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티노의 아류인가 현세의 셰익스피어인가


<올드보이>

미국에서 개봉한다는 이유만으로 지난 한해 인구에 회자되었던 <올드보이>를 다시 불러낸다는 것이 새삼스럽기는 하다. 다만, 외지인들의 반응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숨은 비평의 논리가 흥미로워서라면 한번만 더 곱씹어보자. 지난 3월25일, LA와 뉴욕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예상했던 대로 칸영화제에서의 비평 논쟁을 재연하고 있다.

각 언론 매체들은 이른바 예술영화와 컬트영화, 작품성과 대중성, 내용과 스타일의 양분법에 입각한 자신들의 오랜 소신을 바탕으로 <올드보이>의 위치를 규정하느라 바쁘다. 예를 들면, “산낙지를 먹고, 망치로 사람 머리를 부수는 사내와 ‘아트’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라는 <뉴욕타임스>의 비평문 서두는 일찌감치 폭력 묘사, 선정적인 내용, 현란한 스타일로 가득한, 이라는 문구가 이어질 것임을 예상케 한다. 데이비드 린치식의 스타일지향주의적 B급영화가 일부 시네필의 지지를 받는 것조차 현 영화계의 망조라는 평은, <올드보이>가 타란티노의 후광을 등에 업은 모조품이라는 <LA위클리>의 리뷰에서 절정을 이룬다.

실상 <올드보이>의 미국 진출은 현실적으로 ‘타란티노’ 세계로의 진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란티노로 대변되는 스타일, 타란티노로 대변되는 아시안 컬트 영화팬층 혹은 그 비판가들로 구성된 취향의 전쟁장. 평소 아시아영화를 지지해온 비판적 언론, <LA위클리>가 ‘타란티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올드보이>가 보인 타란티노에 대한 충성(?)을 운운하는 것은 취향에 가려 작품을 보지 못한 케이스이나, 역으로 <올드보이>가 요란스레 미국시장에 발을 디뎠음을 증명한다. <올드보이>의 반대편에 ‘좋은 한국영화’로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언급하는 것은 너무나 도식적이라 김이 빠지지만.

이에 비해 폭력과 섹스의 묘사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치밀하게 짜여진 영화논리의 결과물이므로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시카고 선 타임스>의 로저 에버트의 평이나 “비극의 고전적인 서사구조가 당대 대중영화의 셰익스피어”라고 할 만하다고 한 <빌리지 보이스>의 평은 <올드보이>에게서 타란티노의 명찰을 떼어내고 형식적으로 비평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눈에 띈다. 요컨대 <올드보이>를 통해 한국 뉴웨이브 시네마의 특징을 ‘길들여지지 않은 감상주의, 스타일주의’로 요약하려는 노력도 결국, 작가주의 영화와 할리우드식 상업주의 영화의 이분법에 끼워맞출 수 없는 한국 대중영화에 대한 이들의 고심을 반영하는 듯하다. 충격이 반복되다보면 갖가지 명찰을 떼고 이름을 불러줄 날이 올지도.

미국 평론가들의 다양한 시각
“조합의 대가 박찬욱은 근사해 보이는 펄프픽션을 만든다. 그의 독창적이지 못한 비주얼 스타일은 히치콕, 큐브릭, 브뉘엘 같은 거장과 데이비드 핀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올드보이>는 보기에는 흥미로운 영화로, 잘 고안된 폭력 이외의 것은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각본은 그중 가장 떨어지는데, 고등학교 시절의 회상이나 십대 매춘부의 등장으로 보건대 박찬욱은 타깃 관객의 청소년적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올드보이>는 장르영화로서는 괜찮고, 박찬욱은 그 방면의 대가다. 그래서 뭐가 특별하다는 건가? 지금 할리우드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처럼 <올드보이>도 A급영화인 척하는 B급영화다… (중략)… <올드보이>가 일부 시네필들에게 환영받는 것은 파산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다.” - 마놀라 다지스 <뉴욕타임스>

“이 정도 수위의 성과 폭력이 있는 영화는 보수적인 미국 땅에선 더이상 만들어지기 힘들다. 좋은 영화냐 나쁜 영화냐를 가르는 건 표현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올드보이>는 묘사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발가벗겨지는 인간의 심리와 감정의 깊이 때문에 매우 파워풀한 영화로 받아들여진다.… (중략)… <올드보이>는 감정의 극한까지 밀고 가지만, 거기엔 이유가 있다. 우리는 흥미를 위해 존재하는 스릴러들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액션이 (심지어 폭력이) 이야기를 하고 이유를 품은 영화를 만나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다.” - 로저 에버트 <시카고 선 타임스>

“박찬욱의 영화는 무척 잔혹해서, 펄프 팬과 일반 관객을 가르는 기준이 될 테지만, 감정적으로 서사극의 스케일을 지닌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대영화의 지형도에서 셰익스피어와도 같은 영역을 차지한다(사실 고전 그리스 드라마, 존 웹스터, 토드 브라우닝의 무성영화 등이 더해진 결과로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중략… 과잉과 과오가 무엇이든 간에(개인적으로는 컴퓨터 기교를 과용했다고 생각한다) <올드보이>는 끝까지 가는 대담함과 고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돋보인다.” - 마이클 앳킨슨 <빌리지 보이스>

“비잔티움 양식과도 같은 내러티브에 짓무른 원한이 일그러지는 <올드보이>는 나쁜 일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아드레날린을 내뿜는 듯 진행된다. 사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고,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폭력적이면서도 코믹하게 부조리한 박찬욱의 네 번째 영화는 악몽과도 같은 이미지의 분출을 보여준다… 중략… <올드보이>처럼 기이하고 환상적인 영화를 보고 나서, 진실한 무언가를 경험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다.” - 카리나 초카노 <LA타임스>

“화려하고 충격적인 사이코드라마인 <올드보이>의 생기와 흥미는 거부하기 힘들고, 꽤 인상적이다. 내가 이 영화를 끌어안지 못한 것은 박찬욱이 그의 재능을 뒤틀린 하드보일드 스토리에 쏟아넣었기 때문이다. 반응은 아마도 제각각일 것이다… 중략… 혀가 잘리고 근친상간이 행해지는 이런 으스스한 판타지에 감동한 이는 스스로 박찬욱 팬임을 자처한 쿠엔틴 타란티노다. <올드보이>는 칸에서 호오가 크게 엇갈렸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나.” - 리사 슈워츠봄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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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국산은 후지다는 편견은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확실히 국산은 후지다. '학자'(혹은 '교수')는 그 중 대표적인 품목이다. 학자 행세를 하려면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에다 박사 공부까지 짧게 잡아도 10년은 공부해야 한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 10년을 했다면 ‘귀신처럼’은 아니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은 가지는 법인데 이상하게 한국의 학자들은 그런 사람이 참 드물다. 괜찮은가 싶다가도 월드컵이나 독도 같은 광풍이 한번 몰아치면 그저 ‘축구 응원단의 일원’으로 ‘우익 시위대의 일원’으로 그 초라한 몰골을 드러내고 만다. 해서, 이따금씩 괜찮은 학자를 만나면 그것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관점이나 의견에 차이가 나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만 있다면 충분히 기쁘다. 박유하 씨는 그런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책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보석과 같다. 어제 신문에 난 그의 대담 기사를 읽다보니 ‘남성 학자는 단지 냉철할 뿐이지만 여성 학자는 냉철한 데다 부드럽기까지 할 수 있구나’ 싶다.

 

마주 치닫는 한-일 관계


△ (왼쪽부터) 주진오 상명대 사학과 교수,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 교수.



‘한-일 우정의 해’가 아니라 갈등의 해가 되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의 날’ 조례를 통과시키자 이에 항의하며 한 한국 사람이 투신해 목숨을 끊은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앞서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또 불거져 갈등의 불씨를 키웠고 한국인의 분노에 한승조씨와 지만원씨의 식민지 미화 발언은 풀무질을 했다. 좋아질 듯하다 곧 틀어지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법은 없는지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집필자인 주진오(47) 상명대 사학과 교수와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의 저자인 박유하(47) 세종대 일문과 교수가 14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나 의견을 나눴다. 토론은 독도와 교과서 문제에 대한 대응법, 한국의 일본 인식부터 민족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지까지 나아갔다. 대담 이후 바뀐 한국 정부의 대일관계 청사진에 대한 의견은 따로 들어 대담 속에 넣었다.

주진오 독도는 협의대상 아니다 우익음모 단호 대처를

박유하 일본 나름의 논리 인식을 과잉대응땐 되레 경색

민족 문제를 잘못 건드리면 ‘공공의 적’이 되기 십상이다.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을 땐 더욱 그렇다. 그래서인지 섭외가 어려웠다. 소신껏 응해준 두 사람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먼저 이번에 독도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이토록 커진 원인과 해결방법에 대해 물었다.

주진오=사실 일본에서 독도 문제에 실리적인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시마네현 어민들입니다. 이번에 굳이 이러한 무리수를 감행한 건 단지 실리 때문만이 아니라 일본 정치의 우경화와 관련이 있죠. 한-일관계의 긴장을 유도하려는 일본 우익 정치세력의 음모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일본 정부가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했다고 보지는 않아요. 우익 세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의 정치지형상 이를 적극적으로 막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겠죠. 어쨌든 독도 문제가 이같은 강렬한 반응이 나타날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해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도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박유하=이번 사태를 꼭 우경화의 결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일본은 이전부터 독도만큼은 양보하지 않아 왔으니까요. 다만 평화적인 해결을 촉구해왔기 때문에 시마네현이 돌출적인 행동을 한데 대해서는 일본 정부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외무상이 시마네현에 대해 공식적으로 제동을 걸지는 않지만 우려의 뜻을 말한 건 그래서죠. 그런 의미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건 반은 진실이지만 반은 호응한 결과로 보아야겠지요. 한국에서는 일축하지만 일본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갖고 있다는 걸 일단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의 주장을 근거도 없이 무조건 뺏으려하는 ‘야욕’으로만 이해한 한국의 대응방식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 측면도 있습니다.

=한국 외교부가 표방해 온 ‘조용한 외교’가 기본적으로 잘못 됐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용한 외교가 무대응 외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사태가 여기에 이르기 전에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한국 정부의 자세를 얼마나 분명하게 보여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노 대통령이 재임 중 과거사를 언급하지 않겠다고 한 게 일본의 우익 정치세력이 무슨 행동을 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 스스로의 자정노력을 촉구한 것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했습니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적극적 대응책은 대체로 바람직한 방향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외교에는 상대가 있는 것이니 우리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 냉정하게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특히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는 지나친 행동에 대해서 자제를 촉구하면서 일본인들 스스로 이 문제의 해결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방향으로 진행됐으면 합니다. 즉 우리의 논리를 일본 사회에 적극적으로 전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겠죠. 우려되는 것은 자살, 방화는 물론 한국을 방문한 민간 일본인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현상입니다.

박/ 일본 주계층 ‘식민=시혜’ 보지않아
자민당 정권 교체없인 망언 되풀이
주/ 국내 지나친 행동 자제 촉구하면서
일본일들 스스로 해결 유도해야

=저는 한국 정부의 이번 반응은 일본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온 과잉대응이라고 생각해요. 그 저변에는 일본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있죠. 이번 발표에서 정부는 일본의 양심적 세력과는 연대한다고 하는데 일본 정부에 대한 신뢰가 근본적으로 없는 상태에서 시민운동과의 연대만으로 지금의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모순입니다. 우익교과서를 비판하는 일본인들도 독도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익 교과서를 비판하는 중요한 이유가 애국심을 고취한다는 점인데 그들이 우리 편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판단이구요. 이번 조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반성하도록 만들겠다’는 걸로 보이는데 반성이란 강압적 수단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일관계의 기본은 해치지 않겠다’고 한 정부의 의지는 평가하지만 이미 보았듯이 문제만 생기면 언제든 모든 관계는 깨지고 맙니다. 독도, 위안부, 야스쿠니, 교과서 문제 등에 대해 양국이 접점을 찾고 일정한 합의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는데 지금 방식으론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사적 근거 면에서나 현실적 측면 모두에서 독도가 분쟁지역이 될 필요가 없는 분명한 한국의 영토라고 봅니다. 단순한 억지주장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더욱이 독도를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문제를 되도록 의연하면서도 조용하게 처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왜 독도가 우리 땅인지, 일본의 주장은 어떤 논리적 근거가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일본은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고 하니까 독도 문제를 계속 제기할 필요가 있겠지만 우린 그럴 필요가 없죠. 그런데 박 교수님은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일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해법을 제시하셨던데요. 그러면 오히려 독도를 하나의 분쟁지역으로 인정하는 게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는 건 두 나라의 동의가 있어야 해요. 시마네현이 조례를 만든 건 우리와는 달리 일본 정부와 국민들이 독도에 너무 관심이 없으니까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쟁지역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건 억측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50년 동안이나 각자 자신들의 주장만 펴고 해결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소모적인 대립이 계속됐다는 점입니다. 일본에선 불법점거라고 이야기하지요. 전후 동아시아 질서 체제와 군사주의 문제를 연결시켜 생각하면 독도는 상징적이고 불행한 지역이에요. 독도가 누구의 소유인가보다 독도 문제를 둘러싼 양쪽의 소모적인 대립을 어떻게 해소할지를 협의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주 교수는 독도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이고 단호한 대응 방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데 비해 박 교수는 오히려 한-일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며 우려했다. 박 교수가 힘보다는 협의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주 교수는 일본 양심적 세력과의 연대하자고 제안했다.

=독도, 위안부 등 한-일간 핵심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식민지배가 시혜라는 생각이 일본 사회를 주도해온 사람들의 인식 속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에 대해 한국 사람들도 분노가 앞서다가 자신이 그 안에 갇히는 점도 있을 겁니다.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공헌했다는 이야기를 누가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일본의 주계층이 식민지배를 시혜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자민당 중심의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가 요구하는 모습이 그려지지는 않겠지요.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문제적 발언이 집권층에서 나오면 당연히 비판해야죠. 하지만 그런 발언을 한 사람을 금방 경질하는 면모도 고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과거에 대한 반성과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한국인들이 상처받는 겁니다. 경질도 한다지만 망언들이 중요한 순간마다 나오지 않습니까? 망언하고 사임하는 게 반복되죠. 최근엔 문부과학상이 ‘자학적인 일본 역사교과서가 많다’는 등의 말을 했죠. 그전엔 그런 이야기하면 사임했을 텐데요. 요즘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한국인에겐 그게 그 사람들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고 해임은 일종의 정치적인 수사라고 받아들여집니다.

=발상을 거꾸로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망언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우리나라에 우파가 존재하듯 과거에 어떤 일을 했든 반성이라는 발상을 못하는 사람이 국가 시스템 안엔 존재하게 마련이죠. ‘일본 모두가 반성해야 하는데 왜 저러느냐’ 하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또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라고 여기면 좀더 여유로운 대응 방식이 가능합니다. 식민지에 대해 일본국민 전부가 반성하는 완벽한 상황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환상이에요. 그럼에도 뭘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필요해요.

=일본의 망언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발언이 왜 나오고 무엇이 문제인지 짚어나가는 건 중요합니다. 한국의 때로는 과도한 감정적 비판과 반발을 문제삼는 것도 의의는 있겠지만 이를 불러일으키는 출발점이 뭔지는 따져봐야죠.

=2001년 교과서 왜곡 문제가 터졌을 때 한국 정부가 35개 조항을 수정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무리한 것도 많이 들어 있었어요. 결과적으로 일본이 다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니 현명한 대처 방식이었다고는 할 수 없죠. 조금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어요. 일본 우파의 발상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일단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를 뭉뚱그려 전체적인 비판만 하니 호소력을 잃는 상황이 계속되는 겁니다.

=물론 일본 전체를 적대적 대상으로 규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저도 일본인 가운데 이런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한국인의 지나친 대응에 자존심 상해서 극우 세력의 범주로 흡수되어 버릴까 걱정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도 같이 봐야 한다는 덴 동의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부터 문제를 풀기 바라는지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어요. 박 교수님은 일본 사회에도 다양한 결과 미덕이 있고 극우 세력이 그런 행태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전제로 우리 자신에 대한 문제 제기를 더 많이 하시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일본에 대한 비판이 필요없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이제까지와 같은 비판이 생산적이지 못했다는 겁니다. 2001년 교과서 사태 때 우리의 대응을 보면, 문제의 교과서 채택률이 미미한 수준에 그칠 거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 소모가 있었습니다. 신뢰가 없었던 탓이지요. 그래서 한국 이야기를 한 거죠. 또 우리 자신의 가해와 피해의 문제도 들여다봐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화해와 용서를 지향하기 위해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인터뷰한 위안부 할머니는 일본군보다 자기를 판 아버지가 더 밉다고 말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건 아주 소수다’라며 흘려버립니다. 그러면 그런 소수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줘야 하는 걸까요?

=저도 처음엔 종군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로만 바라봤습니다. 나쁜 일본인들이 선량한 조선 처녀들을 능욕한 것으로 생각했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지요. 그런데 여성학자들의 연구를 보면서 많이 깨달았습니다. 저만의 깨달음은 아니죠. 위안부 문제는 남성과 여성의 문제이고 국가에 의한 집단적 성폭력의 문제인데 이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성은 과연 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는 문제 제기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일본을 잘 알고 오래 연구해 온 분들이 정작 해주어야 할 작업은 한국인들에게 일본 사회의 정확한 모습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일본인들에게 한국인들의 정서를 전달해 주고 반성을 촉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 사회의 대응, 그 가운데서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한국이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한국의 반발을 부추기고 차분한 대응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진오
식민현실서 민족주의 없었다면…역사적 맥락 민족주의 봐야

박유하
최근 저항 민족주의 긍정측면 부각 이 역시 강자 되고 싶은 욕망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정부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일정금액을 지불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와 편견이 커진 측면도 있어요. 미국이 주도한 부분이 많지만 일본은 전후 민주주의라는 이념을 내걸고 일단은 반성적인 차원에서 출발했습니다. 전전과 전후가 완전히 단절됐다는 의식을 자신에게 불어넣으면서 민주주의 교육이 이뤄졌죠. 그 결과 일본 청년들은 애국심이 없어졌다는 게 우파의 생각입니다. 일본이 헌법을 바꾸고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태로 가더라도 젊은이들이 안 따라와 줄 것 같다는 초조함의 결과로 나타난 게 교과서 문젭니다. 그 전 교과서 채택률을 봤을 때 우파적 사고는 전체의 0.039%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꼭 대응을 과격하게 해야 할까요?

=2001년 한국의 대응에 지나친 점도 있었지만 그것이 없었더라도 0.039%에 불과한 채택률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문제가 된 교과서를 굳이 채택할 필요가 있겠나’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후소샤 교과서가 검인정을 통과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이것을 한국 사람들이 나서서 막는 건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겠죠. 하지만 문제 제기는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채택률이 낮았던 건 외압의 결과라기보다는 일본 시민 사회의 역량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번 교과서 내용은 전체적으론 일본이 얼마나 훌륭한 나라인지 긍지를 키우는 것이죠. 자국에 대한 긍지를 키우는 큰 틀에선 우리나라 교과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는 필요한 부분을 제대로 짚어 비판하되 큰 틀에서는 무시하는 게 가장 좋은 대응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비롯한 외부 세력이 거세게 나오면 언론이 보도할 수밖에 없고 이 교과서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펼쳐보게 돼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현상이 일어나요.

박 교수는 식민지배를 시혜라고 생각하는 일본 우파는 사실 소수인데 한국 사람들이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일본뿐 아니라 우리 안의 문제에도 귀기울이자고 제안했다. 주 교수는 상대의 관점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문제의 원인 제공자인 일본 극우보다 한국에 대한 비판에 치우쳐 있다며 날을 세웠다.

=그런데 과거사에 대해서는 한국의 극우와 일본 극우의 논리가 궤를 같이합니다. 저는 한승조씨 발언이 우발적이라고 보지 않아요. 한국 사회에서 식민지 때 친일, 해방 이후의 독재, 인간이 없는 산업화를 주도해 왔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잠복해 있다가 나온 거죠. 과거사 청산작업을 비판하려다가 과거사를 미화하는 데까지 갔다고 봅니다.

=일본 우파와 닮은 꼴이죠. 타자에 대한 지배 자체는 당연히 부정되고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처음엔 ‘러시아보다 낫다’라는 말은 빠진 채 ‘축복이다’라는 부분만 전달돼 분노를 키웠다는 겁니다. 언론의 문제도 많다고 생각해요. 저는 한국 우파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친일 청산을 법으로 제정하는 것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대한 재심은 해야겠죠.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열렬히 자원해서 입대한 지원병은 세뇌당해서라해도 야스쿠니에 묻히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위안부와 병사는 국가시스템에 의한 가장 처참한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친일 진상 규명을 법제화하고 정부가 나선다는 데 비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국가주의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죠. 그러나 사실 국가가 주도한다기보다는 시민 사회의 요구를 정부가 반영한 겁니다. 저도 친일이라는 범주를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할 게 아니라 학계의 합의를 통해 명확히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해방 직후에 진상규명이 됐으면 이렇게 지겹도록 계속 이 얘기를 할 필요는 없었겠죠. 일종의 역사의 빚으로 빨리 갚고 화해해야 하는데 인위적으로 늦추고 막다 보니까 해방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친일을 규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겁니다.

=수많은 소극적 친일파 속에서 엘리트이면 자연히 적극적 친일파가 되는 구조가 있지요. 친일의 양상에는 개인별로 커다란 차이가 있고 이를 섬세하게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친일을 규명하자는 건 반성과 화해를 통해 소모적인 논쟁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또다시 덮어두자고 하기 보다는 규명해 가면서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항했고 친일파는 소수라는 도식이 있어 그들만 가려내면 깨끗해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소극적인 친일까지 생각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수가 친일파일 수도 있는 거죠. 그러나 친일파를 면죄하거나 합리화하자는 게 아닙니다. 법이나 사전 한두 줄로 풀 수 없다는 거죠. 충분한 연구와 사상적인 접근으로 풀어나갈 문제입니다.

=저도 한 사람의 과거를 특정 시기의 행동만을 끄집어 규정해 버리는 것의 위험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박 교수님은 그동안 반일교육과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해오셨는데요. 일정 부분 공감을 하면서도 한국의 민족주의가 극단적인 몇몇 사례로 대표되고 비판되기엔 외연이 너무 넓지 않나 합니다. 진보적인 지향을 가진 지식인들은 이미 피해의식에 젖어 우리 안의 차별을 보지 못하는 점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건 긍정하지만 아직 일반인들의 의식을 바꿔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는 그 자체에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고 완전한 정의로 여겨지는 순간 여러 문제를 낳죠. 진보와 보수는 실은 다른 입장의 민족주의인데 대상이 일본일 땐 미묘하게 일치되고 맙니다.

=우리 역사를 민족이라는 코드로 바라보는 데 반성해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죠. 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도 있습니다. 한국에선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기대가 크지만 실제로 그들의 영향력은 일본 사회에서 크지 않죠.

박/ 친일청산 화해·용서 위해
우리 안 가해·피해도 되짚어야
주/ 해방 60년 되기까지 소모적 논쟁
섬세한 부분은 규명과정서 고민을

=이른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 힘이 없다고 하는데 반대입니다. 예를 들어 교과서 문제에 앞장서고 있는 고모리 요이치 교수는 일본 근대 문학계의 일인자같은 존재입니다. 다카시 데츠야, 오에 겐자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으론 주류가 아닐지 모르지만 일반인에 대한 영향력은 대단히 크죠. 일본의 문제적인 극우들은 대부분 각기 전문분야에서는 이류들입니다.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논리는 일본에서 일었던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반성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이를 한국 역사에 그대로 대입해 한국 민족주의를 해석하는 게 바람직할까요?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현실을 똑같이 보고 만약 한국인도 지배하는 처지라면 그랬을 거라고 연결하는 건 문제가 있죠.

=민족주의의 긍정적인 부분으로 저항민족주의가 많이 이야기되는데 그 역시 강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죠. 또 저항민족주의라 하더라도 민족 사이에 증오심을 유발하고 폭력에 대한 제어 장치가 없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근대 이후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자신에 대한 긍지가 필요했던 터라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사상으로서 환영받았던거지요. 또 근본적으로 남성중심주의적 가부장제적이어서 여성을 구원하는 담론이 될 수 없습니다.

=저도 가부장적인 요소 등 민족주의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에 대해선 공감합니다. 그런데 일제 식민지라는 현실에서 그나마 한국에 민족주의라도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시대적 과제에 따라 민족주의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보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날 아직도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해체하자는 것은 대안없는 비판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도 식민지 시대의 한국의 민족주의가 꼭 나빴다는 건 아닙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강자적 민족주의가 들어와서 약자의 민족주의가 일어나 구심점을 만들어서 대항하는 건 필연이었지요. 하지만 오늘날까지 이걸 이어받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저도 힘을 키워 극일을 하자는 논리로 귀결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람들의 공감까지 얻을 수 없으면 한풀이 밖에 안 되겠죠. 한국이나 일본에서 미래와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민족상업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책임 있고 절제된 발언을 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게 중요하겠습니다. 한국 사회 안에서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차별과 폭력이 있다면 바꿔가야 할 겁니다. 여기에 한국 민족주의의 미래가 달려 있고 이것을 학계에서 ‘성찰적 민족주의’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죠.

=민족주의가 아니고도 블합리한 억압이나 사고를 비판하는 건 가능합니다. 독도 문제가 한-일 관계보다 우선이라는 단언은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종국적으로는 전쟁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발언입니다. 실제로 독도에 대해 너무나 폭력적인 담론이 많습니다. 민족 구성원 내부의 이익을 지키는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용인하는 담론이 허용되는 건 문제입니다. 또다시 2001년처럼 지방 사이의 교류까지 끊어지고 있는데 이건 맹목적 민족주의가 시키는 일이지요. 그러나 긍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럴 때일수록 국가를 넘어 개인으로서 생각하고 교류하는 게 필요합니다. 평화보다 더 큰 이익은 없습니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이정아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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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홍세화

그대는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의 수많은 무식한 대학생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대는 12년 동안 줄세우기 경쟁시험에서 앞부분을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수학 공식을 풀었으며 주입식 교육을 받아들였다. 선행학습,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등 학습노동에 시달렸으며 사교육비로 부모님 재산을 축냈다.

그것은 시험문제 풀이 요령을 익힌 노동이었지 공부가 아니었다. 그대는 그 동안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대의 대학 주위를 둘러 보라. 그 곳이 대학가인가? 12년 동안 고생한 그대를 위해 마련된 '먹고 마시고 놀자'판의 위락시설 아니던가.


그대가 입학한 대학과 학과는 그대가 선택한 게 아니다. 그대가 선택 당한 것이다. 줄세우기 경쟁에서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알게 해주는 그대의 성적을 보고 대학과 학과가 그대를 선택한 것이다.

'적성' 따라 학과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성적' 따라, 그리고 제비 따라 강남 가듯 시류 따라 대학과 학과를 선택한 그대는 지금까지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은 고전을 앞으로도 읽을 의사가 별로 없다.

 

영어영문학과,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한 학생은 영어, 중국어를 배워야 취직을 잘 할 수 있어 입학했을 뿐, 세익스피어, 밀턴을 읽거나 두보, 이백과 벗하기 위해 입학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학원에 다니는 편이 좋겠는데, 이러한 점은 다른 학과 입학생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문학의 위기'가 왜 중요한 물음인지 알지 못하는 그대는 인간에 대한 물음 한 번 던져보지 않은 채, 철학과, 사회학과, 역사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를 선택했고, 사회와 경제에 대해 무식한 그대가 시류에 영합하여 경영학과, 행정학과를 선택했고 의대, 약대를 선택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그대의 무식은 특기할 만한데, 왜 우리에게 현대사가 중요한지 모를 만큼 철저히 무식하다.

그대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민족지'를 참칭하는 동안 진정한 민족지였던 <민족일보>가 어떻게 압살되었는지 모르고, 보도연맹과 보도지침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그대는 민족적 정체성이나 사회경제적 정체성에 대해 그 어떤 문제의식도 갖고 있지 않을 만큼 무식하다.


그대는 무식하지만 대중문화의 혜택을 듬뿍 받아 스스로 무식하다고 믿지 않는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식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문화가 토해내는 수많은 '정보'와 진실된 '앎'이 혼동돼 아무도 스스로 무식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물며 대학생인데!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에 익숙한 그대는 '물질적 가치'를 '인간적 가치'로 이미 치환했다. 물질만 획득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 자신의 무지에 대해 성찰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대의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그대가 무지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대학가에서 그대가 찾기 어려운 책방을 열심히 찾아내려 노력하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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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haGreen 2005-01-28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저런 현실이 싫어서 고전을 읽으려고 하고 있지만...ㅠ_ㅠ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