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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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이달에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사업에서 은퇴했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직장 생활을 끝냈다. 스트리트레일웨이 광고 회사는 알아서 굴러갈 것이다. 은퇴하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어서 은퇴한 것이 아니라 빚과 절망, 약혼 파기 같은 부정적인 요인 때문에 은퇴한 것이었다. 은퇴한 나는 '장편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고향인 세인트폴로 가만 가만 기어 내려갔다.]

-피츠제럴드의 '젊은 날의 성공' 중에서


대학 재학 중에 결혼 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든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바를 경영 하는 동안 낮과 밤이 뒤바뀌는 생활 속에서도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수시로 읽었다.

1979년 어느 날 자신의 삶의 계시처럼 하늘 위로 날아 온 야구 공처럼 무라카미 하루키는 서른을 앞두고 소설 한 편을 완성했고 글 쓰는 인생의 길을 걸어 간다.


[내가 처음으로 번역한 책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집 <마이 로스트 시티> 였다. 이 책은 1981년에 출판되었는데, 내가 소설가로 데뷔한 직후였다. 이후로도 나는 창작을 하면서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번역하는 일을 시간 간격을 두고 조금씩 계속해왔다. 이후 소설집을 몇 권 엮어 내고 장편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어디에서도 창작 수업을 들어 본 적 없었던 하루키는 작가 생활과 함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번역 하면서 창작과 번역이라는 두 개의 회로를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출간 되었던 피츠제럴드의 주요 작품들 대부분은 1960년대 쇼와 시기에 집중 번역 되었다가 대단한 판매 부수를 올리지 못한 채 대부분 절판 되었다.

피츠제럴드는 동시대 살았던 작가들 중 포크너와 헤밍웨이처럼 노벨 문학상이나 퓰리처 상 같은 타이틀 조차 없었기에 일본 독자들에게 잊혀진 작가 였고 영문학과에서 교재로 읽혀지는 작가에 불과했다.

1980년 부터 본격적으로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한 하루키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번역 스킬을 배운 적도 없었지만 피츠제럴드의 문장에 스며있는 리듬감과 생생한 시대의 목소리를 일본어로 옮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루키는 일본에서 미국 현대 문학 번역의 대가이자 폴 오스터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한 도쿄대학 시바타 모토유키 교수 앞에 번역한 원고를 전부 펼쳐 놓고 첫 문장부터 소리내어 읽어가며 문장 전체의 유연성, 리듬감, 의미를 원문과 철저하게 비교하고 수정하는 작업으로 한 권의 번역서를 완성한다.

하루키 작품의 열풍은 그가 번역하는 작품들로 이어져서 오래전에 잊혀지고 절판 되었던 피츠제럴드 작품들이 일본 주요 서점의 베스트셀러로 올라가고 미국 문학계까지 주목하게 되자 일본 내에서 번역가로 손꼽히는 이들이 하루키가 번역한 작품들과 다른 번역가들이 번역한 작품들을 나란히 놓고 원문과 비교하는 작업을 수행 한 적이 있다.

오래도록 대학의 상아탑에서 학자의 이름을 걸고 시작했던 이 작업에서 하루키의 번역 실력은 A로 평가 받아 학계에서도 인정 받을 정도로 그의 번역 실력은 현재 일본에서 최고로 평가 받고 있다.


'<마이 로스트 시티>를 번역하던 당시,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얼마 번역되어 있지 않았고 대부분 절판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일본 독자에게 널리 소개하는 게 번역자로서의 내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직 번역 능력도 변변치 않았지만. 그 같은 열의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한국에서도 하루키가 번역한 피츠제럴드의 열풍을 타고 그의 작품들이 앞다퉈 출간 되었고 유명 작가들이 직접 번역하는 번역서도 출간 되었을 정도로 작가로써 짧은 생애를 살다간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다시 한번 독자들의 눈길을 받게 되었던 건 무라카미의 성실한 번역의 힘이 가장 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첫 작품으로 군조상을 수상하고 2년 후 1981년 피츠제럴드의 초기 단편집<마이 로스트 시티>를 번역하고 이듬해인 1982년 <양을 둘러싼 모험> 장편을 완성하고 전업 작가가 된다.

그는 이미 소설가가 되기 전 부터 재즈 바 문을 닫은 새벽녘 부엌 테이블 위에 노트와 사전을 펼쳐 놓고 꾸준히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번역하고 있었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그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였고 그의 문학적 스승이자. 글쓰기 교본이였다.

2006년60세를 앞둔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인생 작품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두 번째로 새롭게 다듬어 번역 출간 했다.

장편과 단편, 에세이를 출간하는 동안에도 하루키는 피츠제럴드의 장편 <밤은 아름다워> 번역에 이어서 70세에 들어선 2022년 알콜중독으로 <마지막 대군> 집필 중에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피츠제럴드의 미완성 작품까지 번역하며 문학적 스승인 스콧 피츠제럴드를 향한 고마움이 담긴 번역 작업 마무리를 마쳤다.



[뉴욕은 태초의 모든 빛깔을 지니고 있었다. 귀환한 참전 부대가 5번가를 행진 했고,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을 향해 동쪽으로, 북쪽으로 이끌렸다. 우리 미국은 마침내 명백히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고, 그래서 공기에 축제의 기운이 감돌았다. 토요일 오후에 플라자 호텔 레드룸을 유령처럼 떠돌 때도 술이 풍족하게 제공되는 이스트 60번가의 가든파티에 갔을 때도, 빌트모어 술집에서 프린스턴 동문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도, 나의 다른 인생은 한시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브롱크스의 칙칙한 방,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일, 앨라배마에서 오는 편지를 날마다 기다리는 일(편지가 올까? 뭐라고 쓰여 있을까?) 허름한 양복, 가난 그리고 사랑이 언제나 나의 뇌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친구들이 순조롭게 인생의 바다로 출항하는 동안 나는 나의 불완전한 배를 강물 한가운데로 저어 가려고 열심히 손발을 놀려댔다.]

-피츠제럴드의 <나의 잃어버린 도시> 중에서


내가 피츠제럴드를 다시 만났던 시기는 유럽의 삶을 뒤로 하고 뉴욕에 도착했을 무렵 이였다.

뉴욕 맨해튼 4번가에 위치한 최대 규모의 중고 서점 스트랜드 앞 매대에 1달러짜리 피츠제럴드의 책을 집어 들었던 그 날을 잊지 못한다.


피츠제럴드의 'The Crack up (망가지다)'의 첫 문장, 아니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 물론 모든 인생은 망가져 가는 과정이지만 이 같은 일의 극적인 측면을 만드는 타격(외부에서 오는 -또는 외부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는 -크고 갑작스러운 타격)은, 그러니까 계속 뇌리를 맴돌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갖가지 안 좋은 일에 대한 원인으로 돌리며 탓하고, 마음이 약해질 때면 친구들에게 얘기하게 되는 종류의 타격은 갑자기 효과를 발휘하지는 않는다.]

-피츠제럴드의 '망가지다' 중에서


이 날 밤 나는 1달러를 지불한 피츠제럴드의 에세이들을 여러 번 읽고 다음 날 중고 서적이 아닌 일반 서점으로 달려가서 장편 <위대한 개츠비>를 구입했다.

오래 전 초등학교 졸업 년도에 읽고 고등학교 시절에 원문으로 읽었지만 어떤 감명을 받지도 않았고 내 책장에 그 책을 꽂아 두지도 않았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1920년대 미국은 엄청난 대 호황이 지나간 뒤 썰물처럼 모든 것들이 빠져나가 버렸던 경제 대공황 시절로 사회 전체가 암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기하게도 현 시대와 그 시절의 상황이 맞물려 움직이는 것처럼 내가 살았던 뉴욕의 공기도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뉴욕의 공기와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세기 전에 출간 된 <위대한 개츠비>는 피츠제럴드의 세 번째 작품으로 그는 20대 나이에 철저하게 아웃 사이더의 시선으로 주류의 영역, 계층의 사다리에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인생의 불공평함, 삶의 부조리를 작품 속에 녹여 냈다.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일찍이 발견된 적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아니,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짧은 슬픔이나 숨 가쁜 환희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이용한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 때문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그동안 피츠제럴드는 나에게도 잊혀진 작가였고 그의 출세작인 개츠비가 왜? 위대한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마흔 네 살이 되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구나, 딱 이 나이에 피츠제럴드는 죽었구나' 나는 그때 프린스턴 대학에 다니며 (피츠제럴드의 모교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라는 장편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통감했다.'이 작품을 마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틀림없이 분하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개츠비가 보았던 초록빛을 보기 위해 그가 프린스턴 재학 시절에 끄적였던 원고 복사본까지 찾아 읽으며 뉴욕에서 새로운 희망의 빛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유럽 땅에서 인생의 2막을 시작해서 미 대륙으로 건너와 내가 살았던 땅을 벗어나 마치 거세게 밀려 드는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듯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 하는 동안 가방 속에 부적처럼 피츠제럴드의 책을 넣고 다녔다.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폭풍우가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밤에 잠을 잘 때면 너무나 기괴 하고 환상적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시계가 세면대 위에서 째깍 거리고 촉촉한 달빛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옷을 적시는 동안,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우주가 그의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피어났다. 매일 밤 그는 졸음이 몰려와 생생한 장면을 망각의 포옹으로 감쌀 때까지 새로운 환상을 계속 늘려 나갔다. 얼마 동안 이런 환상은 그의 상상력에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현실이 꿈처럼 비현실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충분한 암시요, 이 세상의 주춧돌이 요정의 날개 위에도 안전하게 세워질 수 있다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피츠제럴드

살아 가는 동안 다양한 형태로 찾아 오는 공격들이 있다.

하물며 새로운 환경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어려움이나 곤경들을 지혜롭게, 아니 운 좋게 해결하고 넘어가기는 쉽지가 않다.


'인생이란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뜻대로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삶은 지성과 노력에 또는 이 두 가지가 적절히 뒤섞여 발휘된 것에 쉬이 길을 내주었다.'


피츠제럴드의 이 문장은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조언 그 이상이였다.

새로운 환경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대부분 내 스스로 해결 할 수 있었고 적절한 시기마다 좋은 사람들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고 노력 한 만큼 애쓰는 만큼 댓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의 빛,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과정에는 엄청난 압박과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 했다.


'사는게 순탄치 않았지만 마흔 아홉 살까지는 괜찮을 꺼야. 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럴거라고 믿어 이런 삶을 살아 온 나 같은 인간이 뭘 더 바라겠어.'

-그런데 마흔 아홉 살을 10년 앞둔 지금, 나는 내가 이미 망가져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만일 내가 서른 살에 마흔 살 그리고 오 십대에 피츠제럴드를 만났다면 그저 한 번 읽어버리고는 두 번 다시 읽지 않았을 것이다.

조류를 거슬러 앞으로 질주 하던 20대 시절에 그의 글을 읽고 삶의 정체기 시절엔 그의 글을 모두 필사 하며 일시적으로 겪었던 난독 증세를 극복했다.

내 인생에서 봉착 했던 어려움은 피츠제럴드의 삶을 무너지게 만들었던 알콜 때문도 아니였고 눈부신 성공에 취해서 흥청망청 시간을 낭비하며 체력을 소진해서가 아니였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뇌신경세포가 손상 된 것처럼 눈으로 활자를 인식해도 머릿 속에선 백지 상태가 되는 증세를 겪었다.

그 분야에서 저명한 의사들도 스트레스 과부하가 원인이라는 진단만 내려서 딱히 뚜렷한 처방도 치료 약도 없었다.


'성공의 첫 번째 거친 바람과 그 바람에 실려 온 달콤한 안개, 그 시절은 짧고도 소중한 시간이다. 왜냐하면 몇 주 후 또는 몇 달 후에 안개가 걷히고 나면 우리는 최고의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달콤했던 런던의 안개와 희망의 빛을 비춰 주었던 파리의 짙은 스모그가 사라진 후에 마주한 뉴욕의 공기는 거칠었다.

거친 공기를 매일 마시면서 나는 서서히 일 근육을 키웠고 공격을 하는 상대에 맞서면서 낯 빛까지 두꺼워졌다.

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단단하게 닻을 묶어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류에 떠밀려 부서지거나 망가지거나 영원히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인생의 낭만적인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너무 이른 시기에 거둔 성공의 대가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이를 통해 젊음을 유지하게 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츠제럴드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지 전 파리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던 그 해 12월 , 집 밖을 나와 미라보 다리를 건너 에펠탑이 뿜어내는 불빛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친구들과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12월 31일 나는 홀로 미라보 다리에 앉아 에펠탑에 새겨진 다음 해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 다운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1월 1일 0의 숫자가 찍히는 순간, 내 시야는 파리가 아닌 뉴욕, 자유의 여신상에 맞닿아 있었다.


삶의 터전을 옮기는 건 대륙과 대륙 사이의 이삿짐을 옮기는 것 만큼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그 해 새해, 파리의 찬란했던 빛을 뒤로 하고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뉴욕으로 건너갔다.

알 수 없는 미래의 꿈을 향해 발을 내딛던 그 시절엔 절벽 위를 기어 올라가도 구불 구불한 도로 위를 질주 해도 무섭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젊어서 성공에 이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의 별이 눈부시게 빛나기 때문에 자기가 의지를 행사하는 거라고 믿는다. 서른 살에 어렵사리 두각을 드러낸 사람은 의지력과 운명이 각각 어떤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서 균형 잡힌 생각을 갖는다. 마흔 살에야 그런 위치에 이른 사람은 의지력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서로 차이 나는 이런 태도는 폭풍우가 당신의 배를 강타할 때 드러난다.]


피츠제럴드가 파리를 찾았던 시기는 알콜에 찌들어서 손가락을 덜덜 떨 정도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던 시기로 문학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헤밍웨이의 작품에 밀려났고 남부 출신의 윌리엄 포크너 작품에 가려져서 미국 문단에서 그의 이름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피츠제럴드는 빛났던 젊음과 사랑, 돈과 명성이 무너져 내리던 시기에도 글을 썼고 딸을 부양하며 창작의 영감이자 뮤즈였던 아내 젤다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영화 시나리오까지 손을 댔다.


'이 낡은 배도 한동안은 물에 떠 있을 수 있겠지... 어떤 바람이 분다 해도....'

-피츠제럴드의 '바람 속의 가족' 중에서


이번에 다시 찾은 파리는 전에 내가 살았던 그 모습은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나의 꿈조차 사라지진 않았다.


다시 찾은 파리에서 미라보 다리에 앉아 밤하늘의 어둠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펠탑의 불빛을 향해 미래의 카운트다운을 세지는 않지만 개츠비가 그랬듯이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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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02 0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작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피츠제럴드, 다시 찾아서 읽어보고 싶네요.

scott 2023-12-02 10:55   좋아요 0 | URL
하루키에게 문학적 스승(피츠제럴드의 굴곡진 인생까지도)의 단편, 특히 에세이가 무척 좋습니다
자극적인 스토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피츠제럴드의 단편 속 이야기 맘을 편하게 해준답니다 ^^

새파랑 2023-12-02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은 소설쓰기의 다른 형태라는 생각이 듭니다 ㅋ저도 이거 펀딩했는데 아직 열어보진 않았네요~!!

전 하루키 덕분에 피츠제럴드를 알게 되었습니다 ㅋ
 
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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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번역하며 세기의 작가로 만들어 놓은 하루키가 직접 선별한 후기작품집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던 시기에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가버린 작가가 남긴 눈부시게 빛나는 단편과 가혹한 현실을 직시하며 써내려간 명 에세이들 작가의 삶은 오로지 작품으로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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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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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1008년경에 쓴 <겐지 이야기(源氏物語)>는 전체 54첩으로 된 장편 대하소설로서,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사랑과 고뇌, 이상과 현실이 불교의 무상관을 바탕으로 은은한 운치와 정감이 배어든 사계절과 함께 이어지는 여러 군상들의 풍류와 인생을 담은 일본 최고의 고전으로 수 세기에 걸쳐 일본 문학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처럼 수 세기에 걸쳐 후대인들에게 읽혀지는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인 우에다 아키나리의 <우게츠 이야기 雨月物語 >는 일본 고전 설화 문학의 진수로 꼽히며 영화를 비롯해서 현대 일본 장르 문학에 큰 영감을 주고 있다.


1775년에 출간된 <우게츠 이야기 雨月物語 >는 기존의 봉건 질서와 유교적인 윤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모습, 기이한 행동과 현상을 괴이하고 신비한 분위기의 몽환적인 세상을 담고 있다.


[메이와(明和) 5년(1767) 3월, 비가 그치고 달빛이 몽롱한 밤에 서창(書窓) 밑에서 이 이야기들을 엮어서 서점에 건네주며, 제목을 우게쓰 이야기(雨月物語)라고 하였다.]


라는 문단으로 시작하는 우게쓰 이야기가 일본의 대표적인 호러 작가 기시 유스케가 2023년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네 가지 공포와 네 가지 절망 속에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농락 당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가을비>라는 단편으로 엮어냈다.


작가의 실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단편 <푸가>는 기묘한 꿈을 꾸면서 순간 이동을 하는 한 인간의 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신의 혼백이 유체이탈해서 이 방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면 거미줄에 잡혀서, 호랑거미에게 포박된 채 아침까지 지내게 됩니다. 그때 꾸는 악몽이 얼마나 음침하고 무서울지는....

지금까지 꾸었던 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일 겁니다.]

-푸가 중에서


꿈 속에서 순간 이동으로 사라진 작가의 삶을 추적하는 마쓰야마는 자신의 영혼이 하늘 높이 비상하는 체험을 하면서 육신은 납으로 된 관 속에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인간에게 내재된 죽음의 공포와 일상에서 밀려 드는 초조함과 불안함, 막연한 미래를 향한 두려움이 현 시대와 과거 시대를 오고 가며 마지막 문장까지 독자들의 심장을 팽팽하게 조인다.


[그 얼굴을 보고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전율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탁한 눈에서는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어마어마한 원통함이 전해졌다.]

-푸가 중에서

작가 기시 유스케가 <우게쓰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비'를 주제로 엮은 단편들에 담긴 인생들은 21세기 현대 일본 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담고 있다.

경제적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정도로 쌓여가는 병원 치료비와 간병비로 노부모를 봉양하는 홀아비의 모습, 쏟아지는 택배 물량을 배달하는 배달 기사가 매일 사 모으는 로또, 학교에서 왕따로 자살을 하기 위해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는 십대들, 불치의 병에 걸렸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릴 용기가 없는 사람, 사이비 종교의 마수에 걸려 폐지를 줍는 인생이 된 사람들의 운명들이 작가의 노련한 필체에 압축되어 담겨 있다.


[어쩌면 각각의 장소에는 행운의 열쇠 같은 것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세 사람에게 똑같이 위도와 경도를 주어도, 길흉은 각각 다를 수도 있다. 어느 사람은 잠든 것처럼 사망하지만 다른 사람은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자신은 어느 쪽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알 수 없으리라.]

-고쿠리 상 중에서

이렇게 저마다 처참한 환경과 운명에 농락 당하는 이들은 꿈 속에서 순간 이동을 하거나 ,한 방으로 인생 역전을 노리지만 자신이 처한 운명에 저항하면 할 수록 악에 대항하면 할 수록 아무리 도망치고 발 버둥치려 해도 원래의 삶, 지옥 같은 일상으로 돌아온다.

[전선이 정체 되어 가을 장마가 시작되면서, 벌써 사흘째 비가 내리고 있다. 인쇄소에 원고 넘기는 날을 앞두고 살기 등등한 편집부 사무실에는 습기가 파고들어 분위기는 몹시 무겁고 답답했다. 공조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 했다.]

인간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고 어떤 운명도 빗줄기를 피해 갈 수 없다.

그럼에도 비가 내리면 비가 그치길 기다리거나 우산을 쓰고도 온 몸이 비에 흠뻑 젖어도 빗 줄기를 뚫고 질주하는 이들이 있다.

항거 할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죽을 힘을 다해 운명에 맞선다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빗줄기는 언젠가는 반드시 멈출 것이다.


'현실은 공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전쟁에 팬데믹, 기후변화, 저출산 고령화에 경제 위기까지, 인간이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공포는 얼마든지 늘어나죠.

사회가 존재하는 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시 유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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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1-24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암울한 모습이랑 우리나라의 암울한 모습이 비슷한거 같아요. 옆나라여서 그런가..
비를 주제로 하는 작품이라니 재미있을거 같아요~!!

scott 2023-11-25 10:36   좋아요 1 | URL
울 나라 현재가 더 암울합니다. ㅠ.ㅠ

희선 2023-11-25 0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비는 차가운 느낌이 드는군요 가을비가 자꾸 오면 겨울에 가까워져설지도 모르겠네요 비가 와서 우산을 써도 비를 아주 맞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피할 수 없는 비라니... 눈은 좀 괜찮은데... 책 앞에 있는 말이 무섭네요 ‘진짜 지옥은 우리가 사는 세계야’는 말...

scott 님 이야기는 어두워도 주말입니다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2023-11-25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냥이 2023-11-26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은 공포로 가득찬게 맞는말 같네요 여기저기 우울한 소식들만 들리고 아동폭력 동물학대 어휴
요즘도 저는 그냥 책만 듣고 다 닫고 살아요 ㅎㅎ 고양이들 돌보느라 24시간이 모자라네요
추워지는 날씨 건강 조심하세요

2023-11-26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책을 훔치는 자는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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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곳곳에 50여 개의 책방들이 즐비 한 책의 마을 요무나가에는 신사가 있다.

이 곳 신사에는 서책을 관장하는 미쿠라관에는 이나리 신이 모셔져 있다.

서책을 관장하는 이나리 신을 모신 요무나가신사로 향하는 이들의 염원하는 소원들은 독서, 글쓰기에 관한 것으로 책과 관련된 기원과 욕망, 저주의 말들을 쏟아 내기 위해 전국 각 지역에서 모여 들고 있다.


[1980년에 나온 <정본 수서산서>의 특별 한정판 35부를 10만엔 이하로 구입할 수 있길.

SF작가 도헨 보쿠타로의 창작 의욕에 불을 지펴주세요.

20년 동안 신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인 문학상을 탄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탄다! 타게 해주세요!

서점 매출이 오르기를, 가능하다면 인터넷 서점 아마존이 경영이 악화되거나 스캔들이 발각 되어 망하길]

인간을 위한 신사가 아닌 미쿠라관은 조상 대대로 책을 지키고 보관하고 널리 전파 하는 가문으로 미쿠라관 설립자인 미쿠라 가이치는 책 수집가이자 평론가였고 그의 아내도 책 수집가로 살다 세상을 떠났다.

이 가문의 자손인 아들 아유무와 딸 히루네는 관리인으로 오로지 이 집안 책을 펼치고 읽고 수집하고 관리하고 보존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미쿠라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본 중에 200여권이 서가에서 사라지자 폐쇄를 결정하고 희귀본을 훔쳐간 도난범을 찾는데 온 가족이 혈안이 된다.

미쿠라 집안의 손녀 미후유는 책을 싫어하는 고교 1학년생으로 책을 읽는 것 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맛있는 걸 먹는 걸 더 즐기는 십대 소녀다.

인간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닌 오로지 책을 위해 지어진 미쿠라관에는 몇 개의 방을 제외하고는 인간이 편안하게 쉴 공간이 없다.

할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마자 정원을 없애고 별관을 증설해서 가족들의 거주 공간을 마련했지만 창도 없고 환기구만 있는 그곳은 십대 소녀 미후유에게 감옥이였다.

남아 있는 희귀본을 지키기 위해 폐쇄해버린 미쿠라관에 교복을 입은 낯선 침입자가 슬그머니 들어 온다.

침입자의 이름은 마시로, 낯선 침입자가 입을 열었다.


[미쿠라관의 책. 현재 23만 9122권. 그 모든 책에 '책의 저주'가 걸려 있어. 훔치면, 미쿠라 집안 사람이 아닌 자가 바깥으로 책을 한 권이라도 가지고 나가면 발동하지 이야기를 훔친자는 이야기의 감옥에 갇혀. 이번엔 선택된 건 마술적 사실주의의 저주야. 매직 리얼리즘이라고도 불리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세계에 도둑이 갇히는 저주지.]


서책들이 걸린 저주는 미쿠라관 주변을 에워싸더니 요무나가 마을의 고서점 일대로 퍼져 나가 신호등 색이 뒤바뀌며 녹색빛의 은행나무 잎이 갑자기 샛 노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미후유, 지금부터 도둑을 찾아야 해. 책 도둑을 잡으면 책의 저주는 사라지고 마을도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책을 지키는 가문에서 태어나도 책을 싫어하는 미후유가 과연 책 도둑을 잡을 수 있을까?


비를 몰고 다니는 남자 베이젤과 해를 몰고 다니는 남자 케이젤이 살았던 한모 마을

두 형제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날 여우비를 맞으며 형 베이젤이 거대한 바위를 들어 동생을 향해 던지려는 순간 동생 케이젤은 날카로운 나뭇가지로 형을 찌르려고 달려들자 나그네가 주사위 두 개를 던져 하나는 서쪽, 하나는 동쪽으로 향해 떠나라고 지시한다.

형제는 나그네의 말 대로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떠나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다.

형 베이젤은 빗물을 받아 놓는 항아리 밑에서, 동생 케이젤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장에서 검은 투구벌레를 발견한다.

서로 각자의 길을 가다 두 형제를 만나게 한 투구벌레, 형제의 이야기는 마을의 전설처럼 전해져서 한모 마을 사람들은 투구벌레 처럼 등딱지가 있는 벌레를 신의 심부름꾼으로 숭배한다.

미쿠라 도서관의 낯선 침입자 마시로는 미후유에게 현재 요무나가 마을이 한모 마을 같은 저주에 걸렸다며 투구벌레를 찾아 낸다면 책 도둑도 잡고 마을에 걸린 저주도 풀 수 있다고 말한다.

한모 마을의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두 형제 베이젤과 케이젤의 이야기가 책 도둑을 찾아 내려는 미후유의 모험과 함께 맞물리며 독자들은 책을 모시고 지키는 가문의 손녀이자 후계자가 책도둑을 찾아 다양한 책들을 만나고 그 책들을 읽은 사람들을 추적하는 동안 그토록 책을 싫어 했던 미후유는 책을 펼치고 활자의 마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작은 산만 한 그 생물은 고개를 젓다가 위쪽 램프와 부딪쳤고, 가엾은 램프는 지면에 떨어졌다. 기름에 불이 붙었고, 순식간에 불꽃이 융단처럼 퍼져나갔다. 그 불꽃이 비춘 생물은 분명히 '짐승'이라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미후유는 언젠가 어린 시절 할머니가 읽어 주셨던 그림책<은빛 짐승>에서 보았던 짐승들이 바로 눈 앞에 나타난다.

노란 여우, 하얀 개, 갈색 말


이런 짐승들을 돌봐주던 사람들 모두 동물의 모습으로 변해 버리고 마을의 저주는 점점 더 강해져서 짐승으로 변하지 않은 인간들의 삶까지 위태로워진다.

하얀 개로 변해버린 미쿠라 도서관의 낯선 침입자 마시로의 등에 올라 탄 미후유는 인간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지만 인도에도 고서점 거리에도 어디에도 사람의 인기척을 발견하지 못한다.

마을 주민들이 전부 사라져 버린 도시에 홀로 남겨진 미후유는 책의 도시였던 마을에 북커스의 버그나 오작동으로 사람을 싫어하는 마을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는다.


[미쿠라 집안과 연고가 없는 자, 미쿠라관의 장서를 한 권도 반출 하지 말 것. 이 금기가 깨지면 주술, 즉 북커스가 발동된다.]


저주에 걸린 마을 사람들은 여우의 모습이 되고 도둑이 나타나면 미쿠라관과 신사를 제외하고는 세계는 정해진 책에 기초하여 변해버린다.

이 모든 저주는 요무나가신사에 모셔진 제신 혼요미노미코토의 가호로 집행되었고 미후유는 '마을에 거부당한' 그곳 저주를 풀기 위해 신의 거처를 찾아 간다.

미후유는 신의 거처에서 엄청난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되고 첫 페이지 부터 마지막 장

'진실을 알아버리다'를 펼친 독자들은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책들은 진심으로 책과 문자에 대한 사랑이 깊은 신앙심으로 이어진 미쿠라가문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꼈을까?

책을 신성한 가치로 여기며 책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고 보관했던 옛 선인들은 자신의 손 떼가 묻은 책을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하거나 물려 주기 싫었을 정도로 신성 불가침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책의 신이라는 게 고대부터 존재할 리 없었고 종이의 대량 생산과 맏물린 인쇄기의 발명으로 서민들이 글을 깨우치고 자신의 돈으로 책을 구입하고 소장하면서 책의 가치는 더 이상 드높아지지 않았다.

그러니 신처럼 책탑을 숭배하고 모시며 소원을 빌고 책의 신의 권능으로 저주를 받는 현실은 불가능 하다.

하지만 살아 생전 책을 가까이 하며 책을 읽고 쓰며 책의 가치와 효용에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불어 넣었다면 가능할 것이다.

이삿짐을 쌀 때 가장 먼저 처분하는 것이 책들로 처분할 때 가장 헐 값에 매입 되는 것도 책이다.

종이와 인쇄 비용은 날로 치솟아서 만 원 한 장으로 책 한 권을 구입하기 힘들어 졌고 그동안 유용하게 읽었던 책 탑을 팔아 치우면 지폐 몇 장만 손에 쥐어질 정도로 이 세상에서 책의 가치는 무게와 부피에 비해 턱없이 낮다.

이북으로 편리하게 전자 결제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여전히 한 끼 식사 가격의 비용을 지불하고 종이 책을 사는 이들이 있고, 처분해버리기도 아까울 정도로 책탑을 쌓아 놓으며 읽고 싶은 책들을 장바구니에 가득 담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 책의 작가 후마미도리 노와키는 책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서점에 취직해서 온 종일 책 무덤 속에서 살다 미스터리 단편으로 작가로 데뷔해서 데뷔 3년 만에 그해 미스터리 베스트 10에서 6위에 올라가는 작품을 써냈다.

매년 작가 후카미도리가 써내는 작품들은 여러 상의 후보로 올랐고 2015년에 발표한 첫 장편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탄탄한 필력을 갖추었다.

책의 세계로 빠져드는 미스터리 판타지 세상을 그린 <이 책을 훔치는 자는>은 서점 직원들의 극찬과 사랑을 받으며 독자들에게도 보물 같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책을 훔치는 자는>에는 매 챕터 마다 '마술적 사실주의', '하드보일드', '스팀펑크', '호러' 같은 다양한 장르 영역을 넘나들며 네 편의 환상적인 책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영역과 이야기 세상을 탐험하며 책의 마법 속으로 빠져 버린다.


사는 동안 책이 거는 주문과 마법에 빠져 보는 것만큼 인생의 도움이 되는 건 없는 것 같다.

스마트 폰 세상 보다 순수하고 유해 하지 않는 공기를 품고 있는 책의 세계

이 책을 읽고 나면 북커버를 씌워주고 싶어 질 것이다.


세상의 모든 책들을 소중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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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1-21 0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이 책 매력에 빠져 버린다... 별난 집안이네요 집안 사람이 아닌 사람이 책을 훔쳐가면 저주가 걸린다니... 책을 싫어하던 미후유는 저주를 풀면서 책을 만나고 책을 좋아하게 되겠습니다 영상을 보는 것보다 책을 보면서 상상하는 게 더 자유롭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 걸 다 똑같이 상상하지 않겠지만...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희선

2023-11-21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3-11-21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커버 예쁘네요. 혹시 저 책을 구매하면 북커버를 사은품으로 주나요? ㅋ

책을 사랑하는 작가의 작품이어서 그런지 내용도 완전 책에 대한 여행 이야기군요~!!

2023-11-21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샐리 루니 지음, 김희용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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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영미 문학권을 뒤 흔들며 '스냅챕 세대의 셀린저'라는 영미 문학 평단의 찬사와 수 많은 수식어를 쏟아낸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은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100만 부 이상 판매된 초대형 베스트셀러다.




나는 이 책 <노멀 피플>을 2019년 6월, 런던 히드로 공항 서점에서 구입했다.

표지 속 두 남녀가 깡통 속에 들어 가 있는 모습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책을 펼쳤고 그 날밤 투숙 중인 호텔에서 밤을 지새우게 만들었다.

특별하지 않은 배경과 상황, 별난 구석이 없는 인물들, 그리 큰 갈등이나 클라이막스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이 책에 빨려 들어갔던 건 91년생 작가의 엄청난 필력 때문이였다.

불안한 청춘의 시기를 겪는 메리엔과 코넬이  서로를 향해 지칠 줄 모르는 끌림과 갈등, 사소한 부딪침이 주된 스토리 이지만 이 책을 두 번, 세 번 읽다 보면 가족과 형제에게 당한 폭력과 폭언의 상처가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학적인 욕구와 욕망의 충돌 속에서 육체적인 사랑이 어떻게 유지 되는지 절제 된 대화와 묘사로 펼쳐 보이는 기술은 가히 예술적이다.


'같은 터의 토양을 공유하며 서로의 주변에서 성장하고 공간을 만들기 위해 몸을 뒤틀다 예상치 못한 모습이 되어버린 두 그루의 나무들 같다.'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 중에서


거대한 사회 네트워크 속에서 인간은 개개인으로 존재 하지 않고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비로소 한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 해 나간다.

부와 특권의 촘촘한 네트워크 망에서 발버둥 치며 계층의 사다리로 올라가려는 청춘의 처절한 모습은 타인의 도움과 보살핌 없이 불가능하다는 현실까지 보여준 작가 샐리 루니는 2015년의 데뷔작 <친구들과의 대화>를 쓰기 전 부터 출판계에서 눈여겨 보았던 인물이였다.


아일랜드의 최고 명문 대학인 트리니티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샐리 루니는 유럽 연합에서 주최하는 대학생 토론 대회에서 매년 우승하며 정치, 문학, 사회 분야에서 최고의 영예상을 받았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더블린 리뷰>에 다양한 에세이를 기고 하며 뛰어난 필력을 인정받아 출판 에이전트들이 그녀에게 명함을 뿌리고 갈 정도였다.

밀레니얼 세대의 문학적 현상이자 미래의 고전이라는 극찬을 받은 <노멀 피플>은 출간한 해에 맨 부커상 후보작에 오르며 <타임스>가 선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계 인사 100명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영국 BBC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2018년 그녀의 세번째 작품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Beautiful World, Where Are You>는 대형 광고 간판과 팝업 스토어 형식의 북스토어에 오로지 이 책으로만 가득 채워질 정도로 그녀의 인기는 하나의 문학적 현상을 넘어 서서 문학계 셀럽이 되었다.


2022년 3월, 런던에서 Beautiful World, Where Are You를 구입하고 앞 부분 몇 페이지를 읽다 덮어 버렸다.

도저히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에도 감정을 이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였다.




그렇게 몇 달을 방치하다 영국 가디언지에 그녀가 기고한 리뷰 나탈리 긴츠부르크의 <All Our Yesterdays>에 기사를 읽고 나서 다시 책을 펼쳤다.

이 책<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Beautiful World, Where Are You>의 첫 장엔 나탈리 긴츠부르크의 에세이에서 발췌한 문장이 쓰여있다.


나는 보통 어떤 글을 쓸 때 그것이 아주 중요하고

또 나 스스로가 뛰어난 작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겠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시시한 그것도 아주 시시한 작가라는 인식도 자리하고 있다.

맹세코 나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나의 소명' 중에서 


1916년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명망 있는 학자 집안에서 성장한 나탈리 긴츠부르그는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토리노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대 가족이자 친족 구성원의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열 살 때 부터 글을 썼던 문학 천재 긴츠부르그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는 동안에도 아이들과 피난 생활 중에도 시와 소설, 에세이를 썼고 무명 작가들의 책을 영어와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출간 해 주며 생의 마지막까지 세상의 모든 희망을 문학에서 찾았다.

밀레니얼 세대의 문학 스타로 드높은 칭송을 받고 있는 샐리 루니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칭 마르크스 주의자'라며 정치적 소견을 밝혔다.

그녀가 '자칭'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큰 목소리를 내며 여러 단체와 함께 시위를 하거나 어떤 주장을 펼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앞서 발표한 두 작품에서 계급과 권력, 자본주의의 병폐를 보여 준다는 평단의 평가를 받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좌파 정치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책으로만 마르크스 사상을 학습한 게으른 좌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학 시절 내내 다양한 주제를 놓고 벌이는 토론 대회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쓰기 실력을 보여 주었던 샐리 루니의 집안은 노동 계층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더블린의 경제 불황이 시작 되기 전에 국영 전기 회사에 근무했다.

경제 불황으로 공기업을 사기업으로 전환하는 사회,경제 개혁 정책으로  실업자가 된 그녀의 부모는 일용직 노동자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런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고 성장한 샐리 루니는 서구 유럽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장미빛도 기대하지도 않고 자신이 쓴 작품에서 조차도 현 사회에 대한 새로운 모습이나 제도와 개혁에 대한 주장도 펼치지 않는다.

오로지 천 유로 세대의 고단한 현실이나 계층 사다리에 올라 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보다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담은 지극히 사소하면서 평범한 남녀간의 사랑 세계에 집중하고 있다.

[한 여자가 호텔 바에 앉아 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깔끔하고 단정했다.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긴 상태였다. 그녀는 메시지 접속 창이 떠 있는 휴대전화 화면을 힐끗 보고 나서 , 또 다시 문을 돌아 보았다.]

-샐리 루니의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중에서

한 남자가 문으로 들어 왔다. 

그는 얄팍한 얼굴에 몸은 호리호리하고 머리 색은 짙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손님들의 얼굴을 살핀 뒤,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창가에 있던 여자는 그를 알아보았지만, 그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주의를 끌려고 애써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같은 또래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올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었다.

24살에 발표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신예 작가 엘리스 켈리허는 전 유럽에서 쏟아지는 문학 행사 참가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 차기작 집필은 커녕 현재 신경 쇠약 중세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고향 더블린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한적한 해안 마을에 집을 빌려 혼자 살고 있다.

데이팅 앱을 통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은 펠릭스는 물류 창고 노동일을 하고 있고 사망한 엄마가 남긴 집을 놓고 형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마침내 약속 장소에서 만난 앨리스는 자신의 집을 구경 시켜 주겠다며 펠릭스를 초대 한다.

[친애하는 아일린에게, 네가 매 마지막 이메일에 답장해주기를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기 때문에, 사실은 (한 번 짐작해봐!) 네 답장을 받기도 전에 너에게 새 이메일을 쓰는 중이야.

우리가 이메일을 주고받는 게 내가 삶을 버티고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내 존재(그러지 않으면 거의 쓸모 없거나 심지어 완전히 쓸모없는)의 일부를 급속도로 퇴보하는 이 행성에서 보존하는 나름의 방식이라는 걸 너는 알아야만 해.

나 한테 이메일도 쓰지 않으면서 대체 뭐하고 있는거니?

나는 네가 더블린에서 내고 있는 집세를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 지금 거기 집세가 파리보다 더 비싼 거 아니?]

친구의 집세까지 걱정하는 앨리스가 이메일을 보내는 상대는 문예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프리랜서 작가이자 편집일을 하고 있는  아일린 라이든이라는 인물로 이 두 사람은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의 동창생이자 절친한 친구 사이다.

박봉에 시달리는 아일린은 현실의 비참함을 어린 시절의 친구이자 의회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사이먼과 가끔은 진한 사랑을 나눌 정도로 사랑의 감정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상태다.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네 명의 인물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장면이 바뀔 때  마다 이메일 형식의 1인칭 시점이 서로  맞물려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30대를 갓 넘어선 네 명의 남녀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이 작품의 스토리 중심은 서로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끌림이다.

육체적인 사랑으로 엮여진 네 명의 인물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암흑 같은 절망보다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라는 외침처럼 희망적이다.

책 출간의 성공으로 엄마의 담보 대출까지 한번에 갚아 준 앨리스는 매달 통장에 만 단위 숫자가 찍힐 정도로 돈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일용직 노동자 펠릭스에게 '돈 정말 많다'라는 말을 내뱉을 정도로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주면서도 차기작 구성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성경 책을 펼쳐 놓고 셰익스피어의 가부장적인 언어 유희를 실랄하게 비판한다.

앨리스는 이메일을 통해 절친한 친구 아일린에게 유럽 문학계의 지나친 자본주의 행태를 비판하며 현대 소설은 이미 그 생명력을 다했다며 비관적인 생각을 토로 하며 오염된 공기와 물, 질병의 대 유행, 기후 변화의 위기, 부패한 정치 집단을 비난 하면서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앨리스는 기원전 1400년 경에 세워졌던 크레타 문명을 발굴한 에번스과 문명의 언어를 해독하는데 매달렸던 문헌학자와 고고학자들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고리가 이어지지 않고 끊어지고 멈춰버렸다며 현 자본주의 시대의 종말을 주장한다.

반면 자신의 생체 시계에 대한 걱정, 즉 출산 능력이 앞으로 10년 정도 유지 될 수 있을지, 이런 사회에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을지 걱정하며 친구 아일린에게 '너는 애를 잘 낳는 외모'라며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칭찬의 말을 한다.

친구 아일린은 여섯 살 연하의 여자친구랑 연애 중인 친구 사이먼이 자신과 잠자리를 하고 나서 성당에서 고해 기도를 올리는 모습에 실망하면서도 그의 사랑을 갈구 한다.

1년에 2만 유로 정도 벌고 시골 대 저택에 혼자 거주 하며 우울감에 빠져 있는 앨리스는 현 사회를 피해자 집단(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 유색인종, 여자들)과 억압자 집단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 남자들, 백인종)으로 구분하고 이들이 서로 착취하는 방법을 차단 시킬 해결책을 친구 아일린에게 토로 하면서도  펠릭스의 데이트 신청을 기다린다.


[나는 20세기를 하나의 긴 질문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답이 틀렸어. 우리는 세상이 끝났을 때 태어난 불운한 아기들이 아닐까? 그 후로는 이 행성에도 우리에게도 기회가 없었어. 아니, 그것은 단지 하나의 문명, 즉 우리의 문명의 끝일 뿐이고, 미래의 언젠가 또 하나의 문명이 그 자리를 대신할지 모르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둠이 깃들기 전 불을 밝힌 마지막 방에 서서 무언가의 증인이 되고 있는 셈이야.]


세상의 끝, 자본주의 한계의 끝자락에서 밀레니얼 세대인 30대 앨리스, 아일린, 사이먼은 모두 고학력자들로 천 유로 세대들보다 비참한 삶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부모 세대처럼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는 삶은 꿈꾸기 힘들 만큼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살 곳을 찾아 정착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작품 출간이 대박 나서 돈을 쌓아 놓고 있는 앨리스와 달리 펠릭스는 사망한 엄마가 물려 준 방 한 칸과 주방 한 칸 짜리 집을 놓고 형과 다툼을 벌이며 냉동 물류 창고에서 포장 업무를 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펠릭스의 삶에 할애한 페이지가 몇 장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날 아침 펠릭스가 일하는 동안 앨리스는 그녀의 출판 대리인과 전화 통화를 하며, 그녀가 받은 문학 축제들과 대학들의 초청에 대해 의논했다. 이 통화가 이뤄지는 동안 펠릭스는 휴대용 스캐너를 이용해 다양한 제품 상자들을 식별하며 라벨이 부착된 팰릿형 카트에 분류해 넣었고, 그러면 곧이어 다른 작업자들이 그 카트를 밀며 수거해갔다. 이 작업자들 중 몇몇은 상자들을 수거하러 왔을 때 펠릭스에게 반갑게 인사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영국에서 불굴의 의지로 작가가 된 데버라 리비는 밀레니얼 시대 사회에서 가장 주목 해야 할 것들은 돈-계급-차별 이라며 자신의 모든 작품이 이 세가지 키워드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했다.

데버라 리비는 첫 남편과 이혼 후 아이들의 생계를 떠 맡으면서 사회가 어떤 식으로 모성을 강요하며 여성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차별과 학대 착취를 하도록 오랜 세월 관습과 문화, 언어로 지배를 가했는지 여러 작품과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작가 데버라 리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로지 개인적인 성취에서 이뤄낸 이익만이 삶의 풍요를 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반면 91년생의 샐리 루니는 대학 시절부터 쌓아 온 필력으로 단 두 편의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외모와 치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 욕망이라는 요소 없이 즐길 수 있는 순수하면서 심미적인 것을 인식할 때 아름다움은 비로소 분출 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이 세상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예술 작품 마네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베르조를 그린 초상화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작품, 음악, 아름다운 경치에 보여지는 아름다움이라 생각 하기에 밀레니얼 세대에게 칭송 받는 계급인 상업성을 두루 갖추고 SNS의 팔로우 추종자들을 이끌고 있는 셀럽들이 즐겨 먹고 마시고 듣고 읽는 것 보다 자신의 눈과 귀를 끌어 당기는 작품에서 삶의 의지와 욕망을 발견한다.


[인류는 신을 향해 나아가고 신의 본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런 속성들을 갖추고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써. 따라서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든 우리를 신성함에 대한 사색으로 인도하지. 비평가로서 우리가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는 것에 대해 궤변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거야. 우리는 단지 인간일 뿐이고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 할 수는 없는 법이나까.]


집안 대대로 귀족 가문에서 성장한 톨스토이는 자신이 집필 중인 작품에서 가난과 고통, 질병 그리고 형살이에 처한 삶의 모습을 묘사 할 때 밑바닥 삶을 체험했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참조 했다.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가난을 글로 읽었던 톨스토이와 달리 사형장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도스토옙스키는 모든 인간의 고통과 번뇌의 시작은 '돈'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세상은 아름다움이 구원할 것이라 믿었다.


“나를 파멸 하게 하는 건 돈이 아니라 삶의 이 모든 불안, 이 모든 쑥덕거림, 냉소, 농지거리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중에서


소설 ‘가난한 사람들’에서 빠듯한 월급으로 입에 겨우 풀칠만 하는 하급관리 마카르는 연인에게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건 돈이 아닌 타인의 조롱과 비웃음이라고 고백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 했을 당시 1846년대 러시아 사회는 모두가 ‘절대적 빈곤’만 강조했다.

하지만 지옥의 끝까지 추락해 본 경험을 가졌던 자신의 작품 <가난한 사람들>의 빈궁한 하급 관리 마카르의 모습에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고 좌절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투영 시켜 이미 러시아 사회 깊숙이 청년 빈곤층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불행은 전염병입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전염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옛날에 검소하고 조용하게 사셨을 때는 겪어 보지도 못했을 불행을 이제 제가 당신께 가져다 드리고 말았군요.]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불행도 가난도 전염병처럼 대를 이어 물려 받는다.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는 이제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고 누구든 열심히 성실하게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으로 시험에 합격해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의 연쇄 순환 고리가 사라져 버렸다.


[착한 사람은 황무지에서 살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저절로 굴러 온 행복을 누리는 이따위 일들은 도대체 왜 생기는 것이랍니까! 어째서 어떤 사람은 어머니 뱃 속에서부터 운명의 새가 행운을 점지 해주고, 왜 어떤 사람은 양육원에서 태어난단 말입니까! ]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1840년대의 삶과 2023년 현 시대의 인간의 삶이 크게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분명 인류는 진화해 왔고 현재의 삶은 분명 지난 세기 보다 월등히 좋아졌고 나아졌지만 서로를 향한 울분과 증오심, 분노의 크기는 이전 세기보다 더 커졌고 사회적 위치와 삶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기회의 평등이 사라져 버렸다.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 이전하고 같을 수밖에 없느냐고요?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들을 옷을 뒤집어 보이듯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도스토옙스키


샐리 루니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속의 인물의 사고와 행동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며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서간체 형식과 3인칭 시점이 뒤섞인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의 두 인물, 앨리스와 아일린은 독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작가의 생각과 사고를 대변하는 양면적인 인물들이다.

카톨릭 신앙이 국교인 국가에서 태어나 최고 대학의 영예로운 졸업생으로 30세에 진입하기 전에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위치에 올라선 작가는 삶의 중심을 신앙과 사랑에 두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절망적이여도 신을 선택한다면 생의 빛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 보다 무언가를 사랑하는게 훨씬 낫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 있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을 바라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 그것은 그 나름대로 특별한 선물, 축복,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닐까?'


친구 앨리스의 편지를 받은 아일린은 삼 개월 동안 피임약을 끊고 사이먼의 아이를 갖는다.

일에 대한 큰 애착심이 없는 의회 보좌관 사이먼은 자동차도 집도 없지만 방 한 칸짜리 주택에서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매일 출근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바로 지금 겪고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고 남을 바꾸기보다는 나 자신을 바꾸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이런 사회, 이런 정치, 이런 국가의 상태를 개인이 바꾼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매일 우리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하루를 살아내고 버텨내고 있다.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라는 제목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그리그의 신들>의 한 구절로 작가 샐리 루니가 2018년에 참가한 리버풀 비엔날레 행사 제목이였다.


한 시대의 예술로 평가 받는 작품은 이미 현 시대에서 예술로 평가 받으며 수많은 이들의 공감과 이해 그리고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따라서 지난 세기의 작품이 현 시대에도 통용되는 언어가 되고 미술이 되고 음악이 되어 각기 다른 아름다움으로 빛이 난다.


91년생 작가의 작품이 밀레니얼 세대의 '제인 오스틴', '더블린의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불리며 미래의 고전으로 평가 받고 있어도 다음 세대까지 이 평가가 이어질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이란 무섭고 섬뜻한 거야! 무섭다고 하는 건 뭐라고 정의 할 수 없기 때문이야. 정의할 수 없다는 건 하느님께서 수수께끼 만을 던져주셨기 때문이지. 여기 선 양극단이 맞붙어버리고 모든 모순이 함께 살고 있어. 동생, 난 교양이라 곤 하나 없는 놈이지만, 이건 많이 생각해봤어 정말 비밀이 무섭게 많아!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가 이 지상에서 인간을 짓누르고 있어.

어떤 사람이 그것도 더없이 고상한 마음과 높은 이성을 지닌 사람이 마돈나의 이상에서 시작해서 소돔의 이상으로 끝나고 만다는 거야

수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이란 다름 아닌 소돔 속에 도사리고 있어.

넌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니? 섬뜩한 건 아름다움이 무서울 뿐만 아니라 신비로운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야. 거기서 악마가 신과 싸우고, 그 전쟁터가 바로 인간들의 마음 속이야.]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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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1-15 0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였나 이 책 그림 보고 어디에서 많이 본 건데 했습니다 《아몬드》 그린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건 조금 전에 떠올랐습니다 이름 알아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네요 영점일(0.1)...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닌데... 그림 그린 사람 이름도 잘 적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마지막에 일러스트 영점일로 쓰여 있어요

앞에 보이는 네 사람은 여기 나오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가 봅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소설을 쓰기도 했죠 제목 맞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에서는 사랑이기는 했네요

이 작가는 아일랜드 사람이더군요


희선

2023-11-15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ookholic 2023-11-15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선가 먼지를 먹고 있는 <노멀 피플>을 꺼내야 하루시간이군여~^^
scott님,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요~~

scott 2023-11-15 23:15   좋아요 1 | URL
드라마도 추천 합니다.
북홀릭님 이 책은
아들과 딸에게는 아직 ^ㅎ^

새파랑 2023-11-15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샐리 루니에서 제인오스틴, 도스토예프스키 까지 이어지다니 놀랍습니다~!!

이 책 표지가 좀 마음에 안드는데 읽어보고 싶긴 합니다~!!

역시 문학강국 아일랜드~!!

🇮🇪 🇮🇪 🇮🇪

scott 2023-11-15 23:15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이 사강을 좋아 하는 것 만큼
샐리 루니도 좋아 하실 것 같습니다

문화 강국 아일랜드!
맥주도 맛난 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