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하고 요약본을 읽게 하는 수능의 논술은 사과맛 비타민 알약…책에 질려버린 친구 딸과 7살 꼬마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나, 당분간 책 안 읽을 거예요.”

지난주 수능고사를 친 친구 딸에게 이런 황당한 말을 들었다. 내가 전화해서 시험공부 하느라 애썼다, 이제부터 잠도 실컷 자고 책도 실컷 봐라, 했더니 톡 쏘듯 한 말이다. 나만 보면 무슨 책이 재밌냐고 묻는 이 아이는 평소 책을 많이 읽고 글도 잘 써 논술에 자신 있어 했다. 논술학원 선생님들도 이름만 똑바로 쓰면 무조건 된다고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논술 반영률이 높은 수시에서 줄줄이 낙방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렇지, 시험에 떨어졌다고 왜 책을 안 보겠대?

“아줌마, 무슨 시험 보세요?”

오늘 그 친구네 집에 갔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거실 소파 위에 눈에 익은 붉은 표지의 <체 게바라 평전>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이 아주 가관이다. 갈피마다 각가지 색깔의 포스티잇이 붙어 있고 군데군데 접은 페이지에는 형광펜으로 “★★★★★ 반드시 외울 것”이라고 써 있었다. 밑줄도 총천연색으로 쳐 있었다.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책이 교과서나 참고서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외우고 분석하며 읽어야 하는 건가? 친구 말로는 요즘 논술 공부는 그렇게 한다니, 나라도 이렇게 했다간 책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사라지고 말겠다.


△ 요즘에는 논술을 조기 준비하느라 초등학생에게까지 니체를 가르친다고 한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까. 한 대안학교에서 학생 세 명이 한 권의 만화책을 함께 보고 있다. (사진 / 한겨레 김태형 기자)

아이의 책장을 보고는 더 놀랐다. 루소의 <에밀>과 스피노자, 데카르트 사상 요약 정리본, <폭풍의 언덕> 등 문학작품의 요약본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런 사상, 철학서를 논술 필독서로 정한 분들도 다 생각이 있겠지만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대학 전공서적에 가까운 책들을 읽을 시간도 사고의 여유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시험에 난다니 학원에서 요약해놓은 자료라도 공부할 수밖에.

더구나 문학작품의 요약본이라니? 문학작품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사과 한 알을 오감으로 충분히 음미하는 과정과 같다고 생각한다. 먹기 전에는 사과의 모양과 색깔과 향기를, 한입 베어 물었을 때는 새콤달콤한 맛과 아삭 씹히는 감촉까지를 고스란히 느끼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반면, 요약본이란 이 소중한 감정들은 무시한 채 그저 사과를 비타민C의 조달처로만 여기며 사과맛 비타민 알약을 먹는 것과 같다고 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학작품은 절대로 요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 그게 논술하고 얽혀 있어 시험을 보려면 줄거리라도 알아야 한다니 차마 요약본 보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속쓰리다. 아무튼 이렇게 정작 사과는 구경도 못하고 지겹게 사과맛 비타민 정제만 먹어야 했던 아이들에게 책이란 그저 논술을 잘 보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몇 달 전 여의도공원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6, 7살 정도 된 꼬마가 날 한참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아줌마, 무슨 시험 보세요?”

“아닌데. 왜?”

“시험도 안 보면서 왜 책을 읽어요?”

“재미있으니까 읽지.”

“네? 책이 재미있어요? 난 하나도 재미없는데….”

“뭐라구?”

“엄마가 읽으라고 해서 읽는 거라구요. (작은 소리로) 이그 지겨워….”

이 아이 역시 책이 이끄는 이야기의 바다에 빠져보기도 전에 책이란 그저 학습의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요즘에는 그놈의 논술을 조기 준비하느라 초등학생들에게까지 니체를 가르치고 있다니 정말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 것인가. 논술고사의 원래 취지가 이런 게 절대로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나는 다행히(?) 논술이 없을 때 학창시절을 보낸 덕에 독서의 즐거움을 십분 누리며 지낼 수 있었다. 그때라고 입시경쟁이 치열하지 않았겠냐만, 생각해보면 친구들과 경쟁적으로 책을 읽던 여고시절 3년간이 내 독서생활의 든든한 토대를 만든 시기였던 것 같다.

그때는 얼마나 책을 이해하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느냐가 중요했다. 내 친구들은 ‘1년에 100권 읽기’라는 공동목표 아래 각자의 독서목록을 만들어서는 한 권씩 끝낼 때마다 지워나가는 재미로 살았다. 어느 겨울방학인가, 언니들이 사놓은 세계문학전집 20권을 다 읽고 친구들에게 한참을 뻐기던 기억도 생생하다. 하여간 그때 붙은 독서습관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별건 아니다. 하루 중 책 읽는 시간 확보하기(지금은 지하철 타고 다니는 1시간30분), 읽은 후 책 뒤나 일기장에 한 줄이라도 독후감 쓰기, 그리고 읽고 좋았던 책은 적극적으로 권하기다.

읽고 쓰기보다 재밌는 권하기

사실 책을 읽고 쓰는 것보다 권하는 게 훨씬 재미있다. 좋은 책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면 다른 도움을 준 것보다 기분 좋다. 책 읽기에 시큰둥한 사람을 살살 달래서 좋아할 만한 몇 권을 읽게 한 뒤, 그 사람에게 알고 보니 책도 재밌다는 얘기를 들으면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뿌듯했다.

이런 사람이 친구 딸이나 7살 꼬마에게 책에 대한 편견과 악담을 들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는지 모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미력하나마 이 친구들의 눈높이에 맞는 책을 열심히 권해서 책이란 맛있는 사과 자체이지 그저 몸에만 좋은 사과맛 알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일 거다. 그런 뜻에서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책 두 권을 종이비행기에 실어 보낸다.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청어람미디어), 요절한 사진작가의 아름다운 사진과 글이 늦가을 바람처럼 뼛속으로 스민다. 박경철의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리더스북), 이 외과의사, 주식에만 해박한 게 아니라 글도 무진장 잘 쓴다. 하느님이 한 사람에게 재능을 너무 몰아주신 것 같다.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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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12-0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울 애들은 공부도 뒷전, 시험 앞두고도 책 보고 낄낄~ 거리고 있는데...-.-;;(무.. 물론 별 재미없는 교양서적 말고 만화책이나 재미난 동화책 종류만 본다는...)

이매지 2006-12-05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서점에 갔더니 그런 책들 엄청 많더군요. (고전 요약본들) 그런거 보면서 저걸 본다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책에 질리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던.

라주미힌 2006-12-05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이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신거겠죠. :-)
크크.. 평가와 요약이라...
그래서 인간도 누군가에게 평가받으려 부단히 애쓰고, 몇 가지의 정체성으로 무자비하게 요약되나 봅니다.

해리포터7 2006-12-06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논술땜에 요약본들이 많더군요..1학년부터 읽어야 할책을 쭈욱 요약해놓았더군요.세상에나....책을 좋아하기까지는 부모의 노력도 많이 필요한거 같아요..부모가 얼만큼 책을 가까이 하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그속에서 아이들은 책은 좋은것이다.재미있는것이다라는걸 알게 되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