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결핍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타인의 빈곤, 고통, 애환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게 된다. 또 지나치게 결핍에 시달려도 닻을 내리고 정착할 곳이 없어 타인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공감과 연대는 구호로 만들어야 할 만큼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 가치다. 절로 우러나오기엔 우리의 시야가 너무 좁고 세계가 너무 바쁘고 걍팍하게 돌아간다.

 

여기 하나의 풍경이 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걸레질 하는 여자. 그 여자가 어디 한 구석이라도 먼지를 놓치지 않을까 감시하며 물 한잔을 권하지 않는 여자. 이 풍경은 주인과 노예로 계급신분제가 있었던 머나먼 과거 속의 것이 아니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 국가, 자본주의의 축배를 들었던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두 개의 극단은 더욱 자주 서로를 비껴간다.

 

 

 

 

이 책의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발칙한 발상을 한다. 그녀는 백인이고 중상류층에 속해 있는 저널리스트다. 그녀에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워킹 푸어들의 생활상은 주변 세계에서 풍경으로라도 자주 떠오르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다. 고급 음식점에서 잡지의 기사 꼭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그녀가 직접 워킹푸어들의 세계로 입수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녀가 철저한 실험과체험을 중시하는 과학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엉뚱하고 가당찮게 느껴지는 출발이었다. 인위적으로 빈곤해지기로 인위적으로 피곤해지기로 결심하는 모습은 또 하나의 오만이자 독선으로 비쳐지는 면도 있다. 하지만 여하튼 따라가 보자. 그녀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이것은 감정적인 동정이나 박애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정말 그렇게 일정 자본금 없이 노동시장에서 몸으로 벌어 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가능성 타진이다. 날로 높아가는 집세, 물가, 생각보다 비탄력적인 임금, 미국의 복지정책 개정으로 인한 일정 기간 보조금 수급 후 의무 취업 정책하에서, 산다는 것은 가능할까?

 

그녀의 저임금노동자 체험 생활 그 자체는 점차 진정성을 얻어 가는 것 같다. 식당의 웨이트리스, 호텔 청소부, 청소 용역 업체의 가정집 청소부, 요양 병원의 영양 보조원, 월마트의 판매원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취업 이력은 점차 다양한 굴곡을 그려간다. 시간당 6달러에서 7달러를 벌어 그 수입의 50프로 이상을 집세로 지불하면서도 모텔의 장기투숙 등 주거는 안정되지 못하고 식사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사먹는 정크 푸드들로 점차 채워진다. 벌어서 먹고 근근히 살아나가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취업 때마다 통과해야 하는 번거로운 약물검사 절차, 일터에서의 고용주들의 대리인들의 숨막히는 감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가는 일은 하나의 잠재적인 범주자로 간주되는 일이었다. 청소 용역 업체에서 파견나간 으리으리한 대저책에서 핏빛 같은 녹물로 더러워진 샤워실의 대리석 벽의 이음새를 말끔히 청소해 달라는 주인 앞에서 그녀가 차마 할 수 없었던 되뇌었던 이야기는 가슴으로 와 닿는다.

 

"당신의 대리석 벽이 피를 흘리는 게 아닙니다. 저것은 전 세계의 노동자 계급, 즉 대리석을 캐 나른 노동자들, 당신이 아끼는 페르시아산 카펫을 눈이 멀 때까지 짠 사람들, 당신이 가을을 주제로 아름답게 꾸며 놓은 식탁 위의 사과를 수확한 사람들, 쇠못을 만들기 위해 강철을 제련한 사람들, 트럭을 운전한 사람들,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집을 청소하려고 허리를 쪼그리고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흘리는 피입니다." 

-p.129

 

이 르포르타주는 70년 전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세계를 취재한 조지 오웰의 것과 만난다. 두 개의 풍경은 시간과 장소의 격차를 무색케 할 정도로 닮아 있다. 가진 자들의 호화로운 세계, 중산층의 그럴 듯한 생활을 지탱하기 위하여 그 아래에서 허우적 대는 빈곤층들의 고난과 처절한 생활상은 외피만 조금씩 갈아 입을 뿐 끈질기게 반복된다.

 

 

 

현대적인 대도시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뜨거운 지하굴 안에서 접시를 닦으며 보내야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중략> 그의 일은 노예적이고 기술이 없다. 그는 딱 살아 있을 만큼을 보수로 받는다. 그의 유일한 휴일은 해고다.
-p.152

 

 

이 불결하고 작은 식기실을 둘러보면서 우리들과 저 식당 사이에 양날개 문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재미있었다. 식당에는 깨끗한 식탁보, 꽃병, 거울, 금박 처마 장식, 아기 천사 그림 등 온갖 화려함을 누리는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불과 몇 자 떨어진 이 곳에서 우리는 혐오스럽도록 불결했다.
-p.88

 

 

'앎'이라는 것은 때로 대안이 없는 공허함으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이 둘은, 그리고 이 둘이 알게 된 사실을 읽게 된 우리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죄책감. 부책감. 남의 아이를 돌보기 위하여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방치해야 하고 남의 음식을 서빙하고 남이 사고자 하는 쇼핑 품목을 배치하게 위하여 정작 자신들의 욕구는 돌보지 못해 아예 마비되어 버린 사람들. <노동의 배신>의 바버라는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나의 선택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고 화려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거리는 더 까마득하게 멀어져버린 것만 같은 지금의 무력감 속에서 어떤 결론도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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