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책을 읽는 경험은 첫 키스와 같다. 나는 진심으로 이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열다섯 살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댈러웨이 부인>은 내게 첫 키스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내가 읽은 어떤 책보다 농밀하고 내밀하게 다가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

 

 

 

이제 2012년도 채 한달이 남지 않았다. 거울을 본다. 아직도 젊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온 날만큼 더 살면 나는 완연한 노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아주 운이 좋은 경우가 아니라면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또 몇몇의 지인도 내 곁에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세월은 꾸준하게도 뚜벅뚜벅 제 갈길을 간다. 한파는 시간의 흐름과 마무리를 응축한 은유 같아서 더 시리다. 눈이 와도 이제 강아지처럼 뛰어다닐 일은 없으리라. 아이의 성장은 나의 또다른 시계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처음이다. 그녀는 나에게 완고하고 성마른 인상이었다. '의식의 흐름기법' 들어는 봤다. 그러니 나는 그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같지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를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준다. 그에게 이 책은 첫 키스를 회고하는 첫사랑 같은 글이라 한다. 이미 열다섯 살에 그는 버지니아 울프를 읽었다. 나는 지금에서야 그녀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다. 첫 키스는 뒤늦게도 찾아온다. 이 책은 생각만큼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의식의 흐름'이란 거창한 어구 아래 그저 내 마음 속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모호한 생각, 느낌 들이 그녀의 명료한 언어로 분출된 듯한 느낌. 정말 농밀한 책. 구십 년도 더 전의 그녀는 어쩌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무단 침입한 듯하다. 표현할 수 없었던, 말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그녀의 언어에 빚진다. 소설의 한계의 철책은 그녀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구나.

 

 

런던이다. 찬란한 6월의 아침. 오십 대의 클라리사는  파티에 필요한 꽃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리고 하루. 파티가 열린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서사는 그것이 전부다. 그녀의 눈에 비친 런던의 풍경, 그녀를 둘러싼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성공한 사람들, 때로는 그렇지 못한 채 소외된 사람들의 정경.

 

그녀는 빅토리아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며 인간이 너무나 어리석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무엇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사랑하고, 어떻게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보고,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p.9

 

수많은 아침을 밀어넣은 지극히 농밀한 이 하나의 아침. 이 순간. 젊은 시절의 어리석은 사랑도 오늘의 어리석은 세속적인 욕심도 함께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무리 불행해도 인생은 포기 못할 그 어떤 마지막 꿀을 숨기고 있다. 무모하고 비겁하고 "낭만적인 해적 같은 남자"인 그녀의 젊은 시절의 사랑, 피터 속에는 이러한 깨달음이 있다.

 

늙는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보상은 바로 이거야. 열정은 여전하지만 지난날의 경험을 천천히 불빛 아래 돌려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존재에 최상의 향기를 더해주는 힘이지. <중략> 쉰세 살이 되고 보니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필요치 않았다. 인생 그 자체, 인생의 순간순간, 그것의 방울방울, 여기, 이 순간, 지금 이 햇빛 속에, 리젠트 공원에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정말이지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p.115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추억의 귀환. 끊임없이 테잎은 되감기고 의미는 가공된다. 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경험도 했더라면 좋았을 경험도 이제는 무의미하다. 내 인생에 삶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의 무게의 추는 숙명적으로 내 삶의 닻이다.  단하나의 무의미함도 어떤 하나의 사소함도 걸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댈러웨이 부인>을 읽아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작품이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속의 '사자' 거기에도 파티가 있었다. 그 파티에 참석했다 우연히 죽어버린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흐느끼는 아내 옆에서 삶을 조망하는 남자가 있었다. 묘하게 닮아 있는 이야기.

 

 

 

 

 

 

 

 

 

 

 

 

 

 

 

 

자기라는 존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세계로 사라져가고, 그들 죽은 사람들이 한때 살던 현실의 세계 그 자체는 허물어져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 p.291

 

노이모 자매의 파티에 참석한 조카 가브리엘은 아내 레이첼의 추억을 버지니아 울프의 피터처럼 불빛 아래 천천히 돌려보게 된다. 역설적으로 추억의 귀환은 죽음에 대한 명료한 의식으로 연결되고 현재의 순간에 대한 농밀함으로 통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조우하는 부분이다. 두 작가의 생몰 연대를 보니, 놀랍게도 같다. (1882~1941)  버지니아 울프의 약력을 보니 그녀의 죽음이 제임스 조이스의 죽음에서 온 우울증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친분이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밀착되어 있던 관계였던 것같다. 파티라는 생의 축제에서 갑자기 다가오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삶의 본질적 유한성에 대한 두 작가의 공통적인 통찰에서 유려하게 빚어낸 깨달음이다. 클라리사도 가브리엘도 어쩌면 작가들 자신의 투영인지 모르겠다. 파티를 개최하고 파티에서 시를 읽고. 각기 다른 의미에서 파티에서의 주인공 역할을 했던 그들도 그들이 걸었던 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거리도 이제는 없다. 그리고 그 둘은 그럴 것을 이미 안다. 내일 죽을 것을 이미 아는 것은 머리로 가능한 명제이지, 가슴으로 간직하는 깨달음은 아니다. 모든 것의 유의미성도 무의함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지금 하는 사랑은, 지금 하는 일은 우리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게 되기도 한다. 삶 앞에서 어리석어지는 것은 이 단순한 명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클라리사의 말처럼 그것은 의회의 법령으로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뛰어들고 싶어했을 정도로 화창했던 유월의 아침. 그 순간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반복된다.

 

눈이 온단다. 사박사박 그 눈을 밟으면 2012년 12월 5일은 또 허공으로 스러질 것이다. 그 경계를 딛고 나는 또 나아가고. 무작정 스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댈러웨이 부인>은. 

 

P.S.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바치는 일종의 헌사다. 각기 다른 세 시대, 세 여인의 접점은 <댈러웨이 부인>이다. 심지어 한 명은 댈러웨이 부인의 클라리사라는 이름과 같다. <디 아워스>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이 작품을 <댈러웨이 부인>과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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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사랑의 시작
    from A Month in the Country 2012-12-06 23:17 
    서재 이웃분이 한 번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소설을 쓰게 된다면 누구처럼 쓰고 싶은지. 소설이나 글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 나는 누구를 표준모델로 골라야할까 고민을 좀 했었다. 일전 한 페이퍼에서도 썼었는데, 내게 '글'이란 정연(井然)과 정연(整然)이 만나서 이뤄내는 무겁거나 깊은 어떤 것,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의 밖에 머무는 어떤 것이다. 지금처럼 소소한 상념들을 블로그에서 끄적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문학소녀 시절을 벗어난 이후 '소설'이든 '
 
 
댈러웨이 2012-12-0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요즘 저는 <출항>을 끝냈고, 울프의 다른 책들이 오는 동안 <등대로>를 다시 읽었고, <제이콥의 방>을 읽고 있어요. 반가워요. 버닝햄의 책도 함께.

댈러웨이 2012-12-05 21:35   좋아요 0 | URL
마이클 커닝햄이에요. 뭘 버닝하고 싶었던 걸까요 저는? --; 블랑카님, 저 먼댓글 달고 싶어지는데요? ^^

blanca 2012-12-06 09:31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이 떠올랐어요. 왜 댈러웨이라고 이름 붙이셨는지 설명 안 하셔도 느낌으로 다가올 만큼 너무 좋은 책이더라고요. 저도 커팅햄이라고--;; 수정했답니다. 참, 댈러웨이님! 저 울프의 다음 책으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으로(아, 너무 지난한 표현이지만) 한 권 더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다크아이즈 2012-12-05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커팅햄의 <첫 키스> 비유가 왜 <댈러웨이 부인>에 가서 걸리는지 아직 이해가 안 되는 일인.
억지로 읽어보려 했는데도 그냥 덜 읽고 반납하고 만 기억이 있네요.
어쩌면 번역상의 문제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삼아봅니다.
291쪽 옮긴 글(깔끔한 번역 같지 않아요.)보다 저는 블랑카님의 해설이 더 좋은 걸 어쩌라구요?^^

blanca 2012-12-06 09:33   좋아요 0 | URL
아, 팜므느와르님, 댓글 읽고 커닝햄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추신으로 덧붙였습니다.^^ 아, 번역이요! 그러실 수도 있어요. 제가 읽은 이태동님의 번역은 참 좋았어요. 일단 표지가 이뻐서 낙찰했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