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눈발이 흩날렸다. 자의가 아닌 상황과 타의에 의해 하는 이사는 얼마쯤 서러웠다. 그리고 무심코 보게 된 인터넷 기사에서 당신의 부음을 전해들었다. 2011년 1월 22일.
박완서 작가의 죽음이 훑고 지난 간 4년의 시간 후, 당신의 고즈넉하고 단아한 문체를 닮은 맏딸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 현재의 자신을 둘러싼 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노작가가 세상과 작별하기 이전, 이후, 그리고 딸의 삶이 잘 버무려져 있다. 딸이 바라보는 작가는 평범하고 엽엽한 가정주부로서의 삶과 전후 시대의 질곡과 여인의 신산한 삶들을 섬세한 문장으로 갈무리한 위업 사이의 어느 지점에 가 닿아 있다. 그것은 평범한 모녀 관계에서 조금 더 나아간 일종의 경외감이 자아낸 거리. 익숙하지 않은 그 간극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아이를 훌쩍 키워내고 갑자기 등단하게 된 작가의 원고를 직접 들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여고생의 풍경이 그려진다. 어머니의 마지막, 그렇게나 완벽하고 단단해 보이던 여인이 이제 마침표를 찍기 위에 풀썩 주저앉은 자리는 의외로 슬프고 비극적이지만 않았기에 안심이 되었다. 이제 딸들은 작고 약해진 어머니를 마음껏 사랑하고 어루만지며 아쉬움과 회한을 달랜다. 그리고 어느 새벽, 이삿짐을 기다리며 몸을 뒤채며 내가 보내던 그 신새벽, 나의 첫아이의 태교의 지문을 주었던 다감하면서도 엄격할 것 같던 소설가 할머니는 생의 소임을 다하고 훌쩍 사라져간다.
작가들이 태어남과 길러짐의 모호한 지점에 서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로맹가리의 이야기처럼 어머니를 이 세상에서 잊혀지지 않게 하려는 특별한 소명의식 때문인지 유달리 어머니와의 추억과 석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에서 기억에 각인처럼 남은 몇 작품들.
수전 손택의 외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에 대해 남긴 기록은 살아 있는 지성으로서의 그녀의 신화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하고 작아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모습에 대한 아들의 시선은 절절하다. 가장 명료하고 가장 현명하고 가장 세상과 강하게 밀착되어 있던 그녀의 이지러짐은 그래서 더더욱 슬프고 또 애끓는다. 자신에게 닥친 병조차 학문적으로 해석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그 해답을 구하려 했던 그녀의 시도들은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 그녀의 저작들, 그녀의 삶과 지근거리라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녀가 없어져 버린 거리에서 아들은 정작 했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되짚으며 자책한다. 그 누군들 이러한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참 신기하게도 이 흑백 사진 속 어머니의 옆모습에서 나는 친정 엄마의 미소를 발견했다. 엄마가 젊었을 때에도 이런 옆모습, 이러한 느낌이었다. 잘 웃지 않아서 미소로 들어가는 관문의 엄마의 모습은 언제나 수줍었다. 종군기자인 아들이 고백하는 어머니와의 내밀한 순간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것이 지는 지점에서는 너무나 눈물겨워 한번에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이야기. 군데 군데 삽입된 흑백사진들이 가두어 놓은 찰나들은 도저히 시간의 결 속에 고여 있는 것들로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어머니는 25년 간이나 정신병으로 아들을 보살펴 주지 못했다. 생의 마지막 즈음에서는 말 그대로 무너진다.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노숙인처럼 입성이 추레해진 이제는 도저히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늙고 병든 여자 앞에서 또 그녀의 죽음 앞에서 그가 정신이 명료한, 젊은, 온전한 엄마를 되찾기 위해 엄마의 요리 레시피를 찾아 그녀의 그 따스했던 부엌을 다시 복원해 낸다. 애도와 추모의 과정은 한 인간의 성숙의 여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 고백은 뼈아픈 것이지만 한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탈피와 성장의 노래이기도 하다.
나이들어 노망난 여자와 힘차고 빛이 났던 여자를 글쓰기로 합쳐 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는 아니 에르노의 어머니에 대한 연가는 사실 모든 어머니에 대한 글쓰기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젊고 여자의 향기가 바래지 않았던 젊은 엄마의 품 안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걷고 뛰고 자라나서 마침내 우리보다 더 작아지고 약해지고 혼미해진 늙은 여인의 슬픈 뒷모습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는 과제로 다가간다. '그녀'라는 3인칭은 애써 그녀를 객관화하고 그녀와 나와의 거리감을 만들면서 동시에 좁히려는 그 헛된 시도의 응축일런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의 어머니는 아니 에르노만의 것이 아니라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화장실에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를 들고 들어갔는데 맞춤하게도 그 안에 저자의 어머니 박완서의 에세이집 <세상에 예쁜 것>이 꽂혀 있었다. 묘한 기분. 딸의 글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커다란 아쉬움, 회한 대신 어떤 충족된 애착, 존경심, 애정이 느껴져 부러웠다. 마지막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 속에서도 지나친 고통이나 쇠락을 떨구지 않고 가 뒤에 남은 이들의 부책감을 줄여준 노작가의 단정한 모습이 그의 작품 같아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그러고 보면 이별도 만남 만큼이나 관계에 있어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 맞잡은 손을 놓을 때 비로소 '나'와 '당신'의 관계는 완결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