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 전21권 세트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표면상으로는 소설을 썼다. 이 책은 소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하고많은 분노에 몸을 태우다가 스러지는 순간순간의 잔해다. 잿더미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가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 없다.
                                                                                                                                     -<토지> 서문 중 
 

 

나는 표면상으로는 소설을 읽었다. 시대의 질곡 속에서 들려오는 민초들의 포효는 말줄임표였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따름이라는 작자의 얘기는 사무치는 겸손이었다. 이것은 단지, 저 피안을 응시하며 자맥질하는 허무한 몸짓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도저히 얘기할 수 없다. 나는 전율없이 <토지>를 회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숙연한 슬픔, 소소한 가을바람과도 같이 영성을 흔들며 알지 못할 깊고도 깊은 아픔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슬픔인 것 같았다.
                                                                                                                                            -토지 19권 p.331

 

박경리가 엮은 언어의 틈새에는 나를 향해 달겨드는 별빛들이 있었다. 그러니 그는 언어의 마성을 초월했다. 유일하게 진실에 가 닿을 수 있는 가능성에의 천착은 무용한 것이 아니었다. 2011년 8월 7일, 1994년 8월 15일 작가가 마침내 끝을 맺은, 1945년 8월 15일의 얘기를 읽어냈다. 문득 깨어보니 독도분쟁은 한창이었고 동경에서는 한류 반대 시위가 일고 한국의 여성 격투기 선수는 일본의 남성 개그맨 세 명에게 무참하게 구타당했다. 역사적 기억들은 하나의 화인 같다. 후손들은 그 화인 주위를 또 맴돈다.

<토지>는 몇 차례 드라마화되었다. 주로 아버지의 재종형인 친일파 조군구에게 가산을 수탈당한 최참판댁 여주인 최서희의 집념어린 복수와 하인 길상과의 애정사에 초점을 맞춘 경향이 있었다. 지금도 당시 서희역의 안연홍이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테야!"라며 훗날의 복수를 기약하던 당돌한 모습의 잔향이 크다. 더불어 평사리의 상민 이용과 무당의 딸 월선의 안타까운 사랑과 이별의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월선역의 청순하고 아름다웠던 선우은숙의 촉촉했던 눈시울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토지>에 있어 이 대목들은 일부를 차지할 따름이다. 600여 명이 넘는 인간 군상이 구한말부터 해방기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밀착하여 엮어내는 삶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토지>가 출발점은 소설이었을지라도 결국 우리 모두의 피를 따라 흐르는 눈물어린 조상들의 삶의 집단 기억을 선택받은 저자가 대필한 것이 아닐까. 숙명의 과업을 걸머지고 고행길을 걷다 저 하늘로 떠나버린 작가. 나는 주술에 걸린 죄인인가? 를 자문하며 쓰지 않을 수 없던 그에게 <토지>를 읽는 일은 하나의 채무를 지는 것과 같다.  

 

*생에 대한 연민, 그러나 삶에 대한 찬사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토지>는 시작하고 끝난다. '한'에 대한 얘기는 전체를 관통한다. 서희와 혼인한 하인 출신의 길상이 어린 시절 양육되었던 절에 장엄한 '관음탱화'를 향한 얘기들은 결국 작가가 삶의 본질에 대해 하고 싶어하던 얘기다. 슬픔과 외로움. 우리 모두는 슬프고 외롭다. 가지지 못할 것들을 끊임없이 소망하고 희망의 여백을 언제나 포기하기 않기에 한없이 슬프다. 생의 에너지는 필연적으로 결핍과 만난다. 그러니 저마다 딛고 선 발뒤꿈치에 뭉친 울음 한 덩어리씩은 숨기고 있다. 

결국 논둑길에 퍼질러 앉아서 두 늙은 여자는 익어가는 벼를 등지고 함께 울기 시작했다.
-<토지 17권 p.333>

  

존재의 근원, 생명과 닿아 있는 한은 신비롭게도 허무로 흐르지 않는다. 삶의 존귀함과 진실에의 천착은 오도마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삶 자체가 존재하며 그것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아름다웠다. 그런 하나하나가 무리지어 흐르고 있다는 것은 더욱 엄숙하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개미들의 행군처럼 물고기들의 군무처럼. 그러나 언제인가는 사라질 것들,
-<토지 20권 p.268> 

  

*개인에 밀착하는 민족의식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은 개개인의 삶으로 스며들어 온다. 전도부인 여옥이 부유한 역관 집안의 딸로 권문세가로 시집 간 명희에게 이젠 깨끗한 것보다 진실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는 장면은 작가의 독자들을 향한 준엄한 질타 같다. 민족주의는 자아에 대한 방어요, 민족적 존엄은 결국 내 자신의 존엄이기 때문이라는 서의돈의 얘기는 구한말 의병투쟁에서 동학전쟁, 항일투쟁에 이어지는 민족적 움직임이 가지는 본질적 의의를 얘기한다. <토지>에 나오는 사내들은 개인의 영락, 소망, 삶에 대한 기대 들을 가슴 한 켠에 묻고 민족적 자존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산화한다. 그 산화는 그러나 다시 개인의 소망과 내 자신의 존엄으로 귀환한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고리타분한 민족적 자긍심 고취나 맹목적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내 자신을 존귀하게 대우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딛고 서야 할 대지의 좌표를 올바로 정립하는 일. 그것은 결국 또 내가 삶을 제대로 사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하다. 

 

*물고기들의 군무(펄떡이는 은어처럼...) 

<토지>에는 '나약하며 사악하고 선량하면서도 노회하고,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열정과 냉담, 온갖 특성의 인간'<토지 19권 p.88 >들의 군무가 펼쳐진다.  

가장 악랄한, 잔인무도한 악인이 선량하고 정직한 아우를 껴안고서 눈물을 흘린다. 
-<토지 9권 p.429>

살인자의 자식이 되어 버린 형과 아우는 극명하게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형은 일제의 주구로, 아우는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만주로 나르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나 형제는 공통의 비애와 슬픔 안에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며 재회한다. 우리의 가슴 속에 한 명쯤 있는 형과 아우의 마음. 결국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모습. 모든 모순과 대립은 생명이기에 삶이기에 가능하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기적이며 경위 바른 김이평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는 본래 최참판가의 노비출신으로 면천한 작인이다. 마을 장정들이 친일파 조준구가 들어앉은 최참판댁을 습격할 때 슬며시 몸을 감추었다 다시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비겁한 것이기도 하지만 리얼리티가 살아 있다. 악하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사회악의 축출에 가담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안위를 도모하며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 작은 죄책감 하나를 키우는 그의 모습은 도처에 있다.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에 가담하며 축재하는 아들 두만에게 내지르는 일성은 생존과 보신에 엉켜 붙은 자신에게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통곡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 자체로 찬란하고 신비로운 것이기에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기도 하다.   

 

*희망고문

"어머니! 이, 이 일본이 항복을 했다 합니다!"
"뭐라 했느냐?" 
"일본이, 일본이 말예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다음 순간 모녀는 부둥켜안았다. 
-<토지 21권 p.395> 

서희를 휘감은 쇠사슬은 모조리 풀어져 땅에 떨어졌을까. 그로부터 오년 뒤 벌어진 민족상잔의 비극은 최씨가에게 어떤 비애의 자락을 드리웠을까. 아니, 어미는 하인과 통정하여 집을 나가버리고 아비마저 교살당한 휑한 집안을 집안 사람에게 빼앗겼다 이역만리 만주에까지 가서 결국 되찾게 되는 이 집념의 여인을 휘감았던 쇠사슬은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풀어질 수나 있을까. 그것은 차안에서 끊임없이 피안을 기웃거리는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휘감을 수밖에 없는 숙명의 구속이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토지 5권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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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8-0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토지를 완독했군요, 짝짝짝~~~~~~~~~
서재에 새글도 안 올리고 전념한 토지 읽기, 얼마나 걸린 거에요?^^
토지를 읽으며 휘몰아치던 감정의 파도를 넘는 일도 쉽지 않았는데...
리뷰도 감동입니다!!

blanca 2011-08-11 13:01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안그래도 순오기님이 토지 문학관 가신 것 관련 페이퍼를 읽은 기억이 나서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토지 문학관기행도 꼭 가보고 싶어집니다. 한 달 남짓 걸렸고요. 잡념 없애는 데 최고던걸요^^

2011-08-09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1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1-08-10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전율없이 <토지>를 회상할 수 없게 되었다...란 글을 읽으니 제가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에 토지를 읽으며 느꼈던 느낌이 새록새록 하네요~~.^^
토지가 다시 읽고 싶어지긴 하는데 책이 다 미국집에 있어요.ㅠㅠ
도서관에라도 가서 빌려보고 싶어지네요.^^

blanca 2011-08-11 13:04   좋아요 0 | URL
아, 나비님도 이 감동을^^ 대하소설들이 보관하는 데에 있어 곤란한 경우가 많지요. 저도 지금 책이 사방에 난리라 어디 분산 배치하든지 해야 할 것도 같아요. 사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려 계획했었는데 읽다가 순서에 맞게 빌려 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도서관 교통이 불편해서 구입해서 읽게 되었어요. 제 딸도 언젠가 읽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마녀고양이 2011-08-10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희는 정말 대단하죠, 서희라는 인물 때문에 토지를 다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블랑카님의 리뷰를 읽다가 문득, '자유와 정의의 공통점은?' 이라는 질문에 머뭇한 기억이 나요.
지금도 머뭇하게 되는게.... 말로는 외치지만 몸으로는 보여주지 못 하는 것과 같은 정답과 어긋난 답만 생각나거든요.
그게 현재의 제 심리겠죠. ^^. 드디어 페이퍼 올리는데 성공하셨군요, 축하해요!

blanca 2011-08-11 13:06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은 지금쯤 여행 준비 하고 계실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냥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아도 여기 알라딘에 와서 칭찬 받으니 괜시리 든든해지네요. 자유와 정의. 만나면 참 좋을 텐데요. 죽을 때까지 고민하며 살게 될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1-08-10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해요! 멋져요. 페이퍼는 더 좋아요. 그래서 그동안 안보이셨구나? 오오, 블랑카님의 인내와 집중력 그리고 몰두를 본받아야겠어요. 전율.. 이라니. 저는 학창시절에 서점에서 엄마가 사줬는데 1권 읽고 더이상 읽지 않았어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요. 그 사이 새 판본이 나오고 권수가 늘었죠. 세월이 많이 흘렀어요. 박경리 선생님께 더이상 죄송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도 블랑카님처럼 도전하고 싶어요. 참참, 이런 건 7회 연재 이런 걸로 페이퍼 써야 해요!^^

blanca 2011-08-11 13:08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 고맙습니다. 그리고 꼭 도전해 보세요. 어느 순간 정말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생동감이 작렬하는 소설이랍니다. 우아, 학창시절에 어머니가 사주셨어요? 완전 근사한 어머니를 두셨군요!

stella.K 2011-08-1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했군요. 저는 2권인가, 3권 읽고 땡쳤는데...ㅠ
오랜만이예요. 토지 읽느라 안 보이셨나?^^

blanca 2011-08-11 13:08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ㅋㅋㅋ 토지도 읽고 아이가 방학이라 종일 인형놀이 상대역 해주고 색칠 같이 해야 하고, 짬도 안 나더라고요^^;;

블루데이지 2011-08-1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솔출판사판으로 10년동안 읽었어요~~
고등학교때 시작해서...20대 후반에 다 읽었으니...깨으름은지..느긋함인지......
축하드려요~~blanca님...저도 이번기회에 10년만에 나남출판사판으로 재도전하고 싶어요~~

blanca 2011-08-11 13:09   좋아요 0 | URL
아, 블루데이지님, 저 그렇게 읽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블루데이지님의 청춘과 <토지>가 함께 곰삭는 느낌, 좋을 것 같은데요. 책이 판형이 작고 편집도 좋아서 읽기 좋더라고요.

cyrus 2011-08-1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그 많다던 토지를 읽으셨다니..
저는 두권 이상은 끝까지 못 읽는 편이라
읽을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

더위, 비 피해 조심하시고요, 행복한 8월의 여름
보내세요 ^^

blanca 2011-08-11 13:12   좋아요 0 | URL
cyrus님이라면 금방 읽으실 것 같은데요. 아, 푸른 하늘을 보고픈데 항상 하늘은 흐려 있네요. 저는 cyrus님 보면 '나는 그때 너무 철이 없었구나.cyrus님은 어떻게 다 알지?' 싶어요. 그냥 눈앞만 보며 달렸던 것 같아서 참 아쉬워요. 참 부럽답니다. 남은 방학 보람차고 즐겁게 보내세요^^

비로그인 2011-08-1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뜸하시다 했더니 거사를 치르셨군요. 책걸이를 거하게 하셔야겠네요^^

blanca 2011-08-11 13:13   좋아요 0 | URL
후와님, 아, 책걸이요! 그러게요. 고민 좀 해봐야겠네요^^

oren 2011-08-1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이네요.

제 아내도 두어달 전쯤 '한달여 동안' 토지만 붙잡고 지내더군요. 아내가 20여권을 다 읽을 동안에 틈날 때마다 '토지를 읽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제게 얘기하는 걸 들어 주느라 애먹었는데, 소설에 자주 나오는 '이해하지 못할 경상도 사투리'에 대해 제게 자주 물어보던데(제 고향이 경상도), 저는 '나중에 읽어볼 요량으로' 아껴두고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지리산과 섬진강과 악양 평사리의 너른 들판이 문득 가보고 싶어집니다.
(아참... 마침 다음주에 2박3일로 지리산 종주 산행을 떠날 계획이 잡혀 있네요...)

blanca 2011-08-11 22:58   좋아요 0 | URL
아, oren님 아내분도요! 그러셨군요. 저도 고향이 경상도라면 경상도인에 그래서 좀 사투리가 좀 수월하게 읽힌 감도 있는 것 같네요^^ 다음 주에 지리산 가세요? 저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인데 여즉까지 못가보고 있네요. 즐겁게 다녀오시고 후기도 기다려 봅니다.

꿈꾸는섬 2011-08-17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달동안 토지 완독하셨군요.^^
너무 멋져요.
저도 다시 읽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하고 실천은 못하고 있거든요.
블랑카님 너무 멋져요.^^

blanca 2011-08-18 11:12   좋아요 0 | URL
꿈섬님은 벌써 읽으셨잖아요! 그 대하소설의 매력이 참. 어떤 분이 <토지> 읽으면서 살림 작파했다는 얘기 읽고 막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섣불리 시작하긴 그렇지만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대리 경험하는 느낌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임꺽정>이 또 읽고 싶어 몇 번 만지작 거리기는 했는데 올해는 좀 참아 보려고요^^

달사르 2011-09-26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대단하십니다. <태백산맥> 필사 언급에도 와~대단하시다~했더니, 저 길고 머나먼 <토지>를 다 읽으셨단 말입니다까. 와..존경의 박수를 보내드려요. 꺅! 저는 조금더 나이 들어서 읽어볼까, 생각만 하고 있던 중이라, 더 반가워요~

blanca 2011-09-27 10:57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 저도 <토지>는 분량의 압박 때문에 미루다가 좀 몰입할 게 필요해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한번 읽기 시작하니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어찌나 생동감이 느껴지던지 제가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다름 사람들의 어떤 삶들을 지척해서 지켜 보는 것 같았어요.

달사르 2011-09-27 23:19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박경리님은 개인적으로 알게 되면 아주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는 분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 사람이 저렇게 많은 군상들이 등장하고 대를 이어 삶을 이어가는 대하드라마를? 하면서 의아해하기도 한다구요. 저는 박경리님이 소설에 모든 애정을 쏟아서 그래서 되려 일상에서 차갑게 느껴지는 점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저에게 말을 건네주신 분 또한 그리 말씀해주셨구요. 그 말을 전해듣고, 아...나는 담에 <토지>를 읽겠구나..생각했는데요. 그게 한 달도 전의 일이어서 블랑카님의 이 포스팅이 더 반가웠어요. ^^ 블랑카님 말씀처럼 한번 읽기 시작하면 길게 느껴지지 않을 듯 싶어요. 내년이나 즈음에 날 잡아서 시작하고 싶어지네요.
 

"나 원망하지 마라." 

부처의 포스를 풍기는 나의 아그립파 뎃생을 물끄러미 지켜 보신 턱수염 만발 미술 선생님은 한숨을 쉬었다. 친구들은 내 그림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실 출발이 그랬던 것은 아닌데 요리조리 개념없는 명암 효과 덧칠을 시도하다 보니 점점 로마의 장군은 동양의 석가모니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 학기 나의 미술 성적은 '미'였다. 타당한 일이었다. 

그런 내가 뽑은 역할은 '페이스 페인팅'이었다. 제발 이것만은 피했으면 했던, 역할이었다. 아이의 유치원 시장 놀이 엄마 참여 수업. 가슴이 옥죄어 왔다.(정말이다) 펼쳐진 도화지에도 제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내가 세워진 사람의 살갗에 그것도 실패가 엄청난 파국과도 직결될 수 있는 페이스 페인팅이라니. 아이들은 엄하게 된 자신의 얼굴을 부여잡고 울먹이며 나를 원망할 지도 모른다. 

누워 자는 식구들에다 수채 물감으로 낙서를 시작했다. 난망시됐다. ' 그 날'이 다가올수록 가슴 한 켠의 돌덩이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 날'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르며 유치원으로 향했다. 페이스 페인팅용 물감, 하이라이트를 줄 반짝이, 물통. 나를 포함한 엄마 넷은 다들 긴장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정직하다. 투명하다. 봐 주지 않는다. 이윽고 개시. 바로 일곱 살 아이들 부터다. 일곱 살은 다섯 살 엄마 앞에서 모든 것을 다 아는 눈빛으로 앉는다. 나의 손은 덜덜 떨린다.(다른 엄마들도 그랬단다) 하필난이도도 높은 잠자리를 그려달란다. 무지 뚱뚱하고 좌우 비례가 안 맞는 잠자리가 완성된다. 하지만 해냈다! 사내아이는 벌떡 일어서서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고는 기분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장난감 지폐를 내어 놓고 일어선다. 그림은 점점 발전해 간다. 되도록 손에 그리기를 유도한다.(얼굴보다 쉽다) 다섯 살 꼬마들은 좋아서 계속 그려달란다. 도안을 무시하고 곰돌이와 토끼를 주문할 때는 난감하다. 그래도 자꾸 그리니까 진짜 곰돌이와 토끼가 되어 간다. 콧물을 줄줄 흘리며 나의 옆에 계속 서 있는 여자 아이. 학기 초에 유치원 문을 들어서며 울먹이던 모습이 기억나 가슴이 저릿하다. 아이의 콧물을 닦아 주며 또 그려 줄까?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를 보면 모른 척 해달라고 주문했던 나의 아이가 와서 분홍색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혜로 두 개 그려준다. ㅋㅋㅋ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로 누군가를 즐겁게 해 준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다음에는 페이스 페인팅을 자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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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7-0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로 누군가를 즐겁게 해 준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 이건 너무나 아름다운 수필이에요, 블랑카님. 제 입이 아주 컸으면 좋겠어요. 그럼 고개를 끄덕이고 그 큰 입으로 블랑카님께 웃어드리고 싶어요.

blanca 2011-07-01 21:5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 이제 안젤리나 졸리랑 다락방님이 구분이 안 가요. 그래서 지금 안젤리나 졸리의 살인미소를 그려봅니다. 그 시원한 입매로 짓는 미소를요. 살아 보니깐요. 항상 삶은 제가 생각했던 경로를 아주 교묘하게 이탈하며 지나가더라구요.

감은빛 2011-07-01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심정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페이스 페인팅이라니! 너무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
훌륭히 해내신 블랑카님. 정말 대단하세요!

다락방님 말씀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수필입니다!

blanca 2011-07-01 21:52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훌륭하게 해 내지는 못했답니다. ㅋㅋㅋ 아이들이니 용서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하지만 다음 번에는 좀 더 잘 할 수 있을 것만은 분명해요. 그 느낌이 참 좋았어요. 그것도 아이들과 함께 누리는 그 기분이요.

잘잘라 2011-07-01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보~!!!
blanca님께 기꺼이 저의 크고 통통한 두 볼을 내어드리겠어요.
저는..해바라기꽃과 나비를 부탁드려요^^

blanca 2011-07-01 21:53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이 통통한 두 볼을 내어 주신다고 하니 갑자기 또 의욕이 불끈 솟네요 ㅋㅋㅋ 볼에 그림을 그리다 보니 통통한 볼이 참 아름답다, 촉감도 너무 좋다, 고 생각했어요. 참 이쁜 부위예요. 해바라기 꽃과 나비라면 자신 있습니다.^^

pjy 2011-07-0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활한 저의 볼에도! 전 잠자리를 쌍으로 부탁드립니다^^

blanca 2011-07-01 21:5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짝짝이 잠자리 두 마리 그려 드릴게요. 볼은 넓을수록 좋습니다.^^

프레이야 2011-07-0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분홍공주 깜찍해요.
아이들이 모두모두 즐거워 했겠어요.
블랑카님, 제 왼쪽 뺨에도 페인팅 해줘요.^^

blanca 2011-07-01 21:5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생각보다 참 재미나더라구요. 그러니 제대로 잘 그리시는 분들은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이것저것 다 잘 그릴 수 있으면 더 기쁘게 해줬을 터인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기회가 오면 집에서 연습좀 해서 ㅋㅋㅋ 그려 드리겠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07-01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스 페인팅을 할 줄 알아서 엄마가 될 수 있나요?라고 블랑카님에게 묻고 싶었다.

ㅋㅋㅋ

blanca 2011-07-01 21:5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제가 예체능에 경기하는 사람이거든요. 특히 미술과 체육. 대학에 들어가서 다 끝났다, 안도했더니 이건 이런 식으로 계속 제 발목을 잡네요. 다음에는 또 체육까지 해야 할까봐 걱정이랍니다. 저 달리기 20초잖아요--;;

아이리시스 2011-07-01 22:29   좋아요 0 | URL
할 줄 알아야,를 할 줄 알아서,라고 써서 의미가 좀 이상해지진 않았나요?
그리고 웃다가 빼먹고 갔나봐요. 블랑카님은 멋진 엄마예요. 저라면 그냥 안갔을 것 같거든요. 저도요. 미술과 체육. 경기해요.ㅠㅠ 저 달리기 25초일지도--;

순오기 2011-07-01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엄마가 아니었으면 손을 떨면서 감당하지 못했겠지요?
역시 엄마는 위대해요!^^
연습하면 된다는 걸 확인한 블랑카님께 박수~~~~~짝짝짝!!
분홍공주가 아는 척은 안했나 봐요~~~ 역시 분홍색을 써야 된다고 주문한 분홍공주 멋져요!ㅋㅋ

blanca 2011-07-01 21:5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칭찬해 주시니 완전 기분 막 업됩니다. ^^ 의외로 아는 척 안 하는 모습이 넘 웃기더라구요 ㅋㅋ 그러더니 슬며시 와서 자기는 분홍색으로 해야 된다고 어찌나 간섭을 해대던지. 역시나, 했어요^^

마녀고양이 2011-07-01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스 페인팅 하셨어요?
저는 잘 못 해서, 자원도 못 할건데.... 멋지게 해내셨네요?
분홍공주님은 아직도 분홍을 좋아하는군요? 아이, 예뻐라~

blanca 2011-07-03 11:07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하시면 잘 하셨겠다, 생각했는걸요. 저는 뽑기를 잘못 뽑았어요. 제비뽑기는 항상 운이 안 따르더라구요. 그럭저럭 해 냈는데 제가 그림을 잘 그리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싶어 참 아쉽더라구요.

2011-07-02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3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1-07-02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저두요. 님께는 제 볼을 내어드릴께요.
아이들 어릴적에 페이스페인팅 하려고 줄 서 있다가 문득 내 팔에도 그려달라고 할까? 했지만 이내 포기했던 기억이 있어요. ㅎㅎ
페이스 페인팅 하는 엄마, 따님이 참 자랑스러워 했겠어요

blanca 2011-07-03 11:10   좋아요 0 | URL
세실님이 볼을 내어 주신다면 영광이죠^^ 아, 손목이나 팔에 그려도 참 이쁘겠어요. 헤나 같은 것도 요즘에는 매력적으로 보이더라구요. 그림을 잘 그려야 자랑스러워할 텐데 요새 딸아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제 모습이 참 답답하답니다.

비로그인 2011-07-0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blanca님. 그림도 함 공개해주세욥.

다들 그걸 원하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멋지게 잘 해내신거 들으니 기분이 막 좋아지려고 하네요!
울 분홍공주님 꽤나 오랬동안 뿌듯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D

blanca 2011-07-07 13:51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안 그래도 사진이 있어 올릴까 했는데--;; 수준이 너무 낮아서 그냥 저 혼자 보고 마는 게 낫겠다 싶어 안 올렸답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후애(厚愛) 2011-07-08 0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더위조심하시고 즐거운 하루 되세요^^

blanca 2011-07-08 22:08   좋아요 0 | URL
아, 후애님 여기는 계속 비가 그어서 그래도 시원한 편이에요. 장마가 끝나고 나서 올 더위가 너무 두렵네요. 후애님도요^^

2011-07-17 0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7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7-23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희경 작가님과의 심야데이트 당첨됐더군요~~ 축하해요!!
은희경 작가님 새의 선물, 비밀과 거짓말은 정말 좋았어요~~ 최근작은 읽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데이트 후기 기대해도 되겠죠?^^

blanca 2011-07-23 21:2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정말 잘 얘기해 주셨어요. 저 깜빡 잊고 있었고 메일도 삭제되어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확인했네요. 마음이 급해집니다. 시간이나 장소도 전혀 모르겠고. 확인해 봐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순오기 2011-07-26 15:38   좋아요 0 | URL
은작가님과의 데이트 확인하셨나요?
독서회 사진 추가했으니 봐주세요.^^

blanca 2011-07-27 21:14   좋아요 0 | URL
아, 아쉽지만 제가 시간이 안 되어서 못 간다고 말씀드렸어요. 다른 분에게 기회가 가겠지요. 머피의 법칙인가 봐요. 시간이 될 때는 당첨이 안 되고 시간이 안 될 때 당첨되고--;; 예, 사진 확인하러 갈게요.

2011-07-24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4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7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7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눈팔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조영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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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다. 너무 소설 같은 소설. 다채로운 서사. 극적인 전개. 평면적인 인물. 그런 소설 대신. 

정말 소설 같지 않은. 단조로운. 별로 대단할 것도 하찮을 것도 없는 고만 고만한 사람들. 그래서 주위를 한번만 쭈욱 둘러봐도 닮은 꼴을 굴비꿰듯 줄줄이 엮어낼 수 있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는다. 

   
 

 그의 마음속에는 죽지 않은 아내와 건강한 갓난아기 외에 일을 그만둘 듯하면서 못 그만두는 형이 있었다. 천식으로 죽을 듯하면서 아직 살아 있는 누이도 있었다. 새로운 지위를 얻을 듯하면서도 얻지 못하는 장인도 있었다.

 
   

 

이런 '그'에 대한 이야기이다. 겐조의 이야기는 나쓰메 소세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마치 나쓰메 소세키의 3인칭 일기를 읽는 느낌이다. 본가에서 버림받다시피 하고 입양되었다 다시 양부모의 이혼으로 파양되다시피 한 남자의 얘기. 그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양부모.  

   
 

 겐조는 바다에서도 산에서도 살 수 없는 처지였다. 양쪽에서 내쳐진 채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했다. 바다의 것도 먹고 때로는 산에 있는 것에도 손을 댔다.

 
   

 

나쓰메 소세키는 언제나 담담하고 건조하다. 그런데 그 행간에 눈물이 스며 있다. 그 눈물은 공통의 경험을 공유하지 않아도 그 경험이 남기는 저릿한 슬픔을 공감한다. 다른 일들로 함께 울 수 있다. 바다의 것도 산의 것에도 손을 대는 겐조의 모습이 눈물겹다. 그리고 그 겐조를 둘러싼 한결 같이 무능하고 때로 몰염치한 주변인들. 어느 구석 하나 시원할 것도 상쾌할 것도 없는 지지부난한 일상들. 사실 그런 것이 삶의 대부분임을 소세키는 예리하게 꿰뚫고 있다. 삶, 사람 들이 언제나 유의미하고 위대해질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알고 있지만 못 본 척한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무능력하고 비열한 모습들이 흩뿌려진 소세키의 인간 들은 그래서 어쩐지 익숙하고 외면하지 못하게 만든다. 대단한 이야기나 경구가 없어도 그의 이야기가 언제나 흡인력을 가지는 요인이기도 하다. 

   
 

 '너는 결국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겐조는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대답을 회피하려고 했다. 그러자 목소리는 더욱 겐조를 추궁했다. 몇 번이고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겐조는 끝내 울부짖었다.
 "모르겠어."
목소리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모르는 게 아니지. 알아도 그곳에 도달할 수 없는 거겠지. 도중에 멈춰 있는 거겠지.'

 
   

 

결국 들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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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1-06-27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철학자의 글을 정리하다가 '이처럼 절실하게 벗어나고자 하는'이라는 대목에서 blanca님의 이 글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다소 엉뚱한 느낌은 들겠지만 뭔가 상통하는 것도 있겠다 싶어 댓글로 남겨 봅니다. ㅎㅎ
* * *
한가한 망상(妄想) 속에서나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찬란하고 가장 의기양양한 상황에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기대하는 쾌락들은, 사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처해 있는 초라한 지위에서 우리가 언제든지 손안에 넣을 수 있고 언제든지 우리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그러한 쾌락들과 거의 언제나 같은 것이다. 허영(虛榮)과 우월(優越)이라는 경박한 쾌락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지위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우리는 개인의 자유만이 존재하는 가장 초라한 지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마음의 평정(平靜), 즉 모든 실재적이고 만족감을 주는 향유(享有)의 천성이자 기초가 되고 있는 마음의 평정과, 허영 및 우월이란 쾌락은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가 지향하는 휘황찬란한 위치에서는 우리가 이처럼 절실하게 벗어나고자 하는 초라한 지위에서 용이하게 즐길 수 있는 실재적이고 만족감을 주는 쾌락들을 마찬가지로 쉽게 향유할 수 있을는지도 언제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 아담 스미스,『도덕감정론』中에서

blanca 2011-06-27 23:25   좋아요 0 | URL
언뜻 한번 읽고는 바로 이해되지 않아서 세 번 정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겐조 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정말 필요한 얘기네요. 가장 찬란한 상황은 가장 초라한 지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있어야 겠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oren 2011-06-28 00:46   좋아요 0 | URL
blanca님의 댓글을 보니, 어느 철학자가 매우 긴 호흠으로 자신의 철학을 장황하게 펼쳐 놓은 책 가운데 어느 한 구절을 '덜컹' 끌어 와서 무턱대고 댓글로 남겨 놓은 것 같아 죄송스런 생각도 듭니다.

blanca님께서 인용해 주신 [겐조의 메아리처럼 울리는 듯한 질문과 울부짖는 대답]이 자꾸만 머리를 멤도는 것 같아 목소리가 여전히 똑같은 철학자의 뒤이은 언급 한 대목을 덧붙여 봅니다.
* * *
저 평범한 안전과 만족보다 더 낫지 않다는 것

불굴의 근면함으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경쟁자보다 우월한 재능을 획득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한다. 이어서 그는 그러한 재능들을 공중(公衆)의 눈에 띄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며, 똑같이 열심히 여러 취직의 기회를 사람들에게 간청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는 모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춘다. 그는 내심(內心)으로는 증오하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봉사하고, 자신이 경멸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아부한다. 그가 전 생애를 통하여 추구하는 이상은 자신이 결코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어떤 공적이고 우아한 휴식(休息)의 관념인데, 그것을 위해 그는 어느 때에든 자신의 힘으로 쉽게 이룩할 수 있는 진정한 마음의 평정(平靜)을 희생한다. 그리고 만약 아주 늙어서 드디어 그것을 획득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것이 어떤 점에서도 그가 이것 때문에 포기했던 저 평범한 안전과 만족보다 더 낫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의 최후의 순간이 되어 그의 육체가 고통과 질병으로 쇠약해지고, 자신의 적들의 불의(不義), 동지들의 배신(背信)과 망은(忘恩) 때문에 그가 받아 왔다고 상상하는 수많은 침해와 실망의 기억에 의해 그의 마음이 쓰리고 괴로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그러한 부와 권세가 사소한 효용(效用)만을 지닌 허접한 것에 불과하고, 육체의 안락과 정신의 평정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장난감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족집게 상자 정도의 쓸모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부와 권세는, 족집게 상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편리함 이상으로 번거로움을 더 많이 준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 아담 스미스,『도덕감정론』中에서

blanca 2011-06-28 21:24   좋아요 0 | URL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예전에도 한번 인용하신 것 기억나요. 어떻게 이렇게 명철하고 예리하게 삶을 파악하고 묘사할 수 있을까요? 정말 놀랍네요. 기회가 되면 꼭 완독해 보고 싶게 만드는 인용구입니다. 죄송하긴요.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드는 댓글인걸요.

비로그인 2011-06-27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요새는 담담하면서 조금은 밝은 느낌의 글이 좋아집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 걸으면서도 조금은 힘이 나고 그러더군요.

그리고 그 소설 속의 인물과 사건들을 보면서 전철의 그 수많은 사람들, 하루에 포털사이트에 올라오는 수많은 사건들. 나름 담담하면서 조금은 밝게 보려고 노력하기도 하고요.

blanca 2011-06-27 23:26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저도 이제는 지나치게 염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얘기에서 질기고 생명력이 있는 얘기로 옮겨 가려고 합니다. 그런 시점이 온 것 같아요^^

cyrus 2011-06-27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상중 씨의 <고민하는 힘>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좋게 평가하던 내용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한 번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감명깊게 읽어봤는데 국내에 나스메 소세키의
작품이 생각보다 많이 번역되었더라구요. 전에는 민음사 시리즈에 있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문동에도 그의 작품이 번역되었군요. ^^

blanca 2011-06-28 21:20   좋아요 0 | URL
예. 저는 아직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읽어 보지 못했어요. 정말 기묘하고 매혹적인 작가입니다. 캐도 캐도 무언가가 자꾸 더 나오네요. 저도 정말 우연히 발견했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작품이 나쓰메 소세키를 알기 위한 입문서라고 하네요. 자전적인 작품이라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비로그인 2011-06-28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요맘때 소세키 소설에 빠졌던 때가 떠오르네요. 전집이 나온다면 꼭 소장하고 싶은 작가입니다^^

blanca 2011-06-28 21:21   좋아요 0 | URL
후와님도 좋아하시는군요. 아, 전집이 나오는 것도 괜찮겠어요. 우리나라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들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드문 드문 소세키를 읽게 되네요. <그후>도 참 좋았어요.

비로그인 2011-06-28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이 급박하니 글을 읽을 수가 없더이다, 블랑카 님. 그 어느 글도 내 속으로 스며들 수가 없어서.

blanca 2011-06-28 21:22   좋아요 0 | URL
쥬드님, 동감해요. 저는 그때 오히려 독서가 괴롭더라고요. 정말 말 그대로 활자만 겉돌며 읽게 되고요. 결국 허구가 현실을 이길 수는 없는 걸까요?

마녀고양이 2011-06-29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결국 들켜버렸네요... ㅠㅠ

blanca 2011-07-01 12:41   좋아요 0 | URL
저도 제 얘기하는 줄 알았답니다.--;;
 
밤의 도서관 - 책과 영혼이 만나는 마법 같은 공간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따르면,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 연령'인 56세에 이르러서 나는 젊은 시절의 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무서운 게 없던 젊은 시절, 시력을 잃어버린 위대한 작가 보르헤스의 옆에서 책을 읽어 주며 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알베르토 망구엘. 그는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은 말들로 적시에 독자들을 감동으로 무릎 꿇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56세에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서고 같다. 사라진 도서관, 씌여지지 않은 책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남고야 만 책, 도서관들에 대한 얘기는 까만 밤하늘에 명멸하는 별들 같다. 우리는 이미 밤하늘에서 과거의 소멸된 별들을 본다. 그 별들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미래를 꿈꾸는 그런 아이러니는 모순 같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아련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와 같은 얘기이기도 하다.  

   
 

 "암흑시대에 마케도니아에서, 마지막 촛농을 흘러내리는 불빛을 빌려, 한 남자가 어린 아들을 위해 고대의 낡은 책으로부터 짤막한 구절을 옮겨 쓰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셉티미우스였습니다. 그 덕분에 <아킬레우스의 사랑>의 한 문장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사랑은 어린아이 손에 쥐어진 얼음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소포클레스는 말했습니다.
-p.139

 
   

 

소포클레스의 사라진 비극에서 우리는 이 한 문장을 건진다. "사랑은 어린 아이 손에 쥐어진 얼음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킬레우스의 사랑은 이런 것이었을까? 그리고 수천 년을 지나서도 그 사랑의 느낌은 유효한 것일까?  망구엘은 책이 실제 세계를 온전히 반영할 수도 복원할 수도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끊임없이 직조해 내는 그 불가능한 열망들의 흔적 들은 때로 현실과 존재를 뛰어넘는다. 이제 손에 얼음을 쥔 어른은 아킬레우스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을 막연하게 같은 것으로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불가능하고 스러져 버리는 것. 쥐고 있는 동안 고통스러운 것. 하지만 결국 또 쥐게 되는 것.  

   
 

 잘 쓰인 책이라도 이라크나 르완다의 비극을 덜어줄 수 없지만, 엉터리로 쓰인 책이라도 운명적으로 맞는 독자에게는 통찰의 순간을 허락할 수 있다.
-p.241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 책이 꼭 대단히 훌륭해서라기보다는 그 타이밍의 내 상황과 묘하게 겹쳐 굉장한 동질감과 위안을 주는 시간. 불면의 밤, 티테이블에 우연히 펼쳐져 있던 공지영의 초기 에세이에서 공지영은 울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비극을 덜어줄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때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다. 불행한 순간, 행복한 사람이 던지는 기만적 위로가 아닌 비슷한 무게의 슬픔을 듣는 것. 위안. 그게 통찰로까지 확장되지 않더라도 괜찮다.  

책에 대한 예찬, 옹호 대신 자박 자박 이리저리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의 탄생과 성장, 노화, 죽음에 대하여 하는 얘기들을 듣다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정작 저자인 망구엘에게 책과 독서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따라서 나는 어떤 종류의 계시도 구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에게 말해진 것은 내가 듣고 이해하는 것으로 제한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스런 과정을 통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바랄 수 없는 깨달음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 궁극적으로 내가 알게 되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므로 더 이상의 경험도 구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럼 내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면서 나는 무엇을 구해야 할까?  

아마도 위안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위안일 것이다. "
p.337

 
   

 

 그래.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위안받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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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1-06-15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주는 위로와 위안, 저도 알아요.^^
저 근데 요새 노는데 정신팔려 책도 잘 안 읽어요.ㅎㅎ

blanca 2011-06-16 21:17   좋아요 0 | URL
^^ 꿈섬님 뭐하며 재미있게 노시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요새 저희 집이 너무 더워서 되도록이면 나오려고 하고 있어요. 정말 덥네요. 오늘은 읽을 책도 똑 떨어지고. 어떻게든 도서관을 좀 뚫어보려고 하고 있답니다.

감은빛 2011-06-1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위안이었군요.
저는 어떤 이유 때문에 책을 읽는 건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봐야겠어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blanca 2011-06-16 21:17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의외로 아주 겸손하고 기대가 적은 저자의 독서관이 오히려 더 와닿더라구요. 좋은 책 맞는 것 같아요.^^

2011-06-16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6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11-06-16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쓰인 책이라도 이라크나 르완다의 비극을 덜어줄 수 없지만, 엉터리로 쓰인 책이라도 운명적으로 맞는 독자에게는 통찰의 순간을 허락할 수 있다." 아, 이 말은 너무 옳고도 좋으네요, blanca님.

blanca 2011-06-16 21:19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좋은 문장들이 너무나 많아요. 참 좋더라구요. 구구절절 옳고 좋은 말들. 멋진 인용구들. 추천드려요.

2011-06-16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7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1-06-1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어쩔 때 블랑카님 따라쟁이인 것 같아요. 이 책 저도 오늘 받았는데 어제 리뷰를 발견하게 되어서 신기했어요. 얼른 읽고 싶은데 이렇게 좋은 인용구들을 골라내어 페이퍼를 쓸 순 없을 것 같네요. 언제나 도서관과 책에 대한 책은 참 좋아요, 그쵸, 블랑카님.^^

blanca 2011-06-17 14:19   좋아요 0 | URL
^^ 저 따라쟁이 좋아해요. 저도 글쎄 도서관과 책에 관련된 책만 해도 벌써 많이 모였더라구요. 무심결에 계속 모으고 있었나 봐요. 또 나와도 또 사지 않을까 싶어요.
 

집근처에 도서관이 있는 것은 축복이다. 그런데 우리 집 주변에는 없다. 내 책이야 야금야금 아껴 가며 사고 팔고 하지만 아이 책은 매번 사 줄 수 없어 참 고민이었다. 분노의 검색질 덕택에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곳에 보물 같은 곳이 있음을 알아 냈다. 주변의 풍광이 도서관 중 최고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었다. 동대문정보화도서관. 몇날 며칠을 그곳을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했다. 우리 집 앞에는 버스 정류장이 없다. 택시도 안 잡힌다. 걸어갈 수도 없는 거리. 그런데 도서관 홈페이지에는 주차장 수용 차량이 열 대이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어젯 밤 약도를 숙지했다. 약도는 골목길이 대부분이었다. 초보운전자인 내가 과연 제대로 갈 수나 있을런지 가더라도 만약 주차장에 자리가 없으면 도서관을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턴해야 하는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여하튼 도서관을 뚫어야 한다는 강박에 출발했다. 

역. 시. 나. 나는 도저히 거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골목길을 놓치고 그 옆의 영휘원 주차장에 들어가는 쾌거를 세웠다. 영휘원. 고종의 고종의 계비인 순헌귀비 엄씨(嚴氏)의 묘소. 주차장에는 떡하니 매서운 눈초리로 아주머니가 버티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나의 굴욕을 알까? 괜히 담담한 척 내려 입장료 천 원을 지불하고 영휘원에 입성했다. 그렇다. 도서관에 가려 했던 나는 고종의 계비의 능에 도착한 것이다. 꼼수는 구경좀 하다 아주머니의 눈길을 피해 옆 골목길로 달음박질 쳐서 도서관으로 가는 것이긴 했지만 잘 조성된 수목들과 탁 트인 녹지가 의외로 내 눈길을 사로잡아 사부작 사부작 몇 걸음 둘러보다 다시 나와 오른쪽 골목길로 빠져 나왔다. 

그 골목은 정말 내 생애 최고의 도전 과제였다. 경사도가 거의 70도에 가까웠고 햇살은 가차없이 내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가도 가도 좌회전할 구멍은 나오지 않았다. 숨이 턱에 닿고 다리가 쑤실 무렵 왼쪽으로 장미가 흐벅지게 핀 골목길이 나타났다. 역시 한참을 가니 초등학교 맞은편에 오붓이 도서관이 숨어 있었다. 

도서관은 자그마하고 아담하고 정겹고 아름다웠다. 숲 속에 안긴 듯한 착각. 사방이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책을 보며 싱그러운 녹음을 눈동자에 마구 문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 지. 만. 나는 이미 너무 지쳐 있었고 이곳을 결코 정기적으로 올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미 관심을 잃고 있었다. 잠시 창가에 비치된 안락의자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았다. 

 

 

지하 주차장을 확인해 보았다. 정말 열 대 수용 가능한 곳이었다. 이 도서관에 올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그 등산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집앞에 대중교통도 없고 그냥 돌아서야 했다. 

내려오는 골목길. 등이 굽은 노인들은 힘겹게 그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독특한 냄새에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반지하방에 고목처럼 늙어버린 할머니가 문을 열어 놓고 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힘들다고 투정하는 그 골목길을 매일 올라야 하는 사람들 앞에 괜시리 숙연해졌다. 골목길 초입에는 덩그러니 세콤을 단 담이 높은 집이 버티고 있었다.  

골목길. 사람들에는 아련한 향수와 정취를 풍기는 그곳이 오르막과 더위와 만나 넘기 힘든 큰 산으로 엉 버티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아기자기한 푸른 도서관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영휘원 주차장에서 다시 눈치를 보며 슬며시 집으로 출발했다. 망구엘 아저씨의 <밤의 도서관>을 펴 들었다.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그의 재주에 탄복하며. 아무래도 이 계절에는 정말 밤의 도서관이 필요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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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1-06-14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가까이 사는 전 축복받은 사람이네요.

blanca 2011-06-14 21:22   좋아요 0 | URL
우아,완전 부러워요. 정말로....

2011-06-14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4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1-06-1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대문구 정보화 도서관!
제가 참 좋아하는 곳입니다.
교통이 좀 불편하긴 하죠.
회기역이나 고대입구역에서 버스가 있긴 하더라구요.
저는 회기역에서 산책겸 걸어서 왔다갔다 한 적은 있습니다.

역시 집이나 일터 근처가 아니니, 자주 안가게 되긴 하더라구요.

blanca 2011-06-14 21:2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도 아시는군요! 정말 너무 좋은데 참 난감하더라구요. 저희 집에서 좀 걸어서 버스를 타고 간다고 해도 그 근처라면 시도해 볼 텐데 거기서 또 등산을 해야하니까요. 그냥 저 혼자 다닌다고 해도 너무 부담스러운 시추에이션이더라구요. 사실 아이와 함께 다닐 도서관을 탐색중이었기에 좌절했답니다.

감은빛 2011-06-16 10:17   좋아요 0 | URL
그 도서관에 일하는 사서님이랑 우연히 블로그에서 친해져서,
몇 번 만나고, 식사도 하고 했었어요.
그 도서관에 오면 특별회원으로 모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거리가 멀어서 늘 안타까워했답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면 자주 찾아갈만한 멋진 도서관이예요.
도서관 서포터즈도 활성화되어있고, 여러가지 다양한 프로그램도 많구요!
장정일 선생님이 진행하는 문고 읽기 강좌도 꽤나 흥미롭더라구요.

무슨 초등학교던가요.
그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그리 가파르지 않은 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암튼 블랑카님께서 쉽게 다닐 수 있는 도서관을 금방 찾게 되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1-06-14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이 대개는 오르막 저 끝에, 걸어서 올라가기엔 너무 힘든 곳에 있는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지요. 주차시설도 턱없이 부족하구요. 여기도 그런 곳이 많답니다.
접근하기 쉽지 않게 만드는 요인 중 지리적 위치도 빼놓을 수 없어요.ㅠ
힘들게 올라가 앉은 창밖 녹색은 참 눈이 부시네요. 고생하셨어요.
이참에 '밤의 도서관' 담아갈래요.^^

blanca 2011-06-14 21:2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정말 그래요. 그래도 전에 살던 집 앞 버스를 타고 가면 바로 근처 도서관 입구에 내려 주었거든요. 아이도 데리고 가고 참 좋았는데 이 예쁜 도서관이 참으로 난감한 위치에 있더라구요. 너무 이쁘고 탐나서 더 좌절감이 크답니다.

블루데이지 2011-06-14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의 역사, 도서관에 담긴 철학~~밤의 도서관이 급 궁금해집니다...
글 잘읽고 갑니다...땡스 투~~~

blanca 2011-06-14 21:26   좋아요 0 | URL
블루데이지님, 쇼파에 던져 놓고 수시로 읽고 있는데 야금야금 참 재미있네요. 사실 오늘 도서관 탐색을 나선 것도 이 책 덕택입니다.

세실 2011-06-14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서관도 오르막길이 있고, 주차공간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넓은 정원엔 장미랑 백합이랑, 여러 꽃들이 피어 있지요~~~ 이사할때 도서관이 근처에 있는가도 참고하면 좋을꺼 같아요. 아이들이 어릴때는요^*^

blanca 2011-06-15 10:11   좋아요 0 | URL
세실님 일하시는 도서관 가보고 싶어요. 참 궁금해요. 백합도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신도시는 주변에 도서관이 있는 경우가 많다더라구요. 부러워요. 다음 이사 때는 좀 찾아 봐야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6-1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운전 나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여기저기 몰고다니는 모습에........
으아, 그저 부러울 뿐이예요. 용기가 저보다 훨 나아요!

그런데, 능 구경 잘 하셨어요? 좋은데요.
좁은 길, 할머니. 삶의 한구석 같네요. 그림이 짜안해요. ^^

blanca 2011-06-15 10:1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부러워하실 필요 없는 게 정말 구린 운전자랍니다. ㅋㅋㅋ 저 운전하는 것 누가 관찰하면 참 속 터진다 할 거예요. 여기는 운전 안 하면 집에서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해야 한답니다. 어떨 때는 참 재미있기도 해요. 능 참 좋은데 벌써 너무 더워요. 창덕궁도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더워서 엄두가 안 나네요. 할머니는 제가 괜히 호기심에 쳐다 본 것 같아 죄송스럽더라구요. 실질적인 도움도 못 드리면서 무심코 고개를 돌려 버린 게 죄책감이 들더라구요.

icaru 2011-06-1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블랑카(영타가 젬병이라--;;) 님의 재주에 탄복하며.,,, 이런 글 좋아요~

blanca 2011-06-15 21:37   좋아요 0 | URL
꾸벅, 감사합니다. 저도 영타가 느려 되도록 아이디를 한글로 친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15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어떻게 된 주거지역이길래 버스정류장이 없단 말입니까...승용차 없을 땐 집에서 몇 분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가셨나요?

blanca 2011-06-15 21:38   좋아요 0 | URL
노자님, 물론 버스 정류장이 한 오분 가면 있긴 해요. 문제는 한 대만 오지요. 그 한대와 저의 목적지가 겹칠 때는 거의 없답니다.

穀雨(곡우) 2011-06-1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책에서 백배공감. 여간 부담이 아니더라구요. 그래도 잘 읽으니 좋아하니 그걸로 되었다는 최면을 걸고 몇차례 지름신 강림을 해 줍니다. 도서관도 멀고 도무지 중고로 돌려 책 사주기에는 그렇더라구요.ㅋㅋ

그나저나 용기백배 드라이버시군요. 골목길 운전이 젤루 힘들던데...간격이 서투르니 긁힐까 노심초사하게 되고...

blanca 2011-06-15 21:39   좋아요 0 | URL
곡우님, 도서관이 정말 아이들한테 절실한 것 같아요. 책값도 만만치 않은데 매번 사줄 수도 없고 중고로 잘 나오지도 않고. 어린이 도서관 근처에 사는 친구가 참 부럽더라구요. 골목길요. 안그래도 초보인데 여기 골목길들은 참 인내를 시험한답니다. 급경사에 좌우로 주차되어 있는 차들. 제 차는 긁혀도 남의 차는 안 긁을라고 무진장 땀흘리며 다닌답니다.^^

순오기 2011-06-1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진 도서관에 가려고 나선 길이 영휘원엘 가셨군요.^^
도서관은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곳에 있으면 좋은데...땅값 때문에 그런 곳에 짓지 못하겠지요.ㅜㅜ
요즘은 학교 도서관도 지역주민에 개방하니까 가까운 곳에 학교는 없는지 알아보셔요.

blanca 2011-06-16 21:2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예. 저 결국 도서관 뚫고 말 겁니다.^^;; 다각도로 접근해 보려구요. 아무래도 땅값 때문이겠지요? 참, 아쉬워요. 도서관이 사실 가장 사람들 접근성이 좋은 곳에 자리잡아야 할 텐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