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니 '사람'보다 '상황'의 힘이 때로 더 힘을 발휘하게 되는구나, 싶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도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리는 언행을 할 것이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 앞에서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내 손 안에 쥔 것들, 내가 지향하는 것들이 때로 너무 허무하게 느껴진다. 저렇게 늙고 싶지 않다,는 모습도 어느새 내 안에 들어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듦'과 '성숙'은 동의어가 아니다.
장 아메리는 '늙어감에 대하여' 어떤 미화나 위안의 비늘도 가차없이 벗겨낸다. 드러난 속살은 서글프다. 결국 그가 이야기하는 '늙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미화될 수 없는 무기력함과 쪼그라듦을 향한 잔인한 노정이다. '성숙'도 '달관'도 다 헛소리다. 세상은 노인 앞에서 등을 돌린다. 그는 그 누구도 감히 발설하지 못했던 잔인한 진실들을 가감없이 내뱉는다. 말라 비틀어져도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그 뒤에 읽는 이들은 '삶의 찰나'들을 즈려 밟으리라 결심하지만 원경에서도 근경에서도 너무 초라해져 버린 삶의 풍경 앞에서 일순 아연해진다. 모두가 극명한 진실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과장일지라도 거짓말일지라도 생은 긍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생의 전진은 '나이듦'과 떨어져 이야기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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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금은 가벼워 보이는 듯한 제목의 중편집을 통해 무라카미 류를 처음 만났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한없이 어여쁜 제목에 기대어 그를 만나볼까 하며 인터넷 서평을 이르집다 멈칫했다. 그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작가가 아닌 듯하다는 인상. 제목처럼 아름답고 투명한 작품들은 아니라는 평. 하루키와 같은 성을 가진 그와는 그렇게 멀어졌다, 다시 만났다.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이다. 섣불리 그를 만났다면 섣불리 멀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오랜만에 아껴 읽을 만한 이야기들을 만나 일부러 천천히 갔다.
쉰네 살에 이혼한 여자는 마트나 백화점의 식품 매장 시식 코너에서 일한다. 그녀는 생계를 걱정하다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갖춘 남자와 재혼하기로 하고 결혼 상담소에 등록하여 나이든 남자들과 선을 본다. 물론 성공하지 못한다. 업체에서 선별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파티 참석차 간 호텔에서 우연히 위로가 필요한 젊은 남자에게 얼그레이를 권하며 그와 일회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무언가를 그녀에게 남기고 간다. 미련을 잘라내는 일. 그리고 그것은 진심을 다해서 해야 한다는. 전남편과의 재회에서 그녀는 그와 보낸 긴 세월의 친밀감을 인정하지만 자신과는 다름 사람임을 절절하게 인식하고 깨끗한 이별을 한다. 미련들이 밀려나간 자리에서 그녀는 더 삶을 성실하고 충만하게 살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이라는 이야기는 몇 번이나 멈추지 않고는 읽어낼 수가 없을 정도로 묵직하다. 작은 출판사에서 해고당하고 아직 대학 등록금을 대야 할 아들이 있는 인도 시게오라는 남자의 그 노숙자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한때는 소설가를 꿈꾸었던 그가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공사 현장의 차량안전요원 일을 하며 내일의 생계를 걱정하는 모습은 그 누구도 불편감을 느끼지 않고는 읽어내기 힘든 상황이다. 아무도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 그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그 앞에 나타난 중학교 동창생. 한때는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나누고 이야기했던 그들의 추억은 노숙자가 되어 병든 몸으로 나타난 그 친구 앞에서 무색해진다. 인도 시게오가 그렇게나 두려워했던 바로 그 노숙자가 되어버린 친구. 친구는 이혼해서 떠나버린 어머니가 남기고 간 반지를 돌려주는 일을 부탁하며 둘은 그 여정을 동행한다. 노숙자 냄새를 지우려 싸구려 여자 향수를 뿌리고 버스 안에서 오줌을 싸 버리는 그 친구를 부축하며 인도 시게오는 마침내 삼십 년을 떨어져 있었던 모자를 상봉하는 데 손을 보태게 된다. 그런 드라마틱한 경험 뒤에도 그는 여전히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임시직을 전전하고 일자리를 잃은 아내는 여전히 구직중이다. 하지만 어머니 옆에서 죽게 된 그 친구와의 만남은 무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것의 실체를 지척에서 목격하지만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되려 삶의 의지를 되찾게 된다. 모든 불안정한 것들, 두려워했던 것들이 물러나고 남은 것은 생의 긍정이었다. 친구는 가엾고 서글픈 삶을 살았지만 마지막에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학창 시절의 친구에게서 위로를 받으며 생을 마감하고 인도 시게오는 그 친구의 마지막 나들이에 동행함으로써 그렇게나 끄달리던 두려워했던 것들에서 놓여난다.
이밖에도 겉도는 남편 대신 반려견에 기대었던 그녀가 반려견의 죽음을 함께 하며 남편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 퇴직 후에 캠핑카를 사서 아내와 자유로운 은퇴 이후의 삶을 꿈꾸었다 그것이 깨어진 마당에서 가족 간의 진정한 소통, 독립에 대하여 숙고하게 되는 전직 세일즈맨, 어린 시절 해녀 할머니와의 추억들과 늘그막의 사랑의 실패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게 되는 전직 트럭 운전사의 뒤늦은 성장. 그들은 모두 사회에서 때로는 함께 지내던 배우자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마침내 스스로를 들여다 보고 잊었던 것들, 놓쳤던 것들 앞에 자연스럽게 당도하게 되며 단순한 쇠락이 아닌 또 하나의 성장의 전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미래상이다.
그러니 이들과 비슷한 연배의 작가가 하는 이야기에 기대고 싶다. 분명 지나가고 남는 것들이 있다는 믿음. '나이듦'이 반드시 '상실의 과정'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 이러한 위로들이 어쩌면 와글와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캐릭터들의 일상을 통해 이야기되는 과정은 참으로 따스하다.
어젯밤에 '이동진의 빨간 책방'의 '대성당' 편을 마침내 다 들었다. 결국 사람 사이의 소통은 아무리 어렵고 미망일지라도 끊임없이 포기되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에서 만나는 작가들 앞에 서는 것이 좋다. 너무 순진한 믿음이라고 해도 이미 태어나 만나고 사랑하고 이야기하며 살게 된 마당에서 '절망'과 '체념' 주변만을 서성거리고 싶지는 않다.
작지만 분명 뭔가 있는, 위로가 되는 이야기 앞에서는 진부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지 않다. 위로는 위안은 언제 받아도 넘치지 않으니까. 이야기마다 따스한 마실 것들을 나열하는 작가의 섬세함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