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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밀키웨이 > 철학이 담긴 동화작가 레오 리오니



레오 리오니(Leo Lionni)는 1910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리오니의 집 근처에는 유럽을 대표하는 박물관이 두 곳 있었고, 그의 두 삼촌들은 미술품 수집가, 건축가였다. 안팎으로 예술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주변 환경 덕분에 리오니는 어릴적부터 그림, 조각, 건축, 그래픽 디자인 등 예술적 분위기에 흠뻑 젖어 살았다.
리오니의 방 앞에는 달력처럼 샤갈의 원화(原畵)가 걸려 있었고, 대부분의 학교 친구들이 공원에 모여 축구 시합을 하는 토요일마다 리오니는 연필과 접는 의자를 들고 박물관으로 가서 혼자 그림을 그리곤 했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이런 어린 시절은 그가 열 두 살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어린 시절 덕분에 리오니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터, 애니메이터, 조각가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소양을 길렀으며, 글보다 그림이 아름다운 그림책을 쓸 수 있었다.

한편 리오니는 파충류, 곤충, 어류 등 휘귀한 동물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직접 사육장을 설계하고, 건축했으며, 그 안에 거북이, 도마뱀, 쥐, 나비, 가시고기 등 다양한 동물을 길렀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리오니가 그림책을 쓰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주인공이 쥐, 도마뱀, 물고기 등을 비롯한 동물들이라는 것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한 인터뷰에서 노년의 리오니는 "어느날 문득, 나는 내 작품의 장면 하나 하나가 사육장의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책의 주인공들도 70여 년 전 바로 내 다락방에 살았던 생쥐와 거북이, 달팽이, 가시고기, 나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바 있다.

열 두 살 이후 1928년까지 리오니는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보냈다. 이처럼 어린 시절의 예술적 분위기,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니며 쌓은 경험들,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래픽 디자이너, 조각가, 미술가, 애니메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경력은 그가 다양한 소제와 유머, 상상력이 넘치면서도, 복합적인 철학적 의미들을 내포하는 그림책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1928년부터 30년까지 리오니는 쥬리히 대학을 다녔으며, 모타 페네토니(Motta Panettoni)제과 회사에서 일했다. 1931년에는 노라 머피(Nora Maffi)와 결혼하여 이탈리아에서 살았으며, 그의 광고 에이전시 회사를 창업하고 경영해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밀라노에 살면서 유럽의 예술잡지들에 미술과 유럽 건축에 관한 기사들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이 때 리오니는 자신에게 그래픽 디자이너의 길을 열어 준 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던 중 1935년에는 제노바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각, 건축, 일러스트레이션, 그래픽 디자인에서 애니메이션까지 모든 예술 분야에서 여러 차례 수상 경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업적도 남긴 리오니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미술이나 디자인과 관련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살던 리오니는 1939년 2차 대전과 함께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의 독재와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건너간 리오니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광고 에이전시 회사에서 일했다. 이 곳에서 경력을 인정받아 그는 미국 예술가 협회에서 주는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45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얻고, 뉴욕에 아파트를 마련했다. 또 1947년에는 뉴욕 노리스트 겔러리(Norlyst Gallery)에서 유화와 수체화가 주가 된 개인전을 열었다. 이를 개기로 리오니는 뉴욕과 일본 등지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게 된다.

개인전이 있던 1947년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걸쳐 있는 휴양지 리비에라에 집을 사고, 이 곳을 중심으로 유럽을 두루 돌면서 그림을 그리고 여행도 즐겼다.

이후 10여 년 동안 리오니는 <프린트(Print)>를 비롯한 유명 잡지의 공동 편집진으로 지내기도 하고, 퍼슨스 디자인 학교(Parsons School of Design) 학장으로 있기도 했다. 그리고 국제 예술가 협회를 비롯한 많은 단체의 장(長)으로 일하기도 했다. 또 <뉴욕 타임즈>나 <포춘> 같은 유명 잡지의 아트 디렉터로 일하기도 했다.

한편 1959년에 10여 년 동안 일하던 <타임사(社)(Time Inc.)>를 그만두고, <포춘> 잡지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섯 살과 세 살 된 손자를 데리고 기차 여행을 하게 되었다.
<라이프>지를 보고 있던 리오니는 손자들이 기차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빨리.
그런데 우연히 <라이프>의 한 면을 펼쳐든 순간 리오니에게 아주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그 페이지는 파랑, 노랑, 초록 등의 색으로 장식된 페이지였는데 리오니는 손자들을 불러 놓고, "할아버지가 이야기 하나 들려줄게." 하며 아이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서류 가방을 테이블 삼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세 가지 색이 그려진 페이지를 찢었다.
그리고 파랑색이 있는 부분을 망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둥글게 찢었다. 노란색과 초록색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찢은 다음 리오니는 세 조각들을 들고 즉석에서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흥분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그림책이 <꼬마 파랑과 꼬마 노랑(Little Blue and Little Yellow)>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레오 리오니가 어린이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게 되는 개기가 된 책이기도 하다.
한편 이 책은 1960년에 <뉴욕 타임즈>가 뽑은 올해의 좋은 그림책 베스트 텐에 선정되었다. 이 책이 내용은 파란색 작은 얼룩과 노란색 작은 얼룩이 서로 껴안고 초록색 얼룩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리오니가 쓴 많은 그림책들이 다양한 기관에서 주는 상들을 수상한다. <조금식, 조금씩
(Inch by Inch)>는 1960년 <뉴욕 타임즈>가 뽑은 올해의 좋은 책 베스트 텐에 선정되는가 하면, 1962년에는 루이스 캐럴 상(Lewis Carroll Shelf Award)을 수상했으며, 독일 청소년 문학상(German Youth Book)에서 주는 명예의 책(Honor Book)에 선정되었다.

<으뜸 헤엄이>는 1963년에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책 베스트 텐에 선정되는가 하면, 1966년에는 5년 동안 기억에 남는 어린이 책 베스트 50에 선정되었다.
또 1966년에는 독일 어린이 문학상 그림책 부문 상을 받는가 하면, 1967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브리티슬라바에서 열린 세계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에서 주는 그림책 상을 받았다.


비평가들 사이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은 <프레드릭(Frederick)>은 1967년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책 베스트 텐에 들었으며, 1968년 독일 소년·소녀 문학상(German Juvenile Book Award)을 받았다.

 

 

 

 

<새앙쥐와 태엽쥐(Alexander and the Wind-up Mouse)>는 크리스토퍼 상(Christopher Award)을 수상하는가 하면, 1970년 지 선정 "올해의 눈에 띄는 책"에 선정되었다.

 

 

한편 레오 리오니는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1970년에 테헤란 영화제에서 두 작품으로 다섯 개 부분 상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리오니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작품들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1988년에 열린 미국 영화·비디오 페스티발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리오니의 이런 경력은 그가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 밖에도 리오니는 <물고기는 물고기야>, <아주 신기한 알>  <제각기 자기 색깔>, <초록꼬리> 등 우리 나라에서도 소개되어 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을 비롯한, 40여 편이 넘는 그림책들을 남겼다. 이 작품들은 모두 철학적이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꿈과 상상의 세계, 심오한 사상들이 녹아 있다.




리오니는 1997년에는 <세계 속에서(Between Worlds)>라는 자서전을 펴내기도 했다.
현재 그는 뉴욕에 있는 아파트와 이탈리아의 17세기 농장 풍의 잡을 오가며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지내며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는 육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1999년 10월 12일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레오 리오니의 작품세계

1) 그림책의 비중를 한 단계 높인 레오 리오니

문학 전반에서 아동 문학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선진국에서도 그림책은 그다지 인정받고 있는 분야는 아니었다. 또 글과 그림을 동시에 쓰고 그린 사람들도 흔히 글을 쓰고 동시에 그림까지 그린 글 작가로 소개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글 양이 비교적 적고, 내용도 간단한 그림책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데 레오 리오니는 대부분의 글·그림 작가와는 달리 자기 그림책에 글까지 쓴 사람으로 평가된다. 이는 글보다는 그림을 염두에 둔 평가이다.

레오 리오니는 주로 꼴라주 기법을 사용한 그림들을 그리고 있다. 잘 다듬어진 형태, 군더더기 없는 모양과 선 , 화려한 색채, 적당한 여백, 유머가 넘치는 장면들 등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림이다. 비록 리오니의 작품들이 짧지만 철학적인 텍스트가 담겨 있다 하더라도 그의 책을 특별하게 하고, 아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그의 이런 그림이라 생각한다.

리오니는 "그림책은 문학의 복합성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말한 적 있다. 아직 글을 읽지 못한 아이들, 복잡한 구성과 동시에 쏟아지는 여러 사상들 등을 감당하기 어려운 청소년, 분량도 많고, 복잡한 구성의 문학 작품들로부터 떠나 명쾌한 인생관과 세상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고 싶어하는 어른들, 어릴적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어른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림책은 아직 문자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독서를 시작하려는 아이들에게 독서 준비 과정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생각 아래 리오니는 80년대 초반부터 <수(Number)>, <글자(Letter)>, <단어(Word)> 등 일련의 글자 없는 그림책 시리즈를 펴냈다. 어린이들은 이를 통해 책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고, 독서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게 된다.
이런 일련의 노력 덕분에 영미권과 유럽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림책 분야의 독자층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아동문학, 아니 문학 전반에 걸쳐 그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다.


2) 어린 시절의 반영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레오 리오니의 작품들은 그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린 시절 리오니는 삼촌의 영향을 받아 아주 유능하고 성실한 건축가였다. 아주 작은 파충류, 어류 같은 동물들을 좋아해서 많은 동물들을 수집했다. 그는 작은 다락방에 돌과 이끼를 깔고, 흙과 나무를 가져다가 사육장을 지었다. 이 사육장은 너무도 꼼꼼해서 마치 진짜 동물원 같았다고 한다.
이 곳에는 생쥐도 있고, 도마뱀도 기어다니고, 나비도 날고, 거북이와 가시고기 등 다양한 동물들이 있었다. 여름 내내 햇볕과 색깔, 이야기를 모으는 들쥐 시인, <새앙쥐와 태엽쥐>에 나오는 태엽쥐가 되어 인간에게 사랑 받고 싶어하는 생쥐, 마법사 도마뱀 등과 <으뜸 헤엄이>, <물고기는 물고기야>에 나오는 다양한 물고기들, <아주 신기한 알>에 나오는 악어와 개구리 등은 모두 어린 시절 리오니가 만든 사육장에 있었던 바로 그 동물들이다.

뿐만 아니라 한 인터뷰에서 리오니는 책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가 책에서 묘사한 바닷속, 오솔길, 들판 등도 그가 어릴 적에 사육장에 만들었던 실제 모래, 이끼, 바위, 물, 풀 등이라고 한다. 리오니는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리오니는 "좋은 어린이 책은 삶에 대한 원초적인 호기심과 기쁨을 잃지 않은 아직 어린이로 남아 있는 모든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책이어야 한다. 나는 아직 어린이인 채로 있는 내 자신의 삶에 대한 호기심과 기쁨을 위해, 그리고 다른 친구들의 그것을 위해 이 책을 쓴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리오니는 좋은 어린이 책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거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되살려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대부분의 어린이 책 창작 활동을 뉴욕에 있는 아파트가 아니라 이탈리아 제노바에 있는 17세기 농장 풍의 집에서 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리오니가 직접 설계한 이 집은 그가 어린 시절 정성을 들인 사육장을 그대로 본떠 만든 집이라고 한다. 이 곳에도 제라늄이 피어 있고, 벌과 나비가 날고, 도마뱀이 기어다니고, 이끼가 잔뜩 낀 바위가 있다. 또 생쥐와 가시고기가 평화롭게 살고 있기도 하다.

3) 간단한 내용 속에 담긴 다차원적인 철학성

레오 리오니는 아무리 간결하고, 짧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림책에는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이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만 연령과 계층을 초월한 여러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질 또한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리오니의 작품들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책들이다.
예컨대 <프레드릭>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물질 문화와 정신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햇볕이 쨍쨍한 한여름에 다른 들쥐들은 겨울 양식을 모으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프레드릭은 나무 그늘에 그냥 앉아 있기만 한다. 열심히 일하는 들쥐들이 비웃으며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물으면 프레드릭은 햇빛을 모은다거나, 색깔을 모은다거나, 아니면 이야기를 모은다고 얼토당토 않은 말만 늘어놓는다.
그런데 정작 겨울이 되자 이 시인의 진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다른 쥐들은 모아 놓은 식량이 모두 동이 나자 침울해 한다. 그런데 프레드릭은 의기소침한 들쥐들에게 여름 내내 그가 모은 햇볕과 색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생쥐들은 이에 감동하여 다시 용기를 얻는다.


이 이야기는 이솝우화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를 풍자하는 작품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사회에는 경제 생활 외에도 다양한 문화 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이 없이는 인간은 삶의 의욕을 잃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결한 문체와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여 주고 있다. 문화 비평가 호이징가의 말처럼 인간은 "유희적 존재"이며, "문화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물질 문화와 정신 문화의 조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경제적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한편 <새앙쥐와 태엽쥐>에서는 사람들에게 늘 사랑 받는 태엽쥐가 되고 싶은 생쥐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과 자아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생쥐는 늘 사람들에게 쫓겨다녀야 하는 신세인데, 태엽쥐는 늘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존재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생쥐는 태엽쥐가 망가져 버려진 것을 보게 된다. 자기 존재 의미였던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사랑, 영원할 것만 같던 타인으로부터의 사랑이 깨어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생쥐는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은 원래 나의 모습을 찾고,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자아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생쥐는 마법사 도마뱀에게 자신의 태엽쥐를 진짜 생쥐로 바꿔 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이 누구이며, 세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모르는 태엽쥐에게 자아 정체성을 길러 주려 한 것이다.

이 밖에도 리오니의 <물고기는 물고기야>, <으뜸 헤엄이> 등도 세계와 나 자신의 존재 이유, 존재 가치, 세계 속에서 나의 역할 등을 깊게 탐구해 볼 수 있는 동화들이다.

이처럼 리오니의 작품들 속에는 세계와 나, 삶의 본질, 존재론적 물음 등 여러 형태의 철학적 의문과 올바른 인생관을 정립할 수 있는 물음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수준은 작품을 접하는 독자들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도록 여러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4) 어린이 책 창작에 대한 리오니의 생각

우리는 아주 재미있고, 흥미로운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접할 때면, 그 작품을 쓴 작가는 분명히 어떤 영감이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작품의 아이디어로 되살아나, 책으로 나올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리오니는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리오니 자신도 그가 <꼬마 파랑과 꼬마 노랑>이라는 작품으로 어린이 책에 대뷰할 때를 생각하면서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빛을 보게 되면서 작품 활동이 시작되고,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꼬마 파랑과 꼬마 노랑>이 쓰여지게 된 개기, 리오니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장면들을 보면 리오니 자신도 그랬으니 말이다.

그런데 리오니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그 가치를 오래도록 지속시키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이라 주장한다. 물론 모호하긴 하지만,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이 머리 속에서 샘솟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만으로 작품을 구성하기에는 너무나 모호하다. 한 아이디어가 작품이 되어 나오기 위해서는 그 아이디어를 다듬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전체 이야기 속에서 각 부분들이 조화를 이루도록 다듬고, 그림과 글을 조화시키는 등 일련의 다듬기 과정이 필요하다.

리오니에 따르면 이같은 일련의 다듬기 과정은 마치 "체스 게임"과 같다는 것이다. 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창작 과정에서는 한 수 한 수 둘 때 마다 상대편의 움직임을 생각해야 하고, 그래서 여러 번 의심도 하고, 머리 속으로 몇 번 말을 움직였다 되돌리기도 하고, 성공할 확률과 실패할 확률을 계산하기도 한다. 그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한 수를 둘 수 있는 것처럼 창작 과정에서도 몇 번을 다시 그리고, 지우고, 이리 저리 옮겨 보기도 하고, 아야기를 여기 붙였다, 저기 붙였다 한다는 것이다.

리오니에게 아이디어를 어떻게 얻느냐고 물으면 그는 "그냥 열심히 하면서요"라고 좀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그게 진실인 것이다.

 

레오 리오니의 책들

     

     

     

     


 

◈참고문헌
Biographical Statement: 1972 Biography from Third Book of Junior Authors --1999 update

◈관련 사이트


http://www.edupaperback.org/authorbios/Lionni_Leo.html 

http://www.shrewsbury-ma.gov/schools/Beal/Curriculum/media/Lionni/leolionni.html

http://www.openkidzine.co.kr/webzine_sub.asp?no=513&aCode=01&page%5Fno=1&isLast

http://www.openkidzine.co.kr/webzine_sub.asp?no=209&aCode=01&page%5Fno=1&isL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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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밀키웨이 > 앨리스의 영원한 기사, 루이스 캐럴



사진출처http://libweb2.princeton.edu/rbsc2/portfolio/lcl/fi/00000004.htm

 

불후의 명작 앨리스 이야기를 탄생시킨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 Charles Lutwidge Dodgson).

그는 우리에게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이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루이스 캐롤’이라는 이름은 1856년에 〈코믹 타임즈〉라는 잡지에 작품을 게재하면서 그 편집자와 상의하여 지은 필명이다.

캐롤은 1832년 1월 27일 체셔(Cheshire)지방 데어스베리(Daresbury)의 목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말장난, 체스 게임, 인형극 등에 관심이 많아서 집안의 많은 형제들과 잡지를 만들거나 연극을 하며 노는 것을 즐겼다. 캐롤은 리치몬드에서 럭비학교를 다녔으며 제임스 테이트 선생의 영향으로 수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1850년 옥스포드대학 수학부에 입학해서 수학과 논리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쓰기도 하고 그림과 사진에도 재능을 발휘했다. 1854년 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이듬해 바로 그 대학의 강사로 취임해 강의를 맡았다.


앨리스와 운명적인 만남


1855년부터 1881년까지 옥스포드대학 수학부의 교수로 재직한 캐롤에게 1855년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새로운 학장으로 핸리 리들(Henry Liddell)이 부임했다. 리들에게는 한 명의 아들과 세 딸, 케롯, 앨리스, 에디스가 있었다.
캐롤은 그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다. 아이들과 캐롤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재미있는 이야기와 그림이 들어있는 수 천 통의 편지를 아이들에게 보내기도 하고 사진기로 아이들 사진 찍기를 즐겼다. 사진촬영 중간중간 캐롤은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아이들은 흥미로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캐롤은 주로 재미있었던 전래동화를 섞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 이야기들은 언제나 꿈과 환상적인 희망의 노래들로 가득했다.

한 번은 리델부부가 외국으로 겨울 휴가를 떠나면서 여성 가정교사와 아이들만 남게되었는데 캐롤은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1862년 여름 몇 달 동안은 아이들과 템즈강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보낸적이 있었다. 뱃놀이를 할 때면 캐롤은 그의 친구 덕워드와 함께했다.
캐롤은 그 당시를 이렇게 일기에 쓰고 있다.
‘덕워드와 나는 세 명의 리델가족 소녀들과 구스토우까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여행을 했다. 우리는 강둑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다가 그만 강의에 늦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직접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고 9시 전에 기숙사로 데려다 주었다.’
특히 세 자매 중 앨리스 리델은 캐롤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앨리스는 캐롤의 이야기를 대단히 좋아했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경청을 했다. 캐롤은 천성적으로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에 기뻐하고 감동해주는 앨리스야말로 더 없이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앨리스 이야기의 탄생

캐롤은 아이들에게 앨리스 이야기를 들려준 시기를 1862년 7월 4일로 기록하고 있다. 8월에도 보트여행을 하면서 리델아이들에게 앨리스 이야기를 해주었다.
캐롤은 이야기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글로 써서 앨리스 이야기 책을 만들기 시작해 이듬해 2월 ‘앨리스의 지하세계 탐험’이라는 이야기 책을 만들었다. 처음엔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사용했지만 출판사 측의 요구로 ‘펀치’지의 카투니스트로 유명한 존 테니엘에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맡기게 되었다.
그가 앨리스 이야기를 정식 출판하게 된 이유는 템즈강을 따라 뱃놀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앨리스가 캐롤에게 한 말 때문이다. “그 이야기들을 책으로 만들어 주신다면 정말 멋질거예요!”
캐롤은 앨리스의 이 한마디로 꿈과 희망을 담은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 결심을 하게된 것이다.

그렇게해서 탄생된 그의 첫 작품이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iand)’(1865년)이다.
이 작품의 원제는 ‘앨리스의 지하세계 모험(Alice’s Adventures Under Ground)’이었다. 그는 필명을 사용해 ‘루이스 캐롤’과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동일인임을 가까운 지인들도 모르게했다.
캐롤은 첫 작품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1864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출판되기를 희망했지만 테니엘이 그림을 마무리하지 못해 이듬해 출판하게 되었다. 첫 해 2천부를 발행했고 캐롤은 그 중 몇 부를 고급양장표지로 만들어 리델 아이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 달 안돼 일러스트레이션을 담당한 테니엘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 출판하기를 요구했다. 캐롤도 이를 승낙해 신 판을 출간했고 5천부가 판매되었다.


리델 아이들과 아쉬운 이별

리델부인은 책이 출판된 후 아이들과 캐롤의 관계에 신경을 쓰면서 아이들이 캐롤과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캐롤의 일기에도 1863년 7월부터 12월까지는 리델아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후부터 캐롤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지못했고 그들의 우정도 소원해졌다.

그후 세월이 흘러 어린 소녀였던 앨리스도 숙녀가 되었고 캐롤과의 만남도 자연 멀어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맑은 모습의 앨리스는 그에게 두 번째 작품 ‘거울 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lice Found There)’(1871년)를 창작할 힘을 주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말을 탄 하얀기사는 다름아닌 캐롤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일러스트레이션을 담당한 존 테니엘에게 너무 나이들어 보이지 않게 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앨리스는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캐롤과도 멀어지게 되었지만 앨리스의 가슴 속에 루이스 캐롤은 아름다운 동화를 들려주던 백마탄 기사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대가들이 만들어낸 앨리스 이야기

루이스 캐롤이 앨리스 이야기를 처음 쓸 때는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려넣었다. 그러나 저명한 작가이자 캐롤의 친구인 존 맥도날드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출판을 결심하게 되면서 캐롤의 그림으로는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출판사측 결론이 나왔다.

이때 앨리스 이야기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된 사람은 ‘이솝우화’ 등으로 작품이 검증된 바 있는 존 테니엘(John Tenniel)이었다. 풍자잡지 ‘펀치’지의 단골 화가였던 존 테니엘은 앨리스 이야기의 정신을 멋지게 이미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러스트레이션과 스토리가 일치되는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앨리스 이야기가 전세계적인 고전명작이 되면서 테니엘의 그림은 이후 작가들에게 모범적인 교본이 되었고 도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캐롤과 테니엘의 묘한 관계

캐롤과 테니엘의 관계는 묘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캐롤은 출판비용을 테니엘의 화료까지 포함해 모두 자비로 했기때문에 책 제작의 모든 것을 자기 취향대로 진행시켰고, 명성이 높았던 테니엘에게도 자기의 생각과 취향대로 그릴 것을 강요했다.
캐롤의 의도대로 한 덕분에 스토리와 그림의 호흡이 일치해 이상적인 그림을 얻게 되었지만, 테니엘은 캐롤의 억지에 질려서 후편의 그림은 끝까지 맡기를 꺼려할 정도였다. 캐롤은 등장인물의 치마길이, 머리모양, 표정에까지 세세하게 관여했고 대가인 테니엘은 이것을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눈여겨 볼 것은 주인공인 앨리스의 모습이었다. 캐롤은 애초에 학장 리델의 딸, 앨리스 리델을 모델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앨리스 리델은 예쁜 소녀였지만 단발에 검은 머리, 그리고 다소 가냘픈 몸매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용하고 어두운 인상이었다.
그래서 존 테니엘은 ‘메어리 힐튼 버드콧’이라는 소녀를 모델로 했다. 메어리는 금발의 긴 머리가 치렁치렁하고 다소 통통한 편으로 활동적이며 밝은 분위기의 소녀였다. 존 테니엘의 앨리스 모델은 지금까지 모든 작가들의 교본이 되고 있다.


앨리스 모델 선정 뒷이야기

원래 존 테니엘은 모델을 사용하지 않고 사진을 보고 그리는 스타일이었지만, 캐롤의 적극적인 권유로 살아있는 모델을 사용했다. 빅토리아 왕조의 이름높은 사진 작가였던 캐롤이 사진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캐롤은 사진의 한계를 알고 있었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실제 모델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공 앨리스에 상당한 신경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존 테니엘의 그림은 동물이나 불가사의한 존재 등의 묘사에 있어서는 호평을 받았지만 정작 앨리스의 그림은 표정이 굳어 있어서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주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이나 상상 속의 존재들이 놀라우리만치 너무나 생동감있게 묘사된 데 비해 주인공인 앨리스는 무표정에 가까웠던 것이 극적으로 대비되어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테니엘은 두 권의 앨리스 이야기에서 캐롤에게 종속적인 그림을 그린 후, 캐롤에게 편지로 ‘이상한 일이지만, 당신의 앨리스 이야기에 그림을 그린 후, 나는 삽화를 그릴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는 그 방면의 일은 하나도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테니엘이 그린 앨리스 이야기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시대를 초월한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위 기사는 2000년 10월호 특집 '앨리스와 떠나는 이상한 나라여행' 중 일부분만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길민권 기자 

출처   일러스트하우스 http://www.illusthou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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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밀키웨이 > 선생님으로 불리길 원한 에리히 캐스트너


◈ 에리히 캐스트너의 삶과 작품활동


아동문학가이면서도 소설가, 극작가, 연극 비평가, 저널리스트, 저항적 지식인으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에리히 캐스트너(Erich Kastner)는 독일이 통일된 이후 제2 제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1899년 2월 23일 유서 깊은 도시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밀 캐스트너(Emil Kastner)는 원래 뛰어난 구두장인(Meister)이었으나 급격한 산업화와 기계화로 수공업 제품이 인기를 잃어감에 따라 구두공장 노동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어머니 이다 아밀리아 캐스트너(Ida Amilia Kastner)는 말을 사고 파는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었으며 남편의 돈벌이가 시원치 않자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미용 기술을 배워 미용사로 일하면서 한평생 외아들 에리히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에리히의 집안은 드레스덴에 살던 시절, 경제적 어려움을 덜기 위해 작은 방 하나에 세를 주었는데 우연히도 이 집에 세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교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에리히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교과서, 받아쓰기 공책, 교제 등에 익숙해졌고, 읽기와 샘하기도 어느 정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마지막에 세든 슈리히라는 선생님은 에리히가 성장할 때까지 캐스트너 집안에 머물면서 에리히에게 삼촌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가 어린시절부터 유달리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들 덕분이라고 그는 그의 어린시절 이야기인 <내가 어렸을 때에>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일도 있고, 또 교사가 되면 안정적인 수입과 직장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에리히의 부모는 에리히가 어릴적부터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 에리히 역시 자신이 다른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만큼 교사가 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그러나 어머니는 에리히가 교원 양성소에서 교사가 되는데 필요한 교육만 시키지 않고 어려운 경제사정과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에리히를 연극 공연장, 오페라 극장, 영화관 등에 자주 데려갔다.
후일 에리히가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정확하고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글들을 쓸 수 있게 된 데는 어머니의 이 같은 교육적 배려가 밑천이 되었다.

외아들이지만 많은 사촌들에게 둘러싸여 부모님의 경쟁적인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라던 드레스덴의 유년시절은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막을 내린다.

에리히는 마치 군대처럼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규칙이 강요될 뿐만 아니라 엄격한 체벌이 이루어지는 비인간적인 교원양성소에서 기계적인 학습을 받는다. 이곳에서 에리히가 배운 것은 어른이라는 권위와 선생이라는 권위를 이용해 아이들에게 되도록 많은 지식을, 되도록 빨리 주입하고, 아이들을 똑같은 생각, 똑같은 행동을 하는 기계처럼 길러내는 기술이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교원 양성소 생활에 완전히 지쳐갈 무렵, 그리고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드는 1918년에 캐스트너는 군대에 징집되어 포병 훈련을 받는다. 이 때의 경험 역시 에리히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으며, 이 일을 계기로 그의 뇌리에는 전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완전히 굳어졌다. 그의 초기 작품 <5월 35일>에는 한니발 장군과 발렌슈타인 공작이 장미 덤불을 사이에 두고 장난감 병정으로 전쟁놀이를 하는 광경을 묘사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전쟁과 관련된 장난감을 줘서는 안 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전쟁의 부당함을 강력히 시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전쟁과 군대에 대한 그의 생각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군대를 제대한 캐스트너는 교사가 되는 대신 대학 진학을 위해 김나지움(우리의 인문계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독일의 학교) 진학하고, 1년 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한다. 캐스트너는 이 곳과 베를린 대학, 로스토크 대학을 오가며 독문학, 역사학, 연극학, 신문방송학, 연극사 등 다양한 학문을 접하며 공부에 몰두하는데, 특히 언론학에 관심이 높아 얼론 연구소를 방문하기도 한다.

1922년부터는 라이프치히의 일간지 <신 라이프치히 신문(Neuen Leipziger Zeitung)의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신문에 기사와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캐스트너는 1927년에 베를린으로 이사한 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1928년에는 첫 번째 시집인 <허리에 달린 심장(Herz auf Taille)>를 출판했다.
곧이어 1929년에는 <거울 속의 소음(Larm im Spiegel)>, 1930년에는 <한 남자가 알려 줍니다(Ein Mann gibt Auskunft)를 비롯한 많은 시집을 출판했는데, 그가 쓴 시들은 구체적이고 날카로운 풍자적 내용이 담겨 있지만,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만큼 난해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비평가들은 캐스트너의 시를 두고 동시와 민요시에 가까운 시라고 평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캐스트너가 자신의 시에 비뚤어진 사회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독자들은 이를 보고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아가 잘못을 바로잡아 사회를 개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931년에 발표된 캐스트너의 첫 번째 성인 소설 <파비안>, 1934년에 발표한 <눈 속의 세 남자( Drei Manner im Schnee)> 등도 이러한 맥락에서 역시 사회의 부조리한 측면을 풍자적으로 묘사해 내고 있으며, 여기에 교육적인 메시지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와는 달리 그 메시지는 좀더 구체적이고 강하게 드러난 점이 다를 뿐이다.

에리히는 자신이 소설에 나오는 그릇된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늘 노력했고, 타인에게 본보기가 되고자 했다.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제3 제국 시절 캐스트너는 나치당의 선전 공보(公報)에 글을 쓰라는 당국의 명령을 거부한 이후, 그의 모든 책이 불태워졌으며, 출판금지 당하는 한편, 집필활동까지 금지 당하는 일들을 겪어내야 했다.
또 다른 지식인들이 망명을 선택할 때 끝까지 국내에 남아 글을 쓰기도 했다. 이 때 쓴 글들은 모두 독일 국내에서는 출판되지 못하고 외국에서 출판되거나 사장되고 말았다. 이 일로 그는 저항적인 지식인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한편 캐스트너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작품들에서 일정한 교육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작품 속에서 잘못된 현실을 거울처럼 보여줌으로서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고 변화시키려 했다.
그런데 캐스트너는 교육이라는 것은 유년시절부터 습관처럼 이루어져야 그 효과가 크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유년시절의 교육과 기억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올바른 어른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올바른 교육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심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자연스러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 교육은 일방적이거나 지나치게 딱딱해서는 그 효과를 거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캐스트너는 교단 앞에서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지는 않지만 미래 사회의 주역인 아이들에게 늘 뭔가를 가르쳐 주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늘 "선생님"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캐스트너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아동문학으로 표현해 내기 시작했다.

1929년에 출판된 <에밀과 탐정들>이 그 첫 번째 결실이었다.
외할머니께 드리려고 어머니가 어렵게 모아 준 돈을 도둑맞은 에밀은 도둑을 뒤쫓아 경찰에 신고하는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되찾는다. 범인을 뒤쫓는 과정에서 에밀은 도둑에게서 돈을 다시 되훔치자는 친구들의 제의를 거절하고 힘들지만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사건이 해결된 이후 에밀에게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하면서 책은 막을 내린다.

캐스트너는 이를 통해 세계적인 경제공항과 맞물린 독일의 살인적인 인플레에 따른 혼란, 도덕적 해의 등을 지적하고, 어른스럽고 용감하고, 도덕적인 아이들을 통해 그 잘못을 바로잡고, 아이들에게 옳은 모범을 보여주려 했다.

이후에 출판된 아동문학 작품들도 하나같이 일정한 교육적인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
1931년에 발표된 <5월 35일>에는 게으름에 대한 경계, 전쟁의 심각성, 지나친 편리함에 대한 경계 같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풍자가 담겨 있다.
같은 해에 출판된 <핑크트헨과 안톤>에서는 빈부의 격차를 극복한 우정, 못된 짓을 하는 어른을 혼내주는 아이들을 통해 어린이 독자들에게 긍지와 자긍심을 심어 주어 옳은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있다.

1934년에 출판된 <하늘을 나는 교실>과 1949년에 출판된 <동물회의>는 에리히 캐스트너의 위와 같은 목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특히나 이 책들은 날카로운 풍자와 철학적이고 교육적인 메시지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작품들보다도 아이들의 심리와 세계를 정확히 이해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에리히 캐스트너를 세계적인 어린이책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이 작품들로 그는 1960년에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 상을 받았으며, 1963년에는 일본 청소년 문학상을 받았으며, 각종 독일 청소년 문학단체에서 주는 문학상들을 휩쓸다시피 했다.

한편 <에밀과 탐정들>, <로테와 루이제>, <마법에 걸린 전화기>, <핑크트헨과 안톤> 등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독일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어져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상연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교육적 메시지 이상으로 돋보이는 캐스트너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있는 문장, 유머러스한 장면들, 아이들의 세계를 완벽히 이해한 데서 나온 심리묘사 때문일 것이다.

1949년 이후 뮌헨으로 이주하여 저작활동과 세계 펜클럽 활동을 활발히 해 나가던 캐스트너는 1974년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리히 캐스트너가 사망한 이후 뮌헨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에리히 캐스트너 제단이 세워지고, 1979년에는 에리히 캐스트너 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에리히 캐스트너 박물관도 세워져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것은 물론 어린이 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들을 펼치고 있다.


◈ 재미있고 유익한 아이들의 인생 교과서

1) 서론............................................................................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캐스트너는 어린이 문학을 통해 아이들에게 일정한 교육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고자 했다. 유년시절의 행복한 기억과 유년시절부터 이루어진 교육이 없이는 사회를 개선할 모범적인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스트너의 이런 생각은 그의 어린이책들이 다른 작가의 그것과 구별되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형성해냈다.
여기서는 캐스트너가 어떤 방법으로 그의 작품을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교육 지침서로 만들어 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도덕적 덕목을 고루 갖춘 아이들...................................

에리히 캐스트너의 작품에는 유달리 어른스런 아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 아이들은 집안이 가난해도 부모에게 불평하지 않고, 어른들의 잘못을 바로잡는가 하면, 용기를 칭찬하고, 거짓말, 비겁함, 우정을 배신하는 일 등을 경멸한다.
이제 완벽한 시민적 미덕, 도덕적 모습을 갖춘 아이들의 모습부터 살펴보자. 캐스트너의 대표작인 <하늘을 나는 교실>을 보자.
이 작품에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남자아이들이 등장한다. 자신들의 친구가 실업학교 학생들에게 납치되었다는 것을 안 아이들은 친구 크로이츠캄을 구출하기 위해 작전회의를 연다. 아이들은 니히트라우어씨의 충고에 따라 실업학교 아이들과 결투를 하지만 절대 비겁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런 일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 나아가 아이들은 크로이츠캄을 구출하느라 사감선생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간 벌도 자청해서 받겠다고 편지를 쓴다. 전형적인 모범생이고, 모범적인 시민의 축소판이다.

<에밀과 탐정들>에서의 에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에밀은 도둑맞은 돈을 다시 훔치자는 친구들 말에 아무리 내 것을 다시 가져오는 일이긴 하지만 도둑질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하고 끝까지 범인을 쫓는다. 이처럼 완벽한 성품을 지닌 아이들은 어려운 집안형편이나 부모의 이혼 같은 아이들의 생활에 절대적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일들에도 태연하기만 하다.

<핑크트헨과 안톤>에서 안톤은 병들어 누워 계신 어머니를 위해 손수 요리를 하고, 추운 겨울에 거리에 나가 성냥을 팔고 구걸을 한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걱정하실까봐 친구 핑크트헨에게도 자기가 거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머니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하늘을 나는 교실>의 마르틴도 부모님이 크리스마스에 집에 돌아올 여비를 보내줄 수 없어 크리스마스 때 학교에 남아야 하는데도 부모님에게는 전혀 불만을 내비치지 않으며 자신의 가난해 대해서도 누구에게도 원망하지 않는다. 단지 나중에 자신은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에게 좋은 선물을 사 드리겠다는 결심만 할 뿐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선장의 누이 동생네 집에서 살아야 하는 요니도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세상에 대한 원망 대신 자기는 앞으로 그런 부모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상황을 끝내고 있다. 선장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처럼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다고 말하면서. 요니의 이런 태도는 세상을 달관한 듯한 모습이며, 상처를 완전히 극복한 태도이다.

캐스트너는 정의, 용기,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마음, 정직성, 강한 책임감,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같이 모범적인 시민적 덕목을 고루 갖춘 아이들이 어른들이 범한 잘못을 지적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해가는 과정을 통해, 그리고 이 해결과정에서도 일말의 비열한 방법이나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속임수를 쓰지 않고 정의로운 방법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통해 아이들에게 올바른 행동지침과 정신적으로 갖추어야할 소양들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3)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훌륭한 어른들..................

어린이들이 아무리 도덕적인 소양을 고루 갖추고 있고,, 또 현실을 긍정하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아직 사회적 경험도 부족하고, 경제적 능력도 없으며, 꾸준히 자신의 적성과 소양을 발견하고, 자기 안에 있는 내면적 품성들을 끄집어내어 다듬어 나가야 한다. 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교육은 어린이들에게 일정한 학문적 지식을 가르치거나 교사의 권위라는 것을 내세워 아이들에게 일정한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아이들의 생각을 인정하고, 스스로 모범적인 행동을 함으로서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따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어른들은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자연스럽게 이끌어줄 수 있다. 더 나아가 아이들은 교육이라는 개념 없이 자신들의 행복하고 재미있는 유년시절을 즐기면서도 은연중에 올바른 교육을 받게 된다.

캐스트너의 작품들 속에는 이처럼 아이들의 친구이면서도 아이들에게 모범적인 선생님이 되는 어른들이 등장한다.
<하늘을 나는 교실>을 보자. 이 작품에는 모범적인 스승과 그 친구가 등장한다. 뵈커 선생님은 김나지움 기숙사 사감이다. 이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무조건 학교 규칙을 강요하지도 않으며, 교사의 권위를 내세워 아이들을 통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마르틴과 그 친구들이 실업학교 학생들에게 붙잡힌 크로이츠캄을 구출하기 위해 학교 규칙을 어기고 외출했다 돌아왔을 때도 무조건 벌을 주기보다는 아이들의 이야기부터 듣는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유가 타당하다고 판단하자 벌 대신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인생지침을 일러주고 아이들을 위로한다.
또 겁쟁이라고 놀림받는 울 리가 자신의 용기를 시험하기 위해 운동장 철봉에서 뛰어내린 일도 벌을 주는 대신 울리를 칭찬하고 정성껏 돌봐준다. 울리 나이 때는 충분히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울 리가 그 일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면 다리가 좀 부러져서 며칠 고생하는 것보다 났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뵈커 선생님은 아이들의 성장과정과 아이들이 겪은 일들이 앞으로 그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고려하면서 아이들을 다독거리고 적절한 충고를 한다.
그러나 이 때도 교사의 권위를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뵈커 선생님은 교사의 권위와 규칙만 강조하고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만 있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자기 일을 마음놓고 털어놓을 수 있는 선생님이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교사가 되기로 했다고 말한다.

이는 작가 에리히 캐스트너가 뵈커 선생님의 입을 빌려 자기의 교육관과 내지 진정한 교육자의 역할과 태도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에밀과 세 쌍둥이>에서는 아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어른이 등장한다. 에밀의 친구 테오도르의 아버지 하버란트 변호사이다. 하버란트 변호사는 에밀과 친구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어른들과 함께 코펜하겐으로 여행을 떠난다. 아이들에게는 이것저것 지시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이런 기회를 통해 한 단계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당부만을 남긴다.
여행 도중 하버란트씨는 어른들에게서 해방된 아이들이 어떤 장난을 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자신도 어렸을 때는 그런 적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이 결코 얌전하거나 아무 일 없이 책이나 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아이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은 아이들을 믿고 있으며,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에 감추어진 덕성들을 끌어낼 수 있는 선한 존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버란트씨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과정을 통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른들이 아이들만 남기고 여행을 떠난다고 한 것에서 이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또 하버란트씨가 모범적인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행복하고 자유로운, 그리고 주변의 따뜻한 시선에 의해 어린 시절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캐스트너는 그가 쓴 글에서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하고,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년시절의 좋은 기억과 교육이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하버란트가 그 전형이다.


4) 작가가 직접 메시지 전해주기.................................................

캐스트너는 어린이문학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적 수단이 되도록 하는데 등장인물들의 성격만을 내세운 것은 아니다.
그는 작품에 직접 선생님으로 등장하여 어린이 독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교실>에서 그는 머리말에서 요나탄 트로츠가 버림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린아이들도 늘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며, 요나탄 같은 상황에서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른들의 잘못으로 고통받는 아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 맺는말에서는 작가가 직접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요나탄과 선장을 만나 크리스마스 연극 <하늘을 나는 교실> 공연을 같이 한 친구들이 그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전해듣는다. 마르틴은 여전히 성실하고 공부도 잘 한다. 울리는 이제 누구도 겁쟁이라고 놀리지 않을만큼 용감해졌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은 울리에게 꼼짝도 못하게까지 되었다. 덩치 큰 마티아스마저도. 그리고 요나탄은 앞으로 자기는 훌륭한 부모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 모두가 캐스트너가 바라는 바람직한 시민상이다. 캐스트너의 어린이책에는 반드시 머리말과 맺음말이 있다(그의 작품에서는 머리말과 맺음말이 두 개 이상 나오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캐스트너는 단지 머리말과 맺음말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아이들이 올바로 성장하는데 있어 필요한 덕목들과 교훈들을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교실>에서 캐스트너는 뵈커 선생님이 되어 어린이 독자들에게 정의가 무엇이며,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올바른 행동과 책임에 대해 충고하듯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에밀과 탐정들>에서는 에밀의 외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 직접적으로 행동하진 않았지만 끝까지 전화기 앞에서 아이들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린 꼬마 딘스탁을 칭찬하면서 드러나진 않지만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또 에밀이 돈을 잃어버린 사건을 두고 지폐는 꼭 전신환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이 사건에서 배워야할 점이라고 강조하면서 돈을 잘 관리할 것을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대목도 볼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캐스트너는 <엄지소년>에서도 드러난다. 엄지소년 맥스헨이 앞으로 뭐가 될 것인가에 대해 요쿠스 선생님과 의논하는 대목에서는 직업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캐스트너의 생각이 드러나고, 어린이 독자들에게 일정한 충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5) 결론 ..............................................................

위에서 본 것처럼 캐스트너는 어린이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일정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아이들 스스로 그 메시지들을 자연스럽게 학습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에는 유난히 긴 머리말과 맺음말도 나오고, 다양한 교훈적 메시지와 교육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전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꾸준히 재판이 나오는 것은 물론,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어져 많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데는 캐스트너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와 재치 있는 문장들, 그리고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에 접근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유년시절의 행복한 기억들을 선물하고, 그것이 교육의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캐스트너의 아이들에 대한 긍정적이고 신뢰감이 넘치는 태도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캐스트너의 어린이에 대한 태도와 작품은 우리 어른들에게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줄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6)참고문헌 및 사이트...............................................

--- 참고한 책

김경연 <독일 아동문학 및 청소년 문학 연구-교육적 관점과 미적 관점의 역사적 고찰->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0)

김윤미 <에리히 캐스트너의 아동 및 청소년 문학 연구-작품 속에 구현된 교육관 분석 및 비판->(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7)


--- 참고한 웹사이트
http://www.kaestnerfuerkinder.net
http://www.erich-kaestner-museum.de
http://www.kaestner-im-netz.de
http://www.michaelhicke.de/kaestnerdruck.shtml
http://www.hh.schule.de/ekg/erich1.html

 

글의 출처  북보트 / 이미지 출처  여기저기 ^^

 

리히 캐스트너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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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선택 순서로 마음을 읽어내는 테스트 / 체크결과입니다



▷ 첫번째 선택한 색은 당신의 본질적인 성격, 당신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잠재적인 당신의 모습을 나타낸다. (당신은 [자주색]을 선택했습니다.)
개성적인 매력의 소유자. 상당히 개성적인 매력의 소유자다. 밝고 활발한 면과 쉽게 빠질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조금 변덕스러운 성향도 있으므로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할 때도 있다.

▷ 두번째 선택한 색은 당신의 과거를 나타낸다. 이제까지 당신의 장애 요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당신은 [오렌지색]을 선택했습니다.)
지나치게 강한 의타심이 성장의 방해 요소. 과거 장애 요인으로는 남에게 지나치게 의지한 점을 들 수 있다. 판단이나 아이디어는 훌륭했지만 자신을 갖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하거나 또는 상대의 반응에만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가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다.

▷ 세번째 선택한 색은 당신의 현재모습을 나타낸다. 현재의 당신의 희망이나 꿈을 나타낸다. (당신은 [녹색]을 선택했습니다.)
좋든 싫든 매사에 집착이 약한 시기. 현재 무리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적당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다. 무슨 일이든 평균 수준에 도달하면 만족하고 매사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깨끗이 포기한다.

▷ 네번째 선택한 색은 당신의 미래를 나타낸다.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 준다. (당신은 [흰색]을 선택했습니다.)
좋은 파트너를 만나면 운세도 상승한다. 당신을 리드해 줄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아버지나 오빠 같은 사람을. 지금까지 해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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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4-26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러게나 말입니다.. 바로 전 페이퍼를 보면 첫번째 본질적인 성격, 개성적인 매력의 소유자. 상당히 개성적인 매력의 소유자다. 밝고 활발한 면,이 맞는 거 같아요..^^

아라비스 2004-04-2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굉장히 소심하고 내성적인데...........그보다는 "변덕"이란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아요^^ 두 번째 진단 맡는 것 갖고, 세 번째 진단 앞에 좀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했고, 네 번째 진단에서 희망을 얻고 과연 귀인이 누굴까, 어느 방향에서 올까, 기다리고 있지요.
 

학문의 통언어적 실천 본격…빈약한 내용 돌파 관건
흐름 : 대중적 글쓰기 붐 어떻게 볼 것인가

2004년 04월 23일   강성민 기자 

학계의 지나친 전문주의와 엘리트주의는 삶과 학문을 결별시켜 별개의 것으로 만들어왔다. 엘리트주의는 학문을 자율적인 영역으로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고 요긴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부에서 아무리 활발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 듯한 ‘효과’를 내더라도, 현실의 제도와 삶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힘이 없다면 그 기득권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자율성의 함정’이 인식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이른바 ‘지식의 대중화’가 목소리를 높여온 것은 대략 1990년대 후반부터이고 그것이 일각에서 ‘대세’로 인식되고 움직이면서 하나의 지류를 형성한 것은 2000년 이후다.

‘보편적 청중’ 확보해 학문위기 타파

지식대중화를 말할 때 지배적인 心象으로 떠올리는 것은 ‘대중적 글쓰기’다. 대중적 글쓰기는 어려운 전문용어와 한자, 논리의 구조물을 해체해서 우리말 속에 생각이 잘 용해된 쉬운 글, 독특한 예시와 문체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글쓰기를 의미한다. 이 대중적 글쓰기의 순기능은 학계의 전문지식과 대중의 접촉포인트를 대폭 늘려 학문적 성찰성과 깊이있는 지식의 토대 위에 우리의 삶을 위치시킬 수 있다는 데 있고, 또한 철학·한문학 등 고사직전에 처한 순수학문의 위상을 되살려낸다는 데 있다.

이런 실용적인 측면 말고도 ‘대중적 글쓰기’가 원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중대한 기능은 따로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학문을 하는 목적이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근대적 학문이 거대한 기계의 한 부품처럼 ‘특수한 보편성’이라는 형용모순에 기초해 있어, 횡단성과 1인2역이 중요시되는 오늘날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즉, 분과학문이 자신이 근거한 특수영역을 넘어설 때는 매우 ‘기형적인 것’ 아니면 ‘유아적인 것’이 돼버린다는 것에 대한 자각인 셈인데, 따라서 대상을 궁리하는 일 자체가 ‘보편적인 청중’을 염두에 두고 진행될 때에만 통언어적인 학문이 가능하다는 게 ‘대중적 글쓰기’의 실천개념에 들어있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지식 대중화’의 다양한 실천들은 ‘교양서적’의 범람에서 그 존재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일단 양적이고 외형적인 측면에서 학계의 엄숙주의, 전문가주의, 논문 중심주의를 경계하는 균형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오늘날 지식대중화 현상이 과연 앞에서 언급한 실용적이고 본질적인 역할에 충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구호에 가려 보이지 않는 허점과 이데올로기가 많은 것 같고, ‘대중’이라는 마술에 기대는 정도에 따라 리스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생긴다.

지식의 대중화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창조적 파괴’를 동반하는 매우 묵직한 과정이다. 그것은 생각하기와 말하기의 관행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이 고도의 추상화 작업으로 철학성과 깊이를 획득한다면, 반대로 ‘고도의 구상화 작업’으로 그 구체성의 세계를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의 대중화에 이런 ‘구상화’가 담보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선 그 작업이 주제나 사유 차원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소재나 관점, 글쓰기 차원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미시사’와 ‘생활사’의 열풍이 그 일단을 엿보게 해준다.

‘고도의 구상화’ 없는 글쓰기의 迷夢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을 수용하면서 2년 전부터 본격적인 미시사 적용서들이 선보였는데, 백승종 서강대 교수(한국사)의 ‘그 나라의 역사와 말’(궁리 刊),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돌베개 刊)는 ‘개인’을 통해 역사전체를 새롭게 보려는 획기적인 시도로 주목을 받았지만 곧 비판에 부딪쳤다. 한 개인의 삶과 철학이 시대와 맺는 관련성 및 시대의 지형도를 새롭게 볼만한 요소를 내포하지 못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과는 별개로, 그의 작업은 일정한 의미망을 형성했다. 전자는 이찬갑이라는 평민지식인의 ‘일기’를 따라읽었고, 후자는 사상가인 하서 김인후와의 가상대담을 통해 그의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측면을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 소재와 관점, 글쓰기 방법론이 독특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선비의 생활사를 다룬 책은 정창권 고려대 강사(국문학)의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사계절 刊), 허경진 연세대 교수(국문학)의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푸른역사 刊)등이 있지만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물론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 刊)이나 고미숙 씨의 ‘열하일기, 그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그린비 刊)처럼 각각 5만부, 2만5천부의 판매고를 올린 경우도 없지 않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출판불황과 관계없이 콘텐츠만 확실하면 독자들이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사례”라며 치켜올린다. 유재건 그린비 대표도 “과거의 마이너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고, 기존의 메이저들이 차지한 영역을 침투해 새로운 중심을 세울 것이다”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런 확신들은 앞의 책들이 기존에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소재와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 신선한 시도”라는 데서 생겨나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글쓰기나 소재나 관점에서 뭔가 새로운 걸 끌어들이는 게 요즘 ‘대중적 글쓰기’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독자의 ‘인식’을 바꿔놓을 정도의 새로운 역사상이나 철학적 전언은 없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은 것이 아니라, 헌 술을 냉장고에 넣었다가 내놓는 격이라 첫맛은 시원하지만 끝 맛은 더욱 야릇하고 찝찝할 때가 많다.

문학평론가 김인호 씨는 “펼쳐 보다가 10쪽도 못읽고 덮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라는 개인체험을 전한다. 그는 “예전에는 10만부 판매를 너끈히 기록했을 책들이 요즘은 만부에 그치고 있다는 건 근래 책들이 대동소이한 소재와 문체, 고만고만한 이야기들로만 승부하려는 유행현상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현식 인천대 강사(국문학)도 비슷한 생각이다. “고미숙 씨의 옛날 책들은 지적 자극을 던져주는 책이었지만, ‘열하일기…’는 그분이 쓴 책인가 싶을 정도로 실망한 게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런 문제의식이 현재 광범위하게 동의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미시역사서를 둘러싼 출판계의 자화자찬은 ‘비판적 검증’을 겪지 않은 ‘시장판매’에 따른 추후적 해석과 자의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불만을 가지고 계속 ‘대중적 글쓰기’를 추궁하다 보면 지적 쏠림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사회의 독서가 비평적 잣대를 상실한 주류언론이 조성하는 지적 경향을 좇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수시로 정보를 주고받는 언론과 출판사 그리고 아카데미를 답답해하는 학자들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가 띄운 ‘읽을거리’가 ‘대중적 글쓰기’ 자체로 포장되다보니 본질이 가려지는 것이다.

지식대중화, ‘비판적 중계자’로 거듭나야

‘재야’라는 것의 이데올로기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의, 특히 역사학 분야에서의 재야는 민족주의 사학에 대한 강한 반감을 토양으로 성장해왔다. 이덕일, 이희근, 남경태를 거쳐서 최근의 강명관, 백승종, 김현식 등으로 이어지는 재야의 반열들은 기존 학계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해왔다. 예를 들어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刊)에서 조명되는 송시열은 예학의 선봉장이 아니라 숙청의 칼을 허리에 찬 당파의 냉혹한 우두머리로 조명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존학계의 연구성과에 대한 비판이 비판대상자와의 최소한의 담론적 교집합 위에도 서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설령 송시열과 관련된 재야의 지적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담론의 교집합 속에서 반대담론과의 부딪힘과 융합없이, 순전히 바깥에서 담 안쪽을 향해 욕하는 식으로 비판이 이뤄져서는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송시열이라는 역사인물의 복합성이라는 주제 자체의 속성을 가지고 따져볼 때도 그렇다. 이런 진정성 획득의 실패는 주제를 다루는 배타성과 편협성에 기초해 있는 것이고 또한 어느 정도의 ‘말초적 대중영합주의’의 산물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에 오면 상황이 더하다. 최근 역사학계의 ‘대중적 쓰기’는 이런 최소한의 비판적 역할마저도 팽개치고 있다. 이는 학계와 독서계를 연결해주는 ‘중간필자’ 지식인이 전반적으로 놓여있는 상황을 점검해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중계자’의 역할, ‘앵커’가 되지 못하고 쉽게 풀어주는 ‘아나운서’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가장 눈에 걸린다. 견고한 것을 소프트하게 바꾸는 역할로 제한된다는 것은 학계의 역량을 量化시키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맛깔스럽다는 것은 글쓰기의 한 특성으로 국한돼야지, 그것이 책의 전체를 저울질하는 기준으로 적용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쉽다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이 분명하다. 그 이데올로기는 ‘전문성’의 이데올로기에 비해서는 인간적이지만, 그 부작용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대중적 글쓰기의 한계는 명백하다. 그것은 내용의 상한선을 명백하게 긋고 시작함으로써 자기발전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행위이다. 쉬워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고 너무 깊게 들어갈 필요가 없고 예시를 많이 들어서 설명하자는 계율은 마치 허들경기와도 같이 정형화된 힘겨운 몸짓을 생산해낸다.

‘쉽게 쓰기’가 일말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까닭은 글쓰기의 권력이동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은 글쓰기의 주체가 지식인에서 대중에게로 이동된 시기다. 이것은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권위를 갖지 못하는 시대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의 대중적 글쓰기는 일종의 패러다임 변환에 종속되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대중의 감수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주류가 되기 위한 선택인데, 이렇게 볼 때 대중적 글쓰기는 글쓰기에 대한 정교한 자기성찰성을 기반으로 해서 생산된 흐름이라기보다는 외재적 환경에 의해 주어진 수동태인 것이다. 이런 대중적 글쓰기에 내재된 수동성에 주목할 때 우리는 그것이 쉽사리 ‘타협적이고 패턴화된 글쓰기’로 정형화될 수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요즘 학계의 인기저자들의 글쓰기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피로감’도 이런 구조적 변수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출처: 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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