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봤다.
예전의 단성사에서 <오아시스> 시사회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에서 이창동 감독에게 질문을 던졌던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벽하게 다른 나, 그러나 또 완벽하게 동일한 나.
2007년 5월의 나는 덜덜, 떨지도 않았고. 눈물 흘러내리지도 않았다. <밀양>을 보는 내내.
세상에 흘러 넘치는 자기계발 서적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고, 학교 수업에 충실했으며 잠은 항상 7시간씩 꼭 잤어요.'라고 답하는 수능 최고득점자의 멘트들로 범벅이 된 그 책들. 삶에 관해서라면.. 긍정적인 마음을 품어라, 분노함을 품지 말아라, 계획적으로 생활하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쫑알거리며 반복한다. 그럴때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 말을 누가 못하니?
#$%@ 하고 &%* 해서 힘들어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라는 질문에 '잘 하면 됩니다'고 답하는 격과 뭐 그리 다를까 싶단 말이다.
용서가 쉽나? 그 누구도 그렇다고 말 못한다. 그럼에도 너무나 쉽게 긍정한다. 용서하지 못하면 스스로 불행에 빠지고 만다고. 그러니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용서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어떻게 하면 용서를 할 수 있나요? 이 질문에 10가지 방법을 단계별로 제시하며 안내해 줄 사람 있나? 그런 구체적인 대안 없이 원론적인 답만 돌아온다. 마음이 수천 조각으로 찢겨 나가 텅빈 사람에게.
인간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무의미함이 아닐까 한다. 내가 한달 내내 죽도록 고생해서 겨우 완성시킨 프로젝트가 멍청하기 짝이 없고 대충대충 인생사는 한심한 윗사람 그러나 빽 하나는 든든한 윗사람의 말 한마디에 날아가 버렸을 때. 한달의 고생스러움이 무의미와 동일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허탈과 분노.
십수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이 어느순간 내 친구와 바람이 나서 나와 아들을 버리고 떠났을 때 느끼는 분노. 우리의 결혼생활은 뭐였어? 난 당신한테 뭐였어? 이런 물음들.
실연, 지인의 죽음, 가족의 불행, 크고 작은 인생의 실수등 슬픔을 느끼게 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에는 무의미 함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다.
난 너에게 뭐였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아빠한테 난 뭐야? .. 이런 것들, 의미를 묻는 물음들.
밀양에서, 자식의 죽음. 그 어린 아들의 죽음의 의미, 남편에게 있어 자신의 의미(자신을 배신하고 사고로 죽은 남편)를 찾지 못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평온함을 얻은 그리스도 신자의 모습과 자해를 하고, 물건을 훔치고, 남자를 유혹하다가 정신병원에 가고마는 전도연의 모습은 사실 특별할게 없다.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이다. 무의미 앞에서 무너지고 절실하게 의미를 찾으려 발버둥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답을 풀어 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들의 죽음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신자라면 자신의 신에게 그 의미를 묻고 답을 찾을 것이고 종교가 없다면 스스로 찾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신이 부여하기도 하고 스스로 부여하기도 한다.(종교의 유무에 따라 다를것)
무의미와 화해를 하는 날, 즉 의미를 찾게 되는 날이 비로소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날이 된다.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 살아내는 삶을 시작하는 첫 날.
*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햇빛이 가득한 영화 <밀양>을 보다. 나에겐 <밀양>이 꽤 따뜻한 영화였다. 동행이 주차장에서 차를 돌려 나오는 동안 나는 밖에 서서 한옥마을 기와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비와 밀양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