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5일 음악 생상스 '백조(13.The swan/saint-saëns carnival of the animals)
생상스가 1886년 발표한 '동물의 사육제'(carnival of the animals)
총 14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열세번째 곡 '백조'
백조의 우아한 날개 짓이 첼로 독주의 우아한 선율에서 부드럽게 뻗어나가면서 하프의 소리는 잔잔한 호수의 일렁이는 물결을 떠올리게 만든다.
쉴 새 없이 두들기는 두 대의 피아노 반주는 물속에서 부지런히 헤엄치는 백조의 두 다리의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생상스가 1886년 발표한 '동물의 사육제'는 현악기와 플루트, 클라리넷, 실로폰, 첼레스타, 피아노 두 대에서 나오는 화음들이 다양한 동물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발한 구성으로 작곡된 작품이다.('동물의 사육제'는 생상스의 작품중에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만큼 가장 유명한 작품이지만 정작 생상스 본인은 이곡을 자신이 눈을 감기전에 절대로 출판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출판사 측은 생상스가 1921년 86세의 나이로 알제리에서 사망 하자마자(원고는 이미 완성해 놓음) 그다음날 바로 출간해서 엄청난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동물의 사육제'는 총 14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곡 '서주와 사자왕의 행진'은 피아노가 저음에서 강한 음향을 만들어내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고 넷째 곡 '거북이'는 느릿느릿 기어가는 거북이의 움직임을 음으로 표현했다.
다섯째 곡 '코끼리'는 코끼리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더블 베이스가 연주 한다.
일곱번째 곡 '수족관'은 실로폰과 피아노가 물속을 유유히 유영하듯 환상적인 화음을 연주하면서 플루트와 바이올린 화음이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느끼게 만든다.
아홉번째 곡 '숲속의 뻐꾸기'는 클라리넷 소리로 깊은 숲 속에서 들려오는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벽장 시계 속에서 나는 소리와 똑같이 울린다.

샤를 카미유 생상스(Charles-Camille Saint-Saëns1835년 10월 9일 ~ 1921년 12월 16일)
모차르트의 아버지도 깜짝 놀랄만한 천재, 음악 신동 샤를 카미유 생상스
두살때부터 피아노 건반 음을 정확하게 두들기며 화음을 만들었고 세살때는 짧은 피아노 소품곡을 작곡 했다.
피아노 건반 부터 두들겼던 꼬마 생상스는 세살때 작곡을 뚝딱 하고 난후 글자를 깨우쳤다.
네살때 최초로 참가한 살롱 연주회에서 베토벤 소나타를 완벽하게 연주 했다.
이후 주변을 놀라게할 만큼 학습에 가속도가 붙어서 드디어 일곱살때는 라틴어를 정복했다.
열살이 되던해 500여명의 청중이 모인 플레옐 홀에서 생애 첫 독주회를 열었다.
생상스의 천재성은 파리 음악원 입학 이후에도 이어졌다.
음악원 재학 당시 교황곡을 완성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음악계의 거목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꼭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받을 정도로 유럽 전역에 천재 음악가 생상스를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 였다.
음악원은 물론 쟁쟁한 현역 음악가들도 '생상스는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음악가 중 한사람'이라고 극찬을 한다.
하지만 생상스는 로마 대상(프랑스 파리 음악원 로마 분교에서 만든상, 음악계에서 가장권위 있는 상)에 두번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첫번째 참가 했을때는 너무 어려서 심사위원들이 탈락 시켰고 두번째는 생상스의 눈부신 재능과 천재성이 심사위원들의 생계 까지 위협 할지 모른다는 질투 때문에 0점을 줬다.(하지만 이후 생상스가 심사위원중 한명이 된 이후 피의 숙청,실력없는 위원들 사표쓰게 함/ 너무 과도하게 개혁을 추진해서 음악 후배들에게 기피 대상 1호가 됨)을 단행한다.
음악원 2년만에 마친 생상스는 자신의 천재성을 살려 (피아노 보다 오르간 연주를 잘함) 생마리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곧바로 취직했다.
말년에 구도자의 길을 간 프란츠 리스트가 직접 이 교회에 찾아가 생상스가 연주하는 오르간 연주(악보 없이 즉흥으로 연주함)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오르가니스트라며 극찬 하며 자신의 사위 '바그너'에게 생상스를 소개 시켜준다.
다른 음악가들과 달리 생상스는 교습이나 연주 활동을 하는데 집중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형편이 좋았다. 신동의 영롱한 재능의 빛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그러지지 않았다.
20대 후반부터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을'사라사테' (서주와 곤도 카프리치오 op.28은 당시 엄청 유명했던 바이올린니스트) 에게 헌정했는데 사라사테가 기분 좋게 자신에게 헌정 한 곡을 연주회 프로그램에 넣었다.
이후 생상스의 이름은 더더욱 유명해져서 여기 저기서 협주곡 의뢰가 쇄도 했다.
생상스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협주곡 그중에서도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사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드디어 33살때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작곡 한 곡에 1번 2번 번호를 붙여가며 주르륵 곡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사회적으로 혁명, 전란의 혼돈의 시기에도 생상스는 음악 협회를 세우며 오로지 프랑스 국민을 위한 음악만 작곡하고 연주하는 공간을 만드는데 앞장선다.(하지만 너무 독선적이고 보수적인 사고와 성격 고집불통으로 소통 하지 않고 혼자서 밀어 붙여 버려서 후배들 한데 쫒겨남)
주변의 혹평을 들어도 왕따를 당하고 쫒겨 나도 생상스는 자신만의 길을 우직하게 걷는다.
교향곡, 협주곡, 오페라, 실내악 , 합창곡, 피아노와 오르간을 위한 곡을 쓰면서 주일 마다 대성당 오르간 연주 자리에 지각이나 결근 한번 한 적 없이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주중에는 순회 공연 지휘자로 출장 연주회를 다녔다.
음악가로 바쁜 생활을 하는 중에도 생상스는 다른 분야를 두루 섭렵해나갔다.
지질학, 고고학, 식물학, 천문학 그리고 수학, 그중에서도 수학 공부 할때 가장 행복한 시간이였다고 ,,,,
틈틈히 그리스 신화를 읽으며 시와 희곡을 썼고 문학, 연극, 철학, 음향악, 고대 악기는 전공자들도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유럽 전지역의 언어를 구사 할 줄 알아서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 당시 전장에 우두머리들이 모셔 갈 정도로 (당시 지역 사투리가 심했음) 국보급 인물이였다.

1905년에 러시아 안무가인 미하일 포킨(Michel Fokine)이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를 위해 만든 독무(獨舞) 작품에서 생상스에 '백조'를 음악으로 사용하면서 발레곡으로 재탄생 하게 된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에서 초연되면서 안나 파블로바는 발레계의 스타, 세계 전역에서 첫번째로 초청하고 싶은 대 스타가 된다.
생상스는 본인이 작곡한 동물의 사육제(Carnival of the Animals)를 죽기 전까지 대중에게 발표하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제13악장 '백조'만은 출판을 허용하고 대중에게 공개했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안나 파블로바는 세탁 노동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극도로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머니는 딸 안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파블로바는 여덟 살 때 어머니와 함께 마린스키 극장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처음 보고 난 후 발레의 매력에 빠져서 발레리나가 되기로 결심한다.

황실 발레 학교는 8살의 나이는 발레를 배우기 너무 어린 나이이고 비쩍 말랐다는 이유로 입학을 시켜주지 않는다.

하지만 파블로바의 특별한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프랑스 출신의 발레계 거장(巨匠)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에게 선발되어 파블로바는 10살 때부터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다.
마르고 가녀린 몸 때문에 '빗자루'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무대에서 군무로 밀렸고 동료들에게 무시와 왕따를 당했지만 '지젤',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파블로바의 눈부신 재능이 활짝 피게 된다.
20세기 초 비행기 같은 운송 수단이 없던 시절 몇 달씩 배를 타고 가는 고단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무대를 투어 하며 발레의 대중화를 이끌어내며 전 유럽과 북미 발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안나 파블로바가 나타나기 전 발레극은 왕족, 귀족 그리고 부르조아(자본가) 계층이 즐겼던 예술이였다.
'백조' 작품을 계기로 고전 발레의 명작들이 줄줄이 유럽, 미국, 인도, 중국, 일본까지 투어를 다녔는데 그 시절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 이던 때로 유럽 전역을 투어하며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공포와 절망감을 발레로 달래주려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수많은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파블로바의 공연을 직접 보고 난 후 무용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들이 많았다.
파블로나는 죽기 전 까지 생상스의 '빈사의 백조'('dying swan) 를 4천회 이상이나 공연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전쟁 고아들을 위한 공연을 위해 열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파블로바가 탄 열차에 문제가 생기자 다음 열차를 기다리기 위해 잠시 밖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대기하는 동안 독감에 걸리게 된다.
이후 무리한 일정으로 공연을 강행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해 독감이 폐렴과 늑막염까지 번져버린다.
의사가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는다고 경고 했지만 파블로바는 "발레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수술을 거부하고 바로 다음 일정을 강행했다. 결국 1931년 1월 23일 헤이그의 한 호텔방에서 공연때 입을 순백색의 백조옷을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떠난다
'빈사의 백조('dying swan) ' 공연이 예정되어 있던 헤이그의 극장은 백조로 영원히 팬들 앞에 돌아오지 못한 파블로바를 위해 그녀가 춤추었을 무대 위 텅 빈 무대에 조명 빛을 비추고 생상스의 '백조' 음악만 연주 한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관객들 모두 눈물의 기립 박수를 친다.
파블로바는 '백조의 화신'이었다.
그녀는 고전 발레의 아름다움을 전세계 모든 이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다.
특히 발레 공연을 못 볼 정도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료 공연도 했고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과 직접 교감 하기 위해 평생 동안 헌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