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 이야기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숲으로 사냥을 하러 갔는데 옹달샘에 비친 자신의 몸에 반해 먹지도 않고 자기 얼굴만 보다 말라 죽은 후 한 떨기 수선화가 되었다. 19세기 말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는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차용해서 리비도의 대상이 자신이 되는 심리상태를 ‘나르시시즘’으로 명명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말이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자기 과시에 몰입하는 네티즌들의 원형 서사 같아 보인다. 나르키소스의 옹달샘이 자기도취의 거울이었다면 네티즌들에게 그것은 바로 ‘블로그’ 혹은 ‘미니홈피’쯤 될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멋진 자신의 얼굴을 옹달샘에 비추듯,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만든 멋진 콘텐츠를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올린다.

자신이 만든 특이하고 맛깔난 음식 정보를 블로그에 올리는 ‘가정주부들’. 디지털 카메라로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직접 찍어 미니 홈피에 올려놓은 ‘셀카족들’. 취미가 유사한 익명의 네티즌들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정보를 제공하며 즐거워하는 네티즌들. 이들이 우리 시대 인터넷 나르시시즘의 주인공들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의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익명의 네티즌들과 공유하길 원하는 이들은 자생적인 공간에서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고 유통, 소비하는 ‘생비자들’(prosumers)이다.

디지털 시대 콘텐츠 생비자들은 근대적, 물리적 공간에서의 자기도취자들과는 다른 욕망을 꿈꾼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사모님들’이나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며 주말에 고급 사교파티를 즐기는 ‘문화귀족들’의 자기과시는 오로지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다. 일반 서민들이 이들을 재수 없게 보는 것도 타인과의 소통과 공유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소통과 공유를 원칙으로 한다. 맛있는 해물 떡볶이, 내가 만든 가구, 알콩달콩한 우리가족 이야기, 이 모든 정보는 내가 잘났다는 과시이기에 앞서, 익명의 네티즌들과 소통의 기쁨을 공유하려는 소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해 만든 콘텐츠라 해도, 타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이른바 ‘댓글의 행복’이 없으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터넷에서 자기과시는 하나의 게임이다. 마치 고대 원시 부족사회에서 행해졌던 ‘포틀래취’(potlach) 선물 게임처럼,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도전과 응수를 위한 반복적인 게임이다. 내가 맛있는 ‘해물 떡볶이’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리면, 누군가가 더 맛있어 보이는 ‘치즈 떡볶이’로 응수하고, 다시 나는 최고로 맛있어 보이는 ‘카레 떡볶이’로 도전하는 게임 말이다. 게임의 장에 참여한 유저들의 도전과 응수는 배타적, 폐쇄적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개방적, 다방향적 나르시시즘이다. 오로지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다른 유저들과 소통하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내하는 것은 블로그가 주는 일상의 행복과 천상의 기쁨 때문이다.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한 ‘해피해피 라이프’라는 네티즌 참여 코너의 사례처럼, 아기자기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탈권위적이면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다.

물론 유저들이 만든 콘텐츠가 모두 사심 없는 것은 아니다. 네티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특정 연예인들을 조롱하고 희화화한다거나 아니면 스스로 연예인이 되고 싶어 댓글 자작극을 벌이는 현상들도 일어난다. 인터넷 자기과시 행동이 지나칠 경우 오직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려 인터넷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어떤 정치인들은 애초부터 진정한 정보 소통에는 관심이 없고, 의정활동을 위한 홍보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적인 정보들이나 미니홈피의 ‘디카놀이’ ‘일촌 놀이’들이 사이버 커뮤니티를 지극히 개인화하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려는 정치적 불감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자신을 뽐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직하고 열정적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자생적 콘텐츠는 무기력증에 빠진 가정주부들에게 생활의 활력소를 준다. 이제 부엌과 거실은 가사노동의 현장에서 풋풋하고 따근따근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스튜디오로 전환된다. 인터넷 나르시시즘이 가정주부들에게는 가사의 불평등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자기 최면술일 수도 있지만, 가사의 반란을 꿈꾸는 쾌락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

소비 자본주의 시대 상품화된 나르시시즘은 결핍에 대한 편집 증세를 보인다. ‘명품중독’과 같은 상품 나르시시즘의 욕구는 끝이 없다. 소통과 공유를 위한 인터넷 유저들의 대중 나르시시즘은 비록 폭력과 집착의 위험성을 갖고 있지만, 타인에 대한 에로스의 열망을 담고 있다. 자신이 만든 정보를 미치도록 소통하고 공유하고 싶은 에로스적 욕망, 물질적 보상은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인터넷 나르시시즘은 행복하다.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클레어 2006-11-09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관심있는 부분이라서 퍼갑니다. ^^

비로그인 2006-11-0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심리죠.저는 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그럴 수도 있다...로 가더군요.
 

‘취향이 당신을 규정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코드는 많다. 성별, 나이, 재산, 인종, 학력 등으로 우리는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한다. 이 과정에서 때론 오해와 편견이 끼어들어 예상치 못한 비극을 낳기도 한다.


인터넷엔 성별도 나이도 재산도 없다. 태국의 가난한 중년 남성이 스웨덴의 소녀 행세를 할 수도 있고, 영국의 중산층 청소년이 사우디아라비아 재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당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건 당신의 취향이다.



◇블로그, 취향의 전시장

‘미니홈피’로 유명한 싸이월드 회원수는 1천9백만명, 네이버 블로그는 7백만개에 달한다. 거미줄처럼 엮인 이 조그만 은하계는 각기 다른 취향의 박물관이다.

‘마이 디비디 리스트(www.mydvdlist.co.kr)’에선 자신이 소장중인 DVD나 CD의 목록을 등록할 수 있다. 회원들은 수천장에 달하는 소장 작품들을 제작사, 장르, 아티스트 등의 범주로 정리한다. 소장품 목록 정리뿐 아니라, 타인의 취향과 소장 작품을 엿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내 목록을 방문한 사람이 자취를 남기면, 난 그의 목록을 보고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살핀다. 그리고 그의 취향이 나와 얼마나 비슷한지를 가늠한다.

취향을 통한 정체성 규정은 영화나 음악 커뮤니티, 블로그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들 커뮤니티를 돌다보면 ‘지름 보고’라고 제목이 붙은 게시물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자신이 산 DVD, CD, 책, 전자 기기 등의 겉모습을 사진 찍어 게시판에 올리는 것이다. 대부분 본격적인 감상을 하기 전 포장을 뜯는 순간부터 차례로 사진을 찍기 때문에, 리뷰는 없는 경우가 많다. 어떤 물건을 샀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맛집 소개, 명품 위시 리스트도 흔히 볼 수 있는 게시물이다. 누구나 쉽게 들르거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독특하고 구하기 힘든 걸 소개한다.

취향의 은하계는 트랙백 기능을 통해 촘촘히 엮여진다. 확장된 형태의 리플기능이라 할 수 있는 트랙백을 통해 한 게시물에 대한 댓글을 다른 게시물에 달 수 있다. 예를 들어 ㄱ블로그에 ‘라디오스타’에 대한 감상문이 올라왔다면, 그에 대한 의견을 나의 블로그에 쓸 수 있는 기능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의 저서 ‘구별짓기-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에서 “문화 상품에도 독특한 논리를 가진 경제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속옷을 고르는 일, 미술관에 가는 일, 음식을 먹는 일 모두 계급적 구별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부유하는 네티즌들은 자신이 선택한 상품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드러낸다.

따라서 타인의 취향을 베끼면 고스란히 그 사람이 될 수 있다. 꼼꼼하고 세심한 IT기기 리뷰로 유명한 이일희씨(26)는 자신의 블로그가 통째로 도용당한 적이 있다. 모든 글, 심지어 배경까지 똑같이 도용한 뒤 이씨의 아이디만 지우고 자신의 것처럼 위장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이씨는 “그의 블로그를 보는 순간 마치 그 사람이 나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취향의 공동체는 가능한가

DVD 커뮤니티인 DVD프라임(www.dvdprime.dreamwiz.com)에는 ‘오픈 케이스’라는 게시판이 있다. 이용자들이 최근 구입한 DVD의 케이스 앞·뒷면과 디스크 안쪽의 모습, 속지까지 차례로 사진을 찍어 올려놓는 곳이다. 국내 출시판은 물론,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해외 특별판까지 종종 볼 수 있다.

표지의 오자 하나에까지 신경을 쓰는 컬렉터들의 특성상 이 갤러리는 DVD 구입 여부를 가늠하는 좋은 지침이 된다. 네티즌들은 리플을 통해 가격이 적당한지, 국내 출시 계획이 있는지, 디자인은 괜찮은지 정보를 교환한다. 이 커뮤니티에서 형성된 네티즌의 여론은 국내 DVD 출시사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정도다. 최근에는 일본영화 ‘배틀로얄’의 일본 특별판, ‘다빈치 코드’ 코드2 컴플리트 박스 사진이 올라왔다.

DVD2.0 한선희 편집장은 “매장에선 패키지를 뜯어볼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던 정보를 오픈 케이스 게시판에서 알 수 있다”며 “타인의 평가를 통해 자신의 구매가 적정했는지 알아보고, 향후 올바른 소비를 계획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블로그를 통해 낯선 타인과 친밀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도 있다. 3월 블로그를 개설한 화가 성유진씨(27)는 사람을 직접 대면했을 때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블로그에선 서슴없이 털어놓는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어둡고 우울한 감성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오프라인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듣기 싫어하지만, 온라인에선 오히려 비슷한 정서의 네티즌들이 성씨의 정서에 공감을 표하며 블로그에 올린 작품에 성원을 보내기도 한다. 성씨는 “블로깅을 하면서 사람을 얻고 대화가 가능하게 됐다”면서 “내 작업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아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커버스토리]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이버 과시족’
직장인 김모씨(26)는 외식할 때 카메라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한다. 멋진 분위기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게 생활화됐기 때문이다. 누구나 흔히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나 체인점 음식은 사진을 찍어 올리지 않는다. 조금은 특별하고, 남들과 다른 자신의 선택을 과시할 수 있는 음식만 찍는다. 주말에 좋은 식당을 찾아 음식을 먹고 일요일 저녁이면 간단한 작업을 거쳐 블로그에 올린다. 월요일이면 친구들은 김씨의 블로그를 찾아 “맛있겠다” “어디냐? 가격대를 가르쳐달라”고 리플을 단다. 김씨는 “음식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을 때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리플을 통해 나만의 가치있는 선택을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사진모델/홍보대행사 프레인에 근무하는 직원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안수희·김기진·강정숙·김정애·김승언씨.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신(神)에 의한 인정을 중시하던 중세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는 근대 철학의 자신감 넘치는 출발점이었다. 이어 프랑스 철학자 메느 드 비랑은 데카르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의욕적이다, 고로 존재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데카르트나 비랑의 선언을 패러디해 21세기 한국의 인터넷 세상을 묘사해보면 어떨까.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사이버 스페이스의 유목민들은 이 광대한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부모, 형제,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채 꺼내지 못한 얘기를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 저편의 네티즌에게 건넨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의 사생활을 미주알고주알 드러내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현대인들은 타인의 비루한 일상을 꼼꼼히 챙길 만큼 한가하지 않다.

남들과 똑같아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자신의 특별한 취향을 드러내기. 드러내는 사람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독특한 것이 결국은 사람의 이목을 끈다.

세계 최대의 동영상 공유 커뮤니티 유튜브는 1억건, 한국 최대인 판도라TV에는 85만건의 동영상이 하루에 올라온다. 그 중 네티즌의 이목을 끄는 건 극소수다. 오프라인에서 마주쳤다면 ‘미친놈’ 소릴 듣기 딱 좋은 황당한 퍼포먼스 정도가 돼야 네티즌들은 환호한다. 전세계를 돌며 우스꽝스러운 막춤을 춰서 인기를 얻은 미국 청년도 있고, 인기 가요에 맞춘 어설픈 립싱크로 인기인이 된 한국 청년도 있다.

블로그도 마찬가지다. 프로페셔널을 뺨치는 아마추어들이 예민하게 갈고 닦은 취향의 집적물을 전시한다. 방대한 DVD나 CD컬렉터들이 남들에게는 없는 리스트를 자부하면서 내밀고, 대중 앞에 내놓기 쑥스러워 골방에서 그려냈던 그림을 광활한 네트 갤러리에 전시한다.

유치하다고 해도 좋고, 어설프다고 해도 좋다. 다만 이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그 취향을 인정받아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고픈 당연한 욕망의 발로다. 공자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닌가”하고 말했다지만, 이는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돌려서 말한 데 불과하다. 새로운 세대의 족속들의 손에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가 쥐여졌다.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빠른 통신망을 탄 채, 우리는 우리를 드러냄으로써 타인의 시선을 갈망한다. 외로우니까, 나 하나만으로는 외로우니까.

〈글 백승찬·사진 권호욱·일러스트 김상민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노아 2006-11-09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히 잘 짚어냈네요.
 

 

현실이 버거울수록 민중의 두뇌를 마비시킬 초강력의 마취제가 더 필요해서일까? 불황으로 영세민의 생활이 망가지고 노동 불안화 정책으로 비정규직들이 대규모로 양산되는 이 시대에, 시청자로 하여금 현실의 애환을 잊고 화면 속의 볼거리에 몰입하게끔 만드는 사극들이 유달리 많이 나타난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 고대적인 갑옷·무기·의상도 ‘볼거리’지만 이들 영화는 무엇보다 보는 이의 ‘민족적 감수성’에 호소한다.

현실 속에서 입시 지옥과 대학들의 학비 인상, 취직난과 조기퇴직 압력, 비정규화와 부동산값 상승 등으로 늘 한숨만 쉬게 돼 있는 선남선녀들로 하여금 한나라, 당나라의 군대를 쳐부수는 등 ‘힘’을 과시해 온 고구려, 발해의 ‘기상’을 즐겨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껴 ‘위대한 과거’의 달콤한 꿈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문화전략인 셈이다. ‘북방 사극’들이 실제로 있었을 것 같지 않은 고구려인들의 단군 숭배 등을 연출시키면서 국수주의로 흘러간다는 비판은 이미 여러 번 제기됐는데, 사실 강경한 민족주의야말로 이 영화들의 호소력의 주된 기반인 듯하다. 민족주의란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존재해 온 다양한 종족, 국가들을 뭉뚱그려 ‘똑같은 우리 한민족’으로 묘사하여 이 ‘한민족’의 ‘기백’과 ‘힘’을 찬양하는 담론이다.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는만큼 현실에선 힘을 잃어가는 개개인들에게 바로 ‘우리 힘’의 숭배야말로 최적의 위로, 최강의 정신적 마취제가 되는 법이다.

시청자의 상당수가 사극의 내용을 ‘역사’로 받아들이기에, 신빙성이 있는 사료에 기록돼 있지 않은 장면들을 안방극장에 내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데 ‘북방 사극’들이 설령 무리한 추측을 ‘역사’로 둔갑시키지 않는다 해도 그 효과를 긍정하기 어렵다. 왜 그런가? ‘북방 사극’도 대다수의 일반 사극처럼 역사의 중심적 주인공으로 남성을 등장시키는데, ‘북방 사극’은 이 남성 주인공의 주된 활동 분야로 전쟁, 곧 살육을 만든다. ‘북방 사극’이 제공하는 ‘화려한 볼거리’란 살기 띤 눈을 부릅뜬 중무장한 남성들이 서로 찌르고 베고 토막 내는 아비규환의 장면들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남성다움이란 곧 폭력 능력이고 진정한 사나이란 바로 다른 진정한 사나이를 주검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사극을 통해 계속 가르친다면 과연 군사문화로부터 자유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우리가 일본의 군사주의적 경향을 비판하지만, ‘화려한 전투장면’이란 일본의 우파적 전쟁 긍정론에 못잖은 군사주의적 선전이 아닌가? 물론 사회통합 차원에서 역사 속의 영웅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남북을 더 가까워지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고구려사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한-중-일 사이의 이해 증진을 염두에 두어 중국에서 천태교관의 실천자로 이름을 높인 고구려인 파약 스님이나 일본인들에게 종이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고구려 화가 담징 스님을 사극의 영웅으로 만들지 않고, 동북아 국가 사이의 약육강식만을 꼭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중국 관변 쪽과 일본 우파의 군사주의적 민족주의를 미워하면서도 꼭 베껴야 하는 것인가?

역사는 칼을 찬 근육질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 어린이, 장애인, 종교인, 그리고 연개소문과 같은 착취계급의 우두머리들을 상대로 해서 투쟁했던 민중의 반란자들에게도 그들의 역사가 있다. 방송사가 남성 지배자의 칼만을 ‘우리의 위대한 과거’의 상징으로 만든다면 이것은 최악의 역사 왜곡이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노아 2006-10-10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박노자예요...

프레이야 2006-10-1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합니다..
 

 

창조계급, 부와 권력을 재편하다

김국현(IT평론가)   2006/09/19
현실의 물리적 제약에서 자유롭기에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는 네트워크 위의 이상계. 알고 보니 이상계란, 싸이와 블로그에 의하자면, 현실계를 흡수하고 미화하며 팽창하는 창조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 곳에 우리의 현실을 뱉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계에 삶을 담는 일을 ‘라이프 캐싱(Life Caching)’이라 한다. 현실계에서 '탈물질화'한 정보들은 이상의 대지에 기억의 은닉처(캐시, cache)를 만들어 놓고 있었던 것.

라이프 캐싱을 즐기는 세대, 제너레이션 C(Creativity, Content, Caching). 창조력을 지니고 컨텐츠를 만들어 이상계에 캐싱을 시도하는 세대를 뜻한다. 리차드 플로리다(Richard Florida)가 "The Rise of The Creative Class"라는 책에서 ‘창조 계급’이라는 말로 표현한 세대적 움직임과 결국은 같은 집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이름까지 생겨난 것 보면 분명히 특이할 만한 집단, 세대, 계급이 등장하고 있음을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웹2.0의 변화란 '디지털화된 프로슈머', 즉 '이상계에서 생산을 하는 소비자'의 등장에 있다. 지금까지 고객이란 소비자, 즉 수용자였다. 막말로 주는 대로 받는 이들이었던 것. 그러나 이제 생산성 소비자들이 지금까지 기득권들이 쥐고 있던 생산 권력을 해방시켜 간다.

현실계에서는 생산력을 개인이 지니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현실의 제조업을 개인이 시뮬레이션 하기는 힘든 것이다. 그래서 피드백 정도나 제공하는 프로슈머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상계라면 그곳의 가치는 개인이 생산할 수 있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컨텐츠의 완전 제조가 가능한 곳이 바로 이상계. 문자 정보를 넘어서 음악과 영화와 같은 본격적인 시청각형 예술 컨텐츠조차 개인이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까? 그 해답은 이상계의 본질 '디지털 네트워크'에 있다.

① 네트워크: 쌍방향 직접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상계 플랫폼의 완성
지금까지 우리는 가치의 분석과 창조를 교수, 기자, 컨설턴트와 같은 권위에 의존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1%의 창조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개 블로그에 올라 오는 포스팅 중에는 이들도 무릎을 꿇게 만들만한 촌철살인의 알짜 들이 등장하곤 한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모든 것 중 상위 1%의 창조물과 상위 1%의 창조자가 만들어 내는 모든 창조물 중 어느 것이 재미 있을까?

이상계를 배회하다 보면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중얼거리게 될 때가 있다. 이상계가 제공한 '쌍방향 직접 소통력'을 믿고 지금까지 재야에 묻혀 있던 엄청난 양의 가치들이 서로에게 직접 소통을 시작한 덕이다.

블로그란 그 소통력을 가능하게 한 대표적 '플랫폼' 중의 하나다. 플랫폼은 우리 행위의 틀이 된다. 게시판에서 사람들은 게시판에 맞는 행동을 한다. 익명의 댓글이 달리는 곳에는 그 분위기에 걸맞은 댓글이 달린다. 그리고 블로그에는 블로그에 맞는 포스팅이 올라 온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1%의 컨텐츠를 뽑아 내어 공개하고 싶게 만드는 구조가 완성된 것이고, 여기에 제네레이션 C의 첫 번째 배후가 있다.

② 디지털: 장난감이 아닌 창조의 도구, 가제트의 힘
우리는 적어도 한 두 개의 CPU를 늘 몸에 지니고 다닌다. 핸드폰의 MSM칩도 사실상 CPU이고, 디카, MP3, PDA, PMP 등 '어른들의 장난감'은 하나 같이 CPU를 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CPU의 도움을 받아 이상계를 위한 디지털 컨텐츠를 만들어 낸다.

물론 DSLR을 가졌다고 앙리 까르띠에 브레쏭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날마다의 사진을 암실이 아닌 컴퓨터 앞에서 편하게 연구하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사진 작가의 꿈을 키우게 되기도 한다. 디지털은 우리에게 가능성을 주는 것이다. 디지털은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하는 것이다.

대중화된 디지털 생산 도구는 이제 모두의 손에 쥐어졌다. 디지털 가제트는 의인화된 지름신 덕에 21세기의 문방사우라 불러도 좋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 '디지털의 힘'이 '네트워크의 힘'과 만나는 순간, 창조 공간으로서의 이상계, 그리고 그 가능성을 본 창조 계급, 제너레이션 C가 등장한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건전한 '승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공산품에 제조담당자 이름을 명기하곤 한다. 즉 뛰어난 기술로 제조를 담당한 명예를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담당자 본인에게는 큰 격려가 된다고 한다. 이름을 알리고 싶다. 튀고 싶다. 내 실력을 보여주고 싶다. 이런 일종의 현시욕은 강력한 '창조의 인센티브'가 된다.

내가 쓴 글이 포스팅되어 모두에게 읽히는 쾌감, 내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모두와 공유하는 쾌감은 다른 차원의 지적 쾌감으로 이어진다. 내가 만든 무엇이 세상에 소개되어 좋던 나쁘던 반응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창작의 동기 부여를 끊임없이 일으키는 것이다. 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타인의 경험에 공감하는 '체험'이 인간의 본능을 자극한 것이다.

싸이의 성공도, 플릭커(flickr.com)의 성공도 다 이 자극에 기인한다. 디카로 찍어 업로드한다는, 현상과 인화와 기다림이라는 현실의 제약이 제거된, 디지털 생산 활동의 네트워크화는 '이상계의 현실 흡수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의 아마추어 사진가는 과거의 프로 사진가 못지 않은 '양'의 사진을 찍어댄다. 2GB의 SD 메모리 카드가 꽉 찰 동안 DSLR은 필름 한 번 갈아 끼우지 않고 2000장의 사진을 연속적으로 찰칵거린다. 절대적인 양적 풍요 속에 우연히 프로급의 한 장 찍힐 수 있는 법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1%의 컨텐츠를 뽑아 내어 공개하고 싶게 만드는 구조'에 '디지털 문방사우의 가공할 생산 효율'이 결합된 것. 여기에 웹 2.0적 혁신의 비결이 있다.

최근 이 결합은 자본의 예술인 영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튜브(youtube.com)라는 구조 덕에 그리고 동영상 기능을 갖춘 디카와 핸드폰 덕에 누구라도 지금 당장 입봉할 수 있다. 물론 상업 영화의 스탭 들이 보기엔 웃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 주위의 오브제와 여러분 주위의 출연진만으로 영화를 촬영, '세계'를 향해 어필할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의 한가운데에 우리는 지금 서 있다.

스스로 방송 보도를 할 수도 있다. 부시 대통령이 스탠포드 대학 방문시 야유 받는 시위 동영상을 스탠포드 신입생이 유튜브에 업로드해 두 달 만에 10만 번 이상의 조회와 2천5백여 건의 댓글을 받았다. 이 곳에 하루에 올라 오는 영상은 4만 편 이상. 전세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방송이라면, 그리고 화제가 될 만한 영상물이라면, 그 누가 만들었건 지금 이상계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정보 생산 기득권 붕괴가 일어나는 신호다.

지금까지는 대규모 전달을 위한 장치와 이를 운영하기 위한 장치가 없으면 생산이란 힘든 일이었다. 정보 생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정보의 탈물질화가 가속화되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이제 의지만 있다면 그 주체의 대소에 상관 없이 최소한의 정보 생산력은 확보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최소한이라 하더라도 사건이 생길 수 있는 시작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개인과 소수에게는 꿈을 주는 자극이 된다.

음악은 또 어떠한가? 음악도 미디(MIDI)에 의한 신디사이저 음악 이래, QWERTY와 건반, 이 두 가지 키보드만 있으면, 그리고 Acid Pro와 같은 적절한 프로그램만 있으면 음악을 전공하지 않아도 샘플링을 따 비트를 짜고 작곡을 할 수 있다. 디지털의 힘에 의해 예술혼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음악에 곁들여, 아니 자신의 음악이 없더라도 입담만 있으면 자신의 토크쇼를 만들 수도 있다. 예전에는 잘 만든 토크쇼 기껏 열심히 녹음해 봐야, 짝궁이 들어 주면 행복했다. 그러나 이제는 '포드캐스팅'이라는 구조에 의해, 전세계 MP3플레이어들에게 구독될 수 있다. 그야말로 끼만 있다면 뜨는 것은 시간 문제인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창조 행위와 표현 행위가 실질 경제적 이익으로 돌아 오는 시대다. 창조 행위가 자신의 블로그에 담을 컨텐츠의 질을 높이는 행위로 이어진다면, 자신의 블로그의 조회수가 올라가고 페이지에 곁들인 광고 수입이 덩달아 올라 가기도 한다. 즉 다른 의미에서 자극이 될 경제적 동기를 부여하는 구조가 이상계에는 마련된 것이다.

내 블로그의 일정공간을 구글 ‘애드센스’와 같은 광고대행사에 광고판으로 제공하면, 내 블로그와 어울리는 광고가 수시로 바뀌며 게재되고, 수익이 적립된다. 즉 양질의 컨텐츠만 있으면 용돈 정도는 벌어 쓸 수 있다. 누구나 창조를 할 수 있고, 누구나 미디어가 될 수 있고, 이를 통해 누구나 꿈을 꾸고 또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곳, 그 곳이 이상계다.

'부와 권력의 재편'이 일어난다는 말 이외에 이 순환을 어찌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 사소한 징후에 오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장기간에 걸쳐 일어날 지금 문명사적 대전환의 첫 페이지에 서 있을 뿐이다. 물질 중심 사회에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와 권력의 재구성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