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적의 딸 로냐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11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 일론 비클란드 그림, 이진영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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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드그렌 할머니의 책은 서평 쓰기가 영 어렵다. 왜일까? 넘치는 감동을 받은 작품일수록 적절한 거리와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작품의 면모를 하나하나 분석하기가 까다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감상도 단편적인 문장의 나열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1. 이 세상 모든 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산적의 '아들'이 아닌 산적의 '딸'이 주인공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얼마나 통쾌한지. 아직까지도 유명한 문학, 예술 작품에서 어린 소녀가 멋진 주인공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드물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정도? 린드그렌 할머니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놀다가 죽지 않은게 신기하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던데 씩씩하고 활동적인 로냐야말로 작가의 분신으로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2. 숲은 로냐와 비르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입사식의 공간이다. 이들은 부모로부터 독립해 다른 곳이 아닌 숲에서 생활하며 스스로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발견해간다. 물론 이 이야기의 입사식은 그 어떤 이야기에서보다 훨씬 주체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아이들은 완전한 고립과 위험의 장소이면서도 한편 원초적 생명력의 근원지인 숲에서 정체성을 찾아간다.

3. 린드그렌의 모든 작품에서 그렇듯이 빼어난 묘사와 독특한 유머는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장점이다. 산적들의 캐릭터는 눈에 보이듯이 선연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에 웃음짓게 한다. 유머는 산적들이 악한과 선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게 만든다. 이 점은 무척 중요한데 그 까닭은 '타고난' 로냐와 '다시 태어난' 로냐의 성격 차이, 즉 로냐의 입사식 과정과 그 의미를 부각시켜 주기 때문이다.

4. 작품 자체를 놓고 평가할 때 당연 별 다섯 개를 주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네 개만 주고 마는 이유는 보다 솔직하기 위해서다. 로냐의 입사식 과정은 올바르고(?) 흥미진진했지만 이미 입사식을 지나 성인인 나에게 어린 소녀의 자아탐색 과정이 감동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엄밀히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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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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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란 이름에는 향수가 어린다. 그 향수에는 어렸을 적 즐겨보았던 티비 드라마의 추억이 담겨있다. 그 외화 시리즈를 다시 한 번 방영되길 학수고대 하고, 책 속 삐삐의 대화문은 이름 모를 한국인 성우의 목소리와 계속 중첩된다. 그 유명한 작품을 이제서야 원작인 소설로 읽었다. 삐삐가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오랜 기간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할머니의 작가적 역량 덕분일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어떤 아동문학에서, 소설에서, 영화에서 삐삐만큼 독특한 캐릭터를 찾아볼 수 있을까.

원작으로 처음 읽은 삐삐는 요사이 유행하는 '엽기 코드'에 가깝다. 그 아이의 행동거지, 상상력, 무궁무궁한 거짓말, 세상과 기존 질서에 대한 시선은 가히 '엽기적'이라 할 만하다. 삐삐를 요즘 말로 부른다면 '엽기 소녀'쯤?... 하지만 삐삐를 '엽기 소녀'라고 부르기에 삐삐는 너무 오래 전에 탄생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다. 다시 말해 요즘의 '엽기'와는 분명 다른 구석이 있는 것이다. 삐삐의 '엽기성'은 어떤 것이며 요즘의 '엽기'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요즘 대부분의 '엽기'는 단순한 일탈과 눈요기를 추구하는데 비해 삐삐의 엽기성은 파괴적인 상상력에 기초해 건전한 다시 보기를 시도하는 듯 하다. 삐삐의 말과 행동은 지극히 '비사회적'이고 우리가 바라는 '착한 어린이상'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얼마나 질긴 제도와 관습의 굴레에서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하고 이를 의심하고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온실속의 화초처럼 곱게만 자라온 옆집아이들, 토미와 아니카에게 놀라운 즐거움을 안겨주는 많은 에피소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지, 나도 그렇게만 놀고 싶다. 게다가 티파티에서 가정부들 흉을 보는 위선적인 주부들에게 그보다 더한 가정부 이야기를 해대는'맞불작전'은 얼마나 통쾌한지.

어찌보면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이러한 삐삐의 말과 행동은 어떠한 악의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삐삐는 도둑들을 혼내주지만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준 도둑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서커스를 망치지만 서커스 속 힘 대결의 승리자로 당연히 받아야 할 상금을 거절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삐삐가 불난 집의 아이들 구해주는 장면은 삐삐가 '착한 아이'라는 점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주는 장면이다. (린드그렌 할머니는 어쩌면 '노파심' 때문에, 즉 삐삐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혹 삐삐를 읽은 아이들이 삐삐처럼 될까봐 걱정할 부모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이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로 삐삐가 아동문학 작품으로 과연 괜찮은 건지 의심하는 눈초리나 논란들은 그야말로 '노파심'으로 봐도 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성인문학의 인물들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모두들 '비정상적'인 인물들인데 아동문학의 캐릭터는 모두 착한 어린이의 전형이 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나 삐삐를 좋아하던 나도 이렇게 범생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데(?) 아이들이 삐삐를 읽는다고 해서 집안을 어지럽히거나, 소란을 피운다거나, 학교에 가지 않는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내면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승화시킬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엽기'이든 무엇이든, 파괴적이면서도 건전한 상상력으로서 말이다. 어른들에게 '착한 어린이'로 규격화되어 자라길 강요받고 있는 요즘의 아이들에게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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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잇
김영하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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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는 소설가인데도 난 그의 소설집은 단 한 권 읽은 반면 에세이는 세 권이나 읽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실 난 우리나라 사람들이 쓴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할만한 소설가나 유명인이 쓴 것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에세이들은 나르시시즘을 과대포장한 것에 불과하거나 지적, 문화적 수준의 얄팍함을 드러내기 십상이다. 청승맞거나, 도덕 교과서 같거나, 지루하거나, 잘난 척 하거나, 무식하거나,... 암튼 그러기가 쉽다.

이 책 역시 때론, 그리고 약간, 그러한 에세이의 치명적인 약점을 피해갈 수는 없는 듯 하다. 처음에는 그를 무척 재밌고 살아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그는 '날라리인 척 하는 범생'으로 보인다. 그의 글을 읽으며 평소 생각하던 바와 일치하고 그리고 미처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해도 비슷하게 느끼던 부분들을 드러내 준 것을 발견하며 동질감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동질감은 그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김영하란 작가와의 만남은 대학시절 일명 '반짝이'라 불렀던 뭇 남학생들을 떠올리게 한다. 잠깐 가슴설레며 좋아했지만 그건 아주 잠깐, '반짝'하는 것에 불과했을 뿐 불과 며칠, 몇 주일, 몇 달이 지나 그 관심이 사그라들던 그런 사람들... 처음에는 나와 비슷한 감성과 시대의식을 가진 젊은 작가라고 좋아했지만 '작가'에게 그 같음은 곧 그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일까...

하지만 난 아직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그는 소설가이므로 나는 그의 소설을 읽고 그를 '반짝이'로 규정할지 또는 '친구'나 '연인'으로 이름지을지 생각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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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이우일의 영화이야기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마음산책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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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또다른 영화 이야기 <굴비낚시>는 무척 재밌는 책이었다. 영화문법에 주눅들지 않고, 영화 속에 함몰되지 않고 작품 하나하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그의 영화평은 내가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보고 느끼고 즐길 것인지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에 고무되어 '내 방식의 굴비 낚시를 하리라'고 결심까지 했던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영화에세이인 이 책 역시 재미를 줄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김영하는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그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등등의 소설가의 글에서나 볼 수 있는 재미를 한껏 느끼게 해주었다. 아름다운 책 표지와 이우일의 한 컷짜리 그림은-난 역시 엄숙주의자인지 네다섯컷의 만화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글의 내용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기분 좋은 책을 위해서는 기획력과 북디자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 책이 <굴비낚시>처럼 좋지는 않다. 왜 그럴까? 재밌는 얘기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듣다보면 싫증나는 것처럼 그만의 독특한 영화 이야기의 형식이 이제 시들해져서인가. 아님 작가가 말한 것처럼 '나도 이 정도는 쓰겠다'란 생각에 처음에는 친근감을 느꼈으면서도 더이상 신선함과 지적 자극을 전해받지 못해서였을까. 아님 <굴비낚시>보다 파격적으로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도 하지 않는 글쓰기가 조금은 무례하게 느껴져 기분이 상한 것일까. 처음에는 돋보였던 책의 기획성도 슬슬 상업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책이 <굴비낚시>보다 재미가 없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여전히 재밌고 김영하는 여전히 재미있을 것이고 아마 나는 그의 책을 또다시 읽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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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에게 키스를!
수잔 제인 길머 지음, 이진 옮김 / 한숲출판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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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나는 점점 페미니스트가 되어 가고 있다. 그동안 나는 페미니즘을 외면해 왔다. 흑백논리로 중무장해 전투만 하려 들고, 희생자로서 피해의식만 갖고 있는 듯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핵심인 결혼제도가 하루하루 나의 자유를 압박해오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별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페미니즘의 문턱에서 대답과 해결책을 구하고 있다. 나 자신의 문제 속에 빠져 허우적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책과 이론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페미니즘 관련 책들을 읽을 수록 난 점점 답답해져만 갔다. 그 책들에서 보여준 문제의식과 비판의식은 오히려 이 현실이 얼마나 공고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듯해 해결의 기미가 더욱 보이지 않게 여겨졌다. 그리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칼날 세우지 않고, 이성적으로 살지 않고, 대충 이것저것에 맞춰 주며 살아가는게 오히려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페미니스트로 사는 건 전혀 행복하지 않아 보였고 불행을 자초하는 길 같이 느껴졌다.

그건 어쩌면 많은 책들이 이론에만 머물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내려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을 갖고도 어떻게 당당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통통 튀고, 통쾌하고, 공유할 수 있고, 무엇보다 희망적이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가부장적 현실이 너무나도 비슷하고 꼭 우리나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무척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유교적인 가부장 문화의 본산이라 할 만한 우리나라와 보수주의이기는 해도 더욱 발달한 산업사회인 미국이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다니. 이 두 나라에서 여성의 현실이 피차일반인 걸 보면 역시 가부장 문화가 오랜동안 인류 문화에 뿌리박혀 여성을 억압해 온 제도라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하지만 답답하지는 않다. 나의 현실이 모든 여성의 현실이라면, 다른 여성들과 함께 나의 삶을 조금더 여유를 두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말했듯 나의 현실 역시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나의 불행을 굳이 행복이라 부르지는 않더라도 좀더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듯 하다. 우리가 언젠가는 넘어가야 할 산과 아울러 그 산을 넘는 과정에서 쉴만한 공간을 찾게 해준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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