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부메의 여름>에 흠뻑 반해 교고쿠 나츠히코의 책이라면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나게 된 <망량의 상자 >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분명 추리소설이지만 추리의 재미보다도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주인공인 교고쿠도의 괴설이다.(교고쿠도는 화자의 친구로 나온다) 굉장히 논리적이면서 기존의 생각들을 깨뜨리는 그의 대사를 궂이 괴설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의 말에 100분 동감하며 책을 읽다 가끔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들은 항상 일상을 살아가는 아주 자그마한 현상 하나하나에서 톡톡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괴이한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망량의 상자>는 두 사건을 주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토막살인사건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가나코라는 소녀의 자살미수건이다. 여기에 한가지를 더 넣는다면 망량을 가두는 온바코님 교주 신자들의 불행 정도라고 할까? 이 사건들은 실은 별개의 것이다. 하지만 꼭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 사건이 사건을 낳아버린 기이한 영향력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천재 과학자 미마사카가 등장하며, 일본의 영화계를 흔들었던 미모의 여배우 요코가 나온다. 또한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머니를 죽이고 싶어하는 아자세 콤플렉스를 지닌 요리코라는 소녀, 상자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구보라는 사내까지... 이들은 아무 관계도 없는 듯하다 어느 순간 굉장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각자의 사건에 얽매여 있다 다른 사건의 동력원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사건을 풀어가는 열쇠는 순서다.  사건 발생 순서대로 순차적인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다가는 불가능했을 것을 교고쿠도는 해결해낸다. 이 사건들은 순서대로 찾지말고, 사건 그 자체로 바라보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같은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같은 사건이 아니고, 다른 사건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같은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은 시간의 순서를 저버리고, 우연의 개입을 바라보았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순서보다 중요한 열쇠는 동기다. 작가는 범죄의 동기를 찾지 말라고, 교고코도의 입을 빌려 말한다.

동기란 세상을 납득시키기 위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네. 범죄는---- 특히 살인은 대부분 경련적인 거야. 그럴싸하고 있을 법한 것일수록 범죄는 신빙성이 더해지고,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세상 사람들은 납득하지. 그런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네. 세상 사람들은 범죄자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만, 특수한 정신상태에서만 그 무도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어떻게 해서라도 생각하고 싶은 걸세. 다시 말해 범죄를 자신들의 일상에서 분리하고, 범죄자를 비일상의 세계로 내쫓아 버리고 싶은 거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은 범죄와는 인연이 없다는 것을 암암리에 증명하고 있을 뿐일세.(하권 175쪽)

범죄를 자신의 일상에서 분리해내고자 하는 욕구가 바로 범죄의 동기를 만들고,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범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이러한 동기들이 모여서 힘을 발휘하는 사회적 장치가 된다. 하지만 교고코도는 범죄라는 것은 마치 지나가던 집이나 만난 사람에게 재앙을 끼치고 나서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마물인 도리마처럼, 우리 각자에게 언제나 찾아왔다가 떠나가는 도리모노 같은 것이라고 설파한다. 즉 누구나 갑작스런 살인 충동이나, 파괴 본능을 어느 순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이라는 것은 갑작스레 조성되어지는 환경을 말하며, 바로 그 잠깐 동안의 몇십분의 일초라는 짧은 순간동안 도리모노가 지배했을 때 범죄는 발생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가 발생하고 나서의 사회적 개인적 불이익을 이성적으로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범죄에 대한 욕구가 일더라도 절대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도리모노의 순간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동기는 범죄가 저질러지고 나서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이성적 작용으로 나타나는 설명일뿐인 것이다.

소설 사건의 제일 근간이 되는 것은 망량의 순간이지만, 직접적 사건의 발단이 되는 것은 이 도리모노의 작용때문이다. (망량은 마음의 틈에서 발생하는 유혹정도라고 해야할까, 책 속에서는 망량에 대한 소개, 해설이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진다. 즉, 일정한 형태로 정의되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쪽과 저쪽의 경계선에 있으면서 사람의 조그만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유혹정도라고 해석되어질 수 있겠다.) 따라서, 처참한 살인 사건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법적 심판을 가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며, 심리적 자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범죄가 일어나기도 한다.

또한 이 도리모노라는 것의 습격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망량의 그림자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음양사인 교고쿠도는 소설의 결말부분에 각자의 망량을 떼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자만, 금전욕, 사랑, 이해.... 망량은 개인마다 다른 모습으로 있다. 아차 하는 순간 망량의 작용으로 도리모노가 나를 스쳐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천천히 생각해본다. 나의 망량은 무엇인가하고, 내 마음 속에 감추어진 망량의 상자속에는 무엇이 숨어있는가하고. 그리고 다시 생각해본다. 그것을 밝힐순 없을 것 같다고. 다만 얼핏 망량의 그림자를 보았으니 내 마음에 틈을 보여주지 않도록 살아야겠다고. 그런데 틈을 보이지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무엇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행복해지는 것은 간단한 일이거든. 사람을 그만둬 버리면 되네.(하권 501쪽)

결국 불행이 사람의 조건인 것일까? 주저리 주저리 매달린 마음의 찌꺼기를 지녀야만 하는 사람. 언제나 도리모노가 들어올 틈을 지닐수밖에 없는 몸뚱아리. 그렇다면 차라리 모든 걸 비워버리면 어떨까? 텅 빈 곳엔 빈 틈도 없지 않을까? 空 속에는 경계도 없으니 망량도 없을 것 아닌가? 하지만 바로 그것은 神人의 경지이기에 또한 다른 방향으로 사람을 그만두어야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을 체념하게 만드는 무거운 결말이지만 한편으론 타인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은 있을 수 없다. 말 따윈 통하지 않는다. 하물며 마음이 통할 리 없다.(하권 36쪽)

통하지 않아도 이해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나의 마음 속엔 틈이 있을테니까. 도리모노가 스쳐지나가는 그 자리에 우리 타인의 마음이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과 어울리지 않는 장미빛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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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0-12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는 서평입니다^^

하루살이 2005-10-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막 쓰자마자 읽어주시다니. 고맙습니다. 아직 제대로 머리속에 정리되지않은 글인데, 과찬이에요 ^^;;;

2005-10-12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10-1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비밀을 알았으면... 혹시 습득하시면 저에게도 비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