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연세대에서 열린 송환 문화축제 행사를 취재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정치적 거리감이었다. 평상시 그들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인도주의에서 비롯된, 그들의 모진 생에 대한 연민이었다. 하지만 행사장에서 만난 그들은 불쌍해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꿋꿋한 의지와 신념의 영웅들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마련한, "민족" "민주" "통일" 등의 단어를 순서만 다르게 조합한 사회단체장들의 환송사는 그들 서로가 은근한 "동지"였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려주었다. 그렇게 장기수들에 대한 내 감상은 끝이 났다.

영화를 보게 된 건 영화제에서 상도 받았다 하고, 마침 빈 시간에 같이 가자 한 사람도 있어서였다. 그들 삶에 대해 더 알고 싶다던가, 알아야 한다던가, 알 것이 남아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두 시간 넘는 시간은 몹시 견디기 힘들었다. 지루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계속 내뿜어대는 메시지가 내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다. "감동, 전율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에너지였다. 감독의 자분히 들려주는 일인칭의 나래이션은 고요할 뿐이었지만. 영화라는 매체의 힘, 다큐멘터리의 힘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문제는, 이미 한단락 마무리 된 것이긴 하나 매우 민감한 정치적 사안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치적인 신념에 상관없이, 지극히 합리적인 사유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의 메시지에 동의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영화가 어떠한 정치적 신념 하에, 만드려고 작정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감독이 그들에게 지닌 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만들어졌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나의 경우 감독의 정치적 태도와 비슷한 지점이어서 영화의 시선과 더욱 쉽게 하나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조차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에 대한 가장 큰 의문은 바로 "어떻게 30여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수감생활을 견딜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미 폐기처분 되어버린, 시대착오적 신념과 사상으로? 아니면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것도 불사한 오기와 고집으로? 그들의 대답, 그리고 감독의 대답은, "전향을 강요하는 폭력 앞에 한 인격체로서 오로지 서 있고자 했을 따름"이란 것이다. 서준식씨의 인터뷰 내용이 흥미로웠다. "인간이 극도의 고통을 견디어 그것을 넘어내는 힘은 정신적인 사상이나 신념이 아니라 결코 굽힐 수 없다는 본능과 오기"라는 그의 말이.

폭력성이 심하면 심할 수록 이를 견디어 내는 힘은 더욱 커지는 법인가. 그렇다면 30년을 0.9평의 독방에서 자살하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고, 살아내게 한 그 힘을 지니게끔 만든,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단 말인가. 우리의 정치 현실과 우리의 역사가 만들어낸 그 폭력성의 정도가 어떠했기에...

북한에서, 그들보다 더 비참하게 살았을, 살고 있을 국군포로나 납북포로들 역시 물론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 때 보여준 국군포로가족들의 행동은 십분 이해할 수 있으며 "납북포로"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 가족과 대화하지 않은 장기수들의 행동은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단지 이 영화에서 보고자 했던 것, 볼 수 있었던 것은 한 개인을 통해 들추어 내어진 우리 겨레와 역사의 아픔, 그에 따른 폭력성이며 "통일"의 당위성이 과연 당위적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찾기였다. 

그 유명한 "실미도"에서도 "태극기..."에서도 얻을 수 없었고 허탈하게 돌아서야 했던 미완의 문제의식을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발견할 수 있었다. 감독의 말대로 근 20여년간 "전향"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감독의 삶이야말로 이 영화를 만들고 빛나게 한 단 하나의 힘임을 느끼며, 그렇게 굳건하게 어디서건 제 자리를 지켜내야 하겠다는 사실을 눈물겹게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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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3-2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극기는 보기 싫어서 두번이나 극장 앞에서 발길을 돌렸는데..
제가 사는 이곳은 온통 태극기만 휘날려서.. 흠..
복잡한 심정으로 <송환>을 보리라 다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