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원망하지 마라." 

부처의 포스를 풍기는 나의 아그립파 뎃생을 물끄러미 지켜 보신 턱수염 만발 미술 선생님은 한숨을 쉬었다. 친구들은 내 그림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실 출발이 그랬던 것은 아닌데 요리조리 개념없는 명암 효과 덧칠을 시도하다 보니 점점 로마의 장군은 동양의 석가모니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 학기 나의 미술 성적은 '미'였다. 타당한 일이었다. 

그런 내가 뽑은 역할은 '페이스 페인팅'이었다. 제발 이것만은 피했으면 했던, 역할이었다. 아이의 유치원 시장 놀이 엄마 참여 수업. 가슴이 옥죄어 왔다.(정말이다) 펼쳐진 도화지에도 제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내가 세워진 사람의 살갗에 그것도 실패가 엄청난 파국과도 직결될 수 있는 페이스 페인팅이라니. 아이들은 엄하게 된 자신의 얼굴을 부여잡고 울먹이며 나를 원망할 지도 모른다. 

누워 자는 식구들에다 수채 물감으로 낙서를 시작했다. 난망시됐다. ' 그 날'이 다가올수록 가슴 한 켠의 돌덩이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 날'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르며 유치원으로 향했다. 페이스 페인팅용 물감, 하이라이트를 줄 반짝이, 물통. 나를 포함한 엄마 넷은 다들 긴장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정직하다. 투명하다. 봐 주지 않는다. 이윽고 개시. 바로 일곱 살 아이들 부터다. 일곱 살은 다섯 살 엄마 앞에서 모든 것을 다 아는 눈빛으로 앉는다. 나의 손은 덜덜 떨린다.(다른 엄마들도 그랬단다) 하필난이도도 높은 잠자리를 그려달란다. 무지 뚱뚱하고 좌우 비례가 안 맞는 잠자리가 완성된다. 하지만 해냈다! 사내아이는 벌떡 일어서서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고는 기분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장난감 지폐를 내어 놓고 일어선다. 그림은 점점 발전해 간다. 되도록 손에 그리기를 유도한다.(얼굴보다 쉽다) 다섯 살 꼬마들은 좋아서 계속 그려달란다. 도안을 무시하고 곰돌이와 토끼를 주문할 때는 난감하다. 그래도 자꾸 그리니까 진짜 곰돌이와 토끼가 되어 간다. 콧물을 줄줄 흘리며 나의 옆에 계속 서 있는 여자 아이. 학기 초에 유치원 문을 들어서며 울먹이던 모습이 기억나 가슴이 저릿하다. 아이의 콧물을 닦아 주며 또 그려 줄까?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를 보면 모른 척 해달라고 주문했던 나의 아이가 와서 분홍색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혜로 두 개 그려준다. ㅋㅋㅋ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로 누군가를 즐겁게 해 준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다음에는 페이스 페인팅을 자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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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7-0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로 누군가를 즐겁게 해 준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 이건 너무나 아름다운 수필이에요, 블랑카님. 제 입이 아주 컸으면 좋겠어요. 그럼 고개를 끄덕이고 그 큰 입으로 블랑카님께 웃어드리고 싶어요.

blanca 2011-07-01 21:5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 이제 안젤리나 졸리랑 다락방님이 구분이 안 가요. 그래서 지금 안젤리나 졸리의 살인미소를 그려봅니다. 그 시원한 입매로 짓는 미소를요. 살아 보니깐요. 항상 삶은 제가 생각했던 경로를 아주 교묘하게 이탈하며 지나가더라구요.

감은빛 2011-07-01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심정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페이스 페인팅이라니! 너무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
훌륭히 해내신 블랑카님. 정말 대단하세요!

다락방님 말씀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수필입니다!

blanca 2011-07-01 21:52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훌륭하게 해 내지는 못했답니다. ㅋㅋㅋ 아이들이니 용서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하지만 다음 번에는 좀 더 잘 할 수 있을 것만은 분명해요. 그 느낌이 참 좋았어요. 그것도 아이들과 함께 누리는 그 기분이요.

잘잘라 2011-07-01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보~!!!
blanca님께 기꺼이 저의 크고 통통한 두 볼을 내어드리겠어요.
저는..해바라기꽃과 나비를 부탁드려요^^

blanca 2011-07-01 21:53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이 통통한 두 볼을 내어 주신다고 하니 갑자기 또 의욕이 불끈 솟네요 ㅋㅋㅋ 볼에 그림을 그리다 보니 통통한 볼이 참 아름답다, 촉감도 너무 좋다, 고 생각했어요. 참 이쁜 부위예요. 해바라기 꽃과 나비라면 자신 있습니다.^^

pjy 2011-07-0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활한 저의 볼에도! 전 잠자리를 쌍으로 부탁드립니다^^

blanca 2011-07-01 21:5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짝짝이 잠자리 두 마리 그려 드릴게요. 볼은 넓을수록 좋습니다.^^

프레이야 2011-07-0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분홍공주 깜찍해요.
아이들이 모두모두 즐거워 했겠어요.
블랑카님, 제 왼쪽 뺨에도 페인팅 해줘요.^^

blanca 2011-07-01 21:5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생각보다 참 재미나더라구요. 그러니 제대로 잘 그리시는 분들은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이것저것 다 잘 그릴 수 있으면 더 기쁘게 해줬을 터인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기회가 오면 집에서 연습좀 해서 ㅋㅋㅋ 그려 드리겠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07-01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스 페인팅을 할 줄 알아서 엄마가 될 수 있나요?라고 블랑카님에게 묻고 싶었다.

ㅋㅋㅋ

blanca 2011-07-01 21:5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제가 예체능에 경기하는 사람이거든요. 특히 미술과 체육. 대학에 들어가서 다 끝났다, 안도했더니 이건 이런 식으로 계속 제 발목을 잡네요. 다음에는 또 체육까지 해야 할까봐 걱정이랍니다. 저 달리기 20초잖아요--;;

아이리시스 2011-07-01 22:29   좋아요 0 | URL
할 줄 알아야,를 할 줄 알아서,라고 써서 의미가 좀 이상해지진 않았나요?
그리고 웃다가 빼먹고 갔나봐요. 블랑카님은 멋진 엄마예요. 저라면 그냥 안갔을 것 같거든요. 저도요. 미술과 체육. 경기해요.ㅠㅠ 저 달리기 25초일지도--;

순오기 2011-07-01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엄마가 아니었으면 손을 떨면서 감당하지 못했겠지요?
역시 엄마는 위대해요!^^
연습하면 된다는 걸 확인한 블랑카님께 박수~~~~~짝짝짝!!
분홍공주가 아는 척은 안했나 봐요~~~ 역시 분홍색을 써야 된다고 주문한 분홍공주 멋져요!ㅋㅋ

blanca 2011-07-01 21:5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칭찬해 주시니 완전 기분 막 업됩니다. ^^ 의외로 아는 척 안 하는 모습이 넘 웃기더라구요 ㅋㅋ 그러더니 슬며시 와서 자기는 분홍색으로 해야 된다고 어찌나 간섭을 해대던지. 역시나, 했어요^^

마녀고양이 2011-07-01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스 페인팅 하셨어요?
저는 잘 못 해서, 자원도 못 할건데.... 멋지게 해내셨네요?
분홍공주님은 아직도 분홍을 좋아하는군요? 아이, 예뻐라~

blanca 2011-07-03 11:07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하시면 잘 하셨겠다, 생각했는걸요. 저는 뽑기를 잘못 뽑았어요. 제비뽑기는 항상 운이 안 따르더라구요. 그럭저럭 해 냈는데 제가 그림을 잘 그리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싶어 참 아쉽더라구요.

2011-07-02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3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1-07-02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저두요. 님께는 제 볼을 내어드릴께요.
아이들 어릴적에 페이스페인팅 하려고 줄 서 있다가 문득 내 팔에도 그려달라고 할까? 했지만 이내 포기했던 기억이 있어요. ㅎㅎ
페이스 페인팅 하는 엄마, 따님이 참 자랑스러워 했겠어요

blanca 2011-07-03 11:10   좋아요 0 | URL
세실님이 볼을 내어 주신다면 영광이죠^^ 아, 손목이나 팔에 그려도 참 이쁘겠어요. 헤나 같은 것도 요즘에는 매력적으로 보이더라구요. 그림을 잘 그려야 자랑스러워할 텐데 요새 딸아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제 모습이 참 답답하답니다.

비로그인 2011-07-0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blanca님. 그림도 함 공개해주세욥.

다들 그걸 원하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멋지게 잘 해내신거 들으니 기분이 막 좋아지려고 하네요!
울 분홍공주님 꽤나 오랬동안 뿌듯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D

blanca 2011-07-07 13:51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안 그래도 사진이 있어 올릴까 했는데--;; 수준이 너무 낮아서 그냥 저 혼자 보고 마는 게 낫겠다 싶어 안 올렸답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후애(厚愛) 2011-07-08 0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더위조심하시고 즐거운 하루 되세요^^

blanca 2011-07-08 22:08   좋아요 0 | URL
아, 후애님 여기는 계속 비가 그어서 그래도 시원한 편이에요. 장마가 끝나고 나서 올 더위가 너무 두렵네요. 후애님도요^^

2011-07-17 0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7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7-23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희경 작가님과의 심야데이트 당첨됐더군요~~ 축하해요!!
은희경 작가님 새의 선물, 비밀과 거짓말은 정말 좋았어요~~ 최근작은 읽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데이트 후기 기대해도 되겠죠?^^

blanca 2011-07-23 21:2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정말 잘 얘기해 주셨어요. 저 깜빡 잊고 있었고 메일도 삭제되어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확인했네요. 마음이 급해집니다. 시간이나 장소도 전혀 모르겠고. 확인해 봐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순오기 2011-07-26 15:38   좋아요 0 | URL
은작가님과의 데이트 확인하셨나요?
독서회 사진 추가했으니 봐주세요.^^

blanca 2011-07-27 21:14   좋아요 0 | URL
아, 아쉽지만 제가 시간이 안 되어서 못 간다고 말씀드렸어요. 다른 분에게 기회가 가겠지요. 머피의 법칙인가 봐요. 시간이 될 때는 당첨이 안 되고 시간이 안 될 때 당첨되고--;; 예, 사진 확인하러 갈게요.

2011-07-24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4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7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7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