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문화로 읽는 세상]사랑 그리고 결별해야 할 것


3월12일, 의회반란이 있었던 다음날 나는 한 일간지의 앞면을 장식한 한 편의 시를 읽었다. 안도현이 쓴 ‘울지마라,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의 시였다. “2004년 3월12일을 죽음이라 부르자”는 김지하의 운으로 시작되는 그 시는 얼핏 상투시였다. 한줌도 안되는 금배지들에 의해 쿠데타를 맞았으니 국민의 힘으로 이에 저항하자는 말이니 시인의 노여움치고는 꽤나 밋밋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시인들조차 혀를 내두를 그야말로 ‘초현실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황당한 상황 앞에서 시인인들 별다른 말이 생각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의 한 두 구절은 그래도 눈에 밟혔다. “이건 아니다 백 번 천 번 양보해도 이건 아니다”라는 구절, 그리고 “사랑해야 할 것과/결별해야 할 것이 분명해졌으니”라는 구절이었다. 알다시피 안도현은 80년대에 같이 시를 썼던 다른 시인들이 거의 낙백의 수준으로까지 시를 내려놓았던 90년대 내내 거꾸로 상당한 정도의 문명을 날려왔던 시인이다. 그의 편안한 시풍과 적당한 연성 메시지들이 그 어떠한 거칠고 날카로운 것들도 남김없이 흐물흐물하게 만들어버렸던 90년대라는 시공간에서 대중적으로 넓은 호소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을, 솔직히 말하면 나는 마뜩찮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백 번 천 번 양보해도”라는 구절 속에서 나는 자신이 그동안 사실은 굴복했었던 게 아니라 양보했었다고, 그동안 한번 시대 앞에 한없이 너그러워졌었노라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너그러울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노라고 하는 시인의 변명이자 자기확인이 읽혀졌다.

시인들도 혀 내두른 탄핵그리고 ‘사랑해야 할 것’과 ‘결별해야 할 것’을 분명히 구별하겠다는 구절에서 3월12일 이후 그의 시적, 인간적 실존이 선택한 자리가 어디인지 엿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3월15일, 이번엔 젊은 소설가 서른여섯명의 시국성명 ‘남겨진 6월항쟁의 뒤 페이지를 위하여’를 접할 수 있었다. 거기선 김남일 방현석 정도상 안재성 등 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부터 은희경 공선옥 김형경 송경아 하성란 등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 그리고 김종광 김현영 이명랑 표명희 등 2000년대에 등단한 새내기 작가들까지 한데 모여 “6월항쟁의 뒤 페이지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었다”는 반성과 “등이 휘는 무거운 작가적 실존으로 6월항쟁의 서사를 진정으로 마무리”하리라는 각오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내 시인들이, 작가들이 정신을 좀 차린 것일까? 조금은 바뀌는 것일까?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정신적 공황상태 속에서 차마 흐린 펜끝을 더 어찌하지 못해 펜을 내던졌다가 근 10년만에 다시 향해 말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수년 간이나마 먼저 싸움을 걸어오는 동안 ‘외롭다’는 생각이 절실했던 나로서는 동료·후배 시인·작가들의 이런 변명과 각오들이 차라리 생뚱맞다고 할 정도로 새삼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고맙고 대견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만시지탄’이라는 생각이 먼저 나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나선 것은 부지깽이도 기가 막혀할 이 특수국면에 한해서일 것이라는 예단을 피할 수 없다. 이 수십명 작가들이 지난 10년 동안에 쓴 수백편의 작품들이 근 몇 년 동안 나온 단 서너편의 영화보다도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문학의 위의가 무너져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가들의 문학이 조금만 더 올바른 정치의식 아래 생산되었다면, 아니 정치를 의식하기라도 했더라면 어쨌든 지금과 같은 공허한 기분은 없었을 것이다.

문학한다는 부끄러움에…결국 그동안 이른바 지식인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나태와 방관이, 정치로부터의 소외가 누적되는 동안 오늘과 같은 낯 뜨겁도록 무식한 광경이 부패한 암실 속에서 현상되고 인화되어 왔던 것이다. 그동안 문화적 마이너리티가 되어버린 문학만이라도 올바로 섰다면, 우리의 21세기적인 혼곤한 일상 속에, 나날의 소외 속에 이런 황당한 ‘정치’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음을 작은 소리로나마 외쳐주기라도 했다면 문학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옛날 옛적 80년대에 어떤 민족해방파 평론가가 호기롭게 하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날 따뜻하니까 식민지 아닌 것 같지?”

〈김명인 문학평론가〉


최종 편집: 2004년 03월 23일 19:03:23

한겨레 21에서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역시 김명인씨 글 시원~깔끔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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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3-27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들어왔는데, 김명인 씨 글 보니 한 마디 안 쓸 수 없네요. 이 분 글은 항상 맘에 들더라구요. 이 글도 좋네요.

아라비스 2004-03-3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들어오셨어요?^^ 저도 님 서재에 어쩌다 갔었는데...^^; 종종 왕래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