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도서관 - 책과 영혼이 만나는 마법 같은 공간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따르면,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 연령'인 56세에 이르러서 나는 젊은 시절의 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무서운 게 없던 젊은 시절, 시력을 잃어버린 위대한 작가 보르헤스의 옆에서 책을 읽어 주며 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알베르토 망구엘. 그는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은 말들로 적시에 독자들을 감동으로 무릎 꿇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56세에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서고 같다. 사라진 도서관, 씌여지지 않은 책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남고야 만 책, 도서관들에 대한 얘기는 까만 밤하늘에 명멸하는 별들 같다. 우리는 이미 밤하늘에서 과거의 소멸된 별들을 본다. 그 별들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미래를 꿈꾸는 그런 아이러니는 모순 같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아련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와 같은 얘기이기도 하다.  

   
 

 "암흑시대에 마케도니아에서, 마지막 촛농을 흘러내리는 불빛을 빌려, 한 남자가 어린 아들을 위해 고대의 낡은 책으로부터 짤막한 구절을 옮겨 쓰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셉티미우스였습니다. 그 덕분에 <아킬레우스의 사랑>의 한 문장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사랑은 어린아이 손에 쥐어진 얼음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소포클레스는 말했습니다.
-p.139

 
   

 

소포클레스의 사라진 비극에서 우리는 이 한 문장을 건진다. "사랑은 어린 아이 손에 쥐어진 얼음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킬레우스의 사랑은 이런 것이었을까? 그리고 수천 년을 지나서도 그 사랑의 느낌은 유효한 것일까?  망구엘은 책이 실제 세계를 온전히 반영할 수도 복원할 수도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끊임없이 직조해 내는 그 불가능한 열망들의 흔적 들은 때로 현실과 존재를 뛰어넘는다. 이제 손에 얼음을 쥔 어른은 아킬레우스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을 막연하게 같은 것으로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불가능하고 스러져 버리는 것. 쥐고 있는 동안 고통스러운 것. 하지만 결국 또 쥐게 되는 것.  

   
 

 잘 쓰인 책이라도 이라크나 르완다의 비극을 덜어줄 수 없지만, 엉터리로 쓰인 책이라도 운명적으로 맞는 독자에게는 통찰의 순간을 허락할 수 있다.
-p.241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 책이 꼭 대단히 훌륭해서라기보다는 그 타이밍의 내 상황과 묘하게 겹쳐 굉장한 동질감과 위안을 주는 시간. 불면의 밤, 티테이블에 우연히 펼쳐져 있던 공지영의 초기 에세이에서 공지영은 울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비극을 덜어줄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때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다. 불행한 순간, 행복한 사람이 던지는 기만적 위로가 아닌 비슷한 무게의 슬픔을 듣는 것. 위안. 그게 통찰로까지 확장되지 않더라도 괜찮다.  

책에 대한 예찬, 옹호 대신 자박 자박 이리저리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의 탄생과 성장, 노화, 죽음에 대하여 하는 얘기들을 듣다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정작 저자인 망구엘에게 책과 독서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따라서 나는 어떤 종류의 계시도 구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에게 말해진 것은 내가 듣고 이해하는 것으로 제한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스런 과정을 통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바랄 수 없는 깨달음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 궁극적으로 내가 알게 되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므로 더 이상의 경험도 구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럼 내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면서 나는 무엇을 구해야 할까?  

아마도 위안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위안일 것이다. "
p.337

 
   

 

 그래.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위안받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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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1-06-15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주는 위로와 위안, 저도 알아요.^^
저 근데 요새 노는데 정신팔려 책도 잘 안 읽어요.ㅎㅎ

blanca 2011-06-16 21:17   좋아요 0 | URL
^^ 꿈섬님 뭐하며 재미있게 노시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요새 저희 집이 너무 더워서 되도록이면 나오려고 하고 있어요. 정말 덥네요. 오늘은 읽을 책도 똑 떨어지고. 어떻게든 도서관을 좀 뚫어보려고 하고 있답니다.

감은빛 2011-06-1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위안이었군요.
저는 어떤 이유 때문에 책을 읽는 건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봐야겠어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blanca 2011-06-16 21:17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의외로 아주 겸손하고 기대가 적은 저자의 독서관이 오히려 더 와닿더라구요. 좋은 책 맞는 것 같아요.^^

2011-06-16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6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11-06-16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쓰인 책이라도 이라크나 르완다의 비극을 덜어줄 수 없지만, 엉터리로 쓰인 책이라도 운명적으로 맞는 독자에게는 통찰의 순간을 허락할 수 있다." 아, 이 말은 너무 옳고도 좋으네요, blanca님.

blanca 2011-06-16 21:19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좋은 문장들이 너무나 많아요. 참 좋더라구요. 구구절절 옳고 좋은 말들. 멋진 인용구들. 추천드려요.

2011-06-16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7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1-06-1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어쩔 때 블랑카님 따라쟁이인 것 같아요. 이 책 저도 오늘 받았는데 어제 리뷰를 발견하게 되어서 신기했어요. 얼른 읽고 싶은데 이렇게 좋은 인용구들을 골라내어 페이퍼를 쓸 순 없을 것 같네요. 언제나 도서관과 책에 대한 책은 참 좋아요, 그쵸, 블랑카님.^^

blanca 2011-06-17 14:19   좋아요 0 | URL
^^ 저 따라쟁이 좋아해요. 저도 글쎄 도서관과 책에 관련된 책만 해도 벌써 많이 모였더라구요. 무심결에 계속 모으고 있었나 봐요. 또 나와도 또 사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