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Prokofiev: Romeo and Juliet, No 13 Dance of the Knights
1914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한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원에서 주최한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루빈시테인상을 수상한다.
항상 자기 멋대로 자기 방식을 고집했던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원에서 지정한 고전주의 협주곡을 거부 하고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1번 D장조>를 연주 했다.
음악원 스승을 가리지 않고 등에 칼을 꼽아 버렸던 성질인 프로코피예프의 이런 행동이 음악원 측에서는 전혀 낯설지 않아서 내버려 두었다.

심사 위원들 중 외부 인사들은 프로코피예프의 범상치 않은 피아노 연주와 작품에 주목 했고 심사 결과는 어느 누구의 제자이고 싶지 않았던 프로코피예프가 차지 했다.
그해 프로코피예프는 이 작품 악보를 들고 런던으로 건너가 인생의 두번 다시 오지 않을 행운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러시아 출신의 사업가 이자 자신의 이름을 딴 발레단을 이끌고 있던 거물 댜길레프로,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프로코피예프에게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음악을 의뢰한다. 천부적으로 상업적 예술 촉을 가진 댜길레프는 프랑스에서 스트라빈스키에게 투자해서 유럽 전역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제 그의 돈은 자만심으로 충만한 22살 짜리 음악원 졸업생 프로코피예프로 아직 발레곡이 없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성공 가능성에 통 큰 베팅을 건다.
1914년 제 1차 대전 발발로 프로코피예프는 곧바로 작곡에 착수 하지 못하고 뒤이어 발발한 피의 혁명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망명자 신세가 된다.
1917년 일본을 거쳐 미국 땅에 도착한 프로코피예프는 낯선 땅에서 왕성하게 창작욕을 불태우며 생애 가장 널리 연주 되는 작품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의 연주와 음악은 미국에서 커다란 호응을 얻지 못한다.
날 선 긴장감에 충만해서 거칠고 요란하게 울리는 북 소리 같은 그의 연주 스타일이 미국인들에게 그는 볼셰비키 혁명가로 보였다.
1921년 프로코피예프는 미국 땅을 떠나 파리로 건너가 이미 앞서 등장 했던 스트라빈스키-쇤베르크에 뒤이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불협화음 연주자 계보에 가볍게 올라 탄다.
파리 시민들은 그의 음악을 경멸하기도 했고 싫어 하기도 했고 비웃기도 했지만 어쨌든 새로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 외면 하지 않았다.
댜길레프가 의뢰 한지 정확히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 1934년 가을, 볼쇼이 극장으로부터 <로미오와 줄리엣>공연 가능 허가를 승인 받는다.
이미 2년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서 작곡 스케치를 해나갔던 프로코피예프는 낭만적 고전 스타일에 최대한 충실한 작품으로 탄생 시킨다.
그는 이 작품에서 몬테규가와 캬풀렛가의 한치의 양보도 없이 밀고 당기는 긴장감, 타이볼트의 포악함과 죽음, 중세의 시대 자유롭지 못했던 젊은 연인들의 모습 속에 혁명 이후 극 변해버린 러시아 시대를 담았다.
두 집안의 극심한 대립과 결투,달 빛 속에 싹트는 연인의 사랑 그리고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연인의 생명 까지 프로코피예프는 비극적인 운명의 사랑을 모음곡 형식으로 총 14곡으로 표현했다.

모음곡 제1번
1. 민족무용, 2. 정경, 3. 마드리갈, 4. 메뉴에트, 5. 가면 무도회, 6. 로미오와 줄리엣, 7. 타이볼트의 죽음.
모음곡 제2번
1. 몬테규가와 카플렛가, 2. 소녀 줄리엣, 3. 로렌스 수도사, 4. 춤, 5. 이별 직전의 로미오와 줄리엣, 6. 안티뉴 섬에서 온 아가씨들의 춤, 7. 줄리엣의 무덤 앞의 로미오
이렇게 완성한 작품은 지나칠 정도로 셰익스피어 원작에 충실하다는 이유로 레닌그라드 키로프 극장으로부터 공연 거절을 당하고 춤을 추는 분량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도 공연 거부를 한다.
결국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러시아의 어떤 극장에서도 올리지 못하다가 1938년 체코 브루노 극장에서 초연 되어 2년 후 레닌그라드 키로프 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이 공연은 러시아 음악 역사상 세기의 공연으로 기록 될 정도로 대 성공을 거두며 안무,지휘,무대 미술가들은 스탈린 상을 받으며 인민 예술가가 된다.
이 나라 저 나라 망명객으로 살았던 프로코피예프는 소비에트 음악계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작품 속 인물들의 깊은 정서적 표현과 강렬한 개성, 타의 추종을 불허 한 큰 스케일 때문에 발레 음악 중에서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음악은 물론 뮤지컬, 연극,오페라, 발레 작품으로 무대에 수없이 올려 지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

1940년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초연 된 라브로프스키의 버전을 시작으로 1955년 로열 데니쉬발레단을 위해 만든 프레데릭 애쉬튼 버전, 1958년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을 위해 만든 존 크랑코 버전(John Cranko), 1965년 영국 로열발레단을 위해 만든 케네스 맥밀란 버전(Kenneth MacMillan)버전 , 1977년 런던 페스티벌 10주년을 위해 만든 루돌프 누레예프 버전(Rudolf Nureyev), 2006년 현대 감각으로 안무 된 몬테카를로발레단 장 크리스토퍼 마이요 버전(Jean-Christophe Maillot)까지 세기에 걸쳐 새롭게 탄생 되고 있다.

여러 안무가의 버전 중에 영국 로열 발레단을 이끌었던 안무가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셰익스피어의 원전에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맥밀란 버전은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의 선율이 담고 있는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섬세한 안무로 표현 하며 뛰어난 연출력으로 극적인 긴장감이 빚어내는 뭉클한 감동까지 느낄 수 있다.

여러 버전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발코니 파드되’
맥밀란 버전은 어느 버전 보다 남녀 간의 사랑의 여운과 깊이를 실감나게 표현해서 뒤이어 터져 나오는 비극에 가슴 속 깊이 슬픔을 도출해 낸다.
맥밀란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14살 소녀가 사랑과 이별을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에 촛점을 맞췄다. 관중들은 2시간 남짓 동안 '줄리엣이 심리적'으로 성장 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1막, 캐퓰렛가의 가면무도회 –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가면무도회에 등장한 귀족들이 화려한 의상과 가면 속에 본성을 숨긴 채 각자의 욕망에 이끌려 다니는 모습을 통해 곧 닥쳐올 가문의 비극에 대한 암시를 보여주는 화려한 서곡이다.
2막 ‘발코니 파드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 ‘발코니 파드되’
첫 눈에 반했지만 서로 원수 집안의 연인이 비밀리에 만나 처음으로 어떤 두려움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2막 베로나 광장의 싸움
가면 무도회에서 귀족들의 숨겨진 욕망을 보여 줬다면 이 장면에서 케퓰렛가와 몬테규가 남자들의 칼 속에 노골적인 욕망의 담겨 있다, 결국 두 남자의 칼부림으로 티볼트와 머큐쇼는 죽음에 이른다.
3막 ‘침실 파드되’ 와 마지막 '캐퓰렛 가문의 지하 묘지'
빠른 템포로 연주 되는 음악 속에 줄리엣은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다.
패리스 백작과 사랑 없는 결혼을 강요 받고 있는 줄리엣 뒤이어 로미오의 죽음을 알고 오열과 절망 속에 죽음을 택한다.
1948년 소비에트 당국은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에 대해 '표현력이 부족하고 완성도가 낮으며 조화롭지 못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음악을 생산 하기 때문에 더는 좌시 하지 않겠다고 선전 포고를 한다.
수주일 동안 프로코피예프는 당국의 주요 간부를 만나 자아 비판을 하며 스탈린에게 충성 한다는 서약을 작성한다.
'저희에게 엄하지만 중차대한 질책을 해주신 총 연방 공산당 중앙 위원회, 그 중에서도 친애하는 지도자 스탈린 동지께 무한히 감사 드립니다
저희는 소비에트 인민의 삶과 투쟁을 음악에 생생하게 담아 모든 인민들의 사상의 견고함을 다져나가는데 모든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
57세에 접어든 프로코피예프는 지난 시절에 작곡 했던 자신의 작품의 화려한 음표를 모두 제거 하고 서로 비슷한 화음의 음악을 공장에서 생산하는 통조림 처럼 찍어낸다.
그는 생애 마지막 해에 완성한 교향곡 7번은 가장 빛났던 시절 20대 때 습작한 작품을 조금 길게 늘려 썼다.
1953년 3월 5일 6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프로코피예프, 같은 날 스탈린도 사망한다.

클레먼시 버튼 힐의 <Year of Wonder>의 곡 선별과 작곡가 구성등 많이 참조 했구나.
이 책은 표지 까지 비슷하게 !
2021년 신년 새해 플친 오거서님의 탁월한 북 셀렉팅으로 구매한 <1일 1클래식의 기쁨> 1곡씩 유툽에서 찾아 듣다가 1월 17일 부터 포스팅을 시작!
해서.........2021년 12월 31일 까지 359일 동안 1일 1음악 포스팅을 올리는 동안 새벽 비댓으로 댓글 테러도 당하고 북플 뉴스피드에서 이웃 플친들 포스팅 좋아요 눌렀다가 해제 된 줄 몰랐다가 좋아요 취소했다고 악담이 가득 적힌 댓글을 달은 옛플친들도 나타났다.(지금은 플친사이가 아님)
음악 포스팅 올린건 전부 ***블로그로 옮겨 버렸고 플친님들의 따스한 댓글은 소중하게 간직
이 포스팅만 여기 올려 놓은 이유는 악담을 섞은 댓글을 영원히 삭제 하지 않기 위해서다.
음악을 찾아 듣고 포스팅을 하면서 플친님들의 따스한 댓글과 선물까지 받은 기쁨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