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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했음'이나 '잘 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를 닮았다'라고 써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이불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막연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번째 문장은 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을 매우 독특하다. 그의 대표작인 <비밀노트>의 이 구절은 그의 문장론 또는 문체론을 정리한 것처럼 문장의 서술에 대한 그의 견해를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어떠한 생각으로 이렇듯 독창적인 소설을 쓰는지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엿볼 수 있다고나 할까.

문장론에 관한 교과서 한 구절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그리고 감정의 서술 대신 사실 묘사가 중요하다는 그의 견해는 우리가 평소 얼마나 많은 판단과 그로 인한 선입견 속에 살고 있는지까지 반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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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sta 2004-08-0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에 오니 정말 좋군요. 저 혼자였으면 도저히 몰랐을 책들을 많이 접하게 되어서 말입니다.
(간혹 올려주시니 반가와요.^^)
 

영원히, 신은 생명을 주면서 분만의 침대 위에 누워계신다. 신의 본질은 출산이다 - 마이스터 에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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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7-3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찾아뵙네요. 님의 새 페이퍼가 올라왔다고
제 서재에 올라와 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왔습니다.
여름이 뜨거워지기 전까지 엑카르트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나 반갑고 깊게 울려오네요.

찌는 듯한 여름 풍경에서 아름다운 모퉁이들 만끽하시길*^^*

Smila 2004-07-3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출산예정일을 이틀 앞둔 저에겐 너무 크게 와닿는 한마디!

아라비스 2004-08-05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랜만이죠... 실은 에카르트의 책에서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과연 그가 한 말인지 확인이 필요하긴 하지만, 스밀라님처럼 저도 감동먹어서 올렸습니다. 물무늬님께서 요새 에카르트를 공부하시나봐요. 보통 삼위일체론에서는 신이 발출, 기출한다고 하는데 과연 에카르트가 출산, 한다고 했는지, 나중에라도 가르쳐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스밀라님, 순산 기원합니다~

2004-08-05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라비스 2004-08-0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마태님...
 

구원의 진정한 신학적인 개념은 결코 밖에서 갑자기 인간에게 도래하는 미래의 기쁜 상황-또는 그것이 멸망인 경우에는 기쁘지 않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다만 도덕적인 판단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상황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자유로이 하느님 앞에서 가지는 진정한 자기이해와 진정한 자기 실현의 최종 결정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유로이 초월을 해석하고, 이것을 선택할 때 자신에게 개시되고 제공되어 있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것이다. 인간의 영원성은 오직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자유의 본래성 그리고 최종 결정성으로서만 이해되는 것이다. 그밖의 모든 것은 결국 시간 속에 있다. 거기에 영원은 없다. 영원이란 시간의 반대의 것이 아니라, 자유의 시간의 완성인 것이다.

요새는 그림책, 만화책 외에는 책을 일부러 잘 읽지 않으려고 하니 "엑스 리브리스"에 쓸 것이라곤 공부하는 책 뿐이다. 하지만 이렇듯 훌륭한 사상을 접할 때면 다른 책을 못 읽고 있는 것이 조금 덜 안타까울 때도 있다.  하지만 신학 책 속에만 박혀 있을 때면 늘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 걸 어찌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비종교인(또는 비 그리스도교 신앙인)에나 종교인(또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나 외면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비종교인에게 신학은 지하철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떠들어내는 이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며 일명 "독실한" 신앙인들에게 역시 "믿음이 부족해 머리로만 따지려 한다. 신앙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물론 종래의 신학이 일정 부분 스스로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한 것은 여전히 자기 반성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어느 선배의 말처럼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학은, 그리고 진지한 신학자들의 사상은 결국 그들이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이해하려 했는가에 있을 지도 모른다. 자연과학자들이 우리 주변의 자연 현상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 역시 우리의 일상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신학자들이 논하는 것은 하늘 위 구름 속에 갇힌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들이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해결되지 않는 신비이다. 따라서 설령 그들의 언어가 스콜라 철학의 용법에 갇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논구하고 있을 때라도 우리는 그들이 왜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이것이 우리 신앙에서, 삶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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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4-28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요즘 다른 책은 읽지 못하고 있어서 님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신학....그 뜨거운 감자가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제게도 참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깊이 공감됩니다.
그럼에도 님의 말씀처럼 너무나 소중한 의미가 있네요....
그래도 저처럼 신학에 관심을 갖는 님같은 분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네요....^^
 

우리는-신학자로서 또는 수도자로서-이 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무엇이 세상인지, 세상이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세상이 형성되고 구성되어 있는지 등 신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고서도 신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창조개념은 이로써 공허한 개념이 되고 만다. 피조물의 내용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가 어떻게 신의 창조사업을 진지하게 논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세상의 창조주 하느님 하며 신을 찬미하고 사랑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신약성서 면면은 예수가, 자신이 속한 시공간의, 당시 이스라엘 민중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내며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았고 그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니고 있었음을 드러내준다. 그는 바리사이인들이 지닌 허위의 심층, 율법을 강조하는 그들의 문자지상주의, 패권주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내부를 통렬히 비판한다.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반대되는 사회 현실을, 그 내부를, 심장을 정확히 읽어낸 것이다. 또 예수는 종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비전을 민중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속담 등 그들 언어로 표현해 냈으며 그들의 생활상을 들어 비유로 설명했다. 예수는 단지 아름답고 고상한 말만 뿜어낸 교양인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생활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그리고 그 교회의 최고 권력층은 점점 그들만의 성에 스스로 갇힌 채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듯 보인다. 현대인의 일상생활은 그들에게 그저 속된 것, 세상적인 것, 하느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게 만드는 것, 비본질적인 것,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신경쓰지 말아야 될 것, 물리쳐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의 악과 고통, 있는 그대로의 세상살이 모습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그들에게 세상은 때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또 때로는 죄많은 인간이 더럽혀 놓은 천한 것의 양극단을 오간다. 그들이 사는 물리적 공간은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제 입으로 들어갈 밥을 자기 손으로 벌어먹지 않을 뿐 아니라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상의 행위마저도 그들이 고용한 '세상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가난하게 산다고, 세상에 대해 어떤 욕심도 없다고 착각하며 지낸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병들었을 때 치료해 줄 것, 죽으면 묻어줄 것이 보장된 상태에서 더이상의 욕심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 안락하고 모든 것이 보장되어 있는 곳에서 그들은 제 손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세상 사람들이 부디 죄악을 떨쳐버리고 하느님에게 돌아오길,  하며, 그저 허황된 기도만을 되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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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7-22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교회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평생을 두고 제게 시험대처럼 다가올 듯한데 독실하다는 신앙의 선배들에겐 제 속을 드러낼 수 없으니 원...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못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전적으로 고독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완전히 혼자서, 아무도 나를 대신해줄 수 없음을 알면서,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일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 의무를 행하면 자기자신을 참으로 거역하고 말살한다는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는데도, 아무도 고마와하지 않는 기막힌 바보짓을 않고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의무를 행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이해도 메아리치지 않고, 자기자신을 <몰아적>이라든가 떳떳하다든가 하는 느낌의 갚음도 없이 누구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 그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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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4-1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근히 몇 번을 읽고 또 읽게 되고,
뭔가 마음 깊이 울여오는데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끄적거릴 수 없는 공명이 있습니다.
칼라너의 사상에 대해서 빨려드는 매력을 느끼게 하는군요.

아라비스 2004-04-2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얇은 책이예요. 내용이 좋아 워드로 옮길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라너 책 중 가장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단 이유로 몇 년 전 읽었을 때는 위 문구 외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그의 사상의 맥락을 훑고 있는 지금, 그가 어떤 지평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으니 더욱 진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꼬옥~ 사서 보시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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