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지음, 황유원 옮김 / 읻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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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버스 운전기사가 있다.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시(市)의 23번 버스 운전기사 패터슨은 월요일 아침 6시 10분과 15분 사이에 알람 소리 없이 일어나 아내에게 ‘굿모닝 키스’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정확한 시간에 아침 식사를 마친 패터슨은 아내가 챙겨준 점심 도시락을 갖고 자신의 일터인 23번 버스에 올라 탄다.

버스에 시동을 걸기 전에 그는 수첩을 꺼내 시를 끄적인다.

또 다른 하나

네가 어렸을 때

너는 세 개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배운다:

높이, 너비 그리고 깊이

마치 신발 상자처럼.

그러다 나중에 너는

네 번째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

흠.

그러다 누군가는 말한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차원...

나는 일을 해치우고

바에서

맥주를 마신다.

나는 내 맥주잔을 내려다보며

기쁨을 느낀다.

그는  버스 백미러에 비친 이들이 자신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거나  푸념할 때도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정해진 정거장을 따라 운행 시간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 온 패터슨을 자신을 반기는  애완견 마빈을 쓰다듬고는  아내의 하루를 묻는다.

지난 밤 자신의 꿈 이야기를 늘어 놓던 아내는  매일  수첩에 시를 끄적이는 남편에게 시를 출판 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

그는 아내의 잔소리를 흘려 듣고 애완견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산책 중에 그는 잠시 들리는 술집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별 볼 일 없는 이들

그 끔찍한 얼굴의

아름다움이

나를 흔들어 그리하라 하네.


까무잡잡한 여인들,

일당 노동자들—

나이 들어 경험 많은—

푸르딩딩 늙은 떡갈나무 같은

얼굴을 하고선

옷을 벗어던지며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사과」,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중에서

그 다음날도 패터슨의 일상은 어제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건 오늘의 날씨와 차장 밖으로 보이는 풍경, 그리고  그가 운전 하는 23번 버스에 올라타는  승객들만 바뀔 뿐이다.

패터슨은  매일 운행되는  버스 노선 시간표에 맞춰 살아가면서도 마치 찰나의 순간에 수면 위로 살포시 떨어지는 꽃잎의 모습을 포착 하듯 버스 시동을 켜기 전  시를 쓰고 있다.

꽃잎 가장자리에서 하나의 선이 시작된다

하염없이 가늘고 하염없이

단단한 그 강철의 존재가

은하수를

뚫고 들어간다

접촉도 없이—거기에서

올라간다—매달리지도 않고

밀지도 않고—

멍 들지 않은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그 장미」,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중에서

버스 기사 패터슨은 대단한 기대나 거대한 야망을 품고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패터슨은 한번 쯤은 늦게 일어나고 싶은 날도 있었을 것이고, 버스가 고장 나 일정이 변경되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그에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상처를 주거나 배신을 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지극히 평범하면서 지루할 정도로 무미 건조한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반복 속의 적지 않은 충돌과 갈등이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 

인간이 무수히 내뱉는 말은 매일 바뀌는 날씨처럼 생각이나 기분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상흔을 남겨서 하루에도 여러 번 요동치는 감정들은  마치 시의 운율처럼 움직인다.

그러니 인간의 삶은 매 순간이 연을 이루는 행과도 같아  일주일의 삶은  7연으로 쓰인 시(詩)일 것이다.

 시를 쓰며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패터슨도, 컵케이크를 굽고 기타를 치는 그의 아내 로라도, 패터슨의 단골 바에서 매일 밤 패터슨이라는 도시의 역사를 들려주는 주인장도, 이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도  각자의 일상을 시어로 빚어내는 예술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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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6-07-19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영화네요.
나중에 본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도 생각나는데, 저는 <패터슨> 이 더 좋았어요.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 교양과 상식으로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
유홍준 지음 / 눌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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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로 외세 침략과 약탈로 셀 수 없이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화재나 도굴, 강탈로 소실 되었다.

1782년 정조가 강화도 행궁(行宮·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곳)에 창덕궁 규장각의 부속시설로 설치했던 왕실 자료실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866년 철종 재임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귀중 도서 340여 권과 지도 갑옷 등을 약탈해갔다.

프랑스 군이 외규장각을 약탈 했을 당시  외규장각에는 당시 조선 역대 왕의 글과 글씨, 의궤와 주요 서적, 왕실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도서는 대략  6000여 권 정도 보관 하고 있었지만 귀중한 보물의 상당수가 파괴되어 사라졌다.

1991년 서울대가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청하면서 한국과 프랑스 간 반환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프랑스 측에서 지속적인 반환 거부로 협상이 결렬 되었지만 경제적 실무 협약을 맺으면서 협상을 이어가다가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이 ‘의궤 대여’(5년마다 다시 계약하는 대여 방식)에 합의해서 현재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관람 할 수 있게 되었다.19세기 말 무렵 부터 20세기 전반기 일제강점기와 근현대 수난기를 거치는 동안 한반도에서 사라진 문화재와 유물들이 국외로 반출되어 현재까지 해외에 남아있는 한국 문화유산은 공식 확인된 것만 약 25만 6천여 점에 달한다.

이 중 전체의 43.2%인 11만 6백여 점이 일본에 집중되어 있어, 일제강점기 당시 가장 압도적인 규모의 문화재 유출이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암암리에  자행 되었던 약탈과 도굴로 찾아낸 문화재들이  밀반출되어 개인이 은닉한 유물까지 합치면 실제 유출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가유산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조사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29개국 박물관·미술관 등에 분산된 한국 문화유산은 총 256,190점으로  일본이  110,611점에 달하는 한국의 문화재를 자국의 박물관과 사찰, 기타 개인 소장품으로 등록 시켜 놓았다.

반도체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이드 인 코리아’ 상품이었던 도자기는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목적이 조선의 도공을 납치 할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한반도 전역을 닥치는 대로 약탈을 해갔다.

이토 히로부미도 고려청자를 손에 넣자 마자 자신의 방에 모셔 두었을 만큼 일본의 한국 청자 사랑은 유별나다 못해 병적이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넘어간 유물은 고려청자, 조선백자 등의 도자기류와 고문헌(서적류), 고분 출토 장신구 및 불상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일본 지배층 사이에서 고려청자 수집 열풍이 불면서 무덤을 파헤치는 잔인한 도굴이 성행했다.

도굴에서 파낸 청자는 중간 상인들을 거쳐서 비싼 가격에 해외 컬렉터에게 넘겨 졌다.

1883년 조영통상조약 체결 이후 한국에 들어온 영국의 외교관, 의사, 선교사들은 조선 왕실 및 고위층과 교류하며 엄청난 양의 미술품과 민속품을 합법·비합법적으로 사들였는데 영국인들은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에 탐복해서 외교관·자산가·박물관이 삼각편대를 이루어 고려청자를 필두로 한 예술품과 민속품을 종합적이고 지속적으로 수집했다.

한국과 해외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애국적 수집가와 후원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구입한 한국의  청자를 국가에 조건 없이 기증 해서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과 호암 미술관 기타 지방 국립과 사립 미술관에서 청자를 볼 수 있다.

일본 다음으로 한국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 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으로  68,961점을 보유하고 있다.

독일과 영국은 선교나 목회 활동으로 한국에 체류 했던 종교인들과 외교 사절단으로 방문해서 장기 체류 했던 해외 관료들과 대사관 근무를 했던 외교관들 그리고 방대한 자금으로 컬렉션을 갖고 있던 수집가들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한국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손에 넣었다.

1909년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던 독일 가톨릭 순교 수도회인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한국의 문화와 풍속을 깊이 연구했는데 이들 중에서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총원장은 일제에 의해 한국 전통문화가 말살되고 헐값에 팔려 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조선의 일상 유물, 민속품, 양반가의 가구 등을 대거 수집하여 독일로 가져가 보존했는데 베버 총원장의 수집품 중에 조선 최고의 천재 화가 중 한 명인 겸재 정선 화첩이 있었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던 '겸재 정선 화첩(보물)'은 수도원 측에서  이 유물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난 2005년 한국(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 조건 없이 영구 기탁 형식으로 반환해 주었지만 여전히 독일 수도원에 한국의  많은 민속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절 전 세계의 문화재를 끌어 모은 영국은  서울 인사동으로 흘러들어 온 한국 유물과  일본, 중국의 골동품 시장에 유출된 문화재를 대영 박물관 예산으로 직접 대량 매입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보급 유물인 고려시대 '나전칠기 경함'이나 '화엄경변상도', 삼국시대 금귀걸이 등이 영국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편입되었다.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초정밀 공예품인 고려 나전칠기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단 20여 점밖에 남아있지 않은 초희귀 유물품이 되었다. 20여점 중에 7점이 현재 일본 도교 국립 박물관에 국보로 소장 되어 있다.

고려 시대의 정교한 기법을 이어받으면서도 조선 공예가들의 독창성이 꽃피기 시작한 조선 전·중기(15~16세기) 나전함은 임진왜란 당시 약탈 당하거나 화재로 소실 되어서 현재  전 세계에 단 4점만 남아 있는 초희귀 유물이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전함 (1점)은 조선 중기에 제작되었고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나전함 (1점)은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2023년 일본에서 환수된 나전함 (1점)은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일본의 한 개인 수집가에게 사들인  16세기 경에 제작된  나전함이다.


 8~10년 정도 자라야 옻액을 채취할 수 있는 옻나무에서 채취하고 걸러 내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옻칠로 가공한 상자에 4만 5천여 자개조각을 길고 가느다란 모양으로 오린 후, 아교를 바른 바탕 위에 칼로 끊어가며 붙여 장식하는 끊음질 기법과 타찰법으로 무늬의 균열을 내어 다양한 형태의 연꽃과 넝쿨 줄기 밤하늘을 수 놓은 별빛 처럼 새겨져 있다.

유럽과 이슬람권 등 다른 문화권에도 조개껍데기를 가구나 목재 상자 표면에 박아 넣는 장식(Inlay) 기법은  존재했다.

하지만 조개껍데기를  실처럼 가늘게 자르고(끊음질) 의도적으로 깨뜨려(타찰법) 보석처럼 수놓는 기법은 한국(조선)이 세계에서 유일한 독보적인 기술이었다.연꽃 봉오리, 잎받침이 있는 연꽃, 활짝 핀 연꽃들이  뒤얽힌 넝쿨 줄기와 이파리, 칠보무늬의 장식이 언뜻 보면 별 것이 아닌 듯한 상자로 보이는 나전 칠 연꽃넝쿨무늬 상자는 나라를 잃은 우리 조상들 처럼  400년 동안 해외를 유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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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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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보세요. 공작, 제노바도 루카도 보나파르트 일가의 여지, 영지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잖아요. 미리 말씀드려두지만, 그래도 전쟁 같은 건 없다고 하시거나 반그리스도의(정말 저는 그자가 반그리스도라고 믿고 있어요)추악하고 무서운 소행을 변화라도 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당장 당신과 절교하겠어요. 앙신은 더이상 제 친구도 당신이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제 충실한 노예도 아녜요. 어쨌든 잘 오셨습니다. 잘 오셨어요. 제가 당신을 놀라게 해드린 것 같군요. 자, 앉아서 말씀을 들려주세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중에서 

1805년 7월 ,마리야 페오도로브나 황태후를 가까이 모시면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관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는 자기 집 야회에 맨 먼저 도착한 위세있는 고관 바실리 공작을  세련된 프랑스어로 맞아 들이면서 19세기 초 러시아 상류 사회 사교계들의 모습들이 눈 앞에 펼쳐 진다.

형형색색으로 수 놓은 궁중복을 입은 이들 별 모양의 훈장을 한 쪽 가슴에 주렁 주렁 달고 나타난 이들 온갖 향수 냄새로 진동하는 연회장 한 가운데서 안나 파블로브나는 느긋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초대 손님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아아, 오스트리아 얘기 따윈 그만하세요.!제가 잘 모르는 건지도 모르지만 오스트리아는 결코 전쟁을 원한 적이 없고, 지금도 원하지 않아요. 그 나라는 우리를 배신하고 있는 거예요. 오직 러시아만이 유럽의 구세주가 되어야 해요. 우리 폐하께서는 당신의 고귀한 사명을 알고 계시고 그 사명에 충실하실 겁니다. 제가 믿는 건 이것뿐이에요.......

우리 러시아인만의 힘으로 의인들이 흘린 피를 반드시 씻어주어야 합니다. 어디 한번 말씀해보세요. 우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희망을 걸어야 합니까?....폐하께서 반드시 유럽을 구하실 겁니다.!'


1805년과 1807년, 그리고 1812년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 했다가 후퇴하는 시기를 담은 이 작품 속 중심인물들은 유산을 위해 싸우고 영적 성취를 갈망하는 백작의 사생아인 피에르 베즈호프 백작,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가족을 뒤로 하고 싸우는 안드레이 볼콘스키, 그리고 귀족의 아름다운 어린 딸이 등장한다.

 두 남자 모두를 유혹하는 나타샤 로스토프의 삶을 통해 전쟁을 겪으면서  소작농과 귀족, 민간인과 군인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시대, 역사, 문화에 따른 문제와 씨름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 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제1편에서는 화려한 러시아  사교계를 중심에 두고 곧  닥쳐올 전쟁의 위기를 주요 등장 인물을 통해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10만 프랑스군의 추격을 받고 가는 곳마다 주민들에게 반감을 사고 이제 더는 연합군도 믿을 수 없고 식량이 떨어지고 전쟁의 예기치 않은 조건 아래서 행동할 것을 강요당하던 3만 오천의 러시아군은 쿠투조프의 지휘 아래 도나우 강 하루 쪽으로 서둘러 퇴각했고 적군에게 추격을 당하면 멈춰서 중포 따위를 잃기 않고 후퇴할 수 있을 만큼만 후위전으로 응전하면서 나아갔다. 적군도 인정 할 만큼 러시아군은 용감하고 완강히 싸웠지만 이러한 전투는 결국 후퇴만 더 재촉할 뿐이었다.]


톨스토이가 36세이던 1864년이었다. 톨스토이는 같은 해 1월 20일자 편지에서 누이동생에게 “1812년부터 취재한 장편 소설을 쓰고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이 작품을 탄생케 한 직접적인 동기는 1856년 유형지에서 귀환이 허용된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1825년 12월 26일에 무장봉기를 일으킨 러시아 혁명가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들의 활동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들의 혁명운동을 중심으로 한 소설을 쓰고자 했고, 스스로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데카브리스트의 성격과 세계관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어떻든 그보다 한 시대 이전의 러시아 국가가 당면했던 역사적 대사건이며, 당시 청년층에 커다란 영향을 준 나폴레옹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톨스토이는  한 시대 이전의 러시아 국가가 당면했던 역사적 대사건이였던 나폴레옹 침공이 현세대와 미래 청년 세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전쟁과 평화>작품의 시작을 1805년으로 정해 놓고 개개인의 회상과 편지를 통해 당시 사회 정세 속에 여러 인물들의 삶이 어떤 변화와 성장 과정을 거쳤는지 상세하게 묘사했다.

『전쟁과 평화』는 인생, 역사, 가족, 그리고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전쟁의 공포와 삶의 공허함에 대한 질문 즉 죽음의 공포 속에서 어떤 삶을 선택 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전쟁이 발발한 원인은 인간이 알 수 없다. 

전쟁은 숱한 인간 의지가 응집한 힘의 파급으로 특정 원인이나 한 사람의 주도적인 영향만으론 절대 터지지 않는  수많은 우연이 켜켜히 쌓여 일어나는 필연이다.

인류는 전쟁의 한 단면만  볼 뿐 전체를 파악하는 시각을 갖지 못한 채 애국심에 불타 올라 이성을 잃고 광기에 휩싸일 뿐이다.

톨스토이가 애국심에 불탄 러시아 민중이  이성을 잃고 광기에 휩싸인 모습을 전쟁과 평화에서  생생하게 펼쳐 보였듯이 전쟁이 터지면 인간은 미쳐간다. 

전쟁에서 승리도 그리고 완전한 평화도 없다. 

 한쪽의 추가 기울어지지 않게 팽팽하게 당겨야 하는 평화라는 힘의 균형을 가까스로 유지 하고 있을 뿐  세상 곳곳의 화약고는 터지고 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 . 

그는 과거를 지배 한다.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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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완성, 그때 그 사람 명화의, 그때 그 사람
성수영 지음 / 한경arte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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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미국 뉴욕 미술 시장 경매에 등장한  ‘누워 있는 나부’(Nu Couché)'의 낙찰 가격은  1억7040만달러(약 2585억원). 

전 세계 미술품 경매 역사상 전체 작품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해당하는 기록을 세운 모딜리아니는 세상에서 작품 값이 비싼 화가대열에 끼여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의문이 든다.

가늘고 긴 얼굴에  동공이 없는 텅 빈 눈 갸우뚱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짖고 있는 모딜리아니 그림에 대체 어떤 특별한 마력이 있는 걸까?

왜 이런 그림이 이토록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되짚어봐야 한다.

188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항구 도시 리보르노의 부유한 유대인 가문 모딜리아니 저택에 집행관들이 들이 닥친다.

때마침  모딜리아니 어머니는 진통이 시작되고 하인들은 분주하게 산모가 출산하는 방 침대 머리 맡에 온갖 귀중품들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임산부나 산모의 침대 그리고 침대에 있는 것들은 압류 할 수 없다"는 법 규정 덕분에  모딜리아니가 태어나던 그날 재산의 일부를 지킬 수 있었다.

비극적이고 모순적이 상황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에게 모두들 입을 모아 천사처럼 잘생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축복받은 외모와 달리 태생적으로 병약했던 모딜리아니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다 열 네살 고열에 시달리던 중 미술관이 눈 앞에 나오는 환각 증세에 시달린다.

아들이 16살이 되던 해 결핵 진단을 받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눈에 보였던 미술관을 운명이라 생각하고 로마와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의 유명 미술관을 데리고 다녔다.

 르네상스 시대를 포함한 이탈리아 고전 미술의 정수를 온 몸으로 흡수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 세계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갔다.

당시 파리 화단은 1905년 야수파가 등장한 이후 야수주의와 입체파로 나눠져서 서로 유사한 그림을 전시장에 쏟아내며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밀고 나가는 젊은 화가들 집단인 파리파가 등장한다.

당시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이국적인 아프리카의 미술과 조각품, 프랑스 식민지령에서 쏟아져 들어 오는 아시아 불교 미술과, 북아프리카 조각들 그리고 골동품 상들이 들여 온 선사시대와 아르카익기의 그리스 미술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파리에서 미래주의 전시를 준비하는 이탈리아 작가들 그룹에 합류 하지 않았던 모딜리아니는 홀로 고립되어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 시켜 나갔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파르미자니노의 ‘긴 목의 성모’에 매료 되었던 모딜리아니는 목을 비롯한 신체를 의도적으로 늘려서 인물의 우아함을 연출하고 베네치아 동방 정교회 성화(聖畵)의 기울어진 고개의 인물 구도를 정립해 나갔다.

여기에 더해  고귀한 대상을 단순한 형태로 표현하는 방식에 인류 미(美)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 모딜리아니는 

아프리카 가면의 단순하면서 간결한 선과, 캄보디아의 크메르 부처 석상에서는 부드러운 면(面)의 미학을 합쳐 길쭉한 얼굴, 한 줄로 떨어지는 코, 평면 위에 펼쳐진 인물.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던 모딜리아니만의 화풍을 완성시킨다.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한 1914년 유렵 전역에 몰아닥친 전쟁의 소용돌이는 모든 것을 파괴 했다.

모딜리아니는 그림을 그릴 수록 영원에 대한 갈구가 깊어졌고 삶의 덧없음이 뼛속까지 파고 들어갔다.

결핵을 숨기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모딜리아니는 돈이 생기는 데로 술을 마셨고 술을 사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은 작업실에  모델을 밀어 넣고 술과 마약을 던져 주었다.

가난, 폐병, 마약과 술, 여자에 탐닉하며 스스로를 파멸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 넣었던  모딜리아니가 그린 작품은 놀랍게도  선이 분명한 얼굴에 꿈꾸는 듯한 표정에 모두 눈동자가 없지만 텅 비어 있지 않다. 

대체 그 눈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딜리아니는 절친했던 친구이자 화가 카임 수틴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고대의 아름다운 조각처럼 세잔의 인물들은 시선을 지니고 있지 않다네. 하지만 나의 인물들은 시선이 있지. 비록 내가 동공을 그려 넣지는 않았어도 내 인물들은 세상을 볼 수 있다네. 그렇지만 내 인물들의 시선도 세잔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무언의 긍정을 표할 뿐 다른 의미는 없네."

모딜리아니의 작품 모두 모델의 이름이 없다. 

신분도 사연도 식별할 수 없고, 옷차림으로도 잘 구분되지 않는다. 

초상화 모델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걸 중시했던 이전의 서양 초상화 양식과는 전혀 다르다.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눈으로 마주 하고 있는 인물들의 동공을 그려 넣지 않았지만  우수에 젖어 있는 얼굴을 가까이 바라보면 그들의 속마음을 듣고 싶은 신비로움을 채워 넣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20년까지 모딜리아니는 현재 우리가 아는 작품들을 모두 쏟아 냈고 혼수 상태로 발견되어 사망 한 후 이튿날 그의 약혼녀 잔 에뷔테른은  뱃속의 아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그때 눈동자를 그리겠다.” 모딜리아니 

살아생전 술과 마약에 빠져 자멸한 방탕한 인간일지라도 자신만의 예술적 신념으로 그려낸  얼굴들은 그 누구의 얼굴도 아닌 우리 모두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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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데미언 허스트 (무선) - 현대미술계 악동과의 대면 인터뷰
김성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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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영국 런던 그룹 전시회장에    온갖 잡동사니를 조각 조각 붙여낸 대형 작품이 등장했다.

텔레비전, 녹음기, 진공청소기 등 첨단 가전제품과 햄 통조림 등의 사진을 짜깁기해 채운 거실에 싸구려 잡지 광고에서 가위질한   근육질 남자와 가슴 풍만한 여자의 알몸 이미지로 들어찬 이 작품의 제목은 <무엇이 현대의 가정을 이다지도 색다르고 매혹적으로 만드는가?>

당시 전 세계 예술계를 지배하고 있던  난해하면서 요란한 추상그림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 걸린 이 작품은 물질 만능 주의 시대에 범신론적인 존재인 소비재 상품을 예술의 선반 위에 올려 놓았고 수 년 후 전 세계 예술계를 강타하게 된다.

전후 경제번영기를 맞아 삶의 단면이나 실제 사물에 대한 묘사를 금기시하고 순수 추상만을 고집한 모더니즘 미술 시장에서 리처드 해밀턴의 <무엇이 현대의 가정을 이다지도 색다르고 매혹적으로 만드는가?>는 1960년대 전 세계 예술계를 강타한 팝아트의 선언문이 되었다.

1960년대 팝아트의 태동은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과 텔레비전이라는 시각적 매체에서 퍼져 나간 대중 문화의 폭발력에서 분출 되면서 미디어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이미지들이 예술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팝아트의 선언문 같은 작품이 가장 먼저 내걸렸던 곳은 영국 이였지만 팝아트가 꽃을 피운 곳은 대서양 건너 미국이였다.

광고계에서 부터 경력을 쌓기 시작했던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모두 대중들이 소비하는  상품을 오브제로 삼고작품을 전시장에서 내걸었지만 이들의 예술적 뉘앙스는 서로 달랐다.

가장 먼저 대중 매체의 만화와 광고 이미지를 차용한 리히텐슈타인과 도저히 팔 수 없을 정도로 추하게 변형된 물건을 상품이라고 전시한 올덴버그와 달리 앤디 워홀은 슈퍼마켓에 물건을 진열 하듯 상품을 전시장 중심에 등장 시켰다.

196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페루스 갤러리 등장한  워홀의 다섯 점의 캠벨 수프 그림은 오랫동안 관행처럼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닌 선반 위에 캠벨 수프 깡통이 올려졌다.

악평이 쏟아지더니 캠밸 수프가 100달러 가격에 팔리고 있다는 것에 분노한 딜러가 진짜  캠벨 수프를 29센트에 판매 하겠다고 나서면서 대중들과 미디어 관심이 쏟아졌다.

온 세상이 워홀의 캠벨 수프 깡통으로 들썩이는 동안 워홀은 서른 두 점의 캠벨 수프 그림을 완성했고 이 그림은 대형 창고형 매장 진열 방식처럼 여덟 점씩 4열로 전시 됐다.

워홀이 상품을 작품의 기본 프로토콜로 사용하면서 미술계는 수레를 끌고 슈퍼마켓으로 들어가 온갖 상품을 담아 전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앤디 워홀은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한 상품 생산이 가져온 시대를 "코카콜라 민주주의 "라고  정의 했다.

한 때 소수만 누렸던 상품들이 대량으로 생산 되면서 여왕도 대통령도  거리의 노숙자도 마실 수 있게 되었듯이 상품이 예술이 되는 순간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들의 소비면모를 드러내는 매개체가 되었다.

1990년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급속하게 진행되었던 세계화 물결 속에 등장한 영국의 젊은 작가 군단 yBa(young British artist)이   '죽음과 몸'이라는 담론으로 세계 미술 시장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동물의 사체를 미술관에 전시 해 놓고 삶의 무상함과 덧없음, 생의 한복판에서도 죽음을 기억하라는 Memento Mori라는 메시지를 담은 바니타스 회화의 후계자로 자처한 데미언 허스트는 1995년 영국 현대미술의 최고 영예인 터너상 수상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그는 술에 취해 수상 소감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 받은 2만파운드의 상금조차 어디로 사라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회상 할 정도로  술을 음미하는 수준의 애주가가 아니였다. 

젊은 시절 부터 오로지 취하기 위해 술을 섞어 마셨던 데미언 허스트는 한 때 코카인까지 곁들여서 음주를 즐겼던  방탕한 중독자였다.

1998년 데미언 허스트는 영국 테이트 모던에서 아스피린 모양의 의자와 약장, 약국을 테마로 한 독특한 벽지를 바른 전시장에 프라다가 디자인한 수술복을 입고 볼타롤 지연제, 러시아산 퀄루드, 마취제 화합물 같은 파격적인 이름의 시그니처 칵테일을 서빙하는 직원들을 등장 시켰다.

전시장에  ‘파머시(Pharmacy)’라는 레스토랑을 열은 허스트는 이듬해 칼튼 런던 레스토랑 어워드에서 최고의 디자인 레스토랑 상을 받았지만, ‘약국’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영국 왕립 약학회와 갈등을 빚었다.

그가 방탕한 중독자 생활과 결별하고 예술에 집중 하게 된 계기는 2002년에 찾아왔다.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더 클래시의 조 스트러머, 예술가 마이클 주프와 밤샘 작업을 하던 어느 이른 아침  담배를 찾던 그의 시야에 일곱 갑의 빈 말버러 라이트가 들어왔다.

 140개비 모두 자신이 피운 담배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그는 그길로 금연을 결심했고, 담배를 피우고 싶게 만드는 술까지 함께 끊어내며 방탕한 과거와 작별했다.

2016년 그는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에 허스트는  정통 영국 요리와 함께 보드카 브랜드 블랙 카우(Black Cow)를 활용한 칵테일을 제공했지만 대중과 평단의 반응은 싸늘했다.

1986년 앤디 워홀을 시작으로 키스 해링, 에드 루샤, 루이즈 부르주아 등의 거장들과 협업 하면서  공격적이고 감각적인 마케팅으로 성장한 스웨덴 보드카 브랜드 ‘앱솔루트'는 데미언 허스트의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을 보드카의 투명한 액체 병에 담았다.

 ‘영원히 썩지 않게 보존한다’는 포름알데히드의 속성은 앱솔루트의 시그니처 보틀 브랜드의 영속성을 드러내는 헌사가 되어 보드카 시장에서  소비량을 치솟게 만들었다.

알콜과 약물 중독에서 빠져 나온 허스트는 자신의  스폿 페인팅(Spot Painting)을 독일의 맥주 브랜드 벡스의 한정판 라벨에 붙였다.

벡스의 이 한정판 보틀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현재는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V&A)에도 소장돼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작가의 고유한 손길 대신 기계적인 정확성을 선택한  앤디 워홀처럼  데미언 허스튼 기술보다 개념을 판매하며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현대 의학의 차가운 시스템을 상징하듯  작품마다 LSD, 비소, 모르핀 같은 화합물 및 약품명을 붙이고 있다.

 모든 것이 상품처럼  팔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데미언 허스트는 예술을 캔버스 밖으로 꺼내 술병에 담았고, 레스토랑으로도 만들어 우리 삶의 영역에 의도적으로 침투해 왔다.

어쩌면 손 끝 터치 하나로 빠르게 주문하고 대량으로 폐기되고 있는 현 시대에  1972년 듀안 핸슨의 작품 <슈퍼 마켓 구매자>에 등장하는 여성처럼 쇼핑카트에  인스턴트 식료품을 산더미처럼 쌓고 힘겹게 끌고 가는 모습이 오히려 더 예술적 가치가 더 클지 모르고 이에 대한   평가는 아마도 전시장을 찾은 관람자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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