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여자가 성공한다
우테 에하르트 지음 / 글담출판 / 2000년 2월
평점 :
절판


제목 한 번 발칙하다.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니. 누가 여자의 성공을 바라기나 하나? "여자"와 "성공"이란 단어는 왜 그렇게 아직도 멀게 느껴지는지. 게다가 기껏 성공한 여자들을 상상해봐야 짙은 톤 바지 정장에 컷트 머리에 별로 예쁘지도 못나지도 않은 "커리어우먼"상으로만 떠오르는지... 그리고 잠깐, 착한 여자가 성공해도 봐줄까 말까 한 판국에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고? 그 꼴을 감히 어떻게 봐? 누가 그렇게 되도록 놔 둘 줄 알고?

내가 써놓고도 과연 화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나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두인지... 하지만 화자를 헷갈린다는 것은 바로 이 책이 지적하고 있는 바, "착한여자" 신드롬 내지 컴플렉스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내 안의 가부장적인 목소리와 생각들을 몰아내고 싶으면서도 결국 완전히 박멸되지 않는 바퀴벌레들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스미고 다니는 그것들... 인류와 내 개인 역사에서 철저히 닦아 버려야 할 흔적들이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많은 여자들이 지금껏 참 많이 이해하고, 미소짓고, 수동적으로, 감내하고, 참고 살아왔다. 착해지고 싶어서... 그리고 누군가 간혹 "나쁜 여자"를 표방할 때 "나쁜 남자"들과 "착한 여자"들은 그들을 외면하고 억압했고 이것이 그들을 다시 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여자들은 나쁘다는 손가락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착해지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망치느니 나쁜 여자의 길로 나아가 행복하길 원한다. 저자의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다. "나쁜 여자는 다른 사람들과 결별하면 했지 자기 자신과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는다"... 

이 책은 종래의 착한 여자로는 성공할 수 없음을, 성공을 위해서는 나쁜 여자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물론 성공에 대한 목적과 지향을 떠나 자신의 본 모습과 욕구를 찾아야 행복하고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근본 태도이다. 한편 저자가 제시한 많은 사례는 여자 상사의 모델을 적절히 갖지 못하고 있는(드라마 속 인물-대장금의 한상궁-이 여성 리더쉽의 모델로 회자되고 있는 형편이니... 현실이 얼마나 척박했으면 그러한가) 우리 현실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위해 모색해야 하는 방향의 척도를 분명히 제시한다.

언제쯤이면 자신의 성공과 성취를 위해 올바로 삶의 기획하고 행사하는 여성들을 착하다/나쁘다의 분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착한 여자" "나쁜 여자"의 도식이 용어상의 아이러니를 이용하고 있는 줄은 잘 알지만 지금껏 "올바르지 않은 착함"을 탈피해 "올바른 나쁨"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독려하는 이 구분은, 그래도 참 씁쓸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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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문화로 읽는 세상]사랑 그리고 결별해야 할 것


3월12일, 의회반란이 있었던 다음날 나는 한 일간지의 앞면을 장식한 한 편의 시를 읽었다. 안도현이 쓴 ‘울지마라,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의 시였다. “2004년 3월12일을 죽음이라 부르자”는 김지하의 운으로 시작되는 그 시는 얼핏 상투시였다. 한줌도 안되는 금배지들에 의해 쿠데타를 맞았으니 국민의 힘으로 이에 저항하자는 말이니 시인의 노여움치고는 꽤나 밋밋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시인들조차 혀를 내두를 그야말로 ‘초현실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황당한 상황 앞에서 시인인들 별다른 말이 생각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의 한 두 구절은 그래도 눈에 밟혔다. “이건 아니다 백 번 천 번 양보해도 이건 아니다”라는 구절, 그리고 “사랑해야 할 것과/결별해야 할 것이 분명해졌으니”라는 구절이었다. 알다시피 안도현은 80년대에 같이 시를 썼던 다른 시인들이 거의 낙백의 수준으로까지 시를 내려놓았던 90년대 내내 거꾸로 상당한 정도의 문명을 날려왔던 시인이다. 그의 편안한 시풍과 적당한 연성 메시지들이 그 어떠한 거칠고 날카로운 것들도 남김없이 흐물흐물하게 만들어버렸던 90년대라는 시공간에서 대중적으로 넓은 호소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을, 솔직히 말하면 나는 마뜩찮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백 번 천 번 양보해도”라는 구절 속에서 나는 자신이 그동안 사실은 굴복했었던 게 아니라 양보했었다고, 그동안 한번 시대 앞에 한없이 너그러워졌었노라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너그러울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노라고 하는 시인의 변명이자 자기확인이 읽혀졌다.

시인들도 혀 내두른 탄핵그리고 ‘사랑해야 할 것’과 ‘결별해야 할 것’을 분명히 구별하겠다는 구절에서 3월12일 이후 그의 시적, 인간적 실존이 선택한 자리가 어디인지 엿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3월15일, 이번엔 젊은 소설가 서른여섯명의 시국성명 ‘남겨진 6월항쟁의 뒤 페이지를 위하여’를 접할 수 있었다. 거기선 김남일 방현석 정도상 안재성 등 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부터 은희경 공선옥 김형경 송경아 하성란 등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 그리고 김종광 김현영 이명랑 표명희 등 2000년대에 등단한 새내기 작가들까지 한데 모여 “6월항쟁의 뒤 페이지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었다”는 반성과 “등이 휘는 무거운 작가적 실존으로 6월항쟁의 서사를 진정으로 마무리”하리라는 각오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내 시인들이, 작가들이 정신을 좀 차린 것일까? 조금은 바뀌는 것일까?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정신적 공황상태 속에서 차마 흐린 펜끝을 더 어찌하지 못해 펜을 내던졌다가 근 10년만에 다시 향해 말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수년 간이나마 먼저 싸움을 걸어오는 동안 ‘외롭다’는 생각이 절실했던 나로서는 동료·후배 시인·작가들의 이런 변명과 각오들이 차라리 생뚱맞다고 할 정도로 새삼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고맙고 대견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만시지탄’이라는 생각이 먼저 나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나선 것은 부지깽이도 기가 막혀할 이 특수국면에 한해서일 것이라는 예단을 피할 수 없다. 이 수십명 작가들이 지난 10년 동안에 쓴 수백편의 작품들이 근 몇 년 동안 나온 단 서너편의 영화보다도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문학의 위의가 무너져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가들의 문학이 조금만 더 올바른 정치의식 아래 생산되었다면, 아니 정치를 의식하기라도 했더라면 어쨌든 지금과 같은 공허한 기분은 없었을 것이다.

문학한다는 부끄러움에…결국 그동안 이른바 지식인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나태와 방관이, 정치로부터의 소외가 누적되는 동안 오늘과 같은 낯 뜨겁도록 무식한 광경이 부패한 암실 속에서 현상되고 인화되어 왔던 것이다. 그동안 문화적 마이너리티가 되어버린 문학만이라도 올바로 섰다면, 우리의 21세기적인 혼곤한 일상 속에, 나날의 소외 속에 이런 황당한 ‘정치’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음을 작은 소리로나마 외쳐주기라도 했다면 문학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옛날 옛적 80년대에 어떤 민족해방파 평론가가 호기롭게 하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날 따뜻하니까 식민지 아닌 것 같지?”

〈김명인 문학평론가〉


최종 편집: 2004년 03월 23일 19:03:23

한겨레 21에서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역시 김명인씨 글 시원~깔끔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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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3-27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들어왔는데, 김명인 씨 글 보니 한 마디 안 쓸 수 없네요. 이 분 글은 항상 맘에 들더라구요. 이 글도 좋네요.

아라비스 2004-03-3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들어오셨어요?^^ 저도 님 서재에 어쩌다 갔었는데...^^; 종종 왕래할까요?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연세대에서 열린 송환 문화축제 행사를 취재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정치적 거리감이었다. 평상시 그들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인도주의에서 비롯된, 그들의 모진 생에 대한 연민이었다. 하지만 행사장에서 만난 그들은 불쌍해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꿋꿋한 의지와 신념의 영웅들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마련한, "민족" "민주" "통일" 등의 단어를 순서만 다르게 조합한 사회단체장들의 환송사는 그들 서로가 은근한 "동지"였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려주었다. 그렇게 장기수들에 대한 내 감상은 끝이 났다.

영화를 보게 된 건 영화제에서 상도 받았다 하고, 마침 빈 시간에 같이 가자 한 사람도 있어서였다. 그들 삶에 대해 더 알고 싶다던가, 알아야 한다던가, 알 것이 남아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두 시간 넘는 시간은 몹시 견디기 힘들었다. 지루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계속 내뿜어대는 메시지가 내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다. "감동, 전율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에너지였다. 감독의 자분히 들려주는 일인칭의 나래이션은 고요할 뿐이었지만. 영화라는 매체의 힘, 다큐멘터리의 힘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문제는, 이미 한단락 마무리 된 것이긴 하나 매우 민감한 정치적 사안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치적인 신념에 상관없이, 지극히 합리적인 사유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의 메시지에 동의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영화가 어떠한 정치적 신념 하에, 만드려고 작정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감독이 그들에게 지닌 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만들어졌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나의 경우 감독의 정치적 태도와 비슷한 지점이어서 영화의 시선과 더욱 쉽게 하나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조차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에 대한 가장 큰 의문은 바로 "어떻게 30여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수감생활을 견딜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미 폐기처분 되어버린, 시대착오적 신념과 사상으로? 아니면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것도 불사한 오기와 고집으로? 그들의 대답, 그리고 감독의 대답은, "전향을 강요하는 폭력 앞에 한 인격체로서 오로지 서 있고자 했을 따름"이란 것이다. 서준식씨의 인터뷰 내용이 흥미로웠다. "인간이 극도의 고통을 견디어 그것을 넘어내는 힘은 정신적인 사상이나 신념이 아니라 결코 굽힐 수 없다는 본능과 오기"라는 그의 말이.

폭력성이 심하면 심할 수록 이를 견디어 내는 힘은 더욱 커지는 법인가. 그렇다면 30년을 0.9평의 독방에서 자살하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고, 살아내게 한 그 힘을 지니게끔 만든,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단 말인가. 우리의 정치 현실과 우리의 역사가 만들어낸 그 폭력성의 정도가 어떠했기에...

북한에서, 그들보다 더 비참하게 살았을, 살고 있을 국군포로나 납북포로들 역시 물론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 때 보여준 국군포로가족들의 행동은 십분 이해할 수 있으며 "납북포로"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 가족과 대화하지 않은 장기수들의 행동은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단지 이 영화에서 보고자 했던 것, 볼 수 있었던 것은 한 개인을 통해 들추어 내어진 우리 겨레와 역사의 아픔, 그에 따른 폭력성이며 "통일"의 당위성이 과연 당위적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찾기였다. 

그 유명한 "실미도"에서도 "태극기..."에서도 얻을 수 없었고 허탈하게 돌아서야 했던 미완의 문제의식을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발견할 수 있었다. 감독의 말대로 근 20여년간 "전향"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감독의 삶이야말로 이 영화를 만들고 빛나게 한 단 하나의 힘임을 느끼며, 그렇게 굳건하게 어디서건 제 자리를 지켜내야 하겠다는 사실을 눈물겹게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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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3-2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극기는 보기 싫어서 두번이나 극장 앞에서 발길을 돌렸는데..
제가 사는 이곳은 온통 태극기만 휘날려서.. 흠..
복잡한 심정으로 <송환>을 보리라 다짐하고 갑니다..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못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전적으로 고독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완전히 혼자서, 아무도 나를 대신해줄 수 없음을 알면서,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일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 의무를 행하면 자기자신을 참으로 거역하고 말살한다는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는데도, 아무도 고마와하지 않는 기막힌 바보짓을 않고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의무를 행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이해도 메아리치지 않고, 자기자신을 <몰아적>이라든가 떳떳하다든가 하는 느낌의 갚음도 없이 누구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 그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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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4-1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근히 몇 번을 읽고 또 읽게 되고,
뭔가 마음 깊이 울여오는데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끄적거릴 수 없는 공명이 있습니다.
칼라너의 사상에 대해서 빨려드는 매력을 느끼게 하는군요.

아라비스 2004-04-2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얇은 책이예요. 내용이 좋아 워드로 옮길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라너 책 중 가장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단 이유로 몇 년 전 읽었을 때는 위 문구 외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그의 사상의 맥락을 훑고 있는 지금, 그가 어떤 지평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으니 더욱 진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꼬옥~ 사서 보시면 좋을 듯.
 

음... 그의 글 전문이 보고싶다.

씁쓸하고 허탈하고 화나는 마음 지울 수 없없던 하루가 지나가는 군...

 

김원우, 후배 소설가에 쓴소리


“형식에의 변주를 시도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수많은 자료와 간접경험을 나름의 시각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사건의 전개에 치우쳐 관념의 개진을 약화시킨다.”

소설가 김원우씨(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가 후배작가인 김영하·배수아·정이현의 작품에 대해 쓴 소리를 했다. 김씨는 최근 발간된 계간 ‘대산문화’ 봄호의 기획특집 ‘2004년 봄, 젊은 소설을 읽다’에서 김영하의 ‘검은 꽃’,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식당’,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분석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지난해 발표됐는데 배수아의 ‘일요일…’은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고 김영하의 작품도 2군데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문학과지성사의 신인문학상 1호로 등단한 정이현의 첫 작품집 ‘낭만적…’ 역시 여론의 호평을 받으며 대형신인의 탄생을 알렸다.

그러나 김원우씨는 이 소설들이 “균형감각을 잃었고(검은 꽃) 사실주의 기법이 아니라 에세이풍 서술에 치우치며(일요일…) 신선미가 떨어지는 데다 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잠시 걸친 듯 날림공사에 그친다(낭만적…)”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김씨는 “형식의 패러디, 그것들의 의도적 뒤섞음, 서술기조의 탈장르화 등의 기획은 어떤 식으로든 안착돼야 형식미라는 이름에 값한다”며 소설전통의 파괴만큼이나 수호도 중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극단적으로 말해 오늘날 남들이 모르는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며 “교훈적·정보적 가치의 공급원으로서 소설의 위력이 미미해진 반면 어떤 이야기라도 작가의 독창적 해석에 따라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층층의 격조를 빚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측면에서 ‘검은 꽃’은 수많은 정보에 치인 감이 있으며 두 작품도 세부적인 인용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검은 꽃’에서 멕시코 초기 유민들이 정글 한가운데 근대국가를 세우는 대목은 이론적 짜깁기라는 혐의가 짙다고 지적했다. “날 것의 자료를 버리기 아깝다고 마구 인용할 때 작품의 정보 부각에는 무해무득하다”는 게 김씨의 지론이다.

김씨는 또 ‘우리 젊은 소설에 유전인자처럼 확고하게 자리잡은’ 영화적 기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자연시간으로서의 현재와 인위시간으로서의 과거를 뒤섞은 장면의 스냅식 전환이나 미흡한 수준에 머문 아이러니와 풍자와 해학의 직조, 너무 다사다난해서 신파극 같은 주요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세파의 부대낌 등이 관념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사건의 지칠 줄 모르는 조작행위는 인간의 위상을 몰라볼 지경으로 떨어뜨려 가혹한 현실에의 노예화에 이른다”며 “반영화적 발상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일지 모르나 그런 아집이 장르 감각의 독보성 유지에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최근 한국소설의 개간이 이뤄지고 있으나 그 개간지는 아직 너무 거칠어서 사람다운 사람의 운신을 제한하는 수준”이라며 “땅뙈기를 무작정 넓혀가기보다는 작지만 조촐한 채전밭을 일궈가는 데 전심전력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윤정기자〉


경향신문 최종 편집: 2004년 03월 11일 18:3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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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4-07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고집스런 김원우씨의 얼굴이 눈에 보일 듯 하네요.세 자매이야기를 읽고부터 그의 글을 좋아했지요. 모두들 띄워주는 작가지만 늘 20% 부족하다 싶었고 불만스러웠으나 딱 꼬집어 표현하기 어려웠는데 김원우씨가 잘 썼네요.

아라비스 2004-04-0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가 아니고 20%시라구요?^^; 알라딘에서도 워낙 인기가 높아 이 글 올리고도 조마조마 했었는데, 그래도 님이 동감해주시니 괜히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