 나무로 된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전족은 옛 사람들의 풍속이 아니다. 어떤 이는 당나라 양귀비가 처음 시작 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문헌 출처가 없다.]

학자 차약수는 후한 시대에는 전족이 실행되지 않았다고 기록 했지만 양귀비 역시 어떤 문헌에도 그녀가 '활 모양의 작은 발' 전족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중국 고전 문헌과 역사를 공부 하는 학자들은 이미 이런 기록이 나오기 전 부터 '전족'은 중국의 오래된 풍습으로 자리 잡았고 당대 지식인들이 '지금-여기' 같은 시점을 명확하게 새겨 두지 않았기에 전족의 기원은 문헌에 새겨진 것 보다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시인 이백의 시 중에 '자연 그대로의 발을 가진 여자' '두 발이 서리처럼 하얀' 여자가 빨래 하는 모습을 찬양하는 시가 있다.

후대 학자들은 이백이 노래 한 시 구절의 '자연 그대로의 발'이 전족을 하지 않은 여성이라고 해석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중국 역사에  남아 있는 어떤 문헌에도 '전족'의 기원이나 유래를 찾을 수 없고, 수 세기에 걸쳐 여성들이 어떤 고통의 몸부림을 쳤는지에 대한 기록 조차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학자들은 전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전족 모양과 색의 변화에 촛점을 맞추고 발 크기와 형태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바뀌어 갔는지 추적 해서 각종 재질과 기물, 장식품으로 유추하고 분석해 나갈 뿐이다.

전족의 풍습과 자료가 가장 많이 전해져 오는 시기인 1600년에 들어서자 전족은 사회적 관습으로 완전하게 자리 잡아 다양한 모양의 신발과 끈이 귀족 여성들의 보물 1호가 된다.

이 시대에 상류층 남자의 발 싸는 천은 명주 였지만 전족을 한 여성의 발은 비단으로 결혼 예물로 가장 선호 했다.

반면 신분이 낮은 계층으로 내려 갈 수록 전족 신발 크기가 커졌고 더 낮은 계층인 하층민 여성들은 전족용 신발을 살 수 없기에 '태생적 크기의 발'인 어른 남성의 발 크기를 가졌다.

17세기로 넘어 오면서 이전 세기 보다 상류층 여성들의 발 크기는 더 작아졌고 전족용 신발의 장식은 더 화려 해졌다. 이시기에 전족 용 신발은 죽기 전에 꼭 신어 보고 싶은 사치품이였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대접 받을 수 있는 것이였다.

'지금은 얼굴을 제외하고 발이 가장 으뜸가는 결정 요소다. 오늘날에는 활 모양의 작은 발을 5척 어린이라도 아름답다고 느끼며 부러워한다.'

19세기 이전 외부 세력이 중국의 주요 항구 도시를 무력으로 밀고 들어오기 전 전족을 하지 않은 여성은 조롱 받으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비단 양말을 신은 앙증 맞은 발'을 손에 쥔 문인들은 이런 시를 읊었다.

'나전 장식한 자로 재어보니 4분이나 줄었구나. 가늘기 그지없는 옥 죽순, 가벼운 구름으로 싸였네.'

중국 역사 상 어떤 문인들도 '비단 양말을 신은 앙증 맞은 발'을 가진 여성의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문드러지는 고통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여성의 고통, 육체적 학대를 19세기 중반에 밀려 들어 왔던 외국인 선교사들과 사업가들에 의해 목격 되어 '형벌' 같은 발 크기에서 해방시키는데 앞장 선다.



[예전에 산시 북부 지역은 민간에서 전족이 성행했다. 다퉁 근방에서는 매년 8월이 되면 발 경연 대회가 열렸다. 광장의 공터에 긴 나무 걸상을 계단처럼 겹겹이 쌓아 올린다. 수백 수 천의 여자가 거기 앉아서 치마 아래로 전족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이를 마음껏 보고 품평 한다. 양가의 규수도 많이 참여했다. 이들의 신발에는 진주가 달렸고 수놓은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한 줌도 안 될 정도로 자그마한데 만든 솜씨가 대단히 정교하다. 허랑방탕한 사내들이 이 틈을 타서 수작을 부리며 풍속을 문란케 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남성들이 연 전족 대회에 참가한 상류층 여성들은 신발을 벗고 자신의 작고 앙증 맞은 발을 보여 주었다. 남성들은 작고 앙증 맞은 발을 만지며 평을 하고 순위를 매겼다. 중국 전역에서 봄의 시작과 함께 열렸던 이 행사에는 모든 가족이 참여 할 정도로 1930년대 지방 곳곳에서도 열렸다.

수세기 동안 중국 전역의 풍습이였던 전족은 어떻게 만들어 질까?

아니, 정상적으로 성장 할 수 있는 발 크기를 어떤 방법으로 손바닥 크기 보다 작게 만들 수 있었을까?


3살에서 4살 짜리 여자 아이의 발을 활 모양으로 구부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일곱 살 때 부터 전족 발을 만들었다.


일곱 살 여자 아이를 10센티 크기보다 작은 활 모양의 전족 용 신발에 집어 넣으려면 발가락을 발바닥 아래에 뭍여 버리게 접어야 한다. 발뒤꿈치에서 엄지 발가락 끝까지 최대한 깊숙이 접어서 전족 용 신발에 집어 넣는데 활 모양으로 발을 구부리면 발가락을 움직이는 발등의 힘줄과 근육이 긴장해서 발의 힘이 약화된다.

발 허리뼈는 서서히 위축되어 더 이상 성장 하지 않게 퇴화되지만 골절이 되지 않는데 발허리 뼈를 뒤꿈치 뼈 쪽으로 누르면 두꺼운 지방층으로 둘러싸여 있는 발바닥이 갈라지는 균열이 생긴다.

바로 이렇게 생긴 발바닥 지방층 균열이 생긴 곳을 오랜 세기 동안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분출 시키는 곳으로 뼈가 없는 부드럽고 말랑 말랑 한 감촉을 손에 쥐기 위해  여성의 발을 전족 속에 강제로 활 모양으로 접어 넣었다.

엄청난 고통으로 완성 된 삼각형 모양의 발은 각종 유랑 소설에 연꽃 잎이나 옥순으로 비유 되었고 시대를 거치면서 발 모양은 발뒤꿈치 부분에서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점점 가늘어지고 크기가 대대적으로 축소 되어버렸다.


19세기로 넘어 오자 커져 버린 몸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한 전족 발을 가진 여성들은 거리를 마음껏 활보할 자유를 잃었고 무거운 짐을 들고 걸을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남성들의 욕망의 크기는 여성의 전족이 땅에 닿은 발바닥 부분을 서서히 소멸 시켜서 결국에는 발에 붙어 있는 살 덩어리를 없애 버렸다.

19세기 중국 항구 곳곳에 하이힐은 신은 서양 여성들이 등장 하고 상하이를 비롯해 대도시 마다 서양 하이힐 전문 상점이 들어 선다.

중국 상류층 여성들은 비단으로 싸맨 전족 용 신발을 벗고 서양 여성들의 하이힐을 신게 되자 무서운 속도로 하이힐 신발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엄지발가락 끝 그리고 안으로 접혀버린 네 개의 발가락은 지상을 딛고 올라선 5-6센티 굽에 작은 삼각형 발을 집어 넣고 체중을 싣고 마음껏 거리를 활보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일곱 살 여자아이들의 발을 강제로 활처럼 구부리는 관습이 완전히 사라지지 못했지만 19세기 중반 부터 하이힐로 계급이 구별 되어 버렸다.

선교사들은 집집 마다 돌아 다니며 10세 이하 어린이들의 발 상태를 체크 하며 썩은 피가 고여서 진물과 염증에 시달리다 두 발의 앞 부분이 모두 까맣게 썩어 버리는 발, 뼈와 살이 모두 죽어버린 발을 발견 하는 즉시 치료를 했지만 완전하게 전족 풍습 뿌리를 뽑아내지 못했다.



전족으로 망가져 버린 두 발을 갖고 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여성들은 죽을 때 평생 동안 작고 앙증 맞은 발을 감싼 신발과 함께 묻혔다.


눈썹을 교묘하게 그리고, 입술 연지를 살짝 바르고

머리를 용머리 처럼 틀어 올렸네

하루 열 두 시간에 맞춰 금비녀는 12개

머리에 금색 봉황 진주가 달린 두건을 쓰고

양쪽 관자놀이 구름처럼 새까맣구나

사향 풍기는 쓰촨산 비단 저고리 입고

허리에 샹강의 물결 무늬 치마 둘렀네.

발에 신은 궁혜 길이는 겨우 3촌

가볍게 금련 옮겨 방문을 나서네

'3촌 궁혜'의 발 크기로 '연꽃'날리듯 걷는 여성들의 걸음은 수세기 동안 피와 눈물에 젖어 걸었다.


아버지는 딸이 전족으로 인해 발가락이 썩어 버려도 슬퍼 하지 않았고 매일 밤마다 고통에 울부짖는 아이의 빰을 때렸고 어머니는 고통으로 몸부리치는 어린 딸의 두 발을 전족용 신발에 강제로 구겨 넣고 끈으로 묶어 버렸다.

수세기 동안 중국 대륙은 부부간의 행복, 자식의 행복 모두 3촌 짜리 발 크기, 작고 앙증 맞은 전족에 달려 있었다.


1980년대 중국 윈난성 퉁하이현의 류이 마을에는 500-600여명의 전족 여성이 살고 있었다. 이후 80여명으로 줄어버렸지만 작고 앙증 맞은 발 경연 대회는 끝나지 않고 디스코 대회로 진화했고 90년대 개방 물결로 밀려 들어 온 관광객들 앞에서는 무대에서 공연까지 펼쳐 보였다.

아름다움은 모든 인간의 욕망으로 돈과 지위를 가진 이들이 물질적 쾌락적 향락을 위해 잔혹한 방법으로 학대 해 왔다.

중국 어휘에는 '전족'이라는 단어가 원래 없었다. 그저 여자로 태어 나면 당연히 발을 활처럼 구부려야 했고 발 크기로 계급의 차별, 돈과 재력의 차이를 느껴야 했다.

중국의 전족 역사 속에는 모든 인간의 욕망이 스며 있다. 놀라울 정도로 잔혹하고 퇴폐적이고 폭력적이고 무시 무시할 정도로 끔찍한 욕망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어머니 딸로 이어져 왔던 길고 긴 세월은 결국 여성들의 선택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남성의 손에 쥐어지는 크기의 발을 갖게 되면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시를 읊으며 좀 더 세련되고 화려한 화살 모양의 전족용 신발에 집착했다.

이토록 무서운 욕망은 자발적으로 성장해서 발전해 왔다.



중국계 미국 역사학자 도러시 고(Dorothy Ko) 는 1990년 대부터 중국 여성학 분야를 집중 연구 하며 200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중국 전족 문화를 파고 들었다.

역사학자 도러시 고는 서양인들이 역사속 중국 여성들의 순종적인 모습을 반박하기 위해 17세기 중국 강남 지역의 여성들 중 주체적인 삶을 펼쳐 보였던 귀족과 문인 여성들의 삶을 집중 탐구 하다가 전족으로 신분의 등급이 구별 되고 죽을 때도 전족과 함께 묻히는 역사속 그녀들의 삶을 추적해나갔다.

역사학자 도러시 고는 지난 세기 서구 학자들은 중국 여성의 삶이 남성 중심적 봉건주의 사회로 인해 신체적 학대와 억압을 받아왔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중국여성의 억압을 상징하는 '전족'을 중국 여성 중심으로 재 해석하기 시작 했다.

하지만 1000년이 넘도록 지속 되어 온 전족의 역사에서  어떤 이유로 시작 되었는지 아직 까지 명확하게 밝혀 지지 않았다.

전족의 기원은 보통 10세기(오대십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기록된 문헌에 궁중에서 무희들의 발을 천으로 칭칭 동여 맨 뒤 금으로 만든 커다란 연꽃 위에서 춤을 추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기록에는 전족의 다른 이름인 ‘금련(金蓮)’의 발을 한 기녀들이 여러 문헌과 문학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수세기에 걸쳐서 중국 대륙 곳곳에 누가 어떤 방법으로 전해져 있는지 명확하게 기록 된 것 조차 없다.

역사학자 도러시 고는 전족을 주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구속과 학대 억압으로 보았던 전통적인 해석과 다른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분석 했다.

즉, 그녀는 전족을 하는 소녀들이 품었을 기쁨과 희망 그리고 신분 상승을 향한 꿈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전족은 여성에게 짐이 아니라 일종의 특권이었다. 여성은 전족을 통해 자존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그녀의 주장은 미국 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1000년 가까이 보편화됐던 전족 문화가 왜 어떻게 사라졌는지 고전문학과 각종 신문이나 정부문서, 서양인의 회고록 등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제시하며 전족을 무조건 적으로 옹호하거나 비판 하지 않았다.


신해 혁명이후 중국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졌던 반 전족 운동은 중국 여성들의 발을 10센티 전족에서 해방 시켜 주지 못했다.

반 전족 운동 이전의 중국 여성들은 중국 명절인 청명절(淸明節)이면 정성껏 작은 발을 단장해 내보이는 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지만 전족 금지령이 시작 되고 전족 신발을 벗는 순간 걷기 힘들 정도로 기형적인 발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된다.



이 책의 원제는 ‘신데렐라의 자매들(Cinderella‘s Sisters)’이다.

동화 속 왕자는 예쁜 구두를 찾은 뒤 거기에 ‘발이 맞는’ 신데렐라를 찾아 헤맨다.

왕자가 찾고 있는 발 크기에 들어 가기 위해 '전족' 크기에 맞는 발을 해야 했던 신데렐라의 자매들 

전족 속에 배어든 남성의 욕망, 왜곡된 여성의 신체 학대 풍습을 오랜 세월 동안 은밀하게 자행 되어 왔던 폭력이 여성으로 태어나면 반드시 해야 하는 관습이 되어 여성의 자존과 자유는 또 다른 여성의 신체적 고통과 억압이 되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중국 대륙에 퍼져 있는 소수 민족 여성들은 전족용 신발을 칭칭 동여 매는 끈 매듭을 만드는 법을 능숙하게 하며 어느 누구도 전족용 신발을 신지 않아도 이들의 몸과 손가락은 기억 하고 있다.

사라져 버린 전족은 시대를 지나 또 다른 국가에서 다른 방식으로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고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여자의 신체적 억압은 낯선 풍습, 기이한 전통이 아닌 지금 어디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자 영원히 뿌리 뽑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악습이고 모든 인간 속에 내재된 욕망의 분출인 것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리의화가 2022-11-03 1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림과 사진에 보이는 여성들의 발이 너무 사실적이라 충격적입니다. 생각만 해도 고통스러울것 같은데 말이죠. 욕망의 대상이 되고 계급화의 결과물이 되었다는 게 씁쓸합니다.

scott 2022-11-03 11:15   좋아요 2 | URL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진은 못 올렸습니다 ㅠ.ㅠ

엄청나게 잔혹한 방법으로 발크기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도
그리고 나중에 전족용 생산 신발 공장이 문을 닫고 나서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발의 기형이 심해 졌다고 합니다

그동안 중국 옛 그림 속 여인들의 발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이 책 읽고 나서 찬찬히 살펴 보니

전부 저런 발들이 ㅠ.ㅠ

프레이야 2022-11-03 1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중한 페이퍼 잘 보았습니다. 전족 발 사진을 예전에 본 적이 있어요. 끔찍했어요ㅠ 신데렐라 유리구두도 비슷한 맥락에서 자행된 폭력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자매는 그 구두에 맞춰 발을 자르기도 하죠. 그런 이야기를 동화라고 읽혔으니 ㅠ 뒤틀린 욕망이란 게 그렇게 잔인하고 추악합니다. 마지막 공장의 생산라인이 멈춘 게 불과 20여 년 전이라니 놀랍고요.

scott 2022-11-03 12:0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잔혹 동화 신데렐라 유리 구두

티파니 보석 회사에서도 광고로 이용하고 있죠
여성의 욕망 신분 상승등을 자극 시키면서

생산라인은 멈췄지만
넓고 넓은 중국 땅에서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mini74 2022-11-03 1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지의 오란 생각나네요. 전족 못한걸 부끄러워했던. 사진보니 너무 너무 끔찍합니다. 이 책도 ㅠㅠ 찜 ㅎㅎ *^^*

scott 2022-11-03 12:01   좋아요 1 | URL
그쵸 어린 시절 하녀로 이집 저집 옮겨 다니다가 전족 할 시기를 놓쳤고

남편은 발 작은 여자에 엄청 집착 하는 ㅠ,ㅠ

이 책 엄청나게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번역도 훌륭!^^

페넬로페 2022-11-03 13: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족이라는 말만 듣다가 사진을 보면서 경악했습니다. 저 작은 발로 평생 육체의 하중을 견뎌야하는데 얼마나 힘들지 ㅠㅠ
전족 여성을 좋아하는 것도 다 교육된 욕망같아요^^

scott 2022-11-03 14:05   좋아요 2 | URL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냥 어렸을 때 발을 동여 묶는 걸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강제로 발가락을 발바닥 아래에 붙게 묶어버린다니 ㅠ.ㅠ

페넬로페님 말씀 처럼
교육된 욕망
세뇌 당한 욕망

alummii 2022-11-03 14: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흑 잔혹해요 전족 사진 첨보네요 ㅜㅜ

scott 2022-11-03 14:30   좋아요 2 | URL
수세기동안 자행 되었던 전족 ㅠㅠ

coolcat329 2022-11-03 2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족 사진 처음 봤을 때 정말 놀랐어요. 다시 봐도 참 ㅠㅠ
근데 저자의 수정주의적 해석이 흥미롭네요.
전족이 뿌리뽑히지 않은 데는 여성의 신분상승 욕망도 한 몫했다는 건데 당시 사회가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남자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 길은 전족밖에 없으니 여자도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닌가도 싶네요..
전족 안 한 여자는 여자도 아니니까요.
글항아리 책이라 더 좋네요.

scott 2022-11-03 21:46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책 처음 읽고 난 후 꿈에서도 전족한 발이 보였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홍콩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 학자 인데
이분의 처음엔 전족‘을 중국 여성 중심으로 재 해석했지만 결국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워낙 약탈과 전쟁이 많았던 중국 영토에서 전쟁에 나서지 못했던 여성들의 생존 본능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중국 남성들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여성의 작은 발에 대한 집착
소름이,,,,
글항아리가 책은 정말 잘 만드는 것 같습니다

믿고 읽게 만들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