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떨 땐 정말 우리 말로 된, 그러니까 번역을 거치지 않은, 우리네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진다. 그럴 때에는 사실 참으로 난감하다. 이런 추상적인 소망을 제대로 충족시켜 줄 딱 바로 그 책을 어디에선가 골라야만 하는 것이다. 대체 어떤 책이 그러한 난감함을 무마시켜 줄 수 있을까.
난삽한 검색에 들어간다. 그냥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알라딘 동네를 떠돌다 우연히 만난 책. 그냥, 제목이 좋았다. 이 작가는 처음이다. 나는 그 유명한 그의 <19세>를 읽지 않았다.
'수색'은 실제 은평구 수색동의 지명과 겹친다. 정말 이 수색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장마만 되면 한강 하류에 위치해 물이 이곳까지 차오르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이 지명은 이 소설 전체를 견인한다. 소설 속의 '나'는 직장생활과 소설 창작을 병행하다 전업 작가가 되는 모양새로 실제 작가 이순원의 이력과도 겹친다. 자전적이라는 용단은 위험하지만 군데군데 이것이 소설인지, 정말 작가의 내밀한 고백인 것인지에 대한 경계가 모호하다. 그 모호함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이건 정말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닐지도 몰라, 를 의식하며 읽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그만큼 핍진하고 뭉클하다. 거짓부렁인지 알면서도 화자의 이야기가 어디에선가 실제 일어났던, 일어나는, 일어날 이야기라고 믿는 것은 청자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적인 포기할 수 없는 기만이다.
'나'는 아내와 엄격하지 않은, 그러니까 언제든 다시 합칠 용의가 있는 별거를 하게 된다. 아니, '용의'는 없었다. 심한 갈등의 골로 벌어진 사이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 정도의 간극. 신사동에 새로운 아파트를 분양받아 들어가는 시점에 부부는 한 명은 작업실로 한 명은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가는 비현실적인 별거에 착수하게 된다. 계기는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냥 자연스럽게 멀어진 부부. 그 거리 어느 지점엔가 '나'의 '엄마'가 있다. 나를 낳지도 온전히 키우지도 못하고 떠난 두 번째 엄마. 생모는 아버지의 외도로 들어오게 된 시앗에게 '나'를 지목하여 '나'의 엄마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무언의 압력이었다. 아이를 갖지도 이곳에 정착하지도 말라는. 수호는 그러나 그 엄마를 잊지 못한다. 여기까지 왔을 때 언젠가 어디에선가 티비에서 두번이나 본 그 드라마가 생각났다. 젊은 엄마. 눈이 땡글하게 큰 조은숙의 연기였다. 그 등에 업힌 아이. 그러한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걷는 길에서 나온다. 이순원의 또다른 작품 <아들과 함께 걷는 길>과 이 작품이 한데 섞인 그러한 드라마였던 것같다.
'업힌다'는 행위는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다 담을 수 없는 모든 그리움과 아련함과 유년의 애착을 한데 그러모으고 남는다. 나를 자주 업어 주었던 나의 꼬부랑 할머니는 나를 업고 정육점 앞에서 처음으로 내가 손으로 '고. 고'하며 고기를 가리키던 시간을 잊지 못하셨다. 나는 이렇게나 젊은데 나의 작은 아이를 조금만 업어도 숨이 턱하니 막힌다. 업어주는 데에 인색하다. 나는 아이를 업어준 엄마로는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대신 아기띠로 안고 고 작은 다리를 달랑거리며 사방팔방을 다녔다. 버스도 지하철도 계단도 지나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아이의 달랑거리는 오종종한 다리를 때로 양해를 얻고 만져보며 좋아들 했다. 그 정도의 추억이다. 그 아기띠를 뒤로 돌려 업고 무릎을 꿇고 시장통에서 국수를 먹은 기억은 있다. 아이를 누일 곳도 앉힐 곳도 없는 그런 협소한 곳. 국수맛은 일품이었다.
'나'는 수색으로 가면 그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번이나 그 '어머니'의 무늬를 직접 찾아 더듬을 수 있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피한다. 그러면서도 무언가에 끌리듯 수색은 '나'의 뒷덜미를 잡는다. 진짜 어머니가 아닌데, 정말 나의 가족도 아니었는데 누구나 한 명쯤은 자신의 유년을 통째로 저당잡은 하나의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의 복기는 본능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만날 듯 만날 듯 만나지 못하고 잡을 듯 잡힐 듯 하면서도 끝내 놓치고 마는 그러한 것. 삶은 그러한 것들의 점철일런지도 모른다.
'성장'에는 눈물이 스며든다. 그 안에 담긴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떠오는 길에 이 '수색'이 있다. 마지막 장면. '나'의 자전적 작품이 발표되고 말없이 계속 걸려오는 그 전화. 자동응답기에 '안녕하세요. 이수홉니다. 저는 지금 수색에 가 있습니다'는 말을 녹음해 둔 '나'. 너무나 아름답고 아련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메시지는 잃어버린 그 '어머니' 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색의 그 어머니는 마침내 수호의 그 메시지를 받았다. 작가가 그렇게나 찾아 헤매었던 그 물빛 무늬는 이제 읽는 이들을 향하여 점점이 번져 온다. 파문처럼.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