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먹고는 살 수 있겠냐”
허구헌날 방 안에서 책만 읽는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렇게 묻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것만이 삶의 즐거움이던 아들 역시 대학 시절까지 자신이 도대체 뭘 해서 먹고살 수 있을지 몰랐다. 단지 좋아서 책을 읽고, 책을 곱씹어 글을 썼다.
책, 책, 책… 책 이야기만 한다
그, 표정훈(36)은 이제 ‘표정훈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책벌레’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정평이 난 출판평론가다. 당연히 그를 찾는 곳이 많아 지난해 내내 1달 평균 12~13편의 서평을 쓰고, 일주일에 6개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책 이야기를 했으며, 독서를 주제로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중국 철학과 사상에 관심이 많아 그와 관련한 책을 여러 권 쓰거나 번역했고, 그에게 출판기획과 관련된 조언을 구하는 출판사들도 많다. 그리고 그의 아파트에는 7천여권의 책이 함께 살고 있다. “편집증적으로 책에 대해 계획을 세워놓고 읽은 책에 대해 기록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지금도 해외 사이트까지 헤매다니며 우리나라에서 번역했으면 좋겠다 싶은 책 목록을 만들어둔다. 읽는 것도 좋지만 원하는 책을 만나기만 해도 냄새를 맡아보고 행복해할 만큼 책 자체가 너무 좋다.”
그처럼 출판평론가, 도서평론가, 출판칼럼니스트 같은 직함을 가지고 책을 소개하며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는 전문 ‘책벌레’들이 이제 방에서 나와 세상 밖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이권우, 최성일, 한기호, 임지호, 강유원, 한미화, 김지원, 박천홍이 쓰는 책 이야기나 출판계 소식은 이제 왠만큼 책을 좋아하는 열혈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70년대가 문학평론가의 한 시대였고, 90년대가 영화평론가의 무대였다면 2000년대는 출판평론가들의 시대가 되고 있다.
돌아보면 불문학자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나 소설가 장정일의 〈장정일의 책읽기〉처럼 책읽기를 주제로 한 시대를 매혹시켰던 책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현이나 장정일이 문학을 연구하고 소설을 쓰면서 ‘부업’으로 서평을 썼던 데 비해 최근 등장한 출판평론가, 도서평론가들은 서평으로 먹고사는 프로 독서가들이다. 이들은 이전의 문학평론가나 소설가들에 비해 훨씬 대중을 염두에 두소 쓴 다양한 서평을 내놓고 있다.
표정훈씨는 “오랫동안 언론매체에 글을 쓰려면 교수나 사회적 명사여야 한다는 ‘장벽’이 높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대중들이 대중문화에 열광하게 되면서 장벽이 많이 낮아졌다. 영화평론을 중심으로 한 문화비평이 엄청나게 늘었고, 출판계에서도 문학의 지위가 하락하고, 정통 학술서가 아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같은 대중적 교양서들이 주목을 받았다. 예전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쓴 서평에 대해 ‘뭐야, 학위도 없고 전공도 안 했으면서’라는 비판이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또 “지금 출판평론가들의 역할은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고급 정보를 골라주는 것이다.
독서평론가들은 지금 당신이 이것을 읽으면 이런 점에서 재미있고, 이런 지식정보를 얻을 수 있고 쓸모도 있다는 식으로 독자들이 원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대화를 한다.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학자들처럼 깊은 것은 아니지만 한 분야에만 집중해 어렵게 쓰지 않고, 친절한 글로 다양한 책과 독자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점이 호소력을 얻고 있다”고 최근의 흐름을 설명한다. 이들 평론가들의 ‘대부’격인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열린 감성과 직관을 중요시하는 매트릭스 사회에서는 전통 사회에서 중시하던 문·사·철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책읽기가 중요하다. 대중사회는 요약을 원한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증도 크다. 수많은 컨텐츠를 자유롭게 바라보고 연결하고 요약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독서·출판 평론가들이 각광받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이 스타평론가 배출
2000~2001년 무렵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이들 독서평론가들은 대부분 서적광, 서적애호가라는 뜻의 ‘비블리오파일(bibliophile)’들이다. 표정훈씨는 수많은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영어, 중국어, 일본어 실력을 가지게 돼 번역가로 활동하다 “2000년 9월 일간지에 서평을 쓰기 시작하니 여기저기서 청탁이 몰려들어 졸지에 평론가가 됐고” 이권우, 최성일씨는 국문학을 전공하고 〈출판저널〉을 통해 출판계로 들어온 뒤 전문적으로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와 〈이크와 각주의 책읽기〉 등을 낸 이권우씨는 “책 읽고 쓰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책이라는 이름의 성채에 머물 때면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가 있는 듯 편안했다. 사람들이 집에 책을 몇권 가지고 있냐고 묻는데 그런 거 세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 어쨌든 가지고 있는 책의 10%만 읽어도 박사될 정도”라고 말한다. 문화일보에 ‘사서 읽은 책’ 코너를 연재하고 있는 강유원은 한 회사의 웹마스터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밤에는 공부하고 강의하는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80권의 책을 도발적으로 평한 서평집 〈책〉을 내놓기도 했으며 “책은 직접 내 돈 주고 사서 읽고, 냉철하고 날카롭게 비판한다”는 원칙을 지키며 독특한 서평을 쓰고 있다.
이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책을 이야기하는 무대가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 〈TV 책을 말하다〉 〈즐거운 문화읽기〉 〈라디오 책세상〉 같은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앞다투어 독서 프로그램 또는 책 관련 코너를 만들었고, 일간지마다 거의 잡지에 가까운 정도로 방대한 북섹션들을 내놓기 시작했으며 잡지, 웹진들까지 책 관련 코너를 마련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은 많지 않은 평론가들이 한 사람당 일주일에 열 개가 넘는 서평을 쓰거나 방송을 맡다가 과로로 몸져 눕는 사태가 잇따르기도 했다.
인터넷 역시 이들이 활동하는 주요한 공간이다. 표정훈씨가 운영하는 출판사 궁리의 사이트(www.kungree.com)에는 역사, 철학과 관련된 책 정보들과 책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창립 멤버로 편집장과 웹마스터로 활동한 뒤 프로메테우스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는 도서평론가 임지호씨 역시 개인 홈페이지 리드 오어 다이(www.readordie.net)를 통해 꼼꼼하게 새로 나온 책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평을 올리고 있다. 강유원씨의 홈페이지(armanius.net/ex_libris)에서는 주로 학술, 인문서에 대한 실랄한 평들을 볼 수 있다.
인터넷은 또한 보통 사람들을 ‘아마추어’ 평론가로 만들고 또 그 중에서 스타 독서평론가를 발굴해낸다. 웬만한 인터넷 서점마다 일반 독자들의 서평을 보여주는 북로그, 나의 서재, 서재의 달인, 리스트의 달인, 리뷰의 달인 같은 코너를 선보이고 있다. 소수가 책에 대해 훈계조로 이야기하던 시대는 가고,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책에 대해 평가하는 시대다. 그 가운데 ‘조금 내공이 있어 보이네’ 하는 평을 받으면 각광받는 온라인 평론가가 되기도 한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가영아빠’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그림책 읽어주는 남자’로 유명해진 류증희(33)씨는 “학사 장교 시절 백혈병으로 투병하면서 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동안 그림책 읽는 재미를 뒤늦게 깨닫게 되면서” 진솔하고 핵심을 짚은 어린이책 평을 올려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글은 〈하하 아빠 호호 엄마의 즐거운 책고르기〉라는 책의 일부로 묶여 나왔고, 지금은 ‘가영이랑 은수랑’(kidbook.co.to)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그림책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서평을 담고 있다.
사상최악의 출판시장 불황 속에서…
류증희씨의 전문 분야가 어린이책이라면 다른 출판·도서 평론가들 역시 ‘전문 분야’가 있다. 박천홍씨는 역사, 이권우씨는 문학과 인문, 표정훈씨는 철학과 사상, 한기호씨는 베스트셀러와 실용서, 변화와 트랜드, 한미화씨는 어린이책, 여성을 독자로 하는 실용서적, 문학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평을 쓴다. 정재승씨는 과학전문 서평으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 출판평론가들은 책을 평론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출판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고, 출판사의 기획위원으로 일하면서 새로운 책의 생산자가 되기도 한다. 하루아침에 쌓을 수 없는, 오랜 세월 책벌레로 다져온 이들의 책에 대한 감각을 원하는 출판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권우씨는 사계절 청소년 시리즈와 단행본 기획자이며, 표정훈씨는 출판사 휴머니스트와 궁리의 출판기획자도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한권 한권의 책에 대한 평을 넘어 책이 만들어지는 세계인 출판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하기도 하고, 출판계의 현실과 흐름, 제도와 현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지난 3월26일 오후 서울 신촌의 출판마케팅연구소 사무실에서 한기호 소장과 도서·출판 평론가 이권우, 한미화, 이면희씨, 번역가 강주헌씨 등이 모여 출판계와 어린이책에 대한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금요일마다 모여 요즘 무슨 책을 읽었는지, 출판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애들 책은 왜 꼭 하드커버여야 하는 거야? 오히려 너무 무겁고, 다칠 수도 있잖아?” “다들 유명 그림작가들에게만 몰려가니 어린이책 그림 하나 그리는 데 2년씩 기다려야 하고 비용도 외국의 유명 작가에게 맡기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이제 새롭고 신선한 작가들을 발굴해야 하는 것 아니야?” “애들에게 강제로 책 500권을 읽게한 뒤 4지선다형 시험을 봐서 등급을 매기는 독서능력검증시험이란 게 생긴대. 그것도 일부 교사들이 나서서 한다는데, 도대체 이런 무책임한 독서교육이 어딨어?” “어린이책이 엄청 호황이라고 했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호황을 맞고 나서 그것을 이어나갈 힘이 없는 것 같아.”
영화평론가들이 뜨던 90년대 초는 바야흐로, 문학의 시대가 가고 영화의 시대가 오던 때였다. 그러면 출판평론가들이 뜨는 2000년대에 책의 시대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이들에 따르면 단기적으로 올 상반기만 본다면 그런 기대와는 반대로 출판시장은 정말 심각한 사상 최악의 불황을 겪으며 얼어붙고 있다. 경제가 어렵자 사람들이 책 소비를 가장 먼저 줄이고 있으며, 대학시절 사회과학 서적으로 단련된 30~40대와 달리 요즘 대학생들은 정말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이다. 실용서는 많이 팔리지만 불황에도 끄떡없다던 어린이책도 출판사들마다 자회사를 세우고 뛰어들어 경쟁을 하다보니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빛깔있는 책들이 보여주는 희망
그러나 한편에선 책의 소재가 다양해지고 개성 있고 신선한 책들이 고루 나오고 있다는 데에 희망이 있다. 전통적으로 창비, 문지, 민음사, 한길사, 사계절 같은 몇몇 주요 출판사들이 주도해가던 출판시장에서 중소 규모 출판사들이 전문성을 강화해 좋은 책을 내놓고 있다. 이권우씨는 “2~3년 사이에 좋은 책이 많이 나왔다. 규모가 큰 출판사는 기본을 하고 작은 출판사들이 색깔 있는 책을 많이 냈다. 주제도 좋고 접근 방법도 새롭다. 푸른역사가 내놓은 역사책들, 그린비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같은 새로운 인문서들, 동아시아, 지호, 승산, 한승, 이끌리오의 과학책들도 주목할 만하다. 다만 몇년 동안 ‘386이 주독자’라는 말이 나올 때 참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취향만을 고려하고 새로운 독자층을 개발하거나 20대를 끌어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다. 이 점을 극복하면 출판시장에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