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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결혼 이후의 이 결핍감을 무엇이라 표현해야할 지 몰랐다. 그런데 어제 어떤 연극배우의 인터뷰를 읽으며 그 실체를 언어화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에너지를 빼앗기게 되는 일상". 그녀는 결혼 전에는 주연 배우를 도맡아 하다 결혼 후 조역배우로 활동한다며 그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시집살이나 육아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일상 자체에 에너지를 빼앗기게 된다고... 정확하게 그 원인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태풍으로 피해입은 사람들의 모습을 방송으로 보았다. 언제나 불행은 가난한 곳으로부터 스민다. 홍수는 낮은 곳으로부터 차올라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부터 생채기를 낸다. 가난한 이들은 자연재해를 이겨낼만한 재화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돈이 있는 사람들이 철옹성 같은 집에서 안심하고 지낼 때 부실하기만한 그들의 삶의 환경은 아주 조그만 부침에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 불량한 주거 환경과 삶의 터전을 나라에서 미리 손봐주거나 지켜주지도 않는다. 나라의 힘은 부자들, 힘있는 사람들에게 가깝기 때문이다. 상수 침수 구역, 똑같은 자리에서 몇년간 똑같은 재해가 발생해도 번번이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가진 자들이 집값 상승을 목적으로 도로 예정지를 바꾸고 유해시설을 쫓아낼 때 없는 이들은 자신이 살 집 한 칸조차 변변히 지킬 힘이 없다. 당하고 통곡하고 인내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갈 뿐.

부부간 성추행이 처음으로 유죄로 인정됐다고 한다. 아직까지 유죄로 인정되지 않고 있었나 잠시 혼돈스러웠다. 이혼을 앞둔 상태 등이 아닌  '정상적인' 부부 관계 하에서는 아직 부부강간이 인정된 적도 없다니. 여성계나 젊은이들이야 당연히 찬성하고 언론도 그러한 분위기지만 나이든 분들, 남성들의 반대하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들의 반대 이유에 대해 일일이 논박할 수도 있지만 답답함과 분노, 황당함에 그럴 기운도 없다. 

오늘 아침 주부 대상 아침 프로그램에서는 '효도법'을 제정하는데 찬성한다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훨씬 높게 나오고 찬성 편 나이든 패널들은 득의양양이었다. 사사로운 부부 사이의 일을 어떻게 법이 관여하냐며, 은폐된 폭력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부모에 대한 개인의 효도는 법으로 제정해서 장려하자고?

이 어긋난 가치관들이 한가닥 방향을 잡아갈 날이 과연 있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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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a 2004-08-20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죠, 정말.

마냐 2004-08-21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염됩니다. 이런.

내가없는 이 안 2004-08-21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합니다...

아라비스 2004-08-23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밀라님/결혼과 동시에 무언가가 변하고 소멸되는 것 같아요. 삶에 대한 도전, 모험, 진취성, 욕망, 타인과 세계에로 향함, 창조성, 예술성, 낭만, 아픔, 고통, 예민함 뭐 그런 것들이요...다들 그러신가요? 저만 그런 건가요? 전 왜 그럴까요?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마냐님, 이안님/세 꼭지를 쓰고 제목을 무얼 할까 하다가 문득 무기력이란 단어가 떠오르더군요. 혹 그런 것에 동감하신다든가 감염되셨담 죄송한데...^^;
 

휴가삼아 지방에서 올라오신 아빠는 샤갈전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내년이면 환갑이시고 특별히 예술적 취향이 높으신 것도 아니고 문화적으로는 오지 중의 오지인 곳에서 사시는 아빠가 서울에 오셔서 하고 싶으신 일이 샤갈전을 관람하시는 것이라니, 평소 문화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고자 하시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우리 아빠도 참, 대단한 분이구나 싶었다.  

마침 나도 선선해지는 가을이면 보러 가야겠다 하고 벼르고 있던 전시라 더위야 미술관 안에서는 힘쓰지 못하겠거니 생각하며 먼 여행길을 떠나듯 지하철을 탔다. 흔히 샤갈을 '색채의 마술사'라고 표현하지만 그가 색을 쓰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는 못하겠고 그저 그의 작품만이 지닌 색감과 동심, 천진난만한 기운 등을 참 좋아했던 터였다.

그러나 100여점이 넘는 작품을 가져온 사상 최대의 전시라고 선전한 것에 비해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감동은 기대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니스의 성서박물관에서 느꼈던 그의 작품과의 환상적인 조우의 순간들을 다시 한 번 이 땅에서 맛보길 바랬던 욕심은 지나쳤던 것일까. 유대인 극장 패널화인 <문학> <음악> <연극> <무용> 네 작품에서 오직 약간의 떨림을 느꼈을 뿐이다.

참 우스운 일인 듯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나를 자극한 것은 샤갈의 그림이 아닌 관람객이었다. 아무리 방학이라고 해도 아이들 숙제로 엄마들과 손잡고 나왔다고 해도 평일 낮시간에 미술관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입구에서 2층, 3층 전시실까지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줄을 만들 정도였다. 우리나라 문화 양태라는게 한 곳에만 쏠리는 걸 십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의외였던 것은 관람객의 진지한 태도였다.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작품을 뛰엄뛰엄 보는 사람도 없었고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작품들을 몇 분여에 걸쳐 하나씩 진지하게 감상했다. 5-6학년 정도로 되어보이는 여자아이와 엄마의 대화 역시 잊혀지지 않는다.

아이 : 엄마, 나 르네상스로 쓸거야.(감상문을 말하는 것이겠지)

엄마 : 르네상스는 16세기야.(오옷, 교양있는 어머니로군)

아이 : 아니, 그게 아니라 샤갈하고 16세기 르네상스하고 비교할 거라고...(헉, 초등학생이 '비교'라는 관점에서 감상문을 쓸 생각을 하다니...16세기 르네상스보다는 당대의 추상화가들과 비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충고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외에 드문드문 엿들을 수 있던 말들도 모두들, 나름대로 자신의 관점과 역량 하에서 작품을 이해하려는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학력이 높은 어머니들이 집안에만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이렇듯 아이들 교육 수준의 향상에 일조하는 식으로라도 뒷받침하는 형태로라도 기능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물론 중산층 이하 계층 아이들의 문화 소외 문제도 생각해볼 수 있겠고 엄마들의 지나치거나 유행만 좇는 교육열을 문제삼을 수도 있겠지마는... 지난번 현대미술관에서 어떤 엄마는 많아야 네 살밖에 안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너는 그림 보기가 싫으니. 이렇게 그림 볼 줄도 몰라서 앞으로 어떻게 할래"하고 나무라기도 하더라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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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8-1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저 엄마와 딸 장난이 아니로군요.
하지만, 님의 아버님도 장난이 아닙니다. 넘 근사한 부녀입니다. 에구. 부러버라.

아영엄마 2004-08-16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 사이트에서 샤갈 전시회 무료관람 티켓 이벤트를 한 적이 있는데 저도 응모해서 표 받았거든요.. 조금 선선해지면 갈려고 미루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은 이런 문화혜택을 누려 본 적이 거의 없어서 좀 걱정되네요...

ceylontea 2004-08-16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적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사회적으로 너무 무시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교육을 받고 학력이 높은 사람이 사회 활동을 통해 그 진가를 발휘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다음 세대를 바른 가치관으로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4-08-16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언급하신 모녀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네요. 어떤 삶을 사는 엄마길래, 그림 볼 줄도 몰라 '앞으로' 어떻게 할래, 라고 말할까요...

superfrog 2004-08-1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제목이 딱이에요.. ㅋㅋ

아라비스 2004-08-17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정말, 장난이 아니죠? 저희 부녀는 아니구요...^^; 그렇게나 좋아하시는데 지방에 사시는 탓에 문화혜택을 못누리시는 걸 보면 좀 안타깝죠.
아영엄마님/아이들이 정말 좋아할걸요? 이왕 나가신 김에 덕수궁 돌담길도 걷고... 아... 좋겠다.
실론티님/양육과 교육은 죄다 어머니 몫으로 맡겨두고 정말 너무하죠...
이안님/제가 기억력이 나빠 단어 하나하나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예요. 다만 그런 분위기만큼은 확실했다는 것... 저도 참 답답하대요.
금붕어님/그렇네요^^
 


페르세우스 유성우라는 것을 관측하기에 좋은 날이라는 뉴스를 신문에서 봤다. 별똥별을 관측할 수 있다고 할 때마다 오빠에게 이야기하곤 했지만 오빠는 늘 관심없어 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귀담아 두었는지 별 보러 나가자고 한다. 소원도 미리 생각해 두었다면서... 이제 빌고 싶은 소원도 많아지고 마눌이 해달라는 것도 잘 들어주고 싶은 건지... ㅎㅎ

도심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을 찾기 위해 차를 타고 일단은 광명역사 근처로 갔는데 어두컴컴한 곳은 죄다 사유지였고 방향도 맞지 않아 삼막사로 향했다. 지난 겨울밤 어떤 곳인지 한 번 가봤을 때 그 길에는 가로등조차 없어 무서울 지경이었는데 이제 도로가 완전히 개발되어 있었고 도로 양편에는 더위를 피하러 나와 돗자리를 깔고 누운 사람들로 줄을 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여들었는지 '치킨 배달'이라는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다. 가장 꼭대기 주차장엔 그나마 가로등도 없고 하늘도 가리지 않아 여기다, 싶었더니 웬걸, 헤드라이트 불빛에 비친, 주차장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 나도 나중에는 그와 다름없는 처지로 있긴 했지만 불을 켜면 달아나는 바퀴벌레 같았다. 헤드라이트가 고장이라도 났다면 어쨌을지...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은지 얼마되지 않아 우리는 함께 별똥별 하나를 발견했다. 별도 잘 보이지 않고, 차들은 계속 들어오고, 공중화장실 냄새도 심하고, 목도 아프고 해서 분위기가 잘 잡히지 않은 상태였고, 그 바람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소원도 빌지 못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시간은 매우 짧다. 그래서 오빠는 소원을 네 글자로 짧게 빌자고 한다. 내가 "만사형통"이라고 했더니 "꼭, 너같은 소원이다"라고 실쭉거리며 자기는 "백년해로"란다. 귀여운 오빠 같으니...ㅋㅋ

하지만 우리는 그 소원을 빌 별똥별을 찾지 못한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내려왔다.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를 부르며 풀벌레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시원한 여름밤을 느끼기에는 턱없이 열악한 환경 탓이었다. 일단 하나 봤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도시에서 맨눈으로 별똥별 보기가 어디 쉬운가. 밤이어야 하고, 달이 없어야 하고, 게다가 도시에서 불빛 없는 곳 찾기란 정말이지 힘들다.

오랜만에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 만들었다. 별똥별이 떨어질 때 빌어야 꼭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그 소원은 언젠가는, 아니 언제라도 꿈이 아닌 현실로 자리잡고 있는 것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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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4-08-16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까지 별똥별 떨어지는 것 못봤는데... 그리 보기 쉬운 것은 아니군요..

superfrog 2004-08-16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 만들었다. 별똥별이 떨어질 때 빌어야 꼭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그 소원은 언젠가는, 아니 언제라도 꿈이 아닌 현실로 자리잡고 있는 것일테니까.
님의 요 마지막 글들이 별똥별 만큼이나 아름다워요..^^ 님 말씀대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셨군요.. ㅎㅎ

아라비스 2004-08-17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네. 제 경우도 무지 행운이었죠. 그런데 이번에 옥상에서 열 개나 봤다는 사람도 있어요...
금붕어님/솔직히 전 마지막 문장이 너무 나이브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

때도 아닌데 갑자기 온 가족이 성묘를 가게 됐다.  지금까지 추석에만 성묘를 갔던 터라 봄기운에 뒤덮인 공원묘지는 매우 낯설었다. 죽음의 기운은 오히려 평화롭고 안온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죽음이 있어 봄과 생명이 되돌아 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 마냥.  인근 화훼단지에서 산 꽃화분을 비석 곁에 심었다. 꽃이 심겨진 흙무더기가 무너지지 않게 검은 비닐 단지 안에서 쏘옥쏙 빼어내는 날 보더니 옆에 있던 동생이 "와, 제법이네"한다. 언제나 나를 과대평가, 과소평가 하기만 하는 동생. "그러엄~ 내가 타고난 가드너(gardener)인데"하니 삐죽, 한다. 의기양양해진 내가 썰렁하게 덧붙인 말 "존 엘리엇 가드너......." 그러자 동생이 묻는다. "존 엘리엇이 유명한 가드너야?"

(* John eliot gardner는 나름대로 유명한 지휘자 이름입니다.)

둘.

녹두 고시촌에는 고시생을 위한 일요일 5시 미사가 있다. 일반 본당이 아닌, 상가 건물 1층을 개조해 꽤 쓸만한 사무실, 만남의 방, 성당을 꾸며놓았다. 모대학 법대학장님이 기증했다는 기사를 언뜻 본 것 같은데, 역시 권력 언저리에 있으면 살기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시촌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성당이 또 하나 있는데 말이다) 고시생인 동생의 안내로 이곳에 갔는데, 들어가기 전부터 "여기는 성당이 좁아서 늦게 들어가면 쪽팔린다"고 투덜댄다. 나 땜에 늦은 것도 아니고 성묘 갔다가 시간이 딱 맞아 여기로 온 것 뿐인데... 끝나고 나오는데 입구에 빵과 우유가 준비되어 있다.  인원수에 비해 간식이 모자랄 것 같아 보였지만 건조한 봄바람에 목이 많이 말랐던 터라 냉큼 딸기우유 하나를 집었다. 동생은 또 핀잔이다. "10분이나 지각한 주제에 간식만 챙기냐" 지각과 간식이 무슨 관계지? 지각해도 영성체는 꼬박 주는데? 차라리 동생이 배고픈 고시생들을 위한 간식을 손님인 내가 왜 가져가냐, 목마르면 슈퍼에서 사먹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면 수긍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동생, 내가 신나게 꿀꺽꿀꺽 마시는 걸 보더니 자기도 목이 마른지 한 모금만 달란다. 내가 안주자 뺐기까지 하려는 통에 다급해진 난 용량 초과로 우유를 입에다 부어댔다. 길거리에서 이 나이에 동생이랑 먹는 걸로 아웅다웅 하자니 그러잖아도 우스운 터에, 노닥거리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남자 고시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웃음... 입이 터지도록 들어 있는 우유를 삼키지는 못하겠고 뱉지도 못하겠고.... 결국 몇 초간 애쓰다가 결국 쭈그리고 앉아 입에 있던 우유를 모두 토해버렸다. 분홍색 우유가 아스팔트 위에 적셔신 꼴이라니...다행히 내가 비참함과 쪽팔림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이 광경을 처음부터 줄곧 지켜보았으면서도 쪽팔리다 도망가지 않고, 괜찮냐 걱정하며 등 두드려주고, 휴지로 아스팔트 바닥의 우유를 닦는 날 도와주던 우리 오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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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4-2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유명한 가드너와 터져나오는 핑크빗 우유가
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안겨주네요.^^
일상의 사소한 행복들이 떠오릅니다.

아라비스 2004-04-28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늘 자상한 코멘트를 남겨주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처음으로, 논문을 쓰기로 결심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는 중이예요....__;

물무늬 2004-04-28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러셨군요....그 논문이란 것이 참.... 그래도 해내고 나면.....-.-::

마태우스 2004-04-29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바나나우유를 더 좋아합니다. 딸기우유도 맛있긴 하지만...

박예진 2004-04-30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본인이 되면 굉장히 뭐뭐 하겠지만 ^-^ 추억은 방울방울이군요! 히히.
 

잠꼬대를 하기 시작한 건 집 떠나 서울에 올라와 대학생활을 시작하고서부터였다. 손주들에게 잔정이 전혀 없는 친할머니와의 동거는 하숙이나 자취의 어려움과는 또다른, 일면 내게는 더욱 힘들고 괴로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할머니집이 마침 학교까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오랜기간 혼자 사신 할머니에 대한, 못말리는 효자 장남인 아빠의 강압감 때문에 나는 4년 내내 그 집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 집에 내려오자마자 엄마는 내게 잠꼬대 버릇이 생겼다는 걸 알아챘고 엄마는 그 때 무척 가슴 아파하셨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잠꼬대는 주로 할머니에게 대드는 내용이었고, 가끔씩은 엉엉 울며 일어나기도 했다. "착한 애가 얼마나 눈치를 보고, 억압되고, 가슴에 묻어둔 것이 많았으면... " 하시던 엄마는  "20대에는 잠꼬대 버릇이 생기기도 한다더라. 좀 그러다가 없어진대"하며 애써 위로해 주셨다. 

동생 둘이 하나씩 서울로 올라오고, 한 명 이상은 더이상 집에서 돌봐 줄 수 없다는, 내가 이 나이에 애들 뒤치닥거리 해주게 생겼냐는 할머니의 의지에 따라 나는 동생들과 새둥지를 틀었다. 독립이자 해방이었다. 대학 4학년 때 IMF로 취업난이 생기면서 나의 걱정은 직장을 못 갖는 자체가 아니라 계속 할머니집에서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클 정도였으니까. 결국 졸업도 하기 전 11월에 처음으로 시험 친 직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할머니집을 떠난 후에도 나의 잠꼬대는 계속됐다. 나는 가끔씩 밤마다 할머니에게 말대꾸했고, 고모들의 잔소리와 눈치에 억울한 통곡을 하며 일어났다.

할머니집을 떠난 지도 6년째, 당시와 관련된 악몽이나 잠꼬대의 빈도와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잠꼬대만은 계속된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은 처음에는 자다가 내 잠꼬대 때문에 번쩍번쩍 일어났다고 했다. 워낙에 잠꼬대가 또렷하고 크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이었냐 물어보면, 정확히 알아듣진 못해도, 대개는 아직도 무언가를 주장하고 따지는 내용이란다.

오늘 아침, 비몽사몽간에 그가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나중에 제 정신 차리고 보니 와이셔츠 단추 달고 있는 거였더만) 키득키득 웃음을 참고 있는 소릴 들었다. 굉장히 재밌는 걸 억지로 참는 웃음이길래 분명 내가 또 잠꼬대를 했구나 싶어 물어봤더니, 내가 매우 또렷하게 "여보세요?"라고 했단다. 잠결에도 피식, 웃었다.  

우스울 테다. 모든 잠꼬대가 혼자서 상대의 대화, 행동까지 주고 받는 것이긴 하지만 전화하는 듯이 "여보세요"라고 발화된 걸 들었을 땐,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재미를 선사한 건 난데, 나는 그걸 나중에 들어 알고, 억울하잖아, 나도 잠꼬대하는 사람을 고를 걸,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난 꿈도 잘 꾸고, 꿈을 그대로만 옮기면 판타스틱 소설이나 영화가 될 법도 한 정도고^^; , 게다가 잠꼬대까지... 그래도 다행이다. 내 상처 중 하나가 점점 잊혀지는 중인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아도 좋고, 노래를 불러도 좋으니, 그래서 때때로 같이 사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가 내 악몽에 안타까워 하며 달래주지 않게 되면 더 좋으니, 매일 매일 행복한 잠꼬대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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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4-2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심리학이나 머 여러가지 전문적인 면에서 볼 때 정신적 외상이 잠꼬대로 나타난 거잖아요.. 근데 키득키득 웃고 말았어요..;; '여보세요?' 땜에.. ^^ 저와 같이 사는 사람도 자다가 일 관련해서 막 설명해주다가 제가 '그래서, 어느 나라에 뭘 보낼 건데?' 라고 대꾸를 하면 잠이 좀 깼는지 피식, 웃더군요..^^

마냐 2004-04-2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기억'이 옆지기와의 따뜻한 일상속에서 엷어지고, 오히려 예쁘게 새로 태어나는 거 같아...결말이 무지 마음에 듭니다. ^^

프레이야 2004-04-2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라비스님, 심각하게 공감하며 읽다가 "여보세요? 땜에 배를 잡았어요.
저랑 같이 사는 사람도 잠꼬대를 종종 하거든요, 그거 옆에서 듣는 사람 기분 제가 알죠.
얼마나 재밌다구요. 저도 예전엔 잠꼬대를 했어요. 님처럼 따지고 주장하는 내용이었어요. 잠꼬대하다 깨면 그 내용이 어느정도 기억나고, 나는 마구 억울해하며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죠. 근데 세월이 흐르며 그런 거 없어졌어요. 따지고 주장할 필요가 없어졌는지 제 생활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는지. 아무튼 좋은 쪽인 것 같아요^^

물무늬 2004-04-22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근래에 우연히 문학 비평, 시학 그런 것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님의 글을 읽으며 처음으로 그 내용이 중에 중요하다고들 하는 개념이 하나 떠올랐어요.
"반전!"
뭔가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빨려들어갔는데...."여보세요?" 와 "낭군님의 키득키득"....그리고 매듭 짓는 행복한 잠꼬대....노스롭 프라이의 "구원의 신화"에서 나오는 희극의 반전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제 입가에는 미소가....^^
물론 끝부분이 보기에 따라 조금은 그늘진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너무 예쁜 이야기였어요....방금 문지방에 새끼 발가락 부딛혀서 발톱이 꺽이고 피가 고여서 쓰라린 느낌이었는데, 님의 잔잔하고 포근하며 미소가 번지게 하는 이야기에 그 통증을 잊었네요..감사해요....^^

아라비스 2004-04-26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글을 재밌게 읽고 있는 터라, 재밌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제 성향도 그렇지만 글은 더욱 엄숙주의 색채를 지녔었다고 반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시도해 본 스타일인데, 역시 몸에 맞지 않은 옷 입은 듯 어색하고 어눌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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