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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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의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 작가들의 소설을 멀리하게 되었던 건, '작가'라는 각기 다른 세계가 지녀야 할 독특함을 느낄 수 없게 되고부터였다. 이유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독자층과 판매부수가 편향되고 그러다보니 작품도 작가군도 다양할 수 없다는 우리나라 출판 현실, 근대 이후 문화적 토양의 척박함...

천운영의 소설을 만난 건 그래서 기쁨이었다. 낯선 것이 주는 반가움이랄까... 소골을 먹는 늙은 여자, 문신 일이 직업인 여자, 바늘을 갈아 먹여 연모하던 스님을 죽인 여자, 꼼장어를 바르는 여자... 그 여자들이 보여주는 괴기적이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이미지들이 내 마음을 현혹시켰다. 현혹이란 표현이 정확할 듯 싶다. 책을 단숨에 읽고 난 그날 저녁 생전 처음으로 생선을 직접 다듬었으니...--;

생선 내장 바르는 일은 예상과는 달라 칼 손잡이에 느껴지는 물컹거림과 비린내, 이리저리 흩어지는 내장 때문에 자꾸만 욕지기가 일어나는 것을 겨우 참았다. 굽는 것도 마다해 다른 이에게 시켰고 구운 것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우습게도 나의 독후 활동(?)을 통해 나는 그녀의 소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그녀의 소설 역시 겉으로 보이는 강건함과는 달리 또다른 허술함을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그녀의 소설작업에는 다른 작가들과는 또다른 많은 짐이 실려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예술장르에서나 늘 그렇듯이 '새로움'이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건 덜 새로운 것들이 그러할 때보다 더욱 눈에 띄게 드러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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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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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트콤을 보는 듯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책을 그대로 시트콤으로 옮긴다면 얼마나 재미있고 신이 날까 싶었다. 게다가 요즘에는 갈수록 각 방송사의 시트콤이 싱거워지는 터라 이렇게 기가 막힌 소재를 매일 시트콤으로 볼 수만 있다면 인생살이의 행복지수가 30% 정도는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까지...

우리 사회에서 '유머'란 덕목이 서구에 비해 그리 큰 빛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네 삶의 모습을 잘 반증해주는 듯 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아둥바둥 하는 것이 삶의 목표이자 의무이며 존재 그 자체였던 경제개발 시기는 물론이고 '부자 되기'가 모든 국민들의 덕담으로 오고가는 지금에도 우리는 삶의 여유와 관조에서 비롯되는 진정한 '유머'를 모르고 살아왔다. 우리가 늘상 접하는 유머란 그저 한순간 사라지고 흩어지는 웃음들 뿐이다.

나라마다 유머의 스타일도 다른 모양인데, 동양인인 나로서는 독일식 유머란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거리두기를 통한 다시보기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지내던 사실들의 또다른 이면을 보게 되면서 우리는 큰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같은 책이 나올 수 있을까? 그 책이 시트콤으로 만들어지는 그 날, 우리 삶도 조금은 헐거워질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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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인 것 사계절 아동문고 48
야마나카 히사시 지음, 고바야시 요시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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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위 명작, 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공통점 혹은 기준은 뭘까. 30년전에 출간됐다고 하지만 지금 한국 아동문학을 잣대로 보았을 때 상상치 못할 정도로 선구적인 이 작품을 접하면서 결국 다른 모든 예술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시대를 앞서 나간 작품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히데카즈의 엄마-사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나쁜 엄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평범한 축의 엄마에 들어가는-와 얄미운 마유미, 뒤틀린 가족관계를 묘사하는 첫 부분을 보고 약간의 충격을 받고는 '이래서 일본에서는 이 작품을 현대아동문학의 시효라고 하는구나...' 했는데 갈수록 가히 점입가경이라 할 만 했다.

히데카즈가 가출할 때까지만 해도-클로디아의 비밀처럼-돌아오고 화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책 중반에 벌써 집으로 돌아와 예상을 엎어놓더니 엄마는 가출했다 돌아온 상태였고 눈물 흘리며 돌아온 탕자를 조용히 맞아주는 기색은 전혀 없이 아이와 몸싸움을 하고... 어디 그뿐인가. 편지 사건 이후 큰아들은 유치장 신세, 작은 아들은 학교에서 문제아 취급에, 부부싸움에... 히데카즈가 두 번째 가출했다 돌아와보니 이건 또 뭔가. 집이 불타버리다니, 어떻게 아동문학에서 집안을 이렇게 콩가루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그 어떤 작품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다. 일본의 정신적, 문화적 토양이 어떻길래 이런 작품이 나올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워낙에 깊었고, 이것이 잘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신선함으로, 선구자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즉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키워주라는 것, 어린이는 보호라는 명목으로 자칫 학대하고 억압하기 십상인데 그들을 부모와 동일한 인간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늘상, 어디서나, 어린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그리고 '개인주의'는 없고 '이기주의'만이 판을 치는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볼 때 이러한 메시지가 얼마나 공감 가능할까, 실현될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역시 전체주의적 성향이 짙은 일본 사회에서 30년전에 이러한 작품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되돌아 보는 것만으로 우리에게는 의미있는 일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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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전2권 세트
에쿠니 가오리.쓰지 히토나리 지음, 김난주.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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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라면 가려 가며 읽지 않는(?) 잘난 척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지만 피렌체라는 향수 어린 도시를 배경으로 한 연애담이고, 독특한 형식이라길래 읽어 보았다. 책 광고대로 BLU와 ROSSO를 한 장씩 번갈아 가며, 두 권을 책을 동시에 읽는 독특한 경험도 했다. 방정리를 하던 친구가 한 권을 읽고 있는 사이 다른 한 권을 책장을 꽂으려고 해서 '두 권 같이 있는 중이야. 치우지 마!!'라고 한 뒤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던 우스운 기억.

사랑 이야기는 남몰래 저마다의 추억을 반추해 볼 수 있어 언제고 재미있는 소재다. 게다가 일본의 유명 작가들이 합작한 이 작품은 그 형식상의 특별함으로 더욱 눈길을 끌 만 했다. 이런 기획은 상업적인 의도를 물론 배제할 수 없겠지만 다행히 작품성 또한 크게 해치지 않고 책 한 권으로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듯 여겨져 일본의 젊은 작가들의 신선한 아이디어에 괜스레 뿌듯해진다.

부부번역가의 번역에 의지해 읽어보자면, 에쿠니 가오리에게서는 간결하고 섬세한 아오이의 이미지가, 츠지 히토나리의 쥰세이에게서는 씩씩하고 활달해보이지만 여린 심성을 지닌 인물들의 면모가 매우 정확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아오이와 준세이는 각자의 목소리로,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독자들에게만 들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작가는 그렇게 자신들의 작품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한 작품으로 불려도 좋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융해되어 있었다.

내가 여성이어서 그런지 에쿠니 가오리의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더 끌리는 것은 굳이 선택하려 하지 않으려해도 마음 속에 자연스레 결정지어졌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하는 질문처럼 우습게도. 게다가 그녀의 후기 또한 맘에 들었다. '어떤 사랑도 한 사람의 몫은 2분의 1이란 것' '인생이란 그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성립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과, 마음이란 늘 그 사람이 있고 싶어하는 장소에 있는 법이라는 또 하나의 단순한 사실'이라는 멋진 문장 말이다. 그녀는 분명 매우 똑똑한 여성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피렌체의 두오모에 오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왜 피렌체에 가기 전에는 알지 못했을까. 다시 피렌체에 가게 된다면 나도 아오이와 준세이처럼 그 약속을 꼭 이루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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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반양장)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34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김난령 옮김 / 시공주니어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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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설명할 말이 없다. 동화에 관한 모든 인물과 에피소드의 교과서, 축약본이라고 할 만하다. 어디서 본 듯한 인물, 어디서 읽은 듯한 이야기, 그러나 아니다. '마틸다'에서 창조되고 이제 널리 퍼져 익숙해진 것이겠지.

줄거리도 구성도 완벽하지만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책의 도입 부분이다. 마틸다가 자상한 도서관 사서의 도움을 받아 책을 읽게 되는 과정, 그리고 마틸다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 부모에게 깜찍하고 통쾌한 복수를 하는 마틸다의 기지가 반짝 반짝 빛난다. 참, 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을 빼놓을 뻔했다. 호텐샤가 입에서 감자칩 부스러기들을 흩뿌리며 '소년원에 온 걸 환영해'라고 말하는 부분. 행복해 미칠 지경이다. 언제 이보다 더 배를 잡고 웃을 수 있는 장면을 만날 수 있을까.

부당한 어른들에 대해 끊임없이 계속되는 마틸다와 친구들의 복수에서 느껴지는 기지와 웃음. 그중 가장 훌륭했던 것은 초콜릿 케이크를 먹어치우던 브루스 보그트로터.

그런데 책의 결말은 너무나도 파격적이라 깜짝 놀랐다. 본인을 이해해주지도 사랑해주지도 않는 부모 곁을 떠나 날개 달린 삶을 새롭게 사는 것이 물론 신나기는 했다. 하지만 동화의 결말 부분이 부모와의 이별이라니, 좋고 나쁨을 떠나 정말 대단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언젠가는 작가가 쓴 그대로 영문으로도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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