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늘빵 > [진중권의 상상] <2>상상력과 시멘트

2007. 6. 5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6/h2007060417364786330.htm


선거철 공약, 거꾸로 '향수'대신 앞으로 '비전' 보고 싶다

[진중권의 상상] <2>상상력과 시멘트

기술을 넘어 예술로 가야 할 정보화 시대에 정치권은 표를 얻으려 대중의 향수 자극
토건 마인드엔 능하나 안보이는 상상력 약해…청계천과 선유도공원 인공-자연미 대비돼


청계천

선유도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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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돼지 수난극

정치권에서는 ‘경부운하’를 둘러싸고 말이 많은 모양이다. 선거와 맞물리면서, 그것은 이미 냉철한 경제학적 논제가 아니라 뜨거운 정치적 쟁점이 되어버렸다. ‘침로상실’이라는 말이 있다.

폭풍우 속에서 배는 설사 항로가 틀렸더라도 계속 직진을 해야 침몰을 면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경부운하를 가장 큰 정책으로 내세운 후보는, 설사 그게 타당성이 없음을 스스로 안다 할지라도 제 정치적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끝까지 그것을 주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인이 갖춰야 할 미덕 중의 하나는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만드는 것. 어차피 선거란 대중 앞에 허황된 약속을 늘어놓는 세리머니다. 당선된 후 그 허위과장 광고를 모조리 실현하려 들면 어떻게 될까? 나라 절단 난다.

그리하여 이명박씨 역시 7% 성장, 4만 달러, 7대 강국의 약속을 공약(空約)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운하 판다는 약속만은 꼭 지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왜? 그 분야만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테니까.

선거철을 맞아 정치권에서는 미래의 비전을 내놓기 바쁘다. 그렇게 제출된 기획들은 하나 같이 복고풍. ‘카리스마 가진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전 국민이 삽질하면 선진국 된다’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한 마디로 국가발주의 건설사업으로 경기를 부양하여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하겠다는 얘기다. 덧붙여지는 게 있다면, 기껏해야 법인세 깎아주겠다는 정도. 상상력의 부족으로 인해 미래의 비전을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고도성장기에 대한 향수로 때우는 셈이다.

●탈(脫)물질화와 재(再)물질화

한국은 이미 산업이후(post-industrial)의 정보사회로 진입했다. 과거의 산업사회는 물질의 육중함을 갖고 있었다. 가령 정유, 화학의 파이프라인은 산업사회의 혈관계통이며 불도저, 크레인, 공작기계 등은 산업사회의 근골계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보사회에 들어오면 세계는 무게를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정보사회의 혈관계통은 사이버 공간의 네트워크이며, 그것의 근골계통은 키보드, 마우스, 스캐너와 같은 입력기다. 정보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에는 물질성이 거의 없다.

빌 게이츠가 생산하는 상품은 원칙적으로 무게가 없다. 전자의 배열은 무한히 복제해도 닳지를 않고, 그 복제가 원본보다 질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음악, 게임, 사진, 만화, 동영상, 아이템, 소프트웨어 등 ‘정보’라는 허깨비를 다운로드 하느라 사람들은 현실의 돈을 지불한다. 10년 쓸 핸드폰을 2년만 쓰고 버릴 때, 소비자들은 상품의 물질적 속성보다 상품의 기호적 가치에 더 많은 돈을 쓴다. 그 무게 없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디자인과 브랜드다.

물론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육중한 유조선은 필요하다. 그리하여 최근엔 다시 재(再)물질화를 얘기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다시 등장한 물질은 산업사회 시절의 육중한 물질이 아니라 IT, BT, NT와 결합한 새로운 물질이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선박의 몸체를 만드는 중공업이 아니다. 가치는 새로운 콘셉트, 세련된 디자인, 첨단 IT의 결합에서 창출된다. 과거에 선진국은 기계를 만들어 후진국에 팔았으나, 이제는 기계를 디자인만 하고 생산은 다른 나라로 넘기고 있다.

●기능과 기술과 예술

소비의 기호화, 생산의 정신화, 상품의 탈(脫)물질화. 정보사회의 생산력은 상상력에서 나온다. ‘블루오션’이니 ‘레드오션’이니 하는 말도 이와 관련이 있다. 레드오션은 이미 있는 욕구를 누가 싼 값에 만족시키느냐의 경쟁이다. 반면 블루오션은 아직 없는 욕구를 누가 먼저 상상해내느냐의 경쟁이다. 예를 들어 ‘워크맨’을 만들자 대중은 비로소 집이 아닌 거리에서 음악이 듣고 싶어졌고, 핸드폰에 카메라를 달자 대중들은 전에 없던 새로운 욕망을 갖게 됐다.

몇몇 분야만 제외하고 한국의 기술은 아직 이미 존재하는 기술에 몇 가지 기능을 첨가한 게 대부분.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됐다”는 얘기는, 한국이 아직 일본의 전략을 배우지 못한 사이, 중국은 한국의 전략을 넘겨받았음을 의미한다.

한국이 넘지 못하는 문턱은 바로 선진국의 창의적 기술이다. 기능에서 기술로, 거기서 예술로 나아가야 한다. 아티스트의 상상력, 엔지니어의 기술력, 인문학자의 콘텐츠로 이루어진 삼각 컨소시엄. 이것이 미래의 생산 형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기술을 넘어 예술로 가야 할 시대에 아직 기능에 집착하는 게 한국의 분위기다. 가령 황우석 박사의 젓가락 기술에 보냈던 거국적 환호를 생각해 보라. 기술이란 모름지기 재연 가능해야 한다.

즉 언제, 어디서, 누가 하더라도 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어야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쇠젓가락 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라면,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능이다. 과거에 한국은 기능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그렇다고 당시 한국의 기술이 세계 최고였던가?

●주체에서 기획으로

과거에는 인간을 ‘주체’라 불렀다. 주체란 ‘이미 있는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하지만 미래에 인간은 ‘기획’이 될 것이다. 기획으로서 인간은 ‘아직 없는 세계’를 앞으로(pro) 던지는(ject) 이를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대전환을 위한 준비다. 하지만 미래로 나가는 문턱에서 정치권은 눈을 뒤로(retro) 던진다(ject). 대중의 향수를 자극해 표를 얻기 위해서다. 하지만 과거로 던지는 시선은 전망(prospect)이 아니라 회고(retrospect)일 뿐이다. ‘747’(7% 성장, 4만 달러, 7대 강국)은 40년 묵은 노후기종이다.

‘불도저’가 너무 낡았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측근 중의 하나는 그를 ‘컴도저’라 고쳐 불렀다. ‘컴퓨터 세탁’이라 써 붙인다고 세탁업이 IT산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의 낙후성은 물론 이 후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을 짜는 브레인의 한계일 터. 아무리 생각해도 운하 판다고 국토를 뜯어 고치기 전에 그 브레인부터 손보는 게 조국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겠다. 뇌의 이식에는 발달한 대한민국 BT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게다. 모자라는 상상력을 시멘트로 때울 수는 없다.

●청계천과 선유도

‘문화’라고 하면 삽 들고 건물부터 지으려 한다. 전국 지자체에 그렇게 지은 문화관들, 대부분 1년 내내 텅 비어 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을 짓는 데에는 능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기획력은 없다는 얘기다. 이 모두가 산업화시절의 토건 마인드가 낳은 비효율이다.

이를 닮아서 그런가? 대한민국의 인터넷 역시 망은 거미줄처럼 깔려 있으되, 그 안에서 제대로 된 콘텐츠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이 IT의 강국이라 하나, 소비의 강국일 뿐 아직 생산의 강국은 아니다. ‘기획’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두 가지 예가 있다.

먼저 청계천 복원사업. 이 사업은 낡은 패러다임의 연장에 불과하다. 온통 시멘트로 바른 인공하천은 역사복원, 생태복원과는 관계가 없는 거대한 유원지를 이룬다. (이 시장의 업적은 소프트웨어적인 것, 가령 교통체계개편에서 찾을 수 있다.) 외국에서 복원사업을 이렇게 한다면 두고두고 비난을 받을 것이나, 유적을 훼손하고 물줄기를 역류시켜도 한국에서는 외려 ‘업적’으로 칭송받는다.

왜 그럴까? 시민들까지도 토건 마인드를 갖고 있는데다가, 서울에 워낙 숨 돌릴 공간이 없기 때문일 게다.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선유도 공원. 별 기대 없이 우연히 들렀던 그곳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원래 그곳은 정수장이 있던 곳. 불도저로 밀지 않고도 그 인공의 구조물을 아기자기한 자연으로 바꿔놓았다.

청계천이 자연을 밀어버리고 거기에 인공을 갖다 놓았다면, 선유도 공원은 인공마저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것을 자연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하여 선유도 공원에 가면 구석구석에서 설계자의 창의적 아이디어들과 마주치는 즐거움을 갖게 된다.

토건과 기획은 서로 다른 미감으로 실현되는 법. 청계천과 선유도를 둘러보면, 토건 마인드와 기획 마인드의 확연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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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진중권의 상상] <1>돼지 수난극

2007. 5. 29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5/h2007052817245284320.htm

한국사회, 엽기성으로 현대예술을 능가하다

[진중권의 상상] <1>돼지 수난극

시민들이 '퍼포먼스'라 부른 아기돼지 능지처참
미술관의 돼지 사체보다 황당한 '감각의 테러'
비난하는 사람들도 사형제 잔혹성은 의식 못해
우리사회 폭력성·전근대성 보여준 '문화 아이콘'


다미엔 허스트의 <돼지>

프랜시스 베이컨의 <책형>

요셉 보이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회화를 설명할 것인가>

트럭 한 대가 시청 앞을 지난다. 짐칸에 두 명의 노인이 알몸으로 서 있다. 둘 사이에는 거대한 나무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는 뻘건 색으로 ‘멸공통일’이라 적혀 있다.

생방송 중에 바지를 내린 젊은 아이들의 치기도 아니고, 대책 없이 보수적인 머리 위에 허옇게 센 머리카락을 입은 노인들이 반공의 이념을 위해 성스런 십자가를 들고 국부를 드러낸다. 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가? 이 사건이 한국의 행위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좌절감을 안겨 준 모양이다.

“도대체 한국에서는 예술을 할 수 없어.” 44라는 작가의 푸념이다. 사회 자체가 워낙 엽기적이라서, 예술가들의 상상력으로는 그 황당함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 아름다움으로 감동을 주는 고전예술과 달리, 현대예술은 새로움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주려 한다. 그런데 한국은 현실 자체가 워낙 그로테스크해서, 예술가들이 연출하는 인위적 충격으로는 도대체 사람들을 자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느 나라에서 반공과 누드와 할렐루야를 합쳐 하나의 별자리를 그린단 말인가?

얼마 전 누드-반공-할렐루야를 능가하는 수준 높은(?) 사건이 있었다. 군부대 이전에 항의하는 이천 시민들이 서울 한 복판에서 새끼 돼지의 사지를 찢었단다.

흔히 이를 ‘능지처참’이라고들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거열형’(車裂刑)이라 불러야 한단다. 물론 동물을 잔혹하게 학대하는 이상한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하지만 벌건 대낮에, 시장과 의원이 참석한 공식적 자리에서, 평범한 시민들의 손으로 이런 엽기를 ‘퍼포먼스’라고 버젓이 저지르는 나라가 또 있을까?

●동물 사체의 오브제

유감스럽게도 돼지를 작품(?)의 소재로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6년에 영국의 작가 다미엔 허스트는 죽은 돼지를 두 쪽으로 잘라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들어 있는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그는 이렇게 죽은 동물들을 통째로, 혹은 슬라이스로 쳐서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곤 한다. 그 첫 시도가 <살아있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인데, 이 심오한 형이상학적 제목의 실체는 오스트리아에서 잡은 타이거 상어를 포름알데히드로 채운 유리 용기에 담아 놓은 것이다.

마르셀 뒤샹이 1917년에 변기를 미술관에 들여놓은 이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자격을 얻게 되었다. 옷걸이, 자전거 바퀴, 세제 박스, 통조림 깡통 등 이런 식으로 졸지에 작품이 된 사물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허스트의 오브제는 특별히 도발적이다. 왜? 온갖 것을 재료로 사용하는 예술에서도 동물의 사체를 재료로 쓰는 것은 꺼려왔으나, 그는 ‘생명의 경외’라는 전통적 가치로 인해 터부시되어온 그 일을 저질러 버렸기 때문이다.

더 잔혹한 것도 있다. <엄마와 아기>(1993)라는 작품에서 그는 어미 소와 송아지를 각각 절반으로 절단해 포름알데히드에 담가 놓았다. 뭘 말하려는 걸까?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이 삶과 죽음과 성을 담고 있다고들 하는데, 솔직히 센세이셔널리즘을 넘어서는 철학 같은 것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동물을 학대하는 병적(morbid) 취향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 20세기 후반 예술의 ‘아이콘’으로서 생존 작가들 중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이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감각의 테러

가련한 아기 돼지는 분노한 시민들의 손에 사지가 찢긴 채 아스팔트 바닥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잔혹한 장면을 담은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가 된 채로 네트 위를 떠돌았다. 하지만 붉은 색을 머금은 분홍색 고기 덩어리는 흐릿한 모자이크 상자 뒤에 숨어서도 이미 충분히 참혹해 보인다. 이 역시 예술사에서 처음 보는 장면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책형>(1944). 짐승의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고기 덩어리가 매질당해 십자가에 걸린 예수의 몸처럼 축 늘어져 있다.

‘현대예술’이라 하면 피카소나 칸딘스키를 떠올리던 당시 관객들에게 베이컨의 작품은 참을 수 없는 시각적 테러였을 것이다. 왜 그는 고기 덩어리를 난자하는 잔혹극을 연출했을까? 관객의 “신경세포 위에 직접 작용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데카르트 이후 서구인들은 자신을 ‘정신’으로 착각해 왔다. 하지만 감각의 폭력을 당하면 자신을 신과 같은 정신적 존재로 생각하던 인간들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한 마리의 짐승임을 깨닫게 된다.

두뇌로 올라가지 않고 신체로 내려와 감각을 자극할 때, 이미지는 시각적 구조물이 아니라 촉각적 자극이 된다. 베이컨은 신경세포에 가하는 이 자극을 ‘회화의 폭력’이라 불렀다. 그의 그림처럼, 사지가 떨어져 나간 채 아스팔트 위를 나뒹구는 새끼 돼지의 몸뚱이는 시각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촉각적 폭력의 주체가 된다. 그것은 시민들의 신경세포를 난타했다. 그들의 분노는 양식을 파괴하는 이 잔혹극이 자신들의 감각을 폭행했다는 느낌에서 나온다.

●죽은 동물의 퍼포먼스

이천 시민들은 새끼 돼지 잔혹극을 ‘퍼포먼스’라 불렀다. 동물을 퍼포먼스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63년에 백남준은 독일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피가 흐르는 소머리를 전시한 바 있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회화를 설명할 것인가>(1965)라는 퍼포먼스에서 요셉 보이스는 회칠을 한 얼굴로 죽은 토끼를 가슴에 끌어안고, 웅얼거리는 짐승의 언어로 몇 시간에 걸쳐 토끼에게 회화론을 강의했다. 인간과 동물의 소통을 회복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하지만 허스트와 베이컨과 보이스를 다 합쳐도 이천 시민들의 퍼포먼스를 따라가지 못한다. 죽은 돼지를 사용한 허스트와 달리 그들은 산 돼지를 사용했고, 화폭 위에서 폭력을 행사한 베이컨과 달리 현실의 공간에서 돼지를 난자했으며, 소통을 회복하려 한 보이스와 달리 인간과 동물 사이에 있어야 할 최소한의 연민마저 파괴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원리가 한국에서는 차라리 일상의 질서에 속한다. 그리하여 이름 없는 이천 시민들의 전위정신이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작가들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대로에서 산 동물을 도살하는 습속의 ‘전근대성’. 군부대의 이전으로 입을 이해의 손실을 타산하는 삭막한 ‘근대성’,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예술로 승화시키는 ‘탈근대성.’ 이 세 요소로 짜여진 별자리는 그 동안 퍼포먼스의 제왕으로 군림해왔던 ‘누드-반공-할렐루야’의 엽기를 가볍게 능가한다. 이 사건은 아마도 21세기 복잡한 한국 사회의 단층을 보여주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문명화 과정

양식(良識) 있는 시민들은 이 몰취미를 “야만적”이라 불렀다. 문명화 과정은 공개처형이든, 공개도살이든 잔혹성의 연출을 공공의 영역에서 감추어 버린다. 잔혹극을 포기한 인성은 이른바 ‘취미’(taste)의 섬세함을 갖게 된다. 그런데 현대예술은 어떤가? 문명화를 거슬러 취미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 한다. 왜 그럴까? 이미 확립된 질서 너머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다. 취미가 없었던 문명화 ‘이전’과 취미를 포기하는 문명화 ‘이후’가 언뜻 비슷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둘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돼지 도살 퍼포먼스의 잔인성을 비난한다. 그들의 말대로 이 퍼포먼스는 문명화에 대한 야만적 테러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정작 사형제도 자체의 잔혹성은 의식하지 못할 게다. 잔혹한 범죄의 범인이 잡힐 때마다, 인터넷 공간은 17세기의 공개처형장이 되어 온갖 끔찍한 봉건적 처형방법을 제안하는 아우성으로 가득 찬다. 돼지도살 퍼포먼스가 그저 고립된 예에 불과할까? 혹시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에 널리 깔려있는 이 잠재적 폭력성의 단편적 드러남이 아닐까?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고 돼지는 희생되었다. 같은 이유에서 십자가에 달려 고기 덩어리로 생을 마감했던 한 사내의 말이 생각난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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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하고 요약본을 읽게 하는 수능의 논술은 사과맛 비타민 알약…책에 질려버린 친구 딸과 7살 꼬마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나, 당분간 책 안 읽을 거예요.”

지난주 수능고사를 친 친구 딸에게 이런 황당한 말을 들었다. 내가 전화해서 시험공부 하느라 애썼다, 이제부터 잠도 실컷 자고 책도 실컷 봐라, 했더니 톡 쏘듯 한 말이다. 나만 보면 무슨 책이 재밌냐고 묻는 이 아이는 평소 책을 많이 읽고 글도 잘 써 논술에 자신 있어 했다. 논술학원 선생님들도 이름만 똑바로 쓰면 무조건 된다고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논술 반영률이 높은 수시에서 줄줄이 낙방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렇지, 시험에 떨어졌다고 왜 책을 안 보겠대?

“아줌마, 무슨 시험 보세요?”

오늘 그 친구네 집에 갔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거실 소파 위에 눈에 익은 붉은 표지의 <체 게바라 평전>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이 아주 가관이다. 갈피마다 각가지 색깔의 포스티잇이 붙어 있고 군데군데 접은 페이지에는 형광펜으로 “★★★★★ 반드시 외울 것”이라고 써 있었다. 밑줄도 총천연색으로 쳐 있었다.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책이 교과서나 참고서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외우고 분석하며 읽어야 하는 건가? 친구 말로는 요즘 논술 공부는 그렇게 한다니, 나라도 이렇게 했다간 책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사라지고 말겠다.


△ 요즘에는 논술을 조기 준비하느라 초등학생에게까지 니체를 가르친다고 한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까. 한 대안학교에서 학생 세 명이 한 권의 만화책을 함께 보고 있다. (사진 / 한겨레 김태형 기자)

아이의 책장을 보고는 더 놀랐다. 루소의 <에밀>과 스피노자, 데카르트 사상 요약 정리본, <폭풍의 언덕> 등 문학작품의 요약본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런 사상, 철학서를 논술 필독서로 정한 분들도 다 생각이 있겠지만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대학 전공서적에 가까운 책들을 읽을 시간도 사고의 여유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시험에 난다니 학원에서 요약해놓은 자료라도 공부할 수밖에.

더구나 문학작품의 요약본이라니? 문학작품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사과 한 알을 오감으로 충분히 음미하는 과정과 같다고 생각한다. 먹기 전에는 사과의 모양과 색깔과 향기를, 한입 베어 물었을 때는 새콤달콤한 맛과 아삭 씹히는 감촉까지를 고스란히 느끼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반면, 요약본이란 이 소중한 감정들은 무시한 채 그저 사과를 비타민C의 조달처로만 여기며 사과맛 비타민 알약을 먹는 것과 같다고 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학작품은 절대로 요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 그게 논술하고 얽혀 있어 시험을 보려면 줄거리라도 알아야 한다니 차마 요약본 보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속쓰리다. 아무튼 이렇게 정작 사과는 구경도 못하고 지겹게 사과맛 비타민 정제만 먹어야 했던 아이들에게 책이란 그저 논술을 잘 보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몇 달 전 여의도공원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6, 7살 정도 된 꼬마가 날 한참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아줌마, 무슨 시험 보세요?”

“아닌데. 왜?”

“시험도 안 보면서 왜 책을 읽어요?”

“재미있으니까 읽지.”

“네? 책이 재미있어요? 난 하나도 재미없는데….”

“뭐라구?”

“엄마가 읽으라고 해서 읽는 거라구요. (작은 소리로) 이그 지겨워….”

이 아이 역시 책이 이끄는 이야기의 바다에 빠져보기도 전에 책이란 그저 학습의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요즘에는 그놈의 논술을 조기 준비하느라 초등학생들에게까지 니체를 가르치고 있다니 정말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 것인가. 논술고사의 원래 취지가 이런 게 절대로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나는 다행히(?) 논술이 없을 때 학창시절을 보낸 덕에 독서의 즐거움을 십분 누리며 지낼 수 있었다. 그때라고 입시경쟁이 치열하지 않았겠냐만, 생각해보면 친구들과 경쟁적으로 책을 읽던 여고시절 3년간이 내 독서생활의 든든한 토대를 만든 시기였던 것 같다.

그때는 얼마나 책을 이해하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느냐가 중요했다. 내 친구들은 ‘1년에 100권 읽기’라는 공동목표 아래 각자의 독서목록을 만들어서는 한 권씩 끝낼 때마다 지워나가는 재미로 살았다. 어느 겨울방학인가, 언니들이 사놓은 세계문학전집 20권을 다 읽고 친구들에게 한참을 뻐기던 기억도 생생하다. 하여간 그때 붙은 독서습관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별건 아니다. 하루 중 책 읽는 시간 확보하기(지금은 지하철 타고 다니는 1시간30분), 읽은 후 책 뒤나 일기장에 한 줄이라도 독후감 쓰기, 그리고 읽고 좋았던 책은 적극적으로 권하기다.

읽고 쓰기보다 재밌는 권하기

사실 책을 읽고 쓰는 것보다 권하는 게 훨씬 재미있다. 좋은 책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면 다른 도움을 준 것보다 기분 좋다. 책 읽기에 시큰둥한 사람을 살살 달래서 좋아할 만한 몇 권을 읽게 한 뒤, 그 사람에게 알고 보니 책도 재밌다는 얘기를 들으면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뿌듯했다.

이런 사람이 친구 딸이나 7살 꼬마에게 책에 대한 편견과 악담을 들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는지 모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미력하나마 이 친구들의 눈높이에 맞는 책을 열심히 권해서 책이란 맛있는 사과 자체이지 그저 몸에만 좋은 사과맛 알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일 거다. 그런 뜻에서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책 두 권을 종이비행기에 실어 보낸다.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청어람미디어), 요절한 사진작가의 아름다운 사진과 글이 늦가을 바람처럼 뼛속으로 스민다. 박경철의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리더스북), 이 외과의사, 주식에만 해박한 게 아니라 글도 무진장 잘 쓴다. 하느님이 한 사람에게 재능을 너무 몰아주신 것 같다.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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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12-0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울 애들은 공부도 뒷전, 시험 앞두고도 책 보고 낄낄~ 거리고 있는데...-.-;;(무.. 물론 별 재미없는 교양서적 말고 만화책이나 재미난 동화책 종류만 본다는...)

이매지 2006-12-05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서점에 갔더니 그런 책들 엄청 많더군요. (고전 요약본들) 그런거 보면서 저걸 본다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책에 질리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던.

라주미힌 2006-12-05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이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신거겠죠. :-)
크크.. 평가와 요약이라...
그래서 인간도 누군가에게 평가받으려 부단히 애쓰고, 몇 가지의 정체성으로 무자비하게 요약되나 봅니다.

해리포터7 2006-12-06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논술땜에 요약본들이 많더군요..1학년부터 읽어야 할책을 쭈욱 요약해놓았더군요.세상에나....책을 좋아하기까지는 부모의 노력도 많이 필요한거 같아요..부모가 얼만큼 책을 가까이 하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그속에서 아이들은 책은 좋은것이다.재미있는것이다라는걸 알게 되는것 같아요..
 

[한겨레] 미국 네오콘의 국가철학으로 대접받는 레오 스트라우스는 누구인가
정치는 종교와 도덕을 앞세운 ‘고귀한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

▣ 장정일/ 소설가

네오콘(neoconservative·신보수주의자)이 설명될 때마다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네오콘에게 그가 끼친 사상적 영향력이 얼마만큼 컸으면, 아예 ‘레오콘’이라고까지 부를까? 박성래의 <레오 스트라우스>(김영사, 2005)를 읽는 중에, 유럽에서 태어난 사탄의 아들 데미안이 미국 대통령의 양자로 입양되는 설정으로 발전됐던 걸작 오컬트 영화 <오멘>(The Oman) 시리즈가 저절로 떠올랐다.

니체를 접하고 혼란에 빠지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사람은 니체다. 이런 문제가 <도전! 골든벨> 같은 텔레비전 퀴즈 프로에 나오면 누구나 재깍 대답한다. 삶과 문화 전체가 1천년 넘도록 유일 인격신에게 지배돼본 경험이 없는 우리로서는 니체의 선언이 얼마만큼 충격적이었는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당대의 서구인들에게 그 선언은 또 한번의 지동설이나 같았을 것이다.

1899년, 독일에서 태어난 스트라우스는 20살 때 처음 니체를 접하고서 혼란에 빠졌다. “근대인은 성경의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성경의 도덕을 보존하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성경의 신앙이 없어지면 성경의 도덕도 사라져야 하며 근본적으로 다른 도덕이 수용되어야 한다.”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산다는 게 가능한지, 또 신이 사라진 세계의 새로운 도덕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한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치가 등극하기 직전,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가졌다는 바이마르공화국의 혼돈은 일부 지식인들에게 ‘신 없는 세계의 당연한 결과’로 비쳐졌다. 때문에 하이데거는 모든 근대 문명과 제도를 공동체와 인간 존재를 파괴하려는 위협으로 간주하고, 나치즘이 제시하는 절대국가를 반기게 된다. 일찍이 스트라우스는 그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민주주의·자유주의·상대주의 등의 지적 조류와 정치 운동 일체를 근대 이성이 불러온 허무주의와 퇴폐주의로 치부하면서, 나치 운동에 호의적이었던 스트라우스는 스승과 달리 나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박해를 받을 게 뻔한 그에게 외국행을 권유한 또 다른 선생이 훗날 나치의 법이론가가 된 카를 슈미트다. 이 사람은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행위가 곧 정치’라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또 국가의 최고 통치자는 매번의 고비마다 결단을 할 뿐이지 국가적 의제를 의론에 부쳐서는 안 된다는 ‘결단주의’를 주창했다. 당연하게도 히틀러의 제3제국은 의회를 가지지 않았다.

적은 누룩인가? 한알의 밀알인가? 1930년대 말부터 시카고대학에 자리잡은 그는 독일에서 품고 온 불씨를 전파한다. ‘고대 그리스 정치’를 이상으로 삼고서, 대중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훈련된 철학자들이 정치를 관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중은 ‘진리가 없다는 게 진리’라는 것을 견뎌내지 못하며, ‘정의란 강자의 이익’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이 혼란해지므로 정치는 항상 도덕과 종교를 앞세워야 한다. 스트라우스는 그것을 ‘고귀한 거짓말’이라고 가르쳤고, 네오콘들은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자국민을 속였다.

“그를 이해하는 건 우리에게도 충차대한 일”

흥미롭게도 이런 거짓말 책략은 마키아벨리의 가르침과 비슷하지만,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을 하수로 본다. 정치와 도덕을 분리한 공으로 마키아벨리는 근대 정치학의 비조로 추앙되지만, 정치가 도덕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네오콘이 부시의 재선 전략 가운데 하나로 낙태와 동성애를 부각시킨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히피이즘으로 대표되는 자유분방한 미국의 60년대가 스트라우시언을 낳았다. 애초부터 현실정치에 개입할 목적이 있긴 했지만, 그의 철학이 한동안 지성사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국가철학으로 승격된 것은, 윤리나 도덕 따위로 더 이상 체제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진 미국의 패권주의와 상관된다. 저자는 “스트라우스를 이해하는 것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는 사활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일”이라고 썼다. 놀랍지 않은가? 데리다도 푸코도 라캉도 이런 중차대성은 부여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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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노정권을 까대는 한겨레 기사를 읽다 짜증이 났다. 노 정권이 좌파답지 못하다, 는 식의 논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문제는 노정권이 좌파답지 못한 게 아니라 노정권을 좌파로 보는 것, 이다. 노정권은 좌파 정권이 아니라 좌파의 탈을 쓴 우파 신자유주의 정권이며 오늘 현실은 그 당연한 귀결이다. 흔히 말하는 ‘무능’이나 ‘미숙’은 본질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신문은 노정권을 두 눈 감고 밀던 시절이나 까대는 지금이나 변함없이 노정권을 좌파, 혹은 좌파적 정권이라고 전제한다. 이런 태도는 둘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일 것이다. 첫째는 우파 신자유주의 정권에 좌파의 탈을 씌워줘 결국 수많은 순진한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한 제 과오를 감추려는 비굴. 둘째는 여전히 좌가 뭔지 우가 뭔지 분간을 못하는 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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