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결혼기념일을 잊어 버렸다. 지나고 나서야 둘 다 "맞다!" 했다. 한 술 더 떠 우리가 과연 4월 16일날 결혼을 했는지 19일날 했는지에 대한 헷갈림까지. 누구 한 명이 잊고 누구 한 명이 헷갈렸다면 우린 슬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이 동시에 더이상 기념일에 의의를 두지 않고 그런 지나침에 큰 서글픔을 동반하지 않게 된 것은 일순 달달한 연애와는 다른 삶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다독여 주기로, 이제는 그러한 사이클에 우리가 서서히 진입하게 된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에 대한 수긍이기도 했다.(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스물 세 살과 스물 여섯이 만나 스물 여덟과 서른 하나로 결혼하기까지 왜 많은 사연들이 없었을까. 남녀가 소개팅으로 만나 서로 호감을 느끼고 갑자기 세상 전체에 둘만 손을 잡고 걷는 듯한 그 두둥실한 판타지에서 점점 대화가 줄어들고 털 하나도 얄미운 순간도 있었을 테고 그러다 또 갑자기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처럼 느껴져 마침내 하나의 공동체로 들어서기까지. 그러나 어쨌든 해피엔딩은 언제나 많은 기억들을, 많은 고난들을 저만치 밀어내고 현재가 마치 태곳적 과거였던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아, 나도 이런 책을 읽었다. 너무 늦게.

 

 

연애소설. 참 오랜만이다. 이미 다 읽어버린 듯한 착각에 이제는 읽지 않게 된 장르. 첫장부터 큰 기대 없었다. 그냥, 한번쯤은 이런 책도 읽어보고 싶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결혼 적령기의 남녀. 각자의 너무나 다른 유년기가 복기된다. 남자는 가난하고 얼마쯤 비참하다. 여자는 중산층에서 자란 유별나지 않은 캐릭터. 정이현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남녀의 배경차. 둘은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디테일이 참 예쁘다. 정이현의 매력이기도 하다. 아, 그래, 경청. 남녀 관계를 이러한 구도로 설명하는 시선은 참 신선하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누구나 들어주는 사람에 고프다.

 

어떤 관계에서든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은 있다. 연인들은 필연적으로 역할을 선택해야 한다. 굿 스피커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굿 리스너가 될 것인가. 말할 것인가, 들을 것인가. 던질 것인가, 받을 것인가. 그들이 서로에게 매혹된 원인은 , 각각 상대방이 아주 훌륭한 청자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p.114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경청하게 된다. 상대방의 입에서 나오는 그 어떤 이야기도 그 나름으로 멋진 서사다. 그것이 과장이나 망상일지라도. 그 언어들이 구성하는 세계에서 상대는 독보적인 존재다.  내가 가미한 멋대로의 환상과 겹쳐져 우리는 어쩌면 가장 비현실적인 '너'를 내 나름으로 재구성해서 껴안고자 하는 헛된 시도를 '사랑'이라 명명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아주 담담하다. 남녀가 만나 불타오르다 식는 그 파고가 롤러코스터의 그것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아주 당연하게 얌전하게 납득할 수 있게 현실과 환상이 만나 어떻게 그 환상이 사그라드는지 지극히 현실적으로 읊조린다. 남녀는 권태를 느끼고 결혼 앞에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다 원거리에서 주춤 주춤 이별을 준비한다. 연애 소설의 독자인 나로서는 다시 재결합했으면 하는, 지극히 당연한 소망 앞에서 움찔했지만 그렇게 쉽게 해피엔딩이 아닌 기만을 던져 주지는 않는다. 똑똑한 이야기. 우리가 지척에서 당면했던 정말 그럴 법했던 이야기.

 

아무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사랑을 지속하는 데에 실패했으나 어쨌거나 이별을 위한 연착륙에는 실패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했다. 비행기 동체도 부서지지 않았고 크게 다친 사람도 없다고,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다면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대도 충분히 의미 있는 비행이었다는 것도.

-p.208

 

이별의 연착륙. 울며 불며 매달리고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고 절규하지 않아도 싫증나서 겸연쩍은 이별을 했다고 해도 이 지구에서 타인을 만나 잠시 온기를 쬐었다는 것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회고해도 역시나 근사한 의미 있는 일이다.

 

다른 곳에서 발생해 잠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p.209

 

이 대목에서 소설가 김연수가 떠올랐다. 그의 화법과 그의 시선과 묘하게 겹친다.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순간! 모든 만남은 그것이 스쳐갔던 것일지라도 하나의 기적이다. 잘 만나고 잘 헤어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섭섭하기도 하고 공감가기도 하고. 아, 이런 결말의 연애는 남의 것일지라도 언제 들어도 가슴 한 켠이 뻥 뚫리는 것같다. 아줌마는 언제나 아가씨가 아줌마가 되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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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1-2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기념일을 두분 다 잊다니요? 게다가 날짜가 헛갈리다니 ㅜㅜ
너무 우울해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가끔 서로 처음 만나 호감을 느끼던 그때를 생각하면 사는 일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올 해는 특별한 결혼기념일을 계획해보시면 어떨까요? ㅎㅎ

blanca 2013-01-22 11:07   좋아요 0 | URL
ㅋㅋ 안 그래도 저희 너무하다 했어요. 그래서 그 작년에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표시해 놓고 나름 즐겁게 보냈답니다. 올해도 또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네요. 꿈섬님 말씀처럼 올해는 더 특별하게 보낼 이벤트를 찾아 봐야겠습니다.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