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르트'냐, '사회주의'냐?

때로는 온갖 통계로 무장한 책 한 권보다도 날카로운 통찰이 담긴 글 한 편이 더 인상에 남는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를 다 읽고 나서 한 5년 전 한 잡지에 실린 글을 떠올린 것도 이 때문이다. 요즘도 여전히 통찰이 담긴 칼럼으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김규항이 쓴 '요구르트'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의 핵심이 담긴 대목을 같이 읽어보자.
"불가리아의 장수 마을(요구르트 먹고 장수한다는 광고에 나온 그 마을)엔 더 이상 장수 노인들이 없다. 마을 묘지엔 1990년 즈음 세 해 동안 죽음 사람들의 묘로 그득하다. 마을 사람들의 얘기는 이렇다. '사회주의 시절엔 안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진 않았다. 소박하나마 집과 자동차도 나왔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노인들은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

김규항은 이 글의 결론을 불가리아 노인의 장수 비결은 '요구르트'가 아니라 '사회주의'라고 강조하며 맺는다. 과연 그런가?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온갖 사례로 가득하다. 그 사례의 대부분은 한국이 열심히 좇는 유럽, 미국에서 최근 수십 년간 연구된 것이다.

우선 '요구르트'와 '사회주의' 중 무엇이 장수 비결이었는지 살펴보자.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아마티야 센은 1960년과 1977년 사이에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3000달러 이하인 국가 100개를 대상으로 기대 수명이 얼마나 늘었는지 조사했다. 놀랍게도 사회주의 정부가 정권을 잡았던 10개국 가운데 9개국이 상위 25% 안에 들었다.

실제로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동독, 불가리아, 헝가리 같은 동유럽 국가는 기대 수명이 상당히 높았다. 이들 국가는 훨씬 잘 사는 몇몇 서유럽 국가와 비교해도 기대 수명이 오히려 더 높았다. 그러나 이들 국가의 기대 수명은 점점 감소하더니 1980년대 후반부터 서유럽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치를 기록하게 된다.

1970~80년대 동유럽 국가에서 부분적으로 시장에서의 '경쟁'을 도입한 시기였다. 1960년대까지 완만했던 사회 격차가 눈에 띄게 벌어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이런 '경쟁'을 도입하는데 주저했던 알바니아의 기대 수명이 꾸준히 늘어난 것은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방증이다.

이 동유럽 국가들은 1980년대 후반 갑작스럽게 몰락함으로써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극적인 증거를 보탰다. 이들 국가들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갑작스럽게 전환해야 했던 1989년부터 1995년, 말 그대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사망률이 치솟고, 기대 수명은 급격히 감소했다. 곳곳 마을 묘지는 "죽은 사람들의 묘로 그득했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는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282개 대도시를 비교한 연구 결과를 보면, 불평등한 도시일수록 사망률이 더 높았다. 미국과 비교했을 때 모든 면에서 복지 수준이 높은 캐나다도 이런 경향은 마찬가지였다. 캐나다의 도시를 비교해보면, 시장 소득 수준이 불평등할수록 사망률이 더 높았다. 역시 장수 비결은 '요구르트'가 아니라 '사회주의'였다.

김규항의 글에서 또 눈여겨봐야 할 키워드는 바로 '스트레스'이다. 왜 불평등할수록 기대 수명이 감소하고 사망률이 높은가? 얼른 생각하면 영양 섭취, 병원 접근 등이 열악해지면서 건강이 나빠지고, 이것이 기대 수명의 감소, 사망률 증가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캐나다, 스웨덴처럼 복지 수준이 높은 나라를 염두에 두면 다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바로 스트레스가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소득 격차가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주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사회 지위가 낮을수록 감당해야할 스트레스가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그 스트레스가 바로 기대 수명을 감소하고 사망률을 높이는 핵심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일단의 과학자는 짧은꼬리원숭이의 사회 지위가 이들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았다. 여러 집단에서 지위가 높은 원숭이만을 뽑아서 한 우리로 이동시켰다. 그 우리에서 위계가 생겼다. 어떤 원숭이는 계속 높은 지위를 유지했지만, 다른 원숭이는 낮은 지위로 추락했다. 영양 섭취 등 다른 조건은 똑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위계 서열이 낮아진 원숭이는 새로운 우리에서 지난 21개월 동안 동맥 경화로 죽을 확률이 5배나 높아지는 등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또 다른 원숭이를 대상으로 사회 지위에 따라 스트레스를 받을 때 발생하는 대표적인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수치를 측정했더니, 서열이 낮을수록 코르티솔을 더 많이 분비하고 있었다. 바로 스트레스가 문제였다.

인간 사회도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미국 흑인 남성은 1996년 평균 소득은 2만6522달러였으나, 기대 수명은 66.1년에 불과했다. 코스타리카 남성의 평균 소득은 고작 6410달러였으나, 기대 수명은 75년이나 되었다. 이 9년간의 수명 차이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 남성이 감수해야 할 낮은 사회 지위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설명하기 쉽지 않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요인은 이 뿐만이 아니다. 친구로부터 지지를 받은 이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심근경색을 앓은 후에도 생존할 확률이 3배나 높다. 인위적으로 감기 바이러스를 투입한 276명의 자원자 중 유독 바이러스에 저항성이 큰 사람은 바로 친구가 많은 이들이었다. 누구나 알듯이 외로운 삶은 스트레스를 부르고 결국 건강을 해친다.

이 책은 특별히 출생 전후를 포함한 생애 초기의 스트레스에 주목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임신 중 불안감을 느꼈던 어머니를 둔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정서․행동 장애가 더 많이 나타났다. 또 어린 시절 가정불화를 경험하면서 남다른 스트레스를 받았던 이들은 질병에 더 취약했다. 이런 경고를 접하면 아득해진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해결책을 찾을 것인가?

절망할 필요는 없다. 진단이 정확하면 처방이 가능하다. 사회 지위가 문제라면 좀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면 된다. 외로움이 문제라면 우애로 맺어진 공동체를 복원하면 된다. 비교적 평등한 개인들이 서로 위하는 공동체에서 아이들이 고통을 겪을 일은 많지 않다. 지금보다 훨씬 헐벗은 그 때 그 시절에는 설사 부모 없는 아이라도 마을 공동체가 품었다.

'요구르트'냐, '사회주의'냐,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뀔 수 있다. '웰빙'이냐, '평등'이냐?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른들은 왜 그래?


처음 촛불시위에 다녀오던 날 “쌍절곤을 가져올 걸 그랬나봐”라고 말해 일행을 유쾌하게 만든 김건(12살 먹은 내 아들)이 며칠 전 밥을 먹다 말했다. “그런데 아빠. 어른들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았잖아.” “그랬지.” “그런데 자기들이 뽑아놓고 왜 이명박만 욕 해. 어른들은 왜 그래?” “그러게. 어른들은 왜 그럴까? 그런 말 하는 친구가 또 있니?” “응,  우리 반에도 여러 명.” “그래...”

촛불 시위와 광장의 열기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혹은 함께 생략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이명박 씨는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는 사실이다. 지각 있는 사람은 이런 경우, 말하자면 자신의 책임이 포함된 어떤 나쁜 일이 벌어졌을 경우 두 가지 행동을 동시에 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그 일에 대한 비판과 분노. 그러나 촛불시위와 광장에서 이명박에 대한 비판과 분노는 차고 넘치지만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자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위대한 시민”이니 “대중의 놀라운 창발성”이니 하는 입에 발린 아첨의 소리(혹은 광장을 지도해보려는 얕은 수작)나 지껄일 뿐이다.

이명박에게 투표하지 않았다고 해서 면책된다고 생각할 건 없다. 이명박 씨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주요한 원인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사실 5년 전 대선이었다면 이명박 씨는 당선될 수 있었을까? 당선은커녕 후보에서 중도 사퇴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BBK는 내 회사”라고 말하는 이명박 씨의 동영상을 보면서도 아랑곳없이 이명박을 찍었다. 이명박이 좋은 정치인이라 생각해서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뭔가 좀 짭짤하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참 더러운 이유였다.

한국인들은 대체 그 5년 동안 무슨 일을 당했기에 그 지경이 되었을까? 길게 말할 것 없이 노무현 정권이라는 ‘가짜 진보’ 정권에 신물이 나도록 당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노무현 정권은 정치적 민주화를 앞세운 일관되고 무리한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한국사회를 결딴냈다. 극소수의 부자들은 더욱 풍요로워졌지만 대다수 인민들은 삶이 더욱 고단해지고 미래가 불안정해졌다. 결국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이 모든 게 ‘진보정권, 좌파정권 때문’이라 되뇌며 오로지 경제 문제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그가 설사 도둑놈이라 해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이명박 당선의 가장 큰 공신은 노무현 정권이다. 달리 말하면 노무현 씨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모든 사람이다. 알다시피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에 투표한 사람의 범주는 매우 넓다. 노사모뿐 아니라 이른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거개가 ‘비판적 지지’의 이름으로 노무현을 찍었다. 당시 노무현에게 투표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던 것 같다. “현실적인 사회진보”나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아야” 따위 매혹적인 캐치프레이즈를 거부한다는 건 말이다. “개혁은 진보가 아니다, 문제는 민주화가 아니라 자본화”라는 말을 반복하던 내 주변에서도 여럿이 노무현에게 투표했다. 어쩌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에게 투표하는 일은 사회의식의 결핍이라기보다는 진정성의 과잉이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오히려 노무현 씨가 대통령이 되고 한참이 지나 ‘신자유주의 개혁 정권’의 정체가 충분히 드러난 후다. 자신의 판단과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사람을 나는 거의 찾아보지 못했다. 오로지 노무현 욕만 할 뿐이었다. 노무현이 나를 속인 것이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나서 변한 것이지 내가 잘못 한 건 없다는 얼굴을 한 사람들로만 가득했다. 만일 “내가 틀렸다. 노무현 정권이 진보적일 거라 기대를 한 내가 순진했다. 개혁은 역시 진보가 아니다.’고 말하는 사람이 절반만, 아니 절반의 절반만 되었어도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는 최소한의 견제와 균형을 가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성도 성찰도 없이 줄창 노무현 욕만 하는 사람들 속에서, 한나라당과 조중동 욕만 하면 다인 듯 행세하는 그들 속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은 알뜰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대다수의 인민들은 이명박이라는 ‘능력 있는 도둑’에게 몰려간 것이다.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오늘 광장의 열기를 폄훼하지 않는다. 광장의 한계를 고민하면서도 아이 손을 잡고 광장에 나간다. 이명박을 욕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며 그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길 바라는 건 너무나 정당하다. 그러나 이명박을 욕하고 그가 물러나길 바라는 일이 우리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과 성찰까지 대신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내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며 나 스스로가 작은 이명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를테면 ‘0교시 문제’ 등이 불거졌을 때 다들 “이명박이 애들 다 죽인다!”고 욕했지만 사실 이미 애들은 우리 손에 다 죽어가고 있지 않았는가? 이명박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공식화하려 했을 뿐이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4년 전 광장, 이른바 탄핵사태의 광장을 기억하는가? 노무현이 변했다며 욕하던 사람들이 노무현이  탄핵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임명하여 화려하게 부활시킨 광장 말이다. 그 덕에 이미 지지율이 바닥이던 노무현 정권은 단숨에 원기를 회복하여 남은 임기 내내 한층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나갈 수 있었다. 성찰이 없는 분노는 거대한 카타르시스일 뿐이다. 80만이 아니라 800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어른들은 왜 그래?”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주미힌 2008-06-24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자유주의에 투항했던 자신을 못보면.. 이명박2세, 3세는 계속 부활하겠지.
노무현이 부활하듯이.. (미친 노사모 새끼덜)

웽스북스 2008-06-24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네요
성찰이 없는 분노에 대한 문제는 언젠가 얘기했듯 공감이지요

저는 언젠가 링크했던 사과나무님의 글로 제 심정을 대신 표현합니다
90% 쯤은 동의하지만 그래도 억울한 10%는 어쩌란 말입니까 으흑

(뽑아놓고 왜그래? 라는 말에 난 안뽑았거든 이라고 항변하는 치사한 1인)

라주미힌 2008-06-24 01:39   좋아요 0 | URL
광장에 사람은 많은데 울림이 되게 공허해요 (태옆으로 돌아가는 기계적인 구호)... 마치 몰랐던 것인냥, 그것만 잡으면 되는 것인냥.. 떠드는 사람덜 보면 ㅡ..ㅡ;

니나 2008-06-2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들이 손에 든 피켓이 자신의 동네에 장애인학교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데도 역시나 쓰일 수 있다는게 문제겠죠.
 

우리 안의 대운하



- 386에게 보내는 편지

이명박 씨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통령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은 광우병 소 문제가 불거지기 훨씬 전부터, 대통령 선거 운동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미 그를 ‘명바기’라 부르며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삼고 희화화했다. 아이들 몇을 붙들고 왜 그리 이명박이 싫은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들의 표현은 다양했지만 ‘논리 이전의 혐오’라는 점에선 일치했다. 나는 아이들이 그들의 앞 세대는 가지지 못한 어떤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지금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은 93년생인데, 93년은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발한 해다. 아이들은 민주화 이후에 나고 자란 첫 세대인 것이다.

그 아이들의 부모가 이른바 386들이다. 그들은 아이들과는 정반대의 환경에서 나고 자랐다. 군사 파시즘 치하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민주주의의 실제에 대해선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배우거나 익힐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비민주적인, 전근대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습속을 익히며 자라야 했다. 그럼에도 군사 파시즘의 폭압이 20대의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들의 비민주적인 습속이 그들이 일사불란한 대열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습속은 군사 파시즘이 물러난 이후 그들을 무력하게 했다.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민들에 의해 붕괴하자 그들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그 붕괴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했고 낙심과 자괴감에 빠졌다. 그들은 일제히 역사를 접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90년대 이후, 30대가 된 그들은 두 가지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민주화에 대해선 여전히 단호하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대해선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군사 파시즘과 싸워 물리쳤던 추억은 소중하게 간직하면서도  민주화 이후 도래한 거대한 자본화의 흐름엔 타협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속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여전히 한국사회의 전 세대를 통틀어 가장 지적이고 정의 지향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낳고 키운 아이들이 바로 촛불을 든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 역시 두 가지 모습을 가진다. 그들은 한국의 다른 모든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주체적인 개인이며, 권리의식이 높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딱할 만큼 소비문화에 물들어 있고 삶에서 돈과 물질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자본의 감성을 보인다. 영화 <괴물>에서 송강호의 중학생 딸(고아성이 연기한)은 그 전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아이는 유행에 처진 핸드폰을 아빠나 쓰라며 던져버리지만 동시에 부당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놀랍도록 주체적이다.

그 아이들이 오늘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싸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들을 보며 한국 사회의 희망을 느낀다고 말한다. 물론 감동적인 광경임에 틀림없지만 현재로선 희망은 딱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절망이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휴대폰이나 운동화 엠피쓰리 따위에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10대 마케팅’을 벌이는 자들에게 저주를!) 사회는 지구상에 없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장래희망이 없거나 이렇게 많은 아이들의 장래희망이 연예인(은 아이들에게 자유롭고 안락한 삶의 전형이다)인 사회도 지구상에 없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자정이 넘도록 학원을 돌며 경쟁 기계로 키워지는 사회도 지구상에 없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이들은 이명박이 없는, 그러나 사회경제적으로는 좀 더 사악해진 사회에서 충직한 자본의 신민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불길한 예측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이들이 가진 절반의 절망은 전적으로 후천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 아이들의 미래는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하며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한국 사회의 미래는 다시한번 386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그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물론 그들 상당수는 이명박을 싫어하고 대운하를 반대하며 광우병 소에 분노하며 촛불을 든 아이들을 폄훼하는 조중동을 욕한다. 그러나 이명박을 싫어하고 대운하를 반대하며 광우병 소에 분노하고 조중동을 욕하면 정말 이명박을 반대하는 걸까?

아이들이 분노하는 0교시 문제니 고교서열화니 학교자율화니 하는 문제들을 보자. 그 문제들은 이명박이 시작한 게 아니다. 민주화 이후 좀 더 직접적으로는 구제금융 사태 이후 한국사회가 급격하게 신자유주의적 체제로 돌입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 문제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이미 기초를 쌓았고 이명박 정권에서 ‘노골화’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노골화한 부분을 떼어내 반대하는 것으로 이명박의 교육정책을 반대한다고 말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문제의 핵심은 노골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하는 가치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오늘 좋든 싫든 제 아이를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대열에 참여시키고 있다면 ‘이명박의 노골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명박 지지자’일 뿐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한다고 해서 이명박과 다르다고 생각할 건 없다. 미국산쇠고기 문제는 광우병이 염려되는 쇠고기를 국민에게 먹이려 한다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식 그리고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에 대한 입장의 문제다. 미국산쇠고기 문제는 돈이 제일의 가치이고 경제적 효율이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신자유주의 가치관에서 나온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른 농축산물 수입 문제에 FTA에 이마트 노동자 문제에 KTX 여성노동자 문제에 삼성노조운동 문제에 무심한 사람이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한다고 해서 이명박과 달라지는 건 아니다. 막말로 이명박 씨가 지금 야당 대표였다면 미국산 쇠고기를 찬성했을까?

경부대운하를 반대한다고 해서 다르다는 생각도 하지 말자. 오늘 한국의 양식 있는 사람들은 대개 대운하를 반대한다. 그러나 경부대운하를 반대하는 그들 대부분은 이미 제 안에 경부 대운하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파괴적인 대운하를 건설하고 있다. 밤늦은 시간 한국의 도시마다 길게 늘어선 학원 버스들, 생기를 잃은 낯빛으로 그 버스에 실려 가는 아이들. 그게 대운하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그 대열에 제 아이를 ‘아이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실어 보내는 사람이 경부대운하를 반대한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우리는 지금 가치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돈의 가치관과 사람의 가치관. 돈과 경제적 효율을 우선하는 가치관과 느리더라도 사람과 자연을 우선하는 가치관, 국가의 총경제(는 실은 지배계급의 경제다)를 중요시하는 가치관과 인민들의 경제를 중요시하는 가치관의 전쟁이다. 돈의 가치관의 정점에 이명박이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정점의 추한 외양에 거부감을 갖는다고 해서 우리가 사람의 가치관을 가지는 건 아니다. 아이들을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대열에 불편한 시늉으로라도 결국 동참하면서 이명박의 좀 더 노골적인 교육정책엔 분노하는 모습, 제 안에 더 큰 대운하를 뚫어놓고선 이명박의 대운하는 반대하는 가련한 모습이 다라면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은 없다.

한 호흡 멈추고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올바르기 때문에 정의를 좇기 위해서 고통과 손해를 감수하자는 게 아니다. 진정 더 잘살기 위해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생각을 바꾸자는 것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 따위 거짓말일랑 하지 말자. 다 내 욕망을 아이를 통해 구현하려는 것 아닌가? 행복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실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신통한 아이들, 삼성이니 에스케이니 하는 장사꾼들의 붉은 깃발과 국가주의적 선동에 태극기를 두르고 광장을 채우던 20대와는 전혀 다른, 오히려 사회현실을 고민하고 스스로 학습하고 연대하며 싸우던 부모 세대의 청년시절의 모습을 빼다 박은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댓글(4)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가치관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5-28 08:23 
    * 라주미힌님의 2008년 5월 28일 ‘김규항-우리 안의 대운하’ 페이퍼에서 발췌 * ‘이명박의 노골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명박 지지자’일 뿐이다. * 미국산쇠고기 문제는 광우병이 염려되는 쇠고기를 국민에게 먹이려 한다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식 그리고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에 대한 입장의 문제다. 미국산쇠고기 문제는 돈이 제일의 가치이고 경제적 효율이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신자유주의 가치관에서 나온 수많은
 
 
마립간 2008-05-28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 내용을 발췌 저의 서재로 옮깁니다.

Arch 2008-05-2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안의 대운하리즘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아, 이 아이들의 절반의 희망이 맘에 푹푹 잠기는군요.

승주나무 2008-05-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웍샵 하느라 고생했네..

니나 2008-05-28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제가 좋아하는 규항넷... 잠깐만 생각해봐도 우리안의 대운하는 엄청나게 넓디 넓은데...
 

정부가 멍청하면 국민이 똑똑해지는 법. 멍청한 정부 덕분에 온 국민이 거의 광우병 전문가가 되었다. 정부가 못 미더우니, 국민들이 스스로 학습하여 예방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뿐인가? 멍청한 정부 덕분에 국민들 전체가 국제협상의 전문가가 됐다. 정부가 한심하니, 국민들이 정부를 대신하여 재협상의 길을 찾고 있다.

광우병이란 사안에는 크게 위험평가, 위험관리, 위험소통의 세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그런데 정부의 태도는 어떤가? 위험평가에 관해서는 '광우병은 생각보다 위험한 병이 아니다', 위험관리에 관해서는 '미국을 못 믿으면 누구를 믿느냐', 위험소통에 관해서는 '촛불집회를 선동하는 불순세력을 처벌하고 무지한 국민을 계몽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중·고생들도 이게 멍청한 오답이라는 것을 안다. 정답은 '광우병의 위험성은 과학적으로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서는 철저한 안전관리가 필요하다', '그렇게 엄격한 검증을 걸쳐 수입된 쇠고기라도 국민들이 어디에 유의해서 먹어야 하는지 알려야 한다'는 것이리라. 초·중·고생도 아는 것을 왜 정부만 모를까?

보수언론은 정부보다는 약았다. 얼마 전만 해도 광우병의 위험을 경고하던 조중동이 대대적으로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을 홍보한다.

황당한 것은 열심히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떠드는 조선일보의 사내식당에 내 걸린 문구다. '우리 식당에서는 호주산 청정 쇠고기만 사용하오니 안심하고 드십시오.' 기사로 나가야 할 얘기를 왜 자기들 식당에만 걸어놓는 걸까?

듣자 하니 청와대에 사슴을 풀어놓았단다. 사슴 대신 광우병 걸린 소들을 풀어놓는 게 어떨까?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 소 잡아서 대통령과 장관, 여당의원들이 공개적으로 시식회를 여는 거다.

이 초엽기적인 몬도가네쇼는 태국의 악어쇼나 인도네시아의 뱀쇼를 제치고 머잖아 한국이 자랑하는 국제적 관광자원으로 발돋움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330133937&s_menu=사회

 

진보신당의 심상정 후보,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가 대운하 반대 정당대표회담을 제안했다. 각 당은 즉각 이 제안에 응해야 한다. 서울대 어느 교수는 "대운하 사업, 농담하는 줄 알았다"고 말한 바 있다. 나 역시 대운하 사업, 그저 선거 때에 으레 늘어놓는 공약(空約)일 줄 알았다. 그런데 대운하 공약 슬쩍 빼놓고 일단 총선을 치른 후, 거기서 얻은 과반수 의석으로 특별법 통과시키고 기어이 삽질을 하겠다는 게 이 정권의 계획인 것 같다.
  
  대운하 삽질
  
  대운하라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사업인지는 이제까지 나온 수많은 논의를 통해 분명해졌다고 본다. 대운하 반대론자들의 반론에 이제까지 찬성론자들은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은 적이 없다. 그 많다는 대운하 학자들은 다 어디 가고, 지금 남아서 반론을 펴는 것은 추부길, 서경석 두 목사뿐이다. 차르 정권 하의 괴승 라스푸틴이 그 영빨로 러시아를 망쳤듯이, 대한민국의 장래 역시 두 목사의 영빨로 망가질 모양이다.
  

▲ 귀부인들 가운데 있는 남자가 승려 라스푸틴이다. 러시아 짜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의 총애를 등에 업은 그는 러시아 국정에 깊이 개입했다. 사치와 방탕, 혼란으로 이어진 그의 국정 개입은 제정 러시아의 몰락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베를린 자유대학 박성조라는 분이 대운하를 찬성하고 나선 모양이다. 독일에도 국가보안법이 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을 때 이 분은 분명히 전공이 '정치학'이었다. 그런데 대운하 찬양하고 나설 때에는 이 분의 전공이 '산업경제학'이란다. 어느 쪽이 맞을까? 굳이 진실을 말하자면, 내가 자유대학 다닐 때 그 분은 그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라는 한적한 동네에서 애들 너댓 명 모아놓고 일본어 가르치고 있었다.
  
  대운하 전문가라는 박석순 교수, 손석희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냐 하면 배의 톤급을 좀 줄이는 거죠."
  
  그러니까 5000천 톤급 배에서 2500톤급, 거기서 다시 1250톤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대운하 건설되면 요트 띄우겠다더니, 정말 요트로 화물 나를 모양이다.
  
  이어서 한다는 얘기가 "한반도대운하는 물류보다는 수질개선 효과라든지 관광효과라든지 이게 크기 때문에…." 한 마디로 물류효과는 거의 없다는 얘기다.
  
  대운하의 실체를 보라
  
  배가 지나가는데 수질개선 효과가 있다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들어야 할까? 그것은 배가 안 다니는 해수욕장보다 배가 지나다니는 항구의 수질이 더 좋다는 얘기랑 똑같다. 하다못해 해수욕장에서도 바나나 보트 나가는 데는 수질이 더럽지 않던가. 그런데 이 분의 전공이 한나라당 대운하 환경자문단 소속이란다. 아마도 이 분은 배기가스로 호흡하고 휘발유를 마시고 사는 행성에 사는 외계인들을 위해 환경자문을 해주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이 전 정권을 '아마추어'라 비웃던 한나라당이 자랑하는 전문가의 수준이다. 게다가 관광효과? 지금 운하의 관광효과가 어떨지 보려면, 이미 파놓은 경인운하의 몰골을 보면 된다. 사진 몇 장 올릴 테니, 과연 저런 데로 관광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대답해 보라. 저것이 24Km 터널을 통과한 다음에 관광객들이 즐길 한반도의 풍광이다. 제 돈 내고 저 꼴 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 경인운하. ⓒ환경정의

  
▲ 경인운하 주변. ⓒ환경정의

  
▲ 경인운하 공사 현장. ⓒ환경정의

  수질개선이나 관광효과가 있다고 하자. 그것만으로 수지를 맞출 수 있을까? 사업 참여를 고려하는 기업들도 운하가 수익성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요구하는 게 운하와 연계된 개발권. 한 마디로 국민은 세금을 내고, 정부는 그 돈으로 환경 파괴해가며 건설업자 배나 불려주겠다는 것이다. 약속한 7% 성장을 하려면 역시 삽질 밖에 없다. 이게 2MB 짜리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최대치다.
  
  피라미드를 '대한민국 1%' 위한 묘소로 분양하자
  
  운하로 관광사업을 하겠다고 한다. 그러려면 차라리 피라미드를 짓자. 그게 더 합리적이다. 이집트 기제에 있는 대(大)피라미드의 세 배 크기로 짓는 거다. 기제의 것이 높이가 146미터라고 하니, MB 피라미드는 146×3 = 438미터. 벌판에 우뚝 솟은 삼각형의 구조물은 정말 장관일 것이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전망대까지 만드는 거다. 이거라면 세계 전역에서 관광객이 몰려오지 않을까?
  
  대운하 관광 프로젝트에는 박정희 생가 방문, LG 창업주 생가 방문 등의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도 피라미드 쪽이 훨씬 더 사업성이 높다. 피라미드 내부를 위대한 분들의 묘소로 꾸며서 분양하는 거다. 거기에 이승만 묘실, 박정희 묘실, 앞으로 돌아가실 전두환, 노태우의 묘실. 거기에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 총수의 묘실. 아마 타워 팰리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인기를 끌지 않을까?
  
  돌아가신 분들이 편히 영면하도록 피라미드의 묘실들과 청와대 사이에 핫라인을 개설하는 거다. 그리고 피라미드 주변은 아예 왕가의 계곡으로 꾸미자. 이 계곡의 묘소는 대한민국 1%, 그러니까 강남에 사는 공화국의 왕족들에게 분양하게 된다. 워낙 못 가진 것들과 경계 짓고 사는 것을 좋아하는 분들이니 돌아가셔서도 특별히 마련된 VIP 지구에서 영면을 취하시는 게 어떨까?
  
  대운하는 농담이 아니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4%대에 머물고 있는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것이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대운하 사업이나 도심의 고밀도 재개발 같은 삽질이 아니라, 미래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특히 R&D와 같은 데에 민간과 정부의 투자를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7% 성장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는 한 마디로 눈에 보이는 성장률을 위해 나라 경제에 뽕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잠재성장률이란 한 나라의 경제가 인플레이션 없이 성장할 수 있는 최대치라 들었다. 그것을 넘어서겠다는 것은 결국 물가를 올려서라도 성장을 하겠다는 얘기. 원자재 값의 상승이 아니더라도, 무리한 성장에는 필연적으로 물가상승이 따르고, 그것은 실질소득의 저하를 가져온다. 50개 품목의 가격통제를 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은 본질적 차원에서 물가는 올려놓고 현상적 차원에서 비난만은 피해가겠다는 얄팍한 제스처다.
  
  7% 성장의 약속으로 당선이 되었으니,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지 않으면 MB 정권은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동네 정책통인 이한구 의원이 실토한 것처럼 거기에 동원할 "정책수단이 고갈됐다." 법인세 인하는 이미 노무현 정권이 해보았던 것이고, 규제완화도 그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니 당장 가시적 효과를 내는 것은 거대하며 위대하신 삽질. 그래서 MB 정권은 전국을 삽질로 헤집어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뇌정권' 퇴진운동
  
  두뇌를 굴리지 않고 신체를 움직이는 게 이명박 무뇌 정권의 문제. 이명박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부도덕에 있는 게 아니다. 내각의 구성원들이 하나 같이 모자라 보인다는 게 문제다. 쓸데 없는 발언으로 환율시장이나 어지럽히는 강만수 재정부 장관. 믿음이 부족해서 복지가 안 된다는 복지부 장관. 생쥐 튀김이 몸에 좋다는 여성부 장관. 거기에 북한을 선제공격하겠다고 했다가 그런 적 없다고 빼는 국방부와 합참. 이건 내각이 아니라 봉숭아 학당이다.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과반을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니 대운하 특별법의 통과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국토와 환경은 우리만의 것도 아니고, 5년만 지나면 사라질 정권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이 보존했다가 자손 대대로 물려줘야 할 어떤 것이다. 자신의 정책적 무능을 덮기 위해 국토를 파괴하는 만행을 자행하려 든다면, 이명박 정권은 5년 내내 국민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국민들의 거센 퇴진운동을 백골단 따위로 막을 수 있을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08-05-17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 짱이에요~~~~~ ㅋㅋ 피라미드 묘실과 청와대의 핫라인!!

라주미힌 2008-05-1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알맹이 2008-05-19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완전 팬이에요~! 너무 속 시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