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때도 아닌데 갑자기 온 가족이 성묘를 가게 됐다.  지금까지 추석에만 성묘를 갔던 터라 봄기운에 뒤덮인 공원묘지는 매우 낯설었다. 죽음의 기운은 오히려 평화롭고 안온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죽음이 있어 봄과 생명이 되돌아 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 마냥.  인근 화훼단지에서 산 꽃화분을 비석 곁에 심었다. 꽃이 심겨진 흙무더기가 무너지지 않게 검은 비닐 단지 안에서 쏘옥쏙 빼어내는 날 보더니 옆에 있던 동생이 "와, 제법이네"한다. 언제나 나를 과대평가, 과소평가 하기만 하는 동생. "그러엄~ 내가 타고난 가드너(gardener)인데"하니 삐죽, 한다. 의기양양해진 내가 썰렁하게 덧붙인 말 "존 엘리엇 가드너......." 그러자 동생이 묻는다. "존 엘리엇이 유명한 가드너야?"

(* John eliot gardner는 나름대로 유명한 지휘자 이름입니다.)

둘.

녹두 고시촌에는 고시생을 위한 일요일 5시 미사가 있다. 일반 본당이 아닌, 상가 건물 1층을 개조해 꽤 쓸만한 사무실, 만남의 방, 성당을 꾸며놓았다. 모대학 법대학장님이 기증했다는 기사를 언뜻 본 것 같은데, 역시 권력 언저리에 있으면 살기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시촌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성당이 또 하나 있는데 말이다) 고시생인 동생의 안내로 이곳에 갔는데, 들어가기 전부터 "여기는 성당이 좁아서 늦게 들어가면 쪽팔린다"고 투덜댄다. 나 땜에 늦은 것도 아니고 성묘 갔다가 시간이 딱 맞아 여기로 온 것 뿐인데... 끝나고 나오는데 입구에 빵과 우유가 준비되어 있다.  인원수에 비해 간식이 모자랄 것 같아 보였지만 건조한 봄바람에 목이 많이 말랐던 터라 냉큼 딸기우유 하나를 집었다. 동생은 또 핀잔이다. "10분이나 지각한 주제에 간식만 챙기냐" 지각과 간식이 무슨 관계지? 지각해도 영성체는 꼬박 주는데? 차라리 동생이 배고픈 고시생들을 위한 간식을 손님인 내가 왜 가져가냐, 목마르면 슈퍼에서 사먹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면 수긍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동생, 내가 신나게 꿀꺽꿀꺽 마시는 걸 보더니 자기도 목이 마른지 한 모금만 달란다. 내가 안주자 뺐기까지 하려는 통에 다급해진 난 용량 초과로 우유를 입에다 부어댔다. 길거리에서 이 나이에 동생이랑 먹는 걸로 아웅다웅 하자니 그러잖아도 우스운 터에, 노닥거리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남자 고시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웃음... 입이 터지도록 들어 있는 우유를 삼키지는 못하겠고 뱉지도 못하겠고.... 결국 몇 초간 애쓰다가 결국 쭈그리고 앉아 입에 있던 우유를 모두 토해버렸다. 분홍색 우유가 아스팔트 위에 적셔신 꼴이라니...다행히 내가 비참함과 쪽팔림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이 광경을 처음부터 줄곧 지켜보았으면서도 쪽팔리다 도망가지 않고, 괜찮냐 걱정하며 등 두드려주고, 휴지로 아스팔트 바닥의 우유를 닦는 날 도와주던 우리 오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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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4-2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유명한 가드너와 터져나오는 핑크빗 우유가
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안겨주네요.^^
일상의 사소한 행복들이 떠오릅니다.

아라비스 2004-04-28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늘 자상한 코멘트를 남겨주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처음으로, 논문을 쓰기로 결심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는 중이예요....__;

물무늬 2004-04-28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러셨군요....그 논문이란 것이 참.... 그래도 해내고 나면.....-.-::

마태우스 2004-04-29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바나나우유를 더 좋아합니다. 딸기우유도 맛있긴 하지만...

박예진 2004-04-30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본인이 되면 굉장히 뭐뭐 하겠지만 ^-^ 추억은 방울방울이군요! 히히.
 

학문의 통언어적 실천 본격…빈약한 내용 돌파 관건
흐름 : 대중적 글쓰기 붐 어떻게 볼 것인가

2004년 04월 23일   강성민 기자 

학계의 지나친 전문주의와 엘리트주의는 삶과 학문을 결별시켜 별개의 것으로 만들어왔다. 엘리트주의는 학문을 자율적인 영역으로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고 요긴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부에서 아무리 활발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 듯한 ‘효과’를 내더라도, 현실의 제도와 삶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힘이 없다면 그 기득권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자율성의 함정’이 인식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이른바 ‘지식의 대중화’가 목소리를 높여온 것은 대략 1990년대 후반부터이고 그것이 일각에서 ‘대세’로 인식되고 움직이면서 하나의 지류를 형성한 것은 2000년 이후다.

‘보편적 청중’ 확보해 학문위기 타파

지식대중화를 말할 때 지배적인 心象으로 떠올리는 것은 ‘대중적 글쓰기’다. 대중적 글쓰기는 어려운 전문용어와 한자, 논리의 구조물을 해체해서 우리말 속에 생각이 잘 용해된 쉬운 글, 독특한 예시와 문체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글쓰기를 의미한다. 이 대중적 글쓰기의 순기능은 학계의 전문지식과 대중의 접촉포인트를 대폭 늘려 학문적 성찰성과 깊이있는 지식의 토대 위에 우리의 삶을 위치시킬 수 있다는 데 있고, 또한 철학·한문학 등 고사직전에 처한 순수학문의 위상을 되살려낸다는 데 있다.

이런 실용적인 측면 말고도 ‘대중적 글쓰기’가 원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중대한 기능은 따로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학문을 하는 목적이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근대적 학문이 거대한 기계의 한 부품처럼 ‘특수한 보편성’이라는 형용모순에 기초해 있어, 횡단성과 1인2역이 중요시되는 오늘날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즉, 분과학문이 자신이 근거한 특수영역을 넘어설 때는 매우 ‘기형적인 것’ 아니면 ‘유아적인 것’이 돼버린다는 것에 대한 자각인 셈인데, 따라서 대상을 궁리하는 일 자체가 ‘보편적인 청중’을 염두에 두고 진행될 때에만 통언어적인 학문이 가능하다는 게 ‘대중적 글쓰기’의 실천개념에 들어있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지식 대중화’의 다양한 실천들은 ‘교양서적’의 범람에서 그 존재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일단 양적이고 외형적인 측면에서 학계의 엄숙주의, 전문가주의, 논문 중심주의를 경계하는 균형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오늘날 지식대중화 현상이 과연 앞에서 언급한 실용적이고 본질적인 역할에 충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구호에 가려 보이지 않는 허점과 이데올로기가 많은 것 같고, ‘대중’이라는 마술에 기대는 정도에 따라 리스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생긴다.

지식의 대중화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창조적 파괴’를 동반하는 매우 묵직한 과정이다. 그것은 생각하기와 말하기의 관행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이 고도의 추상화 작업으로 철학성과 깊이를 획득한다면, 반대로 ‘고도의 구상화 작업’으로 그 구체성의 세계를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의 대중화에 이런 ‘구상화’가 담보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선 그 작업이 주제나 사유 차원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소재나 관점, 글쓰기 차원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미시사’와 ‘생활사’의 열풍이 그 일단을 엿보게 해준다.

‘고도의 구상화’ 없는 글쓰기의 迷夢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을 수용하면서 2년 전부터 본격적인 미시사 적용서들이 선보였는데, 백승종 서강대 교수(한국사)의 ‘그 나라의 역사와 말’(궁리 刊),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돌베개 刊)는 ‘개인’을 통해 역사전체를 새롭게 보려는 획기적인 시도로 주목을 받았지만 곧 비판에 부딪쳤다. 한 개인의 삶과 철학이 시대와 맺는 관련성 및 시대의 지형도를 새롭게 볼만한 요소를 내포하지 못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과는 별개로, 그의 작업은 일정한 의미망을 형성했다. 전자는 이찬갑이라는 평민지식인의 ‘일기’를 따라읽었고, 후자는 사상가인 하서 김인후와의 가상대담을 통해 그의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측면을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 소재와 관점, 글쓰기 방법론이 독특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선비의 생활사를 다룬 책은 정창권 고려대 강사(국문학)의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사계절 刊), 허경진 연세대 교수(국문학)의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푸른역사 刊)등이 있지만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물론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 刊)이나 고미숙 씨의 ‘열하일기, 그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그린비 刊)처럼 각각 5만부, 2만5천부의 판매고를 올린 경우도 없지 않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출판불황과 관계없이 콘텐츠만 확실하면 독자들이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사례”라며 치켜올린다. 유재건 그린비 대표도 “과거의 마이너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고, 기존의 메이저들이 차지한 영역을 침투해 새로운 중심을 세울 것이다”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런 확신들은 앞의 책들이 기존에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소재와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 신선한 시도”라는 데서 생겨나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글쓰기나 소재나 관점에서 뭔가 새로운 걸 끌어들이는 게 요즘 ‘대중적 글쓰기’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독자의 ‘인식’을 바꿔놓을 정도의 새로운 역사상이나 철학적 전언은 없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은 것이 아니라, 헌 술을 냉장고에 넣었다가 내놓는 격이라 첫맛은 시원하지만 끝 맛은 더욱 야릇하고 찝찝할 때가 많다.

문학평론가 김인호 씨는 “펼쳐 보다가 10쪽도 못읽고 덮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라는 개인체험을 전한다. 그는 “예전에는 10만부 판매를 너끈히 기록했을 책들이 요즘은 만부에 그치고 있다는 건 근래 책들이 대동소이한 소재와 문체, 고만고만한 이야기들로만 승부하려는 유행현상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현식 인천대 강사(국문학)도 비슷한 생각이다. “고미숙 씨의 옛날 책들은 지적 자극을 던져주는 책이었지만, ‘열하일기…’는 그분이 쓴 책인가 싶을 정도로 실망한 게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런 문제의식이 현재 광범위하게 동의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미시역사서를 둘러싼 출판계의 자화자찬은 ‘비판적 검증’을 겪지 않은 ‘시장판매’에 따른 추후적 해석과 자의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불만을 가지고 계속 ‘대중적 글쓰기’를 추궁하다 보면 지적 쏠림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사회의 독서가 비평적 잣대를 상실한 주류언론이 조성하는 지적 경향을 좇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수시로 정보를 주고받는 언론과 출판사 그리고 아카데미를 답답해하는 학자들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가 띄운 ‘읽을거리’가 ‘대중적 글쓰기’ 자체로 포장되다보니 본질이 가려지는 것이다.

지식대중화, ‘비판적 중계자’로 거듭나야

‘재야’라는 것의 이데올로기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의, 특히 역사학 분야에서의 재야는 민족주의 사학에 대한 강한 반감을 토양으로 성장해왔다. 이덕일, 이희근, 남경태를 거쳐서 최근의 강명관, 백승종, 김현식 등으로 이어지는 재야의 반열들은 기존 학계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해왔다. 예를 들어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刊)에서 조명되는 송시열은 예학의 선봉장이 아니라 숙청의 칼을 허리에 찬 당파의 냉혹한 우두머리로 조명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존학계의 연구성과에 대한 비판이 비판대상자와의 최소한의 담론적 교집합 위에도 서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설령 송시열과 관련된 재야의 지적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담론의 교집합 속에서 반대담론과의 부딪힘과 융합없이, 순전히 바깥에서 담 안쪽을 향해 욕하는 식으로 비판이 이뤄져서는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송시열이라는 역사인물의 복합성이라는 주제 자체의 속성을 가지고 따져볼 때도 그렇다. 이런 진정성 획득의 실패는 주제를 다루는 배타성과 편협성에 기초해 있는 것이고 또한 어느 정도의 ‘말초적 대중영합주의’의 산물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에 오면 상황이 더하다. 최근 역사학계의 ‘대중적 쓰기’는 이런 최소한의 비판적 역할마저도 팽개치고 있다. 이는 학계와 독서계를 연결해주는 ‘중간필자’ 지식인이 전반적으로 놓여있는 상황을 점검해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중계자’의 역할, ‘앵커’가 되지 못하고 쉽게 풀어주는 ‘아나운서’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가장 눈에 걸린다. 견고한 것을 소프트하게 바꾸는 역할로 제한된다는 것은 학계의 역량을 量化시키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맛깔스럽다는 것은 글쓰기의 한 특성으로 국한돼야지, 그것이 책의 전체를 저울질하는 기준으로 적용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쉽다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이 분명하다. 그 이데올로기는 ‘전문성’의 이데올로기에 비해서는 인간적이지만, 그 부작용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대중적 글쓰기의 한계는 명백하다. 그것은 내용의 상한선을 명백하게 긋고 시작함으로써 자기발전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행위이다. 쉬워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고 너무 깊게 들어갈 필요가 없고 예시를 많이 들어서 설명하자는 계율은 마치 허들경기와도 같이 정형화된 힘겨운 몸짓을 생산해낸다.

‘쉽게 쓰기’가 일말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까닭은 글쓰기의 권력이동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은 글쓰기의 주체가 지식인에서 대중에게로 이동된 시기다. 이것은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권위를 갖지 못하는 시대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의 대중적 글쓰기는 일종의 패러다임 변환에 종속되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대중의 감수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주류가 되기 위한 선택인데, 이렇게 볼 때 대중적 글쓰기는 글쓰기에 대한 정교한 자기성찰성을 기반으로 해서 생산된 흐름이라기보다는 외재적 환경에 의해 주어진 수동태인 것이다. 이런 대중적 글쓰기에 내재된 수동성에 주목할 때 우리는 그것이 쉽사리 ‘타협적이고 패턴화된 글쓰기’로 정형화될 수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요즘 학계의 인기저자들의 글쓰기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피로감’도 이런 구조적 변수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출처: 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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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를 하기 시작한 건 집 떠나 서울에 올라와 대학생활을 시작하고서부터였다. 손주들에게 잔정이 전혀 없는 친할머니와의 동거는 하숙이나 자취의 어려움과는 또다른, 일면 내게는 더욱 힘들고 괴로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할머니집이 마침 학교까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오랜기간 혼자 사신 할머니에 대한, 못말리는 효자 장남인 아빠의 강압감 때문에 나는 4년 내내 그 집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 집에 내려오자마자 엄마는 내게 잠꼬대 버릇이 생겼다는 걸 알아챘고 엄마는 그 때 무척 가슴 아파하셨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잠꼬대는 주로 할머니에게 대드는 내용이었고, 가끔씩은 엉엉 울며 일어나기도 했다. "착한 애가 얼마나 눈치를 보고, 억압되고, 가슴에 묻어둔 것이 많았으면... " 하시던 엄마는  "20대에는 잠꼬대 버릇이 생기기도 한다더라. 좀 그러다가 없어진대"하며 애써 위로해 주셨다. 

동생 둘이 하나씩 서울로 올라오고, 한 명 이상은 더이상 집에서 돌봐 줄 수 없다는, 내가 이 나이에 애들 뒤치닥거리 해주게 생겼냐는 할머니의 의지에 따라 나는 동생들과 새둥지를 틀었다. 독립이자 해방이었다. 대학 4학년 때 IMF로 취업난이 생기면서 나의 걱정은 직장을 못 갖는 자체가 아니라 계속 할머니집에서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클 정도였으니까. 결국 졸업도 하기 전 11월에 처음으로 시험 친 직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할머니집을 떠난 후에도 나의 잠꼬대는 계속됐다. 나는 가끔씩 밤마다 할머니에게 말대꾸했고, 고모들의 잔소리와 눈치에 억울한 통곡을 하며 일어났다.

할머니집을 떠난 지도 6년째, 당시와 관련된 악몽이나 잠꼬대의 빈도와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잠꼬대만은 계속된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은 처음에는 자다가 내 잠꼬대 때문에 번쩍번쩍 일어났다고 했다. 워낙에 잠꼬대가 또렷하고 크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이었냐 물어보면, 정확히 알아듣진 못해도, 대개는 아직도 무언가를 주장하고 따지는 내용이란다.

오늘 아침, 비몽사몽간에 그가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나중에 제 정신 차리고 보니 와이셔츠 단추 달고 있는 거였더만) 키득키득 웃음을 참고 있는 소릴 들었다. 굉장히 재밌는 걸 억지로 참는 웃음이길래 분명 내가 또 잠꼬대를 했구나 싶어 물어봤더니, 내가 매우 또렷하게 "여보세요?"라고 했단다. 잠결에도 피식, 웃었다.  

우스울 테다. 모든 잠꼬대가 혼자서 상대의 대화, 행동까지 주고 받는 것이긴 하지만 전화하는 듯이 "여보세요"라고 발화된 걸 들었을 땐,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재미를 선사한 건 난데, 나는 그걸 나중에 들어 알고, 억울하잖아, 나도 잠꼬대하는 사람을 고를 걸,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난 꿈도 잘 꾸고, 꿈을 그대로만 옮기면 판타스틱 소설이나 영화가 될 법도 한 정도고^^; , 게다가 잠꼬대까지... 그래도 다행이다. 내 상처 중 하나가 점점 잊혀지는 중인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아도 좋고, 노래를 불러도 좋으니, 그래서 때때로 같이 사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가 내 악몽에 안타까워 하며 달래주지 않게 되면 더 좋으니, 매일 매일 행복한 잠꼬대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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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4-2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심리학이나 머 여러가지 전문적인 면에서 볼 때 정신적 외상이 잠꼬대로 나타난 거잖아요.. 근데 키득키득 웃고 말았어요..;; '여보세요?' 땜에.. ^^ 저와 같이 사는 사람도 자다가 일 관련해서 막 설명해주다가 제가 '그래서, 어느 나라에 뭘 보낼 건데?' 라고 대꾸를 하면 잠이 좀 깼는지 피식, 웃더군요..^^

마냐 2004-04-2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기억'이 옆지기와의 따뜻한 일상속에서 엷어지고, 오히려 예쁘게 새로 태어나는 거 같아...결말이 무지 마음에 듭니다. ^^

프레이야 2004-04-2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라비스님, 심각하게 공감하며 읽다가 "여보세요? 땜에 배를 잡았어요.
저랑 같이 사는 사람도 잠꼬대를 종종 하거든요, 그거 옆에서 듣는 사람 기분 제가 알죠.
얼마나 재밌다구요. 저도 예전엔 잠꼬대를 했어요. 님처럼 따지고 주장하는 내용이었어요. 잠꼬대하다 깨면 그 내용이 어느정도 기억나고, 나는 마구 억울해하며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죠. 근데 세월이 흐르며 그런 거 없어졌어요. 따지고 주장할 필요가 없어졌는지 제 생활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는지. 아무튼 좋은 쪽인 것 같아요^^

물무늬 2004-04-22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근래에 우연히 문학 비평, 시학 그런 것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님의 글을 읽으며 처음으로 그 내용이 중에 중요하다고들 하는 개념이 하나 떠올랐어요.
"반전!"
뭔가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빨려들어갔는데...."여보세요?" 와 "낭군님의 키득키득"....그리고 매듭 짓는 행복한 잠꼬대....노스롭 프라이의 "구원의 신화"에서 나오는 희극의 반전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제 입가에는 미소가....^^
물론 끝부분이 보기에 따라 조금은 그늘진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너무 예쁜 이야기였어요....방금 문지방에 새끼 발가락 부딛혀서 발톱이 꺽이고 피가 고여서 쓰라린 느낌이었는데, 님의 잔잔하고 포근하며 미소가 번지게 하는 이야기에 그 통증을 잊었네요..감사해요....^^

아라비스 2004-04-26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글을 재밌게 읽고 있는 터라, 재밌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제 성향도 그렇지만 글은 더욱 엄숙주의 색채를 지녔었다고 반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시도해 본 스타일인데, 역시 몸에 맞지 않은 옷 입은 듯 어색하고 어눌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습니다.
 

우리는-신학자로서 또는 수도자로서-이 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무엇이 세상인지, 세상이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세상이 형성되고 구성되어 있는지 등 신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고서도 신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창조개념은 이로써 공허한 개념이 되고 만다. 피조물의 내용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가 어떻게 신의 창조사업을 진지하게 논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세상의 창조주 하느님 하며 신을 찬미하고 사랑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신약성서 면면은 예수가, 자신이 속한 시공간의, 당시 이스라엘 민중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내며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았고 그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니고 있었음을 드러내준다. 그는 바리사이인들이 지닌 허위의 심층, 율법을 강조하는 그들의 문자지상주의, 패권주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내부를 통렬히 비판한다.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반대되는 사회 현실을, 그 내부를, 심장을 정확히 읽어낸 것이다. 또 예수는 종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비전을 민중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속담 등 그들 언어로 표현해 냈으며 그들의 생활상을 들어 비유로 설명했다. 예수는 단지 아름답고 고상한 말만 뿜어낸 교양인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생활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그리고 그 교회의 최고 권력층은 점점 그들만의 성에 스스로 갇힌 채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듯 보인다. 현대인의 일상생활은 그들에게 그저 속된 것, 세상적인 것, 하느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게 만드는 것, 비본질적인 것,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신경쓰지 말아야 될 것, 물리쳐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의 악과 고통, 있는 그대로의 세상살이 모습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그들에게 세상은 때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또 때로는 죄많은 인간이 더럽혀 놓은 천한 것의 양극단을 오간다. 그들이 사는 물리적 공간은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제 입으로 들어갈 밥을 자기 손으로 벌어먹지 않을 뿐 아니라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상의 행위마저도 그들이 고용한 '세상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가난하게 산다고, 세상에 대해 어떤 욕심도 없다고 착각하며 지낸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병들었을 때 치료해 줄 것, 죽으면 묻어줄 것이 보장된 상태에서 더이상의 욕심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 안락하고 모든 것이 보장되어 있는 곳에서 그들은 제 손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세상 사람들이 부디 죄악을 떨쳐버리고 하느님에게 돌아오길,  하며, 그저 허황된 기도만을 되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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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7-22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교회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평생을 두고 제게 시험대처럼 다가올 듯한데 독실하다는 신앙의 선배들에겐 제 속을 드러낼 수 없으니 원...
 

한겨레 21 기사(503호)입니다.

문화포커스- “우린 서평으로 먹고산다”

책 골라주는 책벌레들의 맹활약… 문학 · 영화평론가의 전성기 넘어 출판평론가의 시대로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먹고는 살 수 있겠냐”

허구헌날 방 안에서 책만 읽는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렇게 묻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것만이 삶의 즐거움이던 아들 역시 대학 시절까지 자신이 도대체 뭘 해서 먹고살 수 있을지 몰랐다. 단지 좋아서 책을 읽고, 책을 곱씹어 글을 썼다.

 

책, 책, 책… 책 이야기만 한다

그, 표정훈(36)은 이제 ‘표정훈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책벌레’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정평이 난 출판평론가다. 당연히 그를 찾는 곳이 많아 지난해 내내 1달 평균 12~13편의 서평을 쓰고, 일주일에 6개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책 이야기를 했으며, 독서를 주제로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중국 철학과 사상에 관심이 많아 그와 관련한 책을 여러 권 쓰거나 번역했고, 그에게 출판기획과 관련된 조언을 구하는 출판사들도 많다. 그리고 그의 아파트에는 7천여권의 책이 함께 살고 있다. “편집증적으로 책에 대해 계획을 세워놓고 읽은 책에 대해 기록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지금도 해외 사이트까지 헤매다니며 우리나라에서 번역했으면 좋겠다 싶은 책 목록을 만들어둔다. 읽는 것도 좋지만 원하는 책을 만나기만 해도 냄새를 맡아보고 행복해할 만큼 책 자체가 너무 좋다.”

그처럼 출판평론가, 도서평론가, 출판칼럼니스트 같은 직함을 가지고 책을 소개하며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는 전문 ‘책벌레’들이 이제 방에서 나와 세상 밖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이권우, 최성일, 한기호, 임지호, 강유원, 한미화, 김지원, 박천홍이 쓰는 책 이야기나 출판계 소식은 이제 왠만큼 책을 좋아하는 열혈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70년대가 문학평론가의 한 시대였고, 90년대가 영화평론가의 무대였다면 2000년대는 출판평론가들의 시대가 되고 있다.

돌아보면 불문학자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나 소설가 장정일의 〈장정일의 책읽기〉처럼 책읽기를 주제로 한 시대를 매혹시켰던 책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현이나 장정일이 문학을 연구하고 소설을 쓰면서 ‘부업’으로 서평을 썼던 데 비해 최근 등장한 출판평론가, 도서평론가들은 서평으로 먹고사는 프로 독서가들이다. 이들은 이전의 문학평론가나 소설가들에 비해 훨씬 대중을 염두에 두소 쓴 다양한 서평을 내놓고 있다.

표정훈씨는 “오랫동안 언론매체에 글을 쓰려면 교수나 사회적 명사여야 한다는 ‘장벽’이 높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대중들이 대중문화에 열광하게 되면서 장벽이 많이 낮아졌다. 영화평론을 중심으로 한 문화비평이 엄청나게 늘었고, 출판계에서도 문학의 지위가 하락하고, 정통 학술서가 아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같은 대중적 교양서들이 주목을 받았다. 예전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쓴 서평에 대해 ‘뭐야, 학위도 없고 전공도 안 했으면서’라는 비판이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또 “지금 출판평론가들의 역할은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고급 정보를 골라주는 것이다.

독서평론가들은 지금 당신이 이것을 읽으면 이런 점에서 재미있고, 이런 지식정보를 얻을 수 있고 쓸모도 있다는 식으로 독자들이 원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대화를 한다.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학자들처럼 깊은 것은 아니지만 한 분야에만 집중해 어렵게 쓰지 않고, 친절한 글로 다양한 책과 독자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점이 호소력을 얻고 있다”고 최근의 흐름을 설명한다. 이들 평론가들의 ‘대부’격인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열린 감성과 직관을 중요시하는 매트릭스 사회에서는 전통 사회에서 중시하던 문·사·철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책읽기가 중요하다. 대중사회는 요약을 원한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증도 크다. 수많은 컨텐츠를 자유롭게 바라보고 연결하고 요약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독서·출판 평론가들이 각광받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이 스타평론가 배출

2000~2001년 무렵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이들 독서평론가들은 대부분 서적광, 서적애호가라는 뜻의 ‘비블리오파일(bibliophile)’들이다. 표정훈씨는 수많은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영어, 중국어, 일본어 실력을 가지게 돼 번역가로 활동하다 “2000년 9월 일간지에 서평을 쓰기 시작하니 여기저기서 청탁이 몰려들어 졸지에 평론가가 됐고” 이권우, 최성일씨는 국문학을 전공하고 〈출판저널〉을 통해 출판계로 들어온 뒤 전문적으로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와 〈이크와 각주의 책읽기〉 등을 낸 이권우씨는 “책 읽고 쓰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책이라는 이름의 성채에 머물 때면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가 있는 듯 편안했다. 사람들이 집에 책을 몇권 가지고 있냐고 묻는데 그런 거 세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 어쨌든 가지고 있는 책의 10%만 읽어도 박사될 정도”라고 말한다. 문화일보에 ‘사서 읽은 책’ 코너를 연재하고 있는 강유원은 한 회사의 웹마스터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밤에는 공부하고 강의하는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80권의 책을 도발적으로 평한 서평집 〈책〉을 내놓기도 했으며 “책은 직접 내 돈 주고 사서 읽고, 냉철하고 날카롭게 비판한다”는 원칙을 지키며 독특한 서평을 쓰고 있다.

이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책을 이야기하는 무대가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 〈TV 책을 말하다〉 〈즐거운 문화읽기〉 〈라디오 책세상〉 같은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앞다투어 독서 프로그램 또는 책 관련 코너를 만들었고, 일간지마다 거의 잡지에 가까운 정도로 방대한 북섹션들을 내놓기 시작했으며 잡지, 웹진들까지 책 관련 코너를 마련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은 많지 않은 평론가들이 한 사람당 일주일에 열 개가 넘는 서평을 쓰거나 방송을 맡다가 과로로 몸져 눕는 사태가 잇따르기도 했다.

인터넷 역시 이들이 활동하는 주요한 공간이다. 표정훈씨가 운영하는 출판사 궁리의 사이트(www.kungree.com)에는 역사, 철학과 관련된 책 정보들과 책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창립 멤버로 편집장과 웹마스터로 활동한 뒤 프로메테우스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는 도서평론가 임지호씨 역시 개인 홈페이지 리드 오어 다이(www.readordie.net)를 통해 꼼꼼하게 새로 나온 책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평을 올리고 있다. 강유원씨의 홈페이지(armanius.net/ex_libris)에서는 주로 학술, 인문서에 대한 실랄한 평들을 볼 수 있다.

인터넷은 또한 보통 사람들을 ‘아마추어’ 평론가로 만들고 또 그 중에서 스타 독서평론가를 발굴해낸다. 웬만한 인터넷 서점마다 일반 독자들의 서평을 보여주는 북로그, 나의 서재, 서재의 달인, 리스트의 달인, 리뷰의 달인 같은 코너를 선보이고 있다. 소수가 책에 대해 훈계조로 이야기하던 시대는 가고,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책에 대해 평가하는 시대다. 그 가운데 ‘조금 내공이 있어 보이네’ 하는 평을 받으면 각광받는 온라인 평론가가 되기도 한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가영아빠’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그림책 읽어주는 남자’로 유명해진 류증희(33)씨는 “학사 장교 시절 백혈병으로 투병하면서 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동안 그림책 읽는 재미를 뒤늦게 깨닫게 되면서” 진솔하고 핵심을 짚은 어린이책 평을 올려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글은 〈하하 아빠 호호 엄마의 즐거운 책고르기〉라는 책의 일부로 묶여 나왔고, 지금은 ‘가영이랑 은수랑’(kidbook.co.to)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그림책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서평을 담고 있다.

사상최악의 출판시장 불황 속에서…

류증희씨의 전문 분야가 어린이책이라면 다른 출판·도서 평론가들 역시 ‘전문 분야’가 있다. 박천홍씨는 역사, 이권우씨는 문학과 인문, 표정훈씨는 철학과 사상, 한기호씨는 베스트셀러와 실용서, 변화와 트랜드, 한미화씨는 어린이책, 여성을 독자로 하는 실용서적, 문학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평을 쓴다. 정재승씨는 과학전문 서평으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 출판평론가들은 책을 평론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출판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고, 출판사의 기획위원으로 일하면서 새로운 책의 생산자가 되기도 한다. 하루아침에 쌓을 수 없는, 오랜 세월 책벌레로 다져온 이들의 책에 대한 감각을 원하는 출판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권우씨는 사계절 청소년 시리즈와 단행본 기획자이며, 표정훈씨는 출판사 휴머니스트와 궁리의 출판기획자도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한권 한권의 책에 대한 평을 넘어 책이 만들어지는 세계인 출판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하기도 하고, 출판계의 현실과 흐름, 제도와 현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지난 3월26일 오후 서울 신촌의 출판마케팅연구소 사무실에서 한기호 소장과 도서·출판 평론가 이권우, 한미화, 이면희씨, 번역가 강주헌씨 등이 모여 출판계와 어린이책에 대한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금요일마다 모여 요즘 무슨 책을 읽었는지, 출판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애들 책은 왜 꼭 하드커버여야 하는 거야? 오히려 너무 무겁고, 다칠 수도 있잖아?” “다들 유명 그림작가들에게만 몰려가니 어린이책 그림 하나 그리는 데 2년씩 기다려야 하고 비용도 외국의 유명 작가에게 맡기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이제 새롭고 신선한 작가들을 발굴해야 하는 것 아니야?” “애들에게 강제로 책 500권을 읽게한 뒤 4지선다형 시험을 봐서 등급을 매기는 독서능력검증시험이란 게 생긴대. 그것도 일부 교사들이 나서서 한다는데, 도대체 이런 무책임한 독서교육이 어딨어?” “어린이책이 엄청 호황이라고 했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호황을 맞고 나서 그것을 이어나갈 힘이 없는 것 같아.”

영화평론가들이 뜨던 90년대 초는 바야흐로, 문학의 시대가 가고 영화의 시대가 오던 때였다. 그러면 출판평론가들이 뜨는 2000년대에 책의 시대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이들에 따르면 단기적으로 올 상반기만 본다면 그런 기대와는 반대로 출판시장은 정말 심각한 사상 최악의 불황을 겪으며 얼어붙고 있다. 경제가 어렵자 사람들이 책 소비를 가장 먼저 줄이고 있으며, 대학시절 사회과학 서적으로 단련된 30~40대와 달리 요즘 대학생들은 정말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이다. 실용서는 많이 팔리지만 불황에도 끄떡없다던 어린이책도 출판사들마다 자회사를 세우고 뛰어들어 경쟁을 하다보니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빛깔있는 책들이 보여주는 희망

그러나 한편에선 책의 소재가 다양해지고 개성 있고 신선한 책들이 고루 나오고 있다는 데에 희망이 있다. 전통적으로 창비, 문지, 민음사, 한길사, 사계절 같은 몇몇 주요 출판사들이 주도해가던 출판시장에서 중소 규모 출판사들이 전문성을 강화해 좋은 책을 내놓고 있다. 이권우씨는 “2~3년 사이에 좋은 책이 많이 나왔다. 규모가 큰 출판사는 기본을 하고 작은 출판사들이 색깔 있는 책을 많이 냈다. 주제도 좋고 접근 방법도 새롭다. 푸른역사가 내놓은 역사책들, 그린비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같은 새로운 인문서들, 동아시아, 지호, 승산, 한승, 이끌리오의 과학책들도 주목할 만하다. 다만 몇년 동안 ‘386이 주독자’라는 말이 나올 때 참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취향만을 고려하고 새로운 독자층을 개발하거나 20대를 끌어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다. 이 점을 극복하면 출판시장에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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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4-08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라...대단히 부러분 직업이기도 하지만...내공이 딸리면 그저 아마추어로 만족하는게 좋을듯....^^;; 권력도 디지털 시대를 맞아...더이상 공고히 성을 구축하지 못하더니...영화도 아마추어들의 넘치는 리뷰에 더욱 풍요로와졌구....책도 다시 르네상스를 맞게 되는걸까요? ^^

프레이야 2004-04-08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리뷰어들 중 상당한 내공을 가지고 계신 분들(스스로 알고 계시죠?) 슬슬 나서보심이 어떨지요! 물론 전 한참 멀었구요. 아무튼 우리 도서출판업계에 청신호로 보입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되지 말아야할 듯... 이 기사 퍼갑니다~

아영엄마 2004-07-2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마음에 두었던 기사 내용인데 그 때 퍼가질 않았네요.. 이제서라도 퍼가서 넣어두렵니다. 님도 서평을 참 잘 쓰시는 분이신 거 아시죠? 이 동네엔 그런 분들이 너무 많아서 개인적으로 좀 슬픕니다..ㅠㅠ 제가 리뷰 당선 축하인사를 드렸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