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근처에 도서관이 있는 것은 축복이다. 그런데 우리 집 주변에는 없다. 내 책이야 야금야금 아껴 가며 사고 팔고 하지만 아이 책은 매번 사 줄 수 없어 참 고민이었다. 분노의 검색질 덕택에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곳에 보물 같은 곳이 있음을 알아 냈다. 주변의 풍광이 도서관 중 최고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었다. 동대문정보화도서관. 몇날 며칠을 그곳을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했다. 우리 집 앞에는 버스 정류장이 없다. 택시도 안 잡힌다. 걸어갈 수도 없는 거리. 그런데 도서관 홈페이지에는 주차장 수용 차량이 열 대이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어젯 밤 약도를 숙지했다. 약도는 골목길이 대부분이었다. 초보운전자인 내가 과연 제대로 갈 수나 있을런지 가더라도 만약 주차장에 자리가 없으면 도서관을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턴해야 하는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여하튼 도서관을 뚫어야 한다는 강박에 출발했다. 

역. 시. 나. 나는 도저히 거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골목길을 놓치고 그 옆의 영휘원 주차장에 들어가는 쾌거를 세웠다. 영휘원. 고종의 고종의 계비인 순헌귀비 엄씨(嚴氏)의 묘소. 주차장에는 떡하니 매서운 눈초리로 아주머니가 버티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나의 굴욕을 알까? 괜히 담담한 척 내려 입장료 천 원을 지불하고 영휘원에 입성했다. 그렇다. 도서관에 가려 했던 나는 고종의 계비의 능에 도착한 것이다. 꼼수는 구경좀 하다 아주머니의 눈길을 피해 옆 골목길로 달음박질 쳐서 도서관으로 가는 것이긴 했지만 잘 조성된 수목들과 탁 트인 녹지가 의외로 내 눈길을 사로잡아 사부작 사부작 몇 걸음 둘러보다 다시 나와 오른쪽 골목길로 빠져 나왔다. 

그 골목은 정말 내 생애 최고의 도전 과제였다. 경사도가 거의 70도에 가까웠고 햇살은 가차없이 내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가도 가도 좌회전할 구멍은 나오지 않았다. 숨이 턱에 닿고 다리가 쑤실 무렵 왼쪽으로 장미가 흐벅지게 핀 골목길이 나타났다. 역시 한참을 가니 초등학교 맞은편에 오붓이 도서관이 숨어 있었다. 

도서관은 자그마하고 아담하고 정겹고 아름다웠다. 숲 속에 안긴 듯한 착각. 사방이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책을 보며 싱그러운 녹음을 눈동자에 마구 문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 지. 만. 나는 이미 너무 지쳐 있었고 이곳을 결코 정기적으로 올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미 관심을 잃고 있었다. 잠시 창가에 비치된 안락의자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았다. 

 

 

지하 주차장을 확인해 보았다. 정말 열 대 수용 가능한 곳이었다. 이 도서관에 올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그 등산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집앞에 대중교통도 없고 그냥 돌아서야 했다. 

내려오는 골목길. 등이 굽은 노인들은 힘겹게 그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독특한 냄새에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반지하방에 고목처럼 늙어버린 할머니가 문을 열어 놓고 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힘들다고 투정하는 그 골목길을 매일 올라야 하는 사람들 앞에 괜시리 숙연해졌다. 골목길 초입에는 덩그러니 세콤을 단 담이 높은 집이 버티고 있었다.  

골목길. 사람들에는 아련한 향수와 정취를 풍기는 그곳이 오르막과 더위와 만나 넘기 힘든 큰 산으로 엉 버티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아기자기한 푸른 도서관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영휘원 주차장에서 다시 눈치를 보며 슬며시 집으로 출발했다. 망구엘 아저씨의 <밤의 도서관>을 펴 들었다.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그의 재주에 탄복하며. 아무래도 이 계절에는 정말 밤의 도서관이 필요한 모양이다.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꾸는섬 2011-06-14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가까이 사는 전 축복받은 사람이네요.

blanca 2011-06-14 21:22   좋아요 0 | URL
우아,완전 부러워요. 정말로....

2011-06-14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4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1-06-1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대문구 정보화 도서관!
제가 참 좋아하는 곳입니다.
교통이 좀 불편하긴 하죠.
회기역이나 고대입구역에서 버스가 있긴 하더라구요.
저는 회기역에서 산책겸 걸어서 왔다갔다 한 적은 있습니다.

역시 집이나 일터 근처가 아니니, 자주 안가게 되긴 하더라구요.

blanca 2011-06-14 21:2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도 아시는군요! 정말 너무 좋은데 참 난감하더라구요. 저희 집에서 좀 걸어서 버스를 타고 간다고 해도 그 근처라면 시도해 볼 텐데 거기서 또 등산을 해야하니까요. 그냥 저 혼자 다닌다고 해도 너무 부담스러운 시추에이션이더라구요. 사실 아이와 함께 다닐 도서관을 탐색중이었기에 좌절했답니다.

감은빛 2011-06-16 10:17   좋아요 0 | URL
그 도서관에 일하는 사서님이랑 우연히 블로그에서 친해져서,
몇 번 만나고, 식사도 하고 했었어요.
그 도서관에 오면 특별회원으로 모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거리가 멀어서 늘 안타까워했답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면 자주 찾아갈만한 멋진 도서관이예요.
도서관 서포터즈도 활성화되어있고, 여러가지 다양한 프로그램도 많구요!
장정일 선생님이 진행하는 문고 읽기 강좌도 꽤나 흥미롭더라구요.

무슨 초등학교던가요.
그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그리 가파르지 않은 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암튼 블랑카님께서 쉽게 다닐 수 있는 도서관을 금방 찾게 되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1-06-14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이 대개는 오르막 저 끝에, 걸어서 올라가기엔 너무 힘든 곳에 있는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지요. 주차시설도 턱없이 부족하구요. 여기도 그런 곳이 많답니다.
접근하기 쉽지 않게 만드는 요인 중 지리적 위치도 빼놓을 수 없어요.ㅠ
힘들게 올라가 앉은 창밖 녹색은 참 눈이 부시네요. 고생하셨어요.
이참에 '밤의 도서관' 담아갈래요.^^

blanca 2011-06-14 21:2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정말 그래요. 그래도 전에 살던 집 앞 버스를 타고 가면 바로 근처 도서관 입구에 내려 주었거든요. 아이도 데리고 가고 참 좋았는데 이 예쁜 도서관이 참으로 난감한 위치에 있더라구요. 너무 이쁘고 탐나서 더 좌절감이 크답니다.

블루데이지 2011-06-14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의 역사, 도서관에 담긴 철학~~밤의 도서관이 급 궁금해집니다...
글 잘읽고 갑니다...땡스 투~~~

blanca 2011-06-14 21:26   좋아요 0 | URL
블루데이지님, 쇼파에 던져 놓고 수시로 읽고 있는데 야금야금 참 재미있네요. 사실 오늘 도서관 탐색을 나선 것도 이 책 덕택입니다.

세실 2011-06-14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서관도 오르막길이 있고, 주차공간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넓은 정원엔 장미랑 백합이랑, 여러 꽃들이 피어 있지요~~~ 이사할때 도서관이 근처에 있는가도 참고하면 좋을꺼 같아요. 아이들이 어릴때는요^*^

blanca 2011-06-15 10:11   좋아요 0 | URL
세실님 일하시는 도서관 가보고 싶어요. 참 궁금해요. 백합도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신도시는 주변에 도서관이 있는 경우가 많다더라구요. 부러워요. 다음 이사 때는 좀 찾아 봐야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6-1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운전 나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여기저기 몰고다니는 모습에........
으아, 그저 부러울 뿐이예요. 용기가 저보다 훨 나아요!

그런데, 능 구경 잘 하셨어요? 좋은데요.
좁은 길, 할머니. 삶의 한구석 같네요. 그림이 짜안해요. ^^

blanca 2011-06-15 10:1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부러워하실 필요 없는 게 정말 구린 운전자랍니다. ㅋㅋㅋ 저 운전하는 것 누가 관찰하면 참 속 터진다 할 거예요. 여기는 운전 안 하면 집에서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해야 한답니다. 어떨 때는 참 재미있기도 해요. 능 참 좋은데 벌써 너무 더워요. 창덕궁도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더워서 엄두가 안 나네요. 할머니는 제가 괜히 호기심에 쳐다 본 것 같아 죄송스럽더라구요. 실질적인 도움도 못 드리면서 무심코 고개를 돌려 버린 게 죄책감이 들더라구요.

icaru 2011-06-1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블랑카(영타가 젬병이라--;;) 님의 재주에 탄복하며.,,, 이런 글 좋아요~

blanca 2011-06-15 21:37   좋아요 0 | URL
꾸벅, 감사합니다. 저도 영타가 느려 되도록 아이디를 한글로 친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15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어떻게 된 주거지역이길래 버스정류장이 없단 말입니까...승용차 없을 땐 집에서 몇 분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가셨나요?

blanca 2011-06-15 21:38   좋아요 0 | URL
노자님, 물론 버스 정류장이 한 오분 가면 있긴 해요. 문제는 한 대만 오지요. 그 한대와 저의 목적지가 겹칠 때는 거의 없답니다.

穀雨(곡우) 2011-06-1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책에서 백배공감. 여간 부담이 아니더라구요. 그래도 잘 읽으니 좋아하니 그걸로 되었다는 최면을 걸고 몇차례 지름신 강림을 해 줍니다. 도서관도 멀고 도무지 중고로 돌려 책 사주기에는 그렇더라구요.ㅋㅋ

그나저나 용기백배 드라이버시군요. 골목길 운전이 젤루 힘들던데...간격이 서투르니 긁힐까 노심초사하게 되고...

blanca 2011-06-15 21:39   좋아요 0 | URL
곡우님, 도서관이 정말 아이들한테 절실한 것 같아요. 책값도 만만치 않은데 매번 사줄 수도 없고 중고로 잘 나오지도 않고. 어린이 도서관 근처에 사는 친구가 참 부럽더라구요. 골목길요. 안그래도 초보인데 여기 골목길들은 참 인내를 시험한답니다. 급경사에 좌우로 주차되어 있는 차들. 제 차는 긁혀도 남의 차는 안 긁을라고 무진장 땀흘리며 다닌답니다.^^

순오기 2011-06-1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진 도서관에 가려고 나선 길이 영휘원엘 가셨군요.^^
도서관은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곳에 있으면 좋은데...땅값 때문에 그런 곳에 짓지 못하겠지요.ㅜㅜ
요즘은 학교 도서관도 지역주민에 개방하니까 가까운 곳에 학교는 없는지 알아보셔요.

blanca 2011-06-16 21:2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예. 저 결국 도서관 뚫고 말 겁니다.^^;; 다각도로 접근해 보려구요. 아무래도 땅값 때문이겠지요? 참, 아쉬워요. 도서관이 사실 가장 사람들 접근성이 좋은 곳에 자리잡아야 할 텐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