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1 - 현경 순례기 1
정현경 지음 / 열림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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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네 가지 덕이 진,선,미,성이라고 배웠을 때 나는 그중에서도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뽑고 홀로 좋아했었다. 유교에서 말하는 미와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똑같지야 않겠지만 '아름다울 미'란 글자야 말로 지고지순의 가치를 나타내고, 모든 가치로운 것들을 포함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의, 혹은 여성의 생래적인 감성과 지성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때문에 나는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꺼야'란 제목을 봤을 때부터 이 책에 매혹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순례기를 읽으면서 처음 드는 느낌은 '부럽다'는 것.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처절하고, 철저하고, 화려하게 경험해 본 듯한 그녀는 내게 동경과 질투의 대상이 됐다. 이어 밀려오는 자괴감과 자책. 하지만 이는 결코 그녀가 바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삶, 그녀가 꿈꾸는 세계의 비전과는 정반대일 것이다. 영적 순례기라고 부르는 그녀의 삶의 과정을 엿보며 마지막에 내가 쥐고 있었던 한 가지는 '그래, 나도 여자로서 꿋꿋하게 잘 살자'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의 말처럼 신파조이고 멜로드라마 같으며 때론 자기 과시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라고 하기엔 너무나 유약하고 감상적이며 생태여성신학 사상 역시 신선함이 없지는 않은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그를 삶의 표양으로 동경하게 만드는 까닭은 그녀가 솔직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강한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받아온 상처와 억압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온전히 여자 고유의 목소리와 영혼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결심하게 됐다.

여성 억압적인 그리스도교 세계관과 가치관 속에서 난 늘 제도종교의 가르침을 따라오며 상처를 받아왔고, 나 자신을 자유롭게 펼쳐 보이지 못했음을 이제서야 한스럽게 느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 터.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찾고, 키워가는 과정속에서 진정한 신을 만날 수 있도록 영적 순례의 발걸음을 다시 한 번 내딛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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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 지구 살림 민병대 여성 전사들이 보내는 여신의 십계명
정현경 지음, 곽선영 그림, 제니퍼 베레잔 노래 / 열림원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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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제목은 '미래에서 온 편지'라고 의역됐지만 영어 제목은 '현경에 의한 거룩한 복음'이다. 세상에, 그 어떤 신학보다 도발적이다. 성서의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과 마찬가지로, 일개 아시아 여신학자에 의해 전해지는 복음이라니... 하지만 복음을 인간 구원을 위한 기쁜 소식이라 정의해 본다면 이 책을 복음이라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구약의 십계명에서 본뜬 '여신의 십계명'이 이 시대 억압받는 모든 여성을 위한 구원과 해방의 이야기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여신의 십계명'은 생태여성신학의 논의들을 빠짐없이 충분히 다 반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모든 여성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자신의 여성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저자는, 여성들이 억압의 굴레를 자각하고 상처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방의 자유를 누리고 세상을 변화시키길 촉구하고 있다. 이 여정에 함께 할 수 있는 책과 음악, 영화 소개는 따뜻하고 자상한 동반자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하지만 모든 구분과 정의가 그러하듯 '여신의 십계명'은 여성들을 위한 충실한 길벗이요 치유자 역할을 하면서도 이에 모든 것이 한정되어 버리는 듯한 아쉬움과 답답함이 남는다. 세상 모든 진리가 낱낱이 설명되고 정의되는 것 같은데 대한 알 수 없는 반발심리와 허망함. '계명'과 '계율'이란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그 손짓을 길잡이 삼아 달을 향한 눈길을 거두지 말고, 달빛을 담은 채 아름다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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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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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약력 만큼이나 독특한 이야기들이다. 군인으로 훈장을 받고, 가명을 사용해 공쿠르상을 두 번 수상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그의 일화가 끌어당기는 묘한 마력을 이야기 역시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서머셋 모옴과 오 헨리의 훌륭한 단편들을 연상시키는 깔끔한 구성, 맛깔스런 문체, 기막힌 반전, 그리고 소재 자체가 주는 충분한 재미. 이런 요소들이 단편소설의 진가를 최고로 만족시켜 준다. 인간의 자기 기만에 대한 냉소는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우울하지만 허무에 빠져 헤엄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그의 냉소와 비판은 인간성의 궁극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결국 그 지향점은 인간성을 향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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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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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같다. 빨갛고 통통하게 잘 여물어진, 아담하고 예쁘장하게 자기가 타고난 색깔과 모양대로 살아가는. 소설도 작가도 여주인공도 딸기 같았다. 조그맣지만 제 생긴 대로 제 타고난 대로 제 살아야 할 대로 산다. 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듯한 영롱한 빨강은 언뜻 보기에는 기쁨과 환희의 색깔이지만 가슴 속에 하얀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매끌한 표면을 빼곡히 매어차고 있는 까만 씨앗은 세상에, 가족에, 연인에, 운명에 상처받음이고 주위를 둘러싼 하얀 솜털은 그럼에도 피어나는 희망의 질긴 삶이다. 여름철 때 아닌 딸기는 한 움큼 배어나오는 달콤함은 없지만 그래도 살아내어 피워낸 생명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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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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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엄밀히 말해 '소설'에 빠져있다기보다는 갈수록 무미건조해져가는 이 세상에서 '이야기'가 주는 마력에 빠져있다고나 할까, 아님 지루한 일상 속에서 '소설같은 이야기'가 그립다고나 할까.

하지만 오랜 공백을 두고 다시 한 권, 두 권을 읽다보니 새록새록 재미를 느끼면서도 조금 지나 또 소설을 놓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지리멸렬한 서사 구조, 얄팍한 주제의식, 묘사의 부정확성... 소설이란 독특하고 매력적인 장르가 지녀할 바를 놓치고 있는 글들을 읽을 때 그렇다.

그러던 중, '열정'이라는 제목과,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가 고상하고 신비로운 색감으로 그려져 있는 책 표지, '헝가리'의 작가라는 세 가지 사실이 어우러져 풍기는 묘한 우수에 이끌려 이 책을 읽게 된 건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소설 예찬을 당분간 간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건 정말이지 행복하다.

소설의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다. 19세기 제국주의의 끝 무렵 귀족 사회에서 성장한 두 남자. 한 남자는 부유하고 한 남자는 가난하다. 그에 따라 생성된 그들의 변할 수 없는 성격과 운명. 부유한 남자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아내는 그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다. 결국 세 사람은 배신으로 상처받게 되고 사랑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고귀한 관계는 깨어진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뒤이어지는 진실... 숱한 영화, 문학 속에서 익숙해진 그림이고 이렇게만 살펴 보면 오히려 순정만화의 스토리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하지만 그러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외국 문학계의 대단한 칭찬을 보고 출판사의 허위 광고일거라고 예상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결국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소설을 감히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는 요즘 소설이 잃어가고 있는 고귀한 인간성을 엿볼 수 있다. 삶, 사랑, 열정, 운명, 우정, 가치, 시간, 고독, 고뇌, 기다림, 책임, 진실... 우리가 읽는 소설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점점 잊고 사는 '진정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누구의 삶이나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매한가지로 유치하고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할 지 모르나 인생의 가치는 '의미'에 있는 것처럼 스토리만 따지자면 삼류 연애소설의 한 장면일지 모르나 주인공의 고뇌는 어느 철학서 못지 않다.

이러한 주제의식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어느 부분 하나 모자람없이 탄탄하게 자리하고 있는 소설적인 완성도이다. 주인공의 독백으로 소설 전반을 이끌어 가지만 단 한 번도 그 흐름이 지루하다거나 건너뛴다거나 묘사가 생생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번역자의 역량 또한 대단하다 느껴지지만) 여러번 곱씹고 기억하고 싶게 만드는, 잠언의 한 구절 같은 아름다운 문체도 넋이 나갈 지경이다.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넘나드는 구성 역시 자유롭다.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길 바라는 마음을 되돌아보며 과연 고전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잊고 있던 이 질문에 대해 약간은 생소한 기분으로 대답해 본다. '작품이 특수한 시대상, 사회상을 반영하고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로 모든 시대와 사회를 비추어 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부분에서 전체를 보게 한다면,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변함없는 '인간'의 모습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고전'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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