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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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을 읽었을 때는 약간 뜨아한 느낌만 일었다. 알라딘에서 진중한 추천을 받은 책이라 무척 기대하면서 펼쳐들었는데 저자가 바라본 그림들은 인류의 혼을 담고 있다는 소위 '명화'들도 아니었고 깊이있는 미술사 지식을 찾아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캄비세스왕의 재판'이라는, 내가 보기에도 끔찍한 그림 때문에 다음날 아침에는 악몽을 떨치며 일어나야 했으니... 하긴 잠자리에서 후루룩 넘겨본 그림 모두는 고매한 인류 정신이 담긴 것들이기보다는 그 어떤 사실적인 영화의 한 장면보다 훨씬 잔혹한 피와 폭력, 고통을 그린 것들이었으니 악몽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전부 읽고나니 악몽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그러한 악몽을 단 한 번도 꾸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인류의, 그리고 인간의, 그리고 이 사회의 처절한 폭력과 고통의 실상을 내가 경험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 악몽보다 몇 배 괴로웠다. 내 피가 아닌 단지 내 머리 속에 악과 부조리가 정형화된 정식으로 들어차 있었던 것에 자괴감이 들었다.

예술이 고통받는 민중과 어떻게 교유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예술이란게 그들에게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일까 하는 내 고민의 흔적은 혼자 누리기에 조금 미안한 심정의 다른 표현일 뿐 허위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감히 고통에 대해, 고통받는 사람에 대해 말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음을, 그들에 대한 위무란 그래서 결국 허위였음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림들과 어떻게 마주했는가. 나는 늘 미술관 해설서를 들고 유명작품만을 찾아 해설을 읽고, 공부하고, 해설서가 말하는 대로 느끼고 싶어했고 느낄 수 없으면 안달했다. 그리고 왜 위대하고 아름다운 작가의 혼과 인류의 정신을 찾을 수 없을까 낙담하기만 했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은 그림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보고 느꼈고 아파했다니 나 자신이 이렇듯 천박하게 느껴진 적도 없다.

이제서야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서 왜 그토록 생경하게 떨리기만 했는지, 그 작품을 오래도록 뚫어지게 쳐다보며 분석할 수 없었는지 알 듯 하다. 고야의 '쁘린씨뻬 삐오 언덕의 총살'에서 새하얀 상의를 입고 무방비로 두 손을 치켜든 청년의 가슴에 금새 총알이라도 박힐 것 같아 가슴 한 구석이 불안했던 기분의 정체를 이제서야 알겠다.

이제 폭력에 대해, 악에 대해, 그리고 고통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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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카로 - 쉐퍼 선생님의 '자연학교'
이마이즈미 미네코 지음, 최성현 옮김 / 이후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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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여름 농촌봉사활동, 일명 농활에서는 농민들의 연령대, 성별을 구분해서 실시하는 저녁 일과인 분반 활동이 있다. 예를 들면 청년반, 부녀반, 장년반 등의 분류인데 이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까 암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아동반 활동이다. 도시에 사는 대학생들이 농촌 어른들과 단번에 신뢰 관계를 쌓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진심어린 마음이라면 어린이들에게는 쉽게 가닿을 수 있는 것이고 어린이들이 집안 어른들을 움직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수순이었던 것이다.

쉐퍼 선생님의 '자연학교' 이야기를 접하면서 지난 시절 농활에서의 아동반 활동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쉐퍼 선생님은 아이들의 교육 현장에서 환경에 대한 의식과 생활의 변화를 고취시키며 이를 전 마을로까지 번져가게 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환경교육은 미래 세대의 교육이란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어른들이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생명, 환경에 관한 일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는 나로서도 비온 뒤 아스팔트 바닥에 죽어있는 지렁이는 그냥 징그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물론 한 생명체가 죽은 모습이 감각적으로 좋을 수는 없는 일이겠다. 그래도 최소한 아스팔트가 너무 길게 깔려 있어 미쳐 건너지 못한 지렁이가 안타깝게 죽은 것이라든지 다행히 이 근처 땅은 살아있는 것 아닌가 등의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좀 우스운 질문인 듯 하지만 어떻게 하면 나는 지렁이를 징그럽게 여기지 않고 사랑하게 될까? 머리로 알지 않고 몸으로 느끼는 일,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 중요한 환경적인 이슈가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문명은 갈수록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자연과의 교감을 상실하게 하는 방향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인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들은 결코 자연과 친화할 수 없을 듯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쉐퍼 선생님의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지렁이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보며 느끼는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인간이 자연과의 교감을 되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어렴풋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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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
존 라이언 지음, 이상훈 옮김 / 그물코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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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잘못된 습관 한 가지를 바꾸는 일이 지구의 환경을 보존하는 데에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된다면, 아니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한발짝 더 생각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를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만약 우리가 일상에서 단 몇 가지 점만 달리 행동할 수 있게 되면, 대체에너지나 새로운 환경기술 개발을 위해 막대한 기술과 비용을 투자하는데 그리 힘쓰지 않아도 되고,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지속가능한 개발'이니 뭐니 하며 머리를 맞대고 회의할 일도 없어진다는데, 그걸 안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90년대 초반 일상생활 속의 환경실천을 알리는 목소리들도 이제 점점 희미해져가고 요즘의 '환경'이란 이슈는 나같은 일반인들에게는 너무 사회운동적이거나 이론적인, 거대한 담론으로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란 질문 앞에는 어떠한 대답도 손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할 때 이 책은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들을 잘 알려주기 때문에 참으로 반갑고 고맙다.

환경과 관계된 7가지 아이콘들은 언뜻 황당하거나 소박하게 보이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친근한 소재들을 통해 환경문제의 이슈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혜안은 놀랍다. 자전거와 천장선풍기는 대기오염과 에너지 문제를, 콘돔은 인구 문제를, 타이국수는 식량 문제를, 공공도서관은 자원재활용을, 빨랫줄은 에너지 문제를, 무당벌레는 토양오염과 수질오염을 이들 아이콘 너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어느 것 하나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생태계 전반의 문제이다.

저자가 북미 문화권을 들어 설명하는 것을 보며 우리나라는 다행히도(?) 아직 그만큼 잘 살지 못해서 그들 나라 정도로 죄를 지으며 살지는 않는다고 느꼈다. 하지만 앞으로 더 잘 살게 되더라도 그래서는 안되겠고 지금부터도 고칠게 참 많다. 책을 읽는 내내 아쉽게 생각했던 것은 이런 류의 책이 우리 문화권에 맞게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점이다. 타이국수를 먹으라는 이야기나 지하에서나 간혹 볼 수 있는 천장선풍기를 틀라는 설명을 마냥 듣고 있을 수 만은 없지 않은가.

이 책에 이렇게 감동하더라도 삶는 기능이 가장 마음에 드는 드럼 세탁기를 사용 안 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알라딘을 통해 책도 꾸준히 살 것이다. 하지만 베란다에 고스란히 모셔두고 있는 자전거의 먼지를 털고 앞으로 종종 타고 나닐 계획이다. 마트에서는 좀 비싸더라도 유기농산물을 집을 것이고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에 사려는 계획을 미뤄두었던 에어콘 역시 평생 없이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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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 죽다
정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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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정찬의 소설이 좋았다. 엄숙주의 탓이라 해도, 그리고 우울하고 그늘진 걸 편안해하는 취향 때문이라 해도 좋다. 삶에 대한 작가의 진지하고 잦아드는, 그러면서도 지적이고 이상적인 탐구에 마냥 끌렸다. 게다가 모두가 광주에서 눈을 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금남로 거리에서 떠나지 못하는 그가 처량맞은 양심같아 보였다.

그의 작품을 드문 드문 읽기는 했지만 소설집은 참 오랜만이다. 들뜬 마음으로 한 편 한 편을 읽어나가는데 처음에는 답답했고 갈수록 슬퍼졌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너무나 오랜 기간 그 자리에만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내 옷은 요즘 유행하는 패션을 쫓았는데, 아련한 기억으로 되새겨지는, 오랜만에 조우한 지인은 예전 그대로 남루한 옷을 입고 서 있었다. 그것이 답답했고 그것이 슬펐다.

지인과의 재회는 초라했지만 남겨진 내 자리는 텅 비어버렸다. 그가 정말 마냥 예전과 똑같을 뿐이었을까, 나의 사랑과 이상을 알아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내가 변해버린 건 아니었을까. 남겨진 자리가 허전할수록 의문은 더욱 회의적으로 깊어 간다.

그러나 결국,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허전한 바람이 가슴을 스쳐 지나가기는 해도 오직 강물 위를 흐르는 건 기억 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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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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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비통함을 검은 다이아몬드처럼 그려내는 작가'라는 말이 너무나도 적확해 소름끼칠 정도다. 다이아몬드의 가벼운 반짝임과 아름다움 이면에는 세상 그 어느 물질보다 가장 단단하기에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들어서 있다. 더군다나 삶의 비통함이 지하에서 오랜 시간 응축되어 탄생한 검은 다이아몬드라면... 책 날개에 실린 그의 얼굴 속에는 여느 작가의 사진에서 보여지는 지적이거나 귀기 어리거나 천재적인 호기심의 표정이 드러나질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보잘 것 없게 살아온 그러나 자신만의 세계를 간직한 자에게서 보여지는 강인함이 두렵게 느껴질 정도다. 그녀는, 그리고 그녀의 글은 검은 다이아몬드 이외의 다른 어떤 표현이 불가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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