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이 깨면 도무지 쉽게 다시 잠들지 못한다. 친구 카카오톡의 대문에서 "나이가 들었나, 새벽에 깬다"라는  메시지를 읽고 난 후였다. 새벽에 밀려오는 생각들은 대체로 다 시리다. 온갖 불가능, 온갖 모호함, 온갖 상처.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어쩌면 아침이 밝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루에 나와 눈을 비비니 고작 새벽 네 시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 새벽에 아침을 하는 것도 티비를 보는 것도 왠지 다 어울리지 않는다. <위대한 유산>의 얼마 안 남은 부분을 읽기로 한다. 얼마 안 남았던 마지막 장. 다 읽어도 시계는 삼십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위대한 유산> 덕이다.

 

 

 

 

 

 

 

 

 

 

 

 

 

 

 

 

 

소년 핍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 대신 스무 살이나 많은 누나와 대장장이 매부 조가 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마치 이성과 신앙과 도덕이 명령하는 것을 거역한 채,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강력히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태어나기를 고집한 죄인인 것처럼 누나에게 취급당했다. -p.45

 

찰스 디킨스의 해학은 마치 스티븐 킹의 <스탠 바이 미>의 그 소년들의 등장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의 눈높이는 우리가 이미 잊어버렸던 유년의 그 한없이 순수하고 굴절된 시선까지 정확히 내려간다. 핍의 내면에서 오가는 모든 생각들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누나에게 '따끔이'로 체벌을 당하고 온갖 악담과 비난의 세례를 한 몸에 받아야 했던 핍. 아이의 세계는 너무나 작고 너무나 연약하다.

 

하지만 핍은 "그가 나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도록 허락해줬기 때문에" 매부 조만은 사랑했다.  매부 조는 소년 핍을 언제나 보호하고 지켜주려 한다.

 

인생에서 어느 하루가 빠져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인생의 진로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생각해 보라. 이 글을 읽는 그대 독자여,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라. 철과 금, 가시와 꽃으로 된 현재의 그 긴 쇠사슬이 당신에게 결코 묶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느 잊지 못할 중대한 날에 그 첫고리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p.135

 

핍에게 그 어느 하루는 교회 묘지에서 우연히 감옥선에서 탈출한 어느 죄수를 만나 그의 위협에 겁을 먹고 누나 몰래 먹을 것과 매부 조의 줄칼을 가져다 준 날이었다. 음울한 저택에서 홀로 은둔 생활을 하는 노파 미스 해비셤의 대저택에서 아름다운 소녀 에스텔라를 만나 사랑에 빠진 날이었다. 핍에게 에스텔라에 대한 연정은 자신의 초라한 현실에 대한 자각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은 어디에선가 갑자기 로또에라도 당첨이 되듯 익명의 자산가가 그에게 막대한 유산 상속을 약속하며 신사 수업을 받도록 하는 반전에서 더 뼈아픈 것이 된다. 신실하고 언제나 다정했던 매부 조는 갑자기 핍에게 숨기고 싶고 피하고 싶은 하나의 업보처럼 보인다. 거짓말 같은 기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확천금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주입된 환상이다. 핍이 늪지대의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입성하여 세속적인 열망, 물질욕, 낭비로 오염되며 전락하는 모습은 불길한 복선이다. 뻔한 도식이라고 하여도 찰스 디킨스의 손을 빌리면 한 소년의 성장기는 아름다운 리얼리즘을 획득하며 우리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소년기에서 청년기로의 진입로에는 숱한 왜곡과 오해와 환상의 관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생채기를 입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성장'은 뼈아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자신만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다. 조가 업보처럼 여기며 외면했던 아버지 같았던 매부 조가 나에게는 할머니였던 것 같다. 핍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행운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찰스 디킨스가 그려내는 주변인들은 해학적이고 정겹다. 매부의 삼촌, 탐욕스럽고 거만한 펌블추크 캐릭터도 ,핍의 상속 재산을 관리하는 변호사 재거스, 그의 사무원 월릭도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가진 조연들이다.

 

새벽 네 시, 내가 읽은 대목은 핍이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하나의 지향처럼 사랑했던 소녀(하지만 이제 그녀는 늙고 몰락했다) ,에스텔러와 미스 해비셤의 정원에서 다시 재회하는 장면이었다. 아름답고 눈물겨운 정경. 찰스 디킨스는 소설이 이야기의 사슬을 풀고 인간의 삶으로 흘러들어오는 물꼬를 튼다. 거기에서 나는 가슴이 저릿했다. 그 말고 다른 어떤 작가가 이런 말을 아름답고 도도했던 소녀기를 지나 남편의 학대와 폭력으로 고통받아 시들어가는 여인의 입에서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시련이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 더 강력한 교훈을 주어서, 그 시련의 가르침을 통해 내가 네 심정이 한때 어떠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지금 이순간에는 말이야. 그동안 나는 휘어지고 부서졌어. 하지만 희망컨대 좀 더 나은 모양으로 휘어지고 부서졌다고 생각해.

-p.426

 

'성장'은 '위대한 유산'은 "좀 더 나은 모양으로 휘어지고 부서지는 것"이리라. 아, 왜 어린 시절 아무도 소년, 소녀들에게 이러한 얘기를 해 주지 않았던 걸까. 가르침은 말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꼭 몸소 부서지고 휘어지며 울면서 체득되는 것인가 보다. 사람도, 삶도 그래서 언제나 조금씩은 서러운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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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2-15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다 읽으셨군요. 전 핍이 죽어가는자 앞에서 죽기전에 자신이 아는 비밀을-그러나 그가 정말 알고싶었을- 말해주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어요. 그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이 모두 다 제자리를 찾아가고 그에 맞게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blanca 2012-12-17 10:42   좋아요 1 | URL
이 책도 다락방님 페이퍼 보고 읽게 되었어요. 언젠가 읽으려고 했지만 결국 읽게 된 것은 님 덕분입니다.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특히 다락방님 언급하신 대목도 뭉클했고. 찰스 디킨스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요.

잘잘라 2012-12-16 0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든 책이든, ... 아니 아니 책 책 책! 책으로 꼭, 읽어봐야겠요. 그러고 싶어집니다. 블랑카님 글 읽으면요.

blanca 2012-12-17 10:43   좋아요 2 | URL
메리포핀스님, 꼭 읽어보세요. 무엇보다 참 재미있더라고요. 오히려 영화는 줄거리가 거의 기억이 안 나고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모습들만 어렴풋이 생각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