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일을 멈추고 바닷속으로
조니 선 지음, 홍한결 옮김 / 비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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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과 연예인들이 개인 유툽이나 SNS에서 가장 많이 공개하는 것은 건강을 위해 즐겨 먹는 거나 챙겨 먹는 식습관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식습관일 수도 있지만 개개인의 인지도나 유명세에 따라 조회수가 급격하게 올라가서   화제 영상이 될 경우  대중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파급 효과 때문에 각종 PPL이 붙는다.

어떤 유명인이 광고 효과를 노리고 먹고 마시고 요리 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마다 그 영상을 보는 이들의 머릿 속에는 저렇게 먹으면 자신들의 모습이 지금 보다 좀 더 나아지거나 젊어지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겨 난다.

미국 IT 사업가이자 백만 장자인  브라이언 존슨은  40세가 되던 해인 2013년 ‘브레인트리’라는 자신의 온라인 결제 플랫폼 회사를 8억달러(약 1조500억원)에 달하는 돈을 받고 이베이에 팔았다.  단숨에 돈방석에 앉은 브라이언은 자신의 신체 나이를  18세 청춘으로 되돌리겠다는 인생 목표를 세웠다.

일명 ‘회춘(回春)’ 프로젝트를 시작한  브라이언 존스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오전 11시까지  천천히 음식물을 2250칼로리(kcal)정도  섭취하고  4~5시간가량 '집중된 사고'를 위한 시간을 갖는다. 

그는 외출 할 때는 반드시 선크림을 바르고 햇볕을 차단하는 SUV용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착용한다.

 매일 100여알의 영양·보충제를 복용하고, 매주 3회 고강도 운동을 하는 브라이언 존스는 술은 전혀 마시지 않는다.

오후 8시 30분에는 반드시 취침을 하는 그에게 매달린 의사들은 총 30여명으로 이들에게  정기적으로 체지방 스캔과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를 받는다.

 브라이언 존스는 익명의 젊은 기부자에게 혈장을 수차례 수혈 받은 후  4년 젊어진 신체를 갖고 나서 자신의 열 일곱 살 짜리 친 아들의 피를 수혈 받는다.

17살 아들의 피를 1 리터 수혈 받은 브라이언은 피에서 분리한 혈장을 투여 받아서  46세 나이를 37세 육체로 되돌렸고   피부는 28세 구강 상태는 17살, 폐활량은 18세 수준 까지 되돌렸다.

브라이언이 매년 회춘 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쏟아 부은 돈의 액수는  27억에 달한다.

돈을 쏟아 부은 만큼 젊어지고 있는 브라이언의 회춘 프로젝트를 실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지구상에 몇 명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늙은 세포를 젊게 되돌리는 생명공학 기술, 새로운 장기를 이식해 젊게 살아갈 수 있는 의료 기술은 물론이고 먹는 음식을 바꿔 젊음을 되찾아주겠다는 비즈니스가 가장 활발하게 발전 한 곳은 전 세계에서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미국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노인성 치매 같은 알츠하이머 발병률이 가장 높은 곳도 미국이고 사회 세대별, 인종별 그리고 거주 지역에 따른 빈부차이가 가장 큰 곳도 미국이다.

이에 대해 어느 유명 셰프가 전 세계적으로 즐겨 먹는 음식을 조리 해 먹는 걸로 비교 하기도 했다.

영국의 어느 유명 셰프가 해외 출장을 갈 때면 아침이나 브런치로 즐겨 먹던 스크램블을 먹다가 문득 국가 별로 각기 다른 조리 상태의 스크램블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가장 먼저 계란 2-3개, 버터, 소금 정도만 넣는 스크램블을 조리 할 때 영국식은 계란을 풀면서 버터를 첨가 하고 중불에서 달궈진 팬에 계란 물을 부으면서 빠른 속도로 조리 기구로 젓는 동안 약불로 조절하면서 완성한다.

프랑스 정통 스크램블 조리법은 과정이 좀 다르고 복잡한데 찬물을 냄비에 넣고 끓여 놓은 다음에 그 위에 스텐리스 볼에 계란을 넣고 조리용 거품기로 천천히 휘저으면서 소금을 넣고 생크림이나 우유를 첨가한다.

마지막 충분히 달궈진 팬에 계란물을 붓고 빠른 속도로 휘저어서 완성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계란 소비를 하고 있는 미국식 스크램블은 달궈진 팬에 버터를 넣고 계란을 그 위에 깨고 소금을 조금 넣고 조리기구로 휘 젓는다.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이나 일반 식당은 이런 조리법으로 완성하지 않겠지만 대다수 일반 미국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 스크램블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계란물을 만들지 않는다.

왼쪽 사진부터 영국식 계란 스크램블 가운데는 프랑스식 스크램블 마지막 오른쪽은 미국식 스크램블이다. 

계란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스크램블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조리 하는 방법이 다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 스타일의 스크램블이 아닌  색다른 스크램블을 해 먹어 보겠다며 유명인들의 유툽이나 팔로잉 하는 이들의 흔적을 뒤져 보았다.

(C) JohnnySun

캐나다 캘거리 태생의 조니 선은  대학에서 공학과 건축학 그리고 도시 공학을 공부 했지만 일러스트와 시나리오를 쓰고 프로듀서를 하며 설치 예술을 하는 만능 재능인이다.

2017년 지구를 관찰 하러 온 외로운 외계인이 다양한 생명체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그래픽 노블 <내가 외계인이면 다들 외계인>을 비롯해 다양한 이들의 에세이의 그림을 그려 주면서 대중적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C) JohnnySun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들의 대본 작가로도 활동하는 그는 다양한 활동을 폭넓게 펼치기 때문에 제때 끼니를 챙겨 먹는 걸 종종 잊곤 해서 이동 중에 끼니를 때울 때가 많지만 어린 시절 중국계 부모가 항상 집에서 조리 해주었던 계란 요리가 그의 소울 푸드다.

조니 선이 부모님에게 배운 스크램블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프라인팬을 화구에 올리고 약불로 가열한다.

살짝 달궈지면 식용유나 녹인 버터를 두른다

그동안 계란을 깨서 그릇에 넣고 잘 풀어준다.

살짝 달궈진 프라인팬에 붓고 천천히 계속 젓는다.

계란물을 계속 젓는다.

계란물을 계속 젓는다.

계란물을 쉬지 않고 계속 젓는다.

계속 젓는데 변화가 없다면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무슨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다면 잘하고 있는 것이다.

백만장자나 억만장자 같은 부자들처럼 회춘 프로젝트에 쏟아 부을 돈이 없는 이들에게 완전 식품에 가까운 계란은 그야 말로 음식을 통해 회춘을 꿈꿔 볼 수 있는 훌륭한 식재료다.

세상에서 가장 손 쉽고 저렴한 방법으로 저속 노화 속도를 유지 하며 회춘을 꿈꾼다면 냉장고 문을 열고 계란 한 판을 꺼낸다.

노란 계란물에 온 정신을 집중하며 계란물을  계속 젓는다. 

휘젓고 있는 계란을 응시하며 한시도 멈추지 않고 젓는다.

멈추면 계란이 눌러 붙어 타버리니 무조건 계속 젓자!

돌고 도는 계란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프라인 팬에 휘도는 계란을 젓고 있는 내 마음도 빙빙 돈다.

적절하게 끈적한 상태로 완성한 스크램블을 접시에 담는다.

 5분 정도면 완성되는 요리.

계란 스크램블을 입 속에 넣으면서 몸 안의 회춘 시계를 앞으로 돌리고 있다는 상상을 하며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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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1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침에 계란 먹으라는거죠. 저는 스크램블도 귀찮아서 저녁에 미리 삶아놓은 계란입니다. 저는 브라이언 존슨이라는 사람처럼 살바에야 그냥 노화를 택하렵니다. 좀 엽기적이고 편집광같애여. ㅎㅎ

scott 2025-08-16 00:42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조단위 부자가 아닌 바람돌이님과 저는 계란 한 판으로 회춘의 시계를 앞으로 ㅋㅋㅋ

돈이 넘 많아서 온 몸에 덕지 덕지 하고 있는 조단위 부자들이죠 ^^
 
조지 오웰 뒤에서 - 지워진 아내 아일린
애나 펀더 지음, 서제인 옮김 / 생각의힘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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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의 아내는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 병약한 오웰을 돌보는 엄마 정서적 결핍을 채워주는 아내 타자기로 원고를 정서하고 교정교열까지 해주는 비서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집을 청소하고 요리를 해주는 가사도우미 였을 뿐 오웰은 결혼 기간 내내 바람을 피우거나 강간에 가까운 범죄짓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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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08 0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이 시절 유명인들 뒤에 희생당하는 여성들이 있었던 일은 너무 많은데 이건 많이 심하네요.

scott 2025-08-10 00:20   좋아요 1 | URL
오웰의 현재까지 이어진 명성은 80퍼센트 정도가 아내 아일린 덕분이였습니다.

희선 2025-08-08 0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웰 아내 잘 모르는군요 다른 사람 아내라고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예전과 지금은 많이 다르죠 그래서 이젠 알려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전이 맞았다고 말할 수는 없군요


희선

2025-08-10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힐 2025-08-08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뤼쉰의 아내 주안(朱安) 이 떠오르네요. 이들 대문호들은 왜 자신의 아내가 비극적 삶을 살게 내버려 두었을까요? 그녀들의 희생위에 쌓아올린 문학적 성취를 우리가 존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품과 인간은 별개로 봐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네요.
scott님, 더운날 건강 유의 하세요.

2025-08-10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자에 관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김하현 옮김 / 윌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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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를 불태우고 거리를 행진하고 촛불을 들고 동일 임금과 가정 폭력 가사 육아 임시 중절에 맞서 목소리를 높였던 1970년대 그리고 2025년 시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해방 투쟁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 책은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이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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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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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작가 클레어 키건은 자신이 가르치는 창작 워크숍에서 한 학생이 이야기 서사에서 드라마적인 구조가 없거나 극적인 긴장감 없이도 이야기가 성립 된 작품이 있다면 예를 들어서 설명 해달라는 질문을 받는다.

당시 클레어 키건은 학생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휴식 시간에 자료를 찾아 사무실로 가는 동안 머릿 속에서 하나의 심상이 떠오른다.

사무실에서 빈 손으로 돌아 온 클레어 키건은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다.


매일 직장 사무실로 출근한 남자는 퇴근 시간에 회사를 나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서 키우고 있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텔레비전 리모콘을 누르니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 다큐멘터리가 흘러 나왔다.

맨 처음 키건의 입에서 흘러 나온 이야기는 어떤 드라마적인 구조나 극적인 긴장감 없이 어느 한 남자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 되었다.

창작 수업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간 키건은 수업 중에 즉흥적으로 지어낸 이야기 속의 그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날 키건은 그 남자의 삶의 한 단면을 쓰기 시작했고 50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로 완성했다.

2023년 겨울 미국 문예지 뉴요커의 픽션 팟 캐스트 섹션에서 퓰리처 수상 작가이자 매년 뛰어난 창작 수업으로 학생들에게 최고의 교수상을 받고 있는 조지 손더스가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날에(So Late in the Day)' 작품이 '그해 최고의 단편'이라며 극찬을 했다.



'너무 늦은 날에(So Late in the Day/한국어판 너무 늦은 시간)' 라는 작품을 작가 클레어 키건이 직접 낭독 하는 목소리로 공개 되던 날부터 매일 아침 출퇴근 시간에 소리로만 듣다가 페이퍼백으로 구입해서 읽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

소리로 들었을 때 알지 못했던 인물들의 심리와 의도를 활자로 읽고 재차 앞 장으로 돌아가 곱씹어 보니 키건 특유의 간결하면서 건조한 문장에 내포된 인간의 섬뜻함이 느껴졌다.

클레어 키건이 학생의 질문에 즉흥적으로 쓰기 시작한 <너무 늦은 시간>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7월 29일 금요일에 더블린의 날씨는 예보와 같았다. 오전 내내 뻔뻔한 햇볕이 메리온 광장에 내리쬐면서 카헐이 지키고 있는 열린 창가의 책상에까지 들어왔다. 잘린 풀의 맛이 바람을 타고 들어왔고 이따금 후텁지근한 바람이 창틀의 담쟁이덩굴을 흔들었다.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 중에서


지극히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공무원 카헐의 시선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한 때 결혼까지 약속 했던 약혼자 사빈에게 파혼 당한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남자의 일상적인 모습만 보였다.

하지만 중반부를 지나서 카헐의 입에서 "씹년"이라는 여성 비하 욕이 튀어나와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어 보니 카헐이라는 남자는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무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작가 키건은 프랑스인 엄마와 영국 태생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사빈이라는 여성의 시점이 아닌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아버지에게 어린 시절부터 학습된 남자 카헐의 시점으로 남자들 스스로 지각하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 여성 혐오 대한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 시간을 교차 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 시켜 나간다.

무의식적으로 대화 중에 여성을 암캐, 창녀,씹년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카헐은 갤러리에서 일하는 여자 친구 사빈이 좋아하는 페르메이르의 그림 속 여자들이 그저 게을러터진 여자라 생각한다.

그는 요리를 잘하는 여자 친구 사빈의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서 매 끼니 차려진 음식 재료 값을 아까워 하고 설거짓 감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우연히 지갑을 놓고 온 여자 친구를 대신해서 계산 한 것을 두고 두고 잊지 않는 카헐은 매번 자신이 음식 재료 값에 얼마를 지불했는지 생색을 낸다.

결혼 반지 사이즈를 조정할 때 지불해야 하는 돈이 아깝다며 여자 친구 사빈에게 자신이 돈을 찍어내는 기계냐고 화를 내는 순간 카헐은 어머니를 무시했던 자신의 아버지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사과 한다.

파혼을 당한 후 카헐은 대학 시절 주말에 집으로 돌아왔던 날 모처럼 모인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음식 준비를 했던 어머니가 맨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려고 의자에 앉는 순간 동생과 의자를 빼서 어머니를 넘어뜨렸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는 그 때 집안 남자들과 함께 소리 내어 웃지 않았다면 지금과 전혀 다른 남자가 되지 않았을까 라며 후회를 한다.

작가 클레어 키건은 50페이지 분량 속에 카헐이 회사에서 청소부 여성 부터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게 된 여성 그리고 우연히 광장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사비나라는 여성을 대하는 모습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교차 시키며 아버지로부터 학습된 남성성이 성장하는 동안 어떻게 여성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는지 뒤틀린 관계의 근원적인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다.

이야기 초반부 작가 키건은 '얽히고 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대체로 매끄럽게 흘러갔다.'라는 문장으로 이 짧은 이야기 전체의 구조를 단 한 문장 속에 내포 해서 드라마적인 요소 없이 극적인 긴장감 없이 완벽한 서사를 갖춘 이야기를 완성했다.

한국어판 제목은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번역 되었지만 실제 이야기는 늦은 시간이 아닌 '너무 늦은 날에(So Late in the Day)'이라는 제목에 작가가 의도한 응축된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카헐의 인생에 너무 늦지 않게 몇 번의 시간을 되돌릴 기회는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그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전혀 특이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남자 카헐이 누군가 만나고 통화 하고 문자를 주고 받는 모습에 배어 있는 여성 혐오의 짙은 그림자를 작가 키건은 우리 일상 주변에 지나치는 모든 것에 응축된 의미를 담았다.

'너무 늦은 시간에' 작품 분량의 크기는 손바닥만 한 판형에 위 아래로 충분한 여백을 둔 페이지가 100페이지 조금 넘는다. 작정하고 읽는다면 1시간이 채 걸리지 않고 휘리릭 책장을 넘길 수 있지만 작가는 독자들에게 맨 앞 장으로 되돌아가서 읽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2024년에 출간 된 너무 늦은 시간(So Late in the Day)’은 25년 전 출간한 데뷔작에 수록된 단편 ‘남극’(1999년 작), 단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2007)을 비롯해 가장 최근 단편인 ‘너무 늦은 시간’(2022) 등이 실렸다.

2007년의 단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에킬섬 하인리히 뵐 하우스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성 작가에게 갑자기 찾아온 독문학과 교수라는 남성과 겪는 미묘한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여성 작가가 정성스럽게 만든 케이크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독문학과 교수는 수많은 남성 작가를 제치고 선정 된 여성작가가 한가롭게 케이크나 만들며 주변 풍광이나 즐기는 한량이라며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로 그녀를 힐난하며 가르치려 든다.

여성 작가는 처음 만난 여성에게 세상의 이치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듯 무시하며 가르치려 드는 남자에게 복수 하기 위해 습작하고 있는 소설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을 앞둔 주인공으로 그 남자를 선택하고, 소소한 복수를 단행한다.

1999년 발표작이자 이 책의 마지막 작품으로 수록된 <남극>은 첫 문장부터 충격을 예고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 주말에 그 답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12월이었고, 또 한 해의 막이 닫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너무 나이가 들기 전에 하고 싶었다.

-남극 중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한 여성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도시로 나가 술집에서 만난 낯선 남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를 다룬 <남극>은 평소 남편과 아이들 뒤치닥 거리만 했던 ‘여자’가 갖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어봐 주고 필요한 것들을 사주고 직접 장을 봐서 요리 해주고 설거지를 해주고 씻겨주기까지 하는 남자에게 마음을 뺏긴다.

독자는 낯선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동안 그 여성의 시선을 따라 영국의 유서 깊은 도시 구석 구석을 따라 가다 예상치 못한 끔찍한 일을 당하는 그 여자의 마지막 여정의 끝, 눈과 얼음의 땅에 도달하게 된다.

단편 <남극>의 마지막 문단에 작가는 독자들에게 섬뜻한 돌직구를 날린다.


어둑함 속에서 그녀의 입김이 보이고 머리를 덮는 냉기가 느껴졌다. 차갑고 느린 태양이 동쪽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녀의 상상이었을까, 아니면 창 유리 너머에 내리는 눈이었을까? 그녀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시계를 자꾸 바뀌는 빨간 숫자를 보았다. 고양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사과 씨처럼 새까맸다. 그녀는 남극을 , 눈과 얼음과 죽은 탐험가들의 시체를 생각했다. 그런 다음 지옥을 그리고 영원을 생각했다.

-클레어 키건의 <남극> 중에서


키건이 쓴 세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아일랜드 남성들이 여성을 혐오 하고 무시하고 가르치려 드는 모습이 아일랜드 전체 남성의 모습이라 단정 할 수 없지만 시간과 세대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심리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그 무엇을 작가가 단단하게 문장 마다 심어 놓았다.

120쪽 분량의 10년의 시간 차를 둔 단편 세 편이 실린 이 작품의 미국판 제목은 ‘여자와 남자들의 이야기(Stories of Women and Men)’이고 프랑스어판 제목은 ‘Misogyny(여성 혐오)’다.

미국판과 프랑스어 판 제목에 잘 드러나 있듯이 하나같이 잔잔해 보이는 일상에 숨겨진 폭력과 남성 우월주의, 여성 혐오가 담겨 있다.

서로 다른 시기와 시차를 갖고 있는 세 편의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적 연민이나 따뜻한 손길은 철저히 배제한 채, 차가운 시선으로 남성 중심 사회의 억압 구조를 서늘하면서 건조한 문장으로 해부한다.

웬만해서 100페이지를 넘겨 쓰지 않는 작가 클레어 키건의 작품은 한 번 읽는 것으론 부족하다.

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을 때는 밋밋하면서 평이한 문장이지만 다시 한 번 문장을 곱씹으며 등장 인물이 나누는 대화와 그들의 심리와 사소한 행동을 따라 음미 하며 읽는 동안 앞서 등장한 인물에게 포착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면을 알게 된다.

작가 클레어 키건은 1999년부터 2022년까지 발표한 작품은 5권 뿐이다.

단편 소설집 《남극(Antarctica)》과 《푸른 들판을 걷다(Walk the Blue Fields)>>를 출간하자 마자 아일랜드에서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휩쓸었고 중편 분량의 장편 소설 《맡겨진 소녀(Foster)》는 미국 타임지에서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에 선정 되었다.

영화로도 제작 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2년 오웰상 소설 부문에 수상하고 같은 해 부커상 최종 후보작에 가장 분량이 작은 작품으로 올랐다.

클레어 키건은 2023년 너무 늦은 시간(So Late in the Day) 원고를 완성한 이후 신간 소식이 없다.

그녀의 작품을 토대로 만든 영화들이 개봉 할 때마다 인터뷰에서 문예 담당 기자들은 새 작품에 대한 질문을 꾸준히 던지며 신간을 기다리고 있다.

영미 문학계에서 너무 많이 화자되고 있는 클레이 키건의 작품은 모든 작가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지는 25년 동안 발표한 다섯 권의 책을 쓴 클레어 키건을 가리켜 '탄광 속에 보석' 같은 작가라 칭송하고 미국 문학계는 그녀를 21세기 체홉이라 칭송한다.

작가들에게 극찬과 칭송을 받으며 세계적인 문학상을 휩쓴다 해도 내가 읽고 나서 감흥이 없다면 나에게 대단한 작가가 아니다.

하지만 첫번째, 두 번째 세번째 네번째 그리고 다섯번째 연달아 클레어 키건의 책을 읽으면서 조지 샌더스 작가가 21세기 체홉이라고 극찬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절제되고 지적인 암시를 담담하면서 서늘한 공포로 차오르는 슬픔을 흘러 넘치지 않게 서서히 새어 나오게 사용하는 작가 클레어 키건은 오로지 세상에 자신의 언어로만 쓸 법한 문장으로, 저만이 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써낸다.

형제 많은 집안에서 양육과 생계에 지친 부모에 의해 친척 집에 잠시 위탁 되어 처음으로 보살핌과 사랑을 느끼는 9살 소녀의 이야기부터 가부장, 종교, 이웃, 빈부, 남녀, 욕망, 소문, 평판, 술, 비겁함, 두려움 같은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음습함'을 작가 키건은 응축된 문장에 담아 바로 옆에서 살아 숨쉬는 공기처럼 펼쳐 보인다.

단순하고 감각적인 어휘로 서정적이고 정교한 문장을 조각 하는 작가 키건의 언어는 소리 내어 읽어야 단 몇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진실과 진의가 숨어있는지 알게 된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말을 한다. 자기의 말에 자기가 슬퍼한다. 왜 말을 멈추고 서로 안아주지 않을까? 여자가 울고 있다.”

-클레어 키건 단편 <굴복> 중에서


나는 단편 <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등장한 여자 작가의 모습이 작가 클레어 키건의 모습이라 상상하며 읽는다.


그녀는 책상 위의 종이 조각들을 보고 거기 적힌 메모를 읽은 뒤 한쪽으로 치웠다. 만년필 뚜껑이 빡빡 했지만 결국 열고서 공책을 펼쳤다.

그가 그녀의 케이크를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는지를 생각했다.그녀는 그 갈망과 싸우면서 고개를 숙이고 공책에 집중한 채 계속 써 내려갔다.


다섯 권의 키건의 책을 책꽂이에 나란히 꽂아두고 대 작가 체홉 작품을 읽으면서 스산하게 그려낸 아일랜드 그 시절의 그 사람들의 모습에서 내 삶의 흔적과 상처를 발견 하게 되는 것도 신기하고 새삼 작가의 역량이 대가에 버금가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사소한 것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한다.

오늘 우연히 본 영상 속에 그 무엇에 끌려서 충동 구매를 하거나 먹어 본 적 없는 것을 먹거나 가본 적 없는 곳을 찾아 가기도 한다.

영상과 달리 내가 구사하는 언어로 적힌 글을 읽을 때 어느 순간 마음 안의 썰물과 밀물이 밀고 당기듯 파문의 파도를 일으키는 구절을 만날 때가 있다.

명료한 묘사보다 암시와 은유로 사람 사는 풍경을 그린 클레어 키건의 작품을 읽을 때면 그녀가 그린 인물들의 심상들이 내 마음의 파고를 따라 움직이며 마음 속에 꾹꾹 담아 놓았지만 쉽사리 말로 표현 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는 동안에 읽을 정도로 얇고 가벼운 클레어 키건의 책은 다 읽고 나면 다시 펼치게 만든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치는 세상에 도파민에 중독되어 웬만한 이야기에 대한 감동이나 감흥이 사라진 시대에 소설을 읽는 건 시간 낭비 일 뿐이라 생각 할 것이다.

만 오천원으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고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기에 페이지 분량에 비해 책 가격이 비싸서 외면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만 오천 원으로 120페이지 분량의 세 편의 단편을 읽고 나면 대단한 사건 하나 없는 며칠의 일상이 어쩌면 삶 전체를 바꾸는 소중한 무엇이 될 수도 있다.

옥토가 아닌 땅에도 씨를 뿌리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듯이 클레어 키건이 지어낸 이야기에는 지극히 평탄해 보이는 삶에서 넘지 못할 것처럼 보이던 선이 깨어지고 피어나지 않을 듯 했던 꽃이 피어나는 기적의 순간이 찾아 온다.

그러니 더 늦지 않은 시간에 클레어 키건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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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오키타 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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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이치 현에서 태어난 오키타 엔은 고등학교 재학 중에 진로의 길을 정하지 못한 채 대학에 진학 했다.

대학 재학 중에 우연히 소설 투고 사이트를 발견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창작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 틈틈이 소설을 써나갔던 오키타 엔은 2013년 <한 순간의 영원을 너와>라는 첫 작품을 출간하고 3년 후 두 번째 장편 소설 <나는 몇 번이고 너와 첫사랑을 한다>라는 책이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으게 된다.

10대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시작된 열풍은 20대 여성 독자층을 사로 잡으면서 1년 만에 25만부를 돌파했고 종이 만화 단행본으로 출간하며 대중적인 소설가로 거듭나게 된다.

2018년 연작 단편집으로 제 1회 퓨어풀 소설 대상 부분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필력을 인정 받은 오키타 엔은 출판사 지쓰교노니혼샤에서 창간 한 문학 시리즈 ‘마음을 성장 시키고 희망을 전해줄 한 권의 책’이라는 ‘GROW’의 첫 번째 장편 시리즈 <종달새 언덕의 마법사>를 발표 한다.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에 따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에피소드가 전개되는 <종달새 언덕의 마법사>의 첫 페이지를 열면 마녀와 마법사가 등장한다.

어느 날, 한 마녀가 마을에 나타났다. 끝없이 여행을 이어오던 중에 정착할 곳을 찾다가 우연히 다다른 것이었다.

마녀는 마을이 썩 마음에 들어 자신의 정처로 삼기로 했다.

마녀는 마을에 집을 샀다. 낡아 빠진 건물을 직접 수리하고, 가구를 만들고, 황무지 같던 정원에 텃밭을 일구고, 집 앞에는 사랑스러운 꽃도 심었다.

마녀는 그 집에 마법상점을 차렸다.

-오키타 엔의 <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중에서


‘종달새 언덕’에 자리한 마법 상점에 마법의 힘을 수련 하기 위에 찾아 온 수련생은 뜻밖에도 인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살 소년이다.

부모가 마법을 혐오해서 학대 받으며 자란 소년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그 소년에게 마법을 알려주는 마법사 스이는 자연을 이루는 구성원인 물, 불,바람, 하늘, 식물, 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고 키우는 힘으로 인간의 곁에 있는 동식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고 날씨 변화를 예측하는 힘을 갖고 있다.

‘종달새 언덕’에 자리한 마법 상점에 찾아 오는 이들에게 제각기 다른 사연과 상처를 갖고 있다.

불의의 사고로 소꿉친구와 멀어진 중학생,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원로 화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는 소설가, 애인을 잃고 힘들어하는 형과 그를 걱정하는 남동생은 마법의 힘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현실의 좌절감을 극복 하고 싶어 하지만 마녀 스이는 이들의 소원을 단번에 이루어주지 않는다.

마녀 스이는 마법의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세상에 존재 하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게 만들어 줄 뿐이다.

수련 마법사 소년 역시 스승 마법사에게 배우는 마법의 기술은 그리 대단 하다거나 신묘 하지 않다.

마녀 스이에게 약초 키우는 법과 제조법을 배운 수련 마법사 소년은 마법 상점에 찾아 오는 손님들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과 동 식물의 마음과 상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판타지 세계를 그리고 있는 <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작품에서 태초에 신 역시 지구 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 없고 인간 역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앞 날을 예측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영장류 중에 인간은 무언가를 숭배 하고 예를 표하며 불안과 근심, 걱정을 떨쳐 버리기 위해 눈 앞에 존재 하지 않는 신을 믿고 그 믿음에 부합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한다.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는 주술을 다루는 무속인이다.

석기 시대 부터 존재 했던 무속은 질병 치료, 예언, 기우제, 풍요 기원 등 다양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 하며 영적인 세계와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자 역할을 해왔다.

인간의 불확실한 미래와 고단한 현실의 문제를 분석해서 운의 향방을 알려주는 무속은 시대에 맞춰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 나갔다.

광역 인터넷 망 시대에 무속은 더 넓고 다양한 서비스로 확장 시켜 나갔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AI 기술이 접목 되면서 굳이 무속인과 철학관을 찾아 간다거나 온라인 상담을 통해 1대1로 연결 하지 않아도 이름과 생년월일, 생시, 성별 등을 입력하면 의뢰인의 사주 핵심 특징 분석 부터 시작해서 성격 및 성향 -직업 및 재물운 -애정운 및 결혼운 -대운(운의 흐름) -전체적인 운세 정리 -조언 순으로 사주를 봐준다.

부채를 펼치거나 종을 흔들어 의뢰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불러 낸다거나 깊은 산 속에서 돼지 머리를 올려 놓는 제를 올려 굿판을 벌이는 무속인들에게 찾아 가지 않아도 된다.

AI 챗봇인 챗GPT는 질문 창에 생년월일과 궁금한 질문을 넣으면 실제 점술가처럼 의뢰인과 질문을 주고받는 대화 형식으로 사주를 봐주거나 고민 상담까지 해준다.

단 몇 초 만에 의뢰인의 질문에 즉각적인 답을 하는 챗GPT는 가령 '내 사주로 볼 때 000을 선택 해야 할까? 라는 질문을 하면 이에 대해 이렇게 답변한다.

'그 일은 당신의 사주와 아주 잘 맞는 일은 아니지만, 완전히 불리한 일도 아닙니다. 단기적으로 해보되, 너무 무리하지 말고 더 맞는 일을 찾는 과정 중 하나로 보는 게 좋겠습니다.'

챗GPT는 즉각적으로 두리 뭉실 하게 답변하면서도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로 예의 바르게 대답한다.

몇 십 만 원에서부터 몇 백 만원에 달하는 부적을 지니라는 말도 하지 않고 큰 돈을 들여 굿을 하라는 조언을 하지 않는 챗GPT는 부모탓, 형제탓, 조상탓을 한다거나 전적으로 의뢰인의 업보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사주 결과에 대해서도 딱히 좋다, 나쁘다 하지 않고 의뢰인의 단점이나 부족한 부분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말해 준다.

단, 인간의 생년월시에 따른 운명을 통계적으로 수집 분석하는 AI는 의뢰인의 미래까지 예측해 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무언가 어려움에 봉착 하게 된다거나 불확실한 상황을 돌파 하고 싶다거나 현실의 불행을 극복하고 싶을 때면 철학관 문을 두드리게 된다.

난생 처음 만나는 무속인이나 점술가에게 어느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 보면 가슴의 응얼이가 풀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주를 본다는 건 미래를 알고 싶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마음의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서 다.

바쁘다는 이유로, 힘들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줄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서 반말을 해도 비꼬듯 질문을 해도 화가 나서 퍼부어도 챗GPT는 적당히 다정하게 예의 바르게 대답해준다.


인간의 운명은 마법의 힘이라든가 주술의 힘을 빌린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성형을 해서 인상을 바꿔서 좋은 기운이 흐르는 상으로 바꾼다 해도 개명을 하고 운을 트여 준다는 터로 이사를 간다 해도 현실의 곤궁함을 떨쳐 버리는 인생 역전을 하는 일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판타지 일 뿐이다.

모든 것이 이전 시대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하고 풍요로워 졌어도 예측 불허한 세상에서 인간의 삶은 부모 세대 보다 더 고달 퍼졌고 점점 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인간인 창조한 기계가 더 신뢰 받는 시대에 챗GPT에게 술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가상의 존재, 상처와 고민까지 해결해 주는 마법사가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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