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장가는 일이 식당가는 빈도수처럼 빈번했던 시절이 있긴 했다.
이런저런 이유와 사정이 생기면서 다른 세상 사람이라도 된 듯 극장 가는 일이 낯설어질 지경이 될 즈음 조조영화를 보는 기념비적인 행사를 치르며 내가 본 영화는 <300>이었다. 이미 한 번 본 동행은 흔쾌히 두번 보는 일에 동의했고, 전날의 음주여파로 무거운 눈꺼풀은 압구정 CGV의 한약맛이 나는 걸쭉한 정체불명 원두커피로 애써 치켜올렸다. 적어도 영화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졸음을 매달고 있었단 이야기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
삼각빤쮸 하나 걸치고 시종일관 뛰어다니는 착한 몸매의 남자들이 떼로 나온다는 데 혹한거 맞다. 과도한 근육은 싫네, 마른듯하면서 보기좋게 잡힌 근육이 좋네 어쩌고 하지만 까놓고 말해서 영화 속 남자들의 몸매는 퍼펙트 그 자체다. 오, 브라보!
영화가 불러으킨 정치적인 의미에 대한 의견은 <아포칼립토>때 만큼이나 분분한 듯 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런 것 자체가 좀 이해가 안간다. 관객들이 바보인가? 영화 한 편 보고 파쇼에 물들어 찬양하고 이 한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이며 백인이 모든 인종중에 최고라고 고개 끄덕일까나? 기우라고 본다.
붉은 망토 휘날리며 날아다니는 남자들을 보느라 졸기는 커녕 눈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내 눈에 한 여자가 들어왔는데 다름 아닌 왕비. 예쁘긴 하지만 숨이 멎을만큼 예쁜 것은 아닌, 외모로 모든 걸 승부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그 왕비. 하지만 그 왕비는 내가 봐온 왕비 중 최고로 멋졌다.
비열한 수컷을 단숨에 칼로 찔러서 해치우는 그 멋스러움이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칠뻔 했다. 수컷들이 활개치는 세상의 여자들이 그 왕비처럼 검술을 배우는 거다. 그래서 개념 탑재가 불가능한, 아랫도리만 곤두선 수컷들을 저렇게 처리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